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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20150917] 김유정 신부의 사회교리의 신앙적 토대(전민동 사회교리 2강)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5. 9. 20.


사회교리의 신앙적 토대 (요약)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김유정 신부님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총무)

2015-9-17(목) 성당2층 성전(저녁 8시~10시)





인사말과 사회교리에 대한 소개


저는 어제 (대전교구) 천안-아산 지구 사회교리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왔습니다. 아산 배방성당에서 약 50여명이 사회교리 강의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곳 전민동 성당에서는 여태까지 사회교리 학교를 개최한 중에 가장 많은 분들이 참석하셨습니다. 이 수많은 분들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려는 수많은 분들의 마음과 더불어 존경하는 방경석 신부님께서 많이 강조를 해주셔서 많은 분들이 수강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 9/17 현재, 수강생은 약 250명 정도로, 전민동 신자 약 190명과 타 본당 약 60명이다.)


사회교리는 교황님께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가톨릭교회가 강조하고 있고, 성령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교리를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많은 관심을 보여주신 여러분과 방경석 신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시작하는 이야기.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교리 공부를 하시던 중의 어떤 할머니에게 한 성직자가 묻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우리 오빱니다."


정확하게 답하자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할머니는 '오빠'라고 답했을까요.

할머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하느님 보고 아버지라고 하고, 나도 하느님 보고 아버님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오빠가 아닙니까?"


여기서 질문의 핵심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오빠라고 부른 할머니는 맞았을까요, 틀렸을까요? 우리가 궁금할 때면, 해답은 늘 예수님에게서 찾으면 됩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요한 20,17)


할머니의 대답은 맞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형제’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부터 12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히브 2,11~12)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바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가장 가르쳐주시고 싶으신 것은 "하느님은 너희를 사랑하시는 아버님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형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바치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혼자 기도를 바쳐도,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의 대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의 기도를 왜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냐면, 주님께서 바치신 기도이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바칠 때 이 기도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가와 감히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은총인가를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런데 여러번 하다보면, 우리는 립서비스, 입술 봉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저씨의 나라가 오시며 아저씨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라고 해도 ‘아버지’라고 부르나, ‘아저씨’라고 부르나 별다른 느낌의 차이없이 바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5장 8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마태 15,8) 



유혹에 넘어가는 방식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할 때, 뒤로 잡아끄는 유혹이 많습니다. 고해성사를 받고 이제 깨끗하게 살려고 집에 가는 순간 어지러진 집안에 눈에 갑자기 확 들어오고 오늘부터 남을 미워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는 순간, 내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바로 그 사람이 저쪽에서 걸어나옵니다. 저에게도 유혹이 왔습니다. 40일 피정 때였습니다. 신부가 되는 데 신자가 아니었던 아버님의 반대가 심했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우여곡절 끝에 아버님이 세례를 받이시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보았지만, 어떤 한 순간에 마음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이 한꺼번에 올라오니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아마 제 마음에 "하느님도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내가 하느님을 실망시켜드리고, 하느님 성에 차지 않으면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오늘부터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혹시 이런 분이 아니셨을까를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부가 되는 게 하느님의 뜻이었을까에 대한 의심이 들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저를 '아들'이라고 불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러던 중에 피정을 지도하는 분이 주시는 그 날의 성경말씀이 마태오 복음 17장 5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를 데리고, 높은 곳에 오르셨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하늘에서 빛나는 구름이 일더니 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 17,5)


저는 단지, '아들'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는데, '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란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를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랑받는 아들이다. 너희들은 사랑을 덜 받는 아들이다." 그것을 자랑하러 오신 게 아니라 '내가 아들인 것처럼, 너희도 아들 딸들이다.'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겁니다. 



돌아온 탕자를 대하는 아버지의 방식


루카복음 15장에 보면, 둘째 아들이 살아계신 아버지한테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몫을 챙겨서 먼 곳으로 떠났다가, 거기서 다 탕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웁니다. 아무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돼지는 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 부정한 짐승도 먹을 게 있는데, 먹을 게 없어서 굶어죽게 생겼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에는 그 많은 품꾼들이 먹고도 음식이 남아도는데, 난 여기서 굶어죽게 생겼구나. 아버지께 가서 말씀드리자." 이런 생각을 하고,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루카 15,18~19)



아버지는 기다리셨다


이렇게 말씀드려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께서 멀리서 보십니다. 왜 멀리서 보셨습니까? 기다리신 겁니다. 달려나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준비한 멘트를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입을 맞춰서요. 입을 맞추고 난 다음에야 작은아들은 그 말씀을 드린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가락지 가져오고, "우리 아들이 살아왔다. 죽었던 아들이 찾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되찾았다."하면서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요? 작은 아들은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나라는 걸 깨달아서 온 게 아닙니다.나 굶어죽게 생겼구나. 밥 먹으러 가자. 그런 비참한 자신의 처지가 돌아온 동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변한 게 아닙니다. 속썩히는 아들이라도 여전히 사랑하셨고,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내 처지가 어떠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 딸, 하느님 마음에 듣는 아들 딸들이란 사실은 지금의 내 처지가 어떠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힘입어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지,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간 다음에 하느님이 이 말씀을 해주신 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어디까지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딸인가?


우리들은 모두 하느님 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들입니다. 집에 있는 우리 아이들은 단지 우리 아이들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집에 있는 내 남편도 하느님 아들이고, 내 부인 아니고 하느님 딸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고귀한 딸이며 아들인 것처럼 나와 함께 지내는 사람도 정말 고귀한 아들 딸들입니다. 나만 하느님 딸인 게 아니고, 함께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아들 딸입니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하느님의 딸과 아들입니까? 



경계가 확장되는 것이 영적 성숙이다


이 경계가 확장되는 것이 영적인 성숙입니다. 영적인 성숙은 내가 형제자매로 보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복음의 기쁨에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의 분명한 표징은 얼마나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서 형제 자매로 나아가는 것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의 낯모르는 이들이 내 형제자매들이다. 그래서 그곳에 가서 돌아가셨습니다. 성인 프란치스코는 이 범위가 훨씬 넓었습니다. 하늘의 태양을 형님이라고, 달을 누님이라고 불을 형, 물을 누이, 이게 시가 아니고 성인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인의 기도문이 최근에 교황님께서 반포하신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진정하게 피조물이 형제로 와닿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진정 전 인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는가?


주님의 기도에서 보면,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양식은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인 양식과 육적인 양식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셨나요? 주셨죠! 모든 인류에게 주셨나요? 주셨죠! 모든 인류가 먹고 남을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가 입술봉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재도 세계 도처에서 10살 미만의 아이들이 5초에 한 명씩 죽고 있습니다. 전세계 인구의 7분의 1인 8억 5천만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입니다. 음식이 모자란 것이 아닙니다. 곡식 총생산량의 47%를 가축 사료로 사용하고 있고, 곡식을 가축들이 먹습니다. 그러면 가축들이 나쁩니까? 너무 많이 키운다는 것입니다. 소, 돼지, 닭은 너무 많이 키웁니다. 우리가 너무 많이 먹기 위해서 키웁니다. 



브라질의 까마라 대주교


브라질 유명한 주교님이 계십니다. 돔 핼더 까마라 주교님이라고 하는데요. 그 분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빨갱이(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가 좋을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성당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열린 어머니의 마음과 같아서, '출발하는 교회는 문을 활짝 열어 놓은 교회입니다. (46항)라고 하십니다. 그리고“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49항)라고 하십니다.


2013년 3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선출되시기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자신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며 '신학적 자기 도취'에 빠져있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자신에 의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세속적 교회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복음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라고도 하셨습니다.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


복음의 기쁨에는 이런 구절도 나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들의 일상생활에 뛰어들어 그들과 거리를 좁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인간의 삶을 끌어안고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집니다."(24항)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그리스도의 몸' 하면 '아멘'이라고 합니다. 그 똑같은 '그리스도의 몸'을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에서 '교회'라고 했고, 교황님께서는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찾는다는 것은 영성 생활에서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묵상하는 것과 교회의 거룩한 신비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또한 “작은 이들”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2세, 현대의 사제양성 46항)



너의 주변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곧 나다


우리는 너무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고, "하느님 뭐 하세요? 이 사람 고통받고 있잖아요!", "예수님, 이 사람 좀 도와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앞에서 아프다고 말하는 이가 바로 나다!" 우리는 그 눈을 뜨고 있습니까?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 개개인에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구조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모든 인간의 상황과 모든 사회적 관계에 파고들어가 개입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은 사회적 차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믿는 것은 성령께서 모든 인간의 상황과 모든 사회적 관계에 파고 들어가려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의 기쁨, 178항)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특히 '사회 질서와 공동선 추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합니다."(복음의 기쁨, 182항)



정치가 왜 더러운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정치가 더럽다고 말합니다. "정치가 너무나 더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왜 정치가 더러울까?  왜 그리스도교인들이 복음의 영으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을까?" 그러시면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이란 책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문서[복음의 기쁨]는 우리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모든 사회 문제를 세부적으로 다룰 자리는 아닙니다... 그러한 여러 주제에 관한 성찰에 알맞은 도구들은 ‘간추린 사회교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공부하고 활용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185항)


이것은 교황님 말씀입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책을 활용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계십니다. 사회교리란 "역사가 흐르는 동안 발생한 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말씀 전체에 비추어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해석함으로써 교회가 점차적으로 표명하는 것"(가톨릭교회교리서 2422항) 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회교리는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에 속하는 만큼 이와 동등한 위엄과 권위를 지닌다. 이는 참된 교도권으로 신자들은 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 (간추린 사회교리, 80항)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드 딸


마지막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피조물의 찬가, 교황님께서 <찬미 받으소서> 회칙을 발표하시면서 인용하신 찬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다. 내 이웃도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고, 내 형제자매다. 뿐만 아니라, 교황님은 이제 프란치스코 성인의 입을 빌어서 피조물도 형제 자매가 되어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야가 점점 더 넓어지는 것이 영적인 성숙이고, 사회교리는

우리의 형제자매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살고 있는 것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경제적이고 문화적이고 생태적인 문제는 없는가에 대해서 복음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노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 자매이며 아들 딸이란 사실입니다. 끝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피조물의 찬가를 바치면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피조물의 찬가 - 성인 프란치스코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며 선하신 주님, 찬미와 영광 영예와 축복 모두 당신 것입니다. 오로지 당신께만, 지극히 높으신 주님, 합당하오니 누구도 감히 당신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찬미 받으소서, 저의 주님, 당신의 모든 창조물들을 통하여, 특별히 형제인 태양을 통하여, 그로 인해 낮이 되고, 저희에게 그를 통하여 빛을 주시오니, 그의 아름다움과 찬란한 광채가 높으신 주님, 당신을 닮았나이다.


찬미 받으소서, 저의 주님, 누이인 달과 별들을 통하여, 당신께서 하늘에 그들을 밝고 귀하고 아름답게 만드셨으니.


찬미 받으소서, 저의 주님, 형제인 바람을 통하여, 또한 공기와 구름과 맑은 하늘과 온갖 날씨를 통하여,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창조물들을 기르시니.


찬미 받으소서, 저의 주님, 누이인 물을 통하여, 그녀는 대단히 유용하고 겸손하며 소중하고 정결하니.


찬미 받으소서, 저의 주님, 형제인 불을 통하여, 그를 통하여 밤을 밝혀 주시니. 또한 그는 아름답고 즐거우며 활기차고 강합니다.


찬미 받으소서 저의 주님, 저희의 누이이며 어머니인 땅을 통하여, 그녀는 저희를 기르고 다스리며, 온갖 과일과 색색의 꽃들과 풀들을 낳아줍니다.


찬미 받으소서, 저의 주님, 당신의 사랑 때문에 남을 용서하는 사람들과, 아픔과 시련을 견디는 사람들을 통하여. 평화 속에 견뎌내는 이들은 복되오니, 지극히 높으신 주님, 당신께서 화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찬미 받으소서, 저의 주님, 저희의 누이인 육신의 죽음을 통하여, 살아 있는 누구도 그녀를 피할 수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죽을 죄 속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을 찾는 이들은, 두 번째 죽음이 그들을 해칠 수 없으니.


나의 주님을 찬미하고 찬송하며 그분께 감사드리고 지극한 겸손으로 그분을 섬겨라.




전민동성당 사회교리학교 제2강의 요약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제15기 사회교리학교)

사회교리의 신앙적 토대 | 대전가톨릭대학교 김유정 신부님

2015-9-17(목) 성당2층 성전(저녁 8시~10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