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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와 문헌/교황과 주교

[20110101] 세계평화의 날 베네딕토 16세 교황 담화문 '종교 자유, 평화의 길'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0.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제44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

(2011년 1월 1일)


종교 자유, 평화의 길 


1. 

새해의 시작을 맞아, 여러분 모두에게 안정과 번영, 특히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슬프게도 지난 한해는 박해와 차별, 그리고 폭력과 종교적 불용의 잔혹한 행위들로 얼룩졌습니다. 


저는 특히 소중한 나라인 이라크를 생각합니다. 이라크는 안정과 화해의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폭력과 갈등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겪고 있는 고통들과 특히 2010년 10월 31일 시리아 예법 천주교회인 바그다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주교좌 성당에 가해진 잔인무도한 공격으로 당시 미사 거행을 위하여 모인 사제 2명과 신자 50여 명이 사망한 참사가 생각납니다. 그 이후에도 심지어 민가에 대한 공격들이 잇따라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두려움이 확산되고 많은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하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와 온 교회가 언제나 그들 곁에 함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최근 중동 주교대의원회 특별 총회가 이라크와 중동 전역의 가톨릭 공동체들이 일치하여 살며 그들의 땅에서 계속 용기 있게 신앙을 증언하도록 격려하였을 때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인류 가족 안에서 우리 형제자매들인 이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는 정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폭력과 불용의 희생자인 신앙의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도와주도록 당부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저는 평화의 길인 종교 자유에 대하여 함께 묵상해 보는 것이 특별히 적절하다고 여깁니다. 세상의 어떤 지역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목숨을 내걸지 않는 한 자신의 종교를 자유롭게 고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또 일부 지역에서는 종교인들과 종교적 상징들에 대한, 더욱 드러나지 않고 교묘한 형태의 편견과 적의가 보입니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때문에 가장 심하게 박해 받고 있는 종교 집단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종교 자유를 간절히 호소한다는 이유로 날마다 상처 받고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황은 하느님과 인간 존엄에 대한 모욕이므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안전과 평화에 대한 위협이고 참되고 온전한 인간 발전을 성취하는 데에는 걸림돌이 됩니다.* 

*베네딕토 16세, 회칙「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 29.55-57항 참조.


종교 자유는 인간만이 지닌 고유성을 표현합니다. 종교 자유는 우리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이 하느님을 지향할 수 있게 해 주고, 우리는 하느님의 빛으로 인간의 신원과 의미와 목적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를 부인하거나 독단적으로 규제하면 왜곡된 인간관을 조장하게 됩니다. 종교의 공적 역할을 없애 버린다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고려하지 않는 불의한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 가족 전체 안에서 지속적인 참 평화가 자라나지 못하게 억누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모든 이가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나 신앙을 고백하는 세상,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마태 22,37 참조) 그러한 세상을 건설하는 데에 선의의 모든 사람이 새로운 마음으로 헌신하여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러한 뜻에서 이 제44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는 “종교 자유, 평화의 길”란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신성한 생명권과 영적인 삶의 권리

2.

종교 자유의 권리는 인간의 존엄성 그 자체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인간 존엄성」(Dignitatis Humanae), 2항 참조.)

인간의 초월적 본성은 무시되거나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비슷하게 당신 모습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창세 1,27 참조).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저마다 영적인 관점에서도 충만한 생명을 누릴 신성한 권리를 부여 받았습니다. 자신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초월자에게 열려 있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안으로 침잠하여 인생의 의미에 대한 마음속 가장 깊은 물음들에 해답을 찾지 못하고 항구한 도덕 가치들과 원칙들을 갖추지 못하며 심지어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거나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지도 못합니다.* (「진리 안의 사랑」, 78항 참조.)


성경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인간 존엄의 깊은 가치를 드러냅니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으로 빚으신 하늘하며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바라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시편 8,4-7).


인간 본성의 고귀한 실체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시편 저자가 느낀 것과 같은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신비를 향하여 열려 있고, 우리 자신과 세상의 기원에 대하여 깊은 질문을 할 능력이 있으며, 만물과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들의 시작이시고 마침이신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이 깊이 울려 퍼지는 메아리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 1항 참조.)


인간의 초월적 존엄은 유다-그리스도교 지혜의 근본 가치이기도 하지만, 이성의 사용 덕분에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물질적인 한계를 초월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능력으로 이해되는 이 존엄은 인간 완성을 지향하는 사회 건설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보편적 선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생명권, 종교 자유의 권리와 같은 인간 존엄의 본질적 요소들에 대한 존중은 모든 사회 규범과 법규범의 도덕적 정통성을 위한 조건입니다. 


종교 자유와 상호 존중

3. 

종교 자유는 도덕적 자유의 근원입니다. 진리와 완전한 선에 대한 개방성, 곧 하느님에 대한 개방성은 인간 본성에 뿌리박혀 있습니다. 이는 개개인에게 완전한 존엄을 부여하고 사람들 사이에 온전한 상호 존중을 보장합니다. 종교 자유는 단지 강요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진리에 부합하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자유와 존중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개인이든 사회 단체든 자기 권리를 행사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다른 사람에 대한 자기 의무, 그리고 모든 이의 공동선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도덕률을 지켜야 합니다.” *(종교 자유 선언, 7항.)


하느님께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자유는 결국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온전히 존중하지 못하게 됩니다. 스스로 자신이 전혀 진리와 선을 추구할 수 없다고 믿는 의지는, 일시적이고 부차적인 이익을 제외하고는, 행동의 객관적인 근거나 동기를 갖지 못합니다. 또한 이러한 의지는 참으로 자유롭고 의식적인 결정을 통하여 수호하고 정립하여야 할 ‘정체성’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러한 의지는 다른 ‘의지들’에게 인정받기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의지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또 다른 ‘이치들’을 또는 오히려 차라리 '이치'의 부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상대주의가 평화적 공존을 위한 열쇠를 제공한다는 환상은 실제로 분열을 자아내고 인간 존엄을 부정하는 원인입니다. 따라서 단일한 인간 안에 종교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이라는 이중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종교인들이 적극적인 시민이 되려고 자신의 일부인 자기 신앙을 숨겨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누리고자 하느님을 거부할 필요는 결코 없어야 합니다.”* ( 베네딕토 16세, 유엔 정기 총회에 한 연설, 2008.4.18., AAS 100(2008), 337.)



자유와 평화의 학교인 가정

4. 

종교 자유가 평화를 향한 길이라면, 종교 교육은 새로운 세대들이 다른 이들을 자기 형제자매로 여기도록 이끄는 지름길입니다. 그들은 이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아가고 협력하여 모든 이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 인류 가족의 살아 있는 구성원이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긴밀한 결합과 상호 보완성을 보여주는 혼인을 바탕으로 하는 가정은 자녀들의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영적 교육과 성장을 위한 최초의 학교가 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진리 추구와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는 삶의 첫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언제나 자녀들에게 자신의 신앙과 가치와 문화의 유산을  책임감 있게 또 아무런 주저없이 자유롭게 전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 사회의 첫 세포인 가정은 모든 인간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의 공존에서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게 하는 최초의 훈련장입니다. 지혜는 이것이 강한 형제애가 넘치는 사회적 구조를 건설하는 길이라고 알려줍니다. 그 길에서 젊은이들은 자유로운 사회 안에서 이해와 평화의 정신으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도록 준비할 수 있습니다.


공동 유산

5.  

인간 존엄에 근거한 기본 권리들과 자유들 가운데에 종교 자유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 자유가 인정될 때, 인간 존엄은 근본적으로 존중받고 민족들의 정신과 제도가 강화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종교 자유가 부인될 때마다 그리고 자기의 종교나 신앙을 고백하며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인간 존엄이 손상되고, 그 결과로 정의와 평화가 위협받습니다. 이 정의와 평화는 지고한 진리이시며 선이신 분의 빛으로 세워진 올바른 사회 질서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 자유는 건전한 정치 문화와 법률 문화가 이룬 업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필수적인 선입니다. 각 사람은 개인으로나 공동체로나, 공공장소에서나 사적인 곳에서나, 가르침으로, 행동으로, 출판물로, 예배로, 전례 의식으로, 자신의 종교나 신앙을 고백하고 천명할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개인이 궁극적으로 다른 종교를 선택하거나 종교를 가지지 않으려 해도 아무런 장애가 없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으로, 국제법은 공공질서의 정당한 요건이 충족되는 한 종교 자유에 대한 어떠한 훼손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면에서 각국에 대한 모델이자 필수적인 기준점이 됩니다.* (종교 자유 선언, 2항 참조.)

 

국제 질서는 이렇게 종교적 성격의 권리들이 생명권과 개인의 자유권과 동등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 권리들이 인권의 핵심에, 곧 인간의 법으로 결코 부인될 수 없는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권리들에 속한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종교 자유는 종교인들만의 배타적인 유산이 아니라 지구촌 가족 전체의 유산입니다. 이는 법치 국가의 필수적 요소입니다. 종교 자유가 부인되면 모든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가 침해됩니다. 종교 자유가 그 종합이며 중추이기 때문입니다. 종교 자유는 “모든 다른 인권을 존중하기 위한 시금석”입니다. * ( 요한 바오로 2세, 유럽안보협력회의 참석자들에게 한 연설, 2003.10.10., 1항, AAS 96(2004), 111.)

종교 자유는 인간만이 지닌 능력의 발휘를 돕는 동시에 모든 차원의 인간 전체와 관련된 온전한 인간 발전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전제 조건들을 마련해 줍니다.* (「진리 안의 사랑」, 11항 참조.)

 


종교의 공적 차원

6.

종교 자유는 모든 자유와 마찬가지로 개인 영역에서 시작하여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를 통하여 성취됩니다. 관계가 배제된 자유는 온전한 자유가 아닙니다. 종교 자유는 개인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관계적 본질과 종교의 공적 특성에 따라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성취됩니다. 


관계성은 종교 자유의 결정적인 구성 요소로, 종교인 공동체가 공동선을 위한 연대를 실천하도록 재촉합니다. 개인은 이러한 공동체 차원에서 자신을 완성하고 온전히 실현하면서도, 동시에 유일무이하고 되풀이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종교 공동체의 사회 공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자선 단체들과 문화 단체들은 종교인들이 사회 생활에서 수행하는 건설적인 역할을 입증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치 분야에 대한 종교의 윤리적 기여입니다. 종교는 배척되거나 금지될 것이 아니라 공동선 증진에 효과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다고 여겨져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의 사회적, 특히 윤리적 기여를 통하여 수세기에 걸쳐 형성된 문화의 종교적 차원을 언급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 차원은 믿음을 함께 하지 않는 이들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결속과 통합과 연대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자유와 문명화를 위한
힘인 종교 자유, 그리고 그 악용이 가져오는 위험들

7.

기존 질서의 전복이나 단일 집단의 자원 축적, 또는 권력 장악과 같은 숨은 사리사욕을 감추기 위하여 종교 자유를 악용한다면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광신주의, 근본주의, 인간 존엄을 거스르는 행위들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지만, 심지어 종교를 내세운다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신앙 고백은 악용되거나 힘으로 강요될 수 없습니다. 여러 국가와 인간 공동체들은 종교 자유가 진리 추구를 위한 조건이며 진리는 폭력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의 힘으로” 종교 자유 선언, 1항 참조.

 드러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는 문명화된 정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긍정적인 추진력입니다. 


세상의 주요 종교들이 문명의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것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한 하느님 추구는 인간 존엄을 더욱 존중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그들의 유산인 가치들과 원칙들을 통하여 개인과 민족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존엄을 깨닫고 민주적 제도들을 건설하고 인간의 권리와 이에 따른 의무를 인식하도록 많은 기여를 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점점 더 세계화되는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경제, 정치 생활에 책임감 있게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증언을 통하여 정의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인간사의 올바른 질서를 추구하는 수고롭지만 고무적인 일에 소중한 기여를 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공공 생활에서 종교를 배제하면 초월을 향해 열린 이 두 번째 차원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러한 근원적 체험이 없으면 사회를 보편적 윤리 원칙들로 이끌기 어렵고,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온전히 인식하고 존중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권리와 자유는 1948년 세계 인권 선언의 목표들 안에 제시되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무시되거나 부인되고 있습니다. 


정의와 시민 의식의 문제:
종교인들에 대한 적의와 근본주의는 국가의 긍정적인 세속성을 위태롭게 한다

8.

온갖 형태의 광신주의와 종교 근본주의를 단죄할 때와 마찬가지의 단호함으로, 시민 생활과 정치 생활에서 종교인들의 공적 역할을 제한시키고자 하는, 종교에 대한 온갖 형태의 적의에도 맞서야 합니다. 


종교 근본주의와 세속주의는 둘 다 정당한 다원주의와 세속성의 원칙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형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합니다. 한쪽은 일종의 종교 통합주의를 또 다른 한쪽은 일종의 합리주의를 선호하지만 양쪽 다 왜곡되고 편파적인 인간관을 절대시합니다. 폭력으로 종교를 강요하거나 반대로 종교를 거부하는 사회는 하느님과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그 사회 자체에도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계획으로 인류를 부르십니다. 자연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전 인간을 포괄하는 이 사랑의 계획은 개인이든 공동체든 온 마음과 전 존재를 다한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응답을 요청합니다. 개인과 그 개인을 구성하는 모든 차원을 표현하는 사회 역시 초월에 대한 개방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조직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사회의 법과 제도들은 시민들의 종교적 차원을 무시하거나 완전히 배제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고결한 소명을 알고 있는 시민들의 민주적 활동을 통하여 그러한 법과 제도들은 인간의 참 본성을 적절히 반영하고 그 종교적 차원을 뒷받침하여야 합니다. 이는 국가의 창조물이 아니기에 국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인정하고 존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국가적이거나 국제적인 차원의 법체계가 종교적이든 반종교적이든 광신주의를 허용하거나 용인한다면, 그것은 정의와 모든 이의 권리를 보호하고 촉진하여야 할 스스로의 사명에 위배됩니다. 이 문제들은 입법자나 다수의 재량에 맡겨 둘 수 없습니다. 키케로가 지적한 대로, 정의란 법을 만들고 적용하는 단순한 행위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개인의 존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키케로, De Inventione, II, 160 참조.)

종교 자유가 보장되고 충실히 실천되지 않으면 결국 인간의 존엄은 축소되고 훼손되어, 우상들의 지배, 절대화된 상대적 선들의 지배 아래 떨어지게 될 위험에 놓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회를 각종 정치적 이념적 전체주의의 위험에 노출시킵니다. 이러한 형태의 전체주의는 공권력을 강조하는 반면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마치 잠재적인 정적인 것처럼 비하하고 규제합니다.


국가 기관과 종교 기관의 대화

9.

참다운 종교성이 표현하는 원칙과 가치의 유산은 민족들과 그들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 주는 원천입니다. 이 유산은 인간의 양심과 이성에 직접 호소하여 도덕적 회개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덕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을 커다란 인류 가족에 속하는 형제자매로 여기며 그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갈 것을 촉구합니다.* (베네딕토 16세, 영국의 타종교 대표들에게 한 연설, 2010.9.17.「로세르바토레로마노」,(L'Osservatore Romano) 2010.9.18., 12면 참조.)

국가 제도의 긍정적인 세속성을 마땅히 존중하는 가운데에서도 종교의 공적 차원은 언제나 인정되어야 합니다. 국가 기관과 종교 기관의 건전한 대화는 인간과 사회적 조화의 온전한 발전을 위한 근간입니다.


사랑과 진리 안의 삶

10.

점점 증가하는 다민족과 다종교 사회를 특징으로 하는 세계화된 세상에서 주요 종교들은 인류 가족의 일치와 평화를 위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주요 종교의 신봉자들은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합리적인 공동선의 추구를 바탕으로 종교 자유의 분야에서 책임감 있는 표현을 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종교 문화 안에서는 인간의 존엄을 거스르는 것은 무엇이든 배격하면서 문명적인 공존을 강화하는 요소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제 공동체가 종교들을 위한 공적 공간을 마련하여 주어 거기에서 종교들이 ‘바람직한 삶’에 대하여 제안할 수 있도록 하면 진리와 선에 관한 공통 척도와 도덕적 합의를 마련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존에 근본이 됩니다. 주요 종교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지위와 영향력과 권위를 지녔으니 솔선하여 상호 존중과 대화에 나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교회에서 만나는 이들을 형제자매로 여기고 살아가면서 하나의 세상을 만드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 세상에서는 개인과 민족들이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 11,9 참조).


공동 노력인 대화

11. 

서로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이 나누는 대화는 교회가 공동선을 위하여 모든 종교 공동체들과 협력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교회 자신은 모든 종교의 옳고 거룩한 것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활 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습니다.”*(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상대주의나 종교 혼합주의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실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또 끊임없이 선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한 14,6)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은 풍요로운 종교 생활을 합니다.” * (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

그러나 이것이 삶의 다른 분야에서 대화와 진리의 공동 추구를 배척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말씀하신 대로 “누가 말하든 모든 진리는 성령에서 나오는 것이기”*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강해, I,3.)

2011년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1986년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평화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을 개최하신 지 2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날에 세계 주요 종교의 지도자들은 종교가 분열과 갈등이 아니라 일치와 평화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이 체험에 대한 기억은 모든 종교인들이 자신을 정의와 평화의 일꾼으로 여기고 실제로 그렇게 일하는 미래를 희망할 수 있는 이유를 부여합니다.


정치와 외교의 도덕적 진리

12. 

정치와 외교는 세계 주요 종교의 도덕적 정신적 유산을 존중하여 인간의 존엄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부인할 수 없는 보편 진리, 원칙, 가치들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말해서 정치와 외교 분야에서 도덕적 진리를 촉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는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온전한 지식을 바탕으로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평화, 발전, 인권을 명분으로 거짓 가치들을 조장하기 위하여 진리와 인간 존엄을 말살하는 정치 이념의 해체를 의미합니다. 이는 실정법을 자연법의 기초 위에 세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네딕토 16세, 사이프러스 국가 당국자들과 외교관들에 대해 한 연설, 2010.6.4,「로세르바토레로마노」, 2010.6.6., 8면; 국제신학위원회, 󰡔보편 윤리의 탐색: 자연법에 대한 새로운 관점󰡕, 바티칸시국, 2009 참조)

이 모든 것은 세계 모든 국가들이 1945년 '국제연합헌장'에서 확인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존중을 위하여 한결같이 있어야 할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 헌장은 보편적인 가치와 도덕 원리를 국가적 국제적 차원의 공존을 위한 규범과 제도와 체제의 기준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증오와 편견을 넘어

13.  

역사의 교훈과, 여러 국가의 노력, 국제 기구, 지역 기구, 비정부 기구들의 노력, 날마다 인간 기본권과 자유를 수호하고자 힘쓰는 선의를 지닌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상은 종교에 기초한 박해, 차별, 폭력과 불용의 행위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주요 희생자는 소수 종교의 구성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자유롭게 고백할 수 없고 종교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종교 때문에 온갖 협박을 당하고 그들의 권리와 근본 자유와 필수 재화를 빼앗기고 나아가 개인의 자유와 생명까지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종교에 대한 매우 교묘한 형태의 적대 행위도 있습니다. 이는 서구 국가에서 때때로 역사를 부인하고 대다수 국민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반영하는 종교적 상징을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적대 행위는 흔히 증오와 편견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이는 다원주의의 건전하고 균형 잡힌 시각과 제도의 세속성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가 그들 국가의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접할 수 없는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종교 공동체의 권리와 자유 수호를 통하여 종교가 수호됩니다. 그러므로 세계 주요 종교의 지도자들과 국가 지도자들은 종교 자유를 촉진하고 수호하기 위한, 특히 종교적 소수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종교 소수자들은 다수자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화와 문화적인 상호 증진의 기회를 보여 줍니다. 그들을 보호하는 일은 세계 모든 지역의 근본적인 권리와 자유의 수호를 보장하는 선의, 개방성, 상호성의 정신을 강화하는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세계의 종교 자유

14. 

끝으로 저는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축복하신 성지에서 박해, 차별, 폭력, 불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게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어버이다운 저의 사랑과 기도를 약속해 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당국자들에게 촉구합니다.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여 그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온갖 불의를 종식시키십시오. 지금 어려움에 부딪치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반대 받는 표적이 되는 일이며 언제까지라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봅시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4-12). 그러고 나서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청원하면서 우리도 용서하고 관대해질 것이라고 한 다짐을” 새롭게 합시다. “우리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라고 기도하면서 우리가 청하는 자비의 조건과 범위를 정해놓았습니다.” 바오로 6세, 1976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AAS 67(1975), 671.

 폭력은 폭력으로 극복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고통스런 외침에 언제나 신앙과 희망과 하느님 사랑의 증언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또한 서양에서 특히 유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나오는 가치와 원칙에 따라 살겠다고 하여 적대와 편견의 대상이 되는 일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유럽이 자신의 그리스도교 뿌리와 화해하기를 바랍니다. 그 뿌리는 역사 안에서 유럽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할을 이해하는 토대입니다. 이렇게 하여 유럽은 모든 민족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정의와 화합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종교 자유는 평화의 길 

15. .

세상은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에는 보편적이고 공통된 윤리적 정신적 가치가 필요합니다.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 질서의 건설에 종교가 귀중한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결코 완전히 끝나지 않는 과제입니다. 하느님과 화해를 이룬 사회는 평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도 아니고 군사적 경제적 패권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기만적 계략이나 간교한 조작의 결과는 더욱 아닙니다. 그보다 평화는 모든 개인과 민족들이 참여하는 정화의 과정과 문화적 도덕적 정신적 고양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결과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 존엄이 온전하게 보장됩니다. 저는 모든 평화의 일꾼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그들의 마음 안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초대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참다운 자유와 무한한 힘을 얻는 든든한 준거를 찾기 바랍니다. 이 준거는 세상에 새로운 방향과 정신을 불어넣고 과거의 잘못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선견지명으로 세계 평화의 날을 제정하신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무기 - 인류를 죽이고 전멸시키는 것과는 다른 무기로 평화를 이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도덕적 무기입니다. 이는 국제법에 힘과 권위를 주는 무기입니다. 이 무기는 우선 조약의 준수입니다.” 1976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AAS 67(1975), 668.

 종교 자유는 평화의 참된 무기로서 역사적 예언적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종교 자유는 인간의 가장 심오한 역량과 잠재력이 완전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이 역량은 세상을 바꿀 수 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종교 자유는 심각한 불의와 물질적 도덕적 빈곤에 직면해서도 정의와 평화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줍니다. 지상의 모든 지역 모든 계층에 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회가 하루빨리 평화의 길인 종교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2010년 12월 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Benedict XVI for the Celebration of the World Day of Peace 2011, Religious Freedom, the Path to Peace, 201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