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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20100123] 한상봉의 정의평화영성 2강- 환대와 평화의 사도, 도로시 데이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19.

2010 정의평화영성강좌 - 그리스도인의 실천과 영성

2강. 2010년 1월 23일(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승에서 순례하면서 그분의 말상대가 되는 것이며 그분처럼 ‘연민’에 관해 묵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 나는 “삶의 과정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 동반할 것인가?” 

강사 :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 장소 및 후원 : 대전교구 반석동 성당


1강, 1/09(토) 소박해서 새로운 교황, 요한 23세의 삶과 영성

2강, 1/23(토) 환대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도로시 데이의 삶과 영성

3강, 2/06(토) 하느님의 집으로 가자, 헨리나웬의 삶과 영성

4강, 2/20(토)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다, 토마스머튼의 삶과 영성 




<2강> 환대와 평화의 사도, 도로시 데이

 


세상 속에 깊이 투신하면서 글을 쓰는 사람은 늘 내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도로시 데이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생전에 헨리 나웬과 토마스 머튼처럼 행동과 관상을 통합시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신앙이 실효성 있는 믿음이 되길 갈망하는 까닭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기자 출신으로 이 세상의 어둠과 빛을 두루 보고자 하였으며, 세상의 불의를 고발할뿐더러 신비롭고 놀라운 사랑의 깊이를 돌이켜 보도록 합니다. 그녀는 여섯권의 책과 1천 5백편에 이르는 기사, 수필, 비평 등을 썼는데, “글과 행동, 둘 다 실천입니다. 둘 다 세상에 대한 윤리적 반응에서 나온 인간의 응답입니다.”하고 말했죠.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한 부르심


도로시 데이는 1897년 미국 부르클린에서 한 자유기고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집에선 하느님의 이름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나 어린 나이부터 그는 성인의 삶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병자들, 절름거리는 사람들,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성인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회상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이 움트고 있었답니다. “왜 악을 처음부터 피하지 않고, 그것을 치료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는가? 사회질서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예들을 보살피기만 하지 말고,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성인들은?” 


고민 끝에 그는 종교에 문을 닫고, 당대의 진보적인 정치에 희망을 두게 됩니다. 그의 친구들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로 그들과 함께 다양한 좌익간행물이나, 반제국주의 연맹 같은 조직에서 일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한편에선 슬픔과 외로움과 도덕적 영적 혼란으로 어지러웠답니다. 흥분된 정치참여가 초월성에 대한 그녀의 열망을 완전히 덮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교회로 귀의합니다.


그녀가 회심한 것은 다만 슬픔 때문이 아니었지요. 임신과 출산이라는 자연적 행복의 경험으로 찾아왔던 거지요. 딸을 임신하고 출산하는 가운데 그 즐거움과 감사의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고, 이러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그녀를 하느님께로 인도했던 거지요.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친구들과 남편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불가지론자이며 무정부주의자였던 남편은 가톨릭주의를 경멸했고, 그가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관계가 끝날 것이라고 연거푸 경고하였던 차였습니다. 여기서 도로시는 ‘하느님인가 사랑인가’를 택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가톨릭교회를 향한 그의 걸음은 곧 노동계층을 배신하는 것으로 비추어졌습니다. 


그런데 응답은 피터 모린이라는 덥수룩한 사내의 모습으로 왔습니다. 1932년 어느 날 주머니에 팜플렛과 자료 따위를 불룩하게 안고서 그는 도로시를 찾아왔습니다. 이 당시 미국은 경제공황으로 실업자들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도로시는 워싱턴에서 열린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실업자행진을 취재하러 갔다가 워싱턴의 성모무염시태 성당에 들러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을 동료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열리기를” 간청했는데, 그 다음에 이루어진 방문이었지요. 

피터 모린은 55세의 농부 출신으로서 지난 20년 동안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복음을 행동으로 옮길 고유한 비전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가 그 비전을 현실로 만들 적임자라고 이미 결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서의 철저한 사회적 메시지를 수행하는 운동을 생각해 냈습니다. 단순히 불의를 고발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질서, 노동의 철학과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에 바탕을 둔 새 질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부와 교회가 그러한 프로그램을 실행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에 따라 지금-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할 것이며, “사람들이 더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창조하는 일을 할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가톨릭일꾼(catholic Workers)'운동입니다. 

1933년 5월 1일 성요셉 축일에 ‘가톨릭일꾼’ 신문이 유니온 광장에서 배포된 이래, 이 신문은 미국 전역에 있는 노속인들과 실업자들에게 무료급식을 행하던 ‘환대의 집’에 중심을 두고 있는 운동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또한 가톨릭일꾼공동체는 전통적인 애덕활동뿐 아니라 사회 정의와 평화운동에도 참여하였지요. 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린과 만난 뒤 50년 동안 이 운동에 몸담게 됩니다. 부르심이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도록 그분에게서 초대받는 것입니다. 이는 토마스 머튼이 말하듯이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응답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는’ 문제라서 정해진 길을 걷지 않고 자기 고유한 길을 찾아나가는 과정입니다.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베네딕트는 수도원에서, 프란치스꼬와 글라라는 철저한 가난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길을 찾았습니다. 도로시 데이 역시 피터 모린의 첫 방문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으며, 그녀가 바라던 ‘사회질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성인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했습니다. 그 답변은 도로시 데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해 그러한 성인을 실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안전함을 바라지 않는 신앙


도로시 데이에게 삶이란 하느님의 영과 함께 걷는 흥미로우면서 진지한 사랑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면서 모든 뜻을 하느님께 맡겼습니다. <가톨릭일꾼> 신문을 처음 만들 때 도로시는 자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걱정하였죠. 그 때 피터 모린이 말했습니다. “성인의 역사를 보면 자본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보내 주십니다. 인쇄비를 댈 수 있을 거예요. 성인들의 일생을 읽으면 알게 됩니다.” 이 말은 도로시의 평생에 걸친 지침이 되었다.

실제로 도로시는 가톨릭일꾼운동을 하면서 규정이나 재단, 이사회도 구성하길 원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안전장치에도 기댈 생각이 없었습니다. 불안전함과 취약함 가운데 자신을 놓음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느 환대의 집 일꾼들이 현실적으로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편지를 보냈을 때 이렇게 답장을 보낸 적도 있죠. “마이클, 당신의 신앙은 어디 있어요?”

돈과 재산에 관한 도로시의 생각은 신앙으로 꽉 차있었고, 또 한편으론 실용적인 것이었습니다. 돈이 필요할 때 도로시와 일꾼들은 하느님께 청했는데, 때때로 단식을 하거나 가까운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계속 바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간혹 필요한 액수에 꼭 맞는 기부금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일꾼에서는 전혀 정부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도로시는 “정부가 준 것을 정부가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도로시는 “사회는 가족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정부에 기대지 않고 개인의 순수한 자비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선을 통해 무료급식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만약 돈 때문에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 일을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라 여겼던 것이지요. 모든 일은 우리 자신이 손발이 되지만 결국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요.   


잊혀진 사람들 속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사랑


도로시 데이는 특별히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들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도로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정말로 알아보는 길은 우리가 아는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을 사랑할 마음이 있는지” 묻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도로시는 급식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수척한 얼굴들 속에서, 일용한 빵과 더불어 장미를 구할 줄 아는 노동자들 속에서, 도시의 시멘트 바닥을 뚫고 올라온 가죽나무의 울퉁불퉁한 아름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도로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을 무척 즐겨 인용하곤 하였지요.


도로시 데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육화되었듯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그리스도의 성체를 받아모심으로써 육화를 계속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도로시의 친구였던 롤하우저는 이를 두고 “하느님께서 한때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동하셨던 것처럼 지금은 당신 아들의 모습을 닮고 그를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행동하신다”고 표현하였지요. 


가난한 이들에게 환대의 집을 열어 밥을 제공하고, 그리스도교 평화주의를 옹호하며 반전시위에 참여하고 농경공동체에서 땅을 일구고, 글을 쓰고 신문을 만들었던 그녀의 삶을 이끌어간 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였고, 빠듯한 하루 생활 속에서도 도로시는 영성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도로시는 가능한 대로 매일 미사를 하였으며, 원하는 이들과 저녁기도를 바치고, 묵주신공과 중재기도, 예수호칭기도, 침묵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녀는 아무리 일이 많아도 일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저항했으며, 혼자서 독서하고 기도하며 침묵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도로시의 미사책에는 그가 기도해 주고 있는 긴 목록의 사람들 이름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습니다. “만일 누군가 이러한 ‘기도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가톨릭일꾼운동의 모든 것을 놓치는 것”이라고 늘 말하곤 했지요. 나중에도 도로시는 이렇게 말했죠. “내가 삶에서 무엇인가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덕분이다.”

            

사랑하는 이는 “충분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법이랍니다. 도로시 데이는 73세가 되어서 폐수종에 시달렸으며, 호흡곤란과 동맥경화, 심장성 부종으로 고생했지만 일을 멈추지 않앗습니다. 1973년에는 76세의 나이로 비폭력 시위를 벌이는 산 조아퀸 밸리의 차베스와 농장 노동자연맹에 합류하였고, 이 때문에 다른 항의자들과 더불어 열흘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1980년 11월 29일 초저녁에 사랑하는 딸 타마의 곁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뉴욕시의 그리스도 탄생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생전에 도로시 데이는 자신을 ‘성인’이라 말하던 이들의 생각을 딱 잘라 거절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산상설교에 근거한 ‘영원한 개혁’이 도로시의 지도력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것을 위해서 그녀는 기도하고 연설했으며, 글을 쓰고 단식하고 항의하였으며, 굴욕을 참아 내었고 감옥에 갔습니다.”


원칙적으로 군인은 신자 될 수 없어


최근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대체복무제 이야기가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병역거부자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입장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도전이 됩니다.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의 집총 거부였지요. 살상무기인 총을 잡지 않겠다고 거부함으로써, 군사재판에서 항명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 현재 1300명이 넘고, 매년 500여 명의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약식재판을 거친 뒤 바로 감옥으로 보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가 우상숭배라 하고, 총을 잡는 것은 평화원칙에 어긋난다고 보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복음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업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초기부터 엄격한 평화주의 원칙을 지켰습니다. 로마의 교부 힙폴리투스가 반포한 교령에 따르면, 여전히 세례 받은 교인은 사형을 집행하거나 군대의 선서를 수행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었고,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예비자나 그리스도인은 교회공동체에서 축출되었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과 군대복무는 절대로 조화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요.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맹기(盟旗) 아래, 그리스도와 악마의 군기(軍旗) 아래, 빛과 어둠의 병영(兵營) 안에 있다는 것은 서로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동일한 인간이 그리스도와 악마라는 양자에게 의무를 짊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 주님께 칼을 빼앗긴 사람이 어찌 전쟁을 수행할 수 있으며, 어찌 평화시대일 따름인데도 군대에 복무할 수 있는가? 요한에게 군인들이 와서 처신을 위한 규칙을 얻기는 했고, 한 백부장이 신자가 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의 칼을 빼앗으심으로써 모든 군인의 무장을 해제시키신 것이다.


이처럼 폭력을 배격해야 한다는 입장은 초기교회의 교부들의 한결같은 입장입니다. 오리게네스는 교회란 거룩하고 사제적인 백성이므로 그의 몸이 피로 얼룩져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또는 국가)의 승전(勝戰)을 위해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의로운 일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근본적인 평화주의입니다. 이레네우스는 “자유의 법, 곧 하느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도들에 의하여 온 땅위에 알려졌고, 그 결과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그들이 전쟁의 칼과 창을 보습과 …낫으로…, 그러니까 평화의 도구로 만들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제는 이미 싸울 줄이라고는 모르고 오히려울 줄이라고그들의 뺨을 치면 다른 뺨마저 갖다 대어 주게 되었을진대, 그렇다면 예언자들이 말한 분은 다름 아닌 이런 결과를 나게 하신 그분(예수)입니다.” 예수가 그러하듯이,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전쟁(폭력)과 인연이 멀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리게네스의 다음 말을 자신의 말로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칼을 쥐고 백성에 대항하지 않고 전쟁하는 법을 익히지 않게 되었으니,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평화의 아들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막강한 군대를 통해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던 로마제국 안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 있고 과감한 선언이었습니다. 군대의 무력은 그가 이방인이든 적국인이든 자국민이든 ‘백성’을 겨냥하고 그들을 참살하는데 동원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사실상 지금도 군대는 지배자의 가장 중요한 통치수단입니다. 로마제국 한가운데서 성장한 그리스도교는 이런 국가주의와 황제숭배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군대뿐 아니라 국가 공직에서도 물러나고, 로마시민이라면 누구든 즐기던 검투경기나 야수싸움에 끼여들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축일에 참여하여 잔치 음식을 먹거나 노는 것도 삼갔습니다. 


예수의 마지막 기적은 폭력 금지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을 통해 환대의 집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을뿐더러 이러한 일상적 활동을 넘어서는 ‘그리스도교 평화주의’를 철저하게 수행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부들 역시 <사목헌장>을 통하여 평화 문제에 관하여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였는데, 인류는 참된 평화를 찾아서 새로이 회심하여야 하며, 평화의 건설자들은 “하느님이 아들이라 불릴 것이므로”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공의회는 “진실하고 숭고한 평화의 뜻을 해명하며 전쟁의 야만성을 단죄하고, 평화의 주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정의와 사랑에 뿌리박힌 평화를 확립하고 평화의 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과 협력하도록” 열렬히 호소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말하기를, “예수가 제일 먼저 행한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한 기적이었으며, 배고픈 군중들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이었다. 그리고 예수가 마지막으로 행한 기적은, 예수를 체포하려는 사람들에게 맞서서 베드로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입힌 상처를 치유하신 것”이라고 했지요. 예수는 날카롭게 명령하셨습니다. “칼을 치워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도로시 데이는 그 말씀이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신문에서 사설을 통해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스페인에서 무서운 종교탄압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방법에는 반대한다.” 

도로시 데이의 철저한 평화주의 때문에, <가톨릭일꾼> 신문은 많은 독자를 잃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교회를 비난하던 인민전선을 반대하고 오히려 파시스트인 프랑코 반란 세력을 지지하는 분위기였으니까요. 미국의 몇몇 교구에선 주교들이 교구 안에 있는 모든 교회와 교구학교에서 신문구독을 금지시켰습니다. 결국 스페인 전쟁은 1939년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고,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은 2년 후 참전하게 되지요. 


우리 생활의 법칙은 자비를 실천하는 것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도, 인종차별과 나치운동의 사악함을 알고 있었으나, 도로시 데이는 전쟁을 수단으로 하여 악과 싸운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계속되는 수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변호하러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고 나서도 가톨릭일꾼운동은 전쟁에 줄기차게 반대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은 전쟁 교도소나 시골의 노동단지에서 일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장을 하지 않는 위생병으로 군복무를 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일꾼> 신문은 성프란치스꼬가 길을 들인 늑대 옆에 서 있는 그림과 함께 “승리 없는 평화”라는 말을 곁들여 반전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실었다. <가톨릭 양심적 반대자>란 신문도 발간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애국적인 사람들에게는 배신자처럼 느껴졌고, 많은 주교들에게는 곤란한 일이었지요. 도로시는 우리가 전쟁 중이라고 해서 우리의 적을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도로시는 거듭 말했죠. “우리의 생활의 법칙은 자비의 일을 하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때에도 가톨릭일꾼운동은 더욱 완강히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1965년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전쟁이 확대되면서 3년 안에 미군의 숫자가 51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보였습니다. 방어능력이 없는 외딴 마을들이 전투기와 헬리콥터로 파괴되었고, 예수회 신부인 다니엘 베리간은 신문에 베트남을 ‘불타는 아이들의 땅’이라고 썼습니다. 유니온 광장에선 가톨릭일꾼 봉사자들이 시민불복종 행위로 징집 등록증을 불태웠고, 이 자리에서 도로시 데이는 전쟁의 부도덕성을 알리고 항거의 몸짓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가톨릭일꾼운동의 애덕활동은 평화운동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의 애덕이 도로시 데이의 생각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놀라운 애덕활동을 평화주의로 더럽히지 말라’는 비난이 쏟아져 들어오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데 반해 전쟁은 기아를 가져다주었고, 우리가 괴로워 우는 이들에게 위로를 가져다는데 반해 전쟁은 비참과 폐허를 가져왔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에게 해준 것은 무엇이든, 친절이든 폭력이든, 그분께 직접 해드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것이다.”

한편 토마스 머튼은 1961년부터 <가톨릭일꾼>신문에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연재물을 투고하기 시작했지요. 이 글은 훗날 바오로 6세 교황이 된 밀라노의 몬티니 추기경에게도 전달되었으며, 1965년에 발표된 <사목헌장>에 중요한 내용들이 반영되었습니다. 이를 테면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과 그 주민들에게 무차별 파괴를 자행하는 모든 전쟁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범죄이다. 이는 확고히 또 단호히 단죄받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공의회에서는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도 포함되었습니다. 사목헌장의 이러한 내용은 이미 1963년 초에 교황 요한 23세가 발표한 회칙 <지상의 평화>을 통해 이미 확인된 것입니다. 도법스님과 더불어 지난 몇 년 동안 탁발순레에 나섰던 이들이 말한 것처럼 “평화를 가져오려면 우리가 먼저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마무리 묵상/평화기도문

 

세 끼 밥 굶지 않고 

나 혼자 등 따뜻하다고 평화 아닙니다. 

지붕에 비 안 새고 

바람 들이치지 않는다고 평화 아닙니다. 


평화는 내 스스로 찾아 나설 때 

비로소 오는 것임을 알게 하시고 

바로 지금부터 

세상의 평화를 만드는 일에 

내 이 한 몸 기꺼이 쓰게 하소서.

내 형제 내 자매 고통스러워할 때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내 동포 내 민족 전쟁의 불안에 떨 때 

침묵하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