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8(월) 저녁 7시, 세종 성바오로 성당에서 정세미 개최

제115차 정세미, 문화학자 엄기호 초청 특강

민주주의와 남성중심주의의 문제 (3)


문화학자 엄기호가 강연 중이다. 세종 성바오로 성당 1층 교육관(10/8 월 저녁 7시45분~9시 20분)


최초로 아버지 있는 아들의 탄생

이 아버지들 밑에서 아들들이 태어납니다. 바로 제 세대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되게 못 됐었어요. 독특한 인간들입니다. 근현대사 100년 안에 최초로 아버지가 있는 아들들이 태어난 거에요. 그 이전과 비교를 해보면, 그 전에는 지주집 정도 되어야 아버지 있는 아들이지, 대부분 고아였거든요. 최초로 아버지가 있는 아들들입니다. 이들은 드디어 아버지가 있으니까 뭐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다. 


비로소 아버지가 생겼으니 죽여야 한다

아버지를 죽여야 자기가 아버지가 됩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민주화 운동도 관련됩니다. 소위 86세대들이 그런 겁니다. 40대 50대는 아버지의 역사를 부정한 것이거든요. 아버지! 당신들 덕분으로 대학에 간 거는 맞지만 (아버지 세대가 지닌)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폭력적인 것들은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살부(殺父)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살부(殺父)라는 식으로 아버지 세대를 전면 부정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개별자로서의 내 아버지는 연민의 대상입니다. 존경의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가 (모든 성취를 다 이룩) 해놓고 (그것이) 박정희가 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그러한 세대 전체는 부정되고 극복되어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추석 명절이면 벌어지는 일들

그래서 추석에 아들이 아버지 집에 찾아가면 맨날 싸우게 되는 겁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면, 아들은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맨날 조선일보만 보니까 그러시잖아요.” 그러면 아버지는 “너네가 듣는 뉴스만 진짜 뉴스냐?, 한겨레 신문만 신문이냐? 볼 것도 없더만?” 그런데 요즘은 유튜브 가지고 싸운다고 하더군요. 


40~50대의 세대들은 집을 떠나려고 했다

굉장히 재미있는 현상은 우리때와 비교하면 이 때 대학가려던 친구들은 기를 쓰고 집에서 먼 대학을 가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지방에서는 어떻게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려고 했다는 것이지요. 

(중략)


40~50대들은 최초로 아버지가 있는 아들이었다

서구적 관점에서 이들은 최초로 아버지가 있으면서 아들이 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 숙명은 뭡니까? 아버지는 죽어야 합니다. 또 아들들을 낳았잖아요. 40~50대가 아들을 낳았고, 이들은 이제 20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아버지가 된 세대인 40~50대는) 그런데 이 인간들 절대 안 죽습니다. 이게 한국사회의 두 번째 문제입니다. 요 인간들이 절대 안 죽습니다. 


40~50대는 이전 아버지들과 또 다르다. 교양인의 탄생

이 분들과 또 다릅니다. 왜 안 죽을까요? 이 친구들이 제 또래들인데요. 이 분들은 아버지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친구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아들들에게 좋은 것인 동시에 나쁜 것입니다. 40~50대의 아버지들처럼 권위적이거나 무식하거나 계몽되지 않은 존재가 아닙니다. 이들은 민주적이고 계몽되고 교육받았고, 교양있고, 그런 존재들입니다. 게다가 우아한 존재가 되려고 되게 노력해요. 실제로 그렇기도 합니다. 이 세대부터는 인구의 10~30%가 대학에 가기 시작하고, 교양있는 존재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과 딸들에게 친구같은 아버지, 실제로 아버지들 중 친구같은 아버지가 많아요. 50대, 40대, 30대. 이들은 아이들과 게임도 하고 캠핑도 가고, 당연히 때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야구장 같이 가고 이런 친구같은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이것이 아들들을 곤란에 빠지게 합니다. 아버지는 죽여도 되지만 친구들은 죽이면 안되거든요.


아버지는 죽여도 되지만, 친구는 죽일 수가 없다면

실제로 이런 세대들이 박탈한 것은 지금 아이들이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아이들은 영원히 아이가 되는 존재들인 거죠. 1997년 IMF 경제위기는 제일 큰 사건이고, 이 사건 이후로 실제로 경제적 안정성을 가지고 살아가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부딪치는 것이고, 지금 젊은 친구들의 초점을 맞추려는 것이 이것인데요. 이를 통해서 남자아이들의 마음과 태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아버지란?

첫 번째로 이들은 우리 아버지들에게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친구같은 아버지라서 좋기는 한데, 아버지만큼 되기가 불가능합니다. 대학에서 많이 이야기하는 건, 우리나라에서 20%를 제외한 나머지 80% 안에서는 아버지보다 좋은 대학을 갈 확률은 없어요. 또 아버지보다 더 좋은 직업을 가질 확률은 없어요. 아버지보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더 잘 될 확률은 낮습니다. 


중산층이 교육에 올인하는 이유

실제로 이것 때문에 한국의 중산층들이 교육에 올인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한국의 중산층은 자신이 가진 재화로는 부를 재생산할 수 없습니다. 중산층은 아니고 중상층. 최소 빌딩 2채는 되어야 내가 사는 것만큼 우리 애도 살수 있게되요. 빌딩 2채 중에 한 채 물려주고, 한 채는 갖고 살다가 죽으면서 물려줘야 한다는 거죠. (중략) 그러니까 올인을 할 수밖에 없으니, 자식들은 완전히 빚쟁이입니다. 부모에게 모든 걸 빚졌는데, 빚을 청구하는 사람(부모)이 친절하기까지 하며 영원히 옭아맵니다. 


부모 집에 머무는 젊은이들

이런 와중에서 집 나가기를 싫어해요.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40~50대처럼 어떻게 하든 집을 나가려고 했지만, 이제는 삶의 가장 큰 목적이 안락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니라 자아성취도 아니고 편안하게 사는 겁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만 되면 되었어요. 남편과 연인으로서의 삶이란 것. 그것은 인생의 잠시 잠깐의 순간이었을 뿐, 나머지는 아들 아니면 아버지였던 겁니다. 그렇게 여자들을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그러하니 남편으로 나를 생각한다? 연인으로 나를 생각한다? 그런 것은 잠깐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남편으로서의 나, 연인으로서의 나를 생각한다면) 그러면 여자를 무시하면 안되죠. 그런데 한국 남성에게 그건 1~2년 정도이고 지우개로 지운 게 아닐까 싶습니다. 


더이상 가부장제는 없다

완전한 가부장제, 완전한 남성중심주의였던 시절. 이젠 그럴 수 없는 시대가 되었죠. 그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젊은 친구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역량이 필요해졌다는 겁니다. 이 친구들은 아버지 세대와 다른 건 여자와 경쟁을 해야 해요. 과거에는 여자와 경쟁할 필요가 없었어요. 상대가 아니었죠. 취업이라고 하면 왜 여자랑 경쟁을 해요? 


여자들과 경쟁하는 시대에 돌입

여자가 공부를 잘한다고 대학을 갈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을 간다는 결정을 해도 갈 길은 정해졌어요. 사범대를 갑니다. 여자가 갈 길이 정해진 것입니다. 40~50대의 시대상이 그러햇지만, 젊은 친구들은 그게 아니거든요. 20대 중반 이후 그렇게 30대 정도의 지금 남자들은 당혹스러워요. 여자들과 경쟁을 해야 되는 건거죠. 그런데 여자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몇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여성들은 이제까지 역사적으로 사회진출에 대한 기회가 없다가 생기면서 무섭게 공부하고 무섭게 준비합니다. 남자들은 옛날처럼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 인간들과 미친 듯이 노력하는 사이에 경쟁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남녀공학하는 곳을 가보면, 남학생들이 바닥을 깔아주고 있어요. 그러면서 사법고시를 비롯해서 많은 공무원 시험의 합격자들이 여성들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그러하니 남자 아이들 입장에서 "뭐가 남녀차별이냐? 여자가 훨씬 잘 나가는데. (오히려) 내가 차별받았다."라는 말을 현상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자 아이들이 초중고등학교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초중고등학교 남자아이들이나 대학생 남자들이 초중고 다닐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아세요? 이 아이들이 제일 많이 듣는 말은 뭘 거 같으세요? “하지 마”라고 해요. 선생들한테 제일 많이 듣는 말이 “가만 있어. 하지마.” 


가만 있어, 하지마

남자애들이 움직이다가 사고나면 학교는 책임져야 하거든요. 그런데 여학생들은 뭘 해도 사고가 안 나는데, 남학생들은 사고가 난다는 겁니다. 현상적으로 남자들 경험세계에서 여 선생님, 여교사가 많아요. 집에 가면 엄마가 다 여자잖아요. 여자가 나를 억압하고 ‘하지마’라고, 현상적으로 자기 경험 속에서는 그런 겁니다. 성적도 여자가 나보다 더 좋습니다. 그런데 "뭐가 남녀차별이냐!" 그런데 어느정도 나이가 되면 (남자인) 나는 군대를 끌려가야 하거든요. 남성들 경험세계에서는 차별이 아니라 당하고 있고 역차별 의식이 굉장히 강한 것입니다. 


공부의 진정한 목적

우리가 공부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나의 경험 세계를 뛰어넘는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뒤에 보이는 구조와 맥락을 보는 힘을 가지는 게 공부의 가장 큰 힘입니다. 현상적으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한국에서 여성들이 어떤 고통과 위험들 이런 것들이 어떤 게 있고, 그것이 왜 그렇게 만들어있는가를 읽어내는 힘이 있죠. 그 힘을 가지게 되는 걸 우리가 ‘공부’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공부가 망한 사람들이에요.


한국은 공부가 완전히 망한 사회

한국은 공부가 완전 망한 사회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 경험을 뛰어넘어 그 이상 밖의 것을 이해하고 읽고 그것으로 말을 하려는 시도를 안 합니다. 자기경험 세계에 갇힌 것입니다. 486, 586 이 인간들도 그렇고요. 젊은 세대는 피해의식에 갇혀있는 것이고요.


공부란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

공부를 하면서 이걸 넘어가는 걸 우리가 뭐라고 하냐면, 제일 많이 봐야 하는게 민주주의와 관련된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 경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그것을 누가 겪고 있는가? 그들은 왜 겪고 있는가? 그것을 연민이 아니라, 그 고통을 나는 왜 겪지 않는가를 느끼고 내가 얼마나 기득권을 갖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보호를 받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적으로 보는 걸 넘어 그들의 위치와 내 위치가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평등이란 권리의 평등도 있지만, 그걸 위해서라도 훨씬 중요한 건 타인의 고통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는 없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심각한 고통,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질병이나 사고나 정신적 사회적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서 아는 것은 ‘아무도 나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심지어 나조차도 모른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의 고통은 뭐냐면 외로움입니다.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아무도날 알아줄 수 없다는 것. 심지어 나도 날 모른다. 성경에 나오는 비유로 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얼마나 외롭고 이 외로움의 고통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고통은 외로움이다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을 때의 그 외로움 말입니다. 십자가 밑에는 성모님과 제자들이 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 버림받음처럼 외로움은 없습니다. 고통은 이해할 수 없지만, 고통이 있다는 사실, 위험과 고통이 있다는 걸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감히 '고통을 이해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굉장히 위험하고 조심해야 할 인간이라고 봅니다. 고통에 처한 사람이 있다는 걸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통에 처한 사람이 있다는 걸 인지하는 게 중요

예를 들어 강남역 살인사건 여성분 살해사건에서 사건 자체로만 보면 100만분의 1의 사건입니다. 그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죠. 하지만 그 사건을 보며 한국의 많은 여성들은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공포감을 느낍니다. 그런 위험이 만들어내는 고통. 그것이 상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난사당해서 살해당하지 않더라도 어떤 위협감, 껌껌한 골목에서의 위협감 등은 존재에 가해지는 위협감입니다. 남자들은 느끼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여성과의 비교에서 존재적 차이가 생깁니다. 거기에서 고통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타인의 얼굴

공부를 통해서 타인의 고통 - 철학적 용어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타자의 고통이 있다는 것. 그리고 타자의 고통을 보는 것은 레비나스라는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신학에도 엄청난 영감을 주는데, 타자의 고통이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몸에서 어디입니까? 고통에 처한 사람이 그 사람을 봤을 때 고통에 처해 있구나 드러나는 건 ‘타인의 얼굴’이란 표현을 씁니다.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했을 때,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과의 대면 이걸 '만남'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인카운터'. 이런 만남 없이 우리 사회의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고통을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 이것이 발생할 수가 없겠죠.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과의 대면 즉 만남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는가?

이 지점에서 여기 계신 분들이 우리는 누구를 만나는가? 어떤 만남이 있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 청소년 사목하는 사제와 활동가들이 하는 말은 성당 오는 애들은 착한 애들밖에 없다는 겁니다. 성당 주일학교 오는 애들의 고통을 여러분은 볼 수 있을거에요. 그러나 다른 아이들의 고통은 성당에서 지워져 있어요. 성당이란 어떤 곳입니까? 성당이란 그리스도교에서는 사귐과 섬김과 나눔의 장소인데, 사귐이 누구랑 사귀는가입니다. 


성담은 사귐과 섬김과 나눔의 장소 

사귀려면 만나야 하는데, 여기에 어떤 사람들이 오는가? 성당이란 공간에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고통받는 타자가 있다는 거죠. 그 고통받는 타자가 성당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여기에서 만날 일이 없죠. 만나지 않으니까 고통이 존재한다는 걸 알리도 없죠. 


만나지 않으면 고통이 존재한다는 걸 알리가 없다

또 여기서 사귐과 섬김과 나눔을 해야 하니,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고통을 드러내면 안되죠. 난리나는 일이죠. 그럼 누구의 고통을 인정받는가, 이 모든 문제의 핵심에 고통의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의 고통을 삭제하고 있는가? 누구의 고통만 드러내고 있는가? 그래서 여기 계신 여성분들이 성당 안에서 여성활동가이며 봉사자로서 느끼는 고통들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드러나 가지고 무조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아! 저기 고통이 있구나.” 그걸 인지하는 겁니다. 


아! 저기 고통이 있구나

공동체의 핵심은 그 안과 밖에 고통이 있다는 걸 인지하는 것이고, 그것이 왜 존재하는가를 본다면, 원인없는 고통이 있을리 없죠. 그래서 그 원인을 찾아서 그 고통을 경감시키고 제거하는 방식으로 룰을 질서를 다시 짜야 하는 겁니다. 그 룰을 다시 짜는 것을 바로 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우리 안에 모호하지만 우리 안에 가진 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룰을 바꾸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입니다. 민주주의 핵심은 한 표 던지는 게 아니라 룰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

그럴려면 고통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 뭔가하면 관찰력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관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아 나는 아프다.”라고 얘기하는 사람의 고통을 듣는 건 쉽지만,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을 듣는 건 어렵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자가 된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귀에 말로 들리지 않는 말을 말로 알아듣는 능력입니다.


국가의 언어로만 이야기한다면 

대표적인 예로 한국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이 정부 보조를 받을 필요가 있죠. 기초수급. 그러면 가난한 사람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능력이 없으면 기초수급 못 받아요. 국가의 언어로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동사무소에 가서 뭔가를 엄청 써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올라온 걸 보면 욕 나와요.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며 돈을 줘야 하나, 받아야 하나. 20대 청년이 할머니와 둘이 사는데, 왜 자기네가 기초수급 받아야 하는지 쓰는데 아주 먼 친척과 관계없는 걸 증명하고, 그 앞에서 공무원이 “이게 다 국민의 세금입니다. 이걸 쉽게 받아서는 안됩니다.” 이런 국가의 언어로 가난한 사람이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듣는 능력이 없는 것

관공서에 저도 가면 일일이 물어보고 써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 질문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고통에 처한 사람이 말을 안 한 것인가요?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못 들은 것인가요? 이건 말하는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듣는 능력이 없는 겁니다.


교회의 가장 큰 능력은 듣는 것

국가를 교회로 바꾼다면, 교회의 가장 큰 능력은 말하는 게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 교회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 수녀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들을 귀가 있는가? 이건 예수님이 맨날 이야기하시는 거에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셨는가라고 프랑스 철학자는 책도 한 권 썼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정말 중요한 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예수님이 세리를 만나고 창녀를 만나고 귀머거리 만나고, 그 들 민중이라 불리는 말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먼저 내가 들을 줄 모른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듣는 능력, 경청

런데 경청이라고 하는 듣는 능력. 즉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듣는 능력. 이게 고통을 감지하는 겁니다. 그리고 고통이 있구나를 알면 서둘러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이걸 고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순간에 다 뜯어고칠 수 잇는 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합의되어야 합니다. 고쳐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 합의 하에 룰을 바꿔야 합니다. 


눈치가 중요한 이유

저는 민주주의라는 속에서 이야기한다면 핵심이 고통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걸 잘해내는 것은 우리가 어렸을 때 공터에서 놀던 걸 잘 생각해보십시오. 공터에서 노는 애들에게 기가 막히게 발달하는 역량은 바로 눈치입니다. 눈치의 핵심은 정치력입니다. 눈치가 있다는 건 나랑 같이 놀면서 끊임없이 관찰합니다. 저 애가 재미있어 하나? 도망가려고 하나? 안 하려고 하나? 엄청 관찰합니다. 눈이 픽픽 돌아갑니다. 다 관찰해야 해요. 딱 보니까 재미없어 하니까 둘 셋 점점 재미없어 하면 게임이 끝날 수 있으니 그때 애들이 점점 이 게임이 재미없어진다면, 야 이렇게 해보자라면서 게임의 룰을 조금씩 바꿔요. 


혼자 즐거우면 놀이가 안 된다

애네들이 봉사하는 건가요?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건가요? 아니죠. 너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고 나혼자 즐거우면 놀이가 안되니, 너희들만 즐겁고 그러면 내가 계속 재미있게 되기 위해서 너가 재미없다면 나도 재미없어질 것이니, 룰을 바꾼다. 그래서 전국의 고스톱 룰이 다 다른 겁니다. 좀 더 엔터테이닝해야하고, 나의 재미와 너의 재미가 연동되어지는 겁니다. 눈치가 있으니까 룰을 바꾸는 겁니다. 


협력의 기회

놀이에 참여를 시키고, 이 친구들이 협력할 수 있도록 끌어들이는 것. 이것을 협력의 기회라고 합니다. 단결이 아닙니다. 참여시키고 끊임없이 불러들이고 초대하는 겁니다. 약 30년 전에 가톨릭 예비자 교리서 제목이 초대받은 당신입니다. 교회는 초대받은 공동체라고 하는데 제가 굉장히 실망한 게 “왜 초대하지 않는가?” 초대는 아는 사람만 초대하는 게 아니라 바깥 사람들 고통받고 재미없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초대하는 겁니다. 


왜 초대하지 않는가?

우리끼리 와 하고 재미있는 건 초대가 아닙니다. 초대를 개신교에서는 선교라고 부르거든요. 그럴려면 룰을 바꿔야 합니다. 도저히 이 게임으로 안 되요. 그래서 “나 이거 재미없어서 안 할래 저기 가서 딴 거하자.” 게임의 룰을 바꾸기도 하고 게임 자체를 바꾸기도 하고. 그 목적은 같이 노는거죠. 아이들이 기가 막히게 발달한 건 “같이 놀아야 재미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망가지는 걸 막는 걸 정말 많이 만드는 게 있는 데 그 중 하나가 “깍두기‘입니다 공터에서 놀 때 보면 무능한 애는 끼워줘요. 너무 못하면 끼워줘요. 넌 깍두기 영원히 안 죽어 그러면서 끼워줘요. 그런데 눈치 없는 애는 안 끼워줘요. 눈치없는 애는 추방이에요. 넌 도저히 안 되겠다. 도저히 같이 못 놀겠다.


깍뚜기가 필요한 이유

자본주의는 능력 없으면 배척하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협력을 할 줄 알고, 협력을 기꺼이 하는 사람들 이것만 있으면 끼워주고, 그러면 독점이 발생하면 안 됩니다. 한 놈이 다 가진다. 공터에 엄석대 같은 놈이 다 해먹으면 공터에 안 갑니다. 절대 발생해서는 안 되는 게 독점입니다. 다른 데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 경상도 남자아이들에게는 ’강규야‘란 규칙이 있었습니다. 딱지치기를 하면 워낙 잘하는 놈이 다 가져가게 되어 있는데 결국 한 놈이 잔뜩 다 따버리면 경상도에서는 집에 안 보내줍니다. 애들이 동네 애들이 쫓아다니며 "언제 할거야 언제 할거야! 도망가면 도망간다!" 하면서 골목 막고 절대로 집에 안 보내줍니다. 만일 도망가서 집에 가면 공터에서 추방입니다. 그러면 그 애는 그걸 나눠먹어야 합니다. 나누는 룰도 재미있어요. 넌 나랑 친하니까 100장, 조금 친하니까 50장, 넌 안 친하니까 1장. 그래서 이런 나눠주는 권력이 발생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날 딴 건 하늘에 뿌리면서 ’강규야‘’하고 외칩니다. 그렇게 뿌리면 애들이 와 하고 달려들테고, 그 사이에 도망가는 겁니다. 


딱지치기에의 "강규야"에서 찾아보는 희년

이게 성경에서 희년입니다. 원래 제 자리로 돌려주는 것입니다. 재화의 독점과 권력의 독점. 이 두 가지를 방지하는 겁니다. 재화의 독점과 권력의 독점을 방지하면서, 동시에 무능력한 자는 끼워주되(깍뚜기), 협력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는 안 끼워줍니다. 그 속에서 고통이 발생할 때 그것은 연민이 아니더라고 그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방식으로 룰을 바꿔주는 겁니다.


룰을 바꾸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런 걸 민주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이 민주주의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고통을 대변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성들이 고통을 말하기 시작했다면 들어야 되는 것이고, 듣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고통받는 얼굴을 대면하고 만나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말하는 게 아니라 듣는 겁니다. 공교롭게도 교회의 핵심은 고통을 듣는 겁니다. 고통과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우리가 보지 못한 고통, 듣지 못한 고통을 보고 들을 줄 알면서 교회를 계속 초대하는 공동체 그리고 세상의 룰을 바굴 수 있는, 세상의 독점과 재화의 권력에 의해서 능력 만들어진다면, 세상의 룰에 도전하면서 그 룰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와 여러분이 세상 안에서 그런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8년 10월 8일(월) 저녁 9시20분 강의 종료



(이 내용은 편집자가 강연 내용을 받아적어 정리한 것으로, 실제 강연 내용과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정확한 맥락이나 오해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블로그 편집자의 수준에서 비롯된 것이며, 당일 강사님의 강의는 매우 훌륭했고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영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아름다운 강의였습니다.)






Posted by 대전정평위뉴스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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