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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20150213] 김유정 신부 강론, 주님,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에파타!”라고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5.

2월 13일 연중5주간 금요일

마르코 복음 7,31-37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김유정 유스티노 신부 강론

 

어제 복음 말씀(마르 7,24-30)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 여인의 청을 거절하시려는 듯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강아지에 비유하시는 것도 충격이지만, 이 말씀에 상처받지 않고 겸손하고도 당당하게 대답하는 여인의 모습도 놀랍습니다. 저는 이 여인이,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과 말싸움해서 유일하게 이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처음에 여인의 청을 거절하셨을까’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첫 번째는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당신 자신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에 파견되었다고 생각하신 것으로 봅니다. 두 번째 해석은 결국, 예수님께서 이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새롭게 배우셨다는 것입니다. ‘아, 내 사명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구나’하고 말이지요. 이 해석이 급진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주석 성경’의 주해는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서의 여러 본문이 이 해석을 지지한다고 소개합니다.

 

어쨌든 이 여인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해서 이후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며 기적을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말을 귀담아 들으셨고 이후 예수님의 활동은 변화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무엇을 배우신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배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고귀한 특성인데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여인에게서 배우신 것이든, 아니면 여인의 말을 듣고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할 때가 되었구

나’하고 알아차리신 것이든, 여인의 말은 예수님께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인이 위대하다기 보다 멸시받던 이방여인의 말을 귀담아 들으시고 생각을 바꾸신 예수님의 자세가 위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방인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이사 35,5-6)는 이사야서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못 보는 사람들을 보게 하고, 못 듣는 사람들을 듣게 하는 것은 메시아 시대가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예수님께서 인간의 근원적인 면을 치유하심을 상징합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잘 ‘듣고 있는가’ 성찰해 봅니다. 가난한 이들, 억울한 이들, 의로운 이들의 외침이 우리에게 잘 들리는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다른 소리들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의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에 세월호 유족들이 안산에서 시작하여 팽목항까지 걷고 계십니다. 이 칼바람 속에서 당신들의 걸음을 통해 우리에게 외치고 계십니다.

 

본래 설계 수명이 30년이기에 2012년에 폐쇄되었어야 하는 월성 1호기 핵발전소의 가동 중단 여부에 대한 원자력 안전위원회의가 어제 있었는데 결정이 또다시 연기되었습니다. 핵발전 중단을 외치는 탈핵희망 도보순례단이 대전에서 광화문까지 걷고 계십니다.

 

스물여섯 분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간 쌍용차 사태에 대한 올바른 조처를 촉구하는 두 분의 노동자들께서 70미터 높이의 굴뚝 위에 올라가서 외치신지 오늘로 두 달째가 됩니다.

 

이 모든 외침들이 우리에게 잘 전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접 그분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언론을 통해서, 전해지는 얘기들을 통해서, 이미 해석된 이야기들을 간접적으로 듣기 때문이고, 그 외침보다 더 큰 소리들, 자본의 논리와 광고와 가십들이 우리의 귀를 시끄럽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한편 우리 사이에서는, 우리 공동체에서는 우리가 서로의 목소리를 잘 들어주고 있는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신문을 보니까 노화의 증상 중 하나가 잘 듣지 못하는 것이더랍니다. 5미터에서 못 들으면 노화가 시작된 것이고, 3미터에서도 못 들으면 심화된 것이고, 1미터에서도 못 들으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문득 할머니가 잘 듣고 있나 궁금해서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 뒤에다 대고 물었습니다. “임자, 뭐해?”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가까이 가서 다시 물었습니다. “임자, 뭐해?” 역시 대답이 없었습니다. 1미터 뒤에 가서 물었습니다. “임자, 뭐해?” 그래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슬펐습니다. ‘우리 할멈이 이렇게 귀가 멀고 있는데도 내가 몰랐구나...’ 너무나 안스러웠습니다. 할머니 뒤에 다가가 실로 십 년 만에 꼭 안아주며 물었습니다. “임자.... 뭐해?” 할머니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습니다. “야 이 영감탱이야, 수제비 만든다고 세 번 얘기했어. 세 번!” 과연 듣지 못하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누군가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가 내 얘기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얼마나 귀담아 정성껏 잘 들어주고 있습니까?

 

오늘날 외면되고 있는 의로운 목소리들, 억울한 이들의 호소를,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면, 하느님의 목소리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이 트기 전이나 해가 진 뒤,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의 필요를 아뢰는 것보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 더 많으셨을 것입니다. 긴 침묵 중에 들려오는 아버지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께서 이방여인을 통해 아드님께 말씀을 건네셨다는 것을 침묵 중에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만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주 아버지의 목소리보다 나쁜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제1독서는 말합니다. 유혹은 하와에게 하느님의 명령을 과장하여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하와는 과장된 유혹에 넘어가 대답합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하와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말씀이 없었기에,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과 뱀의 유혹을 섞어서 대답합니다. 본래 하느님의 말씀은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가 아니라, “따 먹으면 안된다”였습니다. 유혹의 속성은 과장하는 것이고, 유혹에 넘어가려는 인간의 대답은 하느님 말씀과 유혹을 뒤섞습니다. 결국 하와와 아담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유혹의 소리를 따라갑니다. 인간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는 숨으면서, 왜 유혹의 소리는 물리치지 않았을까요? 왜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할 소리와 귀담아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 받고 소외받는 이들, 의로운 이들 안에서 우리에게 외치시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닫는 것일까요? 왜 하느님의 말씀보다 나의 이기심과 분열, 나태함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일까요?

 

오늘 주님께 마음을 다하여 청합니다. 주님,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에파타!”라고. “열려라!”라고. 당신의 말씀에 귀를 열고, 유혹의 소리, 거짓의 소리, 우상 숭배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게 해 달라고.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