서해성의 '역사를 잊지 않는 민족'
윤봉길 의사는 우리에게 누구이며 무엇인가?
정세미(51차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 강연
작가 / 성공회대 교수 서해성
대전 버드내성당 2015.5.18(월) 저녁 7:45~9:10
장발장 은행, 43199은행
저는 성당 다니지 않는 데, 성당 다니시는 분들과 일을 많이 합니다. 제주 교구 강우일 주교님께서는 강정의 평화센터로 이름붙인 성당에 좋은 생각을 보태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강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곳에 공소가 하나 생겨서 제가 제주도에 다녀왔고요. 근래에는 서울 대교구 염수정 추기경님과 무슨 일을 하나 합니다. 장발장 은행이라고 하는데요. 벌금형을 받는 가난한 이들에게 벌금형 때문에 감옥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2009년 기준, 43,199명이 감옥에 갔습니다. 그분들 돕자는 운동인데, 염 추기경님께서 3번째 쯤 돈을 많이 내셨습니다. 로마에 다녀오신 뒤로 이 일을 가장 먼저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일로 염 추기경님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친하게 지내자고 하셔서 굉장히 든든합니다.
국회로 간 장발장
2015년 6월 4일에 염 추기경님이 직접 국회를 가실 계획이랍니다. 국회에 가셔서, 행사를 하려는 것입니다. 장발장은 왜 국회로 갔는가? (국회로 간 장발장) 법안을 요청하는 현실적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은 처음인 듯 합니다. 그러니까 염 추기경님께서 국회의원들에게 요구하는 전체 책임자로 국회에 가십니다.
아시아의 등대 - 파주 이주민 문화센터
그리고 저는 파주에 있는 가톨릭단체와도 일을 합니다. 이기헌 베드로 천주교 의정부 교구장 주교님. 그러고보니까 제가 주로 추기경님, 주교님과 일을 하네요. 어헛, 이런 말씀을 드리니 죄송합니다. 이기헌 주교님은 이주사목에 대해 관심 많으시고, 그래서 파주 봉일천 성당 옆자리에 이주민을 위한 문화센터를 세웁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멋집니다. <아시아의 등대>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등대불을 켜자는 겁니다. 설계를 맡은 분은 2013년 제14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 받은 세계적 건축가입니다. 조민석 건축가가 함께 참여해서 일을 하기로 작업 중입니다.
쓸쓸해서 좋은 예수님
그런 분들이나 신부님들과 주로 일을 많이 하네요. 몰랐는데, 여기 와서 생각해보니, 성당 분들과 가깝구나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저런 이유로) 미사에는 늘 가는데 그래도 잘 안됩니다. (기도문이나 전례통상문 등) 외워서 해보려는데 또 까먹고 그렇습니다. 예수님 상을 바라보면 참 쓸쓸해서 좋습니다. 여러분은 가득 차서 좋을지 모르지만, 세상에 없어서 계신 분이시죠. 없음으로서 우릴 가득 차게 하는 것이다. 그 분의 마지막이 초라하고 쓸쓸해서 참 좋고, 우리 고통과 함께 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장에서 노동사목, 이주사목 등 하는 많은 신부님들, 종교인들과 함께 하며 진심으로 감사해합니다.
강정에서 밝히는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특히 강정에서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히신 일들. 그런 건 수천 년이 지나도 마음에 남는 것입니다. 미군 기지의 일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일입니다. 이게 왜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인지 한번은 말할 수 있는데, 제주교구가 큰 힘이 되었다는 걸 잘 알고,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the Worst Dresser in the world
그럼 이제 한국에서 옷을 제일 못 입는 분을 소개해드릴까 싶습니다. (옷을 잘 입고 못입고 하는 말을 할 때) ‘입성’이라고 하죠. (이 사진을 보면 입성이) 괜찮아 보입니까? 혹시 이 분이 누구인지 아세요? (화면에 등장한 이 분은) 윤봉길(1908~1932). 전 김구(1876~1949) 선생이 미워요. 옷 좀 사주시지. 이 옷은 일본말로 다림질 잘 한 거 줄이 잘 선거 오리미 선거. 면 옷일까요? 줄이 잘 설라면 울로는 다림질 안되고, 면 옷이죠. 이 옷을 입어봤다는 건가요? 모자가 잘 어울리나요? 뭔가 쓰긴 썼는데 얹어놓은 거 같은, 예산, 덕산에서 한재라는 대치 한자로 거길 넘으면 해미죠. 요즘 터널 뚤렸지만, 이분 추모 사당이 있는데요. 이 분 사진 보고 있으면 속상합니다.
* 충의사(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967년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것이며, 충의사 본전에 윤봉길 의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같은 옷인가 아닌가?
같은 옷인가요 아닌가요? 같은 옷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보다 1천배쯤 훌륭한 분인데,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겁니다. 똑같은 옷입니다. 이 사진이 1932년 4월 25~26일 쯤 사진입니다. 역사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진에 나오는 폭탄 들고 있는 모습. 이 수류탄 같은 걸 1932년 1월 9일에 일본 왕에게 폭탄 던진 이봉창 의사 것과 똑같은 건데, 윤봉길 의사는 폭탄 던지지 않았습니다. 오른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화영화 비슷합니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이분들 성격이 얼마나 투명했는가를 잘 말해줍니다. 직분을 잘 표시하죠. 그리고 글씨. 이 옷도 똑같은 옷이란 걸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안중근 의사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여기 모인 우리들은 가톨릭 신자인데, 안중근(1879~1910) 의사 집안에 너무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도마. 뮈텔 주교와도 친했죠. 원래 응칠입니다. 아버지가 이름 바꾸죠. 워낙 시끄러워서. 과묵한 사람이 아니어서 뇌구였어요. 번개입. 그러니까 누군가 말이 많다고 해서 탓하지 마십시요. 나중에 안중근 의사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먼저 떠나는 사람이 어른이다
이 사진은 어디서 찍었을까요? 이 사진을 찍은 곳은 안중근 의사 동생 안봉근 선생 집입니다. 이 사진을 찍는데 후레쉬를 치고 그러면 사람이 뭐 하는 줄 알아서 4월 26일 사진 찍기로 되어 있는데 날이 흐려서 27일 찍었습니다. 단추 몇 개죠? 두개죠. 넥타이만 바꾸었죠. 옷은 똑같아요. 그런데 이 사진이 명사진입니다. 이 사진 찍을 때 윤봉길 의사가 청년 윤봉길이죠. 김구 선생에게 선생님이 더 위에 앉으시라고 하니까, 백범이 "세상이 먼저 떠나는 사람이 어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냥 사진 한장 봤다고 생각하지만, 이그런 의미가 담긴 명 사진인 것이죠.
한인애국단은 임정과 다르다
그리고 이 일은 임시정부가 한 게 아닙니다. 저 조직은 사조직. 김구가 개인적으로 만든 한인애국단입니다. 거기 1차 멤버가 이봉창이었죠. 사진은 김구 선생이 윤봉길을 얼마나 믿었는 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김구 선생이 했던 그 말의 무게를 생각해보시면, 저 사진 태극기 앞에서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의 의미가 더 남다릅니다.
나에게는 3시간 밖에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1932년 4월 29일에 의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27일 저녁에 두 분이 같이 드시고, 28일 저녁도 함께 드십니다. 29일 아침에도 김구선생이 윤 의사와 함께 조반을 드시고, 그렇게 조반을 먹고 나니까, 여러분 다 아시는 윤봉길이 찬 회중시계. 대부분 회중시계를 차던 시절인데, 이 일을 위해 산 것입니다. 28일은 답사를 다녀왔고, 29일 아침 조반 먹고 일어나는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회중시계를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나에게는 시간이 3시간 밖에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애니깽
어떤 이에게는 도망가면 아무 일도 아니지만, 자기에게 3시간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김구 선생은 거절하지 않습니다. 활동자금은 하와이에서 왔습니다. 하와이에서 미국사람이 돈을 부쳐준 게 아니라, 애니깽 농장에서 하루 16시간 씩 일하고, 밥 먹는 시간 빼면 허리를 펴면 안되는 거였어요. 노동조건이 그래요. 허리를 펴면 매가 채찍이 날아옵니다. 날아오면 등이 찢어지는 그런 곳에서 일하던 분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내줬습니다. 모든 월급의 10퍼센트씩, 그리고 한인회 10펀센트씩. 그래서 번 돈의 50퍼센트 가량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돈을 냈다고 합니다.
하와이 교포의 피와 땀
그 분들은 사진 가지고 결혼했습니다. 미국 법에 유색인종은 미국인과 결혼할 수 없어서,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중국인은 더 했어요. 중국인을 위한 특별법이 있었는데, 중국에서도 여자를 데려올 수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라는 거죠? 고자로 살다가 죽으라는 거죠. 그게 궁금하시면, 황비홍 영화 보시면, 내용은 진짜가 아니지만, 맥락은 맞습니다. 황비홍 서부 영화 (황비홍 서역웅사 1997년 2월 1일 개봉)가 있어요. 1904년 305명이 인천항을 떠나 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일본인들이 파업을 일으킨 자리 에 대신 들어갑니다. 그런데 왜 하와이 이민 중지되었나면,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제국은 한국인 인력수출을 막습니다. 하와이에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데, 하와이 일본인들의 임금이 낮아진다는 게 이유였어요. 일본인들이 지금도 많이 살죠. 거기에서 한국인이 일한 그 돈을 김구선생에게 보내 준 겁니다. 피맺힌 돈입니다. 피를 팔아도 그만큼 벌었을 돈을 보내줍니다. 그 돈을 윤봉길 의사 자금으로 대준 것입니다. 그런데 김구 선생이 얼마나 믿었냐면, 이봉창이 일본왕을 죽이러 갔다고 1931년 12월에 극비 중 극비인데 말해줍니다.
김구선생이 김구 자신과 윤봉길 말고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믿은 겁니다. 단 한명도 알지 않은 것. 마치 듣지 않은 것처럼. 이름은 말하지 않지만 제 1호가 일본 왕을 죽이러 갔다는 말은 합니다. 그 말을 김구가 해준 일로 모든 마음 결정을 다 한 겁니다. 그리고 마음이 편해졌다고 했습니다.
광복 70년이라고 하지만...
올해가 광복 70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광복을 가져오는데 얼마나 많은 선배들이 치열하게 싸웠는가를 얘기하기 보다, 일본인들이 우릴 근대화시켜 줬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삽니다. 그러면 윤봉길은 미친 놈이 됩니다. 이런 모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 얘기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고향 분들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잘 알지는 못합니다. 나이 25살에 불과합니다. 제가 50이 넘었는데, 늘 형님 같은 분. 그 뜻이 높습니다. 예수님도 저보다 동생이죠. 나이로 말하는 게 아닌 것입니다. 인생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이봉창 의사가 일본 가서 썼던 자금도 다 하와이에서 온 돈입니다. 거기 갔던 이들은 주로 경기도 사람들입니다, 정치적으로 동학사람들이었습니다. 계속 쫓기던 시절에 한국을 떠난 겁니다. 다수가 동학과 관련된 분들입니다.
동학 120년(2014.12.9)
작년 12월 9일 동학 120년이었습니다. 공주 우금치에서 3만명의 동학군이 일본군이 쏘는, 또 일본군의 지시를 받는 조선군 기관총인 맥심기관총에 맞아 죽습니다. 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최초로 학살된 겁니다. 세계 최첨단 무기가 한국인 3만명. 한국을 제대로 세우겠다고 한 이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사용된 적 있으나 몇 년 후 1904년 뤼순 일본군 러시아 전투에서 러시아 기관총에 일본군 4만명 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국주의끼리 싸운 것이고, 이것은 자기 나라 안에서 동족이 동족을 그리고 제국주의자에게 쓰러진 일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근대화 시켰다는 말을 어떻게 합니까?
이 돈, 이제 필요없습니다
제1차 이민자들이 가장 많은 돈을 보냈습니다. 임시정부는 언더서클입니다. 주로 아는 사람이 돈 보내주지 않으면 활동이 안됩니다. 이봉창이 가져간 그 돈, 윤봉길이 사용한 그 돈. 그걸 잘 알고 있었고, 택시를 타면서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에게 택시비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돌려줍니다. 그 생각을 하면 택시 탈 때마다, 오늘 오면서도 택시 타고 왔는데,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정확히 계산하고 돌려줍니다. 택시 탄 채로 말합니다. "이 돈 이제 필요없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테니까요. 선생님." 정말 가슴 아픈 장면입니다. 김구 선생이 회고하셨습니다. 윤 의사가 택시비를 돌려줄 때, 윤 의사와 영원히 헤어지는 지를 알았다. 우리 저승갈 때 노잣돈이라고 하는데, 그 노잣돈 쓰지 않겠다는 거죠. 그리고 홍커우 공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 경비가 막습니다. 1932년에 중국땅 상하이였습니다. 1932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인들. 1932년이 시작되자 마자 이봉창 의사가 도쿄 교외에서 히로이토를 겨냥해서 폭탄을 던져서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일이 있죠.
도시락 폭탄을 던진 게 아니라
중국 상하이에서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행사는 히로히토라는 일본 왕 생일이 1부였고, 2부가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였죠. 생일날 축하로 한 거죠. 일본왕에게 그들 말로 텐노에게. 윤봉길 의사는 물통을 메고 왔습니다. 일본인이 너무 많이 살고 행사장내에서 음식을 못 파니까, 음식 팔면 불을 사용하니까, 그것이 위해를 줄까봐 모두에게 도시락을 싸오라고 했는데 그걸 알아내고, 물통폭탄과 도시락폭탄을 가지고 간 겁니다. 흔히들 '도시락 폭탄', '벤또 폭탄' 을 던졌다고 하는 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홍커우 공원에 갔는데 중국인 수위가 막았습니다. 그러자 윤봉길은 내가 일본인인데 왜 그러냐고 멋지게 말합니다. 신분증 없이 들어갔다는 거죠. 그렇게 통과해서 단상에서 21미터 떨어진 곳에 앉아 있습니다. 지금은 루쉰 공원입니다. 임시 단상을 만들고 중요인물이 서 있습니다. 일본 육군대장. 상하이 침략 총 책임자죠. 행사가 시작되고 2부가 시작되면서 기미가요가 울렸습니다. 제창으로. 합창은 여러명이 부르는 거고, 제창은 모두가 부르는 거죠.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가 앞의 세 사람을 제치고 물통 폭탄을 두껑을 열고 던집니다. 19미터를 날아갔습니다. 적어도 17미터를 날아갔습니다. 1미터 던진게 아니란 말입니다. 성당 저 끝까지 던진 겁니다. 하늘이 도왔다는 건 자칫 중간에서 터질 수도 있고, 안 터질 수도 있고, 옛날 폭탄 던진 거니까, 이봉창 의사 실패는 하나가 안 터진 겁니다. 정확하게 일본인 왕 마차에 들어갔지만 안 터졌어요. 그래서 다섯번을 세도 안 터져서,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몰랐지만, 다시 뛰어가서 자살용 두번째 폭탄을 던졌지만 마차가 지나가버렸어요. 얼마나 다급했겠습니까?
두 개 중 하나는 안 터진다
역사적으로 보면, 두개 중 하나가 안 터졌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얘기지만, 1908년에도 미국 스티븐즈라는 사람이 을사조약은 잘 체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돌아 다녔는데, 대표단이 찾아가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 얘기하고 다녀서, 두 사람이 짜지도 않았는데, 똑깥은 곳에 나타났습니다. 이재명(강사는 "성남시장 이재명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사건에 이재명이 등장했다고 말했지만, 강연내용은 실제 사실과 다를 수 있다.). 전명운 의사. 전명훈 의사가 머리에 대고 총을 쌌는데, 총이 안 나갔습니다. 진짜에요. 그래서 사람이 바보가 아닌데, 덩치좋은 스티븐스 머리를 때립니다. 영화에서나 쓰러지지 안쓰러지죠. 밑에 깔리죠. 전명운 열사가. 그걸 이재명 의사가 보고 있고, 권총을 뽑아서 쐈어요. 그런데 첫 발은 전명운 열사에게 맞았습니다. 그런데 어깨에 맞았어요. 순간 동작 멈추니까 그 때 세 발을 쏩니다. 짜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총이 예비군 총알(최근의 예비군훈련장 총기살인 사건을 인용한 것)도 아니고, 총알이 잘 안 나가던 시절이었던 겁니다. 도쿄 교외에서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의 경우도 기가 막힌 일이죠. 던졌는 데 안 터졌어요. (서해성 교수의 발언에 일부 오류가 있음. 이재명은 1909년 12월 이완용에게 치명상을 입혔지만 죽이지는 못하고 잡혔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경 페리 부두 정거장 앞에서 일어난 스티븐스 살해사건은 장인환과 전명운의 작품이었다. 미국의 언론은 양심적인 보도를 통해서 '스티븐스는 한국의 공공의 적'이라는 기사를 실었고, 대다수 미국인들도 반일에 공감하면서, 이후 이들은 이후 일제의 정치공작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하려는 일제의 정치공작에도 불구하고 미국 법정에서 전명운은 무죄로 석방되었고, 장인환은 2등 살인죄로 처형을 당하는 중형을 면하고 25년의 형기로 결정되었다가 10년 후인 1919년 방면되었다.
일본말 잘하고 싶던 이봉창
폭탄을 던진 하일라이트에서 (다시 이봉창 의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광고하는 시간과 비슷하죠. 이봉창 의사는 서울 사람입니다. 용산 사람인데, 지금 숙명여대 근처에 살았습니다. 무덤이 거기 있으시죠. 윤봉길, 이봉창 등의 무덤이 있습니다. 구파 백정기도 계시고, 안중근 의사는 빈 묘로 있고. 이봉창 어릴 적 꿈은 일본말 잘하는 거였습니다. 우리 영어 잘하고 싶은 거나 마찬가지죠. 돈 많이 벌고, 일본에서 이봉창 의사가 가서 보통 이런 일 몇번 있었는데, 이 가게 일할 것처럼 월급 가불로 타고, 저 가게가서 또 가불해요. 그리고 안 와요. 이봉창 의사는 가난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누구와 오래 연애한 적도 없어요. 가난함의 특성이죠. 그런데 나중 일본인 양자로 들어갔어요.
독립운동과 무관하던 이봉창
독립운동과 관련이 없던 이인데, 살다 살다 할 게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상하이로 갔어요. 거기서도 월급을 두 군데에서 받았습니다. 그런 분 우리 옆에 계시면, 우리의 의인이신데, 어느날 생각해보니 자기가 독립운동을 하면 어떨까 생각해본 겁니다. 나이 33세에. 총각이었는데, 그 때 신문에서 쓰던 말은 가정. 가짜정부였는데, 가정부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았던 거죠. 이봉창은 연도를 표기할 때에도 (일본식으로) '소화 몇년'이라고 쓰던 사람입니다. 각성이 있는 분이 아니란 뜻이죠.
독립운동 할 수 있을까요?
임시정부를 아무튼 찾아가서 독립운동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임정이란 데를 쉽게 들어갈 수 없죠. 누군지 알고 받아들이겠어요. 그런데 이 분 배짱이 있죠. 들어와서 독립운동하러 왔다고. 그런데 한국말을 잘 못해요. 어설프고 해서 이런 사람이 설령 한국말 잘한다해도 독립운동 하기 어렵죠. 프락치로 파괴하러 온 사람일 수도 있으니, 첫 날 쫓겨납니다. 그런데 결기가 있는 분이라 이튿날 또 찾아가서 시비가 붙었어요. 다리 떠는 개기는 스타일인데, 그러면 뭘로 독립운동 하겠느냐고 하는 상황에서 보니까 잘 하는 게 없는 거에요. 일본말 잘합니다. 일본말 잘하무니다라고 하죠. 누가 받아주겠어요. 그런데 그걸 김구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상하이 임시정부 층계에서 한마디 "군이 일할 자신 있는가?"
일할 자신이 있는가?
김구 선생이 처음 한 일이 경무부장입니다. 국방부와 내무부 합친 거죠. 돌격대장이고 칼든 일본인 맨 손 때려잡던 일로 감옥가던 이이고, 발치기를 정말 잘했고, 태권도란 말은 50년대 생긴 것이고, 그래서 그런 과(꽈)들이 서로 알아보죠. 형님들이 형님들을 알아보는 거죠. 이봉창이 그렇다고 말한 겁니다. 그래서 자네는 뭘 하고 싶은데? 할라면 센 걸 하겠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이것은 지식인들 대화가 아닙니다. 센 것 중에 뭐? 생각해보니 제일 센 것이 일본 왕 죽이는 거에요. 그래서 김구 선생이 '그럼 약속지켜'라고 한 것입니다. 특별히 더 주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게 가능했을까? 가슴이 머리를 완전 점령하던 것이죠. 독립운동이란 것이 그런 겁니다.
스타일리스트 이봉창
위 사진을 보시면, 옷 입은 게 (윤봉길과) 같아요 달라요? 오빠 스타일이죠? 이 사진. 일본 건너가기 직전 전전날 죽음의 초상화로 쓰기 위해 찍은 사진. 더블 재킷입니다. 봉길이 형과 다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찍으면서도 와이셔츠 소매를 걷었어요. 그런데 이와 유사한 옷을 입고 이봉창이 나타납니다. 검문을 한번도 받지 않습니다. 옷 잘입어야겠죠? 홈리스 차림이라면 접근했겠어요?
안중근은 어떻게 이토를 알아보았나
안중근 의사 의거에 어떻게 성공했죠? 아침 7시 하얼빈 1층 동쪽 커피숍에 앉아 있어요. 그 전날 안중근 동지인 우덕순 등이 먼저 죽인다고 했는데, 기차 들어오고 있는데, 그 때 카카오톡이 없으니까 무슨 일 있는지 모르잖아요. 걸어 나갔는데, 문제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한번도 안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현실인겁니다. 그래서 누구를 쏴야하는지 몰랐어요. 그 때 사진이 돌아다니던 시절이 아니죠. 그런데 안중근 의사 총 어디서 쐈죠? 하얼빈 역 플랫폼 러시아 군악대 사이에서 쏘았어요. 무슨 얘기냐면, 옷 잘 못입어서 옆의 헌병이 어잇! 하면 끝이죠. 안중근 의사를 (복장이나 외적인 모습을) 보면 이 분을 다 관계자로 본 겁니다. 너무 당당하고, 아무도 제지하지 않은 겁니다. 이토와 다섯걸음. 거리로 5미터 가량. 총 쏘면 정확히 맞겠죠? 거기까지 사실 접근을 못하죠.
신은 존재한다
브라우닝 M 1900. 이 총은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에도 쓰여진 총이다.
그런데 정말 신이 있어요. 안중근이 첫발 벨기에제 총 10연발. 보통 6연발. 그당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책. 존 모세 브라우닝이란 미국인 설계. 브라우닝 M1900 시리즈로 아주 좋은 총이었고. 그 총기 길이는 172mm, 무게는 652g. 총기번호는 262336번입니다. 거짓말 아니거든요. 여러분 여자친구 번호 금방 외우시죠? 안중근 의사가 그만큼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그 때 여러분 앞에 걸어갔을 때까지 아무도 제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첫발 쏘는 데 그 때 군악대 지휘자가 팡파레를 울렸습니다. 진짜에요. 그래서 수행하던 자가 총맞아 쓰러진 걸 몰랐어요. 그리고 나서 두번째 사람에게 연사 세발을 쏜 겁니다.
뭘 하든 옷을 잘 입어야
우선 옷을 잘 입어야 합니다. 명품 입으란 얘기가 아니라 입성이 좋아하죠. 예수님도 옷 깨끗하게 잘 입은 사람 좋아합니다. 교회에 올 때, 성당 올 때 데이트 때보다 좋은 옷 입어야죠. 입성에서부터 정성이 깃들어야 예수님이 좋아하시죠. 그런데 두번째는 정말 하늘이 도운 겁니다. 첫발 총 쏘는 줄 알았으면 제지될 가능성 높았죠. 정말 누가 도와준 겁니다. 그런 것처럼 이봉창도 옷을 잘 입어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이봉창의 마지막 편지
이 분이 김구에게 중간 가명 암호로 보고를 합니다. 아버지는 잘 계십니다. 그런 건데, 하숙비가 없으니 좀 부쳐주시기 바랍니다. 돈 충분히 줬는데, 김구 선생이 (그의 일지에서) 돈은 넉넉히 주었으나, 봉창군이 돈을 더 부쳐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돈을 다시 부쳐줬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 질문없이 부쳐주고, 그리고 확신했고 정말 일할 사람이라고. 이봉창 의사가 그날 아침 편지를 썼습니다. 그 때 김구 선생이 가명이 노 뭔데, 이봉창 의사는 자기 실명 밝히고, "살만큼 살았고 처자식 없으니 이렇게 편할 수 없다. 선생님이 주신 돈은 그동안 술값, 방값, 오입값으로 다 줬습니다." 그동안 모든 편지 중 가장 정직한 편지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은 어젯밤 잔 게이샤에게 다 주었습니다. 이제 제 주머니에는 택시비밖에 없습니다. 돌아올 필요가 없으니까요. 저는 김구 선생님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솔직함의 끝판왕 이봉창
이 분은 뭐가 어떤 오류인지 모르는 분입니다. 고급교양을 갖춘 이도 아닙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안중근도 김구 선생님에게는 아주 가까운 사람입니다. 동학혁명에 가담하고 나서 안중근 의사 집에서 서당선생을 했습니다. 김구 주변 몇 사람이 다 해버린 게 아니고, 그렇게 중요한 일을 했다는 건데,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실패한 성공이죠.
터지지 않은 도시락 폭탄
그런데 일본이 그 때부터 경비 삼엄하게 들어가고, 김구 선생도 철저히 준비해서 가장 강직한 윤봉길 의사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가 4월 29일날 아까 그 옷차람에 중절모를 쓰고 17미터 혹은 19미터 거리에서 폭탄을 던졌고 터졌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도시락 폭탄에 줄을 당겼습니다. 그러면 터지게 되어 있는데, 안 터졌습니다. 우리 독립운동의 가장 커다란 문제 하나 밖에 없어요. 두개를 쓰면 하나가 안 터진다는 것. 그것 때문에 수많은 고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습니다. 당연히 죽이겠지만, 윤봉길을 회유해서 일본 왕에게 대장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길 원했습니다. 어떤 회유도 굴복하지 않는 윤봉길 의사는 그 해 1932년 12월 19일.
1932년 12월 19일
재작년 12월 19일은 그날이었죠? (대통령선거일) 이번 4월 29일은 무슨 날? (보궐선거일). 이렇게 윤봉길 의사가 한국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 야적장에서 일본인들이 윤봉길 의사를 사살했습니다. 아침 7시 27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날 단상에 있던 일본 히라가와 대장이 그날 현장에서 죽지 않고 끝내 죽었던 그 똑같은 시간에 쏴죽이려다가 행정적 절차로 2분 정도 늦어져서 쏴서 죽입니다. 8명 사수에게 탄환 주어지고, 윤봉길 의사는 머리 부분 적어도 세발 이상 맞았습니다. 그런데 사진으로는 윤봉길 의사는 한발 맞은 거처럼 보이는데, 의도적입니다. 얼굴 부위는 함몰됩니다. 이 사진은 세계적 사진입니다. 끝내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틀에 묶습니다. 사형수들이 뒤로 묶어 서서 죽이는데, 이 사진 보면, 김구 선생과 있을 때 그 옷입니다. 바로 그 옷. 제가 그래서 김구 선생이 미워요. 정말로. 저승갈 때까지 입을 좋은 옷을 사주시지. 참 가슴이 아파요.
일본 제국주의의 정체를 드러낸 사형식
그리고 그런 옷 똑같이 입고, 사형 직전 사진에서 마지막 말을 묻자, 할 말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팔을 묶고, 한 사수가 머리띠, 하기 마치를 묶고 이마 한가운데 정확히 조준해서 쏘았습니다. 4~5명은 몸통을 쏘고 3~4명은 머리를 쏘았습니다. 이마 한가운데 흘러나온 피가 물들었습니다. 항복하지 않은 윤봉길의 머리에 일장기를 만든 겁니다. 국가는 최소한 이성을 가진 집단이라면, 일본 제국주의가 얼마나 광기에 사로잡혀서 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사형의 형식으로 모욕과 보복을 가한 겁니다.
안중근 의사에게는 왜 그렇게 못했나
안중근 의사에게 그렇게 못했던 건 세계적 사건으로 다 지켜보던 것입니다. 근처의 공동묘지 아랫부분에 윤봉길 시신을 묻습니다. 모든 이가 밟고 다니도록. 역사상 이렇게 치욕당하고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해방이 되어서 김구 선생께서 안중근 의사 돌아가시면서 1910년 4월 24일 돌아가시며 하신 말씀. 내가 죽거든 하얼삔 공원 유해 묻다가 독립이 되면 내 뼈를 고국에 묻어다오 라고 했지만, 그 시신을 지금까지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김구 선생이 지휘한 두 사람 이봉창, 윤봉길, 그리고 김구 선생이 가슴 사무치게 만나고 싶었지만 만난 적이 없던 구파 백정기
우당 이회영과 구파 백정기
초기 독립운동에서는 우당 이회영이 가장 큰 역할을 했어요. 조선에서 가장 부자였습니다. 지금 삼성같은 재벌은 아니지만 수백만평 땅을 가진 전국 가장 부자. 이항복의 집안으로 12대동안 정승 열세명이 나온 집에 판서는 수십명에 달합니다. 나라가 망하죠. 새벽에 두만강에 이르러, 건너서 6형제가 전 재산을 팔아서 만주 삼원보에 무장투쟁학교를 어떤 미련도 없이 세웁니다. 그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입니다. 일제강점기 초기 양대 대첩.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이 학교 교관이거나 학생들 출신인 거죠. 우리 독립운동사 빛나는 두개의 공적이 1만명 이상 제압했던 일이 바로 신흥무관학교가 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은 베이징 거쳐서 상하이로 왔습니다. 그곳에서 아나키스트 조직 책임자로, 그 밑에 백정기란 사람 있었는데, 역사 명장면으로 1908년에 두 분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약속하지 않아도 똑같은 장소 똑같은 의거를 했던 것처럼, 바로 백정기가 윤봉길이 있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약속하지 않았고, 살아 생전 본 적 없습니다. 그런데 폭탄 터지는 순간 아! 조선사람이구나. 백정기는 아무 근거도 없는데, 그 일을 할 사람은 조선사람뿐이라고 생각. 대단한 일. 똑같은 순간, 똑같은 일을 한 것. 백정기는 도망가야 했습니다. 다음해 다른 사건으로 체포되어 죽었고. 김구 선생은 그런 분 잊지 못해 그 시신 모셔온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효창공원입니다. 이 승만씨가 거기에 체육관을 만듭니다. 나중에 공사한 것인데요. 효창경기장은 김구라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만들어진 거죠.
아무튼 시신을 모셔올 때, 일본에서 윤봉길 시신 발굴 장면(1946.3.4 일본 가나자와시 노다산 육군묘지 부근)과 1946년 3월 9일 발굴단이 일본 가나자와역을 출발하기 직전 모습입니다. 그 시신을 가지고 가나자와 역에 도착했습니다. 시모노세키 통해서 몇달 걸립니다. 그 때 김구 선생이 윤봉길 선생 댁을 방문했습니다. 윤봉길의 아버님이 살아계시고 어머니, 윤봉길의 부인, 옆에는 동생의 얼굴이이 보입니다.
이것은 가장 슬픈 역사의 장면입니다. 자기가 시켜서 죽은 부하의 집에 김구 선생이 방문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도 찾아갈 면목이 없는 집이지만, 일본에서 당신 아들 시신이 돌아온다는 말을 신고하러 간 겁니다. 그리고 예산의 그 자리에 윤봉길 의사 비를 제막했습니다. 해방된 뒤에 김구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런 게 가능했을까요? 그분들이 항일을 평생했다는 것. 김구 선생님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임정보다 더 센 광복군으로 부활하였다
의거를 함으로써 상하이 임시정부는 소멸당합니다. 임정이 하지 않은 일이지만, 군부대가 쳐들어오고 전부 흩어집니다. 그 때 장제스가 말했습니다. "중국군 백만명이 하지 못한 일은 조선청년 한명이 했다." 그 히라가와를 죽이기 위해서 중국인 수십만명이 죽은 게 상하이 사변입니다. 조선 청년 하나가 해낸 것. 상하이 방어 책임자가 장제석이었고, 그 전까지 임정 사람이 장제석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부터는 대부분 말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광복군을 만들 수 있게 된겁니다. 그 때 한 말. 김구선생 한 말이 윤봉길 의사에 대한 얘기였던 겁니다.
중국인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
재미있게도 중국에서 돈 주고 밥주고 총주고 다 한 일인데, 중국인들 여기서 가끔 이상한 짓 하는데 너무 미워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독립운동 주로 어디에서 했나요? 우주에서 했나요? 미얀마 독립운동한다고 총들고 이 동네 돌아다니면 어떻게 할까요? 예산 덕산 밑에 200평만 주시오. 그리고 총 매고 시내 돌아다닌다고 하면 가능할까요? 중국이 일본과 싸워야 할 공동임무가 있겠지만, 한국이 망했을 때, 초기 독립운동을 한 곳은 만주. 중국땅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 한없이 고맙고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청나라겠죠. 그 부분에 대해서 총들고 왔다갔다 한 것이죠. 가방 들고 왔다갔다 한게 아니고, 더 압권은 장제스가 한국독립군에게 전시작전권을 주지 않으려고 했어요. 문서에도 나와 있어요. 임시의정원 사람들이 1박2일로 했어요. 해산하는 일이 있어도 작전권 넘길 수 없다. 그리고 대표단이 찾아가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그러면 윤봉길 의사가 어떻게 쏴죽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무말 못하고 작전권 가져가시오 그랬습니다.
남의 땅에 있으면서 전시작전권도 있었다
그러면 (전시작전권이 없다면) 장제스에게 물어봐야죠. 쏴도 될까요? 망명하고 있을 때 전시작전권도 남의 나라에서 망명하고 있을 때도 한국군에게 있었어요. 베트남 전쟁에서도 전시작전권 채명신 장군이 갖고 있었죠. 소장인데 별 네개랑 담판을 지은 거죠. 카이로회담에서 루즈벨트가 묻습니다. 코리아라는 나라 독립의지 있냐고. 전쟁이라고 로비가 없는게 아니고, 일본의 계속된 로비가 있었죠. 장제스가 말합니다. 임시정부, 그리고 윤봉길과 관련해서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1960년대에도 윤봉길의 집안 사람을 불러서 타이완에서 대접을 합니다. 그 때 장개석 당신도 알지 않느냐? 1930년대 초반 상하이 사변 기억나냐? 그 때 처치한 이가 코리안이다. 역사의 기록입니다.
어떤 남자 오른쪽 다리 없는 사진. 시메미쓰란 사람입니다. 당시 그 단상의 한 남자였고. 다섯명중 하나인 주중공사입니다. 다리 잘렸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 때문에. 이 사람은 일본 가서 치료하고 나중 만주가서 총책임자를 한 핵심세력입니다. 1945년도 돌아와서 해방까지 활동합니다. 일본 패망이죠. 1945년 9월 2일 오후 미 항공모함 미주리 함상에서 맥아더와 악수를 합니다. 이 사람이 요구한 건 물 한잔 달라고 했는데, 미 군인들이 거절을 합니다.
컬러사진입니다. 시메미쓰, 옆에는 일본 육군참모총장. 연합군 11개국 중 한국은 승전국이 안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왕을 대신해서 시메미쓰가 군부 대신 서명을 합니다. 윤봉길 의사 폭탄 던질 때 시라카와 요시노리(1869.1.24~1932.5.26, 白川 義則)라는 육군대장의 사진입니다.
이 사람을 존경하고 창씨개명 똑같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사람. 백선엽이란 사람입니다. (1920년생. 현재 생존한 95세의 친일파이며, 해방당시 만주국 헌병중위로 독립군을 토벌한 간도특설대) 창씨개명한 이름이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 義則)입니다. 이 백선엽이란 사람이 다 아는 것처럼 한국전쟁 중요역할하고, 최고 군부책임자였죠.
왜 하필이면 시라카와(백선엽)이고 시게미쓰(신격호)인가
해방당시 우린 해방이고, 일본 망할 당시 외교문서 서명하는데, 이 사람 시메미쓰의 왼쪽 지팡이는 윤봉길 의사를 상징합니다. 윤봉길 의사가 일본의 패망의 원인인 거죠. 1945년 9월 2일에 동행한 겁니다. 이 지팡이로. 한국군은 승전국 참여하지 못했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기로움을 다리 저는 것으로 비유해봅니다. 윤봉길을 말하고자 합니다. 항복하는 함상에 일본 망했다는 걸 보여주는 사진. 절름발이로. 그 지팡이를 해준 이가 윤봉길입니다. 따라서 항복문서 조인에 그 넋이 있는 것입니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진짜입니다. 그런데 정말 가슴 아픈 것은 이 시게미쓰 마모루의 누이가 있씁니다. 그 남편이 대동아전쟁 당시 대령으로 죽었는데, 그 딸이 하나 장성해서 혼인을 했는데, 시게미쓰 하츠코입니다. 한국의 한 청년과 이미 혼인한 이와 결혼했는데, 신격호란 사람. 일본에서 지금 쓰고 있는 이름이 시게미쓰입니다.
저는 그 두사람에 대해 개인적 물어보고 싶습니다. 두 분 다 살아있습니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딱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왜? 수많은 성과 이름이 있을 텐데, 하필 윤봉길 의사가 제거한 두 사람 각각. 한 사람은 시라카와로 창씨하고, 한 사람은 시게미쓰라고 이름지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윤봉길은 개죽음했나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이걸 묻고 싶습니다. 윤봉길 죽음이 개죽음이 되지 않게 해주셔야 합니다. 제가 조작하는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그런 생각하세요? 역사를 잘못 배웠습니다. 그것은 끊어진 역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고 고통스럽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가슴이 아프죠. 이분들 후손이나 기업활동 모욕하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제가 장제스의 사상 등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써준 글을 고마워서 대만에 갔을 때 묘역에서 향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오직 윤봉길의 부분에 대해서만 향.
장제스에게 고마운 점
장렬한 그 기개가 천년에 이를 것이다. 이것도 장제스 글씨입니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였고, 대의를 밝혔고, 생사를 알았고, 올바른 기운을 남겨 하늘사이에 남았으니 의를 취하고 인을 이루었도다. 그것이 영원히 썩지 않고 남으리라 라고 장제스가 썼습니다. 중국 대륙에서 패배하고 대만으로 밀려난 장제스이지만, 윤봉길에 대해서만 따뜻하고 참으로 깊은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別順逆(별순역) 辨是非(변시비) 明大義(명대의) 知生死(지생사) 留正氣(유정기) 在天地之間(재천지지간) 取義成仁(취의성인) 永垂不朽(영수불후) (천리를 따르고 거역하는 걸 분별하고 옳고 그른 걸 분별하고 대의를 밝히고 살고 죽는 걸 알고 바른 기운을 세상에 남겨 천지 사이에 의를 취하여 몸을 바쳐 어진 것을 이루었으니 업적이 길이 빛나리라)
윤봉길이 다시 나와야 하나
해방 7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생각 해봅니다. 윤봉길에 대해서 정말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나? 만일 우리가 기억 못한다면, 뭐하러 그런 일을 했을까? 후대가 기억한다고 믿기에 그런 일을 한 겁니다. 후대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후대가 특별히 기억하는 두 사람. 시게미쯔를 기억하고, 시라카와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윤봉길의 삶과 죽음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봉길을 기억하는 것은 그 후대까지 함께 기억해야 하는 겁니다. 안 그렇다면 다시 윤봉길이 나와야 합니다.
효창공원의 무궁화 한그루
제가 지난 4월 25일 효창공원에서 윤봉길 의사 생가에서 모셔온 무궁화 한 그루 심었습니다. 박원순 시장과 제가 제안해서 같이 실었습니다. 박원순 시장이 심은거죠. 수많은 제안을 시민이 할 수 있고, 시장이 받아주신 겁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서 비가 오는데 나무를 심었습니다. 저기에 표석을 새기고자 합니다. 제가 표석을 미리 쓴 것을 읽어드리고자 합니다.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1분 윤봉길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제침략자들의 천장절 축하행사 단상을 향해 물통폭탄을 던져 세계를 격동시켰다. 83년이 지난 오늘, 2015년 4월 29일 오전 11시 41분, 그 뜻을 기려 여기 무궁화 한그루를 심고 새김판*에 글을 새기고 시간을 고정한다.
(* '새김판'이란 단어는 잘 못들어서 정확치 않음)
조선말 하고, 내 친구 맘대로 만나서 싶은거다
제가 거기에 11시 41분 고정된 시계 하나 걸까 생각중입니다. 그래서 매일 오전 11시 41분. 중국시간이고, 12시 41분이 우리 시간인데, 전 11시 41분이 맞다고 보고, 매일 11시 41분 종이 한번 울리는 시계를, 그 시계가 돌아가지는 않지만, 그것을 6월 26일 세우려고 합니다. 6월 26일은 무슨 날인가요? 1949년 6월 26일 오후 12시 50분 안두희 총에 돌아가신 날입니다. 제가 오늘 강연하며 아무 종이도 보지 않고, 수많은 숫자들을 말씀 드렸죠. 여러분 이 나라는 저런 분들(김구, 윤봉길, 이봉창, 안중근 등)의 희생 위에 서 있는 겁니다. 저분들의 진정한 목숨 위에 서있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모든 재산 바치고, 명예, 친구, 마누라 다 바치고, 딸 자식 다 폭탄 던지게 하고 왜 그러냐? 조선말하고 내 친구 맘대로 만나고 싶어서다.
해방된 다음 장면이란 게 대단한 게 아닙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숨쉴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고, 일본인들에게 필요한 경우 욕할 수 있고, 한국말할 수 있는 자유, 저 분들이 가져온 것입니다. 그 분들이 남긴 숫자들 다 합쳐도 1000개가 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다면 초까지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분 단위로 기억하는 게 뭐가 대단하겠습니까? 제가 외우는 전화번호가 50개가 넘는데, 제가 뚜렷하게 기억하려는 것은 죄지은 후손이지 않고 싶어서 입니다. 그분이 남기신 뜻은 행동으로 하지 못해도, 제 기억 속에 살아있는 묘비명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겁니다.
안중근 의사의 시신이 왜 안 돌아오실까?
안중근 의사 시신... 왜 찾아오지 못할까요? 돌아가시고 20여년이 흘러서 한국인들이 나서서 이토 사당을 지었습니다. 조선시대 국립묘지 장충단이란 게 있어요. 충성을 기리는 단이란 거죠. 그걸 헐고 만든게 장충단 공원이죠. 조선의 충혼을 밟으란 겁니다. 그리고 그 비탈에 박문사를 만들었습니다. 경복궁, 창덕궁 등의 일부 전각을 뜯어서 박문사란 절을 만든 겁니다. 한국인들이 해마다 수학여행 코스였습니다. 1936년 10월 8일 조선총독부 철도호텔. 지금 조선호텔, 웨스틴 조선입니다. 그 1층에서 이토 히로부미 둘째아들과 안중근 둘째 아들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에게 한 죄를 사과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며칠 뒤, 박문사에서 열린 제사에서 안준상 마태오가 울었습니다. 전 일본신문 똑같습니다. 눈물의 한방울. 해방이 돌아왔습니다. 박문사는 국가영빈관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영빈관 자리 옆에 들어서 있는게 신라호텔입니다.
가장 큰 숙제는 기억하는 것
친일파가 살아있다. 그런 말이 문제가 아니라,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관련된 두 사람의 행적, 그 사람들이 친일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안중근 의사의 그 자리에 그런 일 있었는데, 어떻게 이 오욕스러운 땅에 돌아오시겠습니까? 광복 70년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 가장 큰 숙제의 첫번째는 기억하는 겁니다. 몇가지 중요한 일들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그 기억을 부탁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끝)
위 기록은 필자의 기록을 재정리한 것이므로 강사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작가이자 성공회대 교수인 서해성의 특강은 2015년 5월 18일 저녁 7시 45분경 시작하여 9시 10분 끝을 맺었다.
처음 강의가 시작될 때에는 50여명 정도 참석으로 시작되었는데 나중에 보니 80 여명 정도로 참석자가 불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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