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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20150329] 김유정 신부의 주님수난 성지주일 강론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5.

3월 29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김유정 신부의 강론


<예루살렘 입성> (마르 11,1-10)

 

성주간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거룩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의 고난에 함께 하심을 선포하기에 거룩한 주간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이 하느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밝혀주기에 성주간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성전정화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식민국의 권력자들이 결의했다고 해도 로마제국의 허가 없이는 사형에 처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시골 출신의 유대 청년 하나가 자기네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렀다고 해서 로마제국이 그를 사형에 처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영향력 있는 성경학자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로마제국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게 된 원인이, 이제 우리가 기념하게 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행렬이었던 것으로 봅니다.

 

제국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또한 과월절에 종종 발생하는 소요를 막기 위해 안토니우스 요새에서 예루살렘까지 로마의 기병과 보병들은 행렬을 지어 들어왔습니다. 증오와 과시, 위용으로 가득 찬 군사 행렬이었습니다.

 

같은 때에 정반대인 동쪽 벳파게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또 하나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전쟁 때에 쓰는 말 대신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한 청년을 칭송하고 환영하는 행렬이었습니다. 로마의 군사행렬을 분노와 두려움으로 대하던 민중들은 이 정반대의 행렬에 환호했고, 이는 제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즈카르야 예언자의 선포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즈카 9,9-10)

 

이제 우리는 두 행렬 중 어느 행렬에 참여할 것인지 질문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고 있는 개인주의와, 인간을 포함한 하느님의 피조물을 소비재로만 취급하는 소비주의, 경쟁과 권력 지향주의의 행렬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여 평화와 정의, 겸손과 가난, 예수님께서 당신의 다스리심을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행렬에 참여할 것인지.

이는 교회의 행렬과 세상의 행렬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권력과 명예, 영향력 행사와 거짓 안전의 행렬에 들어설 수 있고, 세상 안에서도 진실과 정의, 평화와 연대의 행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지난겨울 있었던 세월호 유족들의 도보행진과 탈핵희망 국토 도보순례가 제게는 그러했습니다.

 

우리 함께 예수님의 행렬에 합류합시다. 주님께서 목숨 바쳐 걸으신 이 행렬에 우리도 함께 합시다.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주님께 환호합시다. 히브리 아이들과 함께 주님을 맞으러 나가 외칩시다. “호산나! 제발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를 지켜 주리라고 착각해 왔던 우리 각자의 겉옷을 벗어 주님 발아래에 깔아 드립시다.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나귀가 되어, 나를 매어왔던 것에서 풀려나, 이 세상에 전혀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시는 주님의 다스리심에 가장 먼저 우리의 등을 내어드립시다.

 

 

<수난 복음> (마르 14,1─15,47)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죽은 이들조차 살리시는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도, 그분께서 빵과 포도주에 당신의 생명을 담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도,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도, 또한 그 이유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니 대체 그 사랑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도, 우리의 이해를 벗어납니다. 우리는 먼저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 애쓰기보다, 우선 놀라야 하고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강생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다면 우리는 놀라서 까무러칠 것입니다. 영성체가 무엇인지를 정말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마음을 다해 ‘감히 당신을 제 안에 모시기에 부당하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루 종일, 한평생, 그 시간만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진실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내가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일에 몰두합니다. 그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일에 우리의 몸을, 우리의 마음을 소진합니다. 내가 그 의미를 깨닫는다면 내가 변화될 것 같기에, 그 변화를 감당하기가 너무나 두려울 것 같기에 회피하고 도망치려 합니다.

 

아마포를 버리고 달아난 젊은이처럼 이 신비로부터 달아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세상을 위해 세상 안에 육화되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도 세상을 위해 나의 살과 피를 내어주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도 세상 안에서 버림받은 채 죽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의 귀에 들려온 첫 번째 말씀은 세례 받으신 후에 울려 퍼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입니다. 그러나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마르 15,34)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화답송으로 바친 시편 22편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그중 23절인 “저는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히브 2,12) 과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 시편 전체를 바치신 것일까요, 아니면 그 첫 구절만을 바치신 것일까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형도구 위에서 발가벗긴 채로,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에게서조차 버림받은 채,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시며 돌아가시는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모든 인간이 그분을 버렸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도 버림받으신 것 같습니다. 땅에 발을 딛지도 못하고,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늘로 들어 올림을 받지도 못한 채 허공에 달려 계십니다.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느님께 저주 받은 것”(신명 21,23)이라는 신명기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고 이방인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는 고백을 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제 인간이 되풀이합니다. 무서운 절망 속에서도 마지막 시선을 하느님께로부터 거두지 않았던, 그래서 인간들을 향해 “대체 왜 나를 죽이느냐?”고 따지지 않고, 하느님을 향해서도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느냐?”고 “당신 정말로 계시기나 한 것이냐?”고 묻지 않고 “왜 나를 버리셨냐?”고 외치는 젊은이의 절규 속에서 백인대장은 눈을 떴습니다.

 

버림받았다고 절망하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버림받음의 길을 택하신,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면 이 고통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가’라고 절규하는 우리의 고통을, 당신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영역 안으로 들어 올리신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오늘 우리 또한 서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무어라 고백할 것인지 질문 받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버림받으시는 예수, 우리 안에서 또다시 버림받으시는 예수. 세상의 고통에 눈감고 귀 막고 내 영혼의 평화가, 하잘 것 없는 내 평판이 손상될까봐 몹시도 두려워하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행렬을 시작하십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너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고통에 절규하는 세상의 수많은 십자가 안에서 그들과 함께 외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우리가 감동하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응답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