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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인권주일 강론] 복음적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12. 11.

제37기 사회교리학교 수료미사  강론 겸 인권주일 강론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 김용태 마태오 신부)는 2023년 12월 9일(토) 오후 5시, 교구청 명례방에서 제37기 사회교리학교 수료미사를 봉헌하였다.  금번 제37기 사회교리학교는 교구내 본당 사회복음화분과장(원) 및 사목위원을 대상으로 23년 10월 7일(토)부터 12월 9일(토)까지 총 10강으로 진행되었으며, 10명의 적은 인원으로 진행했지만, 참여한 이들이 더욱 친밀하게 교류하는 연대와 공감의 시간이었다. 다음은 수료미사의 김용태 신부 강론 전문이다.

 

복음적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김용태 마태오 신부(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2023년 12월 9일(토) 오후 5시, 대전교구청 1층 명례방에서 수료미사

 

 

대림 2주일 (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 복음 말씀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1,1-8
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2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
라.”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5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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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선포자의 귀감, 세례자 요한 

오늘 오후 3시(토크콘서트)부터 긴 시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수료미사로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오늘 인권주일 · 사회교리주간을 시작하면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의 시작,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나옵니다. 세례자요한은 예수님을 드러낸 인물로 자리합니다. 복음선포자인 우리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분이 바로 세례자요한입니다. 최대한 자신을 낮추며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합니다. 그 면면을 보면서, 특히 봐야 할 것이 낙타털, 허리가죽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는 것, 즉 가난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가난함에서 단순함이 자리합니다. 단순함에 선명함이 자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고, 더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단순소박함이 필요하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역시 단순소박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더 많으면 안되고, 적극적 가난이 필요합니다. 현관문 앞에서 주머니에 뭐가 잔뜩 있으면 열쇠 꺼내기 힘듭니다. 그것입니다. 뭔가 많으면 진짜를 놓칩니다. 마르타에게 “너는 많은  것에 신경쓰는데, 필요한 건 한가지이다.”라고 하죠. 뭐가 섞여있으면 꺼내기 힘듭니다. 그것밖에 없으면 쉽게 꺼냅니다. 

 

세례자 요한이 쌍욕을 퍼부을 수 있던 이유

세례자요한의 모습은 그렇게 가난함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면서 당당함이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쌍욕을 퍼붓는 장면이 있습니다. 왜 그럴 수 있습니까? 받아먹은 게 없어서 입니다. 만일 모피옷을 입었다면, 그걸 준 사람이 온다면 새치기를 시켜주며, “먼저 세례를 받으시죠.”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받아먹은 게 없으면 당당해줍니다. 저 역시 기준이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자세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교회가 그래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교구 또는 수도회는 부당한 정권에게 아무 소리도 못합니다. “왜 아무 소리도 못하지? 저렇게 못하는데?” 예수님도 불의에 맞서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우리 역시 부당하고 불의한 장면에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침묵하고, 또 침묵은 동조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이유가 있습니다. 받아쳐먹은 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허리에 낙타털과 가죽띠, 메뚜기에 들꿀, 이건 세례자요한의 식습관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 당당함의 배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선포자로서의 우리들은 마지막 마무리 교리처럼, 세상 안에서 선포자로, 예수님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당당해야 합니다. 꿀리는 게 있는 순간 아무 소리 못합니다. 받아먹는 게 있는 순간 아무 말도 못합니다. 

 

복음적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무 소리를 못하는 사람들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곧 그런 사람들일겁니다. 그래서 복음적 당당함, 복음적 자존심을 위해서 내적으로 선명함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가난해야 합니다. 복음선포자로서의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간 당나귀는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환호합니다. 그런데 당나귀가 자기에게 그러는 줄 알고 으시댄다면, 이건 꼴불견입니다. 자기에게 그런 게 아니라 자기한테 그러는 줄 알면 꼴불견이고, 또 하나의 꼴불견은 “저한테 이러지 마십쇼.” 이것도 꼴불견입니다.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복음선포자로서, 직무사제인 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겸손과 당당함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겸손함과 당당함을 잘 구분해야

저는 겸손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제 등에 타신 그리스도에 대해 당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겸손한 척하면서 내 등 위의 그리스도를 하찮게 만들면 안됩니다. 직무사제로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 자신은 당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역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당당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2가지 의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두가지입니다. 모든 걸 내어주신 사랑도 있지만, 손톱만큼도 포기하지 않는 당당함으로 돌아간 겁니다. 그 당당함으로 돌아가셨고, 또 한가지, 모든 걸 내어주시는 사랑과 겸손. 이렇게 2가지가 우리 안에 자리한 겁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도 그게 드러납니다. 혹시나 그리스도가 자기로 인해 가려질까봐 한없이 낮추면서도, 예수님을 드러낼 때는 또 당당합니다. 이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걸 구분하지 못하면 비굴해집니다. 듣기 좋은 말한 해버리는 것은 겸손함이 아닙니다. 스스로 겸손할 때 그러지 않으면서 거꾸로 돌아가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는 적극적 가난이 있어서 그것이 당당함을 가능하게 해주고 또 겸손함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복음선포자를 섬기는 건 우상숭배 

우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복음선포자가 잘못하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야 하는데, 우상이란 수단이 목적이 될 때입니다. 수단이나 방법이 목적이 되는 것, 국가가 국민을 죽는 것, 국가는 수단과 방법이고 국민이 목적인데, 거꾸로 되어 있는 겁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은 수단이고 복음선포자입니다. 달을 잘 가리켜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달을 안보고 손가락을 바라볼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나만 바라봐!”라는 식으로 우상숭배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까불지 마, 나한테 죽어”라고말하는 이도 있지요. 

 

달을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보는 2가지 이유 

그런데 왜 손가락을 볼까요?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손가락이 더러울 때, “야~ 저기 봐봐”할 때, 또 하나는, 손가락이 너무 화려할 때입니다. 손가락에 다이아몬드나 황금반지가 있다면 그걸 바라볼 수 있어요. 교회가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겁니다. 너무 더러워지거나 너무 화려해지면, 제대로 가리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세례자처럼, 더럽지도, 화려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낮아지고 약해지고 가난해지고 단순소박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선포자로서의 자세. 세례자요한이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인권주일이며 사회교리주간에 여러분을 세상에 파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양식은? 

오늘 인권주일이며 사회교리주간에 여러분을 세상에 파견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복음선포자로서, 마침 복음의 시작을 선포하는 마르코복음의 첫구절이 나오며 세례자요한을 통해 사도직의 자세를 되새겨보게 됩니다. 이런 단순함과 선명함이 우리에게 자리할 수 있도록, 우리가 많은 것을 갖지 않고 적당히 가질 수 있도록, 나의 필요의 적당함을 오늘 말씀하십니다. 내 소망이 남에게 피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 무수한 필요들이 있지만, 적극적 가난을 실천하며, 하느님을 드러내며 복음을 선포하며 적절한 필요를 예수님이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일용할 양식”

 

이것은 정의로운 양식입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양식입니다.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의 풍요로움을 말하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피눈물이 나게 하는 엄청난 부자가 아니라, 한 데나리온. 이것이 일용할 양식입니다. 아침 일찍 온사람이나 늦게 온사람에게, 포도밭 주인은 그 늦게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병약한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일용할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온 사람에게 손해를 준 게 아니라, 병약하여 늦게 온 이에게 자비를 베푼 겁니다. 늦게 온 이의 양식을 뺏어서 아침 일찍 온 사람에게 주는 게 아닙니다. 

 

가난을 이야기할 때, 상한선은?  
가난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무엇을 얘기해야 합니까? 상한선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다른 사람의 소망과 필요를 짓누르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한계선, 그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에게 필요를 청하면서 적극적 가난을 실천할 때 우리 삶은 단순소박해지면서 하느님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주님의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당당해질 수 있는 비움, 단순소박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의 세례자요한을 통해 배울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마음에 새기면서, 새롭게 세상을 향해 파견가는 여러분 주님 말씀에 충실히 응답하는 한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2023년12월 9일(토) 17시, 수료미사의 보편지향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