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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20090527] 김인국 신부의 정치공동체 강의(제1기 사회교리 7강 자료)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19.

2009년 5월 27일(수) 저녁 7:30~9:00

대전가톨릭문화회관 2층 사랑관


사회교리의 실천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사례



- 사람은 사람 그 이상이다. 인간의 존엄과 죄의 비극

-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꿈

- 대한민국, 옥(獄)의 현실을 신(信)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사제단 그들은 누구인가?


1. 친북좌파/ 불법폭력세력의 정의


① 진보 개혁을 빙자한 친북 사회주의 사상가들(네이버 지식iN)

② 종교인으로서 양심도 없는 집단(뉴라이트전국연합 | 2008.7.1)

③ 불법폭력집단(경찰청 선정)

“수구좌파들, 이제 커밍아웃하라!”(서울대 윤리학과 박효종 교수 중앙일보 인터뷰 | 2009.4.13일자)

  • 사제들이 시국을 비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분들이 제일 잘못한 것은 성속의 경계를 너무 자유롭게 넘나든 거예요. 속세의 일을 “신앙의 이름으로 단죄한다”는 건 정말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할 이야기예요. 정의구현사제단이 무슨 권한으로 신앙이란 이름을 꺼내드는지, 자기들만 옳다는 독선과 아집을 속세의 세계에다 들이미는 건데, 굉장히 오만한 태도입니다.- 사제단이 정치적이라는 건가요?

  • 김대중 · 노무현 정권 때도 문제가 많았지만 그때는 그분들이 정말 친하게 지냈어요. 어떤 분은 청와대를 드나들기도 했고요. 사제들이 성의 세계에 있다면, ‘카이사르의 세계’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합니다. 성의 세계에 있으면서 세속의 소금이 되려는 역할을 해야죠. 하지만 성직자들이 하려면 품위 있게 해야죠. 사제단의 편견이 도를 넘는다는 겁니다. 촛불시위 때 사제복을 입고 미사를 드리면서 세속에서 거룩함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건데 그렇게 성과 속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책임한 태도가 어디 있느냐고 비판하고 싶었습니다. 

사실상 우리 사회의 성역(중앙일보 김종혁 기자)

  •  “박효종 교수는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독한 소리를 마구 쏟아놓을까. 그동안 청와대와 집권당 대변인조차 함부로 논평하기 꺼려왔던 사실상 우리 사회의 성역인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대놓고 공격한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일상의 쟁점을 일일이 “신앙의 이름으로 반대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우리 사회는 신정국가가 될지언정 다원적인 민주사회는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작년 촛불 집회 때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시국미사를 드리고 가두행진을 벌인 사제단은 대도무문의 공정한 행동이라기보다 특정한 가치관에 경도되어 나타난 편협한 정파적 행동으로 보였다고 비판했다.” 

⑥ 언젠가 명동성당 앞에서 “이러려면 차라리 환속하십시오, 신부님”이라고 쓰인 현수막도 보았습니다. 

  • 또 적잖은 이들이 정의구현사제단을 ‘붉은 사제단’으로 부르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략) 정의구현사제단은 ‘거룩한 분노’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왜 ‘거룩한 참회와 반성’은 없습니까? 효순이 미선이 사건의 왜곡, 광우병파동을 둘러싼 어처구니없는 선동. 용산참사를 또 다시 갈등과 미움으로 부추기는 선연한 적의, 그 모든 곳에, 그 모든 순간에 정의구현사제단의 사제들은 있었습니다. 정의는 오로지 길거리 시위에서만 구현됩니까? 고통 받는 이들을 선동 하는 것이 과연 사제들의 자세인지- 정치와 종교는 분명 그 갈 길이 다릅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제정일치의 시대를 위해 극렬한 반정부투쟁을 하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들, ‘그때 그 사람’으로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오늘도 내일도 길거리 시위에 나선다면 제가 권해드릴 일이 있습니다. 차라리 옷을 벗고 정치에 입문하십시오.(2009.2.6 전여옥)


2. 그들은 양반입니다.


2008년 10월 충북대학교인문학연구소 주관 인문주간행사 | 

양반문화 : Noblesse Oblige - 그 원리와 사례(경주 최부자, 유일한, 요셉의원 선우경식,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3. 사제단은 왜 탄생되었는가? - '정의(正義)는 하느님의 대표적 속성'


이름에 들어있는 ‘정의’라는 말

사제들의 자발적 결사체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은 1974년 탄생하였다. 이름에 들어있는 ‘정의’는 하느님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하느님을 모신 자리가 정의로운 곳이며, 하느님을 몰아낸 자리가 불의한 곳이다. 한편 정의는 하느님의 살아계심이며 하느님의 일하심이다. 반대로 불의는 하느님의 현존과 역사에 대한 반대요 저항이다. ‘정의구현’이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면 불의는 하느님 나라를 폭행하는 짓이다. 정의는 예수님의 꿈을 향한 여정이다. 그러나 불의는 그분의 꿈을 꺾어버리는 일이다. 우리는 역사의 현장에서 이런 통찰을 키웠다. 


  • 3-1. 교회의 새로운 가르침

교회의 영역은 성당 담장에 국한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 자신도 그렇게 믿고 그렇게 지냈다. 세상이란 피안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통과하는 장소, 잠시  참고 견뎌야 하는 인고의 처소 정도로 여겼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아픔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다. 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 공식입장이 대표적 사례다.(안중근 의사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갈등)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계기로 가톨릭교회는 봉쇄의 삶을 마감하고 오랜 세기동안 굳게 닫고 있던 문을 활짝 열었다. 교회는 언제나 쇄신되어야 하는 존재이며, 그 쇄신은 바로 세상과의 적극적인 소통이며, 이웃들과 동고동락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신도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도들의 단체가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도의의 단체는 사실 인류 역사에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사목헌장 1항) 


이런 변화를 예측한 사람은 드물었다. ‘제2의 성령강림사건’이라고 자평할 정도로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교회는 ‘시대의 징표’라는 생소한 말을 쓰기 시작했고 세상을 복음의 눈으로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현세질서를 복음에 맞게끔 가꾸는 일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헌신할 일이라고 격려하였다. 


  “그리스도의 구원 성업은 본래 사람들을 구원할 목적을 가졌지만, 현세 질서를 개선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전할 뿐 아니라,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 질서를 완성하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교회와 세계 안에서, 영적 질서와 현세 질서 안에서 자기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질서는, 비록 서로 구별되지만, 하느님의 한 계획 속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신자이면서 동시에 시민인 평신도는 이 두 가지 질서에 있어서 동일한 그리스도교적 양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평신도교령 5항) 

  

공의회는 현세 질서에 대한 사목자와 평신도의 임무를 명확한 어조로 지침을 제시했다.


“현세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사람들의 마음을 합하여 현세 질서를 마련하고 끊임없이 완성해 나아가는 일이다. 사람들이 현세 질서를 바로잡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향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온 교회의 임무이다. 창조의 목적과 현세 사물 사용에 관한 원리를 밝혀 주고, 현세 사물의 질서를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하도록, 윤리적 내지 영적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사목자들의 임무이다. 평신도는 현세 질서의 쇄신을 고유의 임무로 알고, 현세 질서 안에서 복음의 빛과 교회의 정신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써 구체적으로 직접 행동해야 한다. 평신도는 시민으로서 다른 시민들과 함께 각자의 능력대로 책임감을 지니고 협력할 것이며, 어디서나 만사에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찾아야 한다. 이와 같은 사도적 활동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은 신자들의 사회 운동이라 하겠다. 공의회는 이런 신자들의 사회 운동이 현세 생활 모든 분양에 파급되기를 바라며 문화에도 파급되기를 바란다.”(7항)


“문을 열어 바람이 들게 하라!”(요한23세 교황)



  • 3-2. 한국교회의 변화 

한국천주교회도 공의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공의회 폐막 이듬해였던 1966년 5월 주교단은 사목교서를 발표하여 당시 정치·경제·사회적 부조리를 지적하고 그에 대응하는 교회의 입장을 표명했다.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는 주교단 공동교서(1971.11.14)와 주교단 공동선언 (1972.8.15), 1975년 성년(聖年)을 준비하는 사목 교서(1974.7.5)가 줄줄이 이어졌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함으로써 신앙인들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런 변화를 불편하게 여겼다.



  • 3-3. 사제단 태동기의 한국사회   

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추진으로 엄청난 농촌인구가 도시로 몰렸다. 이들은 저임금으로 가격경쟁력을 떠받치는 산업예비군이 되었다. 저임금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저곡가정책이 동반되었다. 덕분에 수출은 늘고 공장은 힘차게 돌아갔다. 하지만 결실은 재벌과 기업주에게 집중되었다. 부모는 시골에서 골병들었고, 자식들은 도시빈민이 되어 시들어갔다. 박정희가 경제가 발전이 돼서 얼마나 좋으냐고 자랑했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공장에서 새 물건이 나올수록 노동자는 헌 사람이 된다.”고 나무랐다. 급기야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이 죽었다. 


5 ·16반란을 일으켜 4 · 19혁명의 열기를 짓밟은 박정희는 군정을 거쳐 민정 이양을 하고 7~8년 동안 집권하다가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붙어서 간신이 이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헌정을 마구 짓밟는 반칙과 억지의 결과였다. 


독재자는 여당 내의 개헌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를 탄압하면서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에서 늦은 밤에 공화당 단독으로 3선 개헌안을 전격적으로 가결시키고(1969.9.14) 이를 국민투표로 확정한 뒤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1971.4.27).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판사들의 집단행동, 이른바 사법파동, 의사들의 집단행동인 수련의 파동, 광주대단지 파동 등 정신이 없었는데 학생시위마저 계속되자 서울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1971.10.15) 바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그것도 모자라 둘째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10월 유신을 선포함으로써(1972.10.17) 대한민국을 완전히 겨울 공화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고는 계속 터졌다. 김대중 납치 사건(1973.8.8)에 이어 1974년은 긴급조치의 해가 된다. 박정희는 긴급조치 1,2호를  선포하여(1974.1.8) 많은 학생, 교수, 종교인, 변호사 등 양심적 지식인들을 잡아다 감옥에 가두었다. 급기야 인민혁명당재건위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조작, 주요 반정부세력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하는 등 강경하게 대처하였다. 인혁당 사법살인이 이뤄지는 1974년은 천주교회 역사에 또 다른 전기를 가져다준 해였다. 


3-4. 지학순 주교의 구속


폭군 박정희는 맘껏 권력을 휘두르며 국민을 괴롭힐 때, 교회는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이렇다 할 저항을 보이지 못했다. 1974년 7월 6일 중앙정보부는 유럽에서 돌아오던 주교 한 명을 김포공항에서 납치했다.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였다.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였다. 주교는 얼마 뒤 풀려났지만 7월 23일 “유신 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 다시 구속되었다. 지 주교는 긴급조치 1,4호 위반혐의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는다. 


주교의 구속사건은 교회 안팎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구속되던 날로부터 그해 9월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신부들은 거의 월요일마다 각 교구를 순회하면서 사제회의를 개최하였고, 지 주교와 민주인사들의 석방 등을 요구하며 미사를 드렸다.  시간이 흐르자 신부들은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를 절감하고 박상래 신부를 대표로, 함세웅 신부를 총무로 선정하였다. 

1974년 9월 23일 사제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으로 확정지었다. 사흘 후 한국순교자대축일인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민주회복, 구속자석방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다. 이 날이 사제단의 생일이다.


3-5.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마태오 25,36)


지학순 주교의 석방운동을 전개하면서 사제들은 학생, 노동자, 민주 인사들의 투옥에 침묵했던 일을 부끄럽게 반성했다. 그리고 늦깎이로 감옥에 들어간 사제들은 거기서 만난 양심수들이야 말로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깊은 충격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후의 여러 시련은 그야말로 은총이 되었다. 많은 사제들이 미행에 시달렸고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무서워서 도망갔다가 성령의 힘으로 제자리에 모였던 복음의 제자들처럼 신부들도 정권의 폭력을 두려워하고 현실의 아픔을 외면하던 일을 뉘우치게 되었다.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 싸운 청년, 학생,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면서 교회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또 회개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3-6. 깊어가는 가을, 사제들의 성숙한 연대 


사제단은 1974년 11월 6일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공권력을 남용하는 정권을 맹렬히 비판하며 제2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1월 27일에 종교계, 학계, 언론계 인사들을 망라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결성되는데 여기서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75년 2월 6일의 기도회에서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제3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2월 24일에는 <인민혁명당 사건의 진상을 공개하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3월 21일 명동성당에서 “자유언론 회복과 고통받는 이들과 민주회복을 위한 인권회복기도회”를 열었다. 


1976년 3월 1일 또 다른 운명의 날이 닥쳤다. 그날 명동성당의 기도회 말미에 <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되었는데 이를 문제 삼아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목사 외에 신현봉, 문정현, 함세웅 신부 등이 구속되었다. 이후 명동성당에서 3·1 사건 관련 구속자들을 위한 특별미사가 계속 봉헌되었고, 그 때마다 유신체제의 부당성을 강하게 나무랐다. 

1978년 5월 16일, 노동자를 위한 특별미사에서 사제단은 노동자들의 권익은 민주회복과 직결된다고 선언하였고, 1979년 6월 24일에는 <민중복음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해 시월에 독재자가 죽었다.  



4. 1980년대 민주화 운동


▵ 1980년 5월 30일 광주교구 사제단은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을 발표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실상을 대외적으로 알렸다. 

▵ 1982년 4월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가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관련자들을 은닉해 준 혐의로 구속되자 6월에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표하여 미국 문화원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전두환 정권의 퇴진을 촉구하였다. 

▵ 1984년 1월, 노동탄압 중지와 통일논의의 활성화를 주장하는 성명서 발표, 9월 24일 명동성당에서 사제단 창립10주년 감사미사를 갖고 <이 사회의 인간화를 위한 선언>을 발표. 

▵ 1985년 6월 8일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표하여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피해보상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올바른 평가를 촉구하는 한편 노동자 구속에 대해서도 항의하였다. 

▵ 1986년 8월 4일에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관련하여 ‘성폭행 고문 진상 규명과 인권 회복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이 사회의 민주화와 인간화를 거듭 호소한다>는 제하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 1987년 1월 24일에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고문 중에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사제단은 <고문살인의 종식을 위한 우리의 선언>을 발표하여 고문 살인의 진실을 밝힐 것과 고문기관의 해제, 정권의 퇴진을 주장하였다. 그해 5월 17일 명동성당에서 광주민주화운동 5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사제단의 폭로는 유월민주항쟁을 촉발한다. 6월 10일에는 정권 퇴진과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참가를 결의하며 <우리의 기도와 선언>을 발표하였다. 불완전하나마 유월항쟁의 성과로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열매를 획득한다. 



5. 90년대 사제단 활동의 진화


5-1. 평화통일과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

  • 민주화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사제단은 1980년 후반 통일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1988년 7월 4일 사제단은「민족의 하나 됨을 위한 우리의 기도와 선언」을 발표하고, “통일논의의 활성화, 한반도의 평화, 통일과 민주는 하나” 등을 주장하며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천명하였다. 

  • 1989년 6월 6일 사제단은 임진각에서 80여명의 사제와 3천여 명의 전국 신자들과 함께 통일염원미사를 봉헌하였다. 그 즈음 임수경(수산나) 학생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하였는데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자 임수경은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사제단은 7월 7일 전국상임위원회에서 목자의 심정으로 임수경의 귀환에 동반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문규현 신부를 파견한다. 문 신부는 깊은 고뇌 끝에 방북을 결행, 8월 15일 판문점을 통과함으로써 분단의 장벽을 넘는다.   


문규현 신부의 방북으로 사제단 소속 신부들이 국가보안법의 망령에 시달리게 된다. 1989년 8월 21일 국가보안법철폐를 위한 서명운동을 시작으로 통일운동과 함께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나서게 된다. 

1999년 9월 7일 명동성당에서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삭발단식기도회를 23일 간 바쳤고, 2004년 11월 18일 역시 명동성당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염원하는 단식기도(14일간)에 돌입하였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곧바로 혼란을 불러 올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오랜 세월동안 익숙해진 나머지 빛보다 차라리 동굴의 어둠 속에 그대로 주저앉으려는 낡은 습관의 힘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의 굴레를 과감하게 깨뜨리고 나면 우리 마음에 서로 모시고 살리는 새로운 가치관이 굳게 세워질 것이며 아울러 온 겨레가 커다란 통일의 집을 짓는데 쓸 반석도 마련될 것입니다.” 

              - 성명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단식기도회를 마감하며” 중에서  



5-2. 생명운동


새만금을 계기로 사제단은 생명운동에도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2001년부터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에서 군산시 고군산군도를 거쳐 비응도를 연결하는 33km의 방조제를 쌓아 4만여 헥타르의 갯벌을 매립하려는 간척사업의 철회를 요구하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다. 이 때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사제단 대표이며 방북의 주인공인 문규현 신부였다. 가히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새만금 갯벌 살리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저는 솔직히 갯벌의 중요성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이 갯벌을 살려달라는 어민들의 목소리가 작지만 하도 애절해서, 그저 그 소리가 꺼지지 않게 해야겠다는 단순한 심정으로 달라붙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는 동안 갯벌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이 바로 개발지상주의자들, 간척 강행론자들의 모습과 다름없었구나 하며 가슴을 쳐야 했습니다. 새만금 살리기 운동에의 참여는 바로 그걸 참회할 수 있었던 기회요 여정이었습니다.”

-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하는 새만금 갯벌이 평화 「평화신문 2001, 6, 17」


불교환경연대 대표 수경스님과 함께 문규현 신부는 부안 해창 갯벌에서 출발하여  서울광장에 이르기까지 65일간 309킬로미터를 삼보일배로 순례하였다. 


5-3. 북녘동포 협력 운동

 

1989년 방북 이래 선구적으로 대북 나눔 운동에 나섰다. 지금까지 대림절과 사순절에 매년 두 차례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1995년 여름의 대홍수와 이듬해 1996년 북한전역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식량사정이 극한상황에 몰렸을 때 사제단은 긴급으로 북한수재민 돕기 운동을 전개 5억 4천만 원 상당의 쌀을 보냈다. 이후로 매년 지속적으로 독립적인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5-4. 반전평화 운동


김대중 정부 이후 SOFA 개정 여론이 높아진다. 사제단은 1999년 10월 SOFA 전면개정을 위한 연대를 강화하고 여러 단체와 함께 ‘불평등한 SOFA개정 국민행동’을 결성했고 특히 매향리 폭격장 폐쇄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이 모든 것이 분단이라는 원죄와도 같은 죄악의 구조에서 파생된 결과입니다. 또한 미군이 폭격을 했어도 한국정부가 배상할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SOFA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이때에 불평등한 한미관계가 정립되지 않고서는 민족의 평화도, 통일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올해 6월도 지난 역사를 기념하는 것이 아닌 평화와 통일을 계속 외쳐야만 하는 현실입니다. 2000년 6월 오늘 이러한 현실 인식 속에서 나와 교회와 민족의 공동고백을 통해 책임 있는 역사참여와 평화와 통일의 희망으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해방을 이루기 위해 결단하고자 합니다.”

「SOFA 전면개정과 매향리 사격장 폐쇄를 위한 우리의 기도와 선언 

“더 이상 우리의 삶을 폭격하지 마라!」중에서 

 

2002년 6월 13일 미군장갑차에 치여 두 여학생이 죽음을 당했다. 미군은 사죄를 거부하고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경찰의 비호 아래 두 여학생의 죽음을 은폐조작하려고 했다. 재판관할권 이양과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두 여학생을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사제단은 전국 각 교구 단위로 <신효순, 심미선 추모와 형사재판관할권 이양, SOFA전면개정 촉구를 위한 시국기도회와 미사>를 열었다.


“불평등의 지속은 진정한 평화일 수 없습니다. 매년 주한미군 범죄가 수백 건씩 발생하지만 가해자 미군이 제대로 처벌받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것은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때문입니다.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고, 피해를 입어도 당하기만 하는 관계는 거부되어야 합니다.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은 전면 개정되어야 합니다. 불평등한 관계를 단호히 끊고, 진리와 정의를 향해 눈을 돌리는 것이 참된 사죄이고 평화의 시작입니다.”

-「고 심미선, 신효순양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호소문」중에서


혹한이었지만 사제단은 천막도 치지 않고 노상에서 8일간 단식기도회를 열고 매일 효순이와 미선이를 위한 미사를 봉헌했다. 사제단의 단식기도회가 끝나자 불교계가 단식법회를 이어갔다. 

 

    

6. 반대 받는 표적


6-1. 박종철 죽음의 진상과 삼성 비자금 증언

6-2. 촛불 시국미사

6-3. 오체투지 


사제단은 비난과 지지를 동시에 받는다. 보수진영으로부터는 미움을, 진보진영으로부터는 사랑과 공경을. 하지만 보수언론도 사제단의 과거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974년 유신을 반대하던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는 것을 계기로 결성된 사제들의 단체다. 그 시절 이 단체는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이었다. 87년 박종철 고문사건 폭로에도 역할을 했다. 누구도 나서지 못하던 시절에 사제들이 몸을 던졌다. 그래서 존경을 받았다.”(중앙일보 2008.3.11 문창극 칼럼)


하지만 사제단의 현재에 대해서는 정반대다.   


“세월이 지나며 사제단의 활동도 변화했다. 사제단의 홈페이지에 기록된 대표적 활동을 보면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양의 평양 방문,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단식기도, 언론개혁, 새만금 개펄 살리기 삼보일배, 송두율 교수 무죄 석방 기자회견, 김현희 KAL기 폭파 진상 규명, 반전 평화미사…. 하나같이 우리 사회에 이념적 갈등을 몰아온 사안들이다.”(위 칼럼) 


어제의 정신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사제단에 대하여 왜 이런 상반된 평가가 내려질까? 사제들의 현실 참여에 대한 세상의 가장 큰 오해는 다음과 같은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근대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종교와 정치는 분리됐다. 이 세상일은 국가가, 하늘의 일은 종교가 맡았다. 물론 종교가 현실 문제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다. 현실정치가 참을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종교는 희생을 무릅쓰고 나서는 것이다. 단 힘없는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압제 당하는 사람을 위해서 말이다. 기독교가 일제 때 3·1운동에 참여한 것도, 유신 때 정의구현사제단이 나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위와 같은 칼럼)


세속의 권력자들은 교회가 현실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마르코 1,24).


세상일은 국가가 맡을 테니, 교회는 하늘의 일에만 열중하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몰라서 그러는 무지의 소치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사람이 되신 신비를 핵심교의로 삼는 종교다. 하느님이 하늘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땅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소서”하고 기도하는 신앙인 것이다. 사제단의 현실참여는 고작 정치인들의 일에 관여하려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뜻과 생명의 법이 살아있도록 자기의 전존재를 봉헌하는 행위이다. 사실 현실참여는 사제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며 때로는 엄청난 불이익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사제들의 본분이며 운명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가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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