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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문헌

가톨릭 사회교리주간(2014.12.7~13) 강론기초자료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5. 1. 17.

이 글은 2014년 12월 9일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정평위 소식] 게시판의 글을 편집정리한 내용이다. 먼저 원문은 다음의 링크와 같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정평위 소식- 제4회 사회교리주간 강론기초자료 2가지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사진)은 2014년 10월 30일 개최된 천주교 주교회의 가을 정기총회에서 사회주교위원장과 정의평회위원장에 선임된 바 있다. 


참고링크 한겨레 2014-10-31(금) 

주교회의 새 의장 김희중 대주교(67) ... "함께 눈물 흘리는 교회 되도록 심부름"


제4회 사회교리주간은 아래 포스터 이미지처럼 2014년 12월 7일(일)부터 13일(토)까지였다. 



이와 관련하여 유흥식 주교의 이름으로 강론기초자료 2종이 제공된 것으로 보여진다. 원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소개된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제4회 사회교리 주간을 맞이하여 영상자료와 함께 강론에 활용하실 수 있도록 참고자료를 준비하여 배포합니다. 각 본당과 사도직 안에서 활용하시면 되겠습니다.



강론 기초자료1


사회교리는 인류를 사랑한 하느님의 이야기이고,


복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믿는 이들의 눈입니다

 

1. 육화 신비로 밝히 드러난 하느님의 인류사랑


한국천주교회는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 2주를 특별히 인권 주일과 사회 교리 주간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강생의 신비에서 이미 인간의 존엄과 그에 봉사해야 할 교회의 구체적 소명이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육화'를 통해 친히 '인간'으로 인류 역사에 동참한 하느님의 사랑은 참으로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따라서 이 여정에 동참하도록 초대된 교회의 응답 역시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것으로서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교회의 관심은(기쁨과 희망 1항) 관념이나 수사가 아닌 실재적인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2.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가치, 인간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구체적 행위, 곧 창조와 육화의 신비로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이기에 인간은 제도와 법, 체제 위에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절대 가치입니다. 따라서 이를 천명하는 것은 교회의 소명인 동시에 그리스도교 사상의 핵심이며 사회교리의 근본원리입니다.(백주년 53항, 어머니요 스승 219항)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존엄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변함없는 시선이며, 세상을 향해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복음의 눈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곧 믿는 이들의 눈입니다.

 

3. 탐욕이 불러온 인간의 위기


한국교회 역시 우리 사회가 직면한 상황들을 복음의 눈으로 최대한 구체적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육화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인류가 직면한 시공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금년 내내 모든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세월호 참사는 물질주의와 경쟁적 이기주의에 매몰된 이 사회의 참상을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탐욕의 '수단'으로 전락한 사회의 재앙, 다름 아닌 "새로운 독재"(복음의 기쁨 56, 213항), ‘시장 독재’의 참혹한 귀결이었습니다. 독재의 귀결은 비단 참사만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비정규직의 양산과 차별, 부자감세로 인한 사회복지의 전반적인 후퇴,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쌍용자동차를 비롯한 노동시장의 무분별한 정리해고 모두, 탐욕의 무한질주가 불러온 또 다른 참화들입니다. 이처럼, 물질에 대한 탐욕이 불러온 것은 재화의 불평등만이 아니라 개인의 위기부터 가정의 해체, 인간 사회의 붕괴에 이르는 보다 근원적인 "인간학적 위기"(복음의 기쁨 55항)인 것입니다.

 

4. 인간에 봉사하는 국가와 참된 평화


다음으로 성찰할 것은 이번 참사로 촉발된 국가 권력과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화입니다. 참사 이후 수습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요구는 "구조적 비리와 사회적 죄악의 개혁"(2014년 주교회의 추계총회 담화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염원은 국가의 책임회피와 정치권의 무능으로 날로 요원해졌고, 설상가상 경제 침체의 원인과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이념 갈등으로 호도되었습니다. 나아가 국가의 보다 책임 있는 태도를 촉구하던 모든 사회적 의견은 공권력의 과도한 통제로 지속적으로 위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사회적 평화는 단순한 폭력의 부재나 강요에 의해 얻은 화친이 아니며, 사회적 약자들을 침묵 시키거나 그 구조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아니어야"(복음의 기쁨 218항)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시민사회의 비판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과 통제는 개인 사찰이라는 인권 침해 논란과 인간다운 일상을 빼앗긴 강정과 밀양 주민들의 고통을 낳았고 사회적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된 평화란 "잠시뿐인 평화나 허울뿐인 서면합의"(복음의 기쁨 218항) 저 너머, 인간 사이에 구현되는 하느님의 질서로서, 무엇보다도 "정의의 열매"이어야 함을 (민족들의 발전 67항) 다시 한 번 유념해야겠습니다.

 

5. 복음이 요청하는 하느님 나라


교회는 그 어떤 것보다 드높은 인간 존엄과 공동선의 절대 우위를 끊임없이 옹호해왔고 “이 가치들이 위협받을 때 예언자의 목소리를 드높여야”함을 고백해왔습니다. (백주년 47항, 복음의 기쁨 218항) 따라서 교회는 고통 받는 인간 개개인에 대한 일시적이고 시혜적인 관심만이 아니라 고통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고 정의를 확장하는 더 큰 연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당하고 불의한 사회구조들 속에서 견고하게 구체화된 악은 결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기초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59항) 복음은 단순히 하느님과 맺는 개인적 관계만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우리를 통하여’ 실현되는 하느님의 통치, 곧 하느님의 질서가 구현된 세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요청(복음의 기쁨 180항)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걸어야 할 길 역시 분명하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고용 없는 성장으로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이며, ‘새로운 형태의 독재’에 대한 분명한 거부입니다.

 

6. 하느님의 눈과 교회의 길


이러한 우리의 발걸음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통에 대한 ‘공감’입니다. “사회적 약자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하느님의 도구”(복음의 기쁨 187)로 불림 받은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복음적 공감 능력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이미 사회교리라는 풍요한 유산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복음이 요구하는 구원이 개인적 차원만이 아닌 총체적이며 전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의 구원’임을 온전히 이해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구체적 얼굴에서 그들과 함께 신음하는 하느님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사회교리는 인류를 사랑한 하느님의 이야기이고, 복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믿는 이들의 눈입니다

 

 

 

강론 기초자료2

 

「복음의 기쁨」을 통해 바라 본 ‘신자유주의’와 교회의 길


배제와 불평등을 토대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인간은 진정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사목헌장 3항)

 

“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권리에 관한 진리의 선포, 불의한 상황에 대한 고발, 사회의 긍정적 변화 및 참된 발전에의 기여라는 삼중적 과제를 수행한다.”

 

I. 가지 말아야 할 길 -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

 

1. “시대의 징표the signs of the times를 꼼꼼하게 탐구하는 것은 교회의 막중한 책임입니다. 어떤 현실은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탈인간화의 과정processes of dehumanization’으로 치달을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충돌하는 결과를 낳을지 분명하게 구별해야만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탐구한다는 것은 시대정신을 식별하고 확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의 영the spirit of good의 움직임을 선택하고 악의 영the spirit of evil의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하느님 백성의 존엄한 생활을 위협하는”(51항) 사회문제 가운데 ‘신자유주의 경제문제’는 비켜갈 수 없습니다.

 

2. “오늘날” 우리의 경제는 “사람을 배제”하고 “불평등을 확산”합니다.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the laws of competition and the survival of the fittest”을 무분별하게 따르기에 “힘 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을 희생시켜 가면서” 살아가고, “대다수의 시민은 배제되고 주변화”되고 있습니다.(53항) 그런데도 언론에서는 “사실로 입증된 적이 결코 없는” 이른바 ‘낙수이론trickle-down theories’을 전파하느라 급급합니다. “경제 권력으로 무장한 이들”은 무조건 “선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 그들의 주머니를 비워 사회적 약자를 돌볼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창고를 채워 줘야 한다고, 또 이를 위해서는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자율the absolute autonomy of the marketplace and financial speculation을 보장하는 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한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그런 믿음은 “조악하고 순진한 신뢰”에 불과합니다.(54항)

 

3. 수많은 “사람을 주변으로 내몰고 배제하는 이런 생활양식”과 “이기적 생활양식”은 급기야 “무관심의 세계화a globalization of indifference”를 발전시킴으로써 우리 사회를 ‘탈인간화의 과정’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대신 “돈”이 “새로운 우상”으로, “비인간적인 경제독재the dictatorship of am impersonal economy”로 등장하여 기세등등합니다.(55항) “소수의 행복”과 “대다수의 삶의 처지”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은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자율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들이 낳은 결과입니다.” 마침내 인간의 존엄함 증진과 공동선 실현을 위해 “시장과 금융을 통제”해야 하는 국가”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임무를 포기함으로써, “실질적인 새로운 독재자가 일방적으로 그리고 임의로 자신의 법칙과 규칙을 강요”하게 되었습니다.(56항) 가히 모든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형국, 곧 “시장의 이익만”이 “신성한 것”이 된 형국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다움과 사회다움의 윤리를 따지는 것이나, 하느님을 고백하는 신앙은 “비웃음”이나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57항)

 

4. 이제 교회는 분명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처럼, 사람과 사회와 하느님을 배제하고, 기껏해야 비웃고 조롱하는 ‘오늘의 경제 모델', 곧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자율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를 추종하여 돈을 신성시하는 경제모델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53, 56항) 이 경제모델이 양산한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마르 6,37)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문 안에서 안주”할 수 있겠습니까?(49항)

 

5. 이 땅의 무수한 하느님의 백성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면, 교회는 결코 악을 묵인해서는 안 됩니다. “한 사회의 구조들 안에서 구체화된 악은 지속적으로 사회를 해체시키고 마침내 죽음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당하고 불의한 사회구조들 속에서 견고하게 구체화된 악은 결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59항)


 

II. 돌아가야 할 길 -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사회

 

6. “어느 누구도 종교는 사회생활과 국가생활에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사회제도의 건전함 여부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의견을 밝힐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는 오로지 사생활의 내적 지성소 영역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183항)

 

7. “복음은 명백히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에서 통치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서 통치하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은 보편적 형제애, 정의, 평화, 그리고 인간의 존엄이 실현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교회생활은 모두 사회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180항) “각 지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각 지역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책임입니다.”(184항) “교회의 목자들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모든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권리를 갖습니다.”(182항) “모든 그리스도인은 『간추린 사회교리』를 연구하고 활용해야 합니다.”(185항)

 

8.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는 분명히 이 땅의 우리 시대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악)영향을 주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를 부르셔서 사회적 약자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당신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187항) 이는 “우리가 만나는 이들의 실제 궁핍을 덜어주려는 일상의 연대 행위뿐만 아니라,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온전한 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일(연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188항) 이 “연대는 반드시 원래 사회적 약자에게 속한 것을 되돌려주는 결의를 갖고 실천해야 합니다.”(189항)

 

9. “교회에게 ‘사회적 약자를 위한 선택 the option for the poor는 문화의 범주, 사회학의 범주, 정치의 범주, 혹은 철학의 범주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범주‘입니다.”(198항) 때문에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사회적 약자와 사회정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데 있어서 예외가 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201항)

 

10.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일입니다. 이는 사회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회를 약화시키고 무너뜨리는 사회적 질병을 치유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적 질병은 사회를 새로운 위기로 내몰 수밖에 없습니다. 시급한 문제에 대응하려는 사회복지 사업은 단순히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 자율을 배척하고,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빈곤의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세상의 빈곤 문제를 풀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은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 자율과 관련해 생긴 그 어떤 문제들도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평등은 모든 사회적 병고의 뿌리입니다.”(202항)

 

11. “우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권력이,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정의의 확장은 경제의 성장을 전제하면서도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정의의 확장은 특별히 더욱 공정한 소득분배, 더 나은 고용자원의 창출, 단순한 시혜정신을 넘어서는 사회적 약자의 종합적 발전을 위한 결정, 계획수립, 실천, 그리고 지속적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노동력을 감소시키면서 이익을 증대시키려는 처방과 그럼으로써 배제된 이들의 계급을 확대시키는 처방은 일종의 새로운 독입니다. (오늘날의) 경제는 더 이상 처방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12. “상처받기 쉬운 이들을 위한 배려는 정의의 요구입니다.”(209항)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형태의 빈곤과 취약함을 살펴보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속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아무런 즉각적이고 확실한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형태의 빈곤과 취약함을 우리는 “노숙자, 의존증자, 난민, 원주민, 소외되어 버려지고 있는 노인, 이민”(210항), “인신매매 희생자”(211항), “배제, 혹사, 폭력의 상황을 견디고 있는 여성들”(212항),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213항), “경제적 이익과 무차별적 착취 앞에 노출되어 있는 피조물 전체”(215항)에서 볼 수 있습니다.

 

III. 교회의 길 그리고 인간의 길

 

‘대조사회’로서의 교회 -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가난한 교회 the poor Church for the poor

 

13. “예수님의 마음으로 고무된 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우선하는데, 이 선택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실천에서 우선성을 갖는 특별한 형태이며, 교회의 모든 전통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베네딕토 16세가 가르친 것처럼 - “그분께서는 가난해지심으로써 우리를 부유하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선택은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하느님께 대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입니다.” “가난한 교회, 사회적 약자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198항)

14. “길을 나섭시다. 모든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건네주기 위해서 길을 나섭시다. 자신 안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만의 안전에 몰두하다가 결국 건전하지 못한 교회가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거리에 나섰기 때문에 상처를 입고 다치고 먼지 묻히는 그런 교회가 더 좋습니다. 어떤 교회 공동체도 스스로 중심자리를 차지하려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다가, 결국 집착과 절차라는 그물에 걸려버려서는” 안 됩니다.(49항)

 

15. “만일 우리를 힘겹게 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은 그만큼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가 그리스도와 우정을 나눔으로써 얻을 수 있는 힘과 빛과 위로를 받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사실, 우리 형제자매가 자기들을 지지하는 신앙 공동체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 우리 형제자매가 인생에서 목표와 의미를 잃은 채 살고 있다는 사실 뿐”이어야 합니다.(49항)

 

16. “재가 되어버릴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거짓 안전감을 주는 구조 안에 갇혀버리는 두려움, 우리를 무자비한 심판으로 만드는 규칙 안에 갇혀버리는 두려움,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는 습관 안에 갇혀버리는 두려움, 그 두려움 때문에” 움직여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지금 교회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치지도 않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6,37)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문 안에서 안주하려 합니다.” 그것만이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49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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