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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세월호 참사 10년, 우리의 추모를 통해, 죽음을 넘어 삶으로 부활한다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4. 4. 17.

추모를 통해, 죽음을 넘어선 삶으로 부활한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추모미사,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용태 마태오 신부 강론

2024. 4. 16.(화) 오후 2시, 대전현충원 내 세월호 참사 순직자 묘역 

 

2024.4.16.(화) 14시, 세월호 참사 10주기 추모미사를 봉헌 중인 김용태 마태오 신부 (ⓒ 임재근)

 

 

 

세월호 참사 10년,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  

(2024년) 오늘 4월 16일,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딱 정확하게 만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 이 추모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 이렇게 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이 미사에 함께해 주시는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 여러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재작년 10월 29일이었죠. 이태원 참사로 159명의 젊은이들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선체로 질식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희생자들의 유가족 여러분도 이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교사들과 순직 소방관 등이 묻힌 대전 현충원에서 ...  

우리가 오늘 현충원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데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안산 단원고 선생님들 열 분이 묻혀 계시고, 그리고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다음에 209일 동안 수색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처음에는 구조 작업을 했다가 나중에 이제 수색 작업으로 변했죠. 그러다가 7월 17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약 세 달 후에 수색 작업을 마치고 강원도 소방본부로 헬기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광주 도심에서 추락해서 다섯 분의 소방관님들이 돌아가셨어요. 그 다섯 분도 여기에 함께 묻혀 계십니다. 그리고 세월호 선원이 열 분 계셨는데 돌아가신 분들이, 그중에 세 분이 또 여기에 묻혀 계십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물론 희생된 학생들의 무덤은 없지만, 항상 학생들은 선생님과 함께 하시니까 선생님이 계신 이곳에서 학생들도 함께 또 기억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겠습니다. 

 

 

2024.4.16.(화) 14시, 세월호 참사 10주기 추모미사가 진행 중인 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 (ⓒ 임재근)

 

 

“나는(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6, 35)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똑같은 자녀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빵으로, 밥으로, 국으로 내어주시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함께 나누어 먹는 하느님의 똑같은 자녀들입니다. 식구들이죠. 오늘 이 복음 말씀은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하느님의 한 자녀임을 일깨워주는 그런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식구들이죠. 같은 빵을 나눠 먹는, 같은 밥과 국을 나누어 먹는 한 형제요, 한 자매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코 저 사람의 삶이 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고, 저 사람의 아픔이 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죠. 저 사람의 고통이 심지어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삶과 죽음이 나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하늘에서 오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빵을, 음료를 나누어 먹고 마시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각자도생의 삶이라는 현실에서 ...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살아가면서 그냥 각자도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삶 안에 너무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굶어 죽든 말든 나만 배부르면 되는 거고, 다른 사람들이야 불행해지든 말든 나만 행복하면 되는 거죠. 다른 집 자식이야 수학여행 가다가 죽든 말든 내 자식만 온전하면 되는 거고 이런 식의 삶의 모습이 우리 안에 너무 만연해 있죠. 그런 세상 안에서 우리에게 오늘 〔세월호 참사〕 10주년을 맞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십니다. “너희는 같은 형제고 같은 자매요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계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얼굴 하나 본 적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삶과 고통, 아픔, 또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결코 무관심해선 안 됩니다.

 

2024.4.16.(화) 14시, 세월호 참사 10주기 추모미사가 진행 중인 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 (ⓒ 임재근)

 

 

“지구의 나이는 몇 살일까요?”   

옛날에 주일 학교 미사를 봉헌하는데 청년 하나가 수능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을 위해서 격려의 한마디를 하러 나와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시험을 앞둔 수능 수험생들에게 “지구의 나이는 몇 살일까요?” 그러면 (답은) “45억 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청년의 그다음 말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지구의 나이는 여러분들의 나이와 같아요. 

이 지구는 여러분이 살아가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청년의 격려 한마디! 시험도 중요하지만, 그 시험을 보는 ‘나 자신’이 더 소중하다는 그런 의미로, 나중에 시험 결과 때문에 실망할지도 모를 자신의 후배들을 향해서 해준 따뜻하고 소중한 격려의 한마디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가! 지금도 기억의 생생함이, 아마 그 자리에 미사를 함께 보관하고 있었던 다른 어른들에게도 큰 울림이 되는 그런 깨우침의 한마디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과연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세상에 나온 그 순간부터 나에게 존재하고 나에게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의 나이는 내 나이와 같은 거죠. 그런 뜻에서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고 하나의 우주입니다. 인생의 무게란 우주의 무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겠습니까? 시간이 흘렀지만, 요즘도 그때 그 청년의 말을 떠올리면서 한참을 꼭 씹어보게 됩니다. 정말이지 모든 사람들이 이 청년처럼만 생각하고 또 서로 그렇게 생각해 주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다 상대를 업신여기는 일 없이 서로 존중하고, 또 존중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꿈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한숨이 절로 나오는 지금의 현실을 보면서 그런 바람이라도 가져봅니다.

 

우주와 비교할 만한 인간의 삶이 무참히 짓밟혔다면 ...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생각해 봅니다. 지구를 넘어서 우주와 비교할 만한 인간의 삶이지만, 지금 이 땅에서는 그 삶이 무참히 짓밟혀버리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죽음과 참사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죽음, 있을 수 없는 죽음,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 이제는 일상화된 듯 합니다. 수도 없이 많은 우주가 그렇게 이 세상에서 소멸해 버립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304개의 우주가 이 세상에서 영문도 모른 채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스스로도 귀하고 소중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누군가에게는 목숨보다도, 45억 살 먹은 지구보다도, 그리고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저 하늘보다도 더 크고 더 귀하고 소중한 사람들, 그런 사람 304명이 어둡고 차디찬 바닷속에서 질식해 숨졌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8년 후에 159명의 젊은이들이 누구나 다니는 도로에서 선 채로 질식해 숨졌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9개월 후에 누구나 다니는 퇴근길 지하차도에서 14명이 빗물에 잠겨 질식해 숨졌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하루에도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터와 또 집에서 학교에서 죽어갑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막을 수 없었을까? 누구의 책임일까? 

 

우주의 소멸 앞에서 우리는 비통하며 또 궁금하다 ...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곁에 함께 살았으면서, 누군가의 가족이고 누군가의 친구였고 누군가의 애인이었던 이들의 이 허망한 죽음! 그 갑작스러운 우주의 소멸 앞에서 우리는 비통함과 동시에 솟아나는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 비통함이 클수록 궁금함도 더 커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묻습니다. 왜? 어쩌다가?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무엇 때문일까?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는 뜻을 드러내어, 상주를 위문한다는 의미의 ‘조문(弔問)’과 ‘문상(問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에 ‘물을 문(問)’자라는 이 글자가 들어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궁금하거든요. 내가 아는 누군가가 100살을 넘기고 돌아가셨어도 우리는 그 유족들을 만나서 어떻게 돌아가셨느냐고 묻습니다. 하물며 젊은 나이에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경위에 대해서, 묻고 따지는 것은 ‘추모(追慕)’의 기본입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쫓을 추(追)’, ‘그리워할 모(慕)’ 이 글자로 이루어진 ‘추모’는 죽은 이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쫓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삶의 궤적을 쫓아가며 그 삶의 마지막 모습, 그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묻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묻고’ 또 ‘알고’ ‘공감하고’ ‘이해함’으로써 고인(故人)에 대한 슬픔과 회한은 흘려보내고, 기억과 유산들은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이라는 일이 일어나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닙니다. ‘묻고’ ‘알고’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 ‘추모’는 지금껏 그와 함께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내가 또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내야 할 삶이라고 하는 ‘미래를 지향하는 몸짓’입니다.

 

고작 10년을 기억했을 뿐, 우리는 2천년을 기억하고 있다

가끔 가다가, 세월호, 리본과 배지를 하고 있으면 그걸 보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거 하고 다니냐”고 심지어는 신자들 중에도 있어요. “신부님, 그거 아직까지 하고 계세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십자가를 통해서 늘 기억하면서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잖아요? 고작 10년 기억했어요. 근데 우리는 2천 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러고 보면 추모(追慕)의 이 같은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그리 비참하게 죽으셨는지를 따져 물어, 그분에 대해 똑바로 알고, 그분에 대해서 기억하고, 뉘우치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분을 따름으로써 구원을 향해 나아가려는 신앙인의 삶, 그 삶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을 향한 참된 의미의 추모입니다.

 

‘추모’는 신앙 생활의 근간

우리 신앙생활의 근간이 이미 추모인 거죠. 이것은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일을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유언을 받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있는 빵’이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밥으로 국’으로 내어주시고 우리에게 당부하시죠.  “기억하여 행하여라.”  예수님은 우리의 이 같은 추모를 통해서 죽음을 넘어선 삶으로 이 세상 안에 부활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우리의 추모를 통해서, 기억하고 행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 시대에 끊임없이 우리 삶 안에 부활하시죠.  수난하고 죽으신 예수님을 향한 이 같은 추모는 모든 추모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죽음으로 인해 그대로 잊혀지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추모를 통해서, 세상 속 우리 형제들의 삶 안에서 새롭게 기억되고 또 발현되는 것입니다. 

 

‘사회적 참사’라는 세상의 십자가 

렇다면 사회적 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정부를 향해 요구하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것은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집착이나 복수심에 사로잡힌 증오나 이해를 따지는 정치적 속셈 같은 게 아닙니다. ‘왜?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따져 묻고, 그 인과관계에 책임을 묻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생존자들을 격려하는 진정한 의미의 조문이고 추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추모는 전례와 신심 행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참사라는 세상의 십자가들을 향한 이 같은 우리의 추모를 통해서 더 선명해지고 더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사회적 참사에 책임이 있는 권력자들은 희생자들의 죽음을 축소하고 은폐하고 왜곡하려 합니다.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궁금증은 더 커지고 우리의 그리움은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궁금증과 그리움은 거대한 추모의 물결이 되어 사라져버린 우주를 다시금 우리 곁으로 불러낼 것입니다.

 

2024.4.16.(화) 14시, 세월호 참사 10주기 추모미사가 진행 중인 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 (ⓒ 임재근)

 

‘사회적 참사’를 ‘숫자’로 호명하는 이유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이제 4·16 참사라고 부릅니다. 이태원 참사를 10·29 참사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건을 그 사건이 일어난 숫자로 부르는 것은 그 사건이 어떤 개인, 어떤 집단의 사건이 아니라 그 나라 ‘국민 모두의 사건’일 경우에 그처럼 그 사건이 일어난 그 날짜로 기억합니다. 5·18,  4·19 ... 마찬가지로 우리가 4·16 또 10·29 이렇게 부르는 거죠. 세월호 참사를 4·16 참사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세월호가 안산 단원고 학생들과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의 사건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를 10·29 참사라고 부르는 것도 이제는 이태원 참사가 159명의 젊은이들이 당한 사건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이태원 참사’는, 그리고 이 시대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회적 참사는 우리 모두의 일이고, 우리 모두의 비극이고 또 살아남은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4·16과 10·29 참사에는 이 시대 온갖 부조리가 담겨 있고, 그 부조리에 희생된 이들의 눈물이 담겨 있고, 이 부당한 희생을 외면하는 이들의 잔인함이 담겨 있고, 이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는 이들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4·16 세월호 참사, 그리고 10·29 이태원 참사에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은 유가족들의 일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과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추모인 것입니다. 2024년 4월 10일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이제 새로운 국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제22대 국회’에 바란다 

국민들의 염원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번 총선을 치르고 맞이하는 4월 16일, 오늘 세월호 참사 10주년의 이 날은 그동안 간절히 염원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이뤄내고 더 나아가 이 땅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80석에 가까운 촛불 의석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허송세월만 보냈던 4년 전의 21대 국회와는 달리, 2024년 4월에 새롭게 출발하는 22대 국회는 불의한 사회적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바라는 국민의 염원과 명령을 받들어 지난 10년간 미루기만 했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고 하는 이 시대적 과제를, 이 참다운 추모를 하루빨리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국민들이 뽑아 세운 이 땅의 정치인들이 할 수 있는 참사 희생자들을 향한 진정한 최고의 추모가 아니겠습니까?

 

내년에 맞는 세월호 참사 11주기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이 세월호 희생자들, 그리고 이 사회적 참사 희생자들을 향한 우리의 추모 안에서 이 땅의 참된 부활로 자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간절한 염원을 담아 미사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기도로 봉헌토록 하겠습니다.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끝)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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