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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김용태 마태오 신부 글 "믿을 교리와 사회 교리"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12. 9.

대전주보 

믿을 교리와 사회 교리

김용태 마태오 신부(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주보글)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2023년 12월 10일(나해) 

 

 

"그것은 '믿을 교리'입니다." 

 

이 말은 교리교육 현장에서 “자꾸 묻고 따지지말고 그냥 믿으세요!”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삼위일체’처럼 이해하기 모호하고 난해한 교리를 설명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느님의 신비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에 나름 수긍을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우리 교회의 신앙교육은 이런 식의 믿을 교리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의 신비라는 게 머리로 이해할 수 없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믿어야 하는 대상일까? 천주교는 ‘계시종교’다. ‘계시’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믿는다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알기를 바라신다.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믿는 것은 ‘맹신’이 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보이는 세상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과 온갖 피조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 교회와 7성사만이 아니라 세상 속 인간과 온갖 피조물들이 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표징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 벽면만 바라보면서 믿을 교리만을 암송할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온갖 피조물들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이 보인다.


교회의 ‘사회교리’란 그런 거다.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것이 바로 사회교리다. 믿을 교리의 하느님은 사회교리를 통해 우리 곁에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 드러난다. ‘천주존재’와 ‘강생구속’은 세상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라는 사회교리 안에서 밝혀진다. ‘삼위일체’는 갈라져 싸우는 모든 이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합하기를 바라면서 혐오와 배척에 맞서는 사회교리 안에서 드러난다. ‘상선벌악’은 아무리 가난해도 착하게 살면 영예롭고 아무리 부유해도 악하게 살면 수치스러운 세상을 만들려는 공정과 정의의 사회교리 안에서 구현된다.


지난 10월 말, 어느 본당의 평일미사 주례를 맡게 되어 미사를 봉헌하면서 참석한 신자들에게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더니 한 신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는 절을 하면서 세상의 십자가는 외면해 버리는 모습이라니! 그런데 이런 신자들이 꽤 많다. 사회교리교육이 더욱 절실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