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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미 강연

[20101115] 김조년 교수의 함석현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정세미)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0.

2010년 11월 15일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정세미) 강연

대전 관저동 성당

함석헌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김조년 한남대 교수

(민들레의료생협 이사장, 표주박통신 발행인)



함석헌의 평화사상의 맥락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단 그의 생애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함석헌에게서 평화는 가능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왜 살아야 하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과 같다. 어느 누구도 살 가치가 있다거나, 살아야 할 어떤 당위성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낳았으니까 사는 것이요, 살려 주시는 것이니까 사는 것이지, 어떤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물론 살지 않고 죽음을 택할 수는 있는 것이지만, 그 순간 삶과는 일단 떨어진다. 살아 있는 한은 살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다른 질문이 없다. 이것처럼 평화롭게 사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아니면 죽음이듯이, 평화가 아니면 반평화나 불화가 있을 뿐이다. 즉 평화롭게 살아야 하냐 아니냐의 문제는 평화가 필요한 것이냐, 가능하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를 뛰어 넘는 문제로 설정한다. 여기에는 어떤 논리를 따지는 말의 전개가 필요가 없다. 평화하지 않으면 죽음이다 하는 것에 걸리는 문제기 때문이다.


함석헌에게서 이러한 문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일생을 따라다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1901년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한 가운데 있는 시점으로 언제나 전쟁의 기운이 사회에 가득할 때였다. 특히 그가 태어난 평안북도 용천지방은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지점, 압록강 하류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그래서 지리상으로 볼 때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갈등과 긴장과 화해의 분위기를 아주 민감하게 느끼던 곳이다. 더욱이나 조선은 말기현상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사라지고 지역민 스스로 자신들의 안녕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와 곳에서 자랐다. 전쟁의 분위기는 어린아이들의 놀이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패를 나누어 놀이를 할 때에도 ‘나는 아라사다, 나는 일본이다’라고 하면서 전쟁놀이를 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일상이었다. 


6ㆍ25 때 우리가 전쟁놀이 하면서 자랐고,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미군이 싸우는 전쟁놀이를 하고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언제나 전쟁 상황에서는 아이들이 놀이를 통하여 전쟁을 재생산하고 체화하는 비극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국권을 잃은 때부터 점점 더 사회불안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때 사회분위기는 언제나 나라를 잃고 자기를 상실한 비애감에 휩싸였다. 함석헌의 집안 분위기와 그가 살던 지역의 분위기는 중앙정부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상관은 없었지만, 민족과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비감함은 매우 대단하였다. 그러한 것이 그에게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가 일찍이 어린 나이에 접촉한 기독교교육의 효과는 매우 결정적으로 컸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는 것을 그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그가 자랐던 곳에서는 반상의 구별이 별로 없던, 평민들이 주로 살았던 곳이기에 계급갈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안에서의 남녀차별이나 장자우선 관습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의하여 아주 뼈저린 경험으로 깨지고 깨우쳐진다. 거기에서 그에게는 민주주의 사상의 기초를 배운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 상하가 평등하다는 것을 어머니의 단순한 이야기로 깨달아 그의 일생을 이끌어 나간다.


그 뒤 그는 사립 기독교학교를 다닐 때와 공립학교를 다닐 때의 분위기를 다 경험한다. 사립학교에서는 매우 활발한 자유정신과 독립정신을 경험하였지만, 공립학교에서는 식민지배자의 앞잡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던 중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이 때 그는 평양의 만세운동을 앞장에서 아주 시원하게 전개한다. 그 결과로 학교를 나오게 되고, 다시는 관립학교에 가지 않고, 그의 말대로 하느님의 발길에 채여 오산학교에 간다. 이 때부터 그는 관과는 대립하는 관계를 설정한다. 그것은 바로 그에게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거대한 사건이 된다. 그곳에서 민족주의를 알게 되고, 독립 기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동양고전과 서양철학의 접목이 어떠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 독자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파고들어가는 훈련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매우 귀한 사람들을 책으로 접촉하게 된다. 가장 귀한 인물이 이승훈과 유영모다.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게 되면서 기독교를 새로 이해하고, 기독교와 애국이라는 관계를 새롭게 정리한다. 특히 예레미야를 공부하면서 망국노의 비애가 무엇인지? 무엇을 통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그가 만난 우찌무라 간조는 일생의 좋은 스승으로 남는다. 그에게 배운 것은 독립정신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 귀국하여 모교 오산학교에서 10년간 교사로 생활한다.


특히 예레미야를 공부하면서 망국노의 비애가 무엇인지?

무엇을 통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그의 동료 김교신과 함께 무교회성서집회를 열고,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함께 꾸려나간다. 이 때 그는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데, 역사 교사가 된 것을 무척 후회한다. 아무 것도 학생들에게 영광스럽던 조상들의 역사를 가르칠 건덕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과 패배와 굴종과 식민통치의 쓰라린 경험의 역사만을 반복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는 ‘자기를 잃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자기를 잃어버린 뒤에는 어떠한 물질의 영광이나 힘의 강력함도 소용이 없다. 등뼈가 부러진 것이요, 중축이 부러진 것이 되고 만다. 그러한 근본이 못된 다음에는 어떤 처방도 임시처방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그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고, 고난의 의미를 예수의 고난과 한국민족의 고난을 대비하여 본다. 예수의 고난에서 인류구원의 비전을 보듯이 한국역사의 고난의 행진 속에서 세계구원의 비전을 본다. 한국역사는 단순히 한민족의 한 역사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 한 예가 6ㆍ25전쟁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잘못 된 것이 함께 몰려든 전쟁이다. 이데올로기와 물질과 과학과 민족들과 헤게모니 쟁탈전이 한반도에서 집중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은 세계화의 어두운 면과 긍정의 면을 동시에 경험한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것의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1) 우선 무력과 전쟁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2) 국지적인 문제라 하더라도 그 지역의 독자적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 안에서 해결된다는 것, 3) 적과 아, 원수와 형제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인류, 하나의 인간이라는 철학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 4) 그러나 민족의 문제는 외세종속체계에서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앞서야 한다는 것, 5) 고난의 연속으로 경험한 민족의 최대비극을 통하여 세계구원의 원대한 비전을 찾아보라는 것, 6) 적대관계나 상생관계나 어느 한 편이 이기고 다른 편은 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길을 찾으라는 것. 사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현재의 남북문제도 처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과 모든 인류가 궁극적으로 구원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음미하여 볼 때라고 본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이의 평화사상: 민족과 민족의 화합, 사람과 하느님의 합일, 사람과 자연의 평화, 순간(지금)과 영원의 통합, 땅과 하늘의 합일, 개인과 전체의 합일을 상정한다.


그는 “씨알은 평화요 평화는 씨알에 있다”는 명제에 따라서 이와 같은 사상을 전개한다. “우리는 모두 세 세계에 살고 있다. 극대(極大)의 나라, 극소(極小)의 나라, 중간 나라. 물질계를 보는 데 눈ㆍ망원경ㆍ현미경의 세 눈이 있듯이, 정신계에도 세 눈이 있어야 한다. 영원ㆍ무한을 내다보는 눈, 마음이 갈피를 찾는 눈,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두루 살피는 눈. 이 여섯 세계를 공통으로 다스리고 있는 원리가 평화다. 화는 곧 조화ㆍ고름인데, 고르게 되지 않고는 세계가 서갈 수 없다. 안ㆍ밖ㆍ생ㆍ무생을 말할 것 없이 복잡한 힘의 얽힘이다. 그 얽혀 작용하는 것이 어느 고른 상태에 이르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가 있을 수 없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그래서 있다. 하나의 질서 잡히고 법칙 있는 세계가 된 다음에야 우리가 능히 생각하고 알고 교섭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설혹 상상한대도 혼돈ㆍ어지러움ㆍ허무ㆍ두루뭉수리밖에 없다. 우리가 있을 때, 알 때, 나일 때는 벌써 거기 세계 곧 질서ㆍ코스모스ㆍ대조화ㆍ평화가 있었다. ‘화(和)는 천하지달도(天下之達道)다.’(중용) 그러므로 화는 알파와 오메가다.


영원ㆍ무한을 내다보는 눈, 마음이 갈피를 찾는 눈,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두루 살피는 눈. 

이 여섯 세계를 공통으로 다스리고 있는 원리가 평화다.


다른 말로 하면 평화는 구경의 원리인 동시에 또 내재의 원리다. 칸트가 위와 안을 보고 다 같이 놀라고 찬미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의 세계도 알고 보면 놀랍다. 공자가 교육의 대강을 말하는데, 명명덕 친(신)민 지어지선(明明德 親(新)民 止於至善)이라고 했다.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말할 때 첫머리에 평천하(平天下)를 내걸었다. 명명덕 어천하(明明德 於天下)라 했다. 예수가 날 때 하늘에서 찬송이 들려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기쁨’이라 했다. 노자의 무위(無爲), 석가의 니르바나도 요컨대 평(平)의 자리다. 


예와 이제를 말할 것 없이, 종교 정치를 가를 것 없이, 사람인 다음에는 다 평화를 내세웠다. 전쟁을 직업으로 하여 불쌍한 씨알의 피로 제 살을 찌우고 기름을 짜며 사람 죽임을 재미있는 장난으로까지 하는 소위 영웅이란 것들도 입으로는 평화를 위해 하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내놓고 전쟁을 예찬하는 놈은 미쳤거나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종자라고 할밖에 없다. 씨알은 말하자면 내재의 평화, 극소세계의 평화다. 본질적인 평화다. 씨알의 바탈이 평화요, 평화의 열매가 씨알이다. 그러므로 씨알의 목적은 평화의 세계 이외에 있을 수 없다. 극소는 극대에 통한다.” 함석헌: ‘세계평화의 길’, 함석헌 저작집 12, 『평화운동을 일으키자』, 한길사 2009, 44-46


결국 그에게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 그것들이 교섭하여 사는 방법은 화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내세우는 평화사상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런데 이것들이 깨지는 데는 몇 가지 사회제도와 그것에 힘을 업은 인간의 집단 심리와 집단행동에서 연유한다. 소유제와 국가지상주의와 계급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국가지상주의다. 국가주의는 결국엔 국가지상주의, 민족 지상주의로 변하여 나와 다른 민족이나 나와 다른 가문, 또는 내나라 다른 나라, 나와 다른 종교에 대한 전쟁을 때때로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다. 대개 정의로운 전쟁이나 거룩한 전쟁이란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뒷받침하는 철학은 차별에 있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것, 다른 너는 나의 소유물이나 밥이나 도구가 되어도 좋다는 기본철학을 깔고 있다. 여기에 모든 중심은 ‘나’에 있다. ‘우리’나 ‘서로’가 아니라, ‘나’를 중심에 놓는다. 이 때 나는 언제나 강력하여야 했다. 여기에 복무한 것이 이른바 우승열패, 약육강식 따위의 사회진화론적 차원의 관계철학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힘의 논리를 앞세운 것으로 화쟁의 원칙이 없다. 그러나 상당히 강한 다른 이론, 즉 생물진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들은 꼭 강자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이 연합하여 살아남았다는 이론이 매우 강하다. 이것은 러시아의 학자 크로포트킨이 쓴 『상호부조론』에서 주장하는 화쟁과 상생의 논리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상생관계로 돕고, 어떤 것은 상극관계로 돕는다. 그것들은 서로 함께 존재해야 살아나가는 것이지, 어느 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 역시 사라진다.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원리다. 원칙이 그러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현실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2. 함석헌의 평화운동과 실천


함석헌의 평화사상이 언제부터 싹트게 되었을까? 가장 가까운 직접 영향은 2차 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그는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무모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특히 식민지배체제 아래 살고 있는 조선 청년들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본다. 그리고 가장 큰 것, 특히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장 큰 이유로 과학기술의 발달과 성숙한 인간이성을 든다. 전쟁무기를 생산하고 운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은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증명하였다. 핵무기의 개발은 전혀 무력전쟁의 무의미함을 말해준다. 핵무기의 발명과 개발은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여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경우 모두가 멸망하게 될 것이기에 평화롭게 살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 H. G. 웰즈의 『세계문화사대계』를 읽고 그의 세계국가주의와 평화사상을 받아들인다. 세계는 점점 더 하나의 국가로 되어가며, 한 형제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싸워야 할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나 간디의 삶은 그에게 비폭력적 평화의 삶이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가를 깨우쳐준다. 더욱이나 인간이성의 성숙으로, 인간은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과 그가 꾸리는 사회는 독립이지만, 종속이 나닌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것을 생활로 경험한다. 급격하게 문제들이 개별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6ㆍ25를 경험하면서 더 이상 무력을 통한 전쟁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런데도 가장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누구보다, 어느 나라와 민족보다 더 평화를 사랑하여야 하는 한반도에서 ‘평화’란 말의 정치-사회적 범죄성을 뼈아프게 여긴다. 평화운동이 어디에서보다도 더 먼저 일어나야 할 한반도에서 평화란 말이 위험한 말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당대의 가장 큰 화두는 평화임을 실감한다. 그 당시 평화는 새 길을 여는 명령이면서 시대를 때리고 깨우는 목탁이었다.


그래서 일차로 주장한 것이 한반도의 중립국가론이다. 이것은 그 당시 이데올로기 대립과 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어느 한 이데올로기에 속하는 것을 극복하는, 초월하자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한반도의 남북 양쪽을 통제하고 있는 외세로부터 자유를 선언하고 독립하자는 주장이 된다. 즉 남의 힘을 빌리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통일하고 이끌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위스처럼 약한 나라는 중립의 입장이라야 자신을 잃지 않고 종속체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리하고 지배하려는 외세의 입장에서 볼 때와, 그러한 외세의 힘을 빌어 정치를 하려는 세력의 입장으로 볼 때는 매우 불순한 주장이었다. 이러한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나와야 한다. 그것은 철학과 도구와 삶을 통합하는 것이라야 한다. 다음 같은 것들이 그 중 몇 가지다.


평화사상은 그의 폭력에 의한 피해와 그것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일제 때 감옥에 두 번 씩 투옥되었고, 해방된 조국에서 소련군에 의하여 투옥되었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글을 쓴 것 때문에 투옥되었다. 그 뒤 감금, 투옥, 재판, 가택연금, 금구령에 버금가는 강연방해, 글 삭제와 게재방해 등을 받았다. 정부의 집권권력의 폭력성을 고스란히 몸으로 체험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몇 가지 그의 평화사상과 운동에 영향을 준 것이 있었다. 동양에서는 제도와 권력을 철저히 부정하는 노장사상, 힌두교의 바가받기타를 몸으로 실천한 간디, 전쟁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맹렬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기독교의 예수와 이사야의 사상, 퀘이커의 평화사상과 평화운동, 그리고 우리 민족의 본래 가지고 있는 평화사랑의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평화는 그에게는 신조다. 어떤 논리나 실험으로 증명하여서가 아니다. 인간의 본능이 평화라고 보고 싶은 것이다. 평화가 생명의 본연의 길이기에 그것에 저촉되는 것에 대한 저항은 아주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평화는 공존이다. 공존하지 못하면 공멸할 뿐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가장 극명하게 저해하는 것이 국가주의다. 나라를 뜻하는 한자의 국(國)자에서, 국가는 이미 근본에서부터 무력을 핵심으로 한다. 사람(口)과 땅(一)을 무력인 칼(戈)로 지켜 낼 큰 테두리(口)가 곧 국가다. 그에게 국가는 폭력의 핵심이다. 아직 사람이 크게 깨닫지 못하였을 때는 국가가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지금은 그것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점점 더 국가는 견고한 성으로 자리를 굳힌다. 그러므로 가장 근본 되는 평화주의 운동은 국가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다. 그 한 예를 그는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았다. 성숙한 개인-이성의 진행은 국가 없이 살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전쟁은 언제나 국가를 앞세운 전쟁업자들의 흥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만큼 가장 사치스럽고 낭비스럽고 파괴스런 것이 없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그것에 저항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비폭력저항이다. 그것의 실예를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에서 보며, 그보다 먼저 살았던 소로우에서 모범을 찾는다. 이 두 사람에게 비폭력은 방법이나 수단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것을 통하여 일을 성취시키고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살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간디에게는 폭력을 통하여 인도의 독립을 얻기 보다는, 비폭력으로 영국의 식민지 안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할 만큼 비폭력을 철저한 삶의 하나로 본 사람이다. 바로 그 길을 함석헌은 따르기를 바랬고, 실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비폭력운동과 삶은 철저한 자기훈련과 자기교육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개개인들이나 집단문화가 성숙되어야 하며, 삶을 수련하듯이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폭력을 미워하고,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잠시 동안 수행하고 담당하는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 사람을 우리와 꼭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 하느님, 부처, 그리스도, 인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까지도 불쌍히 보고, 구원하는 깊은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역사의 심판을 위하여 대신 짐을 져주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함석헌이 가장 힘들어 했던 부분의 하나는 바로 이 점이었다. 내 속에 공격의 대상인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맘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가 맘으로 그를 미워하는 것은 이미 그를 죽이는 폭력에 사로잡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비판이나 대항하는 행동은 나와 그를 동시에 구원하는 기도요 구도자의 행위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을 위하여 해체되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계급이요, 소유제도였다. 계급은 평등에 저해되는 것이며, 지나친 소유제의 신성시는 함께 사는 것을 방해하는 근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계급해체의 방법으로는 역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 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그것은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사회제도에서 온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도 제재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실현은 그에게는 인간의 권위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것을 거저 되지 않는다. 값비싼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전대로 남이 그것을 대신하거나 집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우리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가장 중요한 것이 언론의 자유였다. 그래서 그는 일제 때는 김교신이 주간이었던 《성서조선》을 통하여, 해방된 뒤에는 《영단》아니, 《말씀》을 통하여 영적 진리의 말씀을 펼치다가, 1950년대 중반부터 장준하가 발행하는 《사상계》와 1970년에 그 자신이 발행한 잡지 《씨알의 소리》를 통하여 끊임없이 발언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씨알의 자기교육 도구였다. 무지하거나 무식하여서는 결코 자기를 해방할 수는 없다. 온갖 것으로 씨알을 무식하게 만들고 무지하게 만들려는 제도로부터 벗어나려면 스스로 깨닫는 길밖에는 없다. 그러려면 교육기관이 필요한데, 이제 제도 교육기관이나 언론기관은 모두 다 기본 틀을 유지하고 지키고 더욱 견고히 하는데 봉사할 뿐이다. 여기에는 기본 종교기관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바른 언론을 통한 씨알들의 자기교육을 통한 깨달음, 곧 해방뿐이었다.


그 해방운동은 결국 평화운동과 통한다. 왜냐하면 온갖 기본 제도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데 방해되는 것을 주장하고 이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인간해방운동은 평화운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사탄은 우리는 서로 싸우는 적대자로 갈라놓고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운동을 제창하는 것은 결국 통합운동이다.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민족과 민족을 갈라놓으며, 나라와 나라를 분리하고,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를 따로 서게 하며, 사람과 하느님을 분리시키고, 자연과 인간을 적대관계로 설정하는 온갖 분열의 철학과 종교와 정치와 문화에 대한 저항운동이다. 그 저항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백성’과 ‘행동하는 씨알’을 말하였다. 이들이 모여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함께 살기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화운동의 요체였다.


3. 우리의 평화운동


그렇다면 우리의 평화운동은 어떠하여야 하는 것일까?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스스로 우리 사람들에 의하여 된 일이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유교가 한국에 들어온 때도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그 때 사정으로 미루어보면 지배자 층을 통하여 들어왔고, 불교도 일부 민간에 들어왔던 것이 있는지 모르나 적어도 공공연히 크게 들어온 것은 정치 세력을 타고 왔다. 그러므로 그 두 종교는 처음부터 사회의 상층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후에 민간에 널리 퍼진 때에는 그것은 늘 지배자의 종교, 국교였다. 그런데 이 기독교만은 그와 반대로 지배자가 아니고 불우한 지위에 있는 자를 통하여 왔다. 유교나 불교와 같이 나라 사이의 외교의 한 부분으로 온 것이 아니고 민간의 요구로 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후의 발달에서도 나라의 지배 세력과 늘 사우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도덕면에서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젊은이들을 위한 새편집) 2010, 363


그래서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큰 의미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온전히 세상을 건지고 인생을 건지는 진리로,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으며, 마침내 이편에서 머리를 숙여 세례를 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비단 교회사에서뿐 아니라 일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위의 책, 364


이 때 우리 사회는 매우 절박하게 새로운 기운이 필요하였다. “한 시대가 새로워지려면 결국 기적이 일어나야만 한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외물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하는 정신만이다. 그러므로 결국 종교 문제다. 유럽의 신생운동이 종교혁신에 이르러 가지고야 참 신생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의 종교는 어떠하였느냐 하면 불교에서도 유교에서도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깬다는 것은 씨알이 깨는 것이므로 요구되는 것은 씨알의 종교다. 그런데 유교도 불교도 다 씨알의 종교는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완전히 씨을 떠나 특권층의 것이 되어버렸고, 그 특권층과 함께 썩었으므로 도저히 씨알의 가슴을 흔들 힘이 없었다. 씨알이 구하는 것은 곧 새 양심이다. 두 종교가 다 특권층에 붙음으로써 씨알의 양심을 마비시켜버렸다. 그러므로 그 때의 형식으로 굳어진 유교 교리나 고루한 선비의 유교 사상을 가지고는 아무리 뒤집고 고쳐보아도 씨알을 흔드는 새것은 나올 수 없었다.” 위의 책, 357


물론 그 당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던 불교나 유교 역시 그것들이 들어올 때는 언제나 새 기운으로 들어왔다. 단군조선이 세워질 때 하나님을 숭배하는 종교로 됐고, 기자조선이 될 때 유교로 했으며, 삼국이 세워질 때는 불교가 큰 할 일을 하였다. 이것들이 다 썩은 뒤에는 새로운 것이 와야 하는 조건들이 형성된 때였다. 이 때 기독교는 왔다.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찾게 하려는 것이란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이 따로 있지 않고,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늙은이나 젊은이가 따로 있지 않고, 지배자나 피지배자가 따로 있지 않다. 모두가 그 앞에서는 평등하며 오로지 하나가 되어 그를 찾음이 인생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종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몇 가지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었다. 1) 계급주의를 깨뜨리는 일이요, 2) 사대사상을 쓸어버리는 일이요, 3) 숙명론의 미신을 씻어버리는 일이었다. 위의 책, 369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는 천지에 오직 섬길 이는 영이신 하나님 하나밖에 없다는 것, 모든 인류는 다 형제라는 것, 삶의 기본 원리는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진리에 대한 절대순종의 믿음을 주장하는 엄격한 도덕적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사명을 띄고 이 땅에 왔다는 것이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다 인생을 건지자는 것이지, 압박하고 짜먹는데 협력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모든 종교들이 그렇게 됐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 자체 내에 계급주의, 사대주의, 미신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혁명을 이루지 못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 순교자를 그렇게 많이 내면서도 사회혁명을 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땅에 온 기독교가 깔끔하고 깨끗하게 들어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위의 책, 370

 그것은 서양에서 실패한, 썩은 제도를 그대로 가지고 왔을 뿐,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리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 미신이 흥행한 것은 그 당시 사회가 흉흉하여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그것을 받아 새로 들어온 기독교는 과학적 탐구를 통한 개혁운동을 주도할 민중교육을 실시하였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때, 구교보다 100여년 늦게 들어온 개신교의 활동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흐름을 타고 들어온 개신교의 활동은 초기의 가톨릭처럼 매우 희망스런 출발을 하였다. 독립사상, 새교육의 흐름과 과학정신이 가득한 것은 새로운 기운을 넣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개신교가 했어야 할 근본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을 이끌고 나갈 사회적 중산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워낙 강력한 착취 때문에 피폐한 민중 뿐 중산계급이 형성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 때 그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으나 기독교의 생생한 정신이 제대로 펴졌다면, 다른 시들어가는 종교들의 정신도 다시 살아나도록 됐어야 한다. 한 종교의 살아남은 다른 종교가 동시에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으로 나갈 때 사회는 평화가 오며 혁명은 가능하여 진다. 특히 우리 사회는 다원종교사회다. 역사를 관통하여 볼 때나 사회를 횡으로 볼 때 다양한 종교들이 고루 분포해 있다. 여기에서 원수는 없다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 한 종교의 건전한 발전은 다른 종교의 건전한 발전을 이끌어 온다. 반대로 한 종교의 타락은 다른 종교의 타락을 함께 불러 올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그물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평화생활의 요체는 이러한 것이리라. 신약성경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1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심으로부터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척 하지 마십시오. 악은 필사적으로 피하십시오. 선은 필사적으로 붙드십시오. 깊이 사랑하는 좋은 친구들이 되십시오. 기꺼이 서로를 위한 조연이 되어 주십시오.(9-10)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늘 힘과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 되십시오. 언제든 기쁘게 주님을 섬길 준비를 갖춘 종이 되십시오. 힘든 시기에도 주저앉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을 도우십시오. 정성껏 환대하십시오.(11-13) 원수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 결코 악담을 퍼붓거나 하지 마십시오. 친구들이 행복해 할 때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그들이 슬퍼할 때 함께 울어 주십시오. 서로 잘 지내십시오. 혼자 잘난 척 하지 마십시오. 별 볼 일 없는 이들과도 친구가 되십시오. 대단한 사람인 양 굴지 마십시오.(14-16) 되받아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누구에게서나 아름다운 점을 찾으십시오.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십시오. 받은 대로 갚아 주겠다고 고집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상관할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17-19) 우리의 성경은 원수가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보면 가서 점심을 사 주고 그가 목말라하면 음료수를 대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관대함을 베풀면 원수는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악이 여러분을 이기도록 놔두지 마십시오. 오히려 선을 행함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20-21)” 신약성경, 로마서 12장(유진 페터슨: 메시지, 신약), 복 있는 사람 2010


얼마나 놀라운 소리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실천하는 실행방법이다. 진리를 위하여 죽은, 초기의 순교자들은 모두가 다 타협을 몰랐고, 방편을 쓰지 않았으며, 소박하였고, 목숨을 내걸었고, 직접적이요, 저돌적이었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전범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지금은 국가주의, 자본주의, 정치주의와 타협하여 산다.


일반 시민으로서; 허(虛) 정(靜) 유(柔) 겸(謙)의 수련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나’를 정립해야 한다. 나는 공(公)과 연결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은 국가, 민족, 종교, 단체, 가문 따위를 뛰어 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한 때 우리 인류 역사에서 공은 바로 위에 든 것들이라고 여기게 되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공으로 가는 길목에서 잠간 돌보아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들이다. 지금은 그것을 지나야 하는 때가 되었다. 여기에서 바로 허상을 넘는, 진리와 합일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를 나 되게 하는 데 방해 되는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그 속에 그리스도, 하느님, 부처, 인(仁)의 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내면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적절한 상황만 되면 언제나 움이 트고 잎이 나고 줄기가 생기고 가지를 뻗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언제나 무서운 고난 속에서 피어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든 좋고 나쁜 환경을 겪어 가면서 때를 기다려서 솟아난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씨는 많고 무성해서가 아니라, 한 알이라도 제대로 여물고 썩으면 된다. ‘나는 한 알의 씨다’ 라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을 선언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요 위로다. 나는 한 알의 씨알이다. 즉 하느님, 그리스도, 부처, 인, 내면의 빛을 가지고 있는 영근 씨알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그 속에 그리스도,
하느님, 부처, 인(仁)의 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내면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함석헌과 김교신 등이 일제 강점기의 갖은 압제에서 온갖 박해를 겪으면서 만들어 낸 《성서조선》이란 잡지는 독자가 많을 때 200명 정도를 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매년 연말과 연시에 가졌던 수련집회에는 20명 이내가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뿌려진 씨와 그들이 뿌린 씨는 매우 고귀하고 강력하였다. 한 사람에게 뿌려진 씨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뿌려지는 보편적 씨요, 한 곳에 피어나는 씨는 전체를 뒤덮는 상징이다. 관저동에 개나리가 피면 다른 강산에도 핀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요, 목포에서 움트는 싹이라면 여기에서도 조건이 맞으면 틔어난다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동양에서 인(仁)으로 표시하는 씨, 기독교에서 이미지 또는 형상으로 표시하는 하느님의 상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아니, 내 속에 있다. 이 씨는 알이다. 로 함석헌은 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체와 개체, 극대와 극소, 영원과 순간, 하늘과 인간을 통합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각각 독립된 개체이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이것이 평화의 근원이다. 아름다움의 근원이다. 이 씨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는 한 우리는 평화할 수밖에 없다.


생명평화운동에서 전개하고 있는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라는 것은 좀 더 적극성을 띈 것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나는 이미 평화의 씨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누리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평화는 원하고 원하지 않고 할 선택사항이 아니라, 명령으로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평화 한다고 선언하는 것만이 남아 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내가 평화하면 된다. 이미 나는 평화에 들어섰다고 선언하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독립은 선언하므로 시작이 되고, 자유와 평화 역시 선언하므로 되는 것이다. ‘네 병이 고쳐졌느니라’ 선언할 때 이미 병은 사라지는 것이다.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은 바로 평화로운 세상이다. 단일한, 획일화한 세상이 아니라, 백화가 만발하듯이 서로 다른 독특한 것들이 건전하게 조화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될 때는 각각 자기 소리를 내되 다른 것에 맞출 때 이루어진다. 불협화음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것은 바로 전체 음악에 따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가 만들고 인정한 모든 것 속에 그의 속성이 함께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고 따른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따르고 그렇지 않은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만큼 통이 클 필요가 있단 말이다.


나와 전체;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우리는 몇 가지를 일상생활에서 실현하여 볼 필요가 있다. 평화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찾아야 하는 것이다. 누가 할까? 내가 평화롭게 살아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천하에 남이란 없다’는 묵자의 말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그래서 폭력과 평화에 대한 공부와 생각을 하되, 혼자서도 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몇 명 씩 짝을 지어 끊임없이 해보는 것이다. 수도원이나 수녀원 같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실험할 필요도 있다. 간디는 그것을 아쉬람에서 실험하여 보았고, 함석헌 역시 실패하긴 하였으나 몇 번 시도하여 보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적대적이라고 하는 것을 서로 방문하여 보는 것도 좋겠다. 우선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짝을 지어 방문하여 보고, 기독교가 연합하여 불교나 원불교나 이슬람을 방문하고, 함께 예배, 미사, 예불을 드려보는 것이 좋겠다. 다른 종교를 적대시하고 자기들 것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평화의 노래를 자주 부르고, 평화의 기도를 부르며, 한 두 가지의 평화운동이나 평화로운 삶에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던져보는 것이 좋겠다. 이제는 좌우익의 갈등이나, 진보나 보수의 대립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아우르거나 뛰어넘는 하나로 살아가는 실제 생활을 실험하여 볼 때다. 사실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제도와 틀이 그것을 가리고 방해할 뿐이다. 성숙된 인간이라면 바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운동을 벌일 때 우리 사회에 평화로운 기운은 싹이 트고 만발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오늘 가톨릭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퀘이커를 따르는 저를 이곳에 초청하여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자 하는 것 자체가 벌써 통합의 평화운동으로 가는 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남이야 어떠하든 나는 평화 한다는 것, 사회야 어떠하든 나는 평화 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나갈 때 이미 평화의 세계는 뿌려지고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나무가 되며 가지가 돋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어 다시 땅에 떨어져 그 평화의 행진을 계속하여 진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맘과 발걸음 자체가 이미 복일 것이다. 세상은 언젠가는 평화의 세계가 되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예수가 이 땅에 온 뜻일 것임을 믿는다. 그러나 지금 평화롭다는 안일한 생각에 위기의식이 없을 때 이미 평화세계는 깨져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2010. 11. 15. 관저동성당에서)


[20101115. 사진] 김조년 교수의 함석헌의 평화주의의 우리의 평화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