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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사순특강] 김용태 마태오 신부의 '생태 환경'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4. 1.

김용태 마태오 신부의  '생태 환경'

대전 둔산동 성당, 2023.3.31.(금) 오후 7:30, 미사 후 특강

 

김용태 마태오 신부의 강의 장면

천주교 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용태 마태오 신부가 둔산동 성당(주임신부 송준명 프란치스코)의 초청으로 2023년 3월 31일(금) 둔산동 성당에서 '생태 환경'을 제목으로 하는 사순특강을 실시했다. 저녁 7시 30분 미사를 마치고 8시 5분부터 9시 25분까지 약 80분간 진행된 강연은 성당의 대부분의 좌석을 모두 채운 상태의 열띤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고, 유머와 재치있는 입담에 교중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면서도 생태의 진정한 의미를 함께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다. 다음은 강연내용이다. 

 

둔산동 성당 주임 송준명 신부가 사순특강의 연사를 소개하고 있다.

김용태 신부 특강 2023-3-31 금. 20시05분 시작

"코로나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할 게 없다"라는 인식에 대해

반갑습니다, 여러분. 제가 2005년에 여기 둔산동 성당에서 1년 동안 보좌신부로 있었습니다. 당시 제2 보좌도 있었는데, 제가 1보좌로 있었고, 다시 오랜만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소개받은 대로, (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은 성당에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주로 생활과 세상 속에서 하는 겁니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성당에 못 왔던 적이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성당에 못 나가면 할 게 없다라는 인식이 생긴 적이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런데 우리의 신앙 생활은 여러분이 주된 시간을 보내는 일터, 가정, 학교 등입니다. 여러분이 서계신 모든 곳이 신앙생활의 자리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여러분도 사제이고, 보편사제이며 예언자이며 선포자입니다. 여러분의 사제직은 여러분이 발을 딛고 있는 곳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고 살았습니다. 이를 다시 기억시키고 소개시키고,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도와주는 곳이 바로 사회복음화국입니다. 이번에 (대전)교구 시노드를 하며 고민과 성찰을 통해 새롭게 생긴 곳이 바로 사회복음화국이고 제가 초대 국장을 맡았습니다. 

 

명태가 아니라 '생태'에 대해서 

오늘 드릴 말씀은 명태가 아니라 생태입니다. 생태 영성입니다. 이는 자연보호가 아니라 복음적 의미, 본질적 의미를 말합니다. 생태영성의 대표적 성인은 프란치스코 성인이지요. 오늘 드리는 말씀 안에 밀접하게 관련되고, 교황님도 이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짓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인 [찬미받으소서](2015) 역시 [태양의 찬가]로 알려진 원래 [피조물의 찬가]의 일부분을 따서 내신 것이죠. 그러면 시작 기도로 [피조물의 찬가]를 봉헌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시작 기도로 바치는 <피조물의 찬가>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특히 형제인 태양으로 찬미받으소서.
태양은 낮이 되고 주님께서는 태양을 통하여 우리에게 빛을 주시나이다.
태양은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내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인 달과 별들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하늘에 달과 별들을 맑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지으셨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형제인 바람과 공기로, 흐리거나 맑은 온갖 날씨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피조물들을 길러 주시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인 물로 찬미받으소서. 물은 유용하고 겸손하며 귀하고 순결하나이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형제인 불로 찬미받으소서.
주님께서는 불로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불은 아름답고 쾌활하며 활발하고 강하나이다.

 

김용태 마태오 신부가 시작기도로 <피조물의 찬가>를 봉헌하고 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이 되려면 ...

우리의 삶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우리들 저마다의 색깔과 아름다움이 반짝반짝하도록 살아야합니다. 숲을 가보면 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소나무 하나하나 같은 게 없습니다. 그 다름이 어우러집니다. 작은 벌레까지도 제각각의 특성과 색깔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 그것을 찬미하는 것이 생태영성입니다. 자연보호나 녹색성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여러분이 알고 계신 복음을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비추면 사랑이고, 요렇게 비추면 복음이며, 또 저렇게 비추면 생태입니다.

 

나쁜 놈이 아니라 무식해서 그런 것 ...

그동안 사람들이 복음을 한쪽 방향에서 이렇게만 보았으니, 저렇게 보면 생소하니까, "저건 모르는 내용인데?"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걸 빨갱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회교리’를 말하면 불온하다고 합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쁜 놈이거나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인은 나쁜 놈이 별로 없습니다. 무식한 겁니다. 그들은 무지하거나 무식하기때문에,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자,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빛은 이렇게도 비추고, 저렇게도 비추고, 요렇게도 비추는 것이죠. 그런데 자기가 몰랐던 방식으로 비추니까 깜짝 놀라면서도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여버립니다.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그리고 율법학자같은 사람들읿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두루두루 봐야 합니다. 그동안 몰랐기에 충격적인 것도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충격적인 곳에서 삶이 변화합니다. 처음에는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론을 듣다가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죠.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귀기울여 들일 때, 그동안 지나쳤던 내 주변의 강도 만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지 못한 내 자신을 반성하며 주위의 약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삶의 진정한 변화입니다. 

신앙은 결단이다

결국 회개하거나 회개하지 않거나,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렇게 신앙은 결단입니다.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릴 때, 문을 닫고 커튼닫고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면 최소한 밖에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119에 전화라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현장의 소리에 아파하면서, 성사도 보고, 또 내 자신의 부족함을 뉘우치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게 신앙생활의 모습니다. 이 시간도 그런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영화 [탄생]에 출연하게 된 사연

제가 평화방송에 나와서 2시간 반 동안 신부님 두 분과 수다 떠는 게 있는데요. 영화 [탄생]을 촬영한 박흥식 감독님이 그걸 보셨던 모양입니다. 잠시 제 소개를 하면, 제가 김대건 신부님 4대 손으로 우리 집에 성인 세분(김대건신부님, 그 아버님, 그리고 5촌당고모),  그리고 복자 2분. 순교자는 14명(15명?), 증거자도 15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제게 "넌 뭐냐?”라고 묻습니다. 저는 "생존자"이죠.  김대건 신부님의 가계는 대가 끊기면서, 사촌동생이 대를 이었고, 그 분이 제 고조부이십니다. 결국 고조부의 사촌형님이 김대건 신부님입니다. 그래서 200주년 희년때 주제로 토크하던 중에, "김대건 신부님 캐릭터를 어떻게 잡지"라는 고민을 하던 박흥식 영화감독은 <중세라이브>란 토크에서 저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겁니다. “아! 아닐 수도 있겠다. 밝고 경쾌할 수도 있겠다.”라는 개념으로 주인공을 섭외한 겁니다. 그리고 영화의 주요 대사들도 제가 토크 때 이야기한 걸 인용해서 대사를 썼습니다. 그래서 엔딩 크레딧에서 배우 이름에도, 또 대본에도 제 이름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방송 중세라이브] 성 김대건 신부 4대손 김용태 신부가 말하는 사랑의 순교란? (2021.8.22.)

제 역할은 103위 순교 성인 중 한 분이신 이문우 요한인데요. 제가 연기한 그때 나이가 29살입니다. 전체적으로 5분 정도(실제적으로 12초) 등장하는데, 이문우 요한은 대사는 없고, 고개를 끄덕하는 겁니다. 그 이후로, 감독님께 불만을 토로했어요. "뭐에요. 대사도 없이"라고 말이죠. 천안의 영화관에서 제가 배우로서 무대인사를 했습니다. 성당에서 많은 분이 오셨는데, 영화 끝나고 나와서 절 찾으시더군요. 저는 생각하길,  “아 사인해달라는 거구나.” 라고 있는데, “아니 어디에 나오셨어요?”라는 겁니다. 

 

오창익의 뉴스공감 2022.12.8.(목)

생태영성과 자연보호의 차이

이 시간에 제가 나눌 이야기는 생태영성입니다. 쓰레기는 어떻게 배출하는게 그런 게 아니라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생태’, ‘환경’, ‘자연보호’, ‘그린’, ‘녹색’, ‘에코’ 이런 말을 쓰죠. 생태와 에코는 비슷하죠. 에콜로지(생태학)라는 말에서 ‘에코’가 접두어처럼 쓰이죠. 그리스 신화에도 ‘에코’는 메아리죠. 그렇게 파생된 말이죠. 또 환경이란 말이 있습니다. 생태와 환경. 즉 생태환경이라고 할 때, 환경이란 고리 환(環)자를 쓰죠. 그리고 경(境)은 '지경 경'이죠. 그래서 '환경'이란 주변을 말하는 반면, 생태는 살아있는 모습이겠죠. 따라서 환경의 개념과 생태의 개념은 천지차이입니다.

 

환경의 중심에 누가 있나? 

환경이란 표현 안에는 중심이 있고, 그 중심을 둘러싼 주변의 조건과 상황, 배경을 말합니다. 그런데 환경을 말할 때 중심은 곧 인간입니다. 환경을 이야기할 때는 ‘인간중심주의’입니다. 그래서 환경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잘 살기 위해 자연을 이용합니다. 자연은 배경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모든 생명체의 최고봉에 있으니, 인간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맘대로 쓰고 다스립니다. 이게 환경입니다. 전통적인 개념입니다. 

 

생태는 관계성이다 

생태는 이와 전혀 다릅니다. 관계성을 말합니다. 인간이 중심이 아니고, 인간과 지렁이가 동등합니다. 환경주의는 인간중심이기에 인간을 둘러싼 환경 하나뿐이지만, 생태는 그런 환경들이 각 개체마다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지렁이에게 생태의 주인공은 지렁이입니다. 지렁이 입장에서 인간의 환경은 어떤 걸까요? 더러운 차원이 아니라 위험한 것입니다. 그들의 수많은 환경들의 관계성이 바로 생태입니다. 차원이 완전히 다르겠죠. 환경이란 말은 은연중 인간중심이므로, 자연은 인간을 위해 쓰여진다는 것이고, 마구마구 자연을 사용해도, 남용하지 않는 수준에서는 당연하게 인식하며 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 정당성이 성경에서도 창세기에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다는 구절이 있죠. 그러나 생태는 형님이 태양, 누님이 달. 이렇게 프란치스코 성인의 감수성이 생태입니다. 온갖 피조물이 형님이며 누이입니다.

 

코로나를 바라보는 시각 

그래서 코로나를 바라보는 시각, 코로나 때문에 힘들죠.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라는 심정을 가진 코로나에 대한 시각이 인간중심적이라면, 생태의 시각은 무엇입니까? 지구의 시각에서 인간은 코로나보다 더한 것입니다. 코로나로 죽은 사람의 숫자는 독감으로 사망한 숫자보다 적습니다. 그런데 지구와 자연 입장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강력한 바이러스보다 더한 독종보다 더한 독종입니다. 아마존이라는 평화로운 생태계가 인간이 등장한 순간 완전히 파괴됩니다. 이만한 바이러스가 있을까요? 지구 입장에서 인간은 코로나보다 더한 독극물같은 겁니다. 

 

지구 입장에서 인간은 코로나보다 더한 독극물 

역지사지의 개념이죠. 이게 생태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감수성은 환경감수성이 아니라 생태감수성입니다. 인간감수성이 아니라 형제적 개념입니다. 점점 더 파괴되어가는 공동의 집인 지구와 자연이 인간 이익을 위해서 파괴하는 게 아닌 겁니다. 녹색성장 역시 인간만이 전부라는 사고방식이라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관계성을 회복하자는 것, 이것이 바로 생태적 회개입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 사람에게 죄를 짓거나 해를 가한 것에 대해 죄를 고백하죠. 그러나 함부로 휴지를 버리는 것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생태적 회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김용태 마태오 신부의 강의 장면

장자의 <제물론>에서 스승 왕예가 말하고자 하는 것

노장 사상 중에서 장자 사상의 핵심이 담긴 제물론(齊物論)이란 게 있습니다. 여기에 설결(齧缺)이라는 제자가 스승 왕예(王倪)에게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승 왕애는 제자 설결의 질문에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라면서 명확하지 않게 대답합니다. 그러자 제자는 “그런 게 있습니까? 명확해야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다는 건 뭔 말입니까?”라고 하자, 스승은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몸에 병이 나지만, 미꾸라지도 그러니?”라고 합니다. 미꾸라지에게 습한 것은 좋은 겁니다. 습한 게 인간 환경에 안 좋지만, 미꾸라지에겐 최상의 조건입니다. 모든 걸 다 습하지 않게 만들면 미꾸라지는 어떻게 살까요? 이것을 기원전 수백년전에 나온 말입니다. 사람은 나무 위에서 벌벌 떨지만 원숭이가 그런가요? 인간 중심으로 높은 곳은 위험하지만, 새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나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까지 생각하는 넓은 생각으로 확장해야 합니다. 


설결(齧缺)이 왕예(王倪)에게 물었다.(齧缺問乎王倪曰)
"선생님은 만물이 다 같이 옳게 여기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子知物之所同是乎)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曰 吾惡乎知之)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모르신다는 것을 아십니까?"(子知子之所不知邪)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曰 吾惡乎知之)

"그렇다면 사물이란 본래 알 수 없는 것입니까?"(然則物無知邪)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曰 吾惡乎知之)
비록 그러하나 내 시험삼아 말해보겠네.(雖然 嘗試言之)
내가 안다고 말하는 것이 실은 모르는 것이 아닌줄 어찌 알겠는가?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
내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실은 아는 것이 아닌줄 어찌 알겠는가? (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

내가 또 시험삼아 자네에게 물어보겠네.(且吾嘗試問乎女)
사람이 습한 곳에서 자면(民溼寢)
 허릿병이 나고 반쪽이 마비가 되는데,(則腰疾偏死)
미꾸라지도 그러한가?(鰌然乎哉)

사람이 나무 위에 올라가면(木處)
 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리는데(則惴慄恂懼)
원숭이도 그러한가?(猿猴然乎哉)
그러면 이 셋 중에서 누가 가장 올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가?(三者孰知正處)

사람은 소와 양, 개와 돼지고기를 먹고(民食芻豢)
고라니와 사슴은 풀을 뜯고(麋鹿食薦)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蝍且甘帶)
올빼미는 쥐를 좋아하네.(鴟鴉耆鼠 )
그러면 이 넷 중에서 누가 가장 올바른 맛을 알고 있는가?(四者孰知正味)

원숭이를 긴팔원숭이가 암컷으로 삼고(猿猵狙以爲雌)
고라니는 사슴과 교미하고(麋與鹿交)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어울려 논다네.(鰌與魚遊)

 

사람들은 모장(毛嬙)과 여희(麗姬)를 예쁘다고 따르지만(毛嬙麗姬 人之所美也)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물 속 깊이 들어가버리고(魚見之深入) 
새들은 그들을 보면 높이 날아가버리고(鳥見之高飛)
고라니와 사슴은 그들을 보면 힘껏 달아난다네.(麋鹿見之決驟)
그러면 이 넷 중에서 누가 가장 천하의 올바른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가?(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

내가 보기에는(自我觀之) 
인의(仁義)의 실마리와 시비(是非)의 갈림길이 마구 뒤섞여 어지러우니,(仁義之端 是非之途 樊然殽亂)
내가 어찌 그것을 가려낼 수 있겠는가?"(吾惡能知其辯)


인간은 강하고 자연은 약하다?

인간중심적인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고방식 안에 인간은 강하고 자연은 약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 마음대로 하는 것, 갑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함부로 하는 사람, 인간중심이라고 자연을 훼손하는 사람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작은 것들도 존중하는 모습이 없는 사람들은 사람들도 함부로 대합니다. 

모장(毛嬙)과 여희(麗姬), 그리고  "침어낙안(沉魚落雁)"
중국 춘추시대. 아주 이쁘답니다. 우리가 모장과 여희를 본 적은 없지만,  "침어낙안(沉魚落雁)"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여인의
미모때문에 헤엄치는 물고기가 넋을 빼고 바라보다 물에 빠져 죽고, 기러기가 날개짓을 잊고 떨어져 죽는다는 말입니다. 아주 중국식 뻥이죠. 아무튼 춘추시대 이름있는 미인들인데, 모장과 여희를 미인이라고 하지만, 장자의 [제물론]에서 스승 왕예는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물 속 깊이 들어가고, 새들은 높이 날아가 버리고, 고라니와 사슴은 숲속으로 힘껏 달아난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진선미는 상대적입니다. 결국 나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말입니다. 침어낙안의 원형은 원래 무서워서 도망치는 것인데, 변질되어서, 의미가 바뀐 겁니다. 원래는 "무서워서" 도망간다는 겁니다.

 

천하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천하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요? 절세의 미녀가 지닌 아름다움이 물고기에게, 새들에게, 그리고 고라니와 사슴에게는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생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일화입니다. 어짐과 의로움, 옳고 그름이 분별없이 섞여있다면서 나 중심으로 판단하지 말고 상대방 입장에서도 판단해보자는 게 이 일화의 교훈입니다. 

 

김용태 마태오 신부가 강의하는 모습

코로나를 통해 알게 된 뼈아픈 가르침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지구의 유기적 세계 안에는 수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내 중심적으로 바라봐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연결돼 있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생태학의 제1법칙입니다. 코로나를 통해서 뼈아픈 교훈 첫 번째는 보편적 관계성을 깨닫게 해준 겁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그냥 알아서 각자도생했습니다. 저 사람이 배고파도, 불행해도, 나만 배부르고 행복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를 통해서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다모>라는 드라마의 유명한 대사가 있죠.  “아프냐?, 나도 아프다.” ... 바로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코로나의 강력한 전염성 때문에, 코로나가 아닌 다른 병, 암이나 교통사고와 다른 상황이 생겼습니다. 코로나는 한번이라도 다른 이와 스쳤으면 나도 코로나 걸린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면서, 우리가 잊고 있던 걸 깨닫게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성을 말입니다. 각자도생이 아니라 다 연결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성'  

또 하나는 생태적 감수성. 코로나가 창궐하도 두어달 쯤 후에, 교구청에서 사제평의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동 성당 시절, 운전하고 가는데, 하늘이 너무 맑은 겁니다. 그 두달 동안 인간들이 멈춰있던 동안 지구가 살아나버렸습니다. 위성사진으로 찍은 사진 두달 전의 지구와 비교한 모습이 너무 달랐습니다. 지구가 살려고 코로나라는 백신을 맞은 건 아닌가? 우리는 코로나를 바이러스라고 하고, 백신을 맞지만, 지구는 그 반대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생태의 제2원칙은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다.”

바오로는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바오로 사도 서간에도 ‘유기체적 교회론’이 나옵니다. 머리인 그리스도 이하로 우리는 모두 지체입니다. 어떤 건 큰 역할을 하고 어떤 건 작은 역할을 하더라도 존귀함에서는 동등합니다. 한 몸을 이루는 것, 세상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생태적 관점의 교회론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 깨닫고 살았던 분이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였습니다. 결국 생태의 중요한 지향점은 바로 ‘함께 살자’ ... 거기에 바닥에 기어다니는 지렁이나 더 작은 개미까지도 포함됩니다.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창조 시절의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자는 겁니다. 배운 거 없다고, 빽도 없다고, 약한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말자는 겁니다. 능력도 없고 가진 것 없다면,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만이 인류 발전에 필요하다는 게 진화론이죠. 그 진화론 앞에서 난 힘도 있지 라며 ‘난 살아남겠지’라고 그 누가 자신하겠습니까?


인간의 존엄성이 차별에서 오는 것이라면 ...

여기서 우리는 존엄성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차별에서 비롯됩니다. 원숭이보다, 고래보다 훌륭하다는 건 만물의 영장이란 표현의 의미이죠. 인간이 가장 지능도 뛰어나고 능력도 많다라는 비교와 차별을 통해 인간존엄성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엔 위험과 한계가 존재합니다. 이게 인간존엄성의 원인이자 이유라면, 더 뛰어난 존재가 우리 앞에 등장할 때, 우린 지렁이나 원숭이같은 존재가 됩니다. 더 큰 능력을 가진 외계인이 나타난 순간, 우린 원숭이로 전락합니다. 존엄성을 차별이란 시각에서 이야기하면 이렇게 됩니다. 존엄성을 그렇게 설명해왔습니다. 우리 인간은 세상 피조물 중에 가장 뛰어나니, 생물이니 무생물이지 산도 파헤치고 터널도 뚫고 무조건 마음대로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더 우월한 능력있는 무엇인가에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래서 존엄은 차별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인간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그 이유는 바로 인간이 다른 원숭이나 피조물보다 뛰어난 게 아니라,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닮아서 뛰어나다는 게 존엄성의 이유입니다. 차별에서 뛰어난 건 한계가 있죠. 차별을 통해 인간이 존엄하다면, 1억이 있는 사람은 천만원가진 사람보다 우월합니다. 그러나 1억을 가진 사람은 100억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하등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닮은 존엄함이란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을 닮았기에 모두가 존엄합니다. 그렇게 발길에 차이는 돌맹이도 존엄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지, 인간이 만든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셨기에 인간이 존엄하다 ...

하느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존엄성이 있으며, 여기에서 형제인 태양과 누님인 달을 이야기하고 지렁이 형제님을 말하는 겁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을 닮아서 존엄하다는 것. 이것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바탕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여기에는 하느님을 닮은 것에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 손톱만한 차별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과 나의 격차와 차별을 인정하지 않죠. 그것이 바로 성탄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내려오십니다. 내려오셔서는 “너 사랑하긴 사랑해~ 그런데 넌 거기 있어. 넌 천민이고 난 왕이야. 어딜 가까이 오려고 해. 저리 가~ 이걸 확 그냥~”이라고 하시나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인간을 하느님처럼되게 하려고, 같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감수성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온갖 비천한 존재들까지도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태감수성의 바탕에 사랑이 있습니다. 

 

김용태 마태오 신부의 강연 모습

 

생태감수성의 바탕은 사랑 ...

여기에 구분해야 할 게 있습니다. 생태영성 운동을 하면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진정성이 없습니다. 자신의 웰빙을 위해서, 주변 사람들의 환경이 악화되는 것, 안 좋은 것들을 가난한 사람들이 다 먹게 하는 것, 이것은 가짜 생태입니다. 거기다 포장을 씌우며 그린, 녹색, 녹색성장이라고 합니다. 공장에서 온갖 나쁜 거 다 배출하고 ‘친환경제품’이라고 하면서 그 제조과정이 비생태적이며 온갖 유해물질을 다 배출하고, 그 공장은 못사는 나라에 만든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결정체인 제품을 아름답게 꾸며졌고, 그것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난 친환경이야’라고 한다면, 이것을 과연 생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것을 ‘그린워싱’ 즉 위장환경주의입니다. 알맹이를 뜯어보면, 모든 과정에 수많은 희생과 불의가 자리한 것을 말합니다. 그린워싱. 즉 세탁하는 겁니다. 겉으로 보면 녹색이지만 알고 보면 온갖 더러운 게 숨어있는 겁니다.

 

그린 워싱과 위장 환경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랑 ...

사랑이란 감수성이 있어야 작은 민물까지도 형제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생태의 속성이란 게 있습니다. 어느 곳이 생태적으로 잘 이뤄지는 가를 알 수 있는 속성이란 게 있습니다. ‘생태적’이란 것은 사랑 안에서 움직입니다. 생태적 속성은 흘러갑니다. 순환합니다. 모든 게 순환합니다. 그런데 생태적이지 못하면 순환하지 않습니다. 돌고 도는 것이란 낮아지고 비워지는 성질이 있어서 비움으로 채웁니다. 순환에서 중요한 개념입니다. 흐르면서 비워지고 다시 채워집니다. 산골짜기 시냇물이 흐릅니다. 여기 있던 물이 밑으로 내려갑니다. 여기 있는 물은 늘 있고 새롭지만 위에서 채워지고 또 비워지고 채워지는 걸 반복합니다. 그게 흐르는 겁니다. 다시 말해 순환합니다. 

 

생태적 속성은 순환한다 ...

나무를 보면 또 알 수 있습니다. 나무는 양분을 빨아먹고 한껏 잎과 꽃을 그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다시 낙엽이 떨어지고 양분이 됩니다. 생태적인 것 안에는 기꺼이 비워주고, 또 기꺼이 받아줍니다. 비워지고 채워지는 순환이 바로 생태적 속성입니다. 어느 곳에는 비워지고 채워지는 생태적인 에너지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순환이 멈춰있는 곳이 있습니다. 썩은 물이 있는 곳은 사랑이 없기에 비워지지도 않고 채워지지도 않는 곳입니다. 순환하고 흐르기 위해서는 비워지고 채워져야 하는 데 그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세포의 죽음, 아포토시스 ...

아포토시스(apoptosis)는 그리스말입니다. 낙엽같은 겁니다. 아포(apo-)는 접두사로, 모체로부터 파견되어 나온 것입니다. 아포슬(apostle)은  사도(使徒)이죠.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겁니다. 이것은 분열이 아닙니다. 모체로부터 사명을 가지고 떨어져나온 것입니다. 아포토시스는 무의미하게 떨어져나간 게 아닙니다. 땅에 떨어져 양분이 됩니다. 메마른 땅은 낙엽을 통해 다시 땅을 풍요롭게 합니다. 이는 또한 의학용어입니다. 세포예정소멸프로그램(세모자멸)입니다. 손상되고 노화된 세포는 때가 되면 자리를 내어줍니다. 싱싱한 세포가 다시 들어서는 거죠. 물이 흐르는 이치입니다. 삼라만상 모두 그렇습니다. 피가 흐르는 것도 같은 이치이고, 숨도 늘 들숨과 날숨으로 순환합니다. “난 들이마실거야~”하고 들이마시기만 하면, 그냥 죽죠. 정맥이 있으면 동맥이 있고, 그렇게 비워지고 채워지고 순환하는 게 생태의 속성입니다. 그렇게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세포예정사 프로그램, 늙고 손상된 세포는 알아서 사라지고 젊은 세포가 채워집니다. 작은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게 이러한 세포덕분입니다. 목욕탕에서 밀고 나오는 때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아포토시스와 정의(正義)의 문제 ...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정의의 문제입니다. 늙고 손상된 세포가 자리를 비워주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의 중심은 나야~"라고 하면서 자리를 비워주지 않습니다. 그런 놈들이 하나둘씩 커져만 겁니다. 그렇게 적인 존재가 덩어리로 커지면서, 원래의 개체를 잡아먹습니다. 이 세포를 암세포라고 합니다. 암은 세포소멸예정프로그램이 망가진 걸 말합니다. 이놈의 세포가 자리를 안 비워주고 욕심을 부리면서 손상된 세포가 늘어나면서 인간을 잡아먹습니다. 낙엽처럼 순환되어야 하는데, 나중에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면 순환해야 하는데, 이게 멈춰버리면 꽃이 피나요? 열매가 맺나요? 나무는 말라죽습니다. 

인간은 누군가 도움없이 살 수 없다 ...

이 사회에도 결코 생태적이지 않은 암적인 존재들이 있습니다. 생태적이란 흐르는 것,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되는 겁니다. 소나무는 작은 꽃 앞에서 으스대지 않습니다. 작은 꽃도 소나무 앞에서 쫄지 않습니다. 지렁이는 고고한 학 앞에서 쪽팔려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 역할을 합니다. 내가 가진 걸 내어주고, 또 받아들일 건 받아들입니다. 3-3-3 법칙이란 무엇인가요? 인간은 누군가 도움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겁니다. 3분 동안 숨 안쉬면 죽고, 3일 동안 물을 안 먹으면 죽고, 3주 동안 밥을 안 먹으면 죽습니다.

 

복음의 정반대 개념, 디아블로스 ...

가 먹는 밥은 누군가의 땀으로부터, 노력으로부터 옵니다. 그렇게 인간의 삶을 이루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 생태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게 순환하고 존중하고 작은 것들을 고귀하게 바라보는 섬김을 통해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걸 못하게 하는 암적인 존재가 있다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어떻게 될까요? 가로막는 것, 비워주지 않는 것, 쌓아두기만 하는 것, 그런 암적인 존재를 [디아블로스]라고 합니다. 그리스 말로, '디아'가 접두사로 ‘악’입니다. 이게 붙으면 ‘갈라놓는다’란 말이 됩니다. 다이어프래그머(diaphragma), 즉 횡경막이란 단어인데요. 배와 가슴 사이를 분리하는 근육을 말하죠. 갈라놓는 겁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사람들)라고 하면 유대인들이 나라가 망해서 뿔뿔이 흩어진 걸 말합니다. 원래 하나 있다가 갈라지는 걸 말하죠. 그러면 디아블로스는 뭐죠? ‘갈라놓는자’를 뜻합니다. 인간과 하느님을,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습니다. 왜 그렇게 하죠? 순환하지 못하게 합니다. 순환기능을 망가트리는 게 바로 디아블로스, 즉 악한 존재입니다. 사회를 갈라놓고 분열시키는자, 디아블로스는 생태적 개념, 복음적 개념과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의 코스프레, 프란치스코 성인 ...

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 코스프레하신 거죠. 예수님 삶 안에 생태적인 순환이 들어있습니다. 생태적 감수성을 살리기위해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더군다나 가장 비천한 존재로 오셔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찬란하게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과 인간을 합쳐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디아블로스의 반대는 바로 씸(sym)입니다. 합치는 겁니다. 심포니, 오케스트라. 어우러지는 거죠. 일치시키는 것. 디아블로스에서 디아를 빼로 씸을 넣으면 심블로스, 곧 심볼이 됩니다. 성사(聖事), 즉 칠성사(七聖事)입니다. 칠성사의 어원입니다. 물붓는 상징 등 교회안의 수많은 상징들. 성사라는 뜻이죠. 성사는 그래서 디아블로스 때문에 갈라진 하느님과 인간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다시 순환시키고 연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성사의 역할입니다.

 

성사(聖事)의 역할 ... 

예수님은 바로 그 성사 중의 성사이므로, 원성사. 성사의 원형입니다. 만사가 흐르게, 만사형통이 있게 합니다. 거기에는 비움이 있습니다. 낮아짐과 섬김. 이것이 복음이며 이 복음이 생태적인 겁니다. 비우고 흐르게 하는 이것을 사도바울은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궁핍을 채워주고, 균형을 이루게 합니다."라고 합니다. 

 

13 그렇다고 다른 이들은 편안하게 하면서 여러분은 괴롭히자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14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15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코린토2서  8장)

 

모자라지도 않고 쓸데없이 남지도 않는 세상. 이것이 바로 생태적 세상입니다. 환경보호하고 쓰레기줍고, 이런 노력들이 바로 생태적 세상을 위한 노력입니다. 인간 중심이기에 산도 파헤치고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작은 것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준 것, 즉 복음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복음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에서 이웃을 확장하는 겁니다. 발뿌리에 채이는 돌멩이 하나까지도,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사랑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동안 너무 좁게 이해한, 가족이나 이웃 혹은 인간을 넘어 모든 피조물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사랑을 좁게 인간으로만 해석하는 걸 넘어서는 겁니다. 

 

기후 위기와 2040년 지구의 종말 ... 

이제 우리가 죽게 생겼습니다 2040년이면 지구온난화, 기후위기로 망한다고 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기온이 상승해서 1.1도가 높아졌고, 1.5가 되는 순간 드라마에서 의사가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인제 오셨어요?”라고 하죠. “좀 빨리 오셔야죠” 즉 늦은 시기가 바로 2040년입니다. 온도가 1.5도가 되어, 온갖 재난이 매일 닥칩니다. 미세먼지가 아니라 오늘은 지진 7.0, 내일은 6.0, 또 다음 날에는 불길이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그러면 어떤 분이 “저는 이미 다 살았어요.”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건 순전히 자기 중심이죠. 우리 애들은 어떡해요? 이제 목전에 물이 차오르니 생태를 이야기하는 이 시점에서도 이기적인 생각들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우리의 마음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작은 것들을 섬기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 세상의 디아블로스들이 방해하는 세상에 대해서, 심블로스. 일치하게 흐르게 만드는 게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결국 생태 문제는 정의(正義)의 문제 ... 

래서 결국 생태문제는 정의의 문제, 흐르지 못하는 것들과 맞서 싸우는 겁니다. 이 세상을 흐르지 못하게 정체시키고 순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쓰레기란 개념이 생긴 건 산업혁명 이후입니다. 불과 180여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로인해 지구온도가 1.1도가 올라갔고, 0.4도만 남았습니다. 더 낮추기 어려우니, 여기서 멈추게 하자는 겁니다. 그 문제가 탄소이고, 석탄화력이 문제이니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합니다. 이게 탄소중립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생태적 회심이 없는 상태에서 이게 될까요? 

 

생태적 회심은 차별을 없애는 것 ... 

사실 우리는 마음으로 차별을 좋아합니다. 말로는 평등을 좋아한다고 말하지요. 여러분 평등을 좋아하세요? 우리는 평등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닌데요!”라고 하시겠지만, 예를 들어, 식당에서 주인이 귓속말로 “이거 손님만 드리는 거에요. 딴 사람한테 이야기하지 마세요.”라고 하는 걸 좋아하죠. 그렇게 수많은 차별적 구조들이 용납되고 용인하며, 그런 차별하는 디아블로스를 지지하고 찍어줍니다. 내 마음 속의 욕망들이 오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수성을 다시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에코사이드라는 말

제노사이드는 집단학살란 뜻이죠. 종교적 이유,  인종적 이유 등으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제노'사이드의 ‘제노’를 빼고, 에코사이드로 말을 바꾸면, [생태적 학살]이 됩니다. 자연을 어마어마하게 훼손하는 걸 말합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죠. 그런데 환경도 어마어마하게 망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600종의 동물과 800종의 식물이 멸종위기로 전락했습니다. 환경피해 규모는 500억달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이것도 벌을 주자라고 합니다. 여태까지 이걸 범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범죄로 규정하자고 합니다. 국제적 범죄로 전쟁범죄, 반인륜(반인도적) 범죄, 집단학살, 침략범죄, 그리고 다섯번째 범주로 '생태에 대한 범죄'인 '에코사이드'가 생겼습니다. 에코사이드는 악입니다. 디아블로스입니다. 여기에 맞서 싸우는 게 우리들의 생태적 회심에서 해내는 생태적 정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는 마르코복음 16장 15절 

마르코 복음 16장 15절은 예수님의 모습을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여기서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합니다. 그동안 복음은 인간에게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발길에 채이는 돌멩이까지도 우리의 복음선포의 대상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게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바로 복음적 모습니다.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게 바로 복음선포이 개념입니다. 성당 미사에만 열심히 나오는 것도 복음적이지만, 그 이상의 복음적 삶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바닥의 미물까지도 내 형제처럼 여기는 것, 작은 것들까지도 소중에게 여기는 것, 교회는 이를 가난한 이들도 먼저 채워주는 겁니다. 바다가 평평한 것은 물이 그렇게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섬기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것은 예수님이 말 구유 안에서 태어나듯 작은 사람들에게도 소중하게 대하자는 겁니다.

 

마르코복음 5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열두 해를 하혈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습니다. 잠깐 누군가 옷자락에 손을 대었는데, 아니 스쳐지나갔는데, 아니면, 누군가 정말 간절한 심정으로  손을 살짝 대었는데, 예수님은 이걸 알아챕니다. 만일 버스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밀치고, 꽉 끼어있는데, 누군가 내 옷자락을 잡았을 때, 그걸 알아채는 그런 감수성 ...  예수님은 간절한 여인의 소원을 흘려버리지 않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 

요한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기적 중 하나로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한 이후 첫 번째로 일으킨 기적이 바로 카나의 혼인잔치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하게 만드시죠. 사실 신부들도 첫 미사를 할 때면 성대하게 하고싶어합니다. 그래서 첫미사 할 때 보통 성대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이렇게 소소합니다. 뭔가,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렸는데 살았다단가 그런게 아닙니다.  술로 만드는 이런 기적을 보이시고, 작은 아쉬움까지도 놓치지 않습니다.

 

루카복음 19장 중 예수님과 자캐오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이지만 모두가 그를 멸시하고, 아무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걸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쳐가지 않듯이 말입니다. 생태감수성 안에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작고 여린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이것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장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우리 주위에 버려지거나 배고파 죽거나, 인간의 편리 때문에, 오염물질을 - 후쿠시마 방사물 오명을 바다에 버린다고 하죠? 나 하나 편리하겠다고 남들 피눈물나게 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밀양 등에서) 송전탑이 내 집 위로 지나간다면, 그 목적이 오로지 멀리 대도시 사람들 편하게 만들려고 그러는 것이라면, 그것을 가만히 놔둬야 할까요? 핵발전은 또 어떻습니까? 핵발전을 클린 에너지라고 하지만, 핵발전으로 생기는 핵폐기물은 워낙 위험한 물질입니다. 핵발전이 겉으로 보기에 편리한데, 우리나라에는 핵폐기물을 처리할 장소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핵폐기물은 워낙 위험한 물질이고, 우리 인체에 유해하지 않게 기다리려면 10만년 이상 100만년을 지나야 합니다. 인체에 위험하지 않는 최소 기간이 10만년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편리로 배출시킨다면, 그저 우린 편리하고 깔끔하게 산다고 하지만,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건 친환경이 아니라 위장환경주의입니다. 아파트를 짓는데 화장실도 안만든다면 어떻게 하나요? 이것은 우리 마음 속에 다른 사람들,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뭐 세상이 그렇게 가는 거 아닙니까? 

떤 분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뭐 세상은 그렇게 가는 거 아닙니까?" 일면, 그런 말씀은 이해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편리한 거 원하지요. 그리고 "나 혼자 노력한다고 되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공장에서 돌리면 끝납니다. 세상은 자본주의라서 이윤창출하고 아무리 친환경이나 에코 이야기해도 가당찮은 일입니까? 라고 이야기하죠. 이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의 작은 노력 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역린이란 영화가 있어요. 

2014년 4월 30일 개봉. <역린> 누적관객수 3백85만명. 영화는 정조 즉위 1년, 왕의 암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엇갈린 운명과 역사 속에 감춰진 숨가쁜 24시간을 담고 있다.

역린이란 왕을 분노케하면 작살난다는 말이죠. 정조 암살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인데요. 그래서 영화 자체가 중용 23장을 중심으로 영화가 흘러갑니다. 정조임금은 개혁군주로 알려졌지만, 수많은 당파싸움이 있었고, 디아블로스들, 정치세력들로 인해 좌절되는 상황에서 정조를 암살하려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其次는 致曲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아 爲能化니라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것에도 성실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하면 내안에서 배어나오고, 겉에 배어나오면 겉으로 드러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작은 노력들도 소중하다는 메시지입니다. 맨 마지막에 정조를 암살하려던 세력들, 살수집단이 있죠. 어렸을 적부터 아이들을 납치해서 키우는데, 그곳을 정조임금이 살수만드는 소굴로 찾아갑니다. 그 수괴 앞에서 칼을 겨누고 섭니다. 광백은 극중 인물인데, 정조 임금을 두고, "나 죽이려고 왕이 왔네?"라고 하면서, 또 뭐라고 하냐면, "나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변하겠어?"라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이유 

그런데 정말 통쾌했던 건 그 말 하자마자 죽입니다. 중용 23장의 내용이 화면에 좌악 흐릅니다. 당장 변화하지 않더라도 작은 것에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죽이는 겁니다. 촛불 하나로 세상을 밝힐 수 있을까요? 네 밝힐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한 지 아세요? 죄가 많아서? 큰 도시인데, 죄가 많아서 도 맞지만, 의인 10명이 없어서입니다.

 

창세기 18장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생략)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생략)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생략) ”
30 (생략)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 (생략)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 (생략)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나 하나로 인하여, 하루라도 늦게 망하게 한다면 ... 

그런데 그 넓은 도시에 의인 10명이 없었어요. 그래서 망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진작에 망했어야 할 그 이유는 어딘가에 의인이 10명이 있어서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그 역할을 하시는 겁니다. 나 하나로 세상이 바뀔이 아니다라는 게 아니라, 나 하나로 인하여, 하루라도 안 망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나 하나쯤이야가 아니라, 나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며,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입니다. 작고 여린 것들을 지나치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 우리는 그렇게 생태적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로 마치겠습니다.

(9시25분 종료)
김용태 마태오 신부(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둔산동 성당 초청 사순특강, 2023.3.31.(금) 19:30 미사 후 20:05~21:25

 

둔산동 성당에 붙은 포스터
둔산동 성당 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