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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20090603] 황종렬 신학자의 사도직의 시대적응과 생태영성(제1기 사회교리 8강)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19.

2009년 6월 03일(수) 저녁 7:30~9:00

대전가톨릭문화회관 2층 사랑관


창조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 생태 치유를 향하여

“사도직의 시대 적응과 생태 영성”

                                      

황종렬 (레오, 주교회의 환경소위원회 위원)


차 례

  • 시작하면서 
    “생태” 개념의 그리스도적 이해

  • 시대의 변천
        통의 시대
        평면 시대
        입체 시대
        다시 통의 시대로
        지반 변화의 위기 시대

  • 맺으면서
    하느님의 숨으로서 인간이 그리는 하느님: 온 존재에게 집-밥-몸이 되어 주시는 분


[20090603.PHOTO] 제8강좌 환경과 생태계(황종렬 평신도신학자)



  시작하면서: “생태” 개념의 그리스도적 이해


생태(生態)를 뜻하는 영어 eco는 그리스어 oikos에서 왔다. 이 말은 원래 “집”을 뜻한다. “집”은 우리에게 물리적 공간은 물론 그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집안”을 가리키기도 한다. 말하자면 생태는, “집”과 “집안”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살림의 터와 공동체를 동시에 뜻하게 된다. 우리가 “생태=집=집안” 개념을 건강하게 통으로 이해할 때, “생태”를 매우 그리스도교적이고 복음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의미와 사명을 역동적으로 발굴하고 나누어 갈 수 있게 된다. 


생태를 “집안 살림eco-nomia”이라고 할 때, “집안”의 규모를 확장하여 적용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라 살림basileia”과 “지구 살림terra-nomia,” 그리고 “우주 살림cosmos-nomia”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생태”를 산다는 것이 단순히 우리가 하는 일(missio hominis)인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하시는 일(Missio Dei)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오늘 우리가 말하는 생태 영성은 근본적으로 창조 중심 우주-세계-나라-사람 이해를 원천으로 하며 하느님의 영으로 그분의 일에 참여하는 모든 과정으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과 사람, 사람과 만물의 서로 살림을 위하여. 


이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다스림(basileia tou theou)을 하느님의 집안 살림(oikonomia tou theou)과 하나로 이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의 창조(creatio)와 생태(oikos), 하느님의 창조(creatio: 영원을 향할 수 있는 신체적, 영적 건강으로서 창조)와 구원(salus=salvatio: 영원에 이르는 건강한 창조로서 구원)을 통합하여 우리가 이 시대에 수행할 사명을 좀더 우리 시대에 부합한 형태로 진술하고 실천할 토대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런 기초 위에서 아래에서는 먼저 인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우주 안에서의 여정을 돌아보고, 오늘 우리가 직면한 개인적-국가적-지구적-우주적 도전에 응답할 틀을 갖추는 데 필요한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생태 영성의 빛 안에서 성찰하면서 맺기로 한다. 


시대의 변천


통의 시대


우주의 나이는 우주의 팽창 속도를 측정한다든가 별무리의 질량을 잰다든가 오래 된 별의 빛의 나이를 측정하는 방식 등을 통하여 추론해 왔다. 오늘의 우리는 우주의 역사를 약 130억년에서 150억 년 사이 쯤 될 것으로 본다. 우주의 시간은 우리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범위를 한없이 초월해 있는 것인데, 이것은 물리적으로 우주가 그만큼 창조자 하느님께 가깝게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우주는 대폭발(Big bang)을 기점으로 존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우주에 기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기원이 있다는 것은 한 처음 창조의 시작을 증거한다. 이 폭발과 함께 소립자들이 생성되었고, 이어서 우주를 구성하는 원소들 가운데 수소가 생겨났다. 우주에 떠 있던 수소 원자들이 별을 형성하면서 핵융합을 일으켜서 다양한 원소들을 생성해 냈고, 은하들은 이런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하느님의 창조로 존재하는 우주에는 약 1,000억 개의 은하가 있고, 각각의 은하는 다시 약 1,000억 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를 포함하는 태양계는 이것이 속한 운하계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을 구성할 만큼, 우주의 규모와 공간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하다.*
*주교회의환경소위원회편, 창조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 1, 천주교중앙협의회, 2008, 76; 전헌호, 인간, 그 전모, 위즈 앤 비즈, 2007 참조.


우주가 탄생한 이후 처음에 생성된 별들이 폭발하면서 많은 원소들을 우주로 흩어 보냈는데, 이것들과 수소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행성들을 만들었다. 수많은 별들이 새로 태어났다가 소멸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태양계와 지구, 그리고 사람을 포함하여 지구에 존재하는 만물을 구성하는 물질들이 갖추어졌습니다. 태양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제3세대의 별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2세대 별의 폭발로 우주로 흩어졌던 물질들이 응결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때가 46억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우주를 구성하는 별들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 속에서 태양계와 지구가 태어났고, 지구에서 살고 있는 많은 실체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는 물을 구성하는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들은 이보다 먼저 우주에 등장한 것이다.

지구에서 37억 년쯤 전에 단순한 세포로 구성된 생명체가 탄생하고, 18억 년쯤 전에 진핵생물체가 나타나고, 5억 년쯤 전에 척추동물이 나타났다. 지구에는 약 1천만 종 이상의 동물과 식물, 그리고 수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다. 약 7억 년 전에 바다 속에서 최초로 생겨난 동물은 육지로 올라와서 진화되어 갔다. 식물과 동물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지구상에서 번성해 갔는데, 식물은 광합성을 통하여 동물에게 먹이를 주고 동물은 식물이 지구에서 퍼져나갈 수 있도록 씨앗을 퍼뜨려 주었다. 사람은 이렇게 생성된 우주와 지구별, 그리고 식물과 동물 등의 선-조건(先條件)을 토대로 태어났다. 이때가 3백만 년 전쯤이다. 인류의 조상이 출현한 이래 지금부터 4-5만 년 전에 우리의 선조라고 할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하였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존재하게 된 데는 우주와 태양계와 지구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물적, 생명적 토대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지구에 생명체들이 존재하게 된 이후에는 지구의 대기에도 변화가 생기고, 암석의 종류와 형태로 달라지게 되었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광물 4,200여 종 가운데 3분의 2 가량은 만일 지구상에 생명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조차 않았을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었을 정도로, 생명체의 출현은 지구의 구성에 결정적으로 작용해 왔다.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322921.html 참조.


이를테면, 우주-지구-생명-인류 발생 과정은 우주의 모든 별과 인류와 모든 생물이 우주의 저 광대한 역사와 공간 안에서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을 당신의 섭리로 이끄시어 당신의 사랑과 소통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 창조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 1, 76 참조.



평면 시대


인류는 동굴 시대를 지나고, 구석기 신석기 문화 시대를 지나면서, 마침내 오늘에 이르는 철기 문화 시대를 연다. 이 시기에는 인류는 일정하게 대륙과 지역별로 나뉘어서 자기의 삶의 자리를 평평한 지대로 보면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철기 시대에 바퀴와 무기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급격하게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심화되기에 이른다. 이 문명기에 이르면, 인간과 국가, 민족 사이의 관계가 일정하게 남성중심, 어른중심, 권력자중심으로 구조화되어서, 남녀, 노소, 주종의 틀로 구조화되어 간다. 조선시대초기에 제작된 지도로서, 이 시기의 사고를 잘 보여주는 한 지도를 소개한다.



이 지도는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 이회 등이 1402년(태종 2년)에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다. 이것은 원나라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승려 청준(淸濬)의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를 종합하고, 이 두 지도에서 미흡하게 다루어진 조선과 일본을 추가하여 편집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지도는 이회가 그린 “팔도지도”를, 일본 지도는 1401년(태종 1)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새 일본 지도를 참고하여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지도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복사본이 현재 일본 류코쿠(龍谷)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전시되어 있는 형태를 기준으로 할 때 이 지도의 규모는 가로 167.3, 세로 158.2 센티미터이다.


이 지도의 제작자들은 세상을 각이 진 형태로 이해하고 있고, 차이나를 중심으로 삼고 조선을 그 다음에 해당하는 나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먼저 받는 일본을 조선의 발 아래에 자리잡게 하면서 당대 조선의 일본관을 말없이 확인시켜 주고 있다. 또한 특히 아메리카 대륙은 아예 포착하지 못하면서 세계의 실상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중심은 위-지배 권력에 있으며, 사회는 상(上)-지배-권력을 추구하는 데 길들여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바로 이 “상” 중심 시대에 바닥-섬김을 중심으로 지구와 우주 공동체를 재구조화하면서 구원의 길을 선포한 우주적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위의 지도는 세계 지리학계가 15세기 초에 제작된 가장 훌륭한 세계 지도 중의 하나로 주목해 온 매우 귀한 지도이다. 당대를 기준으로 할 때 이 지도는 상대적으로 세계 관계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를테면 당시까지는 아직 그만큼 지구 세계에 대한 이해가 자기 지역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지도는 여전히 시대의 제약에 따라서 세계 관계를 사실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이를테면 세계가 하나의 연관 관계에 들어선 지구화 시대로서 모던 타임에 비하여 제한된 세계 관계를 살았던 시대인들의 평면 세계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입체 시대


1492년 10월에 콜롬부스가 아메리카에 닿은 사건은 철로 대변되는 파워와 배로 상징되는 거리 장악 능력을 앞세운 서구 국가들이 이같은 지배 종속 관계를 전지구적으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콜롬부스의 탐험은 서구인들이 지구 세계를 입체로 인식하는 사고틀 위에서 가능하였는데, 이러한 세계상을 담은 지도를 아래에 소개한다. 

위에서 소개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그려진 것보다 정확하게 200년 후인 1602년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는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라고 이름붙인 세계 지도를 차이나에서 제작한다. 이것은 여섯 폭 병풍형으로 제작되었는데, 가로 381, 높이 171 센티미터의 대형 지도이다. 비록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지도는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 지도와 유사한데, 그 지도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이 지도는 1603년에 이광정(李光庭, 1552-1627)과 권희(權憘, 1547-1624)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전해진다. 이 지도는 지구가 원형이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고, 이를 반영하기라도 하는 듯이 세계의 대륙과 바다를 타원형 안에 자리잡게 하였다. 아메리카가 자리를 잡고 있고, 특히 인도와 태국, 베트남 등 동남 아시아 지역 역시 어느 정도 비례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때까지 충분히 측량되지 못한 섬들은 제대로 그려지지 못하였고, 그때까지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섬들 역시 이 지도에 수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세계 관계에 비해서는 훨씬 더 실재에 근접한 지리적 세계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둥근 입체 지구가 현실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이 세계를 위 아래, 상하 구조로 기획한 것이 아니라, 마주보도록, 상관 구조로 기획하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는 관계에서는 더 이상 위 아래, 지배 종속, 우열 열등이 아니라, 상호 돌봄과 협력, 상호 섬김과 사랑의 대등한 관계가 이 세계의 기본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웅변한다. 여기에서 중심은 밑-바닥에 있으며, 그 중심이 온 존재를 위 아래가 아니라, 마주 보는 관계에 들어서도록 한다. 말하자면, 지구상의 온 존재는, 동식물이든 사람이든 광물이든 관계없이, 대척(對蹠)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주도 세력은 철과 무기, 그리고 배를 통한 거리 장악력, 그리고 지구의 실상에 근접한 세계관을 앞세워서 식민지배를 전지구적으로 확장시켜 지배-종속 관계를 구축해 간다. 그리하여 둥근 지구를 도리어 전지구적 지배의 장으로 전도시켜 간다. 이러한 정치적 지배력은 곧 부의 축적을 낳았는데, 서구는 이렇게 축적된 부를 통하여 학문 연구를 보다 더 활성화시켜 갔다. 그런 가운데 18세기와 19세기에 증기와 전기를 철과 결합시켜 산업혁명을 이루면서, 전지구 세계로 하여금 새로운 문명 단계에 진입하게 한다. 


서구 열강들이라고 일컬어진 나라들은 산업혁명을 앞세워서 더욱 더 철저한 형태로 지구상의 전지역을 식민지로 삼아갔다. 1910년 8월 일본에 의하여 한국이 공식적으로 식민지배를 받게 된 것은 서구의 식민지배가 마침내 전지구적으로 완결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 1910년대의 제1차 세계대전과 1940년대의 제2차 세계대전은 콜롬부스 사건 이후 계속된 식민지배와 산업혁명의 지배력이 폭력적인 형태로 결합하여 발생시킨 인류의 비극이었다. 


서구 국가들이 전지구적으로 추구하던 정치적인 식민 지배와 종속 시기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끝난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국의 종속과 해방이 현대 세계의 식민 지배와 종속 시기의 완결과 탈 식민지배 시기의 시작 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지배와 종속은 오늘 이 시대까지도 진행 중이라고 할 것인데, 이것은 식민 지배와 종속의 시기에 구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구 국가들이 지금까지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통의 시대로


탈식민지배 시기에 들어서 인류는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서 자기가 태어난 생명의 자리 지구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20세기 초에 금속 제재와 과학이 결합하여 만들어 낸 비행 시대를 우주에까지 연장하는 새로운 단계를 열기에 이른 것이다.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이 달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


인류 사회는 이 우주 시대에 과학의 발전을 통하여 지구의 중심이 지구 안이 아니라 지구 밖에 있다는 것을 보다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주장한 지동설은 이러한 전환을 우리 인류에게 준비시켜 주었다. 이 우주 시대에는 바닥이 하늘이고 하늘이 바닥이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끝째 됨, 무한한 섬김을 통한 하느님의 살림(oikos)의 진리를 일깨워 준다. 맨 처음 통의 시대에는 이런 사실을 과학적으로 알지 않은 상태에서 우주와 하나인 관계 속에서 살아 갔다면, 우주 시대에는 과학을 통하여 이런 진리를 깨달은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아직은 지구의 중심, 세계의 중심, 국가의 중심, 사회와 가족의 중심, 우리의 중심이 지구의 가장 깊은 곳[最奧心]에 있으면서, 이 중심의 중심은 지구 밖 태양에 있다는 것을 우리의 삶에 통합한 형태로 살지 못하는 면이 있다. 우주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는 서구를 중심으로 증기-전기-철도-자동차 등 과학 기술의 활용을 고도화하고, 원자력 이용과 유전 공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물(物)과 명(命)의 장악력을 높여 갔다. 이와 더불어 전화와 TV, 그리고 컴퓨터를 통한 소통 확장을 가져왔다. 이렇게 하여 인류 사회는 물리적 존재 세계에서 한편으로는 연대의 확장을 이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연대를 가공할 수준으로 파괴할 힘을 갖추어 갔다. 일례로, 지구를 둘러싸고 널려 있는 위성 파편들과 멈추어 버린 위성들은 인간의 과학적 지식과 노력의 산물들인데, 현재 지구 주변을 돌고 있는 위성은 800개 정도인데, 지금까지 쏘아올려진 위성 수는 약 6000개에 달한다. 아래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것들은 마치 지구의 띠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인간의 과학적 능력이 앞으로 발생시킬 수 있을 재앙의 수준을 말해 주는 듯싶다. 



우주 시대에 들어서 지구 주변에 쌓여 있는 버려진 위성 파편들
http://www.esa.int/SPECIALS/ESOC/SEMN2VM5NDF_mg_1.html에서. 



이 단계에 이르러 인류 사회의 주도적인 위치에 있는 부류는 작은 것, 보이지조차 않는 것들에 대한 인식을 정교화해 가면서 소유의 대규모화를 달성해 가는 중이다. 이에 반해 인류의 가난한 계층은 이러한 성취와 사유화에서 뒤쳐진 채, 주도 세력이 발생시키는 전지구적 파괴의 희생자로 아픔을 겪기 쉬운 위치에 놓여 있다. 이 단계에서는 한편으로는 유전자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향한 연구를 진전시켜 감으로써 생명과 자기를 알 가능성을 심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과 인간 자신을 사물화하면서 소외를 심화시킬 위기를 발생시키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이산화탄소에 기반한 산업화와 도시문화, 그리고 농업의 화학화 등에 의하여 전지구적으로 기온을 상승시킴으로써 지구상의 생물종을 줄어들게 하고 대기의 순환을 변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빙하와 물, 숲의 구조를 달라지게 하여,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의 존재 유형과 관계를 뒤바꾸어 가고 있다. 이것은 인류 사회가 다시 전지구 차원에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모든 존재와 더 이상 분리 불가능한 형태로 상호연결되어 있는 현실을 보다 더 명시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지반 변화의 위기 시대


오늘 우리 사회가 직면한 지구 온난화는 인류 사회가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지구와 우주 세계에 발생시킬 이러한 위기의 총체성을 잘 드러내 준다. 기후 변화는 가깝게는 산업혁명, 멀게는 1492년 콜롬부스가 아메리카와 유럽의 왕복항로를 발견한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유럽이 전 지구적으로 자신들의 지배를 확장하는 시도는 지구상의 민족과 온 생명 공동체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의 사회적, 경제적, 학문적, 문화적, 종교적 지대의 변화가 전 세계의 사회적 지대에 작용하면서 전지구의 사회적, 경제적, 학문적, 문화적, 종교적 지형을 바꾸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식민지배의 틀 위에서 도달한 산업화를 통하여 유럽만이 아니라 전 세계 공동체가 1492년 사건보다 더 총체적으로 전 지구에 영향을 미칠 기후 변화 현실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2007년 유엔의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지구 온난화 현상에 대해서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IPCC가 2007년에 발표한 연구 보고서의 내용들을 보려면 기후변화정보센터 자료실
 http://www.climate.go.kr/bbs/list.php?code=25&bname=publicity 참조.


 이 사건은 오늘의 사회가 딛고 서 있는 지대를 재성찰하게 만들고, 앞으로 이 지대가 전지구의 지형 변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를 식별하여 응답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옛 패러다임 혹은 옛 지형에 머물면서 바라볼 때, 그들은 그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수준을 넘기 어려울 것이다. 


1492년의 결과를 통합할 줄 아는 수도 공동체는 전 지구적 수도 공동체로 살아서 오늘 우리 시대에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 그렇지 못한 공동체는 끝나는지조차 모르게 끝나고 말았다. 오늘 기후 변화라고 하는 명백한 ‘신 지대’를 자신의 교구나 수도 공동체의 혹은 나라나 지역 사회의 존재 방식에 통합할 줄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은 1492년 사건을 통합할 수 있는가의 여부보다 더 빠르고 더 철저하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위에서는 기후 변화를 “신 지대”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사실은 이것은 단순한 여러 지대 가운데 한 지대의 성격을 띠는 지대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지구 전 공동체의 생존 자체에 변화를 가져올 지반(地盤) 변화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1492년 콜롬부스 사건 이후 서구가 그동안 서구 중심으로 발생시킨 전지구적 지형 변화가 차고 차면서 서구는 물론 인류 사회 전체가 지구 전 생명, 전 존재와 더불어 직면하게 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인류에게는 지반 변화의 위기일 수 있는 이 현실이 지구에게는 단지 조절 활동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보다 더한 존립 위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되었든 이 기후 변화는 일정하게는 동물과 식물들에게 먼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마침내 임계점(臨界點)을 넘을 경우 지구에서 큰 것들부터 작은 것들 순으로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실로 바닥에 가까울수록 자기의 본모습을 그대로 지켜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될 것이다. 샐리 맥페이그, 김준우역, 기후변화와 신학의 재구성, 한국기독교연구소, 2008 참조.

 

지구의 온도가 명백하게 올라가고 있는 오늘의 상황은 1590년 무렵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고 준비했던 것보다 더 분명하고, 일본의 조선 침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위기를 겪게 할 것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 전 지구 공동체가 기후 변화로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지구가 망가질 때, 그 위에서 어떤 경제, 어떤 문화도 제구실을 하기 어렵게 된다. 이것을 보고 인류 사회와 교회, 그리고 지구 생명 공동체가 “생태적 지반 변화”에 직면해 있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느님의 창조계가 위기에 처할 때, 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살 것인가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해 있다. 로스엔젤레스를 비롯해서 많은 도시들이 산과 강과 들과 어우러진 형태로 개발되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지진이 발생하면, 도시의 지반에 변형이 생기면서 도시가 파괴되고 지역민들은 재앙을 겪게 된다. 기온이 지구 생태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올라가는 것은 대기에서 지진과 같은 변동이 발생하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지진이 한 지역의 도시를 파괴하는 것보다 더 넓고 더 크고 더 심각하게 우리와 온 동식물에, 그리고 온 땅과 물과 바다와 대기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도시는 지반을 고려하여 건설해야 하지만, 지반은 도시를 고려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문명은 기후를 고려하고 기후에 적응한 형태로 세워지지만, 기온은 사람과 문명을 고려하여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생태적 지반 변화”의 심각성과 위기의 본질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기후 변화가 한도를 넘으면,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 연령 차별이나 장애인 차별을 극복하려는 어떤 시도도, 사회 정의나 종교 대화, 시장 경제나 자유주의 어떤 것도 다 큰 의미를 갖지 못하거나 아예 의미를 잃어버릴 수조차 있다. 이 위기 앞에서는 성도, 인종도, 연령도, 장애도, 정의도, 종교도, 문화도, 정치체제도 서로 구분지으며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하여 살아날 길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기후 변화는 인간 사회의 여러 이념과 가치 추구와 관련하여 고려해야 하는 한 현상인 것이 아니라, 인간과 지구 전체의 관계를 파국적으로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결정적인 지반에 해당한다. 우리는 땅을 딛고 땅에서 나는 것들을 먹으며 물과 공기를 마시면서 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생태적 지반 변화”를 파국적인 형태로 발생시키는 형태로 살고 개발할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이 바라시는 생명 살림(oikos of life)을 위하여 새로운 마음, 새로운 생활을 할 것인지, 결단해야 할 것이다. 지반이 달라지는 상황에서 이것을 자신의 사목에 통합할 줄 아는 교구나 본당, 가정과 개인이 택하는 복음화나 삶의 방향은 그렇지 못한 이들의 그것과 차이가 나게 될 것이다. 기후 변화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 공동체로 하여금 지금까지 도달한 인간 지성과 인류 문명을 기초로 지구의 현실을 제대로 보고 지구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식별하여 실천할 것을 요청하시는 “때의 표지”와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 당대에 유대인들이 그분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 바른 마음을 갖고 사는 민중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을 시찰하고 왔으면서도 일본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 김성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소유와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도 죽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것처럼, 이 시대에 자연에 폭력적인 형태로 개발하며 살아온 결과로 우리가 초래한 기후 변화의 파국적인 영향을 안다면, 돌아설 선한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알아도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위하여 파괴를 계속해 갈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교회는, 그리고 우리 신앙인 각자는 어느 편에 설까? 


이것은 나에게도 끊임없는 과제임을 고백하면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그러면, 지형 변화 과정을 통하여 도달한 지반 변화 상황에 직면한 지구 공동체에게 희망이 있는가? 예수께서는 회개하고 하느님의 다스림(basileia tou Theou: 하느님의 나라)을 믿으라고 하신 선포로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셨다(마르코 1, 15). 지배와 권력을 하느님의 다스림에 맞게 재구성할 것을 요청하시면서, 당신이 직접 비워서 사람이 되시고 사람들과 함께, 특히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과 함께 이 세상의 고난을 겪으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셨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셔서 인류와 온 생명이 하느님의 구원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게 하셨다.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의 구원의 양식이 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당신의 피와 옆구리에서 쏟으신 물로 우리의 옛 삶의 방식을 지배와 탐욕으로 물든 반생명 관계를 씻어 주셨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선포하고 증거하며 살아갈 “하느님의 살림”(oikos tou Theou)의 복음,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요청하신 회심의 방향이 있다. 

  이산화탄소를 먹고 비정상적으로 커온 현대 문명에 대한, 그리고 개발과 성장이라고 하는 미명으로 포장된 탐욕과 지배욕에 대한 깊고 정직한 성찰이 필요하다. 뼈를 깎는 것같은 이 정화의 과정을 통하여 하느님의 살림에 뿌리 내린 생태적 문명, 생태적 발전으로 돌아서서 서로 살림의 축복을 발생시켜 가야 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 그리스도 공동체는 자신의 회심과 복음 살이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 덩어리 초록별 지구와 인류와 함께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자비를 온 지구, 온 우주의 온 존재와 더불어 찬양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생태적인 한 백성 한 집안(basileia-oikos tou Theou)으로서 그분 안에서 굳건히 서게 될 것이다. 


인류는 하느님의 숨으로서 하느님의 창조력에 참여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자신을 질문하고 세계와 하느님을 탐구해 왔다. 그 흐름 속에서 물질의 심장과 생명의 원천을 향하여 돌진하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물질과 생명의 미시 세계에 도달하면서, 작은 것에서 하느님의 큰 생명을 읽고 하느님의 그 생명에 응답할 능력을 형성해 갔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탐구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이 모든 물과 명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그것, 자기가 하느님께 받은 숨, 곧 자기의 영이 될 것이다. 현대의 현자들이 끊임없이 21세기를 생태의 시대로 일컬으면서 영성의 시대가 되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것이다. 


맺으면서


하느님의 숨으로서 인간이 그리는 하느님: 온 존재에게 집-밥-몸이 되어 주시는 분


하느님은 우리와 온 우주 만물의 집(Oikos=Eco)이요 밥(Eucharist)이요 몸(Body)인 분이시다. 우리가 “생태”라는 말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 그리스어 Oikos는,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원래 “집”을 뜻한다. 집은 사는 자리이니 살림을 내포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집과 살림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품과 성전, 하느님의 평화와 안전 등 무수한 의미를 상기시켜 준다. 이 말은 단순히 사람의 집이나 자연의 생태를 가리키는 데서 그치지 않는 것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이 말은 우리에게 사람과 자연 만물의 “집의 집”을 상기시켜 주고, “집”이신 하느님이야말로 살리는 분으로서 참으로 온 “생태의 생태”이시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리고 바로 그 집의 집이요 생태의 생태이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온 우주 만물을 살게 하는 밥이자 몸이 되어 주기도 하신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집이요 밥이요 몸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 안에서 집과 밥과 몸이 하나라는 것을 선명하게 증거하기 위해 파견된 전령들이 있다. 여러 존재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배추벌레이다. 


배추벌레는 배추에서 살면서 배추를 먹는다. 배추벌레에게 배추는 집이자 밥이고, 그러므로 당연히 배추벌레의 몸이 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배추벌레와 배추를 통하여 우리에게 집이 밥이요 밥이 몸을 이룬다는 것, 그래서 집과 밥과 몸이 하나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구 온도가 올라가면서 기후 변화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잇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가 하느님과 우리 인류 사회와 지구의 모든 생명과 온 존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직시하고 그 깨달음에 맞게 살 것을 요청하신다. 집을 사고팔고 할 대상이나 부의 축적 수단으로 아는 데서 그치는 이들에게 집이 자기를 살리는 밥일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의 몸이기도 하다는 것은 불편한 사실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녹색을 이야기하면서도 생태를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신음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교회는 이미 명시적으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을 통하여 지구가 우리가 사는 인류 “공동의 집”(common home)이라고 확인하고 있다(2008년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 이런 이해를 배추-배추벌레를 통한 생태적 계시에 비추어보자면, 우리의 공동의 집 지구는 단순히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파헤치고 뚫고 개발하고 할 대상인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공동의 집인 지구는 어느 한 나라, 한 사회,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지구에 사는 온 인류와 온 생명체, 온 만물의 밥이자 몸이기도 한 것이다. 더군다나 지구를 하느님의 작은 집- 우주 큰 집 -이라고 할 때, 지구(와 우주)는 하느님의 집이자 밥이자 몸으로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지구 생명 공동체와 함께 살도록 주시는 ‘공동의’ 집이요, 밥이요 몸인 것이다. 


인류를 포함한 온 지구와 우주 만물은, 바오로 사도와 교부들이 증언한 것처럼, 하느님의 성전이요 하느님의 영광으로서, 하느님의 생명을 증거한다. 우주와 지구는 실로 하느님의 몸인 동시에 창조물 각각의 집이자 밥이자 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이 내주시는 것을 먹으며 하느님의 생명으로 서로 살리고 돌볼 책임을 갖고 사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오늘 21세기에 하느님과 창조계, 그리고 우리 사람의 관계로서 천지인(天地人)을 이해하는 생태적 접근법이다. 


하느님 집=밥=몸 패러다임에 익숙하지 않거나 배타적인 사람들은 하느님 집-밥-몸 이해를 회피하거나 왜곡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어느새 우리의 신학과 영성과 사도직에 깊숙이 파고들어와서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중이다. 여기서 한 가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연 만물이나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하느님 없이는 집도 없고 밥도 없으며 몸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 새로운, 그래서 오래 된, ‘생태 진리’를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더욱 더 충만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오늘 우리가 이 귀한 자리를 마련하였다고 믿는다. 



[20090603.PHOTO] 제8강좌 환경과 생태계(황종렬 평신도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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