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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미 강연

조영만 신부 강연. 박근혜 탄핵 이후의 한국사회와 신앙(2)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7. 1. 31.
조영만 신부강연. 탄핵 이후의 한국 사회와 신앙 (2)

2017년 1월 9일(월) 저녁 7시 30분, (부산) 가톨릭센터 소극장
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부산메리놀병원 부원장)

탄핵이후의 촛불
공공성과 경쟁의 규칙(과정의 공정성과 결과를 나누는 분배의 조정)


우리들의 삶을 각자도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남은 내 인생을 더 밀어넣지 않으려면, 최소한 국가라는 조직과 시민사회라는 더 작은 조직이 구성원의 저마다의 삶을 합법적 질서 속에서 지탱시켜줘야 합니다. 

저마다의 생계와 노후를 보장받으려면 1차적으로 탄핵 이후에 우리 사회의 공공성에 대해 누가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거기서도 잘난 사람은 잘 살고, 못난 사람은 못갈 겁니다. 그러나 공공기제와 장치들이 훨씬 더 촘촘하게 구성원들을 지탱해줘야 합니다. 한가지를 바르고 꾸준히 하면 그 사람의 노후는 공공이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안됩니다. 독일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노후가 다 불안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다 박터지게 공부하고, 청년들은 바늘구멍같은 취업에 매달리죠. 게다가 우린 늙어서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렇게 바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탄핵 이후에 우리가 서로를 더 신뢰할 수 있는 공공시스템. 이게 더 누가 손해보는지를 봐야 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핵심의 위기의 본질은 사사로움입니다. 대통령의 비선실세라고 불리는 사람들, 관료들, 재벌들, 교육자들, 의료진들, 종교인들, 정치, 경제, 의료, 교육, 문화, 그리고 특히 국방과 외교. 모든 것들을 너무 사사롭게 진행시키지 않습니까? 박정희 시대에 그것이 통했습니다. 사사로움. 국익으로 포장한 사사로움말입니다. 그 당시 부를 어떻게 축적했습니까?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매일 새벽에 잠도 안 깼는데, 일어나라고 일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나가서 새벽별 보고 나가서 밤달 보고 들어온 우리들 아버지때문에 잘 살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부동산 때문에 잘 살게 된 것이죠. 지금이라도 뭐 좀 가지고 사는 사람들 월급 받아서 잘 살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공정과 합리의 방식으로 살아왔습니까? 

몇 천퍼센트의 상승률을, 집 한채라도 사서 안 까먹은 사람들이 지금 잘 산다는 소리고, 이 나라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이 정직하고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해서 잘 사는 사람이 있나요? 땅 사고 집 사고, 없는 사람 등치고, 노동자 돈 뺐고, 가난한 사람 쫓아내고, 소수자들 이용하고, 독점하고 투기하고, 전용하고 불법적으로 용도변경하고, 그래서 지금도 해운대 앞바다 50미터 밖에 안되는 그곳에 무려 100층짜리 집을 정상적 절차와 과정을 통해서 과연 지을 수 있습니까? 하잖아요.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하잖아요. 

공공성의 박탈. 왜 우리의 공공성은 이다지도 약화되었을까?

사실 우리는 박근혜는 미워한다고 해도, '나'는 그 집에서 살고 싶은 겁니다. (장내 웃음). 나는 솔직히 우리도 바르고 공정한 것이라면 저따위 박정희 식의, 아닌 것도 되게 만드는 방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박탈과 상실을 가져오는 것인지요. 공공성의 박탈. 왜 우리의 공공성은 이다지도 약화되었을까요? 그것은 한국식 자본주의의 단물을 빨아먹었기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느 사회에서나 경쟁은 있어요. 그러나 우리 사회의 경쟁은 달라요. 과정의 공정과 결과를 나누는 분배의 조정. 이게 없으면 불공정게임이 될 수 밖에 없어요. 출발선 자체가 너무 다르죠. 공정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경쟁 결과를 분배하는 조정기능이 없어요. 결국 승자독식입니다. 결국 한국사회의 경쟁은 끊임없이 자기 순위를 확인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끊임없이 자기 순위를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한 한국 사회

한번 보십쇼. 아이들은 몇 등인지, 아저씨들 차는 몇 CC인지, 아줌마들 아파트는 몇 평형인지, 연봉은 얼만지. 끊임없이 자기 순위를 자꾸만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회가 바로 한국사회입니다. 비극입니다. 자신의 성취를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아니하고, 못하고, 그럴 능력을 자꾸 상실하게 만드는 사회.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것을 어느정도 인식합니다. 그러나 남과 비교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우월감밖에 없고, 남과 비교해서 못하면 박탈감 밖에 없습니다. 어느 감정도,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안 산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열심히 삽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다 바빠죽겠다는 소리를 입에서 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밑도 끝도 없는 열등감으로 벌고 쓰고 먹고 싸는 일이 전부가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열등감을 만회하려면 어떻게 하죠? 사야죠. 자기 실력이 안되니까 명품을 둘러야죠. 그래도 열등감이 만회가 안되니까 얼굴을 뜯어 고치죠. 자기의 자존감이 생겨먹은 대로 차등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것도 비참한 일이지만 더 불행한 일은 자기원본이 사라진다는 겁니다. 철학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입니다. 원본이 사라져가는 삶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교육비가 들어가는 나라도 없습니다. 이 어린 새끼들을 경쟁구도 속에 한 발작이라도 더 빨리 밀어넣으려고 하는 것이죠. 공공성은 없고 이기주의만 획책하는 사회이기때문입니다. 그러면 뭐가 되죠. 한걸음 빠르게 이기주의 경쟁 사회로 들어가면 한걸음 더 빠르게 퇴출되는 겁니다. 

과잉사회와 잉여사회 그리고 거품(Social bubble)

독일에서는 아이들 선행학습 시키면 현행범으로 체포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엄마가 학원을 안 보내면, 옆집 아주머니가 압력을 행사합니다. "니 와 그리 키우노?" 

한번쯤 의심해보십시오. 우리 아이들을 하루 15시간~16시간 책상 앞에 앉혀놓는 것이 그 아이의 지적인 성장에 얼마나 도움을 줄 것인가? 그 똑똑한 아이들이 나중에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다 보시잖아요. 22살에 사법고시 패스한 자가 어떤 짓을 하는지를 보셨잖아요. 공공성이 결여되면 그렇게 됩니다. 공공성이 결여된 사회는 결국 과잉사회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과잉이란 말 자체가 비효율이고 낭비라는 소리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니까 그 과잉사회는 피로한 사회입니다. 과잉이 되어버리니 잉여가 넘쳐납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감만으로 행복해지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자기스스로가 행복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그런 자유를 모르니, 늙어죽을 때까지 남의 눈을 신경써야 하고, 평생 이놈의 거품을 걷어낼 수가 없어요. 

주체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요. 평생을 그렇게 바쁘게 살았으면서도 막상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이 단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억울해하며 죽습니다. 아직은 안됩니다. 평생을 살아왔으면서도! 더 큰 비극은 그렇게 죽고나서도 한국사람들은 어디를 떠돌죠? 구천을 떠돌죠. (장내 웃음)

단 한번도 행복하냐고 물어봐 준 적이 없던 학교

냉정하게 거품을 거둡시다. 이 압축적 성장 안에서 발생한 이 많은 폐해들, 단지 박근혜란 한 인물의 문제이거나 박정희란 한 인물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의 의식을 이만큼 지배하고 있으며, 과연 우리에게 단 한번도 행복하냐고 물어봐 준 적이 없는 그 놈의 학교와 선생들. 뭘 잘하고 잘 못하는지 그것만 가르쳤죠. ... 성당도 그렇죠. (장내 웃음)


비정상적 성장, 물질 이런 거품들을 거둬내야 합니다. 보통 통상적으로 3만불 정도 되면 그 나라 국민들이 갖게 되는 물질이 제공하는 만족도의 곡선은 완만한 그래프를 형성합니다. 반대로 비물질을 통해 지탱시켜주는 삶의 즐거움 그 관심이 올라가죠. 어떤 나라도 3만불 정도 되면 사는 게 비슷비슷하다는 겁니다. 5~6만불이 되도 비슷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물질이 제공해주는 그래프가 꺾인 적이 없어요. 맛집, 맛집 어느 놈의 맛집이 그렇게 많습니까? 한국 사람들은 밥 먹고 앉아서 TV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맛집 프로그램을 봅니다. 

"그만하면 되었다. 많이 묵었다." 

우리가 죽어서 이 살의 등급을 나눠서 구분되는 게 아니잖아요. 육즙이 살아있다는 둥, 그런데 얼마나 올인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질이란 것이 어느정도 되면, "그만하면 되었다. 많이 묵었다." 이런 말을 할 때가 옵니다. 그런데 우린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에는 부자가 없어요. 이건희도 아직까지 그만 벌어도 되었다고 한 적이 없어요. 부자가 없어요. 그러니 피곤합니다. 아직도 일본은 앞서가고, 아직도 중국은 우릴 쫓아오고 있고, 아직도 북한은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게 몇년 된 레파토리입니까? 40년전 레파토리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금도 이 소리를 하면 먹힌다는 겁니다.


지금 이 탄핵정국은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리고 국가적손실도 큽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주권자들의 변화된 인식들에 대해서 대의기관인 국회가 국민들의 눈치를 보게 만든 게 촛불이었습니다. 그 새누리조차도 국민들의 눈치를 보면서 탄핵가결로 돌아서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들끼리 남은 밥그릇이라도 빼앗아먹으려고 악다구니를 치고 있지만, 정치가 국민의 눈치를 국민들이 안고 있는 공공의 문제를 풀어가는 절차와 과정으로 정치가 제대로 자리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는 아주 중차대한 문제로 정치를 국민들이 이해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좋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라고 하신 말씀이 낯설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 마음 편안하려고 성당에 왔는데 신부가 정치이야기를 하노?"

그래서 "왜 마음 편안하려고 성당에 왔는데 신부가 정치이야기를 하노?"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대단히 의도적으로 무식한 것입니다.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오해하시는 것입니다. (장내 큰 박수) 이제는 우리의 수준이라는 것이 정말로 세상따로 신앙따로, 믿음따로 실천따로, 교회따로 세상따로. 이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복음이 어떻게 빛과 소금이 되고 있는지를 우리가 정직하게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냥 신앙은 우리 성당 안에 가둬놓은 박물관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서서 "신부님, 시국이 이리 긴박한데, 어찌하여 신부님이 가만히 계신다 말입니까? 신부님 일어나십시요!"라고 하는 소리때문에 더 많은 신부들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장내 가장 큰 박수)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전망합니다. (웃음)

'세상따로 신앙따로, 믿음따로 실천따로'가 아니다

곧 어느 종편에서 이제는 최순실 지겹다 하는 소리가 나올 것이고요. 반기문이 입국하니 그를 중심으로 소위 보수라고 자칭하는 집단들이 자기들 기득권 단 하나도 내려놓지 않으려고 다시금 이합집산을 벌일거고요. 조기대선 국면으로 들어가면 후보검증이란 이름으로 온갖 가십거리들을 꺼내놓을 것입니다. 그런 이전투구들을 보면서 국민들은 다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가도록 이끌어줄 겁니다. 

아직도 4대강을 똥물로 만든 이명박은 그대로

부디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걔네들 하는 짓거리가 그런 겁니다. 아직도 최순실은 그대로고요. 아직도 박근혜는 그대로고요. 아직도 4대강을 똥물로 만든 이명박은 그대로입니다. 아무 것도 아직은 바뀐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했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닙니다. 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이 혁명을 다시 똑같은 실패를 반복할 것인가? 어차피 헌법적 절차를 통해 점진적 혁명을 이뤄가야 하는 상황에서 촛불은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참된 주인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리들 안에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촛불은 공고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 세력에 틈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틈'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분골쇄신하는 사이다같은 정치인들도 만나게 해준 게 바로 그 틈입니다. 이 촛불들이 제대로 올바른 방향과 동력을 잃지 않는다면 대의민주주의 체제 아래서도 직접 민주주의 체제가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국은 정말로 한국형 민주주의를 다시금 써볼 수 있는 좋은 시점이라고 봅니다. 미국 이제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혐오주의자가 대통령이 되었어요. 유럽도 부러워할 게 없습니다.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극우 정당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만큼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정반대의 포지션에 서있는 겁니다. 최소한 이전과는 다른 세상, 아니 2014년 4월 16일 이전으로는 돌아가서는 안되고, 돌아가고 싶지 않은 세상. 내 인생에서 돈 보다 하나쯤은 더 소중한 게 있는 세상, 정말로 세월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대한민국으로 거듭 나야 합니다. 그것만이 아직도 수장되어 있는 아홉분. 그 오늘 1천일 시간에 우리들이 다짐하고 다시금 일어서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이란 꼭지. 고민고민하다가. 오늘 아침까지 이 원고를 썼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정현진이란 기자 분이 오늘 11시 20분에 올린 기사가 있길래 그 기자한테 전화를 걸어서 내가 좀 써야 하는데 하면서 기사를 받아왔습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부끄럽고 날이 갈수록 분노보다 슬픔이 차오른 시간을 우리는 무엇으로 건너왔을까. 배가 가라앉은 날은 주님 만찬 성목요일. 부활을 코 앞에 두고 목격한 참사에 교회는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절박하게 물었다. 하느님을 따르고자 애썼던 선한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비극을 겪게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극심한 충격은 그간의 신앙과 삶에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곧 교회는 자신들이 해야할 일, 있어야 할 곳을 찾아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로 했다. 

일상을 던지고 팽목항으로, 광화문으로, 안산으로 달렸다. 배에서 올라온 이들을 성심으로 닦아 가족품으로 보내고, 전국 각 교구와 본당에서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올바른 참사 해결을 위한 미사와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팽목항과 진도체육관 가족들의 곁에는 천막교회가 세워졌다. "왜 내 자식들이 죽었는지 알려달라"며 굶는 가족들 앞에 천막을 치고 같이 굶으며 기도했고, 가족들의 전국 순례길 매순간을 동행했다. 참사 직후 애도 메시지를 보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8월 16일 광화문 광장을 돌고 돌아 34일째 단식중이던 유민아빠 김영오 씨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그 모든 일은 지금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간절히 묻던 이들은 비로소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의 몫. 연민하고 연대하는 이들 사이의 하느님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교회의 예언자적 소명이 무엇인지, 교회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들도 많았다. "이제 그만하라"는 말이 세월호 희생자가 다니던 본당에서 나오기도 했고, 진상규명 서명운동을 진행하던 본당에서는 일부 신자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 참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전히 눈감고 귀막고 듣지 않는 이들이 있다. 

내일 우리는 세월호 1001일이 아닌 새로 첫날을 살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정의롭게 해결되는 그날까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듯, 우리는 이제 무력과 절망, 부끄러움의 기억을 벗고 희망과 해방의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 

감히 바람을 말하자면, 교회는 각 본당에서, 일상 안에서 아직 눈과 귀를 막고 있는 이들을 더 열심히 만났으면 좋겠다. 특히 깊은 절망감에 차라리 눈감았던 이들, 깊은 상처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손잡아 일으키며 예수가 했던 그 일, "에파타"라 말하며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여는 기적을 함께 만들었으면 좋겠다. 극심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건너야 비로소 부활의 희망을 만난다는 그 증언을 더 많은 이들이 말하고 들었으면 좋겠다. 

올해 부활은 4월 16일이다. 그날, 우리 모두 마음을 다해 기뻐하고 서로의 부활을 축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2017.01.09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정현진 기자


결론. 탄핵 이후의 한국사회와 신앙
덜 열심히 살아도 좋다. 다만 공정하자!
덜 발전해도 좋다. 다만 함께 살자
덜 진보해도 좋다. 다만 끝까지 개입하자
덜 기도해도 좋다. 다만 하나는 실천하자

2017년 첫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미사의 마중물
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