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초청강연은 20분이 지난 오후 3시 20분에 시작되었다.
브루니 교수는 한국의 상부상조의 전통을 곁들이며 1시간동안 공유경제에 대해 강의했다.
세계적 석학 루이지노 브루니(L. Bruni) 교수에게 듣는다.
EoC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경제모델
2016-5-21. 토
충남대 정심화 국제문화회관 백마홀
브루니 교수는 <조선후기 낙안군수 류이주>를 소개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1771년 46세의 나이에 낙안군수가 된 류이주(1726~1797)는 '넉넉한 자가 부족한 자를 돕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겨, 집 행랑채에 쌀 두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목독을 놓아두고 가난한 이웃이 언제라도 쌀독의 아래에 있는 마개를 돌려서 쌀을 빼어 밥을 지어 먹도록 허용했다고 한다. 그 마개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자가 써있었는데, 그것은 누구라도 능히 그 마개를 풀 수 있다는 의미이다.
참고. 운조루(雲鳥樓) 홈페이지 http://unjoru.com/
강연에서 보여준 화면은 아니다. 다만 브루니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말하길, 한국에 오기전 한국 친구들에게
EoC와 비슷한 한국의 전통적 개념을 찾아달라고 했다고 언급하면서 사진을 스크린에 보여주었다.
루이지노 브루니(L. Bruni)의.
EoC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경제모델
고향에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친구가 부르면 가야지!" 예전부터 천주교 대전교구 유흥식 주교님과 저는 친구였고 친구로서 함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친구가 초청을 해서 이곳에 온 겁니다. 그리고 성심당의 사례도 감사드립니다. 공유경제의 정신을 충실히 지켜주시는 EoC 기업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EoC에 대해 말씀을 드리는 데 있어서, 이 자리에는 (충남)도지사, 국회의원, (대전)시장님 등 그리고 저명한 여러 기업가 분들, 남녀 기업가 등 여러분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들어서 압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제 온 맘을 다해서 EoC에 대해 잘 전달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힌국에서 EoC에 대한 확신를 갖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제목은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경제모델>입니다.
2016년 5월 21일 토요일 오후 3시 이후, 백마홀의 모습. 450석의 객석이 대부분 찼다.
프롤로그 - 나무를 보려면 뿌리를 봐야 한다
몇가지 건너뛰고, 파워포인트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한국의 전통 개념에서도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EoC와 비슷한 유사 개념이 있었습니다. 부유한 이들이 곳간에 남은 쌀을 나눠주는 걸 적극 장려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제가 오기 전에, 한국의 친구들에게 부탁을 해서 EoC와 개념이 비슷한 것을 찾아달라고 하니까 이것(류이주의 타인능해 사례)을 찾아주었습니다. 이것은 공유이고 나눔이며 친교입니다. 한국의 전통에서도 이러한 개념이 소중하게 이어져온 것으로 보여집니다.
우리는 흔히 나무를 보려면 뿌리를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뿌리가 잘려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 좋은 결실을 못 맺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EoC는 한국인 여러분의 역사와도 관련이 되어 있으며, 서구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행복과 경제의 관계
제가 본격적으로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서, 유흥식 주교님께서는 저에게 행복과 경제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제는 한국에서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물론 이것은 세계 각지에서 관심을 가진 주제입니다.
여러분 문화에서나 우리 서구문화에서 공유경제는 아주 소중한 개념입니다. 공유경제와 관련하여 독일에서 5백년 대에 포르나투스라는 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EoC와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포르나투스는 지중해 한 섬의 상인이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독일 지역의 숲에 갔는데, 거기서 어떤 여신의 모습을 하고 행운이라고 불리는 여신이 나타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행운이라는 여신은 상인 포르나투스에게 이렇게 말을 건넵니다.
건강을 줄까, 부를 줄까, 지혜를 줄까?
"건강을 줄까, 부를 줄까, 지혜를 줄까?" 그러니까 여신 행운이 상인에게 묻기를 이 중에서 너에게 무엇을 주면 좋겠냐고 하니까, 상인은 '부를 달라'고 말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신은 특별 가방을 그에게 주었는데, 그 가방에서는 항상 열 때마다 원하는 액수의 돈이 들어있었던 겁니다. 그 행운 가방에서는 항상 돈이 나왔고, 어느 나라에 가든지 간에 항상 그 가방을 열면, 베네치아, 피렌체, 프랑스 어디를 가도 거기에 해당되는 통화로 돈이 나오는 거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각 나라에 가면 그 나라 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인은 정말 나중에 행복했을까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이 끝날 때 자기 삶을 뉘우치고 마감을 하게 되자 그의 자녀들이 이 가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녀 중 하나는 살해당하고 남은 하나는 가난해졌습니다.
행복은 버추(Virtue)와 관련이 된다
사실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부와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반드시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행복에는 가정이나 우정 같은 것도 관련이 되어 있기때문에, 그런 행복을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재화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버추(Virtue), 덕(德)이라고 하는 것. 행복은 버추(Virtue)와 관련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버추(Virtue), 미덕, 덕성은 부(富)보다 더 강한 것입니다.
제가 파워포인트에서 보여드리려고 하는 지수가 하나 있습니다. 행복의 역설이란 그래프입니다. 자료집(13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굉장히 유명한 그래프입니다.
이것은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죠. 수평축은 시간대입니다.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를 보여주고, 세로 축은 소득의 증대를 보여줍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인당 GDP는 굉장히 올리기지만, 사람들 행복지수는 의외로 스독증가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이 그래프를 보면서 1945년부터 1970년대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부를 많이 축적한 시기인데, 돈을 벌면 벌수록 행복한 비례관계가 보여지긴 합니다. 어느 정도 가난에서 벗어나는 행복에 필요한 부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일정한 액수를 넘어서면. 이 곡선은 벌어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즉 소득과 행복 곡선은 서로 벌어지는 것인데, 이는 일본이나 유럽이나 한국이나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소득과 행복은 정비례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년 행복에 관한 지수를 조사하는데, 힌국은 세계 GDP 13위인데 행복지수는 58위입니다. 소득과 행복지수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죠. 행복지수는 민주주의, 환경, 건강 등 여러요소가 결합되어 반영되는 통계치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소득과 행복은 정비례하지 읺는다는 것입니다.
몇년 전 조사했던 <수입대비 행복감>(Income-Happiness) 그래프를 보면, 한국은 1인당 GDP가 높은 수준입니다. 그런데 행복지수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어요. 이것은 저보다는 여러분이 제게 답을 해 줄만한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인의 소득이 오르는 데 행복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는 게 인상적입니다. 그래서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소득 외에 다른 요인들이 행복감에 영향을 더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라든지, 환경, 가정 등 중요요소들이 있다는 것이고, 소득이 올라감에도 불구히고 오염되고 질이 떨어진다면 행복도 떨어진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특별히 주교님께서 관심을 가져 주시고 행복과 경제학에 대해 말해달라해서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3:38 pm
불평등은 자본주의가 직면한 도전
이제부터 EoC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불평등은 우리의 자본주의가 직면한 도전입니다. 교회의 위대한 여러 영성들이지금까지 있어왔는데, 이것은 단순하게 종교적 역할만 한 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베네딕토 성인(480~543)은 모토로 '기도하고 일하라.'라고 했는데 왜 이 모토가 중요했을까요. 그 당시 고대 세계에서 노예들이 일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정신이 도달하기 전에 이 세상의 많은 나라에서는 노예들이 육체노동을 통해 생산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정신이 도달하게 되고, 거기 수도자들이 같이 모여 공동생활을 하면서 단순하게 기도만 한게 아니라 노동도 함께 했던 것입니다. 또한 수도자들은 공부도 같이하고 여러 학술 활동을 같이 했습니다. 여러분, 맥주가 수도원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탈리아의 유명한 치즈나 샴페인도 수도원에서 탄생한 것들이 많습니다.
여러가지 사례들을 보았는 데, 성 프란치스코와 성 베네딕토가 유럽경제에 큰 공헌을 했으며, 그것을 증명하는 책들도 출간된 바 있습니다. 또한 회계부기를 처음 발명한 것도 프란치스코회 수사라고 합니다.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아이디어가 나오고, 그것이 역사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chiara Lubich (1920~2008)
가톨릭 평신도 키아라 루빅
가톨릭 평신도 키아라 루빅이 1991년 5월 EoC를 출범시킵니다.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언덕에서 보이는 베네딕도 수도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며 '기도하며 일하라'라고 하는 베네딕토 수도원의 모토를 생각하면서, "일하는 것, 노동이란 게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구나!"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공유경제는 '기도하며 일하라'
즉 '기도하며 일하는 것'은 공유경제, EoC 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노동이란 올바르고 바람직한 영성생활을 위해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지 핞는 사람이 열심히 기도하는 걸 본 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러가지 덕목들, 영성의 여러가지 덕목들을 직접 일하면서 땀을 흘리면서 알게된다는 것입니다.
2003년도에 제가 처음 아시아를 방문했습니다. 한국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2003년도에는 필리핀, 인도, 중국 등을 처음 방문했는데, EoC를 위해서 갔던 겁니다. 그 당시에는 EoC의 창설자가 살아계셨을 때였기에 저에게 메시지를 주신 바 있습니다. 직접 손으로 쓰신 편지였습니다.
EoC 대회를 위해서 이 편지를 씁니다. 적절한 구절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이런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여러분 기업가들은 일하면서 기도하는 분들이란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그것 이상으로 말을 덧붙이면, 일하는 것 자체가 기도입니다. 그래서 노동에 대한 숭고한 가치를 먼저 발견하는 게 중요합니다. 노동자이거나 기업가이거나 모두 노동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디다.
저는 오늘 아침 성심당에 방문했습니다. 여러 곳을 돌면서 큰 인상을 받았던 것은 바로 기업에서 제일 먼저 솔선수범하는 사람이 기업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놀랐고, 사람들 틈에 섞여 일하는 것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기업가가 현장에서 일하는 걸 멈추고 책상 앞에만 앉아있을 때, 기업을 돈 버는 수단으로만 바라볼 때, 현장에 뛰어들지 않을 때, 더 이상 기업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업가란 일할 때에만 기업가입니다.
EoC 개념 안에서 사신 프란치스코 성인
성프란치스코 성인은 EoC 개념 안에 들어 있는 성인입니다. 키아라 루빅의 이름은 키아라가 아니고 원래 실비아였습니다. 실비라안 세례명을 가졌는데, 성 프란치스코 제자인 글라라 성녀의 이탈리아어 발음이 끼아라입니다.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청빈하게 살았던 그 성녀의 이름을 새롭게 가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경제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 수사들은 중세시대 1400년대 이미 서민은행을 설립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수사들이 은행을 설립한 까닭은 당시 고리대금업이 번창해서 높은 이자때문에 많은 서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수사들이 은행을 직접 설립하고, 고리대금업자에게 맞서 서민을 보호하려고 은행을 세운 겁니다. 바로 이러한 정신과 개념이 EoC 개념의 뿌리에 맞닿아 있습니다. 즉 형제애의 은행인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는 또 어떻습니까?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을 노래합니다. 이 시는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이 노래로 만들고, 음악적으로도 많이 알려지게 됩니다.
태양의 찬가
류해욱신부 옮김
지극히 높고 강하며 선하신 주님.
모든 찬미와 영광과 기림과 축복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오로지 당신,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만이 합당한 까닭이나이다.
그 누구도 당신의 지존한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당신이 지으신 모든 창조물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특별히 형님인 태양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태양을 낮이 되게 하시어 저희에게 빛을 주시었사오니
태양은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띠우나니 당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달과 별들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맑고 빛나고 사랑스럽게 하늘에 그들을 지으신 분은 당신이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바람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공기와 구름과 맑고 고요한 날씨와 온갖 기후를 통해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그들을 통해 당신은 손수 지으신 창조물들을 살피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물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물은 쓸모있고 겸손하며 맑고 소중하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불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불은 아름답고 장난스러우며 활달하고 강하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이며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찬미를 받으소서
저희를 지켜주며 다스리는 대지는 온갖 과일이며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을 용서하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아픔과 고난을 참아 받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을 바라보며 고요히 참아내는 이들은 복되나이다.
그들은 월계관을 받을 것이옵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찬미를 받으소서
아무도 죽음을 피할 이 없나이다.
대죄를 짓고 죽음을 맞는 사람은 불행할진저!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 따르며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복되나이다
두번째 죽음이 그들을 해칠 수 없는 까닭이옵나이다.
저의 주님께 찬미와 축복과 감사를 드리오며 지극한 겸손으로 당신을 섬기나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베르나 산에서 겪은 특별한 체험
프란치스코 성인이 베르나 산에 머물며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몸에 다섯 군데 상처가 생기는 체험이었습니다. 바로 이 오상이라고 하는 체험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하고, 이탈리아 밖에서 설교하려고 몇 차례 시도하였다. 1212년 봄 막바지에 그는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섰으나, 달마티아 해안에 강한 폭풍우가 불어닥쳐 타고 가던 배가 난파되면서 이탈리아로 귀환하였다. 1213년 5월 8일 프란치스코는 키우시의 오를란도 카타니 백작으로부터 라 베르나 산을 기증받았다. 오를란도 백작은 프란치스코에게 라 베르나 산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속죄와 기도 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아주 적합한 곳”이라고 설명하였다. 라 베르나 산은 훗날 프란치스코가 기도했던 장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성흔(오상)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생전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힐 때 입었던 상처가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말한다. 1224년 프란치스코가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9월 29일)을 준비하기 위해 8월 15일부터 9월 28일까지 40일 동안 베르나 산에서 단식 기도를 하던 중에 성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에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양손과 양발 그리고 옆구리에 성흔을 받게 되었다. 당시 프란치스코와 함께 있었던 레오 수사는 당시 사건에 대해 간략하지만 확실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가톨릭 교회에서 성흔 현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갑자기 그는 하늘로부터 찬란하고 불타는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세라핌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 그 천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같은 오상을 가졌는데, 그의 날개 중 두 개는 머리 위로 뻗쳤고, 둘은 날 수 있도록 펼쳐져 있고, 다른 둘은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세라핌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오상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성흔을 받고 난 후 프란치스코의 건강은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반쯤 멀었고 심한 병까지 얻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시에나, 코르토나, 노체라 등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치료를 받았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결국 그는 포르치운쿨라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죽음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프란치스코는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성경과 영신 서적 등을 읽는 것으로 보내며 죽음을 준비하였다. 1226년 10월 3일 해질 무렵에 프란치스코는 시편 142(141)편 ‘큰 소리로 나 주님께 부르짖네’(Voce mea ad Dominum)를 노래로 부른 후에 선종하였다.
나병 환자에게 다가가서 입을 맞추라
형제애란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아시시라는 도시에서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고 모든 사람들이 소외시키던 문둥병 나병환자를 보고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을 때, 새로운 삶의 전환기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회개하기 전에는 나병환자들을 싫어하고 꺼려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다가가서 입을 맞추라
이러한 관점은 EoC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이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서 입을 맞추고 신체적 접촉을 하려는 것이 EoC 경제입니다. 오늘날 여러 민간단체들이 서민들을 돕고 여러가지의 시민 운동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면서 "돈만 주면 되잖아요~!, 직접 만날 필요 있나요?"란 식으로 빈민 구제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접촉하는 것입니다. 만지는 것입니다. EoC가 태어난 가톨릭 평신도 운동인 포콜라레 운동 안에서도 이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키아라 루빅의 사람 초대법
이 운동의 창시자 키아라 루빅은 2차 대전 당시 가난한 이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식사대접을 하였는데, 그들과 테이블에 앉을 때는 한가지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살던 공동체의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이 한 명씩 섞여서 번갈아 앉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접시와 나이프와 포크를 꺼내서 극진하게 대접하고 직접적으로 접촉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EoC 기업에서도 가난한 빈곤층과의 접촉을 생활 안에서 구체적으로 가지게끔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EoC 기업이 요양원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양병원 안에 미장원도 함께 운영한다는 건데요. 제가 궁금해서 물어보니까, 관계자가 말하길 한 할머니가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진다면 다리만 고쳐주면 되겠지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미장원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노년의 여성이라도 여전이 아름다운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요양원 안에 미장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EoC 기업이 직접적으로 가난한 이를 초대하고 옆자리에 앉히려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초창기 EoC 정신에서 영감의 뿌리를 두고 있으며, 추상적이지 않고 매우 구체적으로 만지면서 인간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브라질 상파울로의 한 동네가 장벽으로 부자동네와 가난한 동네로 구분된 모습
여성의 천재성을 인정해야
EoC를 창설한 분은 키아라 루빅이라는 여성입니다. 이것은 단지 한 명의 여성에게서 우연하게 창설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성의 천재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성의 독특성에서 비롯되어 EoC가 출발한 것입니다. 키아라 루빅이 브라질 상파울루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공항 근처에 다가가는 순간, EoC에 대한 첫번째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비행기는 착륙이 지연되면서 공중을 선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공에서 내려다본 상파울루의 모습은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에장벽이 있었던 겁니다.
장벽이란 무엇인가? 상 파울로 상공에서 내려다본 모습
장벽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장벽'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베를린 장벽이 떠오를 테고, 난민촌 장벽도 떠올려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 사이에도 실제로 장벽이 있었던 겁니다. 브라질의 부자들의 사는 화려한 고층빌딩을 둘러싸고 있는 빈민촌의 모습을 키아라 루빅이 보았던 겁니다. 그 모습에 큰 충격으로 키아라는 크게 아팠다고 합니다. 몸이 한동안 아팠다는 겁니다.
키아라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상공에서 내려다 본 상파울로의 모습은 화려한 고층빌딩 바로 옆에 방치되어 있는 빈곤층이었습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두개의 세계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공존하고 있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성의 민감성입니다. 키아라는 여성적 민감성 때문에 신체적 이상을 느끼고 복통을 호소하며 몸살을 앓고 며칠간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과연 뭔가 잘못된 세계를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첫번째 발걸음이란 뭔가 잘못된 세상을 보았을 때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걸 못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정의를 위해서 '이것은 잘못되었다!'라고 느끼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키아라의 통증을 통해 탄생한 EoC
제 아버지도 불의를 보시면 못 참고 또 힘들어하시는 분이신데, 키아라 루빅도 신체적으로 힘들어하는 증상을 통해서 역시 '민감성'이란 것이 역사를 바꾼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EoC가 학자들이 만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루빅의 질병에 의해 탄생된 것입니다. 비행기가 상공에서 선회하게 되면서 내려다보게된 상 파울로의 모순된 사회적 현상이 복통을 일으켰고, 바로 거기에서 EoC의 뿌리가 있습니다. 즉 잘못된 사회에 대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시작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서민들의 어려운 삶을 보며 고통을 많이 느끼면 느낄 수록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EoC 기업들도 서민들의 고통을 많이 느끼면 느낄 수록 희망이 점점 더 많아진다고 봅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EoC 기업인) 성심당을 오늘 방문해서 기뻤습니다. 이미 성심당이 EoC를 실천하고 있으며, 이외에 많은 기업들이 EoC로 태어날 것을 확신합니다. EoC 기업들은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은행도 있고, 다양한 종류의 EoC 기업들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EoC 기업의 중추적 정신이란?
그렇다면 EoC 기업의 중추적인 정신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EoC의 기업가 정신에 주목합니다. EoC를 하고자 하는 기업가는 준법정신만으로 충분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제대로 납세하는 것과 법을 준수하는 것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납세를 제대로 하면 제대로 돈을 못 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EoC를 하는 기업가들에게 납세는 기본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좀 더 적극적으로 환경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양심적인 활동들을 펼쳐나갑니다. 그 기업이 속한 사회 안에 현존하는 가난과 빈곤한 현실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려는 적극적인 의도를 가진 기업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전 아프리카 케냐에서 범아프리카 EoC 대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150여명의 아프리카 청년들이 선언서를 읽었습니다. "EoC 기업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EoC 기업이 세계를 바라보고 가난을 바라볼 때, 그것을 단순히 개인적인 현실로만 보지 않습니다. 과연 먹을 걸 사먹을 돈이 없다면, 내 친구 경제학자인 마르셰니가 말했던 것처럼, <가난이란 자유가 결여된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하는 삶을 살 수가 없는 상태이며, 자기가 진정하게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자유가 없을 때 그것을 가난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EoC에게는 무엇보다도 빈곤의 현실이 개인적인 현실인 동시에 병든 사회적 관계의 결과이며, 병든 인간적 관계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상처를 통하지 않고서는 부활에 이를 수가 없다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상처를 통하지 않고서는 부활에 이를 수가 없고, 축복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람들의 관계, 병든 인간관계를 먼저 치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심당이리고 하는 이름은 회사이름이 <거룩한 마음>이란 것인데,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런 이름을 이탈리아에서는 수도원에서 쓰는 이름인데 말입니다. 성심당을 방문했을 때 많은 분들이 사진도 찍고 반갑게 맞이해주며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서 공동체를 느꼈습니다. EoC는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입니다. EoC에 참여하는 주주들, EoC 기업들의 많은 사례들을 보면, 주주들이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도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도 참여합니다. 브라질의 한 가난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 분은 빈민가에 사는 흑인인데 - 사실 많은 흑인들이 가난합니다만 - 기꺼이 EoC 기업의 주주가 되겠다고 나섰으며, 실제로 한 EoC 기업의 주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손녀에게 말하길, "얘야, 저 EoC 기업은 사실 내 것이기도 하단다. 내가 거기 주주이고, 한 부분 기여를 하고 있거든." 바로 이런 생각이 민주주의이며 자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EoC 기업가들의 운동이 아니라 바로 공동체운동이란 것입니다. 거기에는 가난한 이들도 있고, 공동체가 사업을 일궈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비즈니스가 있다는 말입니다.
기업은 사악한 게 아니다
오늘날 EoC가 주는 메시지는 매우 많습니다. 첫번째로 기업은 사악한 게 아니란 것입니다. 기업가가 된다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 번은 루빅이 기업가인 제 친구 알베르토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업가는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기업가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업가이기 때문에 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업이 아름답게 성장하고 제로에서 출발하고 많은 것을 변화시키며 긍정적인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마치 창세기의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 "보시니 좋았다."라고 했던 그런 역할들을 기업들이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되었을 때, 가난한 이들이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이 아니고, 단지 가난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난 안에도 많은 부유함이 들어있고, 부유함 안에도 많은 가난함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가난이 부자들을 치유해줍니다. 왜냐햐면 치유는 서로가 나눌 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보편 질병, 우울증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질병이 바로 우울증입니다. 이 우울증은 가난한 이보다 부자들이 더 많이 겪습니다. 돈이 있는 자들 중에는 그걸 코카인으로 해결하려는 이들도 있어요. 가난한 결코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름다운 가난은 치유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변방에서, 가난한 이들을 끌어안는 기업을 통해서 더 이상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하나의 이야기로 끝을 맺겠습니다. 마을 축제가 열리면, 수레를 끌고 나타나서 사람들을 태웁니다. 그러면 수레에 탄 사람 중에 이야기꾼이 있고 그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어떤 이야기일까요?
천국과 지옥의 차이
하루는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 차이가 너무가 알고 싶어서 하느님에 청을 합니다. "하느님 천국과 지옥을 한번씩 가게 해주셔서 그 차이를 알게 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먼저 지옥에 갔습니다. 지옥에는 잘 차려진 좋은 잔칫상이 있었습니다. 아주 의외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맛있는 음식들. 그런데 지옥의 사람들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포크를 들고 있는데 그것이 엄청나게 길었습니다. 너무나 길어서 그걸 입에 집어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그걸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보니까 거기도 마찬가지로 맛있는 음식이 있고 똑같이 길다란 포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달랐을까요?
양쪽 모두가 갖고 있는 재화는 똑같았지만, 그 느낌이나 행복감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맞은편 상대방에게 서로 먹여주며 행복해 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인간관계를 맺으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화를 통해 포크의 길이는 더욱 더 길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이걸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3:20 ~ 4:19 pm
루이지노 브루니의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경제모델 EoC ①
브루니 교수에게 듣는다. - EoC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경제모델
2016-5-21. 토 @ 충남대 정심화 국제문화회관 백마홀
위 내용은 브루니 교수의 강의를 정리한 것이다. 현장에서 이탈리어-한국어 통역을 통역기로
들은 내용을 기록한 후, 다시 정리하였기 때문에 실제 강연과 다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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