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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미 강연

구름에 감싸인 느낌 - 이호진 프란치스코의 교황님 이야기 @전민동성당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5. 2. 7.



이호진 형제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로 사랑하는 1녀 2남 중 막내아들 승현군을 잃었습니다. 

2014년 7월 8일부터 8월 15일까지 약 38일간 안산-팽목-대전간 총 900km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2014년 8월 17일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직접 세례를 받은 형제님은 '구름에 감싸인 느낌'이라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2015년 2월 7일 세례를 통해 '프란치스코'로 새로 태어났던 이호진 형제님이 천주교 대전교구 전민동 성당에서 평화의 인사를 나눴습니다. 프란치스코 형제님은 교황님의 당부말씀대로, '희망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기로 하느님께 맹세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이호진 프란치스코 형제님의 전민동성당 특강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호진 프란치스코 형제님과 함께 하는 교황님 이야기

           -   구름에 감싸인 느낌   -           


2015년 2월 7일 토요일 저녁 8시

천주교 대전교구 전민동 성당 2층 성전

 

다리에 이상이 있어서, 허락해주시면 앉아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말 이 시간에 이렇게 모여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 유가족을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유가족 중 어느 개인의 발언이구나.’ 그 정도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세월호 참사 초기 때부터 여기저기 다니며 알리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초기에는 가슴에 한이 쌓였고, 원한과 분노도 당연히 쌓였습니다. 말을 하다보면 새끼가 생각나서 말을 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나온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고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분과 이런 자리를 갖게 됨으로써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속으로 울고, 겉으로 웃으면서 말할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울면서 제 말씀을 들어달라고 해도 세월호 유족이고, 웃으면서 말해도 어쩔 수 없는 세월호 유족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슬픈 얘기는 하지 않고, 기쁘고 기분 좋은 얘기를 세월호와 엮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상식으로 살아왔습니까?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잖아요. 지구촌에 65억, 한국은 5천만. 그분들이 다 열심히 살아가고, 다 성실히 살아가지만, 각각 살아가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걸 둘로 나누면, 법을 알고 법을 지키고 살아가려는 한쪽의 사람들이거나 비록 법은 모르지만 가진 것 없고 가난해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 그분들은 바로 상식으로 살아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신호등을 건널 때 녹색불이 켜지면 건너간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이미 오래전부터 몸에 익혀온 사실입니다. 물론 그것도 법일 수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함부로 욕하지 말고 손찌검하지 말라는 것, 법 이전에 상식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당신은 법으로 살아 왔습니까? 상식으로 살아 왔습니까? 제 생각에 거의 모든 분들이 상식으로 살아왔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상식으로 살려고 무던히도 노력해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빠진 것 같습니다.


10년 전에 제가 생각하기를 술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지 않으면서 열심히 일하면 수도권 어디에 내 집 한칸을 마련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데 10년 뒤 보니, 다시 십년 후로 계획을 세워야 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극히 일부분에 속한 분을 제외하면 이상하게 세상이 살기 힘들다고 얘기합니다.

 

당신은 세상을 향해서 말하고 있습니까?

 

바꿔 얘기하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를 말하려고 해도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니지 않은 저 사람에게 이런 얘기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러한 조바심과 두려움 속에서, 언제인가부터는 마음 속 있는 말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정의와 불의를 마음 속으로 분간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무엇때문인지 우린 세상을 향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1994년도에는 그래도 남들보다 잘살지 못해도 경쟁하면 경쟁이 가능한 위치에서 세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지방에서 점심 먹는 데, 그 때 제 나이가 36세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큰 딸이 세살인가 네 살 때였습니다. 그 때 속보가 TV 화면으로 보였습니다. 그 속보는 여러분도 아는 사건 중 하나인 성수대교가 무너진 거였습니다. 그런데 전 그 때, 무너져서 고귀한 목숨을 잃고 성수대교 난간에 자동차가 매달려서 대롱대롱 대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식당에서 밥 먹으면서, 그 사람들의 애타는 심정을 너무 몰랐습니다. 그 시절 저는 공사 계약 앞두고 있고 그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내게 닥친 불행이 아니었다

 

그것이 제게 닥친 불행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인지,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삼풍백화점이 우르르 무너졌습니다. 물론 마음은 안 좋았지만, 그 사람들 입장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용산 철거민 사태로 억울한 가장이 죽음에 이르고, 그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큰 아들이 이리저리 뛰다가 4년 간을 감방에서 생활하다고 나왔어도, 그것은 제 입장이 아니었기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아이들이 당연히 살 줄 알았다

 

그러다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세월호에는 불행하게도 제 새끼가 들어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팽목항으로 가면서도 유족 중 어느 하나도 잘못될 것이란 생각으로 간 부모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살 줄 알았지요. 막상 가보니 구조가 이뤄지지 않았어요.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어렵겠구나. 어쩌면 아이들은 단 한명도 살아나오지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저는 팽목항 도착 이틀 차에 저혼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건질 것 같은 진도 앞바다에서 단 한명도 살지 못하고,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숨져가는 그 항구에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동생 누나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경만 하고 있었어요.

 

세월호 초기에 유족들 중에 비교적 제가 정신을 일찍 차렸습니다. 다른 분들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저는 외부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모이신 분들에게 말씀 드렸어요. 그 때 당시 나룻배 한척으로 아이들을 정신 차리고 구하려고 했다면 백 명은 능히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태평양도 아니고 지중해도 아니고 흑해도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2항


보트 타고 엔진 걸고 부르릉 나가면 바로 가는 그 진도 앞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진 일을 아직도 모르시는 분들이 있어요. 옛날에 제가 대형 참사 앞에서 저의 입장만 생각한 과오는 깨닫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물 속에서 주민등록증도 안나온 아이들이 한명 한명 죽을 때 정말 야속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을 보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원고 학생 일반인 포함해서 304명은 국가의 국민입니다. 그 중에서 대통령도 나올 수 있고, 우수한 인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유가 어쨌든 그 아이들은 미성년자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국가는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그 아이들을 살려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그 의무를 수행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언론은 오보를 쏟아내고, 그 오보에 맞춰서 믿고 따르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어느 집단이든지 똑같은 의견 모으는 게 어렵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건 아닌가.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구촌에서 대한민국은 교육열이 높고, 70% 이상이 대학을 가는 이 초유의 현실 앞에서 그런 언론의 오보를 쏟아내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할 따름입니다. ... 그런 언론을 대하거나 이상한 말씀을 하는 분들을 볼 때에,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능력은 적어도 갖춰놓아야 사랑하는 가족들과 내 새끼들을 지킬 수 있지 않나하는 생각에서 남들 앞에 나서서 얘기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개념’ 하나는 갖고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키고 살았던 건 아닌가?

 

3.1운동 모르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6.25 전쟁 모르는 사람 누가 있어요? 학교공부 좀 하는 사람은 아관파천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왜 고종이 우리나라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쳤는지 우린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와 관련이 없다면 철저히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키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여기서 멈추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산에서 벌어진 일이 서울에서 또는 부산에서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너무나 나른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면 또 다시 그런 일에 놓일 수 있다는 걸 두 번 세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결혼하지 않고 아이들도 없다면 상관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랑하는 새끼가 있고 가족이 있다면 한 두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큰 사건과 작은 사건이, 큰 희생과 작은 희생이 이뤄지며 그것이 대형 참사로 이어진다는 하인리히법칙 생각해봐야 합니다.

 

(*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 ...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그와 관련된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밝힌 법칙)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다가 피를 토하고 죽는다고 해도 세월호 진실은 요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하는 새끼를 너무 억울하게 보낸 뒤에야 그러한 걸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형제자매님은 저를 보고 깨달으시면, 여러분의 소중한 인적네트워크에서 여러분을 지킬 수 있지 않나하는 생각에서 말씀드린다고 생각하면 아마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새끼 장례를 치르고 안산분향소, 서울광화문 그리고 유족들 모이는 자리, 세월호 집회 모이는 자리에서 끊임없이 시간을 보내며 있어도 마음 속 한이 풀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 많은 아이들이 왜 한명도 살지 못했는지, 제가 답을 못 구한 겁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나선 게 이건 땅에서 풀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큰 딸에게 얘기하고 큰 딸도 나선다고 해서 7월 8일 단원고 출발해서 팽목항 거쳐 대전까지 그 머나먼 900키로의 여정이었습니다.

 

900km 도보순례는 원래 체력이 좋아서 했던 것일까?

 

순례길이 다 끝난 뒤, 건강 어떠시냐고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손잡고 울어주시고, 어떤 분은 저한테 ‘원래 체력이 좋으셨나봐요.’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런 때에 저는 정중하게 답해드립니다. “마음에 한이 있으면 저는 9천km도 걸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아빠 엄마의 마음일겁니다.”

 

순례길이, 그 걸음걸음이가 그렇게 고통스러웠어도, 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간 거 같아요. 오른쪽 발부터 시작된 물집이 왼쪽으로 번지고 오른쪽 피고름이 왼쪽으로 번졌어도 ‘걷는게 이렇게 힘들구나.’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그냥 걸었던 거 같아요. 하늘이 저의 정성을 알았는지, 광주지점 지날 정도에 교황님께서 어쩌면 만나주실 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얘기를 신부님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는 제가 힘들게 걷는 와중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길은 대전까지 가야한다. 대전까지 가려면 일차적으로 팽목항이 목표다. 팽목항까지 도착하면 대전까지 갈 수 있다는 결기를 부채질하게 되었습니다.

 

한번도 뵙지 못한 교황님의 그 말씀 한마디가 크나큰 동기부여가 되었던 겁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시고 무사히 팽목항에 도착하고, 광주 지날 때는 행렬이 천명 이상 불어나기도 했고, 많은 분들이 한결 같이 기도를, 세월호에 대한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신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십자가를 지었던가?

 

방금 신부님께서도 소개를 해주셨지만, 많은 분들 궁금한 게 신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십자가를 지었던가?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그 절박한 순간에 왜 주님을 찾게 되었고 주님에 의탁해서 십자가를 둘러메고 땡볕아래 뜨거운 아스팔트 길에 나섰는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이나 전세계 사람들 하나하나 다 십자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요? 그것이 부처님이면 부처의 모습으로, 주님을 찾으면 십자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죄인이 아닌데 죄인이었다

 

팽목 항에 도착해서 1박 2일 휴식 취하고, 대전월드컵 경기장에서 교황님을 뵙게 되었을 때, 저보다 앞서 아홉분의 유족이 먼저 제의실 앞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저와 (900km를 함께 걸었던) 김학일 형제님은 그 뒤에 서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들이 마치 큰 죄를 지은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서있는 걸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분명한 건 우린 죄인이 아닌데, 왜 우리가 죄인처럼 서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제가 떨치지 못하고 있을 때,  교황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열 분의 세월호 유족들 중에는 신자도 계셨고, 아닌 분도 계셨고, 총 열한분이 교황님 제의실 앞에 가로로 일렬로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황님은 걸을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로 한 분 한 분 손을 만지시면서, 저희 유족들 하는 얘기를 들으시면서 제의실로 천천히 천천히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가만히 쳐다보니 (유족) 한 분 앞에 서 있는 게 약 10초가량이었습니다. 그걸 합치면 2분 남짓이라는 데,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그렇게 교황님 뵙고, 십자가 메고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10초, 길어야 20초라면 그 2분여 사이에 그냥 머리 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은 생각이 들었으나,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는 사이 교황님은 다른 유족들과의 만남을 다 끝내시고 저를 쳐다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황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다른 아무 말씀 못 드리고, “교황님을 사랑합니다!” 그 한마디뿐 못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들은 교황님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면서 몸을 돌리시어 제의실로 들어가려는 찰나였습니다.

 

누가 시켰는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제가 교황님을 불렀습니다. 아마 그것은 가슴 속 밑바닥 잠재된 어떤 그런 간절한 바램이 나도 모르게 나온 소리가 아니었나. 지금도 지울 수 없는데,  제가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파파!”라고. 교황님이 거기서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두 걸음만 들어가면 제의실 손잡이를 잡고 안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교황님이 제의실 안으로 들어가시면)  세월호는 거기서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금도 지울 수 없습니다. 제가 큰 소리로 “파파!”라고 부르는 소리에 교황님이 저를 돌아보셨습니다. 그 때 저는 교황님께 말씀드립니다.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너무 허무합니다. 저는 교황님을 생각하며 900km를 걸어왔습니다. 청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는지요?”

 

그러자 교황님께서 말해보라고 했어요. 저는 당장 교리는 부족하지만, 교황님께 세례를 받고 싶은 데 교황님께서 판단을 내리시고 답변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교황님이 제게 신상에 대해 물었습니다. “성당을 나간 적이 있느냐?” 그래서 제가 “네. 성당은 2-3년 전부터 나가고 있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시복식이 열릴 광화문 광장에세 세례를 받고 싶다면?

 

그러자 정제천 예수회 한국 관구장님과 긴밀한 얘기를 1~2분간 주고받더니 다시 저에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세례를 주겠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신부를 통해 세례를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딱 잘라서 말했습니다. “저는 신부님한테 세례 받으려고 십자가를 메고 900km를 걸은 게 아니고, 교황님 뵈려고 이렇게 왔는데, 제 생애에 다시는 교황님 못 뵙니다. 그러니 저에게 세례를 주시고 바티칸으로 가시면 안 됩니까?” 제가 재차 물었습니다. 교황님이 제 진심을 알아주셨는지, 정제천 신부님과 얘기를 몇 분 간 나눴습니다. 그러더니 교황님이 세례를 어디서 받고 싶으냐고 물으시기에, “시복식이 끝나고 광화문에서 받고 싶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로 광화문에서 세례를 주긴 어렵다. 내 생각에 대사관 성당에서 세례 주고 싶은데 너의 생각 어떠냐고 제 의견을 물어주셨습니다. 정신없는 그 와중에도 교황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듣고 아 그래서 ‘모두가 존경하는 큰 어른이시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세례를 청한 것은 이미 하늘의 별이 되어 있는 세월호 희생자 304분의 뜻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황님 말씀에는 따뜻하고 배려하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저에게 전해졌습니다.

 

교황님 말씀을 듣고 저는 5초에서 10초 동안 답변을 못 드렸습니다. 우느라고요. 교황님 사랑을 온 몸으로 느끼는 순간 하염없이 눈물만 떨어지는 겁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먼저 말씀드리고 울고 싶은데, 그냥 눈물이 수돗물처럼 눈에서 떨어지니 조금만 참아보자, 참아보자, 어금니를 깨물어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무슨 말을 하려는 제 모습을 바로 50센티 앞에 계신 교황님이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셨어요. 어찌 보면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교황님에게 세례를 받는 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고, 면전에서 그런 얘기를 꺼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얘기죠.


교황님이 세례를 주시겠다고 하신 그 순간

 

그런 꿈같은 얘기가 사실로 굳어지는 거예요. 제가 비록 억울하게 목숨 같은 막내아들이 희생되었지만, 이건 엄청난 일로 그 감동에 제 몸이 결정을 못할 때 전 눈물을 한없이 쏟아낸 것 같습니다. 눈물을 닦고 “감사합니다.” 말씀드리니, 바로 앞에 계셨던 교황님도 안보이고, 정제천 신부님도 안보였습니다. 그 곁의 추기경, 경호원, 수녀님, 그리고 행사를 진행하는 모든 분들이 순간적으로 안보이고, 그냥 눈앞이 하얀 현상에서 하늘 쳐다보는 그런 현상이 순간적으로 제 눈앞에 펼쳐졌어요. 그래서 그게 큰 충격인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은혜를 받아 보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눈앞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정신을 차리고 정신을 차릴 수도 없지만, 차릴 수 있을 때가지 세수도 해보고, 나와서 담배도 피워보고, 목숨 걸고 어느정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래가지고 하늘을 쳐다보는데, 세월호 희생자들이 전부 다 저를 보고 웃는 듯한 그런 모습을 ... 제 아들 모습도 보이고, 아들 친구들 모습도 보이고, 그 수백 명이나 되는 희생자들이 전부 다 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이 그 순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을 드릴 때, 되도록이면 제가 집중을 안 하고 살짝살짝 빗나가서 말씀을 드리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그런데 교황님과 관련된 말씀을 드리려고 하니, 집중하게 되고, 저도 모르게 그 때 느꼈던 감정들 되살아나서 말을 이어가기 어렵기는 한데, 여러분이 그런 건 양해해주시기 부탁드리고요.


세례식 에피소드

 

교황님 얘기 다하면서 오늘 발언 끝내려고 합니다.

모든 분들에게 말씀드렸지만, 세월호의 슬픈 얘기보다는 우리나라에 오셨던 교황님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의미에서 교황님 말씀을 여러분에게 올려드리는 게 더 값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제가 교황님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교황님은 제의실로 들어가고 월드컵 경기장 좌석에 앉아서 미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교황청 직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이름과 주민번호, 전화번호 물어가고, 그것이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정해진 시간은 일차적으로 새벽 2시였습니다. 그것은 교황님께서 방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고, 그래서 세례식을 할 수가 없고, 그랬다가 다시 한번 바뀝니다. 새벽 여섯시로.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교황님이 단 한사람에게 직접 세례를 내려주신 일은 2천년 가톨릭 역사상 제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교황님이 정제천 신부님에게 이걸 말씀하시고, 정 신부님이 우리말로 풀어서 저에게 말씀하신 사항입니다.

 

새벽 여섯시. 최종적으로 시간을 약속받고, 저는 집은 안산이고, 교황청 대사관은 서울에 있었습니다. 광화문 뒷 쪽에 있어요. 전 (900km 도보순례로) 먼 길 걸어 왔고,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잠을 잔다고 눈을 감았다면 전 약속시간에 못 지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화문 근처 여관 가서, 거기서 자고 이른 새벽에 바로 대사관 앞이니까 가면 되겠지 하고 있는데, 대사관에서 전화가 왔어요. 교황님 말씀은 상당히 영광된 자리이니, 남은 가족 분들 계신지 그분들도 이번 기회에 다 초대해주셨습니다.  그분들 같이 오셔도 된다. 몇 분이 더 오실 수 있나? 대사관 직원이 물어보셨어요. 


집에는 큰아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 이름과 주민번호를 불러달라고 해서, 대사관 근처에서 숙소를 잡으려고 하다가 다시 안산으로 내뺍니다. 큰 아들 데리러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고 하면, 자매님은 한복 이쁘게 꽃단장하고, 형제님은 정장을 입잖아요. 그런데 아들 옷이 없는 거예요. 부리나케 동현이 데리러 가서 있는 돈 없는 돈 옷 장만해서 그렇게 해서 시간을 보니, 설레는 마음 정신 못차리고 있다보니 12시가 넘어버린 거예요. 이제 6시간 지나면 교황님을 뵙게 되는 거였지요. 


새벽 2시에 나타난 시커먼 옷들의 정체


그래서 900km 걸었다고 해서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걸어갈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고, 그러다가 새벽 두시가 되었어요. ‘이제는 안 되겠다. 차라리 대사관 가까이 가서 기다리다 여섯시 되면 가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안산에서 택시를 탔더니, 그렇게 쏜살같이 광화문까지 가는 거예요. 시계를 보니 2시 반이 채 안된 겁니다. 막막한 거예요. 여관에 들어가자니 돈이 아깝고, 컴컴한 새벽에 있기도 뭐하고, 대사관 가까운 곳 내려달라고 얘기하고, 내렸는데, 제가 내렸던 곳에서 아무도 안보였는데, 택시 문을 열고 바깥에 내리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 여섯이 바람같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서 ‘누구 아니시냐?’고 묻기에 ‘맞다.’라고 했는데 그 순간 저는 이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우리 가정에 위해를 가하려는 건가?’라고 생각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교황청의 지시로 대기하던 경찰병력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세례를 받으려고 여기로 오니 오면 바로 대사관으로 연락해라.’라는 것이었죠.

 

교황님이 특별히 지휘계통으로 지시를 내린 듯 했습니다. 우리나라 경찰인데, 대사관의 지시를 받고 기다린 셈이지요. 그러더니 경찰 한 분이 “우린 경찰인데, 대사관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6시에 올 것인데 어떻게 2시 반에 와서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라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 같으면 잠이 오느냐? 집이 안산인대, 실수하면 안 되니 여기서 기다리려고 작정하고 왔다.” 그러자 여섯 명 중 팀장 쯤 되는 분이 껄껄 웃으며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니, 대사관에서 말씀하시길 그렇게도 자상하게 그 마음 이해한다고 하시면서, 그런데 ‘ 아직 새벽 날씨가 차갑고 그러니 대사관 안으로 모셔라. 그러면 우리가 교황님 오실 때까지 모시겠다.’ 그 사실을 경찰관이 저에게 전달하며 같이 가자고 하는 겁니다.

 

이 세상 최고로 맛있던 컵라면과 담배의 추억


그레서 제가 말씀드렸어요. “대사관에 가 있으면 제가 너무 긴장이 되어서 지금의 행복을 못 느낄 것 같고, 아직 더 느끼고 싶다. 요기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 사먹으며 기다리다가 5시 40분에 가겠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다시 대사관에 연락이 되어 제 의사를 전달하니, 그러면 그분들 뜻대로 하시라고 하고, 나머지 경찰 다섯 분은 제자리로 돌아가시고, 제가 컵라면을 먹는 뒤에 한 분이 서계시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담도 되고 컵라면 맛도 못 느끼니 나가 계셔 달라고 부탁을 하니 부담되고, 그 분이 웃으시며 가계셨습니다.


컵라면 먹고 담배도 피고 그런데 제가 18세부터 담배를 피웠던 거 같아요. 제가 세례 받을 때도 ‘원 오렌지’를 피웠는데, 그 맛이 지금까지 피운 담배 중에 아주 그렇게 좋았어요. 그래서 나중에도 라면 하나 먹고 담배를 피워보는데 그 맛이 안나요. 그 때는 붕 떠있는 기쁨에 담배 맛이 그렇게 나타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드디어 교황청 대사관에 들어서니

 

이제 시간이 되어 대사관에 들어갔습니다. 그 안의 성당으로 안내되어서 기도를 하고 있었어요. 사실 기도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눈 감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인기척이 느껴지는 거예요. 눈을 뜨고 뒤쪽을 보니 아주 하얀 옷자락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옷자락 따라 눈을 올리니. 교황님이 저를 보시고 환하게 웃고 있는 걸 보았어요. 제가 교황님 오시는 소리를 왜 못 들었냐면, 아마도 교황님이 실내화를 신고 계셔서 사뿐사뿐 걸어서 못 느낀 것 같아요. 저는 그 때 두 번째 만난 거죠. 교황님을 두 번째 알현한 겁니다. 교황님은 예전보다 훨씬 더 환한 눈길 속에는 얼굴이 까맣고 키가 작은 저에게, ‘엊그제 나한테 세례 달라고 한 그놈이냐?’라는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보시는 것 같은, 저를 아는 것 같은 그런 미소를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교황님 두 손을 잡고 제 볼에 비볐어요. 그리고 손등에 입을 맞추고 다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황님의 미소에 담긴 뜻 - 이제부터 다 너의 몫이다


교황님은 계속 미소만 짓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교황님이 정제천 신부님께 말씀을 해주시면 정제천 신부님이 제가 통역을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정 신부님은 저에게 세례를 주는 의미에 대해서 통역을 해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황님에게 세례 받는 것을 축하할 것이지만, 반면에 다른 많은 분들도 시기와 질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례가 끝난 뒤 그 몫은 다 너의 몫이다. 그리고 각별히 언행에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기에 정중히 ‘평생 가슴에 담고 살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세례의식은 50여분간 진행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사관 건물에는 제 큰 딸 아름이와 아들 동현이 이렇게 있었고, 아름이는 대사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교황님과 정신부님 그리고 대부 서시는 분 그렇게 있는 세례의식이었는데, 정말 정신이 없었죠. 그리고 다 끝나고, 세례의식이 다 끝나고 세례증서를 받아들었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교황님 성함이 인쇄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걸 딱 보는데 알 수 없는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렀고, 교황님과 사진도 찍고, 대사관 직원 분들과 사진도 찍고, 몇 번의 인사를 드리면서 저는 대사관 문을 하나하나 열면서 우리나라 땅으로 나가기 위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친절의 끝판왕 프란치스코 교황님


전방 20여 미터를 앞을 가면 있는 문하나. 그 문을 열고 나가면 광화문 바로 우리나라 땅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 문을 딱 열라고 하는데 누가 막 부르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한 토씨도 틀리지 않는 것이고요. 우리 교황님이 얼마나 자상하고 사랑하시는지 집중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 순간 제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저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그 때 저는 앞만 보고 갔는데, 교황님은 계속 뒤에서 저를 보고 계셨던 거에요. 제가 그걸 알았으면, 팔짱을 끼고 걸었을 텐데, 뒤돌아보니 바로 뒤에 계셨어요. 얼마나 감사하고 마지막까지 배려해주시는 은혜로움에 어찌할 바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말씀 드려야 하는 데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는 수백 번도 더 드린 것 같아 또 그런 말씀 드리는 것은 의미없는 것 같아서, 정신없는 와중에 제가 드린 말씀이 이랬습니다.

 

“교황님! 끝까지 건강하셔야 됩니다!”  ... 옆에 계신 정 신부님에게 통역을 해 달라고 부탁하니, 정 신부님이 그대로 통역을 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한 번 더 말씀드렸습니다.  “교황님 아프시지 마시고 끝까지 건강”하시라고요. 교황님이 정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교황님 키가 엄청 크거든요. 제가 키가 작아서 더 크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를 내려다보시고 환하게 웃으시는 거예요. 제대로 전달이 된 거 같아요. 처음으로 영어를 써주시면서 “탱큐”라고 하시는 겁니다. 교황님 손을 잡고, 지금 제가 교황님 손을 놓으면 어쩌면 내 생애 다시 손을 잡을 기회는 안 올 것이다는 생각에 쉽게 놓지 못하고 몇 초간 두 손을 잡고 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대사관을 나섰죠.

 

교황님 방한의 아쉬움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아쉬워하는 건 외국 가톨릭국가는 교황님 한번 방문하시면, 그 영광과 은혜로움으로 인해 무려 1년간 축제로 지낸다고도 해요. 가보진 않았지만, 그런데 우린 4박5일만 반짝하고, 건너가시자 마자, 교황님에 관한 여운이나 교황님이 계셨을 때의 그 분위기를 느끼기가 어렵고 힘든 분에게 주시고자 했던 사랑의 손길은 너무나 빨리 잊혀진 것 같아요

 

그게 개인적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적어도 한두 달은 교황님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그 축제의 기분을 충분히 느꼈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그런 부분이 아쉽다는 생각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했던 900km 도보순례길

 

저는 절체절명 순간에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주위본 상의해서 결정했으면, 어쩌면 저는 7월 8일 (900km 도보순례) 길에 나서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주위에서 말렸을 것입니다. 터질 것 같은 가슴으로 아무런 대책없이 큰 딸과 길을 나섰지만, 38일간의 순례길에서 많은 분들이 단 한번 안전사고 없이 부상없이, 발바닥 아픈 거 빼고는 무사히 아름답게 900km 순례길이 아름답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건 우리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하느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나! 그래서 부상 없이 아름답게 끝난 것이라는 걸 저는 이순간도 해봅니다.

 

만약 제가 아이잃은 슬픔을 단지 보여주려는 것으로만 움직였다면 진정한 순례길은 멈춰지고, 수많은 순례길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 잃은 슬픔은 세월호 304분 유족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사항입니다. 그 슬픔과 고통은 씻을 수 없는 한으로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구태여 이것을 여러분에게 ‘나누어주세요.’라는 부탁을 삼갑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 말씀을 다시 한번 꼭 드리고 싶어요.


세월호 희생자 304분 중 250여명의 어린 학생들이 어쩌면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손자였을 수도 있고, 여러분 딸일 수도, 아들일수도 있었다는 것 같은 말씀. 그리고 그 아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어떠한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아이들을 반드시 구했어야 된다는 점. 그 말씀 드리면서 긴 얘기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 2월 7일 토요일 밤 9:29분 종료

 


한 학생 질문. “혹시 학생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 있으신지요?”

이호진 프란치스코.  “특별히 따로 학생들이라고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단지 질문을 해주셨으니 한 말씀만 드린다면 십년 뒤 20년 뒤 혹은 30년 뒤, 이 나라 주인이 될 사람들,  다시 말해서 이 국가를 이끌어갈 사람들이에요.  지금 나의 나이 때에서 벌어지고 이뤄지는 일들이 앞으로 여러분에게는 크나큰 숙제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진 궁금증이나 생각들을 끝까지 변하지 않게 마음속에 간직하고 보존하면, 여러분 때는 좋은 세상이 오지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단원고 2학년 8반 故 이승현의 아빠 이호진 프란치스코 형제님 전민동성당 특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