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8(월) 저녁 7시, 세종 성바오로 성당에서 정세미 개최

제115차 정세미, 문화학자 엄기호 초청 특강

민주주의와 남성중심주의의 문제 (2)


문화학자 엄기호가 강연 중이다. 세종 성바오로 성당 1층 교육관(10/8 월 저녁 7시45분~9시 20분)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다면

한국과 같은 사회는 서구와 같은 남성성, 남자다움 이런 게 만들어지기 힘들어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남자가 된다는 것은 즉, 소년이 성인 남성이 된다고 할 때, 서구의 정신분석학적 설명 등에 따르면, 무시무시한 건데요. 살부(殺父)라고 합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극복해 나가면서 한 소년에서 성인 남성으로 바뀌어 가게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소년’이란 존재는 아버지의 법 안에 ‘예속된 존재’입니다. 나의 아버지가 나에 대한 처분권을 갖고 있고,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으며, 결국 나는 예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란 말과 ‘남자’란 말이 동의어(同義語)

서구적 관점으로 말씀드린다면, 원래 ‘인간’이란 말과 ‘남자’란 말이 동의어(同義語)입니다.  재수 없는 말이죠. 예전 서양에서도 여자는 인간이 아니죠. man이 ‘남자’란 뜻, ‘인간’이란 뜻.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냐면, ‘자유민’이란 의미가 있고, 다른 말로 자유인이 아닌 존재는 인간이 아닌 존재로 봐요. 그래서 노예, 여성도 남성에게 예속된 존재로 보고, 어린이는 부모에게 예속된 존재잖아요. 그래서 ‘인간’이란 말 자체가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죠. 인간이란 말에서 제일 중요한 말은 자유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자유)이란 능동성. 노예는 수동적 능동성

자유란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냥 간단히 말씀드리면 능동성(能動性)이에요. 제일 싫은 게 뭐냐면 수동성(受動性)이에요. 수동적 존재는 인간으로 안 보는 거예요. 능동적인 존재만 인간으로 보는데, 예속된다는 것은 수동적이고, 노예란 아무리 부지런히 해봐야 남이 시키는 범위 내에서만 열심히 아는 수동성입니다. 이른바 ‘수동적 능동성’을 노예의 부지런함이라고 합니다.


노예로 부지런히 사는 거라면

주인으로서 열심히 산 게 없이 그저 노예로 부지런히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능동성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는 건 지배자인 아버지를 죽이고 내가 주인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도 구도 자체가 못된 생각이에요. 우리 집의 주인인 아버지를 죽이고 내가 그 집의 주인이 되는 것이죠. 나도 성인남성이 되면 나에게 예속된 부인과 자식을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가부장제(家父長制)입니다. 


살부란 자기가 가부장이 되어가는 과정

그래서 살부(殺父)란 가부장을 죽이고 자기가 가부장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남자들은 어릴 적에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과 반항의식이 있죠. 아버지를 극복하려는 마음이 있는 건데요. 그러나다 (자신이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늙는 걸 보면서) 아버지를 불쌍하게 볼 때 아버지를 극복한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어깨가 초라해 보이면서 측은지심이 생길 때 비로소 독립적 성인남성이 된다고 합니다. 슬픈 것은 제가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제가 비슷한 연구를 하면서 한국 성인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것은 의외로 살부(殺父)에 성공한 남자들이 없어요. 


한국 남성만의 독특한 정체성 '아들'

재미있는 현상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한국의 남성성, 남성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을 규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 남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아들이에요, 아들. 나이가 60이 되건, 70이 되건, “내가 아들이다.”라는 의식이 훨씬 강해요. 아버지가 살아있다면 말입니다. 이건 전 세계적으로 독특한 현상입니다. 게다가 여성 입장에서 굉장히 괴로운 일이에요. 내가 같이 사는 남자가 내 남편이라고 하는 의식과 내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의식보다 자기 부모에 대한 아들이란 의식이 더 강해요. 이것보다 괴로운 일은 없죠. 여성들 입장에서 내가 저 인간과 왜 살아야 하나? 전 지구적으로 특이한 현상입니다. 


왜 '아들' 정체성이 강할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아들’의 정체성이 강하다는 건 성인이 못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가 결혼하고 나서 5년차 지나고 10년차 지나고 나면, 부인들은 자기 집 남편을 ‘우리 집 큰 아들’이라고 부르죠. 다 챙겨줘야 하고, 어쨌든 이건 살부(殺父)에 실패해서 그런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형태가 (한국에서 특별하게) 나타났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한국의 독특한 현상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이 식민지 국가였다는 겁니다. 그때까지 올라갑니다. 


즉 한국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이기도 전에, 이미 그 아버지가 딴 놈한테 죽임을 당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서 대한제국이 멸망을 하였고, 죽여야 할 아버지가 사라진 겁니다. 죽여야 할 아버지는 사라지고, 학문적으로 ‘식민지의 남성성’이라고 부르는데, 내 아버지는 죽었고, 일본 천황이란 새 아버지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일본 천황은 “난 네 아버지가 아니다. 넌 서자다.” 그래서 진짜 아버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아버지 행세를 할 생각도 없으니, 이럴 때 나타나는 의식을 인권 관점에서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이를 ‘고아 의식’이라고 불러요. 


고아의식

난 아버지가 없다는 것. 이것은 남자들만 그런 게 아니라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현상입니다.  한국사회의 큰 문제의 근원은 고아의식입니다. 물려받은 게 없다는 거죠. 물려받은 것도 없고 극복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땅바닥에서 제로(0). 거지로 출발하는 것이거든요. 고아의식이란 걸로 추적하면 재미있는 현상이 있는데, 여기 계신 분들이 세대별로 생각해보시면, “우리 할아버지 저렇겠구나.” “우리 아버지가 그랬던 거구나.” 혹은 “나는? 내 아들은? 내 손자는 어런 거였겠구나~”를 따져보면 됩니다.


할아버지를 경멸하는 아버지 세대

80대 중반의 제 아버지님 세대 남자들을 인터뷰해서 알게된 재미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들을 경멸해요. 거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무책임하다는 겁니다. 보통 다 축첩, 노름, 그 다음에 술, 음주 그리고 부인 두드려패는 거. 이렇게 패가망신하거나. 아버지 세대의 대부분의 스토리는 남자가 무책임해서 패가망신한 스토리가 대부분이에요. 살던 집들도 패가망신하고 소작하는 데도 망할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망하는 식으로 다 망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소수의 예외가 있다면

아주 소수의 예외가 있어요. 주로 어떤 계통이냐면 엘리트들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한 지주계급들은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머지 계급은 아버지에 대한 경멸과 증오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식민지 시절의 사람들은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식민지 백성이라서 사업이나 정치에의 참여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거의 매일 술 먹고 마누라 두드려 패는 것. 30년대 소설 보면 그런 거 많죠. [운수좋은 날]이나 기타 등등 [홍도야 우지마라] 등. 여자가 세가 빠지게 돈 벌어서 먹여 살리는 동안 남자들은 무능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이랄까요. 그리고 해방이 되죠. 


해방세대는 어떠했나?

보통 우리 아버지 세대라고 이야기하는 60세에서 7~80대 초반까지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해방된 이후 58년 개띠라고 부르는 근방의 사람들까지 생각해보면, 이분들은 고아의식이 있으면서도 독특한 다른 의식이 만들어집니다. 즉 자기 아버지에 대한 경멸이 엄청 강하면서 이렇게 경멸스러운 아버지가 되면 안된다는 의식이 되게 강합니다. 한 마디로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있어요. 많은 분들이 친박연대로 활동하시는 경우가 있는 세대의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과 진보적인 사람이 대화하면서도서 안 싸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진정한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나?

젊은 사람들은 부모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라서 어떻게 질문하는 지 몰라요. 

“아버지는 살아오면서 언제가 제일 기뻤어요?”

대부분 이런 거 안 묻습니다. 나를 낳아주고 나를 길러준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에게 무엇이 기뻤는지가 궁금해야 하는데, 한번도 안 떠오르는 질문입니다. 보통 자식들이 생각하는 부모님의 답변에 대한 기준은 “너 낳았을 때 (가장 기뻤다)”던지, “너 대학 갔을 때” 등인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신이 취직했을 때가 제일 기뻤답니다.


광산에 취직했을 때가 가장 기뻤다

할아버지 때문에 쫄딱 망했다가 광산에 취직한 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1960년대 당시의 취직은 광산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광부로 우여곡절 끝에 취직을 하면서 어머니를 만나고 결혼했던 겁니다. 그 아버지가 스스로  가장 기뻤을 때는 광산에 취직했을 때였던 겁니다. 왜 기뻤냐면 이제 내 손으로 밥을 먹고 살 수 있게되고, 누군가 책임질 수 있게 되었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생애사적 기획’이란 표현을 씁니다. 


생애사적 기획

생애사적 기획이란 내 삶을 그냥 하루하루 의존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의 역사처럼 만들어가는 기획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요. 인간에게는 이게 너무 중요해요. 요즘 애들 중에는 오늘만 사는 애들이 많아졌어요. 사실 그건 요즘 젊은이들에게 불가능한 게 많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도 불가능했어요. 아무리 생애사적 계획을 짜 보았자, 일본이 와서 다 털어가면 어찌할 수 없었고, 전쟁이 나도 총 맞아 죽으면 끝이 나버리고, 그래서 생애사적으로 보면 경제적 안정과 정서적 안정이 중요한데, 경제적 안정을 한국에서 최초로 다수의 사람들이 꿈꾸기 시작한 게 60년대에요. 


정서적, 경제적 안정을 최초로 꿈꾸던 60년대에 등장한 박정희

공교롭게도 그것이 박정희의 집권과 맞물려서 (그 세대의 어르신들은) 이 모든 것을 박정희 덕분이라고 이야기하죠. 아버지의 사유 속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는 겁니다. 아버지 세대의 경우 처음으로 이 고아의식에 변화가 생깁니다. 고아는 고아인데, 이 고아들이 뭐가 되기 시작했냐면, 아버지가 되기 시작한 거에요. 이분들 세대를 바라보면서, 한국에서 식민지 해방 이후 최초로 아버지가 등장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60년대에 비로소 아버지가 되기 시작한 사람들

이 사람들 같은 경우. 아버지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되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책임감입니다. 이 시절에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보고 배운 게 없기에) 아버지가 되기 시작한 사람들이 자기 삶에서 아버지를 모르고, (아버지로부터 책임감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명령과 지배 만을 존재했지만, 사실상 그와 동시에 책임감을 가져야만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당시 60년대 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책임감이 있었던 가족만 살아남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책임감이 없다면 가족은 해체되었다

책임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가족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거의 다 사라집니다. 거의 가족해체입니다. 아버지가 노름해서 망하거나 엄마가 바람나서 도망가거나 하는 경우가 진짜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 대가집의 사랑채를 단독셋방으로 18~20가구로 나눠 살던 셋방의 사람들 중에서 셋방살이 중 살아남은 가구가 2~3가구 뿐입니다. 그 가구는 다 대학가고, 나머지는 흔적없이 사라졌어요. 


재미있는 현상은 아버지들이 이렇게 책임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버지들이 잘나서 책임감이 강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아버지보다 더 중요한 게 엄마의 역할이고, 또 하나는 자식들 역할입니다. 이렇게 살아남았다는 것은 대부분의 엄마들이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억세지 않으면 살아남지 않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강인한 엄마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 엄마들이 지금 나이가 70이 넘고 80이 되며 질병이 생기면서 이 집들에 재앙이 닥칩니다. 이 엄마들이 활발하고 사회적으로 모든 걸 책임지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질병으로 못 움직이고 퇴행성 관절염, 무릎과 척추에 질병이 생기고 못 움직이시면서, 이 분들이 내는 짜증과 분노를 자식들이 받아줘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중년의 자식들이 5분 대기조 뛰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본가에서 전화오면 가슴이 섬뜩섬뜩한 것이죠. 오늘은 무슨 일로 호출하나. 싫다는 게 아니라, 가슴아프다는 것입니다. 


삶의 허망함을 느끼는 이유

그 시절의 아버지들이 아버지가 되는 것은 정신차리고 살아야 했던 시절에 책임감으로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으로 6~70년대의 아버지들은 윗대 아버지와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자기 삶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이 양반들이. 이들의 자부심이 박근혜를 지지하거나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박근혜가 탄핵 당해서 쫓겨나고 하는 과정의 이후의 공간 속에서 느끼는 삶의 허망함이 엄청납니다.


태극기 들고 나가는 것은 하나의 사건인가

그래서 이 분들에 대해서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야!, 외곬수다." 이렇게 보면 안 됩니다. 이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그 사람을 보면 안되고, 그 사람의 생애사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둘러싼 사회사를 봐야 해요. 그래야 제대로 길을 찾아낸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만 비판하지, 이 사람 생애를 통해 이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생애사와 사회사에 대한 이해보다는 모든 걸 이 사람에게만 돌립니다. 

(3부에서 계속)


(이 내용은 편집자가 강연 내용을 받아적어 정리한 것으로, 실제 강연 내용과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정확한 맥락이나 오해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블로그 편집자의 수준에서 비롯된 것이며, 당일 강사님의 강의는 매우 훌륭했고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영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아름다운 강의였습니다.)








Posted by 대전정평위뉴스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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