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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와 문헌/교황과 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성명] 평화의 여정을 시작하며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8. 1. 23.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성명 

평화의 여정을 시작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무술년 새해,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 그야말로 격동의 시간이었습니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 그리고 이어진 북핵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과 끊임없이 불거진 한반도 전쟁위기 상황 속에서 1년을 보냈습니다. 휴전선을 마주한 남과 북 사이에 모든 대화채널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 우리는 불안감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한반도의 위기가 심각함을 인지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성탄과 신년 평화의 날 메시지 등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촉구하며 전 세계 신앙인들의 기도와 관심을 당부하셨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평화의 축제인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과 북 당국자들의 만남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북한에서는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 그리고 예술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단절되었던 판문점 연락채널이 가동되기 시작하였고, 군 통신선도 복구되었습니다. 이는 한반도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소중한 기회를 잘 활용하여 상생의 기회를 마련하여야 하고, 미래 세대들이 남과 북을 자유롭게 오가며 대륙을 향한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평화를 향한 긴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완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평화의 완전한 정착을 위해서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비롯하여 서로를 향한 대량살상 무기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잦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 신뢰를 회복해야 하고, 서로를 적으로서가 아닌 동반자로서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적대시하는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체제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이 이어질 때 참평화가 우리 안에 함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긴 갈등과 대결의 시간을 뒤로하고 평화의 길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디며 우리는 북한에서 내려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강조하셨듯이 사랑 가득한 ‘형제애’를 바탕으로 그들을 환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은 민족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체제와 환경, 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가운데 일치를 도모하는 것은 평화의 기본원칙입니다. ‘차이’를 ‘차별’로 받아들이거나,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평화의 또 다른 원칙인 ‘존중’을 통해 우리의 의연함을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평화’와 관련하여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평화는 세상의 힘이 아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 곧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참된 사랑을 통해 참평화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제 평창 동계올림픽이 성대하게 막을 올리게 됩니다. 남북 선수들이 함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올림픽은 세계인들에게 커다란 평화의 울림을 줄 것입니다. 휴전의 험난한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북한에서 온 선수들과 손님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며 환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큰 감명과 더불어 세계평화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모습이 북한 선수들이나 북한 주민들에게 애틋한 형제애로 전해지며 향후 통일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이 우리 민족을 넘어 분쟁으로 얼룩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의 가치를 일깨우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관심과 기도를 당부합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2018년 1월 19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이 기 헌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