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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미 강연

나승구 신부강연(1) 교회가 정치이야기를 하는 게 가능할까?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7. 3. 20.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 10일(금) 오전 11시 22분, 헌법재판소는 전원 일치의 의견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하였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첫 월요일,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정세미(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와 강연) 제85차 강연회가 세종 성프란치스코 성당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자리는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활동 중인 나승구 신부를 초청하여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를 주제로 한 자리였다. 약 90여분에 걸쳐 진행된 강연회의 내용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 (1)


2017년 3월 13일(월) 저녁 7시45분@세종프란치스코성당

나승구 신부, 정의구현사제단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자리가 어색하고요. 제가 말 주변이 없는 걸 서울에서는 다 알아요. 그래서 안 불러요. (장내 웃음) 그런데 조금 떨어져 있다고 불러주셔서 냉큼 왔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에 대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요 며칠 사이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엄청난 일들에 대해서 각자의 소회는 다 다르실 겁니다. 어떤 분들은 당연하다고 하실 것이고, 어떤 분들은 조금 미심쩍다고 하실 것이고, 어떤 분들은 아직도 모자라다고, 홀랑 벗겨야 한다고 생각하시기도 하고요. 또 어떤 분들은 “아니 그래도!”라고 하시고,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서 두 가지 세 가지 수만 가지 생각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이재용의 엄마, 홍라희가 불쌍하다?


이재용 씨가 구속되었을 때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그 엄마 홍라희 씨는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남편이건희는 생사를 알 길 없이 식물인간이 되어서 간신히 간신히 버텨나가기만 하고, 아들은 구속되고

그것도 자기 친척, 자기 집안의 사람이 세운 방송국에 의해서, 얼마나 복잡하고 힘들까!“라는 식의 논설을 썼지요. 그걸 보고 그날 촛불 집회에서 박진(퇴진행동 상황실장)이란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79명의 노동자들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가고 그리고 그 노동의 억울함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딸랑 5백만 원으로 입막음하고 끝내려고 했던 ‘삼성’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갔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배제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잊혀져갔는지에 대해서는 왜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말입니다.


그 모든 사람들, 79명 희생자의 엄마의 마음, 아빠의 마음, 가족의 마음은 왜 보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공평한 세상을 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공평한 세상이란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공평한 세상이 되려면, 모든 사람은 1미터 80이 되어야 한다.” 이건 아니죠. “공평한 세상이 되려면 모든 사람의 얼굴은 똑같아야 한다.” 이것도 아니죠. “공평한 세상이 되려면 모든 사람의 마음 씀씀이도 똑같아져야 한다.” 이것도 아닙니다. 


한 쪽에 작은 것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서 큰 것으로 함께 보완하는 더불어 함께 사는 정세미라고 하는 미사,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가 바로 그런 세상을 위해 계속해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장소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산에도 이런 미사가 있죠. 아세미(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미사). 그래서 서울에서는 광화문 미사가 끝나면 이런 미사를 한번 열어볼까 합니다. ‘정의로운 내일을 위한 미사’ 정내미라고요. (장내 웃음)


교구에서 한 자리에서 그나마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 어쩌면 각자의 현장에서 억울했던 이야기들, 불편했던 이야기들, 마음 놓고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맘 편히 이야기하고 나눔으로써 힘을 얻는 그런 자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가톨릭교회와 정치공동체


가톨릭교회와 정치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자리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이야기는 다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확인하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톨릭교회와 정치공동체에서 ‘정치공동체’란 정치적인 공동체이죠. 한 체제로 묶인 공동체입니다. 공산주의 체제를 따르는 경우라면, 공산주의라는 체제를 따르는 정치공동체이고, 자유민주주의 공동체라면 자유민주주의 형태의 정치를 하는 공동체이겠죠. 한가지로 정치공동체는 곧 ‘국가’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다.”라고 하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공화(共和)라는 것을 따르는 정치공동체라는 것이죠. “나는 이런 자유민주주의가 싫어요.”라고 하면, 내란죄 이런 것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범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따른다는 것. 바로 그것은 국민들의 약속입니다. 


교회가 정치적 이야기를 하는 게 가능한가?


그래서 정치공동체는 국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인데, 교회적 관점에서, 교회의 공식적 입장으로 과연 “정치가 잘 되었다. 잘못 되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한 때는 교회 공식적 입장이나 주교님이나 주교회의 의장님 등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성명서를 내거나 서명운동을 하는 것들에 대해서 ‘정치적’인 일이니까, 종교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식의 반발이 대뜸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치공동체와 교회는 어떤 관계일까요?


간추린 사회교리 424항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24 교회와 정치 공동체 모두 가시적인 유기적 조직으로 드러나지만, 형태나 추구 목적에서 본질상 서로 다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정치 공동체와 교회는 그 고유 영역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라고 엄숙히 재천명하였다.  교회는 신자들의 영적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방식으로 조직되는 반면에, 각종 정치 공동체들은 현세의 공동선을 이루는 모든 것들에 봉사하는 제도와 관계를 발생시킨다. 이 두실재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특히 그 목적과 관련하여 매우 분명하다.(이하 생략)


명백하게 정치와 정치공동체와 종교, 교회는 각각 독립적입니다. 서로 지나친 간섭을 하지 않고, 독립적 자율적이란 것입니다. “옳다구나!” 그러니 교회는 정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서 "back!"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정교분리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425항을 읽어보겠습니다. 

425 교회와 정치공동체의 상호 자율성은 협력을 배제하는 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둘 모두 자격은 다르지만 동일한 인간들의 개인적 사회적 소명에 봉사한다. 교회와 정치 공동체는 사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개인이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실재 안에 내재된 권리들을 온전히 행사하고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올바로 수행하도록 돕고자 인간에 대한 봉사를 지향하는 유기적 조직들이다. 


모든 것은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교회도 정치공동체도 똑같이 사람들이 잘 살게 도와준다는 겁니다.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정치공동체가 또는 교회가 그 자체적으로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라가 발전한 게 목적이 아니라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게 목적이란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게 하는 게 하느님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늘 부딪칠 수 있고 만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협력이 더 단단하고 여러 방면에서 이뤄지거나 또 군데군데에서 일어난다면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더 행복할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공동체의 목적과 종교의 목적 둘 다를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협조할 것인가이다


그래서 무조건 분리하라, 상관마라가 아니라 어떻게 협조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것입니다. 여기서 협조는 절대로 야합이 아니고 비겁한 계약이 아닙니다. 그 목적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는 협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정치공동체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해서는 일정한 선을 그어놓음과 동시에 협력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걸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과연 정치란 무엇일까요? 나라란 무엇일까요? 그런 이야기가 먼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정치는 무엇이고, 나라는 무엇인가?


요즘 촛불집회의 주제는 “이게 나라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는 분명히 있는데 나라가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죠. 그런데 지난 주 주제는 “이게 나라다!”였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 전의 “나라냐?”와 “나라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정치공동체와 나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간추린 사회교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그 누구도 다스리는 사람은 아닙니다. 함께 있는 어른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 모세, 그 다음에도 왕은 없었습니다. 절대 주권을 가진 절대적인 지배자,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그냥 어른이었고, 그 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전달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백성들이 움직이는 것,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 공동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주변 나라에서 왕이라는 존재, 왕정이란 제도가 생겨났습니다. 겉에서 보면 굉장히 일사불란합니다. 어떤 왕이 군사들을 몰고 우~우 하고 일사불란에서 와서 괴롭히는 데 정신을 못 차리는 겁니다. 어떻게 저들은 일사불란하게 우리에게 삥을 뜯을 수 있을까? 양떼도 뺏기고 사람들도 상하고 그런 게 짜증이 나는 거죠. 그래서 우리도 어떻게 하면 저들처럼 우리 집단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생각한 게 “옆 나라들처럼 왕이 있으면 되겠다!”라고 한 거죠. 가나안의 옆 나라들처럼 말이죠. 


그래서 왕이 생기면 우리를 보호해주고 억울한 사람들 보살펴주고, 그래서 사무엘에게 가서 “우리에게 왕을 점지해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그래 좋다. 그런데 그 왕이 너희를 무척 괴롭힐걸?”이라고 하면서, “왕이 있으려면 왕궁이 있어야 하잖아? 왕궁은 누가 지어, 백성들이 짓는 거잖아. 왕궁이 생기면 그 왕궁의 살림을 해야 하잖아? 그걸 누가해? 백성들이 하지. 전쟁이 나고 적들이 쳐들어오면 우리가 막으려고 군사들을 움직이면 괜찮은데, 괜히 왕이 자기 세력 넓힌다고 여기서도 싸우고 저기서도 싸우고, 전쟁놀이하고 다니면 누가 다쳐? 너희들이 다쳐! 그런데도 왕이 필요해?”라고 대꾸합니다.


왕이 필요할까? 필요없을까?


그래도 왕이 필요하다면서 뽑아달라고 하죠. 그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왕이 필요할까요? 왕이 필요 없을까요? 왕정이란 제도가 필요할까요? 아니면 우리 가족처럼 살았던 이런 집단지도체제가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할까요? 갈등이 생기다가 마침내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이 되게 합니다. 이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여태까지 판관들을 통해서 하느님이 당신의 일을 해왔는데, 모세를 통해서 당신 일을 해오셨는데, 이제 그 일을 왕을 통해서 하면 어떨까? 왕이 그 일을 잘할 수 있으면, 우리는 더 좋은 하느님 백성들, 아브라함을 이끌어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는 융성한 백성들처럼 만들 텐데, 그래서 왕에게 그 일을 맡기고, 웬만하면 세습을 하든지 가장 강한 사람을 뽑을 텐데, 이스라엘은 특별히 왕을 만들 때 기름을 붓습니다. 성별(聖別)을 하는 것이죠.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그래서 그 왕들이 늘 우리가 이야기하던 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고, 억울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공정한 재판을 하고, 엉뚱하게 괴롭히는 사람들 벌주고 그래서 하느님 백성들이 살아가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길 원하면서 왕을 뽑아 세운 것입니다. 


왕을 뽑은 결과는 어떠했나?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습니다. 역대 왕들 중에서 다윗과 솔로몬을 빼고 나면, 물론 그 둘도 엄청난 나쁜 짓을 했지만, 모든 왕들이 하느님 뜻에 맞지 않았습니다. 거의 오늘날로 말하면 탄핵에 가까운 점수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표현하기를 “그 결과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멸망합니다. 쫄딱 망했던 것이죠. 그래서 왕정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계속해서 식민지 생활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하다하다 보니 독립의 기운이 생기던 즈음에, 여태까지 왕은 인간적 약점이 너무 많았는데, 그런 인간적 약점이 없는 왕은 어떨까? 하느님이 직접 다스리시면 어떤가? 적어도 하느님이 직접 보낸 그런 왕이 있었으면 어떨까라고 하는 게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가 와서 모든 불편함을 다 해소해준다면 우린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구나. 물론 그 메시아가 그동안 왕권에게 기대했던 억울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을 살게 해주고, 올바르고 공정한 재판을 만들고, 그래서 이 세상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바라는 모든 기대를 메시아에게 걸었던 겁니다. 그래서 더 많은 기대 더 강력한 기대들. 그래서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태까지 모든 왕보다 더 힘이 센 하느님이 직접 지어낸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즈음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등장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들은 그분의 행적을 보고, “이 정도 힘이라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대를 했지만, 정말 엉뚱하게도 3년 남짓 활동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의 언행 또한 당대의 사람들 기대와 다른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진짜배기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가장 낮은 사람들을 돌보려면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권위와 힘을 주어야 한다. 세상에서 높게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낮게 되어야 한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섬겨야 한다.” 이런 말씀으로 당시 현세 권력과 정반대의 메시지들을 보여주십니다. 진짜 하느님의 뜻은 가장 낮은 것들을 끌어올리는 그것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제자들은 혼란스러웠죠. 그럼 나는 무엇을 찾아야 하지? 옛 예언자들이 이야기한 대로 또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하나? 그래서 정치공동체라는 그 당시 왕과 제국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을 만들어냅니다. 


모든 인간의 권력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역시 모든 인간의 권력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모든 권력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품 안에서 그 품을 더 키우는 데 사용됩니다. 정말 그것이 백성들을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권력이 사용된 적이 역사 안에서 얼마나 있겠습니까? 정말 단 한 번도 있나요? 소위 선정(善政)을 베풀었다거나, 훌륭한 왕이었다는 건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이런 오랜 경험들로 인해서 종교관과 종교 안에서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겁니다. 하느님의 모상이므로 존중받아야 하고, 모든 백성과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김 받을 때 그것이 그 구조 또는 체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정치권력과 부딪치고 또 부딪치고 부딪칩니다. 때로는 정치권력이 종교권력에게 제거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종교권력이 정치권력을 임명하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으며 아수라장이 되면서 뒤집히고 뒤집히는 일들이 수도 없어 벌어졌습니다. 


협력을 이야기하면서 서로의 자리를 지켜주는 것


그런데 이제 자율성과 독립성을 이야기하고, 협력을 이야기하면서 서로의 자리를 지켜주는 것. 그것이 교회에서 말하는 정치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치공동체도 국민들에 의해서,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입니다. 교회 역시 하느님의 백성인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 그 백성들이 자신의 권위를 모두 인정받고 존엄을 인정받으며 살아가도록 봉사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천명하게 됩니다.


정치공동체나 교회공동체의 목적은 모두 인간


현저하게 정치공동체나 교회공동체는 목적이 인간입니다. 인간을 배제한 정치공동체와 교회는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없죠. 그래서 간추린 사회교리에서는 계속해서 정치공동체가 어떻게 시민들에게 백성들에게 봉사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지, 소위 말하는 주권재민(主權在民)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 굉장히 유명해졌습니다. 이 성당도 프란치스코 성당인데요. 

“정치공동체는 인간들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도록 하는 게 존재의 이유이며 바로 그것이 정치이므로 정치는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정치는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는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프란치스코 교종은 말씀하셨습니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들 탓으로 돌리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의무입니다.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이 부분에서 정치공동체와 교회의 목적이 맞아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이게 나라냐?”란 말을 했죠. “나라가 없다!”란 이야기를 했고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그 때부터 대한민국은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6.25때 내려왔잖아요. 그리고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죠.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부르며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갑니다. 그 와중에서 “서울은 안전하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합니다.”라고 해놓고 한강다리 끊어놓고 도망갔을 때, 그 때 나라는 없는 겁니다. (계속)



위 기록은 나승구 신부님의 말씀을 정리하였기에, 일부 내용은 맥락상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서울 대교구 나승구 신부는 1991년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지도신부와 신월동성당 주임을 지냈다. 2006년부터 사제단 사무처장을 맡기도 했으며, 2013년 3월 11일, 당시 50세의 나이에 2년 임기의 정의구현사제단 대표에 선출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