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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미 강연

[20160215] 강수돌 교수강연. 노동현실과 희망의 대안 ① 사랑과 평화와 생명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31.

강수돌 교수의 노동현실과 희망의 대안 (1부)


정세미(64차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 강연

천안 불당동성당 2015.2.15 (월) 저녁 7:42~9:10


천안 불당동성당 2015.2.15 (월) 저녁 7:36 스마트폰 촬영


사랑과 평화와 생명으로 살아가려 노력 ...


안녕하십니까. 사실 전 솔직히 신자도 아닙니다. 근데 잘 모르지만 우리 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사랑과 평화와 생명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많은 부분들이 뒤틀려 있어요. 몸이 뒤틀려 있으 면 이 시간에 요가를 하러 가시겠죠. 그런데 우리 사회는 경제도 뒤틀려 있고, 정치도 교육도 뒤틀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노동현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나라의 [노동현실]이 어떻게 뒤틀려 있는지에 대해 같이 생각해보고, 이를 바로잡는 요가, '사회적 요가'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같이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조치원(고려대 조치원 캠, 현재 세종 캠)에 1997년에 처음 왔습니다. 그렇게 와서 거의 20년 동안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업 경영을 보면, 생산하는 영역이 있고, 생산을 해서 파는 영역이 있어요. 이 생산을 해서 파는 영역에는 2가지의 기본적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돈과 사람입니다.


주로 '사람'을 연구


그런데 저는 주로 '사람'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들여다보는 것은 만일 어떤 사람이 기업이라는 하나의 시스템에 부속품으로만 일을 하다보면, 내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일 하는지도 모르고, 단순히 월급 많이 받고 좀 더 높은 곳 승진한다는 인센티브의 꼬드김을 받아가면서 흘러 가다가 40대, 50대가 되면, "내 꿈은 어디로 갔지?"하는 후회가 생길 때까지를 들여다 보게 됩니다. 


천안 불당동성당 2015.2.15 (월) 저녁 7:47 스마트폰 촬영. 강수돌 교수가 강의를 시작하고 있다.


초중등 교육과정이 기업의 인적자원 양성과정에 불과?


여기서 좀 더 영역을 넓혀서 보면, 초중등 교육받는 과정이 기업의 인적자원 양성과정에 불과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더라는 거죠. 그래서 교육도 달리 봐야 하고, 기업의 활동도 자연과 사람의 에너지만 뽑아서 돈벌이만 하는 게 아니라, 기업활동을 통해서 상호 좋은 관계를 맺고. 이 세상의 자원을 파괴하지 않고 순환시키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도와주는 것. 그렇게 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부를 사람들이 유익하게 써야지 기업이 일하는 보람이 있고, 삶을 마감할 때까지 뿌듯하게 가겠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러서, 제 공부가 기업경영을 넘어서서 교육과 생명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은 제가 30여년 공부한 내용을 3시간에 요약을 해보고, 부족한 부분을 서로 같이 토론하며 의견을 나누며 보충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3시간을 한다고 하니 여러분 놀라셨죠? 그 중에 절반 정도만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1. 몇가지 현실지표



몇가지 현실지표들이 있습니다. 최근 자료를 보면, 국가 내지 공공영역이 있고, 민간 가계 영역이 있고, 그 다음에 기업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영역마다 1천조원 이상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출처: 국가부채(기획재정부와 국회예산정책처), 가계부채와 기업부채(한국은행), 소자영업부채(금융감독원)


최근 10년간 가계부채. (출처: 한국은행 가계신용) 기획재정부가 2015년 9월 국정감사를 위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가부채 총액은 4781조를 넘어서 위기상황을 언제든 맞을 수 있는 위험한 상태라고 한다. 



빚더민국, 영역마다 1천 조원 이상의 빚더미


우리나라의 각종 부채 규모를 보면, 각 영역마다 1천 조 원 이상의 빚을 지고 있어요. 한마디로 빚더미 국가입니다. 지표로 보았을 때, 5십년 전과 비교를 해서 보았을 때, 여기서 50년 전이라고 하는 것은 1960년대 초반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1961년도에 태어났는데, 제가 살아온 과정이 박정희 대통령, 즉 아버지 박 통이 다스리던 시기로부터 지금 딸 박 통이 다스리던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대통령 아버지에서 딸에 이르기까지 50년 정도가 흐르는 동안에 1인당 GDP를 보니까 300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300배 부자는 되었으나, 실제로 지고 있는 빚은 민간 가계에서도 천 조원이 넘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1천 300~400 이렇게 달리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가계부채 진단①]1200조 가계 빚 정말 문제없나?…위험신호 3가지 ... 뉴시스 2016.2.10

 

그 다음에 또, 나라 전체가 지고 있는 부채와 공기업의 부채를 합치면 천 조원이 넘습니다. 게다가 일반 기업 빚도 1천조에서 2천조를 육박합니다. 반면 여러분이 접하신 뉴스의 30대 재벌 사내 유보금이 700조가 넘는다고 하니까, 재벌들이 발표하면서, "아니야. 그건 거짓말. 680조인데!" 그러나 우리 눈에는 700조나 680조가 거기서 거기인데 말이죠. 사실은 그것보다 더 많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어요. 게다가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금고가 부족해서 해외 갖다놓은 돈도 막대하다고 합니다. 


2013년 5월 21일자 뉴스타파 참조

한국 부자들이 1970년대 이후 약 40년간 납세를 피해 해외 조세피난처로 옮긴 자산이 890조원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시민단체 조세정의네트워크 2012년 7월 22일 공개 보고서). 1970년부터 2010년까지 7790억달러(약 893조원)이 집계되었는데, 이는 조사 대상 139개국 중 중국(1조1890억달러)과 러시아(7980억달러)에 이어 세번째로 큰 규모다. 이와 관련하여 뉴스타파는 약 10회에 걸쳐 조세피난처 프로젝트 탐사보도를 통해 약 300명(재벌, 고위공무원, 정치인 등)의 한국인 해외 비밀계좌에 대한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1인당 3백배 이상의 부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부의 분포를 보면, 굉장히 많은 이들이 빚을 지고 있는 반면에 아주 극소수는 돈이 넘쳐나 어쩔줄 모르는 지경에 있다는 겁니다. 


노동시간은 OECD 최고 수준


노동시간은 신문에 너무 자주 나와서 여기 계신 분들이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동안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부모님 세대에 하루 열시간, 열두시간 일했는데, 자식 시대에도 긴 노동시간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아예 취업을 못합니다. 또 취업을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취업 기회만 열린다면 열시간 열 두시간 일하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에 와 있습니다. 


연간 2300시간 (OECD 최고 수준), 1800만 노동자, 5천만 인구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버지 세대에 열시간 일해서 먹고 살있다면, 자식 세대에는 여덟 시간이나 여섯 시간 정도, 그리고  손자 시대에 와서는 너댓시간 일해도 먹고 살아야 역사발전이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전에는 아버지가 혼자 벌어서도 온 가족이 먹고 살았는데, 요즘은 맞벌이가 되어도 빠듯하게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오히려 빚은 늘어났어요. 


물론 그 사이에 우리의 소비 수준이나 씀씀이가 헤퍼진 것은 사실이에요. 게다가 스스로 해결하던 걸 백화점이나 시장을 통해 해결하는 부분이 많아짐으로써 돈이 많이 들게 된 사정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총체적인 면을 보면, 부의 불균등 속에서 극소수 재벌들 같은 사람들만 문제가 아니라, 그런 구조 속에 은연 중에 동참해온 우리 자신도 일말의 책임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산재: 하루 240명 내외 사고


산재 부분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는 일관성있게 1등하는 게 산재 부분입니다. 산재 왕국입니다. 30년 전, 제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에도 '산재왕국 오명'이란 말을 쓰고 듣고 괴로워했는데, 지금도 변함없이 일관성있게, 마치 학교 야간자율 학습이 꾸준히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 240명 가량이 사고를 당하고, 그 중에서 7~10명이 산재로 사망합니다. 하루 2~3명은 과로사하며, 직업병이나 일중독도 많습니다. 


[카드뉴스]"죽도록 일한다"…'과로사회' 대한민국 보고서 - 서울경제 2015.9.16



실업과 과로의 이상한 공존


그리고 실업과 과로가 이상한 공존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또 이성을 넘어서서 세상을 따뜻한 감성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일을 골고루 나누면 답이 나오는데, 일을 골고루 나누지 않은 상태로, 한쪽은 일에 치어 죽고, 한쪽은 일이 없어서 죽습니다. 그런 상황이 앞서서 신부님 표현처럼 아이들을 학대하는 부모의 모습이 따지고 보면, 너희들 이런 식을 해서 부모 말을 듣지 않고 공부를 안하면 이 험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나가겠는가 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아주 안 좋은 사태들이 벌어진다고 봅니다.


결국 인간의 탐욕이고 그 탐욕을 시스템으로 합당한 모습처럼 만들어 가는 데 자본주의 시장 경제이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사랑의 보금자리로 상징되는 가정의 모습으로 경제와 생태와 에큐메니칼 이런 종교 영역까지,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단어가 '에코'입니다.


성과에 따라 밥알을 세어서 주지는 않는다


'에코'의 어근 즉 말의 뿌리가 가정, 집, 사랑의 보금자리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면 재벌기업가 조차도 가정에 들어가면 따뜻한 아버지나 어머니인데, 그런 논리로 자녀들을 바라볼 적에는 성과나 점수를 가지고 밥알을 세어서 주지 않아요, 


그리고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어르신 말씀이 바로 사랑의 마음이고 논리죠, 사회도 그런 식으로 돌아가야지 올바로 간다고 봅니다, 가정의 경제에서 우리가 그런 사랑의 마음을 잃고 있지 않는다면, 우리 한가족 먹고 살려면 어느 정도 벌어야 할까요? 먹고 입고 자고, 신문도 보고 책도 사고 여행도 하고 영화도 보려면 우리 수입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어야 하고, 그걸 농사짓던 시절로 따져보면 농사는 얼마나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회 역시 우리가 인간답게 살려면 주택은 얼마나 짓고 옷은 얼마나 만들어야 하는지 총량이 나오죠, 그래서 그 총량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우리 인구가 얼마만큼 있는데, 하루 몇시간씩 일하면 우리 먹고 사는데 필요한 걸 생산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올 것입니다. 지금은 더 쉽게 컴퓨터로 계신할 수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모두에게 합당한 일자리를, 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노동시간을 골고루 분배하면 우리가 먹고 사는데 필요한 총량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 동일한 총량이 있을 때, ① 일하는 사람은 늘려주면서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식과 ② 일하는 사람은 조금만 두고 일하는 시간을 24시간 돌려서 과로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있다면, 우리는 앞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다 일자리를 주고, 대신에 적은 노동량으로 하면, 노동과 여가의 균형을 잡을 수 있고 삶의 일의 균형 속에서 사람들이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을 새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실업과 과로의 이상한 공존이 있습니다. 


실업율 - 850만 비정규직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 지나서 n포세대가 되었습니다. 여러가지를 다 포기하는 세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n포세대의 말을 바꾸어서 포기를 No세대, No 포기하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고 젊은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가 철학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그 바꾼 생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삶의 영역에서 새로운 접근방법으로 들어가면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혼자서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토론을 하고 뭉치고 사회적 공론화를 하며, 여론이 바뀌어서 세상을 바꾸어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노조 조직율 10% 내외


우리나라의 노조 조직율은 10% 내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국, 미국보다는 유럽. 그리고 유럽 중에도 북쪽으로 갈 수록 복지국가의 모습이 강합니다. 그 중에서 노르웨이는 56%, 덴마크와 핀란드와 스웨덴은 70% 내외의 조직율입니다. 그래서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고 정치를 잘해서 그런 것보다는 그런 정치를 하기 위한 사회적 기반이 사람들이 일이 끝나면 가정이나 지역이나 마을에 돌아가서 오늘 저녁과 같은 이런 자리, 인문학을 하는 자리, 토론을 하는 자리, 우리 지역의 경제를 정말 생동감있게 만드는 토론의 자리 등이 동네마다 무수히 많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두세가지 동아리들에 소속되어 끊임없이 요구하고 더 좋은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들이 자연스럽게 투표와 선거에 반영되고 여론이 형성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행정가나 정치가가 일을 할 수 없는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그런 과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자살율은 10만명 당 37명입니다.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하루에 40명씩 자살을 하는 나라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경제의 규모와 완전히 불비례합니다. 아동과 청소년의 행복도는 22개국가 중에서 꼴찌이고, 10대 청소년 자살은 연간 250명~300명 수준입니다. (거의 하루에 한 명의 청소년이 자살하는 셈)


하루 40명 스스로 목숨 끊는 '자살 공화국' -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2015-9-6




2.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좋은 삶이죠. 행복하게 살고 싶죠. 그럴 때 저는 우리가 청년 전태일을 꼭 기억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며 원했던 세상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외침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망각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마음이 사회의 정책과 제도와 프로그램 속에 잔잔히 깔려 들어가야지만 비로소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 행복한 사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1970. 11. 13. 청년 전태일의 꿈: 사람답게 사는 세상,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여러가지 토론 가능하겠지만, 제가 생각한 것은 기본 식, 의, 주가 해결되면서도 삶의 질이 함께 가는 세상이 되어야 사람다운 세상이 되고, 지금도 정치가들이 떠드는 민생을 정말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식, 의, 주와 삶의 질을 누리며 살도록 뒷받침하는 정책과 법을 만들고, 그것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해서 사람들이 정말 이 나라에 태어나서 살아가는게 참 다행이다라는 마음이 들도록 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20대 청년들이나 그 이상 설문조사에서 70~80% 이상의 사람들이 이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런 마음 있어요. 그래서 다 실천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잘 살게. (장내 웃음). 저도 떠나고 싶어요. 하지만 떠나는 걸로 생각해본다면, 어디에 가서도 그 사회 나름의 고민과 문제 있어요. 선진 복지국가도 아무 문제 없는 건 아니죠. 뿐만 아니라 갈수록 국경 문을 닫으려고 하고 있고, 다른 나라 사람이 들어가면 자기 부를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서 생기는 인종차별적 문제들도 있고, 그런 각종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그 외에도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어요. 내부 자원 할당의 문제도 있고, 그들 또한 일하며 겪는 고통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여유롭다는 거지 아무 문제가 없는 건 아니죠. 그래서 궁극적으로 언제 어디에 가서 살더라도 내가 어디 가서 살더라도 내 주변과 더불어 살려고 하고, 문제 있다면 같이 토론하고 고쳐나가며 살아가려고 할 때, 이민을 가건 여기에 있건 마찬가지로 보림된 삶을 살 수 있지 읺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미우나 고우나 내가 어디에 가건, 가는 게 답이 아니라, 불편하지만 현실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고, 이것을 고쳐내는 일을 말과 글과 행동과 연대의 실천과 분위기나 여론의 형성 등 작은 기여라도 하면서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데 왜 오지 않을까요? 




3.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왜 오지 않나?



1960년대 초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2010년에 2만불 시대, 2014년에 2.5만불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렇게 250배, 300배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그렇다면 우리의 행복은 최소한 25배, 30배 정도라도 늘어났습니까? 아니면 그 반대로 스트레스가 25배, 30배 증가한 것은 아닐까요?


'트리클 다운'이라는 거짓말


우선 여러가지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트리클 다운'이란 거짓말이 있죠. 윗물이 흘러서 아랫쪽도 흠뻑 적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아랫물을 온통 펌프질로 뿜어 올려버리는 세상이 된 겁니다. 그러나 대기업들은 그들이 돈을 많이 벌면 저절로 중소기업과 지역사회, 소비자, 노동자와 온 사회에 넘쳐나는 물이 흘러갈 것이기 때문에 재벌기업 발목 잡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컴퓨터, 휴대폰, 자동차 많이 팔았다고 해서 농민들에게 "우리(대기업) 돈 많이 벌었으니까 농민들 이제 유복하게 사셔야죠!" 하며 돈 줍디까?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농사를 망가뜨린 대신에, 공장을 많이 짓고 수출 많이 하는 모델이 과연 올바를까 하는 부분에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트리클 다운’이 안 되는 3 가지 이유

① 위쪽 그릇이 너무나 넓고 깊다

② 위쪽 그릇이 다 차기 전에 얼른 새 그릇으로

③ 위쪽 그릇 뒤에 구멍을 뚫어 빼돌린다

☞ 대신 아래쪽 물을 끊임 없이 펌프질로 퍼 올린다 (‘펌핑 업’이 사회경제 양극화의 진실)


아까 안면도 신부님도 말씀하셨는데, 우리 저녁 먹고, 내일 아침 점심 드실텐데, 밥상에 올라오는 것은 물과 흙에서 나옵니다. 물과 흙으로 상징되는 농어촌, 그리고 그곳에 사시는 농어민들, 그 농어촌 공동체가 망가지는 것을 전제로 이룩한 산업화와 첨단기술들의 미래가 과연 있을지 지극히 의심스럽습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이 없으면 라면이나 국수라도 먹어야 합니다. 아주 열악하면 포테이토칩이라도 괜찮지만, 컴퓨터 칩을 먹고 살 수는없어요. 과학기술이 대안이라고 외치는 장관님들 밥상에 컴퓨터 칩 한 사발을 올리고 싶어요. 농어민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농촌, 농사, 공동체, 농어촌을 죽이는 과학기술과 산업화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이 잘 안내려옵니다. 그런데 왜 안내려올까요? 궁금합니다. 제가 세 가지 원인을 찾아냈습니다. ① 저 위의 높은 곳에 물이 차면 될 것이라고 봤는데, 그 그릇이 어머니의 은혜와 비슷합니다. 아무리 채워도 안 찹니다. ② 두번째 밤샘을 해서 99% 채워 놓았더니 순식간에 다른 새 그릇으로 바꿔치기 해서 또 채우라고 합니다. 또 끊임없이 채우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빠져죽습니다. ③ 세번째는 그릇 뒤로 가서 보니 구멍을 뜷어 호스로 빼돌리고 있습니다. 비자금을 조성해서 국회의원 후보, 대통령 후보 등 여야를 막론하고 미끼를 마구 던집니다, 이걸 포트폴리오 투자라고 하죠. 여기저기 투자해 놓아야 어느놈이 되어도 내 낚시줄에 걸린다는 겁니다. 판검사, 학자들. 4대강을 하는 데도 학자들의 평가, 자문의견 등등 많은 게 들어갑니다. 


그래서 소위 주위에서 '전문가가 되어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할 때의 그 훌륭한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수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제대로 된 교육을 하려면 그런 매수 현실이 존재한다는걸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어떻게 하면 그 유혹에 안 빠지고 양심적인 휘슬 블라우어가 되어 휘슬 소리를 내는 내부고발자가 되어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이런 교육이 어릴적부터 밥상머리에서부터, 초등학교에서부터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정직한 사람을 마음으로 창찬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당히 넘어가고 진실을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키우는 지금의 교육은 끊임없이 그런 부패와 병든 사회를 재생산할 것 같다는 생각 듭니다. 


현재 세계 경제상황은?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들은 이야기가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선진국 된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50년 동안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앞으로 백년 흘러도 안될 것 같습니다. GNP, GDP 수치 상으로는 선진국 클럽에 이미 들었지만, 우리 삶의 과정에서 체감하는 바로는 후진국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미얀마나 베트남이나 태국과 같은 우리가 아는 후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보다도 우리가 오히려 못합니다. 거기는 인정스러운 공동체와 순박한 마음이 살아있어요. 


① ‘글로벌 슬럼프’ 국면: 세계 경제 공황

② 더 이상 시장이 확대될 여지가 별로 없다

③ 기술 발달이 고생산성에 일자리를 없앤다

④ 임금 정체, 저하로 구매력이 떨어졌다

 불필요한 생산은 증가, 필요한 생산은 부족



그러면 우리가 달려간다는 선진국은 무엇일까요? 뉴욕 시티와 같은 걸 상상하는 것 같습니다. 높은 빌딩만 많이 지으면, 불이 번쩍거리면서 그렇게 돌아갈 거 같은데, 그런 뉴욕 시티조차도 그 어마어마한 주변의 농어촌에서 오는 농수산물이 없이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삶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글로벌 슬럼프’ 국면: 세계 경제 공황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이 90년대 이후로 중국이나 구소련 지역, 동유럽 지역에 많이 열렸습니다. 그게 20~30년 정도 온 것입니다. 그런데 2008년도의 리만브러더스 사태가 터진 것은 상징적입니다. 이제 거의 막바지 사태에 들어섰다는 겁니다. 이제 더이상 세계경제 차원에서 성장의 여력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말해줍니다. 이미 마이너스 성장지표들이 나오고 있고, 은행 이자율도 유럽에서는 이제 마이너스 이자입니다. 돈 맡기는 바용을 내가 은행에 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땅을 많이 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비극 같은데, 어찌보면 우리 생명,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이치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직선으로 주욱 올라가는 그래프. 시간이 갈 수록 끊임없이 성장하는 그래프는 기계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포물선이죠. X축과 Y축이 있을 때, 포물선으로 직선보다 더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이 은행 이자의 논리입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폭등합니다. 산술급수인데, 올라가는 건 기하 급수입니다. 바로 이런 은행 이자논리가 바로 자본 논리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끊임없이 더 많이 벌어야 은행 이자도 갚고, 처음 기계 살 때 빚 내니까, 주주들 배당도 줘야하니까 어마어마하게 벌어야 하죠, 그런데 이스털린의 역설이란 게 있어요. 소득이 증가하는데도 어느정도까지 올라가지만, 행복이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아요. 포물선이 누워 있는 것처럼 갑니다. 이것은 성장이 더이상 잘 안된다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관적으로 보지만 저는 이것을 그렇게 보지 않아요. 인간이 키가 어느정도 크면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행복도 충분히 행복하면 더 이상 끊임없이 행복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정도면 좋아!" 그냥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도 좋겠다는 게 있어요.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따뜻한 공동체가 있고, 물과 공기가 맑고 인정스러운 이웃이 있다면, 더 이상 무얼 바라겠습니까? 그런 이치를 생각해본다면, 성장하지 않는다는 걸 좀 다르게 보면, 우리가 만들어내는 물품들이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더 이상 시장이 확대될 여지가 별로 없다


식량생산도 세계 전체로 보았을 때, 골고루만 나눠도 세계 인구가 충분히 먹을만큼 생산성이 엄청 올랐습니다. 오히려 질을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농약 제초제나 비료 안쓰고, 자연농법이나 유기농으로 잘 키워서 골고루 나눌 수만 있다면 충분히 살 수 있고, 더 많이 만들려고 노동하지 말고, 여유있게 살면서 시(詩)도 짓고 음악도 감상하고, 토론도 하며 사는 게 이상한가요? 


그래서 끊임없이 자랄 것 같은 나무도 어느 정도 자라면 그만큼 더 자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달려간다거나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성장그래프는 인간의 논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비극적으로 생각한다기 보다는 충분함의 미학으로 보자는 겁니다. 즉, "아하! 세계경제가 이제 반성할 시점이다. 생산 이정도 충분하고 어떻게 골고루 분배하고 이제는 질적으로 자연 순리에 맞게 다가갈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할 시점이 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세상이 제대로 바로잡힌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하냐면, 법을 바꾸어서 비정규직을 만들고 더 잘라내고 파견 사원을 써가면서 그렇게 좀 더 노력하면 예전처럼 더 올라갈 수 있다고 강요하면서 믿어달라고 하는데 저는 그걸 못 믿겠어요.


기술 발달이 고생산성에 일자리를 없앤다


우리 생활도 그렇고 공장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고 기술발전으로 말미암아 엄청나게 많이 좋아졌습니다. 옛날에 한달동안 하던 일을 하루 이틀만에 해치울 수 있습니다. 특히 포클레인이 삽질하는 것은 삽질의 과학을 어마어마하게 변화시켰죠, 그런데 우리 마을에 팔요해서 학교를 짓고 다리를 놓는 것이라면, 포클레인을 사용해서 하고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다음에 필요할 때 꺼내 쓰면 되는데, 이게 사업이 되다 보니까 24시간 포클레인을 굴려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산도 파헤치고, 2차선을 4차선으로 만들고, 끊임없이 프로젝트를 만들어가야 한 겁니다. 필요의 원리대로 하자면 우리가 필요한 만큼 쓰고, 기름칠을 해서 창고에 잘 보관해두면 되는 것인데, 이윤의 원리는 무한대의 원리이기 때문에 24시간 굴리려고 합니다. 24시간 편의점이 나오는 원리도 같은 이치입니다. 


기술 발달로 보면, 슈마허라는 선생이 '중간기술, 적정기술'이란 개념을 1973년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제시를 했습니다. 저는 그 개념이 그 분이 40여년 전에 이야기한 것이지만, 시간이 갈 수록 더욱 더 유효하다고 봅니다. 현대 산업사회의 기술시스템은 그 분이 보시기에 너무 값비싸고 갈수록 값비싼 기계가 더 많이 나오고, 더욱 복잡한 기계가 등장하니,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너무 성능이 좋고 여러 기능이 기계 안에 다 있다보니까 사람의 역량이 발전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은 단추만 누르면 됩니다. 내가 눈썰미나 나의 전통적 경험이나 지식 등의 노련미를 발휘할 공간이 없어집니다. 게다가 효율이 높아진다는 것의 이면에는 폭력성이 숨어 있습니다. 빨리 망가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폭력성과 인간의 능력을 저하시키는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비싼 기계를 들여다 놓는다는 것은 돈 가진 사람, 혹은 은행에서 빨리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사람, 혹은 권력을 등에 업고 있는 사람들이 그걸 이용하면서, 또 빚을 빨리 갚아야 하니까 병원에서는 쓸데없는 고가의 진단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기계값을 빨리 갚아야 하니까요. 그러면서 또 사람이 일할 공간이 없어지는 것이죠. 따라서 기술 시스템이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적정 수준이 있다는 게 우리들의 해법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마하트마 간디나 슈마허 선생이 말하는 적정기술이란, '인간의 능력을 고양시킬 수 있는 기술'이라는 겁니다. 그런 게 물레, 호미, 쟁기 등 전통적으로 농촌에서 어르신들이 쓰던 도구 정도는 아닐까 합니다. 한가지 일화로 제주도 해녀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질을 하고 해산물을 건져오는데 굉장히 수공업적이고 원시적인 모습인 겁니다. 산소통도 메지 않고 들어가서 2~3분, 길면 5분 안에 숨쉴 수 있을만큼만, 한숨 만큼만 일하고 올라오는 겁니다. 그걸 외국인이 보고 해녀에게 물었습니다. 


"해녀님, 그렇게 하지 말고 이런 저런 도구를 갖추고 산소통을 메고 들어가시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건져낼텐데 왜 그렇게 무식하게 작업을 하세요?"


그러자 해녀가 이렇게 답변을 했어요. "내가 그걸 몰라서 안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하면 아홉명의 내 친구해녀들은어떻게 먹고 살려고?"


저는 그런 부분이 우리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는 등대와 같은 역할한다고 봅니다. 기술이건 조직이건 규모건 교육도 마찬가지고 어느 분야이건 사람과 자연의 관계, 미래와의 관계 등등을 생각하며 나아가야지만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는 고통을 줄일 수 있고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임금 정체, 저하로 구매력이 떨어졌다


지금의 경제 상황 중에서 자가당착적인 게 있습니다. 바로 임금입니다. 여러가지 의미가 있고 토론할 거리가 많지만, 압축적으로 말하면 임금은 노동자에게 생활비지만, 기업가에게는 생산비용입니다. 그런데 사회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생산되어 나오는 산더미같은 상품을 사주는 구매력이 되는 겁니다. 기업가들은 자기 기업 안에서만 생각하다보니, 생산비용 줄이는것만 생각해서 비정규직과 사람 잘라버리는 일만 열심히 합니다. 그러면 남아 있는 사람이 밤샘을 해서 산더미 같은 상품은 만들어내면 누가 사줍니까? 그러니 사회 전체적으로 아귀가 안 맞아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세계적 차원의 자가당착적인 상황으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시장이 확대될 여지가 별로 없다'는 맥락과 연결해서 보면, "아하! 옷도 가방도 책상이나 집도 우리가 필요에 걸맞는 만큼 생산하면 되는데, 너무 지나치게 과잉이다."라는 겁니다. 우리 주택시장도 과열입니다. 제 기억으로 2005년 무렵 가구 1가구당 배분하는 걸로 치면 모두 돌아가는 100%를 이미 달성했습니다. 지금은 110%까지 가고 있습니다. 이 수치만 보아도 굉장한 불균등 분배를 알 수 있습니다. 광주에 사는 어떤 한 분이 1,080채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쪽은 집없는 설움을 겪고 있는데, 한 쪽은 세낸 돈 세느라고 고통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겁니다. 


왜 행복이 올라가지 않을까에 대해서 이스털린 교수가 1974년도에 이미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그 분의 논문에서 보면, 수십개 나라를 비교해보니까, 소득수준이 올라할 수록 어느정도까지는 행복이 증가하지만, 이를테면 1인당 15,000 달러 정도까지 벌면 행복해지지만, 더 이상 많이 벌어도 증가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역설이라고 하지만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런 제 생각이 국제학회에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증가하는 걸 나쁘다고 볼 수는 없어도, 무조건 증가해야 행복하다는 맹신을 경계해야 한다는 겁니다. 필요한 만큼만 벌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충분함의 미학이 정말로 필요한 때입니다. 그럴 적에 건강과 여유, 존중과 평등, 인정스러운 공동체와 맑은 물과 공기가 담보되는 생태계가 삶의 질을 확보하는 핵직점인 조건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나라나 기업에서 매일같이 구조혁신, 구조조정 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이게 무엇을 중심으로 한 것인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맨날 경쟁력 중심을 말하지만, 그 경쟁력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경쟁력있는 자본과 기업을 위한 것이지, 사람을 위한 게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그 기업가의 문제라기 보다는 전체 경제의 운영 원리가 경쟁과 이윤을 원리로 하는 원리 자체를 바꿔요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질 중심의 구조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필요와 협동의 원리, 자금한창 새롭게 시도되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이 경쟁과 이윤 시스템의 메카니즘 때문에 여러가지 애로를 겪고 잘 발전하지 못하지만, 저는 먼 역사의 미래에서 굉장 중요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점에 이런 씨앗을 많이 뿌리고 가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좀 더 역사를 거꾸로 돌려서 보면, 노예시절과 봉건시절에 노예제도와 봉건제도를 넘어가려는 무수한 사람들의 씨앗 뿌리기가 수백년 흘러왔기 때문에, 노예제와 봉건제가 없어진 겁니다. 물론 그로 인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게 지금의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의 성과도 있습니다. 신분제를 타파하고, 공식적으로 노예제 인정치 않습니다. 그러나 요즘 비정규직을 신판 노예제라고 말하지만,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신분 차별 안한다는 선포는 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문제는 많지만 말입니다. 


불필요한 생산은 증가, 필요한 생산은 부족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귀족들이 쓰고 있던 물품들을 대중들이 다 씁니다. 대표적인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조금 좋은 고급스러운 식당에 가서 1인당 15,000원 짜리 혹은 20,000원 짜리 밥을 먹는다고 생각해보면, 그 정도 밥상이라도 세종대왕 밥상보다 훨씬 더 좋은 밥상이라고 봅니다. 평범한 우리 밥상도 그 시절 왕이 먹던 밥상 수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따져보면, 크게 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성과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게 완벽하고 좋으니까 "절대로 이걸 넘어가면 안돼!"라는 게 아니라, 트리클다운은 거짓말이고, 불평등한 분배의 문제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실업과 과로가 공존하고 있고, 미래가 불안한 청년세대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러한 현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 삶의 토대가 되는 물과 공기와 흙의 자연이 파괴되고 있으니 이러한 시대에 이를 바로잡는 씨앗을 뿌리는 게 우리들 운명인 겁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제 나름 공식을 만든 것이 삶의 질 중심의 구조혁신이란 겁니다. 


교훈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해지지 않을 수 있다

일정한 소득과 더불어 (‘충분함’의 미학), ‘삶의 질’이 향상되어야 행복해진다

삶의 질: 건강여유, 존중평등, 공동체, 생태계

결론: 경쟁력 중심이 아니라 ‘삶의 질’ 중심 구조 혁신이 필요하다


1997년 IMF 터졌을 때 제가 KBS 토론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 잘라내는 구조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고도의 성장을 해온 것. 지나간 거 어쩔 수 없지만, 고도 성장을 인정하자.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그 사이에 어떤 병든 구조를 지녀왔던가를 냉철하게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서, 사람 잘라내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 농민과 더불어 노동자들이 행복한 시스템을 새로 설계해야 한다."고 1997년에 말을 했어요. 그랬더니 사회자가 저보고 철학과 교수님이냐고 약간의 인신공격성 이야기를 하면서, "토론을 하자는 거에요 ? 말자는 거에요?"라면서 시비조로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나 토론을 해야죠. 하러 나온 것이고 나는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한 것. 사람 자르는 구조조정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대통령을 했어야 할 것 같아요. (농담에 모두 웃음) 

(2부에서 계속)


위 기록은 강사님의 말씀을 다시 정리한 것이기에 실제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1961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한 강수돌은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독일 브레멘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세종캠퍼스 경영학부 교수로 '돈의 경영'이 아닌 '삶의 경영'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나의 작은 실천'이 참 행복의 길을 열고 사회도 바꾼다는 믿음에서 2005년 5월부터 2010년 6월까지 5년간 시골 마을의 이장을 지내기도 했다. 학교 근처 서당골에 귀틀집을 짓고. 가족과 텃밭을 일구며 세 명의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키웠고 자연이 주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사는 그는, 돈벌이가 아닌 살림살이의 관점에서 사회와 삶을 바라보고 '아래로부터의 시각'으로 이웃과 역사를 바라볼 때 희망이 열리고 더불어 행복한 세상도 올 것이라고 믿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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