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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20141231] 김유정 신부의 2014년도 송년미사 강론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4.

 12월 31일 (성탄 8일 축제 내 7일) 송년 미사

 

김 유정 유스티노 신부의 송년미사 강론

 

요한 복음 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

 

2014년을 되돌아보려고 했더니 너무나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아서 우선 기뻤던 일부터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8월에 교황님께서 우리나라를 방문하셔서 고통 받는 이웃들을 찾아 보아주시고 우리에게 그분들과 연대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참으로 기뻤던 소식이... 없었습니다...

 

가슴 아픈 소식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국가기관들의 불법 대선 개입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교구별 시국 미사가 한창이던 올해 초, 경주 마우나 리조트 붕괴로 인해 대학생들이 숨진 것을 비롯해 고양버스종합터미널과 장성요양병원의 화재, 판교 야외공연장 환풍구 덮게 붕괴와 오룡호 베링해 침몰, 신고리 3호기 핵발전소 가스 누출로 인한 노동자 사망 등 이름만 들어도 다시 가슴이 섬뜩해지는 사건들이 이어졌습니다.

 

아직까지 정확한 사고의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 참사는 국가적인 재난이었습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고등법원에서의 판결을 뒤집은 대법원 판결로 말미암아 다시 굴뚝 위로 올라갔습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오체투지가 광화문에서 막힌 것을 비롯해 많은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외면되었습니다. 농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쌀 개방 협약과 FTA는 속속 체결되었습니다. 폭력적인 행정대집행 끝에 밀양송전탑은 완공되었고 강정은 해군기지 건설에 이어 주민과의 협약을 무시하고 군관사 공사까지 강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말의 해라 그런지 말도 한 몫을 했습니다. 마사회는 비밀리에 화상경마장을 학교 인근에 짓고 불법 개장한 뒤 운영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승마협회의 비리를 조사하던 공직자들이 좌천되고 청와대의 비밀 문건이 공개되면서 이 나라를 움직이고 있는 실세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 되었습니다. 이 의문을 덮기 위함인지 때맞춰 헌법 재판소는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큰 정당을, 가장 중대한 표면적 이유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기도 전에 서둘러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원고를 여기까지 쓰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더 있습니다. 진주 의료원 폐원, 의료 민영화의 가속화, 부자 감세와 서민 증세...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참으로 힘든 세상입니다. 2월에 송파구 석촌동의 세 모녀가 봉투에 5만원짜리 14장을 넣어 놓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봉투에는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10월에는 퇴거 요청을 받던 독거노인이 만 원짜리 10장이 들어 있는 봉투에 “고맙습니다. 국밥이나 한 그릇 하시죠. 개의치 마시고”란 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작년 이 맘 때, 한 대학생의 대자보로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 운동에도 불구하고 2014년은 이렇듯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에게 안녕하지 못한 한 해였습니다. 안녕하기가 미안하고 죄송한 한 해였습니다.

 

작년 여름에 40일 피정을 하였습니다. 10년 전에 40일 피정을 하면서 저의 개인적인 아픔을 많이 다루었는데, 작년 피정에서는 사회적 아픔들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세상의 이해할 수 없는 일들,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울음을 접하면서 하느님께 ‘대체 왜 이 세상에 개입하시지 않느냐?’고 따지고 대들던 중에 피정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느끼는 아픔들이 제 개인의 상처의 투사인가 하고 피정 중에 많이 들여다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상황을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아파하실 거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이 상황에 개입해 주시지 않는지 분노가 컸습니다. 피정 중간 중간에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모두 살아 있다’라는 말이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그렇지만 피정이 거의 끝나가도록 제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피정을 마치기 며칠 전 감실 앞에서 “하느님, 대체 어디에 계세요?”라고 묻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하느님, 계신 것 맞지요?”라고 외치고는 울음이 터졌습니다. ‘정말 당신 계신 것 맞지요? 당신께서 계신데 세상이 왜 이래야 합니까?’ 이것이 제가 갖고 있던 근본적인 물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어서 읽은 요한복음 5장의 말씀이 가슴 깊이 다가왔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5.28-29)

 

정말로 안녕하지 못하던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 공동체입니다. 요한 복음의 저자와 이 복음이 탄생한 공동체에 대해서 아직도 학계에서는 많은 의견이 분분합니다. 집필 장소가 에페소 또는 소아시아의 다른 지역일 것이라 추정되어 왔지만, 최근 들어 이스라엘 내부의 유대교 공동체 내에서 살아가고 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 중 하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 등장하는 ‘회당에서의 추방’이 요한 공동체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으며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다양한 반응들과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논쟁들 역시 복음서가 집필될 당시의 경험을 암시한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당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유대인들의 한가운데 살아가면서 공동체 전체가 소외를 겪고 있었으며 회당에서 추방과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신들이 메시아라고 고백함으로써 소외와 박해를 감수하게 된 예수는 진정 누구이신가? 이 예수는 어디에 계신가? 라는 의문이 제기되었고, 그 해답이 바로 요한 복음서입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빵이시고, 세상의 빛이시며, 착한 목자이시고 부활이요 생명이시며, 참 포도나무이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라는 고백이 복음서 전체에 가득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장면을 과감히 생략하고,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하는 길은, 공동체 구성원 서로가 발을 씻어주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대단히 그리스도론적이면서 대단히 실천적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를 더 이상 묻지 말라고, 그대가 형제의 발을 씻어줄 때에 그대가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파합니다. 복음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복음서 전체를 통한 이 엄청난 신앙고백을 시작하면서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하신 분이셨다’, ‘그분은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이런 말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창세기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첫 구절인 ‘한 처음에’를 의도적으로 첫 구절로 삼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임을 깨닫고, ‘이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창조를 하셨으며 이 말씀이 하느님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누구이신지를 체험한 요한 복음의 저자는 창조부터 종말까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신 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닌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기(요한 1,5) 때문입니다.

 

올 한 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고, 여전히 진행 중인 모든 일들에 공통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모두가 ‘돈’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비밀’ 투성이의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는 관행이 이제는 관행을 넘어서 종교로, 우상으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되는 가장 가슴 아픈 말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 때문에 경기가 침체되고 있다’는 거짓말과 더불어 누군가 유가족에게 퍼부었다는 “보상금으로 로또 당첨되었으면서 왜 난리냐”는 악담입니다.

 

에집트를 탈출해서 자유의 몸이 된 백성들이 계명을 받으러 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만들었던 금송아지가 오늘날 사회의 한 가운데에 들어서 있습니다. 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대열에 합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상검증을 해야 한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세상 한 가운데에서 불리움 받은 예언자들입니다. 그리스도 공동체 전체가 시대의 예언자로 불리움 받고 있습니다.

 

시복되신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돈과 비밀을 섬기는 세상 안에서,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진리의 하느님을 선포하라’고.

 

복음이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대들의 말과 행동으로써가 아니라 그대의 전존재로써 그대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그리스도를 살아가라’고. ‘백성들이 악해서 어쩌다보니 금송아지가 나왔다’는 아론의 변명을 되뇌지 말고, 새로운 모세가 되어주라고.

 

세상에서 고통 받으시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그리스도가 다른 분이 아니심을 깨달으라고 복음은 외치고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새해에도,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복이 되어주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