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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안팎뉴스/가톨릭 뉴스

대전교구 박재우 새신부 광화문 월요시국미사 강론 "정의는 죽지 않는다"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7. 1. 24.

대전교구 새 신부들, 월요시국미사 주례와 강론

1월 23일(월) 광화문 월요미사, 



매주 월요일 7시가 되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천주교 월요 시국미사가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다. 그런데 1월 23일(월)에는 대전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새 신부들이 대거 참여했다. 1월 10일(화)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새 사제들은 1월 23일 광화문 월요시국미사의 주례와 강론을 맡았다. 또한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김유정 신부(대전가톨릭대 총장), 박상병 신부(대전 가톨릭대 교수), 장우일 신부(천안쌍용동 성당) 등도 함께 참여했다. 이 밖에도 문규현 신부, 나승구 신부, 박명기 신부, 김연수 신부, 남승원 신부 등을 비롯한 여러 교구에서 온 43명의 사제가 이번 미사를 공동 집전했다.  


시국미사의 강론을 맡은 박재우 새신부(천안두정동 성당)은 "지난 1월 10일 사세서품을 받고 저와 동기들은 교회의 사제가 되었다."라고 밝히면서, "많은 장애물들이 겹겹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야할 정의와 평화의 길을 벗어나지 말자"고 말했다. 



다음은 강론 전문



“정의는 죽지 않는다”

 

박재우 신부 대전교구 천안두정동성당


 

2014년, 당시 대학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때입니다. 그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우리는 모두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을 안고 학교 학생회가 주체가 되어 준비한 세월호 추모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이곳 광화문으로 향했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 학생회 전체가 이곳 광화문에서 기도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학생이었던 저와 제 동기들은 신부가 되었고,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학생에서 사제로 변한 것처럼 많은 정치인들이 변하여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많은 사건사고들이 정의와 평화의 물결 안에서 해결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직은 주님의 빛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 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결코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촛불은 계속 되고 있고, 사람들의 의지 역시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최근 있었던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으로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정의를 향한 사람들의 마음은 멈추질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여전히 극보수주의자들에겐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입니다. 이들은 국가의 민낯에 관해 그들이 보고 싶은 점만을 유지하고자 온갖 루머와 왜곡된 사실을 퍼뜨리며 보수 언론 역시 사람들의 시선을 분리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치 오늘 복음 안에서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근거 없는 말로 비난하며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분리시키려 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실 악령의 활동 중 하나는 계속해서 나누고 분리시키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론으로 흔히 ‘카더라 통신’을 활용하기도 하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린다더라.’, ‘사실은 뭐뭐 했다더라.’, ‘누가 그러는데 ~였다며.’, ‘다 빨갱이 놈들의 생각이야.’

 

그러나 성령의 활동은 악령의 활동과는 다릅니다. 참 진리 안에 머물며 사람들을 통합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진실을 받아들이며, 거짓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마치 복음 속 율법학자들의 왜곡과 달리 진짜 현실은 성령 안에서 활동하시는 진리의 예수님이셨던 것처럼 말이죠. 사람들을 갈라놓고 싶고, 마치 친정부 성향의 사람들의 생각이 대등한 진리의 편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또 그걸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진짜 현실은 주님의 빛을 향해, 올바른 정의와 평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민심인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 분명 성령의 움직임이 있다고 믿습니다.

 


영들의 싸움, 특히 성령의 활동을 깎아 내리고자 하는 모습은 우리 교회 내부에도 존재합니다.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교회적이지 않다’라 이야기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성향의 말들 가운데 함께 고민해보고 싶은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사실 그리 머리가 좋지는 않지만 나름 적지 않게 사회·정치·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직접 현장에 가보기도 하고, 기도 내용에도 사회적인 내용들이 들어가곤 하죠. 저를 잘 아시는 신부님들이나 동기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활동. 그러니까 정치적인 활동에 참여할 때에는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혜롭게 처신하다. 저에게 이 말을 해주신 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현명하게 판단해라? 성령께 지혜를 청해라? 아니면 정치·사회적인 말을 할 때 조심스러워야 한다? 꼭 참여해야겠냐?

 

지혜롭게. 사실 이 말은 어디든 사용할 수 있고, 또 제가 학생 때도 실천신학과 관련된 부분에서 적지 않게 들어왔던 말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구체적인 방법론을 피해갈 수 있는 두루뭉술한 대답이며 가벼워진 책임감의 무게가 들어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지혜롭게 처신하라.’ 지혜는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지혜서’라는 구약 문헌이 있죠. 이 지혜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합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순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여기서 통치자는 단순히 정치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책임을 지닌 모든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 이들 좁게는 공인들 넓게는 모든 사람들이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 지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하느님을 찾는 것에 관해 세속적인 저울질이 아닌 아주 단순한 생각. 무엇이 더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의 관점으로 하느님을 찾아야 함을 지혜서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인간적인 처세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성령 안에서 이뤄지는 지혜입니다. 지혜롭다는 말로 포장하여 교회의 사회교리적 활동들을 피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있다면 분명히 말씀 드리건데, 이는 지혜로운 행동이 아닙니다.

 


지난 1월 10일 사세서품을 받고 저와 동기들은 교회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마치 10년간의 신학교 생활을 끝내고 나면 무슨 고시패스 하듯 꽃길만 걸을 것 같이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분명 저희의 앞길에는 꽃길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희를 지지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비난하는 분들도 계시겠죠. 특히 사회교리적 방면에서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흰 저희가 가야할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진짜 현실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들은 죄에 매어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성령과 함께 한다면 모든 사람을 안을 수 있는 용기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 계신 분들과 여기에 함께 하고 있지 않지만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정의와 평화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분들께서도 지금 가고 계신 그 길을 포기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그 길은 참된 진리를 만나는 길이며 정의를 만들어가는 길이니까요. 물론 이 길은 윤동주 시인의 ‘길’에서 말하는 것처럼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있는 길입니다. 참으로 많은 장애물들이 겹겹이 존재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야할 정의와 평화의 길을 벗어나지 맙시다. 그 길을 꿋꿋이 걸어갈 때 힘든 안갯길을 지나 밝은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지혜서 1,15의 말씀이자 제가 속해 있던 대전가톨릭대학교 학생회의 시국선언문의 마지막 문장을 읊으며 오늘의 강론을 줄이고 싶습니다.

“정의는 죽지 않는다.” 아멘.


출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블로그 http://blog.daum.net/sajedan21/2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