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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20100419] 금강생명평화미사 박상래신부 강론 - 평화가 강물처럼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0.

2010년 4월 19일

평화가 강물처럼


박상래 신부

금강생명평화미사 강론

 

4대강 살리기는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사업의 다른 이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도 역시 4 대강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왜 정부가 추진하는 4 대강 살리기는 살리기가 아니고 4 대상 죽이기일까요? 나는 이 논란의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습니다. 전문가도 아니고 현장 기술자도 아니고 이 사업 정책의 입안자도 그 추진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고 상식을 가지고 있는 보통 한국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새기며 하나의 상식인으로서 4 대강 죽이기에 반대하는 저의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맨 먼지 떠오르는 하느님의 말씀은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꾸미시려고 땅에서 안개가 솟아나게 하고 축축해진 흙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산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쪽에 에덴이라는 동산을 꾸미시어 거기서 사람이 살게 하셨습니다. 좋은 나무가 그 땅에서 자라나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열매를 내게 하셨습니다.

 

다음에는 강 하나가 에덴의 낙원에서 흘러나와 그 동산을 적시고 그곳에서 네 줄기로 갈라져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 네 강의 이름도 뚜렷합니다. 피손강, 기혼강,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이 그것이지요. 몇 년 전에 티그리스강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 강은 도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유프라테스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혼이라는 강 이름은 예루살렘의 한 샘터 이름과 같습니다. 그러나 집회 24, 27에 기혼강과 나일강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기혼강을 나일강으로 보는 견해에도 일리는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피손이라는 강은 이름만 남아 있을 뿐 지금 어느 곳에 있는 강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농담 같지만, 이렇게 4 대강 사업을 맨 먼저 시작하신 분은 바로 다름 아닌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런데 4 대강만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넷이라는 숫자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온 세상의 모든 강을 만드시고 사람이 물을 마시고 짐승들을 먹이며 농사를 지어 먹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어쨌거나 4 대강을 만드신 분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이 만드신 이 강들은 이스라엘이 정착해 살던 가나안 땅을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에 흐르는 큰 강들이었습니다. 이 큰 강들은 실제로 홍수로 자주 범람하였고 그래서 많은 피해를 주기도 하는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이 강들은 이스라엘을 침탈하고 정복하고 포로로 잡아가는 이른바 적성 강대국들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물은 이렇게 생명의 젖줄이기도 하고 죽음을 몰고 와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삽시간에 휩쓸어가는 무서운 적대세력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이중성을 띠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 생명과 사망이 교차하는 원소라고 하겠습니다.

 

본래 창세기의 4 대강은 하느님이 만드신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보시기에도 참 좋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 동물과 식물,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야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흠잡을 데 없는 완성품이지 미완성품이 아니었습니다. 다 알다시피 물은 흐르는 게 그 본성입니다. 물은 흐르면서 제 갈 길을 찾아갑니다. 가다가 막히면 돌아갑니다. 막힌 곳이 높아 더 이상 흘러내리지 못하게 되면 물이 차올라 다시 흘러내릴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하여 제 갈 길을 다시 찾아 다 흘러간 다음에는 바다와 한 몸이 됩니다. 바닷물은 햇빛을 받고 바람을 타면서 수증기로 증발했다가 비가 되어 산골짜기를 타고 내리면서 골짜기 물을 모아 다시 강을 이루면서 흘러갑니다. 이렇게 하기를 얼마나 오래 했을까요? 그 숫한 세월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강들은 의연하고 도도하고 유유하게 흘러갑니다.

 

이렇게 강들은 하느님의 작품으로 하나의 걸작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포클레인을 들이대고 강바닥을 휘젓고 파내고 퍼 올려 덤프트럭으로 그 흙과 모래를 옮겨 쌓아 보를 만들어 물길을 막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말로는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듣기로는 보가 아니라 댐이라고 할만 합니다. 보를 쌓아올리는 둑의 높이가 11미터나 되고 그 아래 수심이 7미터에 이른다고 합니다. 모두 높낮이가 18미터나 됩니다. 그것이 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댐에 물을 가둬놓고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요? 얼핏 떠오르는 것이 운하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높게 물길을 막아놓고 그래서 물이끼에 물이 썩고 수많은 민물고기가 드나들며 산란도 못하게 하여 멸종의 위기로 내몰며 생태계를 파괴하고 많은 문화재가 수몰되고 둔치에서 고생고생 논밭을 일구어 생계를 이어가던 많은 농민들과 민물 고기잡이 어민들의 생활터전을 짓밟아 놓으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부가 말하는 4 대강 사업에서 기대되는 수익과 혜택이 무엇이고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올릴 수 있는 수익은 또 누구 차지가 되며 그 혜택은 누가 누리게 되겠습니까? 힘 있고 돈 많은 분들은 불우 이웃돕기니 기업의 사회적 기여니 하면서 헌금하고 기부도 합니다. 물론 이런 희사와 기부행위는 그 자체로서는 좋은 일이고 당연히 권장해야 할 일이지만 그나마 한두 번으로 끝날 때가 많고 과시성 시혜와 온정주의로 얼룩지고 “노블레스 오블리쥬 noblesse oblige”라는 미명 하에 그 위선성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비웃음, 그리고 문화사업을 빙자한 감세 혜택의 탐욕을 숨기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 미래의 밑그림을 에제키엘 예언자는 미래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와 사해의 소금기에 절은 짠물을 단물로 바꿔놓는 강물에 비유했습니다. 이 강가에는 양쪽 기슭에 수많은 과일나무가 서있고 그 잎은 시들지 않으며 그 열매는 아무리 따먹어도 떨어지는 법이 없이 다달이 열매를 냅니다. 그 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그 잎은 약초가 됩니다. (에제 47장)

 

이런 강은 아무리 하느님이 주신 온갖 자원을 다 동원한다 해도 사람의 손으로는, 그 기술만으로는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약속하시는 미래의 강은 이런 것입니다. 그 강에는 보가 없습니다. 온갖 물고기가 그 강에 우글거리고 있어서 어부들은 강가에 20여 킬로미터나 되는 길가에 길게 그물을 널어놓고 햇빛에 말려야 할 만큼 그 강물에서 물고기를 많이 잡는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강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신약성경의 마지막 작품인 요한 묵시록 21, 1에는 이다음 세말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면 묵은 하늘과 묵은 땅은 사라지고 그리고 바다도 없어질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묵은 바다는 세상과 인간, 모든 피조물을 위협하는 악의 권세의 상징일 뿐입니다. 이린 의미의 묵은 바다는 당연히 없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4 대강 사업이 노아 때처럼 홍수에 잠겨버리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과 가축들을 휩쓸어 가고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며 이 홍수의 물이 흘러들어갈 바다와 함께 아예 살아져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도 이 사업은 당장 중단하거나 적어도 근본적으로 다시 손질을 해서 우리 국민 모두의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사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법은 물이 흘러가듯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물은 막히는 곳이 있으면 흐르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 4 대강 사업에 앞서 최우선 적으로 뚫어야 할 막힌 곳이 수없이 많습니다. 여론과 언론이 막히고 집회와 결사가 막히고 양극화로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사이가 막히고 청년들의 일자리가 막히고 결식아동들의 공부 길이 막히고 의견을 달리한다 하여 좌파에 몰리고 빨갱이로 매도당하지 않고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공존과 관용의 길이 막히고 천문학적인 비싼 교육비로 가난의 대물림을 청산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노숙자들이 집과 일터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막히고 수많은 노인들이 갈 데가 없어 공원과 역전 광장에서 서성이며, 차상위층에 속한다 하여 아무런 제도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가 하면 100만 명에 가까운 외국인 이민자들, 그중에도 특히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이 차별대우를 받고 사회적 보호에서 소외되는 일이 빈번하고, 수많은 대학 강사들이 안정된 정규직장을 찾아갈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비정규직장에서 감봉의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언제 퇴출당할지 모르는 불안에 떨면서 갈 길이 없어 애태우고 있는 분들, 남과 북이 화해하고 교류하여 북쪽의 어렵게 사는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막히고... 이렇게 들자면 한도 없고 끝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부가 이 모든 난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부터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인지 그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그 결정은 정치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그렇다고 행정편의주의와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고 착각이머 독선이고 오만이며 무엇보다도 여론을 존중해야 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주권은 재민이라고 했습니다. 집권을 주권으로 착각하는 일이 없기 바랍니다. 전제정치와 독재정치는 시대착오입니다. 그래도 무리수를 쓴다면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막힌 데를 뚫는 데 돈이 없다고 예산부족 타령은 하지 안 해도 될 것입니다. 4 대강 사업에 쏟아 넣는 우리 국민의 혈세를 이렇게 수없이 많은 막힌 곳을 뚫는 데 사용한다면 세금을 내야하는 선의의 납세자들의 마음도 그 얼마나 가벼워지겠습니까?

 

이명박 장로 대통령님, 제발 우리 민초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생각을 바꾸는 메타노이아 metanoia, 회개의 결단을 내려 4 대강 사업을 중단하거나 여의치 않다면 그 시기와 규모를 다시 한 번 조정해주시고 4 대강보다는 그 큰 강들이 갈라져 흐르는 여러 지천 사업을 우선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늦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