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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4] 바보야 - 한 사람의 사랑이 모든 이들의 삶을 바꾼다. 추기경 김수환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1.

바보야 (2011) BABOYA | 다큐멘터리

2013.02.14 개봉 | 73분, 전체관람가 | 한국 | (감독) 강성옥 | (주연) 김수환

누적관객 17,912명


한 사람의 사랑이 모든 이들의 삶을 바꾼다


바보 추기경 김수환,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될 그를 다시 만난다!


영하 10도의 살을 에는 추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09년 2월, 몇 초간의 짧은 만남을 위해 약 40만 명의 사람들이 명동에 모인 단 하나의 이유. 믿음이 척박한 땅에서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고, 누구도 나서지 않을 때 용기를 냈으며, 우리 곁을 떠나는 순간까지 기적 같은 사랑을 실천한 故 김수환 추기경. 한국사의 격동기 시절 종교를 넘어 사회의 가장 큰 어른, 약자들의 울타리, 마지막 대변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간 '시대의 거인' 김수환… 그의 뜨거운 사랑이 스크린에서 되살아난다. 



INTRO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을 가슴 깊이 깨닫지 못 하니까 

바보야!   『김수환 추기경 인터뷰 중』



About Movie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故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마지막 선물 <바보야>!


사랑으로 기억 될 이 시대 가장 위대한 바보를 만난다!

그 해 겨울, 눈이 많이 내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 그는 명동성당을 떠났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던 그의 긴 기도소리만 명동을 떠돌았다. 추기경의 선종 후 각종 보도 매체를 통해 알려진 장례 절차와 다시금 전해지는 추기경의 인생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이자 놀라움이었다. 해가 뜨는 새벽부터 한밤의 자정까지 사람들은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명동성당으로 향하는 수많은 발걸음, 그들 모두가 신자는 아니었다. 앞 못 보는 이들을 위해 두 눈을 남기고 떠났음에 감동한 사람들,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추기경이 보여준 범종교적 사랑을 나누고픈 신자들, 자신의 성공보다 약자를 위해 살다간 이 시대 어른의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찾은 부모들까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메시지는 모두에게 거대한 울림이 되었다. 평생을 사랑하고도 마지막까지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랑이었다. 신 앞에 엎드릴 때부터 떠나는 날까지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을 꿈꾼 김수환 추기경. 그는 스스로 바보라 불렀다. 하지만, 그 바보는 믿음이 척박한 땅에서 추기경이 되었고 누구도 나서지 않을 때 용기를 냈으며 우리 곁을 떠나는 날까지 이웃 사랑을 실천한 기적의 삶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일생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 <바보야>는 이 세상 무엇보다 아름답게 빛났던 그의 삶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 줄 예정이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된 종교 지도자로서의 삶뿐 아니라,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역사의 산 증인으로 살아 온 인고의 삶까지, 김수환 추기경의 모든 것이 담긴 다큐멘터리 <바보야>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을 선물할 것이다. 



성직자의 길보다 평범한 장사꾼을 꿈꿨던 청년 김수환

세속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사제로 다시 태어난

그 아름답고 기나긴 여정을 되짚어 본다!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 순교자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자립하게 되면 따뜻한 가정을 이룬 장사꾼이 되는 소박한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홀어머니는 그가 그의 형제들과 같은 사제의 길을 걷기 바랬다. 1933년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된다. 나라의 독립을 가슴 뜨겁게 열망하던 김수환은 황국신민의 소감을 묻는 시험문제에 학교에서 쫓겨날 것을 각오한 채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다”라고 적지만, 그는 이것을 계기로 예상치 못한 일본 유학 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식민지 청년으로서 군대에 징집되는 고초를 겪게 된다. 타국에서 맞이하게 된 죽음의 문턱에서 떠오른 단 하나의 생각은 ‘어머니의 무릎에서 죽고 싶다.’ 였다. 깊은 사모의 정을 체험하고 어렵게 귀국한 김수환 앞에 펼쳐진 길은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고독한 사제의 삶이었다. 그렇게 평범한 가장, 나라를 위해 싸우는 독립운동가의 삶은 잊어야만 했다. 1951년 9월 15일,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았던 사제 수품식에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은 비로소 하느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어머니의 권유로 13살에 신학교에 입학한 후 18년이 흐른 뒤에야 신 앞에 엎드리게 된 김수환 추기경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낮고 겸손한 부복(俯伏)의 자세로 신의 은총을 빌며 사제 김수환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세속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가 된다는 건 곧 순교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 한 평생 정결과 청빈과 순명을 서약하는 그 길은 고독과 싸워야만 하는 기나긴 길이었다. 



피로 얼룩진 격동의 시절 모두의 안식처가 되어준

시대의 성인, 김수환 추기경의 진정한 모습을 만난다!


1987년 6월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사회 정의를 외치는 학생들이 명동성당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 해 전두환 정권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고,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등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했다. 한편,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은폐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재야와 통일민주당은 연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전국적 민주화투쟁의 구심체로 결성했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같은 날 민주정당 대표의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을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됐다. 15일까지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 명이 참가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민주화를 요구했다. 이 같은 시위 과정에서 정부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최후의 성소와 같았던 명동성당을 무력으로 점거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바쁜 일과를 마치고 늘 마음 졸이며 잠들지 못한 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던 그는 수화기를 들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당신들은 나를 밟고, 우리 신부들도 밟고, 수녀들도 밟고 나서야 학생들하고 만날 수 있다.” 


피로 얼룩진 역사에 투영된 김수환 추기경의 일대기는 분명 우리가 공유하고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그의 존재는 부당한 권력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힘없는 민중에게는 더할 수 없는 위안이자 안식처였다. 김수환 추기경, 그는 한국사의 가장 뜨거운 격동기 시절 종교를 넘어 사회의 가장 큰 어른, 약자들의 울타리, 마지막 대변인이었다. 누군가는 그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봤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그가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그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소외된 이들에게

등불이 되어준 단 한 사람, 김수환 추기경! 

성 매매춘 여성들의 아버지가 되다!


온 나라가 앞으로 내달리기만 해야 했던 우리의 70, 80년대. 인권의 개념은 자리 잡지도 못했고, 성장의 그늘 어딘가에서는 늘 구멍 뚫린 인권의 사각지대가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매매춘 여성들이 조그만 쉼터를 마련하던 날, 추기경은 그곳으로 향했다. 어느 누구도 함께 밥 먹는 것 조차 꺼려하던 시절, 추기경은 정초마다 그 곳을 찾아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술에 취한 여성이 자신에게 “아저씨~”라고 불러도 아무 말 없이 웃어 주며 그들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성당을 다녀본 적도 없고 추기경이 뭔지도 모르던 그녀들, 그녀들이 영원히 잊지 못하는 한 순간이 있다. 한 여성이 세상을 떠나던 날의 이야기다. 소외 받은 삶을 살았던 한 여성의 죽음 앞에 추기경은 한 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왔다. 추기경이 죽음 앞에 조문을 하고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 당시 매매춘 여성의 죽음 앞에 흘린 추기경의 눈물은 그녀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름 조차 모를, 가족들 조차 외면했던 그녀들을 진정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추기경은 그녀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녀들의 고민상담에 단 한번도 “고생하지 말고 당장 그곳을 그만둬.”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고생했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라며 그녀들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서산에 노을이 물들면 고향집이 떠오른다던 사람, 김수환 추기경. 가난하지만 평화롭던 그 고향집이 그가 꿈꾸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았을까? 그 자신이 우리의 고향이었다는 걸…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기까지 70년이 걸렸다고 겸손히 말하는 김수환 추기경. 모든 사람들을 아무 조건 없이 온전히 사랑해준 그의 바보 사랑은 영원히 우리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줄 것이다. 


사제서품받고 어머니와


Production note

잊고 있던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는 이야기

2009년 2월,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애도의 물결이 멈추지 않았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토록 관심을 받았던 적이 있었을까? 김수환 추기경이 살아온 인생 속에 펼쳐진 이야기들을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연로하신 나이에 돌아가셨음에도 깨끗했던 두 개의 각막은 두 사람에게 빛이 되었고, 이후 장기 기증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실질적인 기증 참여 증가로 이어졌다. 또한, 얼마 남지 않은 통장의 잔액도 도움이 필요한 곳에 나누어졌고 오일장이라는 것 이외에는 일반 신부님들과 다를 것 없었던 소박한 장례 등 한국 교회사 최고 위치에 계시다 떠나는 분 이라기에는 참으로 검소했다. 그분의 마지막 발걸음은 우리가 얼마나 물질의 풍요에 빠져 있는가를 돌아보게 했다. 추기경을 그리워하는 물결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두 해가 지났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종교의 틀까지 벗어나 사회를 아우르던 분께서 이제 우리 사회에 안 계시다는 것이 아쉬울 때가 잦다. 개개인과 사회가 함께 성숙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 어른의 충고를 듣고 조언을 청하고 싶은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종종 어려운 곳을 방문하여 사람들이 잊고 있던 이웃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던 사랑과 시대의 어른으로서 하시기 어려웠을 충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분의 용기, 그 정신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는 듯하다. 추기경이 몸소 전하던 사랑의 메시지가 다시 필요한 이때, 한 사람의 위대한 삶이 보여주는 교훈을 가슴 속에 깊이 남게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바보야>가 기획되었다. 



‘행동하는 사랑’ 김수환 추기경을 기억하는 사람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사회 곳곳에 영향력을 미친 그였기에 추기경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그만큼 다양했다. 본당 신부 시절 함께한 신자들은 추기경이 꿈꾸던 아버지와 같은 사제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신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 받는 사람들조차 서로 모르게 몰래 돈을 건네는 모습은 혹여 한 본당 안 형제 같은 사이의 신자들이 알게 되면 마음 상할까를 신경 쓴 부모의 마음 그것이었다. 사랑을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다. 추기경의 자리에서도 본당 시절 신자들과 가족 같은 만남을 이어왔으며 수시로 판자촌, 쉼터,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랑을 보여주었다. 사회 속에 참여하는 교회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시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정치, 경제, 사회를 아우르는 조언은 국민이 원하는 때 언제든지 이루어졌다. 위치가 가지고 있는 주목성 때문에 드러나는 부분도 있겠지만, 성탄 즈음에 어려운 곳에서 행했던 방문 미사는 종종 기자들의 취재가 부담스러워 몰래 행하실 때도 있었다는 사람들의 증언으로 보아 단순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 말고도 더 많은 곳에 방문하고 사람을 만나 위로했을 것이다. 서울대교구장 시절은 어지러운 사회 격변기와 한국 내 가장 큰 규모의 교구를 신경 써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더더욱 당신의 뜻대로 방문하지 못한 곳이 많았겠지만 교구장 은퇴 이후 어린이 집, 쉼터, 입양원 등 당신의 관심과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방문했던 흔적이 많았다. 이렇듯 많은 사람을 만났던 흔적은 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감히 짐작해본다. 추기경과 과거를 함께한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추기경은 ‘행동하는 사랑’ 그 자체였다. 추기경이라는 높은 자리가 가져다 준 제약으로 어려운 사람들과 더 많이 함께하지 못한 삶이 아쉬웠음을 회고하셨지만 많은 사람의 증언으로 말이 아닌 실천하는 사랑이 충만한 사제였음이 확실해졌다. 



한 인간의 사회적 성공보다 인간적 진심을 보다

추기경 서임 당시 전 세계 추기경의 숫자는 136명, 현재도 약 200여 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듯 추기경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과 수많은 영향력은 물론 ‘교회의 왕자’라고도 하는 그 위치의 대단함이 잘 가늠되지 않는다. 세속적인 사람의 처지에서는 성공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나이부터 고속 승진이 이루어졌으며 가톨릭 사회에서 교황으로 다음가는 위치에 올랐다. 게다가 자신이 하는 말에 사회가 주목하고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 등 누릴 것이 많은 인생이었다고 말이다. 성공한 인생이 언제나 중요한 발자취를 많이 남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추기경의 인생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에게, 많은 사건과 장소에 영향을 주었다. 수많은 자료화면 속 추기경은 언제나 한국 사회에 대한 걱정과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사제의 길을 걷기로 하고 엎드릴 때 자신의 인생은 신의 은총에 맡겼으므로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노인과 고아 같은 약자들을 돌보는 것에 더욱 힘쓸 것을 다짐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추기경의 인터뷰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만큼 행동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종종 드러난다. 사람들의 증언 속 추기경은 결코 자리가 만든 사람의 행적들이 아니었다. 대교구장이 되었기 때문에 많은 신자와 약자들을 살피고, 추기경이었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신경을 썼던 것보다 추기경의 진심 어린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본래 그런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손 한번 잡아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에 사람은 때론 행한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큰 위로를 받는다. 추기경과 인연을 맺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위로와 격려에 큰 힘을 받았던 경험을 고백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홈페이지 내 사랑의 편지 게시판에는 사람들의 편지에 직접 쓴 글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언제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로 시작되는 추기경의 답변들 속에서 아랫사람들에게 말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음에도 받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린 진심이 느껴진다. 말이 아닌 행동하는 사랑을 보여준 사람, 자리의 대단함보다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이 빛났던 사람. 이토록 위대한 삶을 살아내고도 자신을 바보라 부르는 겸손한 추기경이 다시 그리워진다. 



Beautiful people

1981년 마더 데레사 방한


故 김수환 추기경

1922년 대구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출생,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도쿄 조치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44년에 귀국했다. 1951년 가톨릭대학철학과를 졸업하고, 1964년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신학사회학을 연구했으며, 1974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고 대구 대교구 안동천주교회 주임신부가 됐으며, 1955년 대구 대교구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겸 김천시 성의중고등학교장을 지냈다. 1964년 주간 가톨릭시보 사장, 1966년 마산 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5월 29일 주교가 됐다. 1968년 제12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가 됐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됐다. 1970년 이후 한국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준비위원장, 교황청 세계주교회의한국 대표를 지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성회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가운데 개최했으며, 1998년 서울 대교구장을 은퇴했다. 1968년 서울 대교구장 취임사에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했다. 또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를 사회 교리로 주장했다. 취임사와 사회 교리로 인해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었고, 이후 시국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서울교구장 착좌


요한 바오로 2세

내레이션 배우 안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