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미사가 서울 청계광장 소라탑 앞에서

나승구 신부의 주례와 박경근 신부의 강론으로 봉헌되었다. 다음은 강론내용



제5차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미사 강론

2017/8/14

강론: 사회사목국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박경근 신부

독 서 : 신명 10,12-22

복 음 : 마태 17,22-27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신명 10,18)


1992년 1월에 시작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도 어느새 25년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로서 청년들의 소녀상 지킴이 활동도 595일째를 맞이한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그 긴 시간 동안 집회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큰 진전이 없다는 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갖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피해자 할머니들을 함께 기억하고 연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게 된다. 신앙 안에서 이를 우리는 ‘신비’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시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선과 정의를 위한 사람들의 연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힘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연대의 신비를 알려준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게 된다.

 

내일은 해방 72년을 기념하는 광복절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마냥 그날을 기뻐할 수 없는 오늘을 살고 있다. 벼랑 끝 대치가 지속되고 있는 북미 간의 긴장 고조는 우리로 하여금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의 남북 분할통치로 인해 결코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72년 전의 그날을 헤아려보게 한다. 오늘날 한반도의 현실은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아직도 완료되지 않은 것임을 성찰하게 한다. 남과 북의 화해, 평화의 실현이 해방의 종착점, 완성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급 사건이 이집트 탈출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약속된 땅에 들어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었듯, 우리 민족의 해방 역시도 분단된 이 땅에 평화를 실현함으로써 완성될 것임을 일깨워주는 오늘의 현실인 듯싶다. 그리고 탈출의 여정에서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이스라엘을 지켜주고 일깨워주었던 것이 ‘기억’이었듯이 오늘을 살아가는 올바른 역사의 기억이 우리로 하여금 희망하는 종착점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끄는 길잡이가 된다는 것을 이 시대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오늘 미사 중에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함께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작년 5월에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히로시마를 방문하였었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희생된 이들에 대해 애도하였던 오바마의 방문은 이후 한국의 언론들이 지적하였던 것처럼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일본을 희생자화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된 아시아인들을 가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일본-한국의 방위동맹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는 –그래서 일본의 재무장화를 용인하고 한국을 일본의 하위 파트너로 삼으려는- 미국 대통령의 방문은 졸속 위안부 합의의 배후에 미국의 이익이 자리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긴장이라는 불의한 현실의 배후에도 같은 이유가 또한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나아가 남과 북의 평화체제 구축은 그렇기에 더욱 필요한 것임을, 단순히 한민족의 평화와 안녕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시아의,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 요청되는 것이며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같은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의 문제는 일본의 군국주의, 절대화한 국가주의가 자행한 폭력이며 범죄이다. 때문에 이에 대한 사죄, 배상, 책임의 주체는 당연히 국가여여 할 것이며, 국가가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는 시효의 한계, 보상, 책임의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예외가 없는 것임을, 우리 역사에서 자행되었던 우리의 정부, 공권력에게도 당연히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자행한 범죄인 전쟁 성노예제 피해자 문제는 국가의 역할, 책임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며, 한 개인이 결코 국가보다 작을 수 없는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한다.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운다. 더 나아가 이는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식민지 지배의 적폐가 ‘국가’의 이름으로, 사회의 안정을 이유로 인간을 억압하고 도구화하는 불의한 사고, 관행에 의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성찰하게 한다.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은 그렇기에 직접 피해 당사자들의 고통과 아픔, 한에 대한 보상의 의미만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역할과 책임, 그리고 개인의 인권,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우리 사회의 회복과 제대로 된 ‘꼴’을 갖추어가는 중요한 걸음으로서의 의미를 또한 담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그렇기에 더욱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전쟁, 분쟁의 위기가 고조되는 지금 우리는 부당하고 부도덕한 전쟁의 불의한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해결을 염원하며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전쟁은 늙은 남자들이 결정을 내림으로써 젊은이들, 아녀자들, 어린이들이 희생되는 불의라고 이야기된다. 전쟁을 이야기하고 그것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부터, 그들의 가족부터 전쟁에 투입된다면 과연 전쟁을 쉽게 말할 수 있을지를 되물어보게 된다. 전쟁을 주장하는 이들의 거짓과 비겁함이 그들 말에 담긴 증오, 적대감, 전쟁의 피해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무지, 억압 속에 드러난다. 그와 대조적으로 기림일이 시작될 수 있도록 함께 해온 이들,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고 진행되어온 수요집회, 청소년들이 시작한 노랑나비, 청년들의 소녀상 지킴이 활동은 무엇이 용기이고 진실인지를 일깨워주는,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주류’라고 자처해온 기성세대, 중장년 남성들에게 특별한 깨우침을 주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또한 감사를 드린다.

 

오늘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에 의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아사감방에 들어가게 된 타인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성인의 위대한 모습만을 기억하는 날은 아닐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웃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친 성인의 모습과 더불어 불의한 죽음을 강제하였던 군국주의, 시대, 사회의 불의함을 더불어 기억한다. 그럼으로써 다시는 그러한 불의하고 부당한 죽음, 희생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순교자로서 공경되는 성인을 기억하는 공동체, 신앙인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고 책임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그것이 우리들이 실천해야 하는 ‘자비’, 곧 ‘사회적 사랑’일 것이다.)

 

사회의 침묵, 교회, 신앙인의 침묵, 그리고 침묵을 통한 방관, 동조가 콜베 신부님의 순교 이면에, 그리고 전쟁과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고통에 자리하고 있음을 성찰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은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의미를 더불어 지니고 있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로 대표되는 불의한 범죄로 인한 고통과 아픔을 지닌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악을 피하고 선을 살아가게 하는, 신앙인이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길이며 초대이기도 하다. 그러한 초대에 함께 하며 하느님을 닮은 우리의 본성을 함께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타인을 배려하는 형제적 사랑이 우선한다는 말씀을 들었다-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기에 성전세를 바칠 의무가 없었지만 혼란을 피하기 위해 성전세를 바치셨다-. 형제적 사랑이 우선하며, 그 사랑이 믿음의 정당성, 믿는 이의 신원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형제, 이웃의 한계를 확장시키셨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듯이 예수님은 유다인만이 아닌, 고통 받는 이들, 아파하는 이들이 곧 우리의 이웃임을 알려주셨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 사랑은 이 시대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것을 통해 구체화되며, 그러한 삶을 사는 이가 구원받은 사람임을, 구원의 오늘을 사는 사람임을 더불어 생각해보게 된다.

 

독서에서 들은 신명기의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성실성은 하느님께서 우선적으로 사랑하시는 고아와 과부, 곧 소외된 이들, 아파하는 이들, 이름조차 없고 목소리조차 없는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그것이 진실하게 하느님을 경배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기에 우리가 함께 하는 기도와 미사는, 그리고 연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만이 아닌, 우리를 위한 기도이고, 구원하는 행위이며 하느님께 드리는 진실한 경신례일 것이다. 그리고 이 기도와 연대는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 이 사회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 하며 그리스도를 닮은 참 사람의 길에로 걸어가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은사에로 이어질 것이며, 참된 신앙의 기쁨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임을 믿고 희망한다.




Posted by 대전정평위뉴스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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