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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20100220] 한상봉의 정의평화영성 4강- 관상과 혁명의 통일, 토마스 머튼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19.

2010 정의평화영성강좌 - 그리스도인의 실천과 영성

4강. 2010년 2월 20일(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승에서 순례하면서 그분의 말상대가 되는 것이며 그분처럼 ‘연민’에 관해 묵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 나는 “삶의 과정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 동반할 것인가?” 

강사 :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 장소 및 후원 : 대전교구 반석동 성당


1강, 1/09(토) 소박해서 새로운 교황, 요한 23세의 삶과 영성

2강, 1/23(토) 환대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도로시 데이의 삶과 영성

3강, 2/06(토) 하느님의 집으로 가자, 헨리나웬의 삶과 영성

4강, 2/20(토)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다, 토마스머튼의 삶과 영성 





<4강> 관상과 혁명의 통일, 토마스 머튼

    


1968년 12월 10일, 성탄절을 며칠 남겨 두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한 지혜와 사랑을 역설했던 토마스 머튼이 53세로 이승을 떠났다. 그는 방콕에서 아시아 지역의 관상수도회 원장들 모임에 참석해 마르크스주의와 가톨릭교회의 관상수도원운동에 대해 강연을 했으며, 달라이 라마와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날 강의를 마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선풍기에 연결된 전선에 감전되어 죽었다. 방콕에 머물던 미군장교들은 그의 시신을 애석하게도 방부처리해 수송기편으로 켄터키로 보냈고, 12월 17일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그러나 그는 37권의 책과 숱한 논문을 통해,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진리를 갈구했던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삶의 갈피 마다에서 감지했던 인간적 고뇌와 지혜를 송두리채 세상에 공적 자산으로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우리 자신의 영적 여정을 더듬어볼 필요를 느낀다.   


뚜렷하지만 짧은 생애의 갈피들


헨리 나웬은 토마스 머튼의 생애와 묵상을 다룬 책, <기도의 사람 토마스 머튼>이란 책을 냈다. 여기서 나웬은 그를 가리켜 "오직 하느님께만 집중했던 삶"이라 했다. 나웬은 겟세마니 수도원에서 딱 한 번 그를 만났다고 하는데, 그에게 가장 깊은 영감을 주었던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관상과 혁명이 결코 나뉠 수 없는 급진주의의 두 양식'임을 통찰했다고 말한다.


토마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프랑스의 프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뉴질랜드 태생의 화가였으며, 어머니 역시 오하이오 출신의 화가였다. 아버지는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이따금 퀘이커 모임에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부모의 영향 탓인지 머튼은 다섯살 때 이미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릴 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머튼이 태어난 이듬해 가족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롱아일랜드에 정착했는데, 머튼이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죽고, 그림 전시회 때문에 객지를 떠돌던 아버지는 1931년에 런던에서 뇌종양으로 숨진다. 당시 열여섯살이던 머튼은 영국 오캄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과 클레어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 1934년까지 머문다. 스무살 되던 해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긴 그는 공산주의자 모임에 참여하며 학생들의 간행물인 <제스터>의 삽화 편집자로 일했다. 


그는 에티엔느 질송의 책을 통해 스콜라철학에 접하고, 불교 승려였던 브라마차리와 교분을 맺으면서 그리스도교의 풍요로움에 눈을 떴다. 결국 1938년에 무어 신부에게 교리교육을 받고 그해 11월 16일에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때 십자가의 성요한의 영향을 받아 사제가 되고 싶은 열망에 휩싸이기도 하고,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할 마음도 먹었으나 포기하고, 1931년부터 1941년까지 뉴욕 올린에 있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방학에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피정을 했다. 


1941년에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을 떠나 뉴욕 할렘의 가난한 흑인들 가운데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던 1942년 12월 10일, 스물여섯살의 머튼은 모든 옷가지와 책을 주변에 나눠주고 더블백 하나만 들고 홀로 겟세마니 수도원에 들어갔다. 


토마스 머튼은 1968까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았고, 1948년 출간한 자서전 [칠층산]으로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수많은 글을 통해 영적 갈증과 평화를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자로 살았던 26년 동안 수도원을 떠난 것은 불과 몇 번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1968년에 수도원을 떠나 아시아로 가는 여행을 허가 받았으나, 아시아 종교의 숨결을 느끼며 갑작스런 감전사고로 죽었다. 그의 시신은 겟세마니 수도원으로 이송되어 12월 17일 안장되었다. 


무엇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길인가


토마스 머튼의 청년기는 [세속적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일기에 잘 나와 있다. 그는 세상에 대해 냉혹하리만큼 냉담한 태도로 비판했다. 놀랄만큼 민감한 청년이었던 머튼은 여행과 독서를 통해 얻은 인식력으로 세상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이러한 능력은 훗날 그가 고결한 관상과 진정한 돌봄으로 이끌리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는 적어도 삶에 대해 진정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가르치는 동안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길인가 고심을 거듭했다. 특히 할렘 지역에서 일하면서 그 갈등은 더 깊어갔다. 즉,  뉴욕 5번가에 있는 부유한 성 패트릭 대성당과 할렘에 사는 가난한 흑인 아이들 사이에서 모순을 일으켰으며, 할렘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는 영적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그는 아무런 유보도 없이 "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찾았던 것이다. 


머튼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먼저 에띠엔느 질송과 올더스 헉슬리였다. 질송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접하고, 헉슬리를 통해 신비주의와 접했다. 그후 머튼은 사람이 들짐승과 구별되는 삶을 살려면 기도와 금욕주의를 통해 영혼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헉슬리의 생각에 공감했다.  


또한 십자가의 성 요한을 통해 '영혼의 어둔 밤'을 인식하고,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를 통해 일상 속에서도 성인됨과 관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를 기도로 이끈 것은 로욜라 이냐시오였다. 그는 혼자서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해보앗는데, 꼬박 한 달동안 어두운 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성경을 읽고 묵상했다. "과연 하느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까닭이 무엇일까"하고 말이다. 


그는 스스로 규칙을 정해 매일 아침 동이 틀 무렵에 일어나 미사와 영성체를 하고, 시과경을 낭송하고, 아침마다 45분 정도 묵상하고 영적 독서를 했다고 한다. 훈련된 삶의 방식이 그를 더 개방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고, 그를 여유롭고 화를 덜 내며 불평 없고 지치지 않게 해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헨리 나웬은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 수용적이다. 그들은 붙잡기보다 어루만지고, 깨물기보다 입을 맞추고, 시험하기보다 경탄한다. 기도에 맛들인 사람들에게 자연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장애물이 아니라 길이 된다. 뚫을 수 없는 방패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지평을 넌지시 보여주는 베일이 된다"고 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뿐


그밖에 머튼은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였던 마크 반 도렌의 영문학 강의와 다니엘 윌쉬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영향을 받았는데, 그가 가톨릭교회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인도의 수도승이었던 브라마차리가 마련해 주었다. 브라마차리는 머튼에게 "그리스도교인들이 쓴 아름다운 신비주의 저서들이 참 많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두 책은 꼭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머튼의 아시아 종교에 대한 호기심을 상대화시키고, 오히려 서양의 신비주의 전통이 얼마나 풍성한지 보여주려고 했다. 먼저 제 것을 알아야 한다는 암시였다. 


대학시절 <제스터> 편집위원으로 있던  랙스는 토마스 머튼에게 직접적이며 영향을 준 유대인 친구였다. 훗날 머튼 "타고난 관상가요 예언자였다"고 말한 로버트 랙스는 뉴욕6번가를 산책하다가 느닷없이 "자넨 대체 뭐가 되고 싶은가"하고 물었다. 머튼이 "그저 좋은 가톨릭신자가 되고 싶다고 해두지"라고 답하자, 랙스는 "그럼 성인이 되고 싶다는 거지?"라고 되물었다. "내게 어떻게 성인 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발뺌을 하자 랙스가 멋진 대답을 날렸다. "바람으로써...성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뿐이지. 자네가 동의만 한다면 하느님은 당신의 뜻대로 자네를 빚어주실 것이라 믿지 않나? 자네가 할 일은 그저 그것을 원하는 것뿐이야."


머튼은 나중에 이 사건을 두고, "그는 나보다 훨씬 나은 그리스도인이었고, 하느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썼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랙스는 가톨릭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받은 모든 것을 감사했지만 그들에게 집착하지는 않았다. 서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다 보면 서로 해를 끼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이정표로 보았다. 


그가 결정적으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39년에 머튼은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물었다. "나는 어떻게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파괴의 강렬한 힘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발적인 자기절멸(絶滅)뿐이라고 자각했다. 더 많은 땅과 자원을 정복하려는 세상의 열망을 보면서, 머튼은 이를 모든 소유에서 자발적으로 거리를 두고 살라는, 벌거벗은 채 살아가라는 초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내가 소유한 것에 대한 집착이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일기에 썼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적응하면서, 자발적인 가난이 폭력을 막을 뿐 아니라 개인으로 하여금 위험의 한복판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수도원이 상징하는 초연함은 책임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심없이 두려움 없이 악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도록 해주는 최고의 행위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비폭력의 한복판에 뛰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를 비운 사람만이 진정한 혁명가'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 생명조차 자기 소유라 주장하지 않는다.

 

홀로 있는다는 것 


토마스 머튼은 수도원에서도 평화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질문했다. 이 혼란스런 세상에서 내가 설 곳은 어디인가? 물었다. 그는 26년 동안 수도원에서 침묵 속에 살면서 글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리포터로 살았을 뿐 아니라 세계를 관찰하는 리포터로 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는 점이다. 


그는 수도원에서 수많은 편지와 일기를 빼고서도 35권 이상의 책을 썼다. 일기는 1942년-1954년까지 쓴 <요나의 표징>, 그리고 1956-1965까지 쓴 <죄많은 방관자의 억측>이 있다. <요나의 표징>은 홀로있음에 관한 글이며, <죄많은 방관자의 억측>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연대감에 대해 묵상했다. 이처럼 머튼은 자신의 고독을 발견하고나서야 자기 세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었다. 


<칠층산>을 출간하고나서 갑자기 명성을 얻은 토마스 머튼은 계속 글을 써야 했으며, 누구보다 바쁘고 쉴 틈이 없었고, 소란스런 상황에 접하게 되었다. 1940년에서 1950년 사이에 수도원의 수도자 수는 몇 배로 불었다. 이를 두고 머튼은 "침묵과 홀로있음을 사랑하는 270명의 수도자들이 70명을 위해 세워진 건물에 처박혔다"고 <요나의 표적>에 적었다. 


그것은 결국 새로운 훈련과정, 새로운 건물, 새로운 재단 설립, 대화와 논쟁, 토론과 강의, 많은 트랙터와 불도저들, 분주한 수도자들의 들고남을 의미했다. 그래서 본인이 정말 순수한 관상적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인지 의심했다. 그럼에도 수도원장과 영적 멘토는 그에게 더 많은 글을 쓰라고 격려했다. 이 과정에서 홀로있음에 대한 자신의 갈망이 혹시 자기 편의주의나 자기 본위의 욕망이 아닌지 묻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관상을 위해 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머튼 침묵에 대해 이렇게 썼다.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았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 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침묵은 자비 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용서할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입니다. 

그 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 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할 때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그 분 만이 

내 마음을 이해하시면 족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않고 

그 분의 위로를 갈망할 때

십자가의 침묵처럼 

잠잠히 그 분의 뜻에 모든 것 을 맡길 때 

침묵은 기도입니다. 


머튼에게 글쓰기는 거룩함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다   

 

실상 고독은 그 자신의 마음이 홀로일 수 있다면 소박한 일상에서도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오늘 나는 홀로있음이야말로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이며, 나를 사막으로 부르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이 사막이 꼭 지리적인 좌표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다만 인위적인 기쁨이 소멸되고 하느님 안에서 재탄생하는 마음의 고독이다"(요나의 기적, 59) 


그러나 한편으론 여전히 절대 고독에 대한 갈망으로 카르투지오 수도원으로 옮기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접고, 글쓰기 역시 핸디캡이 아니라 참다운 침묵과 홀로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알아듣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머튼에게 거룩함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된 것이다. 그는 "만일 성인이 되려 한다면 나 자신이 무엇이 되었는지 종이에 옮겨야 하고... 완전한 단순성과 성실성으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머튼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의 내밀한 감정과 생각들을 공적인 자산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수도원의 침묵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자기 자신을 자신의 내적 삶의 리포터를 삼음으로써 이렇게 감정과 생각마저 제 소유로 여기지 않고 비워냈을 때 모든 것이 제게 속한 것임도 깨달았다. 공기와 나무, 전 세계가 하느님을 노래하고, 발 아래 땅에서 불과 음악을 감지할 수 있었다.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그를 가난하게도 하고 풍요롭게도 했으며, 평화와 행복을 안겨주었다. 


1951년 5월 학생들을 돌보는 영적 지도자(수련장)가 되면서 머튼은 새로운 사막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비'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침묵을 느끼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즉, 침묵을 얻자마자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타자의 발견      

 

트라피스트 수도원 창문턱에는 '오직 하느님께만'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토마스 머튼은 수도원의 침묵과 자연의 안식, 그리고 정기적인 기도생활에 녹아들어가 오직 하느님께 집중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자신의 고독을 깊이 있게 응시하게 되면서 '사회적 고독'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1951년 10년째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머물면서 "이제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께만' 쏟아부었던 열정이 정화와 고독을 통해 '모든 사람과 더불어' 가는 길이 되었다. 


1960년대 들어서 미국사회 안에서 인종갈등이 극심해지고, 베트남 전쟁으로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되는 상황을 겪으면서, 머튼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응답할 준비를 했다. 세상과 교회, 실천과 영성 사이에 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1968년 12월 10일 그가 죽던 날, 방콕에서 머튼은 '마르크스주의와 수도원주의;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날 어느 프랑스 학생혁명 지도자가 "우리도 역시 수도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에 머튼은 "수도자는 본질적으로 현실세계와 그 구성체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동의했다. 


관상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문제이며, 침묵과 고독과 기도는 개인적 자산이 아니라 함께 사는 이들과 돌보아야 하는 이들에게 속한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머튼은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베트남 등의 실상이 사실은 자신의 깊은 곳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 먼저 내 안의 파시즘을 척결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머튼은 수도자들이 세상에 대한 경멸의 외투아래 복음이 명령하는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수도자로서 가진 소명은 세상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도 세상을 경멸하여 등을 돌리는 것도 아니었다. 수도자의 임무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현실을 포장한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다. 이는 관상의 본질에 속한다.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것은 관상의 본질이다


머튼이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데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제임스 볼드윈과 마하트마 간디였다. 볼드윈은 흑인문제가 사실은 백인의 문제라고 알려주었다. 백인들이 자기들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고 파괴와 폭력의 뿌리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선한 백인들의 노력 조차 일시적 감정에 그치고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에서 비폭력운동이 좌절되고 블랙파워 등의 과격한 운동이 기승을 부리면서, 머튼은 자기 마음 속 폭력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면 모든 게 다만 전략과 전술에 머물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때에 머튼은 좀 더 깊숙한 곳에서 배어나오는 비폭력저항의 원천을 탐색하면서, 아시아 종교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마하트마 간디였다. 머튼은 <간디의 비폭력>이라는 책을 통해 소개하면서, "진리의 영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의 상황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그 속에 선을 향한 회심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한다. 


만약 폭력적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불가역적이고 가시적이며 윤곽이 뚜렷한 종양이라면 방법은 그것을 잘라내는 것 뿐이다. 그러나 악이 되돌릴 수 있고 용서를 통해 선으로 바뀔 수 있다면 비폭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머튼은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가 가능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비폭력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필요조건이라고 확신했다. 


"영적 자유의 최고형태는 피억압자와 억압자를 동시에 해방하는 마음의 힘에서 찾을 수 있다. 피억압자는 자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간디의 비폭력, 14-15) 


머튼에게 새로운 사막으로 등장한 하느님의 자비는 연대의 체험에서 나왔으며, 이런 체험을 통해 우리가 세상과 다른 이들 속에서 발견하는 악과 죄와 폭력이 실은 자신의 가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     

 

토마스 머튼은 1961년부터 가톨릭계 간행물을 통해 군비경쟁과 냉전에 대한 비판적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도로시 데이가 피터 모린과 창설한 가톨릭일꾼운동의 영향이 컸다. 머튼은 '가톨릭일꾼' 신문에 '전쟁이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연재물을 투고했으며, 도로시 데이와는 죽는 날까지 동지로 지냈다. 


1962년에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라는 책을 탈고했는데, 며칠 후 돔 가브리엘 총아빠스가 토마스 머튼에게 더 이상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글을 쓰지 말고 침묵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수도자가 쓰기에 적합한 주제의 글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군비경쟁을 반대하는 글이 수도회에 불명예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는 총아빠스와 머튼 사이에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불화가 잠복되어 있어서 나타난 결과였다. 


머튼이 이렇게 반박했다. "권위주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차원을 보거나 듣는 게 수도자의 역할이 아니라, 단지 어느 누군가가 규정해 준 만큼, 또한 규정해 주었기 때문에, 기존의 견해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수도자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수도자는 전위부대가 아니라 장교가 시키는 것만을 이행하는 후방의 화물운송부대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적 맥락에서 쇄신에 관해서는, 수도자의 역할은 단순히 높은 분들께 무조건 찬성하는 일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키는 대로 교회 관료들의 목적과 지향에 맞춰 기도만 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토마스 머튼은 장상에게 순명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결국 순명하지 않으면 득보다 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의 입장을 더 들어보자. 


"제가 속해 있는 곳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이 길을 제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했고, 그 길을 바꿀 기회가 왔을 때에도 이 길을 계속 걷겠다고 자유롭게 선택했습니다. 제가 눈엣가시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굳이 그렇게 되려고 해서가 아니라 제 양심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제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상들이 제게 가하는 제약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한 제약을 가하는 표면상의 이유에 제가 동의하거나,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런 일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시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집필 금지령의 이유에는 공산당신문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가톨릭일꾼' 신문에 머튼이 글을 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포스트모던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라는 이 책은 정식출판되지 못하고 등사본으로 알음알이로 주변에 회람되었다. 책을 받은 사람 중에는 훗날 바오로 6세 교황이 된 몬티니 추기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머튼은 1962년부터 열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의제 안에 전쟁과 평화 부분과 관련해 영향을 미치고 싶어했다. 다행히도 1963년에 요한 23세 교황이 발표한 회칙 <지상의 평화>에는 머튼의 주장과 유사한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온다. 또한 1965년에 인준된 <사목헌장>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목헌장>에서는 머튼의 주장과 동일하게 '자연법의 보편적 원리'를 거스르는 명령은 죄악이며, "맹목적인 복종도 그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사면할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명령하는 자들에게 공공연히 저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 사람들의 정신은 최상의 찬사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토마스 머튼의 평화론이 당시 교회에 충격이 되었던 것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대 교회를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이상과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적 외양은 거의 속빈 강정과 같은 것이며, 과거에 '그리스도교 사회'라고 불리던 사회조차 오늘날에는 무늬만 그리스도교이고 사실은 완전히 유물론적인 이교도의 영향아래 놓여 있다. ... 비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 비폭력과 사랑에 관한 복음의 윤리를 '감상적'이라고 비하하곤 한다." 


아시아적 종교심성의 발견 


토마스 머튼은 <칠층산>을 쓴 지 20년이 지난 후 일본어판 서문을 쓰면서, 자신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동기가 세상에 대한 부정적 감정으로 온통 착색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죄많은, 자기 중심적인, 돈에 굶주린 세상과 불화를 일으켜 떠난 것이다. 그러나 수도생활을 통해 머튼은 그들에 대한 연민을 배웠다. 문제의 중심에 내가 있음도 발견했다. 따라서 머튼은 사랑과 진리에 대한 신뢰를 통해 사회적 정치적 참상에 동참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이 길에서 아시아의 위대한 현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장자였다. 장자는 주전 550-250년 사이에 중국에서 활동한 도교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머튼은 장자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깨어나게 해주며 자각하게 해 준다. 선은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가리킬 뿐이다."(선과 맹금, 49-50) 


이것은 새로운 관점이며 경험이었다. 머튼은 <장자의 길>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쓴 다른 어떤 책보다도 이 책을 쓸 때 나는 즐거움을 느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그가 장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를 좋아하는 까닭을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장자의 길, 9-10) 에서 자기의 실존에 대해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은 것이다. 


머튼은 기본적으로 기술과 과학에 대해 인색하다고 평가받았다. 하느님에 대한 진술 뿐 아니라 객관적 진리에 대한 염증이라고 할까, 이런 태도는 장자에게서 영향받은 바 크다. 

 

신발이 맞을 때 

발은 잊힌다 

허리띠가 맞을 때 

배는 잊힌다 

마음이 바를 때 

'옳음'과 '그름'은 잊힌다 

(장자의 길, 112) 


머튼은 과연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말과 토론이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고 있는지 의심했다. 구원의 신비에 대한 지성적 분석과 정교한 글들이 우리를 진리의 근원에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지 의심했다. 머튼은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인식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파악하기 위해 점점 더 복잡한 수단을 절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체계적인 절망이라 부른다. 


장자를 통해 머튼은 비폭력에 대한 영감을 무위(無爲)의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또한 관상생활에서 관상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반대했다.


"우리가 만일 늘 관상, 관상, 하느님과의 합일, 신비적 합일, 하느님과의 친밀 등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그러나 도달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그런 것들에 대해 계속해서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우리는 진짜 즐길만한 것, 행복을 누려야 하는 것, 하느님을 위해 찬양해야 하는 일상생활의 본질적이고도 참다운 경험을 노치게 된다."(소란한 세상에서의 관상, 351) 


그리고 마침내 관상과 행동을 구분하는 일의 피상성을 간파했다. "도인(道人)이 추구하는 참된 평정은 무위의 행동 속에 있는 고요함, 달리 말해, 이름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행동과 관상의 구별을 넘어서는 고요함이다"(장자의 길, 26) 장자는 "물고기에게 필요한 것은 물 속에 잠기는 것이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도 안에 잠기는 것"이라고 했는데, 머튼은 하느님이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자신을 잊을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이런 체험 속에서, 모든 게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변함으로써 세상이 달리 보이는 지경을 이른다. 


"내가 선(禪)을 붙들기 전에 산은 그저 산에 지나지 않았고 강은 그저 강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선에 다가섰을 때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엇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선을 이해했을 때 산은 산이었고 강은 강이었다."(선과 맹금, 140) 


토마스 머튼의 <선과 맹금>은 1968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책이 머튼을 방콕으로 이끌었다. 그는 아시아 종교의 신비정통을 되짚어보면서 결국 서양 그리스도교의 케노시스(자기 비움) 개념의 참뜻을 깨달았다. 행동지향적인 서구인들은 자신의 힘과 영향력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소유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생산력을 따져묻는다. 그런 이들은 자기 자신을 생각의 중심에 놓는다. 


그래서 우리가 침묵할 때 말을 걸어오시고, 우리가 스스로 비울 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위한 여백이 없다. 여러가지 일로 바쁜 우리는 초월적인 하느님을 민감하게 느끼는 대신에, 인위적인 자극이 주는 사소하고 변덕스런 감각적 만족에 빠져든다. 머튼은 관상가들조차 자아의 정신적 만족을 위해 관상하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비판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환상과 황홀경과 모든 형태의 '특별한 체험'에 대해 그렇게도 적대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선사들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선과 맹금, 76-77) 


이런 그가 1968년 12월 10일, 성탄절을 며칠 남겨 두고 53세로 이승을 떠났다. 그는 이제 온전히 자신 마저 비어냄으로써 다른 몸으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