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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미 강연

나승구 신부강연(2)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는 연대로부터 시작한다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7. 3. 20.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정세미(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와 강연) 제85차 강연회가 세종 성프란치스코 성당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자리는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활동 중인 나승구 신부를 초청하여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를 주제로 한 자리였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 (2)


2017년 3월 13일(월) 저녁 7시45분@세종프란치스코성당

나승구 신부, 정의구현사제단




나라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엊그저께 금요일(2017/3/10)에 헌법재판소 앞에서 다른 사람들 다 앉아있는데 맨 앞에 세월호 가족들이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방송으로 보면서 막 좋아하는 데 한편으로 왜 우리 아이들이 죽은 게, 살리지 못한 게 탄핵소추에 사유가 되지 못하느냐 라고 울부짖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나라는 없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라는 때때로 없습니다. 국민들이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들, “나는 이 나라에서 안전해!”라는 생각. 이 나라의 정부가, 이 나라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느끼지 못할 때,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할 때 나라는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국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 나라는 없는 겁니다.


국가의 존재이유


그런데 우리는 나라는 늘 있다고 생각해요. 국가가 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정치공동체가 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아니요! 정치공동체는 없을 때도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무정부시기 때처럼,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겁니다. 아무도 이 나라를 컨트롤하지 못했던 것. 아무도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보고 인식하고 대처하고, 거기에 따라서 적절하게 움직이지 못한 겁니다. 그럴 때 나라는 없는 겁니다.


박정희는 나라의 아버지였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는 나라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국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았을 때, 그 때 “나라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라고 했어요. 그리고 육영수 여사가 비명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라고 했어요. 그 분이 왜 그렇게 많은 자식을 낳았는지. 물론 정신적인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이 강하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가 어느 누구의 것이 되었을 때 개별인간은 없습니다. 개별인간의 존엄은 없습니다. 개별인간의 권한도 없고, 단지 부속품으로 전락할 뿐이죠. 그 때 가장 행복한 것은 부속품이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교육을 받아왔던 것이죠. “너는 너로써 행복한 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에 행복한 거야!” 아니죠.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어도 행복해야지 인간인 것입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행복하다면 그것은 거짓 행복입니다. 


지금도 외울 수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


저는 어렸을 적에, 아니 신학교 들어가서도 다섯 시만 되면 저기 국기를 향해서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아직도 기억이 나요. 왜 이렇게 기억이 날까요? 기억이 난다는 것은 뭘까요? 저를 지배한다는 거죠. 끊임없이 이것을 제가 세뇌 당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국가의 일원일 때는 행복하지만, 국가의 일원이 아닐 때는 불행하다고, 존재의 근거가 없어졌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부속품이 된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리는 소모품이 된 겁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겪었던 수많은 아픔에는 다 이 생각들이 기본적으로 있습니다. “304명 정도는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해서 지워져도 돼! 그들의 희생은 고귀하고, 그들의 희생은 영원하고, 그들의 희생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 희생은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거죠. 희생이 없는 게 좋은 나라지, 희생이 있어서 높이 사는 것은 거짓 희생을 계속 만들어내는 겁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부속품인가?


그건 나라가 아닙니다. 국가가 아닙니다. 정치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도 저 봉건시대에 살고, 봉건시대 이전에 절대적인 전체주의적인 곳에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굉장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맨날 헌법 1조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데, 사용은 위임된 사람이 혼자서 한다? 그게 말이 되나요? 그러면 그 주권은 도대체 어떤 주권인가요. 그것은 정치공동체 이야기, 교회 이야기 그 이전에 우리가 정말 어떤 나라, 어떤 국가, 어떤 국민인가를 찾지 않고서는 이것은 아무리 “정치공동체 일에 교회는 관여하지 마라. 교회와 정치공동체는 어떤 선을 그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 이건 매우 무의미한 일입니다. 


조금 더 세세히 본다면, 국민들이 이 나라의 부속품처럼 여겨지는지를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 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남진 선생님 노래인데, 이 노래 아시는 분은 연식이 되시는 분들입니다. (좌중 웃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하는 분들은 젊으신 분들이 되겠습니다. 만일 이것이 차별적 발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고향에 대한 향수


아무튼 과거에 이것은 아주 낭만이었습니다. “아휴 뭐, 어느 정도 도시 생활을 하다가 고향에 내려가서 농사짓고 살면 행복하겠다!”라고 하는 것이죠. 남진 선생님이 노래할 때만 해도 막 대도시로 대도시로 왔던 시대였겠죠. 그러다보니 고향에 대한 향수가, 지금 대도시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난 곳이 처음부터 대도시였던 것이죠. 고향에 대한 향수란 그립고 언젠간 되돌아갈 곳이 있다는 겁니다. 그 때만 해도 되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조금만 고생하면, 지금 조금만 농촌이 희생을 당하면 불이익을 감수하면 얼마든지 다시 되돌아가서 풍요로운 농촌, 안락한 농촌, 모든 것이 솟아나는 생명이 움트는 농촌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쌀값은 여전히 14만원입니다. 


쌀값이 싸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직도 “농촌은 없어도 돼.”라고 하면서, 농촌은 계속해서 희생당하는 것.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14만원으로 빵을 사면 몇 개나 사죠? 외식을 하면 몇 끼나 먹죠? 이런 것들을 따져보면 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도시가 살기 위해 농촌을, 어느 한 지역이 살기 위해서 다른 지역을 소멸시키는 것들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죠. 핸드폰을 팔기 위해서 포기했던 정책처럼,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계속 포기하는 정책들이 계속 이뤄지고 있습니다. 저 어렸을 적에는 1천만 농민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250만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불과 예전에 우리가 다니던 농활, 안동 농민회, 그 당시 청년이었는데 지금도 청년인 그래서 청년회장 된 분이 계십니다. 얼마 전 그 분이 올해 환갑인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나 환갑에 청년회장 됐어!”, “아 왜요?”, “젊은 사람들이 없어.”

계속해서 한 지역을 죽이면서 다른 지역을 살리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개별적으로 모든 이가 존엄하다


정치공동체는 개별적으로 모든 이가 존엄하도록 봉사해야 합니다. 특정의 지역을, 도시를, 그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봉사한다면 벌써부터 기울어져 있는 것인데요. 또 우리 주된 피해자들 중에서 노동자들. 흔히 노동3권 이야기하고 근로기준법 이야기하는데, 대부분 아시는 것처럼, 어느 기업에서, 어느 노조에서 파업하면 그 다음날 바로 불법파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소위 말하는 단체교섭권이나 단체행동권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노조가 파업했다고 발표하면 “그건 분명히 불법이야!”라고 스스로 생각하잖아요. “뭘 또 얻어먹으려고 하는 거야?”라면서 


나는 왜 재벌의 편을 들까?


끊임없이 한쪽 편을 듭니다. 내가 기업하는 사람처럼. 내가 재벌도 아닌데, 왜 우린 끊임없이 재벌들 편만 들어왔을까요? 왜 노동자들이 대기업 내지는 이 나라의 부정한 것들과 싸울 때 왜 우리는 불편하다고 말해왔을까요? 혹시 우리 안에 ‘이러다 나도 망해서 굶어죽겠지’하는 생각이 든 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도 “그래 너희가 좀 참아. 여태까지 잘 참아왔잖아. 더 못 참을 이유가 없잖아.”라고 하면서, 한편으로 탄압을 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보면서, 혹은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늦게 온다고 짜증나는 이유는 우리 안에도 “국가를 위해서 너희가 좀 희생해!”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요?


다 덮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엊그저께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다 덮고 새롭게 시작하자. 용서할 건 용서하고, 화해할 건 화해하고.” 


다 덮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용서한다는 것은 지금 와서 무슨 의미일까요? 이건 마치 공이 울리기도 전에 반칙으로 한 대 때리고 도망간 그 친구에게 “자 이제 끝났으니까, 공치고 새로 해!”라고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행위에 대해서 어떠한 벌도 가하지 않는 것이죠. 


“아 이제 다 끝났고 지나간 일이니까, 새로 시작해.” 그러면 공치기도 전에 또 치고 도망하고, 또 다시 시작하고. 반칙을 했으면 그 반칙에 대한 벌을 받아야 그 다음에 상응한 경기가 계속될 텐데, 반칙하는 쪽은 계속 반칙을 합니다. 그런데 반칙을 하고 나면 어떤 여론이 만들어지냐면, 반칙이 드러나고 그 반칙이 분명해졌을 때, 이거 반칙이니까 이것에 대해서 이쪽에 어드밴티지, 즉  이득을 줘야 평형이 맞을 텐데, 이 상태에서 또 다시 시작, 또 다시 시작. 그러면서 당하는 사람은 계속 당하고 승리한 사람은 계속 승리하면서 절대 강자로 살아남는 그런 구조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던 겁니다. 


시끄러우니까 이제 그만 하자?


“시끄러우니까, 이제 그만하자. 내 마음이 불편하니까 이제 그만하자!” 이런 것들이 과연 우리에게 얼마만큼 도움이 되었을까요? 대부분의 피해를 입었던 분들은 항상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때는 몰랐다고. 용산참사 가족들이 저희가 용산에 가서 미사도 드리고 그럴 때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맥주집도 하고, 횟집도 하고, 책방도 하고 그랬던 분들인데, 그렇게 살 때는 다른 철거지역에서 그 난리를 치를 때, “하 저애들 왜 저래?”라고 그랬는데, 당해보니 알았다는 겁니다. 당하기 전에 알았으면 좀 더 좋았을걸. 당하기 전에 알았으면 이렇게 안 당했을걸. 


명동성당, 어린 신부였던 시절의 기억


제가 아주 어린 신부시절에 명동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어요. 90년대 초반이었는데, 계속 명동 들머리에서 파업하거나 세상의 문제를 가진 분들이 들어와서 텐트 치고 농성을 했어요. 저는 농성담당이었어요. 농성이 들어오면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빨리 나가시죠. 다음 사람도 들어와야 해요.” 그러곤 했습니다. 계속해서 1년 열두 달 내내, 어떨 때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와 계시기도 했고, 대부분 노동조합들이 왔는데, 그 좀 전에, 한전, 한국전력이 분사가 지금은 동남전력 등등 나누어졌는데, 예전에는 같은 한국전력이었어요. 분사를 하고 민영화를 한다고 하니까, 이 분들이 와서 거의 언덕을 다 채웠습니다. 저도 왔다 갔다 하려면 전경들에게 맨날 신분증 보여줘야 하고 신분증 안 보여주면 한바탕 싸워야 하고, 신자들도 귀찮고 힘들었겠죠. 


묵인하면 다음엔 내 차례가 될 수도 있다


신자 분 중에 한국통신에 다니시던 분이 계셨는데, “아 저 사람 왜 저렇게 있는지 모르겠다. 불편해서 못살겠다.” 그러셨어요. 그런 후에 한국전력 분들이 나가셨어요. 일이 잘 안되었지요. 그런데 그 다음에 한국통신 사람들이 들어왔어요. 그 때 그 신자분도 함께 들어오셨어요. 그러면서 “아, 나는 그 때 잘 몰랐는데.”라고 하셨어요. 이처럼 내가 당하지 않으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이웃, 정치공동체의 다른 누군가가 고통을 받는 걸 묵인하면 그 다음에는 내 차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적어도 “나는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은 시한부 인생밖에 없어요. 결국 개별인간인 내 이웃이 당하는 그 순간, 나 자신도 함께 당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정치공동체인 것입니다. 


너희는 눈 앞에서 사라져 줘!


아까 용산 이야기 잠깐 드렸지만, 1986년~1988년은 그야말로 철거민들의 시대였습니다. 양평동, 목동, 신정동, 상계동 등 우리나라에 올림픽 구경하러 온 사람들한테, 좋은 집 보여준다고 소위 말하는 하꼬방, 달동네 다 철거되었습니다.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것을 위해서, “너희는 좀 없어져 줘! 눈  앞에서 좀 사라져 줘!”라고 했던 겁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의 자리를 빼앗았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단지 있던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겨갔던 게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먹고 살던 터전이 사라져버리는 것이고, 그 사람이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 곁에 있었고, 그 사람 부인이나 자식들이 알던 이웃이나 친구들, 소위 말하는 인맥들이 송두리째 뽑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디론가 다 갖다 버린 것입니다. 저 보광동 허허벌판에, 그 예전 성남 대단지라고 하는 곳에 버려서 성남폭동이란 게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게 인간이 삶의 자리와 일의 자리에서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고 소모품으로 없어져도 될 물체로 바라보게 된 것. 이것은 국가공동체가 할 일도 아니고 목적에도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교리의 기본 원칙은 바로 이런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기본원칙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인간존엄성의 원칙, 두 번째는 연대성, 세 번째는 보조성. 그 다음에 공동선, 재화의 보편성,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등 이것이 그냥 나오는 원칙이 아닙니다. 이게 다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지, 절대로 배제 받거나, 소모품으로 사용되거나 버려지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는 연대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연대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연대에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이야기하는 것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정치적 참여도 내가 어떤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면서, 나는 진보야 수구야 이런 게 아니라, 보편 인간들이 개별적인 존엄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연대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라는 작은 부분이 아니라 사회참여이거나 세상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치참여는 작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참여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연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목헌장에서 말하는 ‘연대’


사목헌장에서 연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사회적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고 그들을 개별차원에서 구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떠한 상호구속도 없이 하나의 백성으로 만들어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다. 인간에 관해 성찰할 때 우리는 항상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정의의 활동에 있어서도 개인의 발전과 상호의존적인 사회의 발전에 대해서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연대


인간의 존엄성을 더 도모하기 위해 연대합니다.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지 결코 개별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공동체로 살아가서 연대의 관계로 살아갈 때 여기에는 또 긴장이 생깁니다. 과연 어떤 연대를 할 것인가? 같이 가긴 같이 가는 데 그러면 어떻게 같이 가는가? 그걸 도와주는 게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더 작은 단체나 몸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더 큰 집단이나 단체에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작은 것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더 낮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게 보조성의 진짜 모습입니다. 단순하게 단계별로 나아서 보더 더 큰 단위, 작은 단위 이렇게 아니라 예를 들면 아이가 아장아장 걸을 때 그냥 내버려두는 겁니다. 뛰게 만드는 것도 아닌 것이죠. 연대가 어떤 조직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조직을 만드는 것은 사회교리에서 이야기하는 방식과 우리가 소위 말하는 카이사르의 방식 즉 제국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국의 방식은 언제나 힘을 키워갑니다. 그러나 사회교리에서는 더 많은 힘을 빼라고 합니다. 힘을 빼라고 하면 답답하기도 하고 화도 날 수 있지만, 힘을 빼면 더 많이 연대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존엄성을 인정받게 됩니다. 


힘을 빼면 더 많이 연대한다


시민촛불 혁명에서 저는 그런 것을 보았습니다. 첫날과 두 번째 날에는 전경버스 다 부술 것처럼 나왔는데, 거기서 “우리 좀 더 약해지자. 우리가 모두 함께 하기 위해서, 내가 가진 힘을 좀 줄이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할 수 있는데, 더 항의하고 더 분노하고 더 힘을 쓸 수 있는데 조금 조금씩 참았어요. 자기 것들을 내려놓았어요.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고 연대하기 위해서. 더 어린 것들을 더 작은 것들을 돌보기 위해서. 그래서 그 다음부터 나온 이야기들이, “우리 서로 차별적인 이야기 하지 맙시다. 여성을 혐오하지 맙시다.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 가리지 맙시다.” 이런 이야기들이 그 안에서 나온 것이죠. 더 작은 것들을 보호합니다. 보조성과 연대와 인간의 존엄성이 죽 연결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교리의 흐름과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힘의 논리에서의 분명한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연대는 힘이 필요한 것도, 조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회교리에서 정치참여, 사회참여의 진짜 부분은 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대한다고 하고, 참여한다고 하면서 힘을 요구하고 조직을 요구하게 되는 일들이 버러집니다. 사실 정말 같이 할 때, 힘이 없으면 처음에는 정말 힘 빠집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서 거기 갔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8년 전, 그곳이 홀랑 다 타버리고, 6명이 죽었다고 하는 뉴스를 듣고서, “올 게 왔다.”하고 생까했습니다.


8년 전, 용산참사의 기억


왜냐하면 사람을 귀하게 보지 않던 세상이었으니까, 이게 언젠가 터지긴 터지지 하면서, 계속해서 개발의 문제가 예전에는 공공개발이어서, 나라와 정부와 철거민들 간의 싸움이었는데, 이제는 조합개발이 되면서 조합과 철거민들의 싸움, 결국 용역과 철거민들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완충지대가 있죠. 바로 공권력입니다. 공권력은 용역의 폭력도 철거민들의 폭력도 용납해서는 안 되겠죠. 예를 들어 박근혜지지 세력과 촛불지지 세력이 있는데, 경찰이 그 가운데를 막았어요. 못 만나게 한 거죠. 


그런데 이쪽에서 폭력을 쓰면 바로바로 잡아가고, 반대편에서 폭력을 쓰면 이걸 봐주는 건 공정한 게 아닙니다. 조합에서 고용한 용역들이 철거민들을 때리고 못 살게 굴고 유리창 깨트리고, 집 앞에 인분(人糞) 뿌려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욕하고, 그래서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철거민들이 모여서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그러면 이건 탄압하고, 그래서 집회를 하면 불법집회라고 잡아가는 것.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쪽은 불만이 쌓이고, 용역들은 의기양양해지고 점점 더 폭력이 심해지면서, 서로 갈 때까지 가면 그 끝은 무엇인가? 


공정하지 못한 공권력으로 인한 비극


결국 그 분들은 망루를 짓고 올라가고, 올라간 지 하루 만에 불에 타버리고 만 겁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전국에 있는 신부님들이 모여서 항의도 하고, 경찰 책임지라고 이야기하고, 그 와중에 함께 천막을 치고 지내기도 한 겁니다. 우리는 가면 뭔가 할 일이 있는 줄 알고, 왜냐면 신부이니까. 저는 그 당시 본당 신부였는데, 적어도 5천명은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당 신자가 5,300명이었는데, 아주 저 싫어하는 분 300명 빼면 5천명은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사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계신 분들은 유가족 분들이었습니다. 이성을 갖고 적절한 협의를 통해 말을 통하고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겁니다. 피해를 통해서 극도로 상처를 받은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분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잠깐 웃다가 다시 얼굴이 굳어지는 분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냥 옆에서 때 되면 미사하고 밥 때 되면 밥 먹고, 그래서 저는 본당에서 일 보다가 3시쯤 되면 오토바이 타고 용산에 간 겁니다. 


공감은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오토바이 대 놓고, 유가족 분들은 따로 그늘막 하나 쳐놓고 상복입고 앉아계시고, 그러면 “안녕하셔요. 밤새 좀 어떻게 지내셨어요.” 인사하고, 다른 쪽 천막에 앉아서, ‘오늘 미사는 누가 할까, 다음 주 미사는 누가 할까?’ 그러다가 미사 드리고 문화제도 하고 분향하고 인사하고 돌아오고. 이게 다였어요. 하는 것이라고는 낮에 유가족 분들이 잘 싸우시거든요. 용역들이랑. 똥 폭탄 만들어서 던지고 그러는 거 구경하고. 그런 것 밖에 단지 조금 더 알리는 것. 조금 더 크게 사람들을 한번 모으는 것. 이런 것들을 할 수는 있었지만, 유가족들 아픔에 함께 한다? 이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냥 가면 공감이 저절로 될 것 같잖아요? 아닌 것 같습니다. 똑같이 고통을 받지 않으면 100% 공감할 수 없습니다.


공감까지 가는 데 필요한 건 함께 있는 시간


그런데 조금씩 조금이나마 그 아픔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같이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6개월이 넘게 있고서야 그제야 그분들이 우리를 친척처럼 동생처럼 대할 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 사실 그 사이에 무척이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겠지요. 하지만 그런 과정들 없이 연대가 어느 순간 쑥 가서, “네. 지금부터 우리가 연대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이게 연대는 아닙니다. 연대는 공감입니다. 연대의 또 다른 말은 연인 콤페션(compassion)이죠. 콤(com)은 함께 하는 것이고, 패션(passion)은 고통입니다. 


방송인 김제동이 말하는 대로


얼마 전에 [말하는 대로]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제동 씨가 나와서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아요. 어떤 참가자가 “제가 친구가 고통스러워해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나를 뭐라고 그랬어요.”라고 물으니 김제동이 “어떻게 도와주려고 했습니까?”라고 했고, “뭐 이런 저런 조언도 하고 ...” 그랬다고 하니까, 김제동은 그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그 친구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무엇을 아파하는지, 어떻게 아파하는지에 함께 있는 것이라는 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진정으로 고통 받는 이와 함께 있는 것은 비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김제동 씨가 늘 하는 18번같은 말입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고통의 깊이에 다가간다는 것


같이 있는 것은 그냥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깊이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 기준이 아니라, “내가 이정도 해줬으면 됐지. 그 정도로 당신과 함께 있어 줬으면 됐지. 내가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과 내 모든 관계를 다 투입했는데!” 그러면서 배신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닌 겁니다. 그분들 입장에서 그분들 자리에서 보지 않으면, 나중에 평가조차도, 그분들, 우리가 연대하려고 했던 소위 말하는 이것도 대상화시키는 것 중에 하나이지만,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차별받는 사람들, 배제된 사람들 입장에 서는 것이겠죠. 


쌍용차 사태에 대한 기억


더 황당했던 것은 2009년에 쌍용자동차도 평택공장에서 77일의 옥쇄파업이 있었지요. 77일의 옥쇄파업이 있을 때 쌍용차 가족들이 용산 미사를 하는 곳에 왔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도 좀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저희가 “아, 여기 다 올인 하느라고 여력이 없어요.”라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분들이 황망하게 돌아가시고, 그게 너무 가슴이 아파서 우리가 회의를 했어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하면서, 일단 몇몇이라도 쌍차 앞에 가자, 평택에 가자. 그래서 쌍차 앞에서 미사도 하고, 최류탄도 맞고, 용역들이 던지는 물도 맞고 하면서 같이 하고 그랬죠. 그러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 제대로 우리가 쌍차와 함께 한 것은 2012년~2013년도의 대한문 미사였습니다. 3월 3일 날인가 대한문에 있었던 농성천막이, 지나가던 취객인데 정신이 약간 불안정한 사람이 “이게 뭐야!”하면서 다 불 질렀어요. 그래서 대한문 옆에 있는 문화재에 해당하는 담이 다 타고 나무도 좀 탔습니다. 그걸 빌미로 해서, 사람들을 밀어버리려고 그 사이에 임시로 쳤던 조그만 비닐하우스 천막을 중구청에서 4월 4일인가에 막 다 뜯어버렸어요. 그리고 거기다가 아주 아름다운 화단을 만든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미 쌍용자동차 같은 경우는 24명이 돌아가신 상태였어요.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하다가, 그 전에는 한 주에 한 번 월요일에 대한문 앞에서 미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가서 보니까, 비는 주룩주룩 오는데, 그분들은 거기서 잔다는 거예요. 비닐 뒤집어쓰고 있는 걸 보면서, 그냥 가자니, 뒤통수가 되게 근질근질하고 이상하고 당기고 그래서 신부님들하고, “우리 중 한 명이 여기 남아서 이 분들하고 오늘밤 같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했는데요. 당시 이미 서른여섯 명인가가 연행되고, 남은 사람도 별로 없고 그랬던 상황인데, 제비를 뽑았는데 제가 걸렸어요. (좌중 웃음) 


대한문 앞 매일미사를 드리게 된 이유


정말 밤에 비가 오니까 바닥은 처벅처벅하고, 거기에 아주 얇은 깔판 하나 깔고 침낭에 들어가서 자는 겁니다. 그런데 거의 잠을 못 잤습니다. 마치 강아지들이 좁은 자리에 서로 엉켜있는 듯했어요. 그 때, 새벽에 누군가가 스윽 나가는 걸 보았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신 분들 모아서 동그랗게 만들어진 영정판을 바라보고 계신 겁니다. 그 순간 덜컥 겁이 났습니다. 눈빛도 이상하고. 저러다 저분 돌아가시겠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그 자리에서 매일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좀 재미있는 것은 쌍용자동차 노조원 중에 신자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거기서 우리가 미사를 거기서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 신부님들이 다 힘을 모아서 거기서 천막을 다시 세워서 농성촌을 만들어줄 수도 없잖아요. 아니면 돈을 거둬서 “아 그러면 앞으로는 옆 어디 호텔에 방을 마련할 테니 거기서 농성하세요!” 그럴 수도 없잖아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을 텐데,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겁니다. 


처음 100일정도 매일미사를 할 때는 우리는 그냥 거기서 미사하는 사람들이었고, 당신들은 당신들 일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사 마지막에 발언하라고 하면 어쨌든 당신들이 홍보는 해야 하니까 앞에서 막 이야기하고 그냥 가고. 그러다가 150일, 200일 지내니까, 사람들이 많이 오고, 미사가 당연한 것처럼 생각들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뭐지?”하면서 나중에는 그 분들이 교리를 아는 분들이 아닌데, ‘주님의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라고 하면 “아뇨. 왠지 이걸 하면 편해서.”라고 하시면서 “그렇다고 앞으로 내가 영세를 받겠다든지 그런 생각은 절대 안하는데, 그냥 하면 편해.”라는 거죠. 그것은 아마 서로가 서로 연대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생겼다는 겁니다.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나?


어느 날인가 미사를 끝내기 두 달 전 쯤. 이 분들이 40일 정도 단식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단식을 제발 하지 말라고 협박도 했습니다. 단식하면 여기서 미사 안한다고. 그런데 여태까지 철탑에 올라가고 단식도 계속 했는데, ‘왜 또 하려고 하는가?’라고 해도 단식을 한다는 겁니다. 결국 단식을 했어요. 우린 떠날 수 없었죠. 왜냐하면 우리가 주도권을 갖고 함께 연대하는 게 아니라, 아픈 사람들과 힘든 사람들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저희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용산참사가 일단락되고 나서, 제가 가톨릭학생회 지도신부였던 때에, 홍콩 대만 마카오 일본 우리나라 등 동아시아의 가톨릭학생회들이 교류하는 게 있었어요. 마침 그 때 알게 된 인연으로 홍콩 가톨릭학생회와 OB모임을 가졌어요. 일종의 정의평화위원회 같은 모임인데, 홍콩도 주거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라서 그들이 용산이야기를 해달라고 하기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용산 이야기를 해주면서 홍콩이나 한국에서 똑같이 주거권에 대한 언급을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수녀님 한 분이 마지막에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혹시 그 일이 있고 나서 인터넷으로 보기에는 수백 명이 달려가고 매일미사를 하고 그랬는데, “유가족들이나 철거민 중에 몇 명이나 영세를 했어요?”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때는 당황했습니다. 한 명도 안했거든요. 원래 2명이 신자 분이었어요. 한 분은 처음부터 신자임을 밝혔고, 한 분은 거의 끝나갈 때, “사실은 나도 신자야.”라고 말씀하셨어요. 나머지 분들은 개신교 교회에 다니셨던 것 같고요. 물론 나중에 소문으로 영세받으신 분이 있다고 듣긴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당시 우리가 조건을 보면서 미사를 드렸던 것은 아닌 거였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을 때, 그 사람의 신원을 조사하고 주민등록증을 보고서 도와준 건 아니잖아요. 강도를 만났기 때문에 도와주고 함께 했던 것이죠. 연대도 역시 자격을 따지고 조건을 따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차라리 그 때는 이렇게 이야기해야 맞을 것 같아요. 


“아직 우리가 준비가 되지 않아서. 아직 내가 갖춰지지 않고, 내가 자신이 없다.”라고 고백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개 우리는 그런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아니야. 그렇게 싸우는 건 우리와는 좀 멀어.”라고 말입니다. 사실은 아직은 그걸 품어낼 만한 여유나 능력이나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빈민사목의 다섯 가지 원칙


사실은 여러 이야기들을 좀 더 많이 있는데, 늘 부족한 것만 느끼게 됩니다. 제가 빈민사목위원회에서 일을 합니다. 빈민사목에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삶의 자리 불가침의 원칙입니다. ‘삶의 자리를 건드릴 수는 없다.’ 빈민이나 철거민 그 사람들이 사는 자리가 최적의 자리라는 겁니다. 두 번째, 우리가 사목을 하는 이유는 복음에 좀 더 가깝게 가기 위해서입니다. 삶과 복음을 일치하자라는 원칙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굉장히 많은 세부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자는 원칙입니다. 네 번째는 ‘가난한 사람들을 주인으로’라는 원칙이고요. 그래서 다섯 번째 원칙은 ‘그분들이 공동체를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 사회참여의 방식이다


사실은 이 원칙들을 통해서 연대와 보조성과 인간존엄이라고 하는 것들이 철거민들, 도시빈민들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으로 하는 연대가 아닙니다. 어떤 조직이나 세력으로 하는 연대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도권을 갖는 연대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와 동떨어진 이름만 내건 그런 연대가 아닙니다. 결국은 이 분들이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찾아갈 수 있게 하는 그런 연대가 참된 연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의 한 방식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배운 게 많아서 가진 게 많아서 처지가 괜찮아서 시간이 괜찮아서 할 수 있는 연대가 아닙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강도만난 사람들, 우리에게 간절한 눈길을 보내는 이들, 이름이 나고 드러나고 그런 게 아니고 아주 일상에서, 어떨 때는 가족 중의 한 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우리 교우 중 한 명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아니다


그럴 때 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대로, 그를 위해서, 그의 처지에서 바라보고 다가간다면 그것이 바로 사회참여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그 어떤 누구도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이 깨트려지지 않을 때, 그것을 위해서 내가 기꺼이 나설 때, 우리는 진짜 국가정치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2016년과 2017년에 정말 귀한 걸 가졌습니다. 그동안 9년, 1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우리가 여태 생각했던 나라가 나라가 아니었다는 생각과, 진짜 나라는 어떤 것인지 소위 말하는 주권재민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배웠으면 그 주권재민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 했던 존엄과 연대와 보조성과 더 깊숙한 곳으로의 투신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끝)



위 기록은 나승구 신부님의 말씀을 정리하였기에, 일부 내용은 맥락상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서울 대교구 나승구 신부는 1991년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지도신부와 신월동성당 주임을 지냈다. 2006년부터 사제단 사무처장을 맡기도 했으며, 2013년 3월 11일, 당시 50세의 나이에 2년 임기의 정의구현사제단 대표에 선출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