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소식게시판 2013.7.31

기고자. 강우일 베드로 주교(제주교구장, 주교회의 의장)


<특별 기고>

땅은 누구의 것인가? 

- 그리스도인이 꿈에서 본 땅 -

  

1.

NLL(북방한계선) 때문에 온 나라가 한참 소란스러웠다. 국회에서는 백성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아픈 곳을 싸매주어야 할 민생 법안들이 잔뜩 쌓여있는데, 이 모든 일 제쳐놓고 NLL 붙잡고 공허한 입씨름을 계속하더니 국정조사까지 한다고 한다. 현 정권은 이미 고인이 된 대통령이 6년 전에 한 말마디를 끄집어내어, 나라의 영토를 포기하려 했다고 시비를 걸고 여론을 들끓게 하였다. 우리가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말마디 때문에 서로 이렇게 사생결단 싸워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땅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분쟁과 갈등을 일으켜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개인도 국가도 서로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많은 희생을 치러왔다. 독도를 둘러싼 우리나라와 일본의 갈등,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갈등 등, 땅 때문에 벌어지는 충돌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땅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바람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땅을 둘러싼 싸움과 갈등은 끊이지 않을 것 같다.

 

2. 

땅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중요한 자산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에도 땅 이야기가 거듭 나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낸 이다”(창세 15,7). 하느님의 이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2,500여 년 전에 잃었던 땅을 되찾으려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 땅에 되돌아가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이들 때문에, 그곳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졸지에 고향 땅을 빼앗기고 난민 신세가 되었다. 그 억울한 원한을 풀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오늘도 고향을 되찾겠다고 목숨 걸고 싸우고 있고 중동 전체가 그 땅 때문에 끊임없는 분쟁에 휘말리고 있다.

 

3. 

팔레스티나 땅의 주인은 누구일까? 팔레스티나 땅의 주인은 정말 이스라엘 백성일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이 땅을 주셨을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4. 

이 말씀을 잘 새겨들으면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복(福)’이지 땅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의 내용은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큰 민족이 되고 하느님의 복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땅 위의 모든 종족이 다 복을 받는 일이다. 


땅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안정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터전이지 땅 자체가 복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그 땅에서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으나 죽을 때까지 자신들이 묻힐 아주 작은 한 조각의 땅, 무덤밖에 얻지 못하였다.

 

5.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한 뒤 모세의 인도 아래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다가 여호수아의 인도로 겨우 팔레스티나 땅에 정착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이 약속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줄로 기대했으나 그곳에는 이미 여러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팔레스티나’라는 명칭은 히브리인들이 정착하기 200여 년 전부터 이미 북쪽에서 이주하여 온 필리스티아인의 땅이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히브리인들이 이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수많은 갈등과 전투를 거친 끝에 이스라엘 왕국(기원전 1050년경)을 세우는 데는 200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 왕국은 얼마 안 가서 남북으로 양분되었고, 기원전 722년에는 북쪽을 아시리아가 점령하였고 남쪽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 그 이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오스만 제국이 차례로 이 지역을 지배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부터 1948년까지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오늘날 이스라엘 새 정부가 다스리고 있기는 하지만, 팔레스티나의 긴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 땅이 유다인들만의 것이라고 단언하기가 쉽지 않다.

 

6. 

이러한 투쟁과 갈등의 역사는 비단 팔레스티나뿐만이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가 겪어온 비슷한 갈등의 내용이기도 하다. 인류는 땅을 차지하려고 헤아릴 수 없는 전쟁과 분쟁을 일으켰고, 참으로 많은 피를 흘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땅을 차지하려고 나치 독일과 일본이 온 세상을 전쟁터로 만든 비극이었고, 한국 전쟁도 베트남 전쟁도 모두 땅을 정복하려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땅에 대한 인류의 욕망은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르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신 것은 살아가는 터전을 마련해 주시겠다는 것이지 땅 자체에 대한 절대 소유권을 약속하신 것은 아니었다.

 

7.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나, 본처인 사라에게서 난 이사악을 강복하셨을 뿐 아니라 여종인 하가르에서 난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내려 그 자손이 크게 번성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의 후손도 본처에게서 난 이사악의 후손도 다 복을 누리게 되기를 원하셨다. 어느 한 쪽이 복을 독점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8. 

성경의 전통에서 땅은 본디 어떤 특정한 인간이 독점할 수 있는 소유가 아니다. 레위기에 보면 땅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 잠정적으로 인간에게 관리를 위탁한 하느님의 소유이지 인간이 이를 영구히 자기 것으로 만들 자격은 없다. 사정이 어려워서 땅을 남의 손에 넘겼다 하여도 희년이 되면 땅은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땅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 분의 일을 하느님께 바치라는 십일조의 규범도 땅에서 얻은 모든 복이 다 그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하느님에게서 받은 복에 감사하는 뜻으로 봉헌하라는 의미다. 일곱째 해에는 경작을 하지 말고 고아와 과부나 나그네들이 굶주림을 해결하도록 하라는 안식년 규범도 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서 힘없는 이들에게도 먹을 것을 나누기를 원하시니 아무도 땅의 권리를 독점하지 말라는 의미다.

 

9.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에게 여러 차례 땅을 주신다고 하셨으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땅의 소유 개념과는 다르다. 하느님께서 땅을 주시는 것은 그곳에서 살며 농사짓고 가축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신다는 의미이지 땅 자체를 소유물로 내어주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새로운 땅에 이를 때마다 그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제사 지내며 예배를 드렸다.

 

10. 

아브라함과 롯의 식솔들이 많아져서 함께 지내기가 곤란해지자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서로 떨어져 살기로 하였다. 롯이 먼저 요르단의 넓은 들판을 선택하고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가기로 하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 자,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고 가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여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창세 13,14-17). 


여기서 주님께서 땅을 주신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먹고살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다는 것이지 땅을 소유물로 주신 것은 아니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일생을 나그네살이를 했지 땅 주인이 되어 대지주 노릇을 한 적은 없다. 이는 이사악에게 내리신 주님의 말씀에서도 드러난다. 


“너는 이 땅에서 나그네살이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너에게 복을 내려주겠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고,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루어주겠다”(창세 26,3).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 땅을 주시고 복을 내려주시지만 그곳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라고 하신다.

 

11. 

야곱이 형 에사오의 분노를 피해 라반 삼촌 집에서 여러 해 일하고 재산을 일구자 라반의 아들들과 재산 분쟁이 생기고 야곱은 라반의 집을 떠나 다시 아버지 이사악 슬하에서 살던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조상들의 땅으로, 네 친족에게 돌아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창세 31,3). 여기서 조상들의 땅이란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살았던 가나안의 땅이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나그네로 몸 붙여 살았을 뿐이지 땅을 소유한 적은 없다. 


나중에 야곱이 요셉을 의지하여 이집트로 내려가서 파라오를 만나고 파라오가 그의 나이를 묻자 야곱은 이렇게 응답한다. “제가 나그네살이한 햇수는 백삼십 년입니다. 제가 산 햇수는 짧고 불행하였을 뿐 아니라 제 조상들이 나그네살이한 햇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창세 47,9).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 야곱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일생을 ‘나그네살이’로 인식한다. 나그네라는 자아 인식은 자신이 이 세상을 잠시 스쳐 지나치는 여행객임을 전제로 하는 표현이다.

 

12.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시 함께하는 인연이지 영구하고 절대적인 소유와 종속의 관계는 없음을 말한다.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께서 그들을 평생 나그네로 살도록 부르신 것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이 땅덩어리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그들을 땅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을 초월한 자유로운 삶,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존하는 믿음의 삶으로 초대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13.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더라도 땅이 제공하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그 땅을 제공해 주신 하느님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너희가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들을 짓고 살게 될 때, 또 너희 소 떼와 양 떼가 불어나고 너희에게 은과 금이 많이 생기며, 너희가 가진 모든 것이 불어날 때, 너희 마음이 교만해져,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 너희는 마음속으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산을 마련하였다.’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 만일 너희가 정녕 주 너희 하느님을 잊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경배한다면, 내가 오늘 분명히 경고하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야 말 것이다”(신명 8,12-19).

 

14. 

그러나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서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섬기기보다는 그 땅이 주는 소출과 부에 더 마음을 빼앗겼다. 이스라엘은 그 땅을 차지하고 정착하면서 일찍부터 그곳 땅을 일구어오던 농경민들의 관습과 그들이 섬기던 종교까지도 받아들이고, 그들의 사회적, 물질적 제도와 탐욕까지도 모두 넘겨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적인 우애와 연민이 넘치는 사회를 건설하기보다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괴롭혔던 착취와 수탈의 체제를 답습하여 동포의 땅을 빼앗고 재물을 축적하기에 급급하였다. 이스라엘 임금 아합과 그 왕비 이제벨이 나봇을 음모에 빠뜨리고 포도원을 강탈하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 말씀을 저버리는 타락의 길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1열왕 21,1-16 참조).

 

15. 

욥의 한탄에도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얼마나 탐욕과 타락의 길로 나아갔는지 짐작하게 하는 표현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경계선을 밀어내고 가축 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들의 나귀를 끌어가고 과부의 소를 담보로 잡는데. 가난한 이들을 길에서 내쫓으니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은 죄다 숨을 수밖에. 그들은 광야의 들나귀처럼 먹이를 찾아서 일하러 나가네. 그들에게는 사막이 자식들을 위한 양식이 있는 곳. 그들은 들에서 꼴을 거두어들이고 악인의 포도밭에서 남은 것을 따 들이네. 알몸으로 밤을 지새네, 옷도 없이, 추위에 덮을 것도 없이. 산의 폭우로 흠뻑 젖은 채 피할 데 없어 바위에 매달리네. 그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을 젖가슴에서 빼앗아가고 가련한 이가 위에 걸친 것을 담보로 잡는다네. 그들은 알몸으로 옷도 없이 돌아다니고 굶주린 채 곡식단을 나르며, 돌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고 목마른 채 포도확을 밟는다네. 성읍에서는 사람들이 신음하고 치명상을 입은 이들이 도움을 빌건만 하느님께서는 이 부당함에 관심도 두지 않으시는구려”(욥 24,2-12).

 

16. 

이스라엘의 이러한 방종과 배신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여러 예언자들을 보내시며 질책하시고 징벌을 경고하셨으나 이스라엘은 귀를 막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과 규정을 명심하여 실천하지 않으면, 이 모든 저주가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 소와 새끼 양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 너희가 밭에 씨를 많이 뿌려도 메뚜기가 그것을 먹어치워 버려서, 너희는 조금밖에 거두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어도 벌레가 그것을 먹어치워서, 너희는 포도주를 마시지도 못하고 저장하지도 못할 것이다. … 너희가 하늘의 별처럼 많다 하여도 적은 수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희가 잘되고 번성하게 하시기를 좋아하신 것처럼, 너희를 멸절시키고 멸망시키시기를 좋아하실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는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신명 28,15-63). 


땅은 결코 이스라엘의 절대 전유물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등을 돌리고 땅을 독점하려고 했을 때 이는 언제라도 다시 박탈당할 수 있는 덧없는 재산이었다.

 

17.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내리신 이러한 징벌의 경고와 저주는 영구적이거나 불변의 최종결정은 아니었다. 이는 옛날 이스라엘의 정화를 위해 광야에서 통과해야 했던 시련의 여정과 같은 것이었다. 이 시련의 여정이 끝나갈 무렵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번에는 저주받은 백성에게 희망의 소식을 전하게 하신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를 하늘 아래 사방으로 흩어버렸지만 너희는 어서어서 그 북녘땅에서 도망쳐 나와라. 주님의 말씀이다. 딸 바빌론과 함께 살고 있는 백성아, 어서 시온으로 빠져나와라. …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때에 너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되리라.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당신 몫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즈카 2,10-16).

 

18. 

땅이 펼쳐놓는 유혹으로 땅을 빼앗겼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땅, 거룩한 땅을 약속하셨고 이 새로운 땅에서는 약탈과 갈등이 사라지고 모든 민족이 하나가 되어 주님을 섬기며 한 무리가 될 것임을 알려주셨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이사 65,17.25).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그들도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주님에게 올리는 제물로 말과 수레와 마차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리라”(이사 66,18.20).


예언서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와 전망을 제시한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집착하던 약속의 땅은 팔레스티나의 한 땅덩어리를 초월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종말론적인 땅으로 탈바꿈되어야 함을 예언자들은 제시한다.

 

19.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자들의 땅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인식을 결정적으로 완성하시고 당신의 메시아적 사명 안에는 땅이 갖는 자리는 없음을 명백히 드러내 주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하시며 당신은 현실 속의 땅과는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사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당신 가르침을 전하시는 첫 외침에서 ‘복’을 외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외치신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오히려 불행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3-5).

 

20. 

예수님께서 다가가시고 행복하다고 선언하신 사람들은 주로 가난하고, 슬픔에 잠겨있고, 힘도 배경도 없어 자꾸 뒤로 밀리기만 하지만 너무 온유해서 항변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다. 나병환자들, 중풍병자들, 거리의 여인들, 세리들, 절름발이, 맹인, 농아, 불치병자들, 노동자들, 세상에서는 지지리도 복이 없는 사람으로 자타가 인식하던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행복하다고 선언하셨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에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보살핌과 위로를 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백성이 그토록 매달리고 되찾으려고 했던 땅을 ‘하늘나라,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왕국’으로 대체하신다. 여기서 하늘은 땅의 것들과는 크게 대비된다.

 

21. 

그리하여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땅과의 인연을 끊고 이 땅을 초월하는 새로운 땅을 추구하도록 가르치고 경고하신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마태 6,19).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땅)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 제자들이 근원적으로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가르치셨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살지만, 땅에서 분리되어, 거룩한 하느님의 땅으로 도약하여야 할 존재였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들일 것이다”(요한 12,32). 


예수님을 따르던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예수님의 자의식과 세계관을 이어받아 “사실 땅 위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습니다.”(히브 13,14) 하고 고백하였다.

 

22. 

2005년 7월 15일 행정자치부는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토지소유 분포 통계를 공식 발표했다. 토지소유의 편중도가 대단히 높게 나타났다. 편중도는 사유지 중 개인 소유 토지를 대상으로 계산됐는데, 2004년 말 현재 면적 기준으로 총인구의 상위 1%가 51.5%(가액 기준으로는 37.8%)를, 상위 5%가 82.7%(가액 기준으로는 67.9%)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상위 100명의 땅부자들이 1인당 평균 115만 3,000평(가액으로는 평균 510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한 사람이 평균적으로 여의도 면적의 0.45배에 해당하는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왜 토지소유의 편중도가 이렇게 높아졌을까? 


그것은 토지소유가 가져다주는 높은 수익성, 곧 토지 불로소득 때문이다. 토지를 사서 일정 기간 동안 팔지 않고 버티기만 해도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부동산 불패의 신화가 만들어졌다(출처: 프레시안 2005.7.16.).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이 신화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지속되던 부동산 신화를 철석같이 믿고 대출까지 받아 투자하다가 ‘하우스 푸어’로 전락한 이들이 200만 가구나 된다고 한다. 소득 양극화에 가속이 붙은 모습이다. 


불평등이 심화되면 그 사회는 균형을 잃고,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이들이 폭력과 약탈을 감행하고, 붕괴가 시작된다. 사회가 붕괴되면 아무리 부를 많이 축적한 사람도 공멸할 뿐이다. 이제 백성들도 지도자들도 땅에 대한 잘못된 환상과 집착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땅은 우상이다.

 

23. 

우리나라 도시 야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사방에 빨간 십자가가 즐비하게 흩어져 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해 보면 사방에, 도대체 저 정도면 건축비가 얼마나 들었을까 싶을 정도의 웅장하고 거대한 교회 건축물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사회의 건축물들이 멋스러워지고 화려해지는 데 비례하여 천주교 성당도, 교육관도, 사제관도 따라서 커지고 화려해진다. 


교우가 늘어나니 어쩔 수 없이 본당도 새롭게 세우게 된다 하여도 교회도 땅을 늘려가고, 부동산을 증식해 가는 경쟁 대열에 합류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제들의 거룩한 사목적 열정을 땅 사고 건물 짓는 데 다 낭비하고 탈진해 버린다면 그것은 우리 주교들이 감독직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든다. 


이스라엘은 몇십 년씩 걸려서 건설한 거대한 예루살렘 석조 성전보다 광야의 보잘것없는 먼지투성이 천막 앞에 엎드렸을 때 훨씬 더 하느님을 전심전력으로 섬기고 예배하였다. 땅도, 거기에 사람이 손으로 지어 올린 건물도 우상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은 인간의 손으로 새긴 우상과는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더 놀랍고도 숨 막히는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이다. +



Posted by 대전정평위뉴스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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