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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미 강연

[정세미 특강] 정현진 기자의 언론과 식별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4. 30.

정현진 기자 특강   언론과

대전 둔산동 성당, 2023-4-25(화) 오후 7:30, 미사 후 특강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대전정평위)의 2023년 상반기 정세미의 두 번째 강연이 지난 4월 25일(화) 저녁 7시 30분 둔산동 성당에서 개최되었다. 제149회 행사로 열린 이번 정세미(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와 강연)의 강사로 초청된 분은 가톨릭계의 대표적인 인터넷 언론인 <가톨릭뉴스지금여기> 정현진 레지나 기자였다.  다음은 강연 내용이다. 

 

제149회 정세미(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와 특강) 


인터넷 언론사 <가톨릭뉴스지금여기>는 2009년 시작된 인터넷 매체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이나 가톨릭신문을 서울이나 대구교구에서 운영하지만, 저희는 평신도들의 소액 후원으로 독립적으로 운영 중인 작은 언론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만 13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두 달 전에 강의를 제안받았고, 이 자리에 서도 되는지 너무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좌충우돌하며 나름 부끄럽지 않은 기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훌륭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기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살면서 나름의 노력 속에서 지닌 고민들을 나누어보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함께 고민을 하면 서로서로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고, 감히 제가 여기서 말씀을 나눠드리게 되었습니다. 

 

언론과  ... 흙탕물 속에서

우리는 계속 정보에 노출돼 뭔가 읽고, 보고, 듣게 된다 

제가 2000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이 언론홍보일이었습니다. 그 일의 시작은 모든 일간지를 다 읽는 거였어요. 당시 잡지를 제외하고 스포츠지까지 일간지는 27개 정도였어요. 인터넷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20년이 지나서) 2020년 말 등록된 매체 수가 13,500개라고 합니다. 눈만 돌리면, 뭔가를 켜기만 하면, TV든 휴대폰이든 우리는 계속 정보에 노출되고 뭔가 읽고, 보고 듣게 됩니다. 저도 기자로서 쓰기도 하지만, 시민으로 다른 매체 기사들을 읽게 되지요. 과연 그때 어떤 매체나 뉴스가 좋은지 구분하는 게 가능할까요? 그리고 어떤 매체가 좋은 기사를 한번 썼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좋은 기사만을 쓸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식별’의 포인트, 관점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직접 언론보도의 환경과 그 행태, 그리고 언론 기사 등에 대해서 제가 겪은 일을 기준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극히 일부이지만, 제가 언론보도와 관련하여 겪은 일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기쁨과 희망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1항은 보통 기쁨과 희망이라고 부르는데요. 첫 구절을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사목헌장] 1.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하 생략)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정현진 레지가 기자의 강의가 시작되고 있다. (2023.4.25. 화. 19:30 미사 후 특강)


2020년 MBC 스트레이트라는 심층보도의 심각한 오보  

살레시오 청소년회관 문제를 다룬 보도였어요. 그 센터는 10세 이상의 미성년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보통 소년원으로 바로 보낸다고 하지만 1호부터 10호까지의 처벌단계, 아니 교화나 교정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0호는 소년원으로 가고 1호는 집에서 보호관찰하고, 2, 3호는 범죄행위에 따른 교육을 받거나, 단,중,장기 보호관찰을 하고 나서 6호 처분이 시설에서 교화를 받고 10호가 되면 소년원으로 가는 겁니다. 여기서 어떤 교사에 의해서 남성교사에 의해서 남학생들이 있는 곳인데, 성추행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실이 드러나고, 바로 즉각 해고하고 이후 조치를 다 했는데 문제는 여기서 있었던 교사들의 갈등과 분쟁으로 인해서 이 사건을 제보한 사람이 해고된 또 다른 교사였는데, 살레시오 청소년센터의 비리를 고발하겠다며 이 시간과 아이들 약물오남용 사건이 나왔습니다. 

https://imnews.imbc.com/replay/straight/5656839_28993.html

제목 "그곳은 지옥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교육과 교화로 다시 사회에 나가서 자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있는 곳을 ‘지옥’이라고 제목을 붙여서, 아이들도 보게 되잖아요. 엄청 상처를 받았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지옥에서 산다는 거에요?" 방송에 나간 뒤, 여기를 나간 아이들이 굉장히 분노하면서, “우린 그런 일을 겪은 일이 없다”라면서 자기 휴대폰 번호를 방송사 게시판에 남겨서, 내가 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힐테니 전화해달라라는 식으로 반응이 있었습니다. 저희도 그 아이들 한번 만나고 제보자도 만나고, 시설측도 만나고, 제보자와 갈등관계 쪽도 만나는 식의 일이 있었고요.  

 

제목도 문제이고, 후속보도는 나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렇게 후속보도도 나왔지만, 취재를 하면서 보니까 이 제목도 문제지만, 제보자가 한 말을 일단 믿어야 하지만,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하는 게 제보자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동기로 제보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사실일 가능성과 아닐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두루두루 다니면서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사실상 방송의 역할은 어마어마합니다. 정정보도를 해도 묻혀버립니다. 이미 강렬하게 박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방송이 나갈 당시, 이렇게 제목이 나갔으면 안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극적으로, 누구 하나 작살을 낼 수 있다는 식의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하나 들었습니다. 

 

<MBC 스트레이트> 방송의 오보기사에 대해 설명 중인 정현진 기자

 

강우일 주교와 충북 유치원 언급  논란  

다음으로는 2017년에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에서 보도했던 기사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당시 사건은 세상에 <학대사건>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언론 보도 제목으로 <수녀님이 3살 아이 폭행 ... 경찰 조사 중>). 당시 번잡한 상황에서 한 아이를 격리시키는 한다는 상황에서 아이를 들어서 다른 공간으로 분리시키는 과정에서 '들었다가 내려났다' 하는 식에 대한 보도가 되었는데, 당시 제주교구장이던 강우일 주교님이 그 보도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신 겁니다. 무엇보다 방송에 나간 아이를 함부로 했다는 그 영상은 CCTV를 8배속으로 돌린 영상이었다라는 겁니다. 뭔가를 들어서 내린 장면이 천천히 내려도 속도를 높이면 강도가 훨씬 보이기에 쎄집니다. 그렇게 방송에 나간 겁니다. 강우일 주교님이 그런 이야기를 듣고 제주교구의 어느 미사강론에서 “다른 얘기를 들었다. 어느 한 편의 이야기만 들을 게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들어봤으면 좋겠다”라고 했는데, 강우일 주교가 신부라고 수녀 편을 들었다. 가해자 편을 들었다는 식으로 보도가 된 겁니다. 

 

 

확인되지 않은 기사가 낳는 폐해

그래서 제가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러니 강우일 주교님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최소한 양측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더라. 수녀님과 성당측이 억울하니까 누명을 벗겨달라는 식으로 얘기한 적은 없다는 것, 그리고 검찰 관계자는 8배속이 맞다라고 확인을 해주었습니다. 특히나 우리가 아동학대라던가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이 이미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이미 명확합니다. 더 이상  (다른) 얘기를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꽤 있습니다. 강우일 주교님의 말씀도 있고, 8배속이란 사실을 모르면서 공분과 비난을 하게 되고, 수녀님은 앓아눕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등 ... 뉴스를 보면서 내가 분노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그게 잘못된 소식이었을 때 관련없는, 그리고 뜻하지 않는 피해 사례들이 너무 많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런 부분으로 인해 왜 강우일 주교님이 언급을 했던 것,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기사를 쓰고, 확인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SBS-TV <그것이 알고 싶다> 깊은 침묵 - 사제들의 죽음 그리고 한 사람

2020년 5월 16일(토) 밤 11시20분 방영

2020년 5월 SBS-TV에서 보도했던 인천교구의 이야기입니다. 서품동기 신부들 1~2년차 세 명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1997년에 인천신학교 초창기에 교수신부로 있던 분께서 신학생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했다는 사실이 신학생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그게 드러날 뻔 했는데, 그당시 묻힌 사건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사건, <신부님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사건>과 <성추행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에요. 각자 다른 이유가 있는 죽음들이었고, 성추행 사건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제보한 사람이 이걸 엮어서 말한 겁니다. 이게 그래서 예고편과 본방이 달라요. 방송 직전에 편집을 다시 해서, 방송 내용이 웃겨졌습니다. 애초 방송은 이 두 사건을 엮으면서 성추행으로 트라우마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서 죽었다라고 만들었다가 방송 직전 그게 아니란 사실, 그제서야 인천교구에 확인하고, 이 두 사건을 은폐하고 신부를 돌보지 않은 저격하기 위해 제보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거를 방송 방향을 본방에서는 바꿨는데도 불구하고 방송스튜디오에서 세 개의 영정, 얼굴 실루엣만 검게 만들고 검은리본을 씌운 영정을 계속 보여주고, 성추행 신부를 다룹니다. 그럼 연결이 되잖아요. 별개의 사건임에도 그렇게 세팅을 해서 방송을 내내 보여주고 맨 마지막에 멘트로 별도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자극적인 방송 컨텐츠가 노리는 것

자극적인 방송 컨텐츠를 만들려고, 충분히 알려면 알 수 있었고, 다루려면 각각 다루어야 할, 아니면 좀 더 제대로 깊이 취재했어야 할 내용을 성급하게 “이거 그림 되겠다”라는 생각으로 방송을 만든 대표적 사례이고, 더불어 그런 방송으로 고인을 모독하고 가족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줬습니다. 결국 돌아가신 분의 한 가족이 명예훼손 고소를 하게 됩니다. 이 방송은 정말 “저건 아니지” 싶습니다. 다시 취재를 하면서, 돌아가신 세 분과 함께 신학교를 다녔던, 그러나 학교를 나와 교수로 잘 사시는 분을 잘 알게 되어 확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말고도 저희같은 작은 언론에서도 알 수 있는게 너무 많습니다. 방송이 진짜 그런 유혹이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영상매체라는 것은 영향력도 굉장히 직접적이고 파장도 크고 경쟁프로그램과의 경쟁뿐만 아니라, 방송제작구조 안에서 결과가 아무리 훌륭하고 불의를 파헤친다고 해도, 방송언론은 그 과정도 중요합니다. 

 

과정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언론의 제작과정 

그런데 언론 일을 하며 불의한 일들을 겪으면서, 이런 방송언론 환경 속에서 우리가 식별한다는 게 무엇인가 함께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언론을 소비하잖아요. 이게 취향을 따라가더라고요. 나는 어떤 기자를 좋아해, 어떤 매체를 좋아해. 이런 기사를 썼기 때문에 거기를 신뢰해. 이러다가 정치와 관련된 기사 위주로 그 기사에 반대하는 사람과는 인연을 끊습니다. 그리고 비난하고 절대 듣지 않습니다. 또 한가지 신기했던 것은 촛불집회 때 당시 최순실 씨 관련 보도를 JTBC가 보도를 많이 했는데요. 저도 스케치를 해야되니까 나가보면, 시민들이 언론이 제역할을 못했다는 것에 굉장히 화가 나 있었어요. 그래서 YTN 보도차량 가서 중계 못하게 하고, 그러면서도 JTBC에게는 모든 걸 다 허락해주러다고요. 사람들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광화문을 메우고 있다가도 “JTBC입니다. 길좀 비켜주세요.”하면 홍해 갈라지듯이 길이 만들어지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JTBC의 위상은 어떻습니까? 그때와 다릅니다. 그때는 그걸 보며 처음 보는 광경이어서, 다른 방송차량은 취재를 방해하면서도, 딱 하나의 매체에게만 취재를 허용해주는 것이 과연 옳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시간이 많은 걸 설명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난을 받는 수구언론도 좋은 기사를 쓸 때가 있다

비난을 받는 수구보수 언론에서도 좋은 기사를 쓸 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진보적인 매체라도 이상한 기사를 쓸 수 있습니다. 매체를 중심으로 ‘니편내편’, 또는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게 가능할까요? 사실 저도 명색이 기자인데, 저역시 가짜뉴스에 속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비밀을 파헤치는 듯한 특종기사를 보게되면 링크를 걸고 또 비분강개도 하지만, 이틀이 지난 뒤 그게 오보라는 걸 알게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걸 두 세 번 겪으면서 제 분별력 없음에 부끄럽기도 하고, 언론소비를 이렇게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우리들 역시 뉴스적 기능을 하고 있다

페이스북에 기사를 링크하는 그런 경우를 말씀드리면서,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언론인이 아닌 일반인이 기사를 보고 듣고 소비만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린 그런 뉴스나 소문들을 퍼나르는 뉴스적 기능, 언론 확산의 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즉 소비자이자 생산자입니다.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거죠.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범람하는 나쁜 뉴스, 가짜 뉴스, 그리고 왜곡된 과정에서 생산된 뉴스를 보면서, 다치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속고 있고, 쓴 사람의 의도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거기에 낚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나도 모르게 거짓을 전달하고, 나쁜 사건이나 보도일 때 더더욱 그런 사건을 접하면서 제 정신이 무엇보다 피폐해집니다. 자존감도 낮아지고 부정적 생각도 많이 들고, 안해도 되는 욕을 하나 더 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식별의 중요성

저는 이 지점에서 식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게 됩니다. 저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일단 불편합니다. 다른 말을 듣는 게 불편하고 싫고 또 극단적으로 가면 내가 가진 생각이 옳은데, 저 사람 왜 틀린 말 하지? 왜 정의롭지 못한 말을 하지?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친구가 없어지는겁니다. 그게 단순히 내가 접촉하는 세계, 내가 소통하는 세계, 내가 만나는 세상의 사이즈가 줄어드는 것일뿐만 아니라 내 자신이 스스로 폐쇄적이 됩니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고, 다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없이 수축이 됩니다. 그러면 포용하고 이해하고 다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된다면, 그것은 증오하고 혐오하고 배척하고 소외시키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느 순간 순간 그러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게 옳지 않은 거잖아요. 신앙인으로, 이웃사랑을 말하며,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말해지는 우리 개개인의 모습을 교회의 가르침으로 얻었으며, 세례 때의 그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것 아닐까요. 

 

나의 살아가는 태도가 내 삶을 파괴하고 있다면 ...

그러면 결국 우리의 삶이 파괴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태도로 내 삶이 파괴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을 저에게 말하고 또 함께 말씀드리고자 싶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식별해야 할까요?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듣지 않고 은연 중에 내가 하는 생각, 내가 들은 정보가 옳다고 생각하고,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 나쁜 것, 악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 그리고 자극적인 보도내용의 유혹에 빠지는 그런 배경에는 무엇이 있나하면, 욕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내가 바라는대로 세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욕망,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일이 되어야 한다는 욕망, 그리고 내 삶에서 확인된 것들이 진리이며 그것이 틀려서는 안된다는 생각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묵상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마태오복음 27,11~26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다 11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총독이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2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당신을 고소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3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저들이 갖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하고 물었으나, 14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고소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총독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15 축제 때마다 군중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총독이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16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17 사람들이 모여들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내가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오? 예수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하고 물었다. 18 그는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는데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했어요.” 하고 말하였다. 20 그동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은 없애 버리자고 하였다. 21 총독이 그들에게 “두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바라빠요.” 하고 대답하였다. 22 빌라도가 그들에게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하니,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였다. 23 빌라도가 다시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24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25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26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무서운 건 디테일에 숨은 악마

예수님 시대에 SNS도 없고, 방송이나 신문도 없으니, 편지나 입소문이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죽이고 ‘바라빠’를 소리질렀던 군중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군중들일까요? 대부분 같았을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건 욕망이었을 거라고 봅니다. 군중은 자신들이 원하는 욕망대로 세상을 바꿔줄 것 같던 예수의 나약한 모습에 실망했을 거 같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예수가 뭐라고 나보다 잘 나가고 대접을 잘 받는가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가졌던 사람들도 있었겠죠. 또 당연한 기득권 세력이 있었지요. 예수를 메시아로 불렀던 그 사람들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라는 사람들 사이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이 시대에 예수가 아니라 진리가 있다면, 사실과 진실과 진리가 있다면, 우리 역시 예수를 못박고 바라빠를 풀어달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진리>를 못박고 <욕망>을 풀어달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대놓고 우리를 속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문제는 악마는 디테일이 있다고 하잖아요. 속에 감춰진 디테일을 아무리 살펴 봐도 나쁜 기사로 보이지 않는 그런 나쁜 기사들이 있다는 겁니다. 

 

흙탕물이 가라앉을 시간이 필요해 

그래서 제가 오늘 강의의 제목으로 <흙탕물 속으로>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제가 약 2년 전 <가짜뉴스 온라인 토론회>의 패널로 참여해서 했던 말이 있는데요. 1만 몇 천개가 넘는 매체와 거기서 또 누군가 복사해서 나르고 인용하는 수많은 정보와 기사들이 정말 쓰나미처럼, 흙탕물처럼 몰려오는 것 같은 상황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즉각적으로 소비하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흙탕물이 시간을 두고 점점 침전물이 가라앉고 그나마 맑은 물이 뜨는 그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어렸을 때는 "백이면 백, 흑이면 흑이지 회색지대가 어디있어 그건 비겁한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이런 고민을 하다가 회색지대가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깐 판단을 보류한 순간, 그리고 생각하는 지점. 그걸 이를테면 광야의 시간이라고 할까요? 그런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천주교인들의 피정, 그런 시간이 우리 삶 안에서 매 순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침묵과 흙탕물이 가라앉는 시간을 드렸는데, 열심히 찾아봤는데, 교황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제46차 홍보주일 담화(2012.1.24.)

다음은 교황 베네딕토 16세, 제46차 홍보주일 담화의 일부입니다. 

메시지와 정보가 넘칠 때, 하찮거나 부차적인 것들 가운데에서 중요한 것을 가려내려면 침묵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깊은 성찰을 하면, 처음에는 무관해 보이던 사건들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게 되고, 메시지를 평가하고 분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한 성찰은 사려 깊고 타당한 의견을 나누어 진정한 지식에 이르게 합니다.... 침묵은 우리가 받은 수많은 자극과 정보들 사이에서 올바른 식별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복잡하고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세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인간 실존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이들을 받아들여 서로 말을 나누며 성찰과 침묵으로 깊은 대화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찰과 침묵은 흔히 성급한 응답보다 더 큰 설득력을 지니고, 답을 찾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새겨 두신 진리의 길을 따라가게 합니다. 

 

병원은 원래 돈을 벌기 위한 곳인가?

최근 의료보험공단이 계속 적자라고 하면서 의료보장을 줄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의료보장이 65%가 조금 넘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65% 정도를 국가에서 보장해주고, 우린 35%의 비용을 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65%가 유지되는 것은 이전 정부까지 매년 20조씩 쏟아부었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적자라는 이유로 그만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20조를 쓰지 않으면서 보장율이 떨어지고 의료보험 수가가 올라갑니다. 문제는 의료가 공공재라는 사실입니다. 병원은 원래 돈을 버는 곳이 아닙니다. 의료를 모두 무상으로 제공하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 때 70%를 약속했다가 20조원을 쏟아부었어도 그걸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돈 없는 사람은 어떻게 치료받으라는 걸까요? 의료보험공단이 이익을 취해야 하는 곳인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손실과 이익을 기준으로 의료보장을 포기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런 것에 대해 본질적 질문을 해야 합니다. 본질적 질문을 위해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남을 지적하는 손가락은 하나지만 나머지 세 개는 저 자신을 향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알려주시는 방식대로 가는 게 우리 자신을 조금 더 기쁘게 하고 구원받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조금 제가 드린 말씀에 귀를 기울일게 있었다면 그걸 함께 기억하며 기도하고 같이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인사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여기 함께 계신 분들의 평화를 빕니다."

 

2023년 4월 25일(화) 밤 9시 23분 종료

정세미(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와 특강) 제149차 강연
장소: 대전 둔산동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