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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20100527] 김인국 신부의 종교와 정치, 교회와 국가, 영성과 정의(제2기 사회교리 7강 )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0.

대전교구 2기 사회교리학교 제7강 2010년 5월 27일

김인국 신부의 정치공동체



종교와 정치, 교회와 국가, 영성과 정의


1. 정치와 종교에 대한 상투적 논란


교회가 현안을 언급하는 순간 터지는 정교분리 논쟁. 4대강 관련 주교회의 성명서나 천주교연대의 생명평화미사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구구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결국 교회의 현실참여가 불만스럽다는 것.  


  - “성당에 가기가 무섭다.” | 뜻있는 평신도들

  - “신부들은 세속적인 일에 관한 자기 의견을 성경이나 교회의 권위를 이용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17)

 | 부산교구 김계춘 신부


원래 성속 이분법은 서양사회에서 생긴 말이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세속주의 진영에서 하던 말이다. 


근대의 세속사회는 중세종교를 부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신앙으로부터 이성의 자율, 교회로부터 국가의 자율을 마련하는 근대 서양사회의 목표였다. 정교분리는 계몽주의의 이상이었다. 그전까지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 교회의 정치참여(좁은 의미에서 성직자의 정치참여)가 전혀 논란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정치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조중동이 반복하는 논리는 이런 대목이다. 그러나 수구언론이 말하는 정교분리와 서양의 계몽주의가 원한 정교분리는 내용에서 크게 다르다. 


한편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교회 내부에서 정교분리를 말하고 있다. 주로 사회참여를 반대하는 논거로 사용하고 있다. 역사의 맥락을 모르고 떠드는 우스꽝스런 말이다. 근대주의의 세속주의자들이 어떤 동기에서 한 소리인지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일천한 소양 때문이다. 



2. 정치가 왜 나쁘지? 

 

인간은 정치적 동물 


대한민국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정치를 혐오한다. 여야가 매일같이 다투고 싸우니까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정치란 선거로 뽑힌 특정인들만의 전매행위가 아니다.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라면 몰라도 모든 인간은 정치를 떠나서 살 수 없다. 인간은 인간(人間)이기 때문이다. 인(人)은 간(間)에 존재한다. 인간은 ‘사이 간의 존재(being between)’다. 정치는 바로 이런 관계성에서 나온다. 더불어 살고, 함께 살아가는 이상 조화로운 공존을 위한 지혜로운 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게 바로 정치(政治)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여기서 정치의 의미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이 광장에 모여 의견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타협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당연히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 단체장과 의회의원들뿐 아니라 시민, 노동, 학계는 물론 모든 개인들은 합의도출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모든 시민은 말이 많아야 한다! 말이 정치다.


"우리는 정치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사람을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아테네에서 ·····”(페리클레스) 


   

3. 종교도 정치에 참여해야 하나?


성경의 하느님도 말씀을 하셨다. 보니 좋다고 하실 때도 있었고, 매우 언짢다고 하실 때도 있었다. 그런 발언으로 여론의 장에 개입하는 일이 정치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


그런 점에서 강생사건은 더 없이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당연히 세상이 반길 리가 없다. 탄생 사화에서 예루살렘의 술렁거림이나 헤로데의 추격을 보라. 집권세력 뿐 아니라 악령 집단에서도 불만을 터뜨린다. 


“그 때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 소리로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마르코 1,24)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라고 가르쳤다. 성속을 구분하는 음모를 간파하신 것이다. 


갓난아기 예수의 앞날을 내다본 시메온은 그분이 얼마나 정치적인 삶을 살아갈 지 일찌감치 예고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가 2,34)


어머니 마리아가 부른 노래는 더욱 직접적이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가 1,51-53)


이 노래는 일찍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불렀다. 지금은 수도자와 사제들 그리고 레지오 단원들이 매일 부른다.  


“배불렀던 자는 떡 한 조각 얻기 위하여 품을 팔고 굶주리던 사람은 다시는 굶주리지 않게 되리라. 아이 못 낳던 여자는 일곱 남매를 낳고 아들 많던 어미는 그 기가 꺾이리라. 야훼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가멸지게도 하시며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일으키기도 하신다.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뒹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혀주시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 2,4-8)



4. 이미 교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영역에 관여하고 있다.


물난리가 나면 교회는 언덕 위의 성당에 수재민들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모금을 해서 돕기도 한다. 이것이 사회참여다. 만일 이런 사회적 역할 수행을 기피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기적이고 야박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교회가 아니더라도 이웃의 기쁨과 희망, 고통과 슬픔을 나누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종교의 길 이전에 사람의 도리다.  

  * 뮈뗄 주교의 1909년 10월 26일자 일기




5. 그리스도교의 두 가지 흐름 | 정치와 종교 

1) 미국의 사례 


미국은 건국부터 지금까지 정치와 종교가 서로 깊은 연관을 맺는 사회다. 돈에 하느님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미국사회에서 개신교가 정치와 관계하는 두 개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자유주의 성향 프로테스탄트의 사회참여(the civil religious movement), 다른 하나는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의 종교우파운동(the religious right movement)이다. 


1970년대까지 자유주의 개신교도들의 시민종교운동은 미국정치에 관여를 하였고, 1980년대 레이건의 집권 이후에는 보수우파 개신교도들의 종교우파운동이 미국 정치에 개입하는 양상을 보였다. 전자가 하나의 공동체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일을 목표로 삼았던 반면 후자는 정치영역에서 종교적 가치의 우월성,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 종교적 입장이 헤게모니를 갖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2) 한국의 사례


미국과 매우 비슷하다. 민주화운동시기(197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 그리스도교는 미국의 시민종교운동과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다. 정치적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해 자유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적극 참여했다. 선각적 개신교계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중심으로 천주교회 일부가 민주화에 한 몫을 담당했다.  


그런데 90년대부터 보수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외환위기를 겪고 나서 더욱 그랬는데 인권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보다는 그리스도교의 보수적 가치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피임과 낙태반대) 


미국의 종교우파들은 철저하게 공화당 편향인데 한국 보수주의 교파와 성직자들은 친 한나라당 성향이다. 개신교, 천주교가 똑 같다. 다만 개신교회가 노골적 지지 행태를 보인다면 천주교회의 경우 암묵적으로 지지한다. 



6. 말하나 말하지 않으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교회는 사회질서에 대해 발언할 수 있고 국가정책에 대해 비판할 수 있으며 국가가 질서유지라는 본연의 책임을 올바로 수행하는 방식에 대해 제안할 수 있다." -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교회가 정책을 비판하고 신앙의 관점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며 옳은 일이다. 가령 한국천주교회는 낙태 합법화 법안을 비난하고 사형제도의 폐지를 제안한다. 같은 맥락에서 4대강 사업의 부당성을 비판한다. 앞의 둘은 되고 마지막은 안 된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웃기는 사람들이다. 



7. 민주주의는 가능한 프로젝트인가? 

오늘의 현실


  “정치적 관점에서 발전은 자유와 평화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강화를 의미한다”

(진리 안의 사랑 21항).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개발도상 국가들의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교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교회가 독재에 저항하는 버팀목 구실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언으로 시민운동은 약해졌고 교회는 보수화 일로를 걸었다. 성직자들은 특권층의 입장에 서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개체화, 파편화되었다. 그러자 소수 특권계층이 민주주의 체제를 조종하고 조작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그러나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종교의 성패는 갈릴 것이다.


1) 말만 하는 교회는 쇠락할 것이다. 화려한 말은 이미 넘쳐난다. 


① “세상의 변화를 위한 사회적 참여와 정의의 실천은 복음 선포의 본질적 차원이다. 다시 말해 인류의 구원과 모든 억압적 상황에서의 해방을 위한 교회의 핵심적 임무다”(현대의 복음 선교 34항). 

②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8항).


2)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집권세력을 편드는 것이다.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종교는 없다. 기존 질서를 수호하는 쪽으로 작동하든 아니면 새로운 질서를 향한 변화를 이끌든 작동을 한다. 가만히 있다고 중립은 아니니 그 경우는 체제수호 입장을 천명하는 것이다. 


3) 교회가 가진 힘 


사회운동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필요한 몇 가지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① 사람들을 모아 협력하게 하고 지속적으로 실천하게 만드는 연결망 ② 사회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연대의식과 긍지를 느끼게 해주는 가치관 ③ 사회운동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들을 조정하는 능력. 그런데 종교는 이러한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다.


① 사회운동 참여의 동기 | 정의와 평화에 대한 윤리적 근거들은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또 전례와 노래들 그리고 성인들의 이야기, 희생과 이타주의, 극기 등의 미덕은 사회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줄 수 있다. 


② 교회가 확보하고 있는 다양한 조직들 | 훈련된 리더십, 집단적 참여경험, 연대감, 소통구조 등은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③ 동일한 신원의식 | 사회운동을 위해 모인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종교는 언제나 지역을 뛰어넘고 국가의 경계를 넘는다. 계층과 직업과 인종과 민족의 다양성을 뛰어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 


④ 교회의 공신력 | 교회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견해는 일반 사회의 의견과 다른 대접을 받는다. 




8. 대안공동체요, 변화의 촉진자인 교회 


  

“정의로운 체제의 구축은 교회의 직접적인 임무가 아니라 정치계의 임무”(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8항)다. 그러나 사회가 불의에 기울 때 교회는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정의롭고 민주적인 체제로 옮아가도록 도덕적, 영적 조성을 마련해야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를 선포하는 것으로 소명을 다했다고 여겨선 곤란하다. 


“사회교리에는 선포의 임무와 더불어 고발의 임무도 있다.” 즉 “사회 교리는 죄가 있을 때, 곧 사회 전역에 갖가지 방식으로 난무하고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불의와 폭력의 죄가 있을 때, 이를 고발할 의무가 있다”(간추린 사회 교리 81항).


- “종교의 본분은 이데올로기나 당파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불변의 도덕적 잣대로 좌파와 우파 모두를 비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그분은 얼마나 많은 비난과 오해에 시달리셨던가! 현실참여 과정에서 “교회가 정치적이다. 지나치게 현실에 개입한다”는 등의 비난이 일어도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미국 가톨릭 주교단은 2003년 주교회의를 마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의 제도로서 교회는 당파적이 아니라 정치적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9. 끝내기 전에 


공적 삶을 외면하는 사적 영성 혹은 종교, 반면에 영적 관심을 외면하는 세속적인 정치,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시달려 왔다. 그런데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영성이나 영혼이 없는 정치는 둘 다 문제가 된다. 예언자적인 영성과 사회 정의를 위한 노력을 연결시키지 않으면 모든 게 헛수고다. 


“야훼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것이다. 

네가 정의롭게 행하는 것, 네가 따뜻하게 사랑하는 것, 

네가 겸손되이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 오직 이뿐이다.”

(미가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