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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20100109] 한상봉의 정의평화영성 1강- 소박해서 새로운 교황, 요한 23세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19.

2010 정의평화영성강좌 - 그리스도인의 실천과 영성

1강. 2010년 1월 9일(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승에서 순례하면서 그분의 말상대가 되는 것이며 그분처럼 ‘연민’에 관해 묵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 나는 “삶의 과정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 동반할 것인가?” 

강사 :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 장소 및 후원 : 대전교구 반석동 성당


1강, 1/09(토) 소박해서 새로운 교황, 요한 23세의 삶과 영성

2강, 1/23(토) 환대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도로시 데이의 삶과 영성

3강, 2/06(토) 하느님의 집으로 가자, 헨리나웬의 삶과 영성

4강, 2/20(토)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다, 토마스머튼의 삶과 영성 




<1강> 아주  특별한 교황, 교황 요한 23세 



지난 5월부터 계속된 촛불정국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다시한번 특별한 모습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어린 소녀들에게서 시작된 촛불문화제와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 독선적인 정부의 태도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지요. 한때 국민들에게 사과한다는 기자회견까지 한 정부였지만 이내 태도를 바꾸어 경찰을 동원해 촛불진압에 나섰을 때, 상처입은 시민들은 사제단이 보여준 시청 앞 시국미사에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때 한 사제의 입에서 나온 첫 발언이 “여러분, 외로우셨죠?”라는 따뜻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촛불을 함께 들고 나선 사제들에게 모두가 박수갈채를 보낸 건 아니었지요. 실상 단 한 명의 주교도 이 시국미사에 참석하지 않았고, 교계언론도 침묵했습니다. 일간신문에 우익단체들은 ‘천주교’ 이름으로 사제단을 비난하는 광고를 내고, 교회의 반응은 냉담했지요.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예언자들은 외롭기 마련인 모양입니다. 우리의 안락한 침상을 흔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타성을 꾸짖고, 내내 묻어 두고 싶은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에게 가라”는 복음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부서진 사람들에게 영혼의 창을 열어두었던 사제, 그래서 바티칸에서 가장 변방으로 내몰렸던 사람 중에 교황이 된 분이 계십니다. 교황 요한 23세, 고난과 아픔이 많은 그가 가톨릭교회의 대문을 열어서 갈라지고 상처받은 모든 이를 잔치에 초대하듯 교회로 불러들였습니다. 

              

농부의 아들, 안젤로 론칼리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1881-1963)가 교황 요한23세의 이름입니다. “나는 소토 일 몬테의 가난한 서민 가정 출신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교황 요한 23세는 말하곤 했습니다. 소토 일 몬테란 ‘산 밑’이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 베르가모 부근의 농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골마을이지요. 그의 부모는 소작농이었는데, 교황 재임 시절 그는 이렇게 말했죠. “인생을 제대로 구기는 길이 셋 있는데 여자, 도박, 농사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따분한 일을 택하셨죠.” 아버지는 하루 온종일 흙을 파고 고르는 일에만 매달렸던 소박하고 선한 농부였으며, 안젤로도 힘껏 아버지를 도와드렸습니다. 포도도 따고 여물도 주고 무도 심고 밭에 거름도 내었죠.


그가 베르가모의 소신학교에 들어갈 때, 아버지가 부쳐먹던 땅주인이 학비를 대주기로 약속했고, 어머니는 빈털터리로 소신학교에 가는 아들이 못내 안타까와 하루종일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2리라를 빌려다 눈물을 흘리며 안젤로의 책상 위에 놓았답니다. 그가 어른이 되어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신학교에 돌아왔을 때 교회 분위기는 근대주의에 대한 단죄로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기존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모든 사상을 교령과 회칙을 통해 단죄했습니다. 


그러나 신학생 시절 론칼리는 에르네스토 부오나이우티 교수와 같은 ‘주의를 요하는’ 인물과 친분을 맺기도 했지요. 로마 사피엔시아 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한 부오나이우티 교수는 1924년 교회에서 파문당했으며, 1931년에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조직에 의해 교수직마저 박탈당한 명망있는 지식인이었습니다. 론칼리는 그와 더불어 산책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훗날 고백했는데, 그 교수를 ‘에르네스토 신부’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1946년에 부오나이우티 교수는 자신을 파문한 교회를 열렬히 사랑하면서 64세로 선종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르친 내용을 살펴보면 단호히 배격하거나 취소할만한 내용이 전혀 없다”고 유서에 썼습니다. 그때 일을 회상하며 론칼리는 “물론 그분의 시신을 강복해 준 사제도 없었고 묘지 자리를 내준 성당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론칼리는 1904년 로마의 포폴로 광장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산타마리아 인 몬테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기차요금이 너무 비싸서인지 사제서품식에 참석하지 못했답니다. 가난한 집안의 보잘 것 없는 사제 서품이었던 셈이죠. 


근대주의 혐의가 유령처럼 따라붙은 사제


사제가 된 론칼리는 베르가모 교구의 교구장이었던 라디니-테데스키 주교의 비서로 일했습니다. 론칼리 신부는 주교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주교의 일정을 정하고 중요한 회의에 배석하면서 세심하고 과묵하게 주교를 도왔지요. 특히 주교의 열렬한 사회활동을 옆에서 도왔는데, 해외이주민과 여성노동자연맹의 사무실, 임산부를 돕는 ‘모성의 집’도 개설했습니다. 론칼리 신부는 노동조합과 형편없는 도시변두리의 주택사정도 잘 알고 있었는데, 이런 활동이 부유층의 비위를 건들려서 악의에 찬 투서가 로마에 들어가기도 했지요.


베르가모에서 가까운 라니카 제련소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을 때, 이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고 교구신문을 통해 성금을 모으기 위해 나선 사람도 테데스키 주교와 론칼리 신부였죠. 그러자 우익 성향의 <페르세베란차> 신문은 “주교의 자선금은 파업에 대한 축성이며 공공연한 사회주의 문제에 대한 강복이다!”라며 비판했습니다. 론칼리 신부는 반박문을 교회신문에 게재했습니다. 그는 레오 13세 교황이 <노동헌장>에서 노조활동을 옹호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교회가 정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교회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제관이 예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당한 사람을 모른 체 그냥 지나간다는 성서의 비유를 들어 “복음적 가르침의 빛을 받으며 사는 사제는 길 건너편에서 그냥 지나 모수 없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은 “권리를 박탈당한 힘없고 박해받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에 주교와 본당 신부들은 “정의의 문제”를 위해 일하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비오 10세 교황이 주교의 처신에 대해 “문책하지 않겠다”는 서한을 보내오자, 라디니-테데스키 주교는 이 ‘은근한 경고장’에 대해서 심정이 상했습니다. “교황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근대주의 시비는 초기부터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비오 10세는 1907년 <근대주의자들의 신조>라는 회칙을 발표하여 신학계의 역사비평적 방법, 교회 개혁에 대한 요구, 근대주의에 대한 옹호, 교도권에 대한 비판 등으로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가차없이” 교회 직무와 교수직을 박탈한다고 밝혔습니다. 1906년부터 론칼리 신부가 베르가모 신학교에서 교회사와 교부학과 호교론을 강의했으니 위험천만이 아닐 수 없었지요. 다행히도 곧이어 교황이 된 사람이 라디니-테데스키 주교와 절친했던 베네딕트 15세라서 그 참화를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새 교황은 론칼리를 두둔하고 학자들을 감시하던 로마의 염탐제도를 폐지했죠. 


로마의 변방, 발칸반도의 불청객, 론칼리 교황사절 


그러나 베네딕트 교황은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선종하였고, 비오 11세 교황 시절에 론칼리는 ‘근대주의’ 혐의로 라테란대학 교수직에서 밀려난 뒤에 줄곧 발칸반도에서 외교관으로 귀양살이를 시작하였습니다. 1925년 신자가 6만명에 지나지 않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감목대리로 임명받은 론칼리 몬시뇰은 주교도 없는 불모의 땅에 던져진 것입니다. 그 사이에 대주교가 되었지만 그가 하는 일이라곤 덜거덕거리는 노새마차를 타고 불가리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신자들을 만나는 것이었지요. 산속에서 산적 때문에 도망간 적도 있고 군 순찰대에 연행되어 초소의 나무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도 있지요. 불가리아에 신학대학을 설립하고자 했지만 바티칸에서 응답이 없고, 동방전례를 행하는 가톨릭신자들에 대한 홀대를 개선하려고 했지만 바티칸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주교직을 수행하면서 불만을 느낀 것은 불가리아 사람들이 아니라 로마에 있는 교회행정기관이었지요. 그는 이렇게 누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인간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정말 언짢습니다. 저마다 자리를 지키고 출세하려고 안달하면서 온통 그 이야기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성직생활을 이런 식으로 경멸하고 있으니...”


한편 불가리아 사람들에겐 특별한 친밀감을 느꼈습니다. 그가 1935년에 그리스와 터키 주재 교황사절로 임명되었을 때 고별강론에서 아일랜드 관습을 하나 소개합니다. 성탄절에 창가에 촛불을 켜두는 풍습이 있는데 거처를 찾아 헤매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거처가 있다고 알려주”있는호였지요. 론칼리 대주교”있약속합니다. “어디서든지 불가리아 사람이 제 집 앞을 지나가면 길눈이 어두운 분이라도 창문에 켜진 촛불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문을 두드리세요, 문을 두드리세요! 가톨릭 신자인지 아닌지 물어보지 않을 겁니다. 불가리아에서 오신 형제이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의 형제인 제가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친구인 제가 기쁜 마음으로 그날을 축제의 날로 지낼 것입니다.”


바티칸과 외교관계로 없고 무신론을 표방하는 터키와 ‘정교’를 국교로 하는 그리스에서 바티칸 외교사절은 불청객 같은 존재였지요. 그러나 론칼리 교황사절은 그리스도교가 탄압받는 상황에서도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와 친교를 맺고 대화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사제들에게 “까치발을 하고” 조심스럽게 직무를 수행하라고 당부했으며,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집전하던 모든 성사를 터키어로 집전했습니다. 당시 가톨릭 신부 중에 터키어로 자유롭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가톨릭교회가 외국세력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던 차였지요. 터키어 미사를 바치자 전통에 얽매어 있던 일부 가톨릭신자들은 자리를 박차고 성당밖으로 나갔지만, 터키외무성은 이탈리아 사람인 론칼리를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에는 이스탄불에서 행한 강론에서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르지 않고 “로마의 주교”라고 부름으로써 그리스 정교회 대주교와 포옹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한편 무솔리니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이름)민족을 침략했을 때 바티칸은 침묵했고 많은 주교들이 국수주의 논조로 환영 입장을 표명했으나, 론칼리 교황사절은 파시즘의 등장을 비난하곤 했지요. 그는 어느 피정에서 “세상은 복음정신에 위배되는 건강하지 못한, 피와 인종의 민족주의로 중독되어 있다”고 하였으며, 전쟁은 당사자 모두에게 엄청난 희생을 안겨주는 “도살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는 동안에 각 나라에서 쫓기던 유다인들을 도와주면서, 바티칸에 “가톨릭교회가 박해받는 유다인을 돕는 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비로운 행동”이라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바티칸의 반응은 냉담했죠. 그가 다시 바티칸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저는 매일 이스라엘의 불쌍한 어린들이 제 곁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 어린이들은 예수님의 친척이며 고향사람입니다.” 당시 론칼리 교황사절이 유다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유다인들에게 위조 세례증명서를 발행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가 로마의 가장 끝자락 발칸반도에서 20년 가까이 떠도는 동안에, 그는 바티칸에서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그의 근대주의 혐의도 베르가모에서 교구장 비서로 일하던 것도 까마득할 무렵, 1944년 전쟁 막바지에 비오 12세 교황은 느닷없이 63세의 론칼리 교황사절을 바티칸 외교의 가장 중요한 창구이며 교회의 맏딸인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로 발령했습니다. 그가 교회의 중심으로 옮겨오는 전환점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방향으로도 불어옵니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교황대사, 론칼리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 시대에는 스승이 없다”고. 그러나 교회 현실을 생각하면 “우리 교회에는 좋은 사목자가 없다”는 말도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세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제들이 ‘종교의 외피’만 쓰고 의례를 행하고 강론하고 신자들을 만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다시 요한 23세 교황을 ‘현대세계의 사목자’로 다시 찾는 것은 당연한 노릇일지 모릅니다.   

 

나중에 교황이 된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그에게 ‘전쟁’은 그의 삶의 이력만큼 따라다니는 지상의 숙제였지요. 그가 로마의 변방을 떠돌다 교황대사로 승진한 곳은 ‘교회의 맏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직이었습니다. 하지만 1944년 12월, 그가 프랑스에 갔을 때는 망명정부에서 파리로 귀환한 프랑스 정부가 교회지도자들에게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독일점령군에 맞서 레지스탕스로 싸울 때, 대다수의 주교들은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것이지요, 드골 장군은 바티칸에 찾아가 비오 12 교황에게 나치와 비시정권에 협력한 발레리 교황대사를 소환시키고, 나치에 협력한 30명의 주교들을 교구장직에서 해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교황은 그 자리에서 어쩌지 못했지만, 금방 사태를 파악하고 서둘러 교체한 교황대사가 론칼리였던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오점이 없고 유연하고 끈덕진 론칼리의 외교 덕분인지 결국 3명의 주교를 교체하고, 나치의 유다인 추방을 반대하던 살리에쥐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사태가 누그러졌습니다. 프랑스에선 철학자 자크 마리탱을 바티칸 주재 프랑스대사로 임명하여 서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답니다.


론칼리 교황대사는 당시 샤르트르 부근의 수용소에 갇혀 있던 독일군 전쟁포로들도 격식 없이 보살펴 주었습니다. 당시 포로였던 한 독일군 병사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탈리아 사람답게 날렵하면서도 땅딸한 그 양반은 어딘지 모르게 믿음이 가고, 성격이 유쾌하고 익살스러우면서 정이 있고, 또 자비로운 모습이었죠. 그분은 자신을 낮추어 친근하게 대해 주었는데, 우리가 가까이 하기 힘든 고행자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한군데 매달리면서도 묘하게 무언가 갈망하는 듯한 그런 분이었죠.” 론칼리는 프랑스 주교들과 힘을 합쳐 포로수감 기간을 단축시켜 26만 독일군 전쟁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가 그에겐 자비로운 사목의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프랑스 교황대사로서 귀족들과 정치인들과 학자들을 접견하면서 상류사회에 적응해야 했는데, 때로는 짓궂은 신사들도 있어서 그의 뚱뚱한 체구를 조롱하기도 했고, 어느날은 무례하게 여자 누드 사진을 불쑥 눈앞에 내밀기도 했지만 유머로 넘어가곤 했지요. 론칼리는 히죽히죽 웃는 그 남자에게 사진을 돌려주며 이렇게 물었답니다. “사모님이신가 보죠?” 


그러나 론카리는 중세풍의 대사관저에 살면서도 여전히 소박하고 검소했으며, 길거리 산책을 즐기는 바람에 비오 12세로부터 교황대사의 품위를 손상시킨다는 꾸중을 듣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농부출신이던 론칼리는 남의 이목을 그리 괘념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 어떤 일로도 나는 자제력을 잃지 않는단다. 나는 농장에서 우리가 소박하게 살았던 일을 생각하지. 그리고 온화하고 겸손하게 직무를 수행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기쁘단다”하고 조카딸에게 편지를 썼지요.


가난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열린 사목


론칼리의 사목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은 1953년에 베네치아 교구의 대주교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사제가 된 이후로 7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신학교 학장과 주교, 교황청 관리 등 윗사람 밑에서 고생을 했지만, 이제 처음으로 자신이 책임지는 교구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는 취임 인사말은 그의 삶을 요약해 줍니다. “저는 어린 시절 어렵지만 부족함을 모르는 축복받은 가난 속에서 자랐습니다. 이 가난은 물질적 욕구가 없는 지극히 고결한 덕목을 쌓게 하며, 삶의 고공비행을 준비해 주는 그런 가난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저는 다른 종교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고 현재 당면한 사회문제를 알게 되었고,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마음과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앙과 도덕의 확고한 원칙을 굳게 지키며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서로 일치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 왔습니다.” 그는 살면서 경험해야 했던 아픔과 고난조차 자기를 더 잘 가르치려는 주님의 배려라고 여겼습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론칼리 대주교의 열린 태도에 감격했는데, 누구나 사전에 약속시간을 정하지 않고도, 의전 절차를 밟지 않고도 주교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교관도 수수하게 꾸미고,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자가용 모터보트가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승객들과 자연스레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건넸지요. “자, 자. 이리들 와서 앉으세요. 여러분이나 저나 같은 요금을 내고 탔잖아요.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론칼리 대주교는 성 마르코 광장 근처에 있는 카페에 앉아 비노비앙코 한 잔을 하든지 카날레 그란데 부둣가에 있는 계단에 걸터앉아 곤돌라 사공들과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대주교에 취임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마르게라의 공장에 찾아가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였고, 그 이듬해 부활절에는 공단 항구에 있는 아지프 사의 노동자들과 미사를 드렸죠. 론칼리 대주교는 힘든 노동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습니다.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들과 밤 10시까지 책상에 앉아 있거나 지역을 돌아보았는데, 베네치아 교구장으로 있던 5년 동안 공단지역에 무려 30개의 본당을 세웠습니다. 1957년에는 교구 시노드를 개최하였는데, 개막식에서 론칼리 대주교는 ‘정신적 부권(父權)’이라는 주제 연설을 통해 “권위적인 태도가 삶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면서 “권위적인 태도는 냉혹함과 힘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가부장적 배려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우습게 만듭니다. 가부장적 태도는 자신의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미성숙하게 만들죠... 그런 태도는 아랫사람의 권리를 존중하지 못하게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명령하는 권력을 마다하고 성령에 의존하여 사람들과 충분히 소통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다만 착한 목자가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1958년에 교황이 된 것입니다. 그동안 엄격하고 강력하게 통치하던 비오12세 교황이 선종하자, 교황선거를 앞둔 추기경들은 의견차이로 갈등이 많은 교회 안에 숨통을 열어줄 지도자를 원했습니다. 비오 교황이 추기경을 거의 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기경단이 노령화되어 전체 추기경 51명 중에 24명이 만 76세의 론칼리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론칼리를 오히려 튼튼한 젊은이라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지요. 론칼리 대주교가 교황이 되자, 이름을 요한 23세라 지었습니다. 요한은 론카리에게 의미심장한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도 요한처럼 사랑받는 이가 되었고, 세례자 요한처럼 예언자의 사명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즉위식 강론에서 “교황이 국가수반이자 외교관, 학자이자 조직가이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실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그저 “착한 목자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요한 23세 이후로 교황을 황제로 만드는 격식들이 점차 폐지되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교황 삼층관을 즉위식 때 사용했으나 얼마 후 매각하여 그 돈으로 사회구호사업을 지원했고, 요한 바오로 1세는 교황즉위식마저 폐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 23세는 롬바르디아 농민 출신답게 사람들을 철석같이 믿어, 예방조치를 취하거나 주변에 보호막을 치지 않았습니다. 비오 12세 교황은 사도좌에 대한 너무 강한 사명감 때문에 모든 일을 직접 결정하였으나, 요한 23세는 그 일을 다른 주교들과 나누었습니다. 즉위한 직후에 새로 23명의 추기경을 새로 임명하고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거리낌없이 중요한 직무를 맡겼습니다. 자기 생각을 교회법으로 만들지 않고, ‘성좌선언(Ex cathedra)'이란 말을 결코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교황을 알현할 때 무릎을 세 번 굽혀 절하는 규정을 없애고, 자신을 “선택받으신 성부”나 “숭고한 입술의 선택받으신 이여”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못하게 당부했습니다. 그는 바티칸에서도 수행원 없이 혼자 돌아다니며 일꾼이나 정원사들과 즐겨 이야기를 나누었고, 혼자 다니다 교황청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지요. 불쑥 바티칸목공소에 들러 목수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기도 하고, 근위대 등 직원들의 봉급을 가족수에 따라 올려주고 자녀들에겐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래서 박사 학위를 가진 교황청 장관들은 자녀 많은 교황청 수위가 자신들보다 봉급이 많다고 볼멘소리를 하곤 했죠. 그런가 하면 교황청 관리들이 이런 과다지출로 사회구호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자, “그렇다면 우리는 자선행위를 줄여야 합니다. 정의가 자선보다 먼저이기 때문입니다.”하고 잘라 말했습니다. 


사목자가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개인의 성품과 상관없이 교황의 경우엔 더욱 복잡합니다. 그래서 그는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만들고 간단한 것은 복잡하게 하지 마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일기장에 자주 이렇게 적었습니다. “안젤로야, 너를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이 그를 자유롭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준비된 원고 없이 거리에서 본당에서 병원에서 교도소에서 즉석 강론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곤 이전 교황들처럼 교황청에 갇혀 지내지 않고 성지순례도 다니고, 성탄절엔 로마의 밤비노 예수 아동병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만났으며, 다음날엔 레지나 첼리 감옥으로 죄수들을 찾아가 교황모를 벗어들고 인사하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러분들이 내게 올 수 없어서 내가 여러분에게 왔습니다.” 그는 착한 목자였습니다.
































<2강> 환대와 평화의 사도, 도로시 데이

 

세상 속에 깊이 투신하면서 글을 쓰는 사람은 늘 내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도로시 데이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생전에 헨리 나웬과 토마스 머튼처럼 행동과 관상을 통합시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신앙이 실효성 있는 믿음이 되길 갈망하는 까닭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기자 출신으로 이 세상의 어둠과 빛을 두루 보고자 하였으며, 세상의 불의를 고발할뿐더러 신비롭고 놀라운 사랑의 깊이를 돌이켜 보도록 합니다. 그녀는 여섯권의 책과 1천 5백편에 이르는 기사, 수필, 비평 등을 썼는데, “글과 행동, 둘 다 실천입니다. 둘 다 세상에 대한 윤리적 반응에서 나온 인간의 응답입니다.”하고 말했죠.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한 부르심

도로시 데이는 1897년 미국 부르클린에서 한 자유기고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집에선 하느님의 이름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나 어린 나이부터 그는 성인의 삶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병자들, 절름거리는 사람들,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성인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회상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이 움트고 있었답니다. “왜 악을 처음부터 피하지 않고, 그것을 치료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는가? 사회질서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예들을 보살피기만 하지 말고,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성인들은?” 

고민 끝에 그는 종교에 문을 닫고, 당대의 진보적인 정치에 희망을 두게 됩니다. 그의 친구들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로 그들과 함께 다양한 좌익간행물이나, 반제국주의 연맹 같은 조직에서 일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한편에선 슬픔과 외로움과 도덕적 영적 혼란으로 어지러웠답니다. 흥분된 정치참여가 초월성에 대한 그녀의 열망을 완전히 덮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교회로 귀의합니다.

그녀가 회심한 것은 다만 슬픔 때문이 아니었지요. 임신과 출산이라는 자연적 행복의 경험으로 찾아왔던 거지요. 딸을 임신하고 출산하는 가운데 그 즐거움과 감사의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고, 이러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그녀를 하느님께로 인도했던 거지요.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친구들과 남편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불가지론자이며 무정부주의자였던 남편은 가톨릭주의를 경멸했고, 그가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관계가 끝날 것이라고 연거푸 경고하였던 차였습니다. 여기서 도로시는 ‘하느님인가 사랑인가’를 택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가톨릭교회를 향한 그의 걸음은 곧 노동계층을 배신하는 것으로 비추어졌습니다. 

그런데 응답은 피터 모린이라는 덥수룩한 사내의 모습으로 왔습니다. 1932년 어느 날 주머니에 팜플렛과 자료 따위를 불룩하게 안고서 그는 도로시를 찾아왔습니다. 이 당시 미국은 경제공황으로 실업자들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도로시는 워싱턴에서 열린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실업자행진을 취재하러 갔다가 워싱턴의 성모무염시태 성당에 들러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을 동료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열리기를” 간청했는데, 그 다음에 이루어진 방문이었지요. 

피터 모린은 55세의 농부 출신으로서 지난 20년 동안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복음을 행동으로 옮길 고유한 비전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가 그 비전을 현실로 만들 적임자라고 이미 결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서의 철저한 사회적 메시지를 수행하는 운동을 생각해 냈습니다. 단순히 불의를 고발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질서, 노동의 철학과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에 바탕을 둔 새 질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부와 교회가 그러한 프로그램을 실행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에 따라 지금-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할 것이며, “사람들이 더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창조하는 일을 할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가톨릭일꾼(catholic Workers)'운동입니다. 

1933년 5월 1일 성요셉 축일에 ‘가톨릭일꾼’ 신문이 유니온 광장에서 배포된 이래, 이 신문은 미국 전역에 있는 노속인들과 실업자들에게 무료급식을 행하던 ‘환대의 집’에 중심을 두고 있는 운동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또한 가톨릭일꾼공동체는 전통적인 애덕활동뿐 아니라 사회 정의와 평화운동에도 참여하였지요. 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린과 만난 뒤 50년 동안 이 운동에 몸담게 됩니다. 부르심이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도록 그분에게서 초대받는 것입니다. 이는 토마스 머튼이 말하듯이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응답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는’ 문제라서 정해진 길을 걷지 않고 자기 고유한 길을 찾아나가는 과정입니다.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베네딕트는 수도원에서, 프란치스꼬와 글라라는 철저한 가난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길을 찾았습니다. 도로시 데이 역시 피터 모린의 첫 방문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으며, 그녀가 바라던 ‘사회질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성인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했습니다. 그 답변은 도로시 데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해 그러한 성인을 실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안전함을 바라지 않는 신앙

도로시 데이에게 삶이란 하느님의 영과 함께 걷는 흥미로우면서 진지한 사랑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면서 모든 뜻을 하느님께 맡겼습니다. <가톨릭일꾼> 신문을 처음 만들 때 도로시는 자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걱정하였죠. 그 때 피터 모린이 말했습니다. “성인의 역사를 보면 자본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보내 주십니다. 인쇄비를 댈 수 있을 거예요. 성인들의 일생을 읽으면 알게 됩니다.” 이 말은 도로시의 평생에 걸친 지침이 되었다.

실제로 도로시는 가톨릭일꾼운동을 하면서 규정이나 재단, 이사회도 구성하길 원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안전장치에도 기댈 생각이 없었습니다. 불안전함과 취약함 가운데 자신을 놓음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느 환대의 집 일꾼들이 현실적으로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편지를 보냈을 때 이렇게 답장을 보낸 적도 있죠. “마이클, 당신의 신앙은 어디 있어요?”

돈과 재산에 관한 도로시의 생각은 신앙으로 꽉 차있었고, 또 한편으론 실용적인 것이었습니다. 돈이 필요할 때 도로시와 일꾼들은 하느님께 청했는데, 때때로 단식을 하거나 가까운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계속 바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간혹 필요한 액수에 꼭 맞는 기부금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일꾼에서는 전혀 정부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도로시는 “정부가 준 것을 정부가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도로시는 “사회는 가족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정부에 기대지 않고 개인의 순수한 자비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선을 통해 무료급식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만약 돈 때문에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 일을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라 여겼던 것이지요. 모든 일은 우리 자신이 손발이 되지만 결국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요.   


잊혀진 사람들 속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사랑

도로시 데이는 특별히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들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도로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정말로 알아보는 길은 우리가 아는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을 사랑할 마음이 있는지” 묻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도로시는 급식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수척한 얼굴들 속에서, 일용한 빵과 더불어 장미를 구할 줄 아는 노동자들 속에서, 도시의 시멘트 바닥을 뚫고 올라온 가죽나무의 울퉁불퉁한 아름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도로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을 무척 즐겨 인용하곤 하였지요.

도로시 데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육화되었듯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그리스도의 성체를 받아모심으로써 육화를 계속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도로시의 친구였던 롤하우저는 이를 두고 “하느님께서 한때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동하셨던 것처럼 지금은 당신 아들의 모습을 닮고 그를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행동하신다”고 표현하였지요. 

가난한 이들에게 환대의 집을 열어 밥을 제공하고, 그리스도교 평화주의를 옹호하며 반전시위에 참여하고 농경공동체에서 땅을 일구고, 글을 쓰고 신문을 만들었던 그녀의 삶을 이끌어간 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였고, 빠듯한 하루 생활 속에서도 도로시는 영성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도로시는 가능한 대로 매일 미사를 하였으며, 원하는 이들과 저녁기도를 바치고, 묵주신공과 중재기도, 예수호칭기도, 침묵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녀는 아무리 일이 많아도 일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저항했으며, 혼자서 독서하고 기도하며 침묵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도로시의 미사책에는 그가 기도해 주고 있는 긴 목록의 사람들 이름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습니다. “만일 누군가 이러한 ‘기도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가톨릭일꾼운동의 모든 것을 놓치는 것”이라고 늘 말하곤 했지요. 나중에도 도로시는 이렇게 말했죠. “내가 삶에서 무엇인가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덕분이다.”

            

사랑하는 이는 “충분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법이랍니다. 도로시 데이는 73세가 되어서 폐수종에 시달렸으며, 호흡곤란과 동맥경화, 심장성 부종으로 고생했지만 일을 멈추지 않앗습니다. 1973년에는 76세의 나이로 비폭력 시위를 벌이는 산 조아퀸 밸리의 차베스와 농장 노동자연맹에 합류하였고, 이 때문에 다른 항의자들과 더불어 열흘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1980년 11월 29일 초저녁에 사랑하는 딸 타마의 곁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뉴욕시의 그리스도 탄생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생전에 도로시 데이는 자신을 ‘성인’이라 말하던 이들의 생각을 딱 잘라 거절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산상설교에 근거한 ‘영원한 개혁’이 도로시의 지도력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것을 위해서 그녀는 기도하고 연설했으며, 글을 쓰고 단식하고 항의하였으며, 굴욕을 참아 내었고 감옥에 갔습니다.”


원칙적으로 군인은 신자 될 수 없어

최근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대체복무제 이야기가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병역거부자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입장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도전이 됩니다.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의 집총 거부였지요. 살상무기인 총을 잡지 않겠다고 거부함으로써, 군사재판에서 항명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 현재 1300명이 넘고, 매년 500여 명의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약식재판을 거친 뒤 바로 감옥으로 보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가 우상숭배라 하고, 총을 잡는 것은 평화원칙에 어긋난다고 보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복음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업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초기부터 엄격한 평화주의 원칙을 지켰습니다. 로마의 교부 힙폴리투스가 반포한 교령에 따르면, 여전히 세례 받은 교인은 사형을 집행하거나 군대의 선서를 수행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었고,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예비자나 그리스도인은 교회공동체에서 축출되었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과 군대복무는 절대로 조화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요.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맹기(盟旗) 아래, 그리스도와 악마의 군기(軍旗) 아래, 빛과 어둠의 병영(兵營) 안에 있다는 것은 서로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동일한 인간이 그리스도와 악마라는 양자에게 의무를 짊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 주님께 칼을 빼앗긴 사람이 어찌 전쟁을 수행할 수 있으며, 어찌 평화시대일 따름인데도 군대에 복무할 수 있는가? 요한에게 군인들이 와서 처신을 위한 규칙을 얻기는 했고, 한 백부장이 신자가 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의 칼을 빼앗으심으로써 모든 군인의 무장을 해제시키신 것이다.


이처럼 폭력을 배격해야 한다는 입장은 초기교회의 교부들의 한결같은 입장입니다. 오리게네스는 교회란 거룩하고 사제적인 백성이므로 그의 몸이 피로 얼룩져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또는 국가)의 승전(勝戰)을 위해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의로운 일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근본적인 평화주의입니다. 이레네우스는 “자유의 법, 곧 하느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도들에 의하여 온 땅위에 알려졌고, 그 결과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그들이 전쟁의 칼과 창을 보습과 …낫으로…, 그러니까 평화의 도구로 만들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제는 이미 싸울 줄이라고는 모르고 오히려울 줄이라고그들의 뺨을 치면 다른 뺨마저 갖다 대어 주게 되었을진대, 그렇다면 예언자들이 말한 분은 다름 아닌 이런 결과를 나게 하신 그분(예수)입니다.” 예수가 그러하듯이,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전쟁(폭력)과 인연이 멀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리게네스의 다음 말을 자신의 말로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칼을 쥐고 백성에 대항하지 않고 전쟁하는 법을 익히지 않게 되었으니,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평화의 아들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막강한 군대를 통해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던 로마제국 안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 있고 과감한 선언이었습니다. 군대의 무력은 그가 이방인이든 적국인이든 자국민이든 ‘백성’을 겨냥하고 그들을 참살하는데 동원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사실상 지금도 군대는 지배자의 가장 중요한 통치수단입니다. 로마제국 한가운데서 성장한 그리스도교는 이런 국가주의와 황제숭배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군대뿐 아니라 국가 공직에서도 물러나고, 로마시민이라면 누구든 즐기던 검투경기나 야수싸움에 끼여들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축일에 참여하여 잔치 음식을 먹거나 노는 것도 삼갔습니다. 


예수의 마지막 기적은 폭력 금지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을 통해 환대의 집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을뿐더러 이러한 일상적 활동을 넘어서는 ‘그리스도교 평화주의’를 철저하게 수행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부들 역시 <사목헌장>을 통하여 평화 문제에 관하여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였는데, 인류는 참된 평화를 찾아서 새로이 회심하여야 하며, 평화의 건설자들은 “하느님이 아들이라 불릴 것이므로”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공의회는 “진실하고 숭고한 평화의 뜻을 해명하며 전쟁의 야만성을 단죄하고, 평화의 주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정의와 사랑에 뿌리박힌 평화를 확립하고 평화의 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과 협력하도록” 열렬히 호소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말하기를, “예수가 제일 먼저 행한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한 기적이었으며, 배고픈 군중들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이었다. 그리고 예수가 마지막으로 행한 기적은, 예수를 체포하려는 사람들에게 맞서서 베드로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입힌 상처를 치유하신 것”이라고 했지요. 예수는 날카롭게 명령하셨습니다. “칼을 치워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도로시 데이는 그 말씀이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신문에서 사설을 통해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스페인에서 무서운 종교탄압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방법에는 반대한다.” 

도로시 데이의 철저한 평화주의 때문에, <가톨릭일꾼> 신문은 많은 독자를 잃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교회를 비난하던 인민전선을 반대하고 오히려 파시스트인 프랑코 반란 세력을 지지하는 분위기였으니까요. 미국의 몇몇 교구에선 주교들이 교구 안에 있는 모든 교회와 교구학교에서 신문구독을 금지시켰습니다. 결국 스페인 전쟁은 1939년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고,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은 2년 후 참전하게 되지요. 


우리 생활의 법칙은 자비를 실천하는 것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도, 인종차별과 나치운동의 사악함을 알고 있었으나, 도로시 데이는 전쟁을 수단으로 하여 악과 싸운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계속되는 수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변호하러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고 나서도 가톨릭일꾼운동은 전쟁에 줄기차게 반대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은 전쟁 교도소나 시골의 노동단지에서 일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장을 하지 않는 위생병으로 군복무를 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일꾼> 신문은 성프란치스꼬가 길을 들인 늑대 옆에 서 있는 그림과 함께 “승리 없는 평화”라는 말을 곁들여 반전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실었다. <가톨릭 양심적 반대자>란 신문도 발간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애국적인 사람들에게는 배신자처럼 느껴졌고, 많은 주교들에게는 곤란한 일이었지요. 도로시는 우리가 전쟁 중이라고 해서 우리의 적을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도로시는 거듭 말했죠. “우리의 생활의 법칙은 자비의 일을 하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때에도 가톨릭일꾼운동은 더욱 완강히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1965년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전쟁이 확대되면서 3년 안에 미군의 숫자가 51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보였습니다. 방어능력이 없는 외딴 마을들이 전투기와 헬리콥터로 파괴되었고, 예수회 신부인 다니엘 베리간은 신문에 베트남을 ‘불타는 아이들의 땅’이라고 썼습니다. 유니온 광장에선 가톨릭일꾼 봉사자들이 시민불복종 행위로 징집 등록증을 불태웠고, 이 자리에서 도로시 데이는 전쟁의 부도덕성을 알리고 항거의 몸짓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가톨릭일꾼운동의 애덕활동은 평화운동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의 애덕이 도로시 데이의 생각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놀라운 애덕활동을 평화주의로 더럽히지 말라’는 비난이 쏟아져 들어오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데 반해 전쟁은 기아를 가져다주었고, 우리가 괴로워 우는 이들에게 위로를 가져다는데 반해 전쟁은 비참과 폐허를 가져왔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에게 해준 것은 무엇이든, 친절이든 폭력이든, 그분께 직접 해드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것이다.”

한편 토마스 머튼은 1961년부터 <가톨릭일꾼>신문에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연재물을 투고하기 시작했지요. 이 글은 훗날 바오로 6세 교황이 된 밀라노의 몬티니 추기경에게도 전달되었으며, 1965년에 발표된 <사목헌장>에 중요한 내용들이 반영되었습니다. 이를 테면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과 그 주민들에게 무차별 파괴를 자행하는 모든 전쟁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범죄이다. 이는 확고히 또 단호히 단죄받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공의회에서는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도 포함되었습니다. 사목헌장의 이러한 내용은 이미 1963년 초에 교황 요한 23세가 발표한 회칙 <지상의 평화>을 통해 이미 확인된 것입니다. 도법스님과 더불어 지난 몇 년 동안 탁발순레에 나섰던 이들이 말한 것처럼 “평화를 가져오려면 우리가 먼저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마무리 묵상/평화기도문

 

세 끼 밥 굶지 않고 

나 혼자 등 따뜻하다고 평화 아닙니다. 

지붕에 비 안 새고 

바람 들이치지 않는다고 평화 아닙니다. 


평화는 내 스스로 찾아 나설 때 

비로소 오는 것임을 알게 하시고 

바로 지금부터 

세상의 평화를 만드는 일에 

내 이 한 몸 기꺼이 쓰게 하소서.

내 형제 내 자매 고통스러워할 때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내 동포 내 민족 전쟁의 불안에 떨 때 

침묵하지 않게 하소서.











<3강> 아버지의 집으로, 헨리 나웬 


네덜란드의 영혼 

순전히 빈센트 반 고흐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만나러 간 뒤로, 그의 행적을 뒤쫓다 보니, 그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사람이었고, 특별히 고흐에게서 영적 위로와 비전을 찾았던 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낯이 익은 사람이었으나, 알아갈수록 다른 얼굴이 돋아났습니다. 그는 헨리 나웬(Henri J.M. Nouwen)입니다. 로널드 롤하이저는 <거룩한 갈망>이라는 책을 그에게 헌정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우리시대의 키르케고르입니다. 자신의 노력을 나눔으로써 그는 우리가 기도하는 법을 모를 때 기도하게 해 주었고, 쉬지 못할 때 쉬게 해 주었습니다. 유혹을 받을 때 평화를 찾아주었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어둠 속에 있을 때 빛의 구름에 둘러싸이게 해 주었고, 의혹 속에서도 사랑하도록 도와주었으며,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마도 나는 키르케고르도 만나러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토마스 머튼과 장 바니에, 그리고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 거슬러 올라가면 에라스무스 한테도 닿을 것이라 여기면서, 나웬을 만나러 갑니다. 그를 만나기 위해 거리를 헤매거나 박물관에 갈 필요는 없겠지요. 얼마전에 함께 독서모임을 하는 친구가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책인데요...”하면서 건네준 책 한 권으로 족할 따름입니다. 그 책은 ‘하느님의 연인, 헨리 나웬’이라고 청록색 바탕에 백발로 제목을 새겨 놓았더군요. 하느님을 연모하던 이가 헨리 나웬이고, 아마도 그분 역시 나웬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헨리가 완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갈망함으로써 그 사랑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린 교회의 사제, 헨리 

헨리 나웬은 193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네덜란드는 상업국으로서 다른 나라에 비하여 종교적으로 관대한 나라였고, 개신교나 유다인 등 박해받는 사람들의 피난처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자유로운 정신이 에라스무스와 같은 개혁적 학자를 낳기도 하였답니다. 사람들은 종교공동체마다 거주지를 정해서 살며 서로 교류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가톨릭 거주지에서만 자란 헨리는 25살이 될 때까지 불신자나 이혼한 사람이나 개신교인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네덜란드 가톨릭교회도 자기 틀 안에서 아주 보수적이고 획일적인 모습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크게 변화됩니다. 


네덜란드 주교들은 대단한 용기로 나치에 저항했습니다. 나치에 협력하지 않은 것은 물론, 유다인 강제 수용과 학살에 항의했지요. 이렇게 가톨릭교회가 히틀러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자 유명한 네이메헌 가톨릭대학교는 폐교되었지요. 수많은 네덜란드 신자들은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었고, 여기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벽이 허물어집니다. 그들은 군대와 감옥과 정치범 수용소에 함께 감금되었고, 서로가 지닌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전쟁이 끝난개신에는 통제와 억압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다. 그들은 교회는 더 이상 권위적인 종교가 통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렇게 가톨릭교회가 개방적인 모습으로 나아가는 시점에 1950년 헨리는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이 당시  그들은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기 전인데도 실험적인 전례운동이 퍼져 나가고 것이지요. 전자국어로 전례를 거행하고 손으로 영성체하는 것, 해설자나 독서자를 허용하는 것 등등. 그러므로 바티칸공의회에서 그들 네덜란드 주교들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당연한 노릇입니다. 


영원한 소년으로 남아 

헨리 나웬이 사제가 되고나서 공부한 분야는 임상심리학이었는데, 그는 두 번에 걸쳐 박사학위를 받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면서 실험과 통계에 의존하거나, 병리학과 임상 조건 분석에 치중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 뿐더러, 이런 방법이 헨리의 기질상 영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학자 타입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가에 가까웠으며, 심리학자 융이 말하는 ‘영원한 소년’의 특성을 지녔습니다. 소년은 의존감정이 아직 남아있지만, 한편으론 이상주의적이며 늘 새로운 계명을 불러오는 자유로운 정신을 갖게 합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일반적 지식과 주석서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직관과 창조적 영감,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적 경험을 통하여 새롭게 내용을 재구성하였습니다. 일종의 영적 성장통(成長痛)을 겪으면서 성찰한 것이 <탕자의 귀환>이라는 책입니다. 늙은 아버지가 탕자를 끌어안고 있고, 경멸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큰아들의 모습을 담은 렘브란트의 그림을 묵상하며, 헨리는 자신을 탕자와 동일시합니다. 그리고 묵상이 깊어지면서 큰아들에게서 자신을 발견하였고, 결국 모든 것을 용서하고 피난처를 제공하며 겉옷으로 감싸 안아 주는 아버지가 될 필요성을 깨닫습니다. 사랑을 갈망하던 소년은 그렇게 자비로운 아버지가 됩니다. 


사실 헨리는 엄격하고 야망을 지니고 있던 아버지에게서 사랑받지 못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헨리의 책을 전혀 읽지 않았다는데, 헨리는 다른 이들의 작은 거부에도 깊이 상처받고 무너지곤 했지요. 그는 인정과 지지를 받으며 활짝 피어나지만, 작은 비난에도 우울증에 시달리곤 했답니다. 이런 경험 속에서 헨리는 남들이 자신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더 이상 남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선물을 발견하게 되면,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어 다른 이들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네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과 네가 소중히 여기는 네 자아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너의 진정한 소망에 응답할 힘이 네 안에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를 수 있다. 그럴수록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심원한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그런데 너에게는 다른 이들의 영향력에 쉽게 굴복하는 나약한 면이 있다. 누군가가 네 행동의 동기를 물어오면 너는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그 사람의 주장에 동의하고 만다. 그렇게 너는 수동적으로 다른 사람이 너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 더 너는 내적 자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느님의 첫 번째 사랑에 대한 응답 

타인의 평가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길을 열어준 것은 하느님이 주시는 첫 번째 사랑 때문이었다고 헨리는 고백합니다. 예수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헨리는 복음서에서 발견합니다. 예수께서 전도하기 시작하실 무렵, 그 길고도 운명적인 여정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하느님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축복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고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제 가거라.” 그 축복으로 예수는 강해졌고,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에 맞설 수 있었고, 그 후로도 숱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의혹과 두려움과 세상의 거부 앞에서도 늘 당신을 축복하셨던 그 목소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헨리는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집은 내 존재의 중심입니다. 거기서 나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에게 나의 사랑을 주노라’하시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나도 그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과거에 내게 말씀하시던 그 목소리가 지금까지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목소리는 아무런 방해 없이 영원으로부터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입니다. 그 목소리로부터 우리는 언제나 생명과 사랑을 받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나는 하느님과 함께 집에 있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삶과 예수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대부분 상상조차 못한다고 헨리는 말합니다. 스스로 비참하고 불안정하고 죄와 수치심으로 가득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유혹을 이겨 내셨듯이 우리도 이런 부정적 감정을 이겨 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사실상 가장 큰 유혹은 명성이나 재물이 아니라 자기 거부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내가 하느님의 눈에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는 동안에 우리가 겪은 수많은 좌절에서 나온 ‘세상이 외치는 소리’일 따름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나 성인들뿐 아니라 우리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받는 아들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소중한 아들 딸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와 우리는 한 식탁에 앉은 한 가족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예수께서 가시는 길이 곧 나의 길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헨리는 예수께서 숨쉬던 성령을 우리도 숨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는 우리의 몸을 통해 거듭하여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실로 참된 구원은 그리스도가 되는 데 있습니다.”(여정을 위한 빵) 


새벽으로 가는 길 

1996년에 세상을 떠난, 헨리 나웬은 꽤 유명한 영성작가이며 사제였지만, 그에게 예비된 삶은 다른 곳에서 무르익었습니다.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수많은 강연에 초청받았으나, 그는 또 다른 길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시토회 수도원에서 관상생활을 하기도 하였고, 제3세계 선교사가 되려고 페루 리마 근처의 빈민촌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헨리는 토마스 머튼과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를 만나 해방하는 영성과 관상생활을 접하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로 내려가는 길을 통하여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복음서의 명령을 받아 안게 된 것이지요. 한편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전환을 일으킨 것은 그의 친밀함에 대한 욕구와 하느님 안에서 성취되는 우정에 대한 깊은 갈망이었습니다. 


결국 기도에 대한 응답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새벽’(Daybreak) 공동체에서 왔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는 멤버들이 모여 사는 이 공동체는 장 바니에가 세운 라르슈 공동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헨리는 자신을 그저 ‘한 사람’으로 받아준 데 대해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놀라움과 기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저명 교수나 지도자로서 남들의 기대에 맞추어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은 아예 없습니다. 이들은 나웬의 책을 알지도 못하고, 책을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는 장애인들이었지만, 연약하게 부서진 몸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여기서 그는 공동숙소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게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아담처럼 가장 장애가 심한 이를 돌보게 됩니다. 이는 마음을 다해 자신을 정화하는 시간이었지요. 이전의 학구적 삶과 동떨어진 삶이었고, 달변가인 헨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과 더불어 공동체와 우정을 배우고, 사람을 돌보는 직무에 전념했던 순간들입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무능함을 경험하고,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들과 형제가 됩니다. 헨리는 연설가, 작가, 상담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토스트를 굽거나 차를 끓일 줄 몰랐습니다.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에는 서툴렀던 것이지요. 다른 유명인사들처럼 특별한 재능 이외의 방면으로는 아주 무능했습니다. 헨리는 자신의 어려움을 감추지 않았으며, 드러내고 이 일들을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여전히 소년의 심성을 가지고 있었던 헨리 나웬은 새벽공동체에서도 여전히 높이 날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곳이었지요. 처음 도착 당시에 헨리는 새로 구입한 자신의 자동차를 선임자와 함께 타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흥분한 어조로 자기가 얼마나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했는지 장황하게 늘어놓던 그 순간, 갑자기 자동차는 어딘가를 들이박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임자가 말했습니다. “이 차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군요.” 


헨리는 이 공동체에서 안식을 찾았습니다. 그는 그동안 마음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많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추구해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들의 단순함과 공동체의 사랑이 그에게 스며들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헨리에게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을 보여주는 복음서의 의미를 생생하게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연인, 우정 가운데 

헨리 나웬은 스스로를 사제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평범한 신자 쪽에 가깝다고 여겼습니다. 자기 이름의 가운데 이니셜 ‘J.M.'은 ’Just Me'를 뜻한다고 헨리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헨리는 보통 사람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상대방의 수준에서 대화하려고 노력했으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친구로서 손을 내밀고 감동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연인, 헨리나웬>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지요. 아일랜드 출신의 은퇴한 노동자인 마이클 플러드가 암에 걸려 죽을 날만 손꼽고 있었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잘 알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생면부지의 헨리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나누었는데, 어느 친구가 플러드에게 물었습니다. 


“나웬같이 훌륭한 사람이 자네처럼 촌스럽고 보잘것없는 노동자와 시간을 보내는 이유가 뭔가?” 플러드가 아일랜드 민요풍으로 답했다네요.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자네는 헨리 나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네.” 


헨리는 성찬 전례에서 성배를 들어 올리는 순간 플러드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플러드는 암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보여준 사랑과 우정이 죽음을 이기게 하였고, 그가 ‘하느님의 연인’임을 보여준 것이겠지요. 하느님의 연인은 가난한 모든 이들의 연인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헨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가 자신의 동성애적 기질 때문에 항상 마음을 다쳤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없이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지위를 탐하는 이도 아니었지요. 그는 개방적인 사람이어서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자기 책을 주거나 나중에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꽃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돈이 꼭 필요한 사람들, 뜻있는 기획안을 들고 온 사람들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환자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비범한 관대함이 많은 이들에게 기쁨과 사랑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동성애적 사랑의 에너지가 그로 하여금 사람들과 맺는 친밀한 우정에 더욱 마음쓰게 하였으며, 그 딜레마를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하는 법입니다. 


성체성사, 부서진 이들과 함께 

헨리 나웬에게 가장 중요한 영감을 준 것은 성경과 성체성사였는데, 특별히 그는 새벽공동체에서 부서진 이들과 더불어 살면서 더욱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에게 성체성사는 단순히 가톨릭신자끼리만 나누는 배타적인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체성사를 예수의 삶과 소명의 핵심으로 이해했으며,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식탁에 앉도록 손을 내밀어 초대하셨다고 믿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에도 낮은 탁자로 만든 제대 앞에서 다른 이들과 나란히 앉았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께서 사람들과 더불어 친교와 우정을 나눈 자리입니다. 그것은 빵을 집어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쪼개어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가정에서 매일 같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식탁이 제대가 되고, 우리의 음식이 성체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개신교 신자든 가톨릭 신자든 누구나 이 식탁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웬의 제대 곁에선 누구나 온전히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과 편안함으로 영성체를 합니다. 


헨리 나웬은 2천년 동안 내려온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현존하는 가톨릭교회의 성체성사가 오히려 예수를 더욱 멀리 있는 존재로 느끼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반복되는 예식과 기도문은 지루해지고, 소박함은 사라졌지요. <불타는 마음으로>에서 그는 “우리는 성체성사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제의, 초, 제대 봉사자, 커다란 책, 추켜올린 팔, 넓은 제대... 이 모두가 단순함과 평범함을 잃고 불분명해졌습니다. 예식을 진행하고 의미를 이해하려면 안내가 필요한 형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즉, 미사에서는 성체성사의 공적이고 조직적인 특성만 너무 강조하다가 결국 개개인의 삶과 맺는 연관성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자기 잔에 담겨진 삶의 특수한 상황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지 결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가 “너도 이 잔을 들겠느냐?”하고 물으실 때,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지 묻는 것이 성체성사라는 것입니다. 


 










<4강> 관상과 혁명의 통일, 토마스 머튼

    


1968년 12월 10일, 성탄절을 며칠 남겨 두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한 지혜와 사랑을 역설했던 토마스 머튼이 53세로 이승을 떠났다. 그는 방콕에서 아시아 지역의 관상수도회 원장들 모임에 참석해 마르크스주의와 가톨릭교회의 관상수도원운동에 대해 강연을 했으며, 달라이 라마와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날 강의를 마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선풍기에 연결된 전선에 감전되어 죽었다. 방콕에 머물던 미군장교들은 그의 시신을 애석하게도 방부처리해 수송기편으로 켄터키로 보냈고, 12월 17일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그러나 그는 37권의 책과 숱한 논문을 통해,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진리를 갈구했던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삶의 갈피 마다에서 감지했던 인간적 고뇌와 지혜를 송두리채 세상에 공적 자산으로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우리 자신의 영적 여정을 더듬어볼 필요를 느낀다.   


뚜렷하지만 짧은 생애의 갈피들


헨리 나웬은 토마스 머튼의 생애와 묵상을 다룬 책, <기도의 사람 토마스 머튼>이란 책을 냈다. 여기서 나웬은 그를 가리켜 "오직 하느님께만 집중했던 삶"이라 했다. 나웬은 겟세마니 수도원에서 딱 한 번 그를 만났다고 하는데, 그에게 가장 깊은 영감을 주었던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관상과 혁명이 결코 나뉠 수 없는 급진주의의 두 양식'임을 통찰했다고 말한다.


토마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프랑스의 프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뉴질랜드 태생의 화가였으며, 어머니 역시 오하이오 출신의 화가였다. 아버지는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이따금 퀘이커 모임에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부모의 영향 탓인지 머튼은 다섯살 때 이미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릴 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머튼이 태어난 이듬해 가족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롱아일랜드에 정착했는데, 머튼이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죽고, 그림 전시회 때문에 객지를 떠돌던 아버지는 1931년에 런던에서 뇌종양으로 숨진다. 당시 열여섯살이던 머튼은 영국 오캄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과 클레어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 1934년까지 머문다. 스무살 되던 해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긴 그는 공산주의자 모임에 참여하며 학생들의 간행물인 <제스터>의 삽화 편집자로 일했다. 


그는 에티엔느 질송의 책을 통해 스콜라철학에 접하고, 불교 승려였던 브라마차리와 교분을 맺으면서 그리스도교의 풍요로움에 눈을 떴다. 결국 1938년에 무어 신부에게 교리교육을 받고 그해 11월 16일에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때 십자가의 성요한의 영향을 받아 사제가 되고 싶은 열망에 휩싸이기도 하고,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할 마음도 먹었으나 포기하고, 1931년부터 1941년까지 뉴욕 올린에 있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방학에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피정을 했다. 


1941년에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을 떠나 뉴욕 할렘의 가난한 흑인들 가운데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던 1942년 12월 10일, 스물여섯살의 머튼은 모든 옷가지와 책을 주변에 나눠주고 더블백 하나만 들고 홀로 겟세마니 수도원에 들어갔다. 


토마스 머튼은 1968까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았고, 1948년 출간한 자서전 [칠층산]으로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수많은 글을 통해 영적 갈증과 평화를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자로 살았던 26년 동안 수도원을 떠난 것은 불과 몇 번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1968년에 수도원을 떠나 아시아로 가는 여행을 허가 받았으나, 아시아 종교의 숨결을 느끼며 갑작스런 감전사고로 죽었다. 그의 시신은 겟세마니 수도원으로 이송되어 12월 17일 안장되었다. 


무엇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길인가


토마스 머튼의 청년기는 [세속적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일기에 잘 나와 있다. 그는 세상에 대해 냉혹하리만큼 냉담한 태도로 비판했다. 놀랄만큼 민감한 청년이었던 머튼은 여행과 독서를 통해 얻은 인식력으로 세상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이러한 능력은 훗날 그가 고결한 관상과 진정한 돌봄으로 이끌리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는 적어도 삶에 대해 진정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가르치는 동안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길인가 고심을 거듭했다. 특히 할렘 지역에서 일하면서 그 갈등은 더 깊어갔다. 즉,  뉴욕 5번가에 있는 부유한 성 패트릭 대성당과 할렘에 사는 가난한 흑인 아이들 사이에서 모순을 일으켰으며, 할렘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는 영적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그는 아무런 유보도 없이 "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찾았던 것이다. 


머튼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먼저 에띠엔느 질송과 올더스 헉슬리였다. 질송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접하고, 헉슬리를 통해 신비주의와 접했다. 그후 머튼은 사람이 들짐승과 구별되는 삶을 살려면 기도와 금욕주의를 통해 영혼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헉슬리의 생각에 공감했다.  


또한 십자가의 성 요한을 통해 '영혼의 어둔 밤'을 인식하고,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를 통해 일상 속에서도 성인됨과 관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를 기도로 이끈 것은 로욜라 이냐시오였다. 그는 혼자서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해보앗는데, 꼬박 한 달동안 어두운 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성경을 읽고 묵상했다. "과연 하느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까닭이 무엇일까"하고 말이다. 


그는 스스로 규칙을 정해 매일 아침 동이 틀 무렵에 일어나 미사와 영성체를 하고, 시과경을 낭송하고, 아침마다 45분 정도 묵상하고 영적 독서를 했다고 한다. 훈련된 삶의 방식이 그를 더 개방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고, 그를 여유롭고 화를 덜 내며 불평 없고 지치지 않게 해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헨리 나웬은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 수용적이다. 그들은 붙잡기보다 어루만지고, 깨물기보다 입을 맞추고, 시험하기보다 경탄한다. 기도에 맛들인 사람들에게 자연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장애물이 아니라 길이 된다. 뚫을 수 없는 방패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지평을 넌지시 보여주는 베일이 된다"고 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뿐


그밖에 머튼은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였던 마크 반 도렌의 영문학 강의와 다니엘 윌쉬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영향을 받았는데, 그가 가톨릭교회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인도의 수도승이었던 브라마차리가 마련해 주었다. 브라마차리는 머튼에게 "그리스도교인들이 쓴 아름다운 신비주의 저서들이 참 많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두 책은 꼭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머튼의 아시아 종교에 대한 호기심을 상대화시키고, 오히려 서양의 신비주의 전통이 얼마나 풍성한지 보여주려고 했다. 먼저 제 것을 알아야 한다는 암시였다. 


대학시절 <제스터> 편집위원으로 있던  랙스는 토마스 머튼에게 직접적이며 영향을 준 유대인 친구였다. 훗날 머튼 "타고난 관상가요 예언자였다"고 말한 로버트 랙스는 뉴욕6번가를 산책하다가 느닷없이 "자넨 대체 뭐가 되고 싶은가"하고 물었다. 머튼이 "그저 좋은 가톨릭신자가 되고 싶다고 해두지"라고 답하자, 랙스는 "그럼 성인이 되고 싶다는 거지?"라고 되물었다. "내게 어떻게 성인 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발뺌을 하자 랙스가 멋진 대답을 날렸다. "바람으로써...성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뿐이지. 자네가 동의만 한다면 하느님은 당신의 뜻대로 자네를 빚어주실 것이라 믿지 않나? 자네가 할 일은 그저 그것을 원하는 것뿐이야."


머튼은 나중에 이 사건을 두고, "그는 나보다 훨씬 나은 그리스도인이었고, 하느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썼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랙스는 가톨릭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받은 모든 것을 감사했지만 그들에게 집착하지는 않았다. 서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다 보면 서로 해를 끼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이정표로 보았다. 


그가 결정적으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39년에 머튼은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물었다. "나는 어떻게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파괴의 강렬한 힘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발적인 자기절멸(絶滅)뿐이라고 자각했다. 더 많은 땅과 자원을 정복하려는 세상의 열망을 보면서, 머튼은 이를 모든 소유에서 자발적으로 거리를 두고 살라는, 벌거벗은 채 살아가라는 초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내가 소유한 것에 대한 집착이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일기에 썼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적응하면서, 자발적인 가난이 폭력을 막을 뿐 아니라 개인으로 하여금 위험의 한복판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수도원이 상징하는 초연함은 책임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심없이 두려움 없이 악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도록 해주는 최고의 행위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비폭력의 한복판에 뛰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를 비운 사람만이 진정한 혁명가'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 생명조차 자기 소유라 주장하지 않는다.

 

홀로 있는다는 것 


토마스 머튼은 수도원에서도 평화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질문했다. 이 혼란스런 세상에서 내가 설 곳은 어디인가? 물었다. 그는 26년 동안 수도원에서 침묵 속에 살면서 글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리포터로 살았을 뿐 아니라 세계를 관찰하는 리포터로 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는 점이다. 


그는 수도원에서 수많은 편지와 일기를 빼고서도 35권 이상의 책을 썼다. 일기는 1942년-1954년까지 쓴 <요나의 표징>, 그리고 1956-1965까지 쓴 <죄많은 방관자의 억측>이 있다. <요나의 표징>은 홀로있음에 관한 글이며, <죄많은 방관자의 억측>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연대감에 대해 묵상했다. 이처럼 머튼은 자신의 고독을 발견하고나서야 자기 세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었다. 


<칠층산>을 출간하고나서 갑자기 명성을 얻은 토마스 머튼은 계속 글을 써야 했으며, 누구보다 바쁘고 쉴 틈이 없었고, 소란스런 상황에 접하게 되었다. 1940년에서 1950년 사이에 수도원의 수도자 수는 몇 배로 불었다. 이를 두고 머튼은 "침묵과 홀로있음을 사랑하는 270명의 수도자들이 70명을 위해 세워진 건물에 처박혔다"고 <요나의 표적>에 적었다. 


그것은 결국 새로운 훈련과정, 새로운 건물, 새로운 재단 설립, 대화와 논쟁, 토론과 강의, 많은 트랙터와 불도저들, 분주한 수도자들의 들고남을 의미했다. 그래서 본인이 정말 순수한 관상적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인지 의심했다. 그럼에도 수도원장과 영적 멘토는 그에게 더 많은 글을 쓰라고 격려했다. 이 과정에서 홀로있음에 대한 자신의 갈망이 혹시 자기 편의주의나 자기 본위의 욕망이 아닌지 묻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관상을 위해 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머튼 침묵에 대해 이렇게 썼다.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았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 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침묵은 자비 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용서할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입니다. 

그 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 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할 때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그 분 만이 

내 마음을 이해하시면 족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않고 

그 분의 위로를 갈망할 때

십자가의 침묵처럼 

잠잠히 그 분의 뜻에 모든 것 을 맡길 때 

침묵은 기도입니다. 


머튼에게 글쓰기는 거룩함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다   

 

실상 고독은 그 자신의 마음이 홀로일 수 있다면 소박한 일상에서도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오늘 나는 홀로있음이야말로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이며, 나를 사막으로 부르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이 사막이 꼭 지리적인 좌표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다만 인위적인 기쁨이 소멸되고 하느님 안에서 재탄생하는 마음의 고독이다"(요나의 기적, 59) 


그러나 한편으론 여전히 절대 고독에 대한 갈망으로 카르투지오 수도원으로 옮기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접고, 글쓰기 역시 핸디캡이 아니라 참다운 침묵과 홀로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알아듣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머튼에게 거룩함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된 것이다. 그는 "만일 성인이 되려 한다면 나 자신이 무엇이 되었는지 종이에 옮겨야 하고... 완전한 단순성과 성실성으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머튼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의 내밀한 감정과 생각들을 공적인 자산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수도원의 침묵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자기 자신을 자신의 내적 삶의 리포터를 삼음으로써 이렇게 감정과 생각마저 제 소유로 여기지 않고 비워냈을 때 모든 것이 제게 속한 것임도 깨달았다. 공기와 나무, 전 세계가 하느님을 노래하고, 발 아래 땅에서 불과 음악을 감지할 수 있었다.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그를 가난하게도 하고 풍요롭게도 했으며, 평화와 행복을 안겨주었다. 


1951년 5월 학생들을 돌보는 영적 지도자(수련장)가 되면서 머튼은 새로운 사막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비'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침묵을 느끼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즉, 침묵을 얻자마자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타자의 발견      

 

트라피스트 수도원 창문턱에는 '오직 하느님께만'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토마스 머튼은 수도원의 침묵과 자연의 안식, 그리고 정기적인 기도생활에 녹아들어가 오직 하느님께 집중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자신의 고독을 깊이 있게 응시하게 되면서 '사회적 고독'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1951년 10년째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머물면서 "이제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께만' 쏟아부었던 열정이 정화와 고독을 통해 '모든 사람과 더불어' 가는 길이 되었다. 


1960년대 들어서 미국사회 안에서 인종갈등이 극심해지고, 베트남 전쟁으로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되는 상황을 겪으면서, 머튼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응답할 준비를 했다. 세상과 교회, 실천과 영성 사이에 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1968년 12월 10일 그가 죽던 날, 방콕에서 머튼은 '마르크스주의와 수도원주의;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날 어느 프랑스 학생혁명 지도자가 "우리도 역시 수도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에 머튼은 "수도자는 본질적으로 현실세계와 그 구성체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동의했다. 


관상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문제이며, 침묵과 고독과 기도는 개인적 자산이 아니라 함께 사는 이들과 돌보아야 하는 이들에게 속한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머튼은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베트남 등의 실상이 사실은 자신의 깊은 곳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 먼저 내 안의 파시즘을 척결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머튼은 수도자들이 세상에 대한 경멸의 외투아래 복음이 명령하는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수도자로서 가진 소명은 세상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도 세상을 경멸하여 등을 돌리는 것도 아니었다. 수도자의 임무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현실을 포장한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다. 이는 관상의 본질에 속한다.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것은 관상의 본질이다


머튼이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데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제임스 볼드윈과 마하트마 간디였다. 볼드윈은 흑인문제가 사실은 백인의 문제라고 알려주었다. 백인들이 자기들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고 파괴와 폭력의 뿌리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선한 백인들의 노력 조차 일시적 감정에 그치고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에서 비폭력운동이 좌절되고 블랙파워 등의 과격한 운동이 기승을 부리면서, 머튼은 자기 마음 속 폭력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면 모든 게 다만 전략과 전술에 머물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때에 머튼은 좀 더 깊숙한 곳에서 배어나오는 비폭력저항의 원천을 탐색하면서, 아시아 종교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마하트마 간디였다. 머튼은 <간디의 비폭력>이라는 책을 통해 소개하면서, "진리의 영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의 상황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그 속에 선을 향한 회심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한다. 


만약 폭력적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불가역적이고 가시적이며 윤곽이 뚜렷한 종양이라면 방법은 그것을 잘라내는 것 뿐이다. 그러나 악이 되돌릴 수 있고 용서를 통해 선으로 바뀔 수 있다면 비폭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머튼은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가 가능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비폭력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필요조건이라고 확신했다. 


"영적 자유의 최고형태는 피억압자와 억압자를 동시에 해방하는 마음의 힘에서 찾을 수 있다. 피억압자는 자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간디의 비폭력, 14-15) 


머튼에게 새로운 사막으로 등장한 하느님의 자비는 연대의 체험에서 나왔으며, 이런 체험을 통해 우리가 세상과 다른 이들 속에서 발견하는 악과 죄와 폭력이 실은 자신의 가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     

 

토마스 머튼은 1961년부터 가톨릭계 간행물을 통해 군비경쟁과 냉전에 대한 비판적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도로시 데이가 피터 모린과 창설한 가톨릭일꾼운동의 영향이 컸다. 머튼은 '가톨릭일꾼' 신문에 '전쟁이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연재물을 투고했으며, 도로시 데이와는 죽는 날까지 동지로 지냈다. 


1962년에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라는 책을 탈고했는데, 며칠 후 돔 가브리엘 총아빠스가 토마스 머튼에게 더 이상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글을 쓰지 말고 침묵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수도자가 쓰기에 적합한 주제의 글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군비경쟁을 반대하는 글이 수도회에 불명예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는 총아빠스와 머튼 사이에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불화가 잠복되어 있어서 나타난 결과였다. 


머튼이 이렇게 반박했다. "권위주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차원을 보거나 듣는 게 수도자의 역할이 아니라, 단지 어느 누군가가 규정해 준 만큼, 또한 규정해 주었기 때문에, 기존의 견해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수도자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수도자는 전위부대가 아니라 장교가 시키는 것만을 이행하는 후방의 화물운송부대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적 맥락에서 쇄신에 관해서는, 수도자의 역할은 단순히 높은 분들께 무조건 찬성하는 일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키는 대로 교회 관료들의 목적과 지향에 맞춰 기도만 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토마스 머튼은 장상에게 순명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결국 순명하지 않으면 득보다 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의 입장을 더 들어보자. 


"제가 속해 있는 곳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이 길을 제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했고, 그 길을 바꿀 기회가 왔을 때에도 이 길을 계속 걷겠다고 자유롭게 선택했습니다. 제가 눈엣가시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굳이 그렇게 되려고 해서가 아니라 제 양심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제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상들이 제게 가하는 제약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한 제약을 가하는 표면상의 이유에 제가 동의하거나,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런 일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시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집필 금지령의 이유에는 공산당신문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가톨릭일꾼' 신문에 머튼이 글을 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포스트모던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라는 이 책은 정식출판되지 못하고 등사본으로 알음알이로 주변에 회람되었다. 책을 받은 사람 중에는 훗날 바오로 6세 교황이 된 몬티니 추기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머튼은 1962년부터 열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의제 안에 전쟁과 평화 부분과 관련해 영향을 미치고 싶어했다. 다행히도 1963년에 요한 23세 교황이 발표한 회칙 <지상의 평화>에는 머튼의 주장과 유사한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온다. 또한 1965년에 인준된 <사목헌장>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목헌장>에서는 머튼의 주장과 동일하게 '자연법의 보편적 원리'를 거스르는 명령은 죄악이며, "맹목적인 복종도 그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사면할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명령하는 자들에게 공공연히 저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 사람들의 정신은 최상의 찬사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토마스 머튼의 평화론이 당시 교회에 충격이 되었던 것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대 교회를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이상과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적 외양은 거의 속빈 강정과 같은 것이며, 과거에 '그리스도교 사회'라고 불리던 사회조차 오늘날에는 무늬만 그리스도교이고 사실은 완전히 유물론적인 이교도의 영향아래 놓여 있다. ... 비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 비폭력과 사랑에 관한 복음의 윤리를 '감상적'이라고 비하하곤 한다." 


아시아적 종교심성의 발견 


토마스 머튼은 <칠층산>을 쓴 지 20년이 지난 후 일본어판 서문을 쓰면서, 자신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동기가 세상에 대한 부정적 감정으로 온통 착색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죄많은, 자기 중심적인, 돈에 굶주린 세상과 불화를 일으켜 떠난 것이다. 그러나 수도생활을 통해 머튼은 그들에 대한 연민을 배웠다. 문제의 중심에 내가 있음도 발견했다. 따라서 머튼은 사랑과 진리에 대한 신뢰를 통해 사회적 정치적 참상에 동참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이 길에서 아시아의 위대한 현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장자였다. 장자는 주전 550-250년 사이에 중국에서 활동한 도교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머튼은 장자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깨어나게 해주며 자각하게 해 준다. 선은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가리킬 뿐이다."(선과 맹금, 49-50) 


이것은 새로운 관점이며 경험이었다. 머튼은 <장자의 길>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쓴 다른 어떤 책보다도 이 책을 쓸 때 나는 즐거움을 느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그가 장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를 좋아하는 까닭을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장자의 길, 9-10) 에서 자기의 실존에 대해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은 것이다. 


머튼은 기본적으로 기술과 과학에 대해 인색하다고 평가받았다. 하느님에 대한 진술 뿐 아니라 객관적 진리에 대한 염증이라고 할까, 이런 태도는 장자에게서 영향받은 바 크다. 

 

신발이 맞을 때 

발은 잊힌다 

허리띠가 맞을 때 

배는 잊힌다 

마음이 바를 때 

'옳음'과 '그름'은 잊힌다 

(장자의 길, 112) 


머튼은 과연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말과 토론이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고 있는지 의심했다. 구원의 신비에 대한 지성적 분석과 정교한 글들이 우리를 진리의 근원에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지 의심했다. 머튼은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인식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파악하기 위해 점점 더 복잡한 수단을 절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체계적인 절망이라 부른다. 


장자를 통해 머튼은 비폭력에 대한 영감을 무위(無爲)의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또한 관상생활에서 관상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반대했다.


"우리가 만일 늘 관상, 관상, 하느님과의 합일, 신비적 합일, 하느님과의 친밀 등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그러나 도달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그런 것들에 대해 계속해서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우리는 진짜 즐길만한 것, 행복을 누려야 하는 것, 하느님을 위해 찬양해야 하는 일상생활의 본질적이고도 참다운 경험을 노치게 된다."(소란한 세상에서의 관상, 351) 


그리고 마침내 관상과 행동을 구분하는 일의 피상성을 간파했다. "도인(道人)이 추구하는 참된 평정은 무위의 행동 속에 있는 고요함, 달리 말해, 이름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행동과 관상의 구별을 넘어서는 고요함이다"(장자의 길, 26) 장자는 "물고기에게 필요한 것은 물 속에 잠기는 것이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도 안에 잠기는 것"이라고 했는데, 머튼은 하느님이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자신을 잊을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이런 체험 속에서, 모든 게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변함으로써 세상이 달리 보이는 지경을 이른다. 


"내가 선(禪)을 붙들기 전에 산은 그저 산에 지나지 않았고 강은 그저 강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선에 다가섰을 때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엇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선을 이해했을 때 산은 산이었고 강은 강이었다."(선과 맹금, 140) 


토마스 머튼의 <선과 맹금>은 1968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책이 머튼을 방콕으로 이끌었다. 그는 아시아 종교의 신비정통을 되짚어보면서 결국 서양 그리스도교의 케노시스(자기 비움) 개념의 참뜻을 깨달았다. 행동지향적인 서구인들은 자신의 힘과 영향력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소유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생산력을 따져묻는다. 그런 이들은 자기 자신을 생각의 중심에 놓는다. 


그래서 우리가 침묵할 때 말을 걸어오시고, 우리가 스스로 비울 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위한 여백이 없다. 여러가지 일로 바쁜 우리는 초월적인 하느님을 민감하게 느끼는 대신에, 인위적인 자극이 주는 사소하고 변덕스런 감각적 만족에 빠져든다. 머튼은 관상가들조차 자아의 정신적 만족을 위해 관상하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비판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환상과 황홀경과 모든 형태의 '특별한 체험'에 대해 그렇게도 적대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선사들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선과 맹금, 76-77) 


이런 그가 1968년 12월 10일, 성탄절을 며칠 남겨 두고 53세로 이승을 떠났다. 그는 이제 온전히 자신 마저 비어냄으로써 다른 몸으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