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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김용태 신부 정세미 미사강론 ... 미투 운동은 이미 2년 전에 시작되었다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8. 3. 13.

미투 운동은 이미 2년 전에 시작되었다



2018년 3월 12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제104차 정세미 미사 강론

장소: 세종 성프란치스코 성당

용태 마태오 신부(대전정평위원장, 도마동성당 주임)

오늘 복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43-54



가난한 이들은 태초부터 피해자였다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는 피해자들 편에 서지 않고 가해자들 편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때로는 그 스스로 가해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늘 피해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교회가 선포하는 예수님은 늘 이런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그 아픔을 달래주고 가해자들에 맞서 함께 싸우신 분이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부터 위선자의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교회는 예수님을 선포하면서 실제로는 그 예수님과는 다른 모습을 지니는 이중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늘 경계하셨던 ‘위선자’의 모습이 교회 안에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회가 그만큼 ‘권력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든 권력자들은 늘 가해자의 위치에 서 왔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권력자들 즉 가해자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아래서 길들여지고 다스려져 왔습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권력화’된 교회 또한 자연스레 가해자들의 편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리얼리티보다 이미지에 충실해진 교회

그러다 보니 교회는 ‘리얼리티’보다는 ‘이미지’에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선포하는 것은 복음이지만 서있는 자리는 복음적이지 못하다 보니 삶보다는 겉모습에 충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살기보다는 거룩하게 보이려 노력했고, 의롭게 살기 보다는 의롭게 보이려고 노력했으며, 자비롭게 살기 보다는 자비롭게 보이려고 노력했고, 가난하게 살기 보다는 가난하게 보이려고 노력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부끄러운 본모습이 드러나게 되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 하기 보다는 감추고 숨기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단순하고 담박하고 리얼한 교회가 되어야

이제 교회는 단순하고 담박하고 리얼해져야 합니다.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이미지’가 아닌 ‘리얼리티’로 승부해야 합니다. 겉모습이 아닌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실망스런 고향이지만 그곳에서 여전히 당신 일을 하십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하셨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떠나 당신을 환영하는 이들만 찾아다니거나 혹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보여주어 그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머무시는 곳이 어떠한 곳이든 간에 당신이 해야 할 일과 당신이 선포해야할 말씀에 충실하셨습니다. 


리얼리티 그 자체였던 예수님 처럼

사람들에게 어떻게 드러날까 하는 것에 마음 쓰지 않으시고 당신이 살아내야 할 삶과 마땅히 걸어야할 길에 충실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삶은 ‘이미지’가 아닌 ‘리얼리티’였던 것이죠. 그리고 이는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할 본 모습이기도 합니다.


과연 몇 몇 사제들만의 잘못일까?

최근의 ‘미투운동’과 함께 드러난 사제들의 성폭력 문제는 어느 사제 몇 명의 개인적인 잘못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이는 오늘날의 교회가 얼마나 어떻게 예수님의 교회로부터 멀리 있는지를 반성하면서 교회 본연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각고의 참회와 쇄신의 계기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미투(#Me too) 운동'은 이미 2년 전에 시작되었다

이미 우리는 2년 전에 거국적인 ‘미투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광화문 광장과 전국각지의 촛불혁명은 이 시대의 거대한 ‘미투운동’이었던 것이죠.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는 이들의 추행과 폭력에 대한 폭로요 저항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미투운동’이 민주주의, 국민, 독재타도라는 거대담론으로 멈춰 서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추상화되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더 세세히 더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시하고 넘어갔던 수많은 추행과 폭력들, 가해자들의 세상에서 살아가다보니 나도 모르게 길들여지고 합리화하고 받아들였던 그 모든 부조리와 부정과 부당함에 대해서도 우리 삶의 가장 작은 이들까지 목소리를 내고 저항하게 된 작은 촛불시위요 생활형 촛불혁명인 것입니다.


미투 운동은 계속되어야

‘미투운동’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미투운동’은 이미 2천년전에 예수님께서 목숨 바쳐 하셨던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당연히 모든 시대 미투운동의 주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방해하거나 왜곡하려는 자들은 늘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마땅히 가야할 길을 당당히 걸어가야 합니다. ‘이미지’가 아닌 ‘리얼리티’로 ‘겉모습’이 아닌 ‘삶’으로 당당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그게 진짜 교회입니다. 


2018년 3월 12일 월요일 저녁 7시 미사, 세종 성프란치스코 성당 / 제104차 정세미 미사 강론  / 김용태 마태오 신부


세종 성프란치스코 성당 야외 성모상(2018.3.12 월, 밤 9시20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