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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 문헌

요한 바오로 2세. 제23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1990.1.1.)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6. 4.

《제23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생태계의 위기: 공동 책임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

모든 피조물과 함께하는 평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90년 1월 1일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서론

1. 세계평화는 군비경쟁과 지역분쟁 그리고 제 민족과 국가들 간의 지속적인 불의에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자연에 대한 마땅한 존중의 결여, 자연 자원의 피해, 점차 악화되는 생활의 질적 저하로 인하여 세계의 평화가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의식이 중대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야기하는 불안과 의기 의식은 집단적인 이기심과 타인에 대한 무시 그리고 부정의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는 환경의 파괴에 직면하여, 모든 곳에 사는 사람들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지국의 자원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일반 대중은 물론 정치 지도자들도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니, 광범한 학문분야의 전문가들이 그 원인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새로운 생태학적 각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무시 해버릴 일이 아니라 구체적인 계획과 사업으로 발전되도록 마땅히 권장하여야 할 일입니다.

2. 평화로운 사회 발전의 토대인 수많은 윤리가치들은 생태환경 문제에 구체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도전들이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은 도덕적 응집력을 갖춘 세계관에 바탕을 둔 해결책의 신중한 협력모색의 필요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세계관은 계시로부터 나온 종교적 신념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저는 성서의 창조설화에 대한 반성으로써 이 메시지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와 똑같은 신념을 갖고 있지않은 분들도 이 이야기 속에서 반성과 행동을 위한 공동의 기반을 발견하게 되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I.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3. 우리가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최초의 자기 계시를 발견하고 있는 창세기(1-3장)에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는 구절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습니다. 바로 그 때에 이 반복구는 바뀌어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고 합니다. 모든 피조물을 인간에게 맡기신 다음에야 - 우리가 읽고 있는 성서의 표현에 따르자면 -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창세 2,3) 쉬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계획 전개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아담과 하와의 소명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모든 피조물로부터 인간 존재를 구별지어주는 은혜와 역량을 활용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들의 소명은 인류와 다른 피조물 사이에 확고한 관계를 설정하여 주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는 온 땅을 지혜와 사랑으로써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창세 1,28) 그러나 그와 반대로 인간은 창조주의 계획을 자의로 거슬러, 즉 죄악을 선택함으로써 기존의 조화를 파괴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인간 소외, 죽음과 형제 살해로 귀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땅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창세 3,17-19; 4,12참조) 모든 피조물은 제구실을 못하게 되고, 오직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과 함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 8,20-21).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인류와 하느님의 화해를 성취하였다고 믿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콜로 1,19-20) 이렇게 하여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습니다.(묵시 2,15 참조) 죄악과 멸망의 사슬에 예속되어 있던 피조물(로마 8,21참조)이 이제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며,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베드 1,3)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함을 넘치도록 주셔서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켜 이루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세워 놓으셨던 계획대로 된 것으로써,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될 것입니다.”(에페 1,8-10)

이러한 성서적 고찰은 인간 활동과 모든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주의 계획에 등을 돌릴 때에, 인간은 다른 피조물의 질서에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는 질서를 야기하게 됩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지구 그 자체도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땅은 메마르고 거기에 사는 모든 것이 찌들어 간다. 들짐승과 공중의 새도 함께 야위고 바다의 고기는 씨가 말라간다.”(호세 4,3)

이 지구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도 절박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점증하는 자연계의 황폐화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연 그 자체를 지배하는 질서와 조화의 요구, 감추어져 있지만 감지할 수 있는 그 요구를 무감각하게 무시해 버리는 사람들의 행동거지에서 자연의 황폐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이루어진 자연 훼손에 대한 치유가 아직도 가능한가 하고 걱정스럽게 묻고 있습니다. 분명코, 그 적절한 해결책은 단순히 지구 자원의 더나은 관리나 더욱 합리적인 이용만으로 모색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일들도 나름대로 중요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의 근원으로 들어가, 환경의 파괴도 심각한 도덕적 위기의 한 난국일 뿐이라는 진상의 전모를 직시하여야 합니다.

 

 

II. 생태계의 위기, 도덕 문제 

6. 오늘날 생태계 위기의 일부 요인들은 그 도덕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째 요인이 과학 기술 발전의 무차별 적용입니다. 최근의 많은 발전들은 인류에게 명백한 혜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참으로 그러한 발견들은 하느님의 세계 창조 활동에 책임 있게 참여하여야 할 인간 소명의 숭고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산업 및 농업 분야에 있어서 이러한 발견들의 적용이 오랜 기간 폐해를 미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켜 왔다는 사실은 이제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생태계의 한 영역에 개입할 때에 그러한 개입이 다른 영역에 미치는 결과와 미래 세대의 행복에 대하여 모두 마땅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존층의 점진적인 파괴 그리고 이와 관련된 ‘온실 효과’는 이제 위기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산업의 발전, 거대한 도시 집중화, 막대한 에너지 수요의 증대로 인한 귀결입니다. 산업 폐기물, 화석 연료의 활용, 제초제, 냉각제 추진 연료의 사용 등 이 모든 것은 대기 환경에 유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 따른 기상 및 대기의 변화는 건강의 손상에서부터 장차 낮은 대지의 해저침몰 가능성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 이미 이루어진 훼손은 제대로 복구할 수 없다고는 하더라도, 다른 많은 경우에는 당장 그 훼손을 중지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인류 공동체, 즉 개인과 국가와 국제기구들이 진지하게 자신의 책임을 떠맡아 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7. 생태학적 문제의 근저에 깔려 있는 도덕적 암시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심각한 징후는 생명존중의 결여입니다. 이는 수많은 형태의 환경오염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흔히들 생산에 대한 관심이 노동자의 존엄성에 대한 관심을 압도하고 경제적인 관심이 개인과 전 국민의 선익에 우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환경의 오염이나 파괴는 때때로 순전히 인간 경시에 이르고 마는 비자연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세계관의 귀결입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생태계의 민감한 균형은 무절제한 동식물의 남획과 무분별한 자연 자원의 개발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비록 발전과 복지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인류에게 손실을 미친다는 사실이 직시되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오로지 깊은 관심을 갖고 생물학적 연구의 엄청난 가능성들을 주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아직 무분별한 유전자 조작이나 비도덕적인 새로운 형태의 동식물 생명의 개발로 인하여 야기될 수도 있는 생물학적 혼란을 평가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으며, 인간 생명 그 자체의 기원에 관한 용납될 수 없는 실험에 대해서도 아직 무엇을 얘기할 만한 처지에 와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처럼 미묘한 영역에 있어서 근본적인 윤리규범에 대한 무관심이나 그 규범의 거부는 인류를 바로 자멸의 지경에 이르게 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생명의 존중, 그 무엇보다도 인간 존엄성의 존중은 건실한 경제, 산업 및 과학발전을 위한 궁극적인 지도 규범입니다. 생태학적 문제의 복합성은 그 누구에게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관계자들의 정당한 자율성과 특수 역량을 존중하면서도 적절하고도 지속적인 해결책 모색을 위한 연구를 지도할 수 있는 근본원리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들은 평화로운 사회 건설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입니다. 평화로운 사회는 결코 생명에 대한 존중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생명 존중이 바로 모든 피조물의 보전이라는 사실을 경시할 수 없습니다.

 

 

III. 해결책의 모색 

8. 신학, 철학과 과학은 모두 우주의 조화, 그 자체의 완전성과 그 자체 내부의 역동적 균형을 갖춘 ‘코스모스’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질서는 마땅히 조종되어야 합니다. 인류는 이러한 질서를 탐구하고, 정당한 주의로써 이를 검증하며, 그 완전성을 수호하는 가운데 이를 활용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지구는 궁극적으로 공동유산이며 그 소산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사목헌장 69항) 이것은 바로 우리가 얘기하는 이 문제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소수의 특권층이 계속하여 과도한 재화를 축적해 가고 유용한 자원을 탕진하고 있는 데 반하여 대다수의 민중들이 바로 생존의 최저수준이라는 비참한 처지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불의입니다. 오늘날 생태계의 붕괴라는 이 비극적인 징조는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탐욕과 이기심이 창조의 질서, 상호 의존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창조 질서와 얼마나 상반되는 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9. 우주의 질서와 공동 유산이라는 개념은 지구 자원의 관리를 위한 더 나은 국제적 협력의 필요성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생태학적 제 문제의 영향은 개별 국가의 국선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그 해결책을 단지 국가적 차원에서만 모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최근에 그러한 국제적 행동을 향한 발전적인 조치들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습니다만, 기존의 체계와 기구는 포괄적인 행동 계획의 발전을 위해서는 분명 부적절한 것입니다. 그 한두 가지 요인만을 말씀드리자면, 정치적인 여러 장애, 과도한 형태의 민족주의, 경제적인 이해 등이 국제적인 협력과 장기적인 효과적 행동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국제적 차원의 활동에 대한 요구는 각국의 책임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규범의 이행에 있어서 각국 정부는 다른 나라들과 제휴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국 내에서 사회의 가장 취약한 영역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필요한 사회-경제적 조정을 하거나 이를 촉진하여야 합니다. 정부는 또한 자국의 영토 내에서 그 무엇보다는 과학 기술 발달의 영향에대한 신중한 감시를 통하여 대기권과 생물권의 파괴를 막아내도록 적극적인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각국 정부는 그 국민들의 위험한 오염 물질이나 유독성 폐기물에 노출되지 않도록 안전을 보장하여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안전한 환경에 대한 권리는 오늘날 새로운 인간권리 헌장에 포함되어야할 권리로서 더욱 더 줄기차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IV. 새로운 연대의 절박한 요구

10. 생태계의 위기는 특히 개발도상국들과 선진 산업국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연대의 절박한 도덕적 요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국 정부는 평화롭고 건강한 자연적 사회적 환경의 증진을 위하여 상호 보완적인 방법으로 점진적으로 책임을 분담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신흥 산업 국가들은 선진산업국들이 자국의 영토 내에서 먼저 적용하지 않는 한 그 신흥 산업에 대한제한적인 환경 기준을 적용하도록 요구당할 수 없습니다. 또한 동시에 산업화과정에 있는 국가들은 과거에 다른 나라들이 범했던 오류들을 되풀이하여 산업 오염 물질, 과도한 산림 벌채,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무제한 개발 등을 통한 무분별한 환경 파괴를 계속할 수 있는 자유가 실제로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해 폐기물의 처리에 대한 해결책 모색이 절박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태계의 위기가 요청하는 연대, 또 평화를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이새로운 연대의 절대적 요구를 세계의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확신하지 않는 한 그 어떠한 계획이나 조직도 필요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는 국가 간의 평화로운 협력 관계의 강화를 위한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11. 또한 전 세계에 존재하는 빈곤의 구조적 형태를 직접 해결하지 않고서는 적절한 생태학적 균형을 모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많은 나라의 농촌 빈곤과 불의한 토지 분배는 영세농업과 토양의 피폐를 야기하여 왔습니다. 농토가 더 이상 소출을 내지 않으면 많은 농민들은 깨끗한 새 땅을 찾아 이동하게 되어 무절제한 남벌을 가속화시키거나, 농민들을 받아들일 만한 하부 구조를 갖추지 못한 도시 지역으로 모여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막대한 외채를 지고 있는 일부 국가들은 새로운 수출 상품의 개발을 위하여 생태계의 균형을 결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희생시켜 가며 천혜의 자연 유산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행동이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인 결과만을 내세워 오로지 가난한 사람들에 게 그책임을 뒤집어씌운다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땅을 경작하도록 부여받은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을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제 민족과 국가 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은 물론 과감한 구조 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12. 그러나 우리를 위협하는 또 다른 위협 곧 전쟁의 위협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현대 과학은 이미 적대 행위의 목적으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그러한 환경의 변경은 그 누구도 예측할수 없는 극히 심각한 결과들을 초래할 것입니다. 화학전, 세균전, 생물전을 금지하는 국제 협약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균형을 변경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공격무기의 개발을 위한 실험실의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어떠한 형태이든 세계적 규모의 전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태계의 파괴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지전이나 지역전마저도, 비록 제한적이라 하더라도, 인간 생명과 사회 구조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대지를 황폐케 하고 곡물과 초목을 절명시키며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열악한 환경 조건 속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환경 조건은 환경에 더욱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극도로 불안한 사회 상황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13. 현대사회는 그 생활양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는 한 결코 생태학적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세계도처의 사회는 순간적인 만족과 소비주의를 누리고 있으며 그것이 야기하는 폐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두지 않습니다. 제가이미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생태학적 문제의 심각성은 인간의 도덕적 위기가 지닌 심각성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처지와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이 결여될 때에,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지구 자체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고 맙니다. 간단히 말해서 소수의 무심한 습관이 끼치는 부정적인 결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절제와 극기는 물론 희생정신이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야만 합니다.

생태계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는 교육, 즉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지구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는 교육이 절실합니다. 이러한 교육은 단순한 감정이나 공허한 소망에 뿌리를 박을 수는 없습니다. 그 교육의 목적은 이념적이거나정치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현대 세계에 대한 배척이나 어떤 ‘실락원’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부질없는 소망을 그 바탕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그와는 반대로, 책임에 대한 참된 교육은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의 진정한 회개를 수반하는 것입니다. 여러 교회와 종교집단들, 민간단체와 정부기구들, 참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저마다 그러한 교육을 위하여 수행하여야 할 구체적인 역할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으뜸가는 교육자는 가정입니다. 바로가정에서 어린이는 자기 이웃을 존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14. 끝으로 창조의 미적 가치를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과우리의 만남 그자체가 심오한 치유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위대한 자연에 대한 명상은 평화와평온을 가져다줍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피조물과선과 미를 거듭거듭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창세 1,4 이하; 시편 42; 104,1 이하; 지혜 13,3-5; 집회 39,16.33; 43,1.9 참조) 인간의 창조력이 낳은 위업에대한 명상 또한 좀 더 난해하기는 하지만 똑같이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시들마저 모두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으며, 그 아름다움

은 사람들에게 환경 보호의 동기를 부여할 것입니다. 훌륭한 도시계획은 환경보호의 중요한 부분이며, 대지의 자연미에 대한 존중은 생태학적으로 건전한개발을 위하여 없어서는 아니 될 필요조건입니다. 훌륭한 미적 교육과 건강한환경 유지 사이의 관계는 결코 간과될 수 없습니다.

 

 

V. 생태계의 위기, 공동 책임 

15.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는 모든 사람의 책임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가 지적한 대로, 그 다양한 측면들은 개인과 민족과 국가와 국제 공동체에 속하는 의무와 책임을 이행하기 위한 일치된 노력의 요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진정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모든 노력과 더불어 손을 맞잡고 나아갈 뿐 아니라 그러한 노력들을 구체적으로 북돋아 주고강화시켜 줍니다. 생태계의 위기를 평화의 추구라는 한층 더 폭넓은 맥락에서볼 때에, 우리는 지구와 그 환경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에 기울여야 할 관심의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가 우리에게 하는 말은 곧 우주에는 마땅히 존중하여야 할 질서가 있으며 자유로운 선택의 역량을 부여받은 인간은 미래 세대의 행복을 위하여 이 질서를 보전하여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태계의 위기는 도덕문제라는 말씀을 저는 거듭 되풀이해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지니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공동선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예리하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건강한 환경의 회복에 기여하여야 할 자신의 의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더 더군다나 환경의 회복에 기여하여야 할 자신의 의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안에는 명확한 질서와 조화가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생태계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피조물 안에서의 자기책임은 물론 자연과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의무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 앞에 열려 있는교파 간 종교간 협력의 광활한 영역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16. 이 메시지를 마치며, 저는 모든 피조물을 보호하여야 할 중대한 의무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가톨릭 교회 안에 있는 저의 형제자매들에게 직접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건강한 환경을 보전하려는 신앙인들의 투신은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서 직접 뻗쳐 나오는 것이며, 원죄와 본죄의결과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그리고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으로부터직접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에 대한존중은 또한 인간과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부름 받는 다른 피조물들(시편 148; 96 참조)에대한 존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1979년에 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자연 환경을 증진시키는 사람들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하였습니다.40) 그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피조물을 참으로 깊이 존중하는 모범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피조물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 성 프란치스코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동물들과 식물들, 온갖 자연들, 형제자매인 해와 달까지 초대하여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주님을 찬미하셨습니다. 아시시의 그 가난한 사람은 우리가 하느님과 평화를 이룰 때에 모든 민족 간의 평화와 떼어 놓을 수없는 모든 피조물과의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우리 자신을 더욱 훌륭하게 헌신할 수 있다는 놀라운 증거를 보여 주고 계십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감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저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더더욱 생생한 ‘형제애’의 의식을 지켜 나가도록 우리를 도와주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인께서 인류 가족 안에 존재하는 저 위대하고도 숭고한 형제애에 비추어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고 보살펴야 할 우리의 중대한 의무를 끊임없이 깨우쳐 주시기를 빕니다.

 

 

1989년 12월 8일 바티칸에서
세계 평화의 날 교황 재위 10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