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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20150304] 박상병 신부의 하느님 사랑의 계획과 교회 사명(사회교리1강)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5.

하기동 성당 모습


시작에 앞서, 제13기 대전 사회교리학교 소개


가톨릭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박상병 신부님, 전의본당 주임)가 주최하는 제13기 사회교리학교가 대전시 유성구 하기동성당에서 열렸다. 2015년 3월 4일(수)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었다.

가톨릭 대전교구 하기동 성당. 대전광역시 유성구 송림로 49번지(하기동 535-1번지)


2015년 3월 4일(수) 저녁 7시31분경 촬영. 성당 1층 입구를 들어서자 배너게시대가 반겼다.



 하느님 사랑의 계획과 교회의 사명


박상병 신부님

시작하기에 앞서서 제 소개를 하고 10주간 과정에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명령으로 로마에 가서 사회교리를 공부했던 까닭에 지난 3년 전부터 가톨릭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군인으로 치면) 작대기 세 개입니다. 박상병. 그러나 병장제대했습니다.


오늘 시작하는 사회교리 학교는 총 10주동안의 과정입니다. 선물로 드린 책 <간추린 사회교리>는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에서 2004년 펴낸 책이다. 이것이 기본 교재입니다. 10주간의 과정은 이 책의 목차를 따라서 했지만, 내용은 가르치시는 강사님마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강의 제목은 <간추린 사회교리>의 책 목차에 맞추려고 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 중 사회교리란 단어를 들어보신 분, 사회교리 강의를 들어보신 분들 아직은 많지 않습니다. 그거 들으면 "그거 뭐여?"하면서 잘 모르시는 데, 첫 시간에는 사회교리가 어떤 것인지와 역사를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2015년 3월 4일(수) 저녁 8시 09분, 강의가 막 시작되는 모습 @ 하기동성당


교회가 걸어가야 할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은 사람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교황으로 선출(1978)되어서 회칙을 내놓는데(1979.3.4), 그것이 <인간의 구원자>라는 첫번째 회칙이고 그 내용 중에 있는 표현입니다. '교회가 걸어가야 할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은 사람이다, 인간이다.'라고 표현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세상 일에 관심 갖는 이유는 사회 안에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는 어떤 근거로 나오는가? 우선 성경을 통해서 인간은,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인간이 성경은 교회를 뭐라고 가르치는가 설명하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시간 나눠보겠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카롤 유제프 보이티와)

1978년 10월 16일 임기시작하여 2005년 4월 2일(선종, 84세) 끝난다. 후임은 베네딕토 16세이고, 전임자는 요한 바오로 1세이시다.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태어나셨다. 





보시니 좋았다와 비슷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교회가 걸어가야 할 일차적 근본적 길은 창세기 일장 이장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이 부분은 너무 잘 아는 부분입니다. 두가지 창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번째 예를 들면, 하느님께서는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 뭘 만드시고, 만드실 때마다 보시니 좋았다고 하시죠. 그리고 여섯째날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한가지를 더 붙이십니다. 바로 우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신학적으로 이것은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상은 무엇인가요? 하느님은 무엇인가? 속성과 모습은 무엇인가? 하느님은 뭘까요?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사랑인데, 그 사랑의 모습으로 인간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은 모상인데 그것은 사랑이다.

두번째 보면, 사람은 흙의 먼지로 빚어 만들고 코에 숨을 불어넣으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모습은 두번째는 흙의 먼지입니다. 재의 수요일에 그런 말을 합니다.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사람의 두번째 모습의 흙의 먼지다. 모든 피조물이 다 밟고 다니는 게 흙이기도 합니다. 사제서품 때 엎드리는 이유는 가장 낮은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게 이유입니다. 흙의 먼지라는 건 그렇게 낮은 존재다. 그런데 첫번째 모습과 두번째는 반대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은 사랑이지만, 또 고귀해보입니다. 그런데 흙의 먼지는 정반대입니다. 그렇게 고귀하면서도 별 것 아닌 먼지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사도들이게 보낸 편지를 보면, (필리 2,6-7)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아주 밑바닥으로 오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것. 하느님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세번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보시니 좋았다, 하루하루 만드신 걸 보시고, 그런데 창세기 2장을 보면, 사람이 혼자 있는게 좋지 않다고 합니다. (창세기 2,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 마지막은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한 몸이 되는 데 둘은 알몸이면서 부끄럽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몸으로 강의한다고 하면 미쳤다고 하겠죠. 부끄러운 겁니다. 그러면 알몸이면서 부끄럽지 않은 관계는 부부사이, 어릴적 아이와 부모님, 즉 온전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혼자 있지 않고 남녀도 함께 있을 때 보기 좋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인간의 속성은 인간이 함께 있을 때, 공동체로 있을 때, 아름다운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모상, 흙의 먼지, 그리고 함께 있을 때 아름다운 존재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거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성부는 하느님의 모상, 성자는 흙의 먼지, 성령은 함께하는 공동체를 대입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써넣은 겁니다.

뱀의 유혹 방식

예수님은 흙의 먼지 모습을 계속 보여주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아버지는 나에게 다 주신다고 하고, 아들도 그것을 아버지에게 받지만 또 다시 돌려주며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걸 계속 유지하고 이끌어주는 게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처럼 저 세개의 속성이 우리 안에 각인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의미있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왜 죄악이 많이 일어나는 겁니까? 그게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흔히 원죄라고 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다봐야 합니다.

창세기 제2장을 보면, 모든 열매에서 다 따먹어도 되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은 먹지 말아라. 그것을 먹는 날 너는 죽는다. 


창세기 2,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대화 자체를 끊어버려라

그런데 (3장 1절에서) 뱀이 뭐라고 하죠? "야, 너네 하느님이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했다며?" 그래서 비교를 해보면, 하느님은 다 먹어도 된다고 하지만,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했는데, 뱀은 어떻게 대화하죠?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했다며? 그렇게 유혹합니다. 그렇게 유혹은 터무니없이 오지 않습니다. 뭔가 우리가 걸려넘어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듭니다. 그런 유혹이 올 때 대화 자체를 끊어버리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오지 않는 유혹을 살짝 맛 봅니다. 그러며 한발자국 악으로 다가갑니다. 그러면서 죄에 빠집니다. 뱀이 이브에게 접근했을 때,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이마 유혹에 빠졌다. 그것은 하느님이 나쁜 존재일 수 있다는 의혹입니다. 유혹에 빠졌음이 드러나는 게 창세기 3,3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3, 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선과 악을 아는 게 오히려 중요한 게 아닐까?

여자는 한 단어를 빼고, 한 단어를 첨가합니다. 하느님은 모든이라고 했지만, 여자는 그 단어를 뺍니다. 그리고 먹지 말라고 했지, 만지지 말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선과 악을 아는 게 왜 문제인가?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 오히려 중요한 건 아닐까? 그런데 성경에서 선과 악이 붙어 있으면 어떤 의미냐면, 전부라는 뜻이 있습니다 모든 것, 이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의 의미입니다. 

선과 악을 안다고 할 때, 성경에서 몇가지 단어들은 예수님이 나는 아버지를 안다, 너희는 아버지를 모른다는 '머리로 알고 모르고'가 아니라, '아버지와 하나이다'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다는 건 전부를 아는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전부를 알 수 있나요? 없다고 하죠. 전부를 알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 뿐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아는 나무열매를 먹으면 안된다는 것은 너희는 하느님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 하느님의 모상인 동시에 흙의 먼지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열매를 먹는 날 죽을 것이란 것은, 결국 흙의 먼지처럼 죽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올라서지 말라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부끄러워한다는 건 사랑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

그런데 여자가 뱀의 유혹에 빠져들며 모든 이란 말 빼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말하니 뱀은 "아싸! 걸려들었구나!"하면서 "안 죽어, 하느님처럼 될거야, 그래서 못 먹게 한거야!" 하고 미끼를 툭 던집니다. 그래서 그걸 따서 먹었죠. 혼자만 먹은 게 아니라,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 자기들이 알몸인 걸 알고 무화과 나무로 두렁이를 만들어 가렸다고 합니다. 그들은 원래 알몸이면서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사랑의 관계가 깨졌다는 겁니다. 그것은 올라섰다는 것이고,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그래서 함께 더불어 살기를 포기했다는 겁니다.

너 어디 있느냐?

성경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고발이 있습니다. 그게 잘못한 사람을 벌주려는 고발이 아니라, 너가 지금 어디 있는지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고발입니다. 하느님이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어봅니다. 부끄러워서 숨었다고 하는 걸 보면, '하느님 앞에서도 부끄러워하니, 하느님도 날 짓눌르겠구나!' 죄의 결과가 들어온 겁니다. 하느님이 바라신 건 무엇인가요? 먹지 말라는 걸 먹었는데, 당신처럼 된 게 아니라 뭔가 이상한 기본이고 잘못 된 거 같습니다. 하지 말라는 짓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통회하고 회개하라는 게 하느님의 고발이 가진 참 뜻인데, 안타깝게도 아담은 여자에게 탓을 돌립니다. 그러자 여자는 뱀에게 탓을 돌립니다. 


창세기 3,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고약한 아담

그런데 아담이 고약합니다. 하느님에게까지 탓을 돌립니다. (창세기 3,12 중에서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죄의 밑바탕, 내면에서 관계가 끊어지는 것, 그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알몸이 부끄러운 것도 남녀 관계가 끊어진 것이고, 하느님을 피해 숨은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내가 위로 올라서려고 하니,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이 세가지 관계가 다 깨지는 겁니다. 

죄지은 인간에게 하느님이 원하신 것

그런데 하느님이 다 끝내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벌을 주시면서도 소명을 주십니다. 평생 땀을 흘려서 먹고 살라는 노동의 소명과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줍니다. 그것은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만듭니다. 즉, 창조를 해갑니다. 그리고 여자의 출산도 생명의 창조입니다. 노동과 출산은 창조의 일이 담겨져 있고, 벌같아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창조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자는 소명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고통이 들어갑니다. 이것이 신비롭습니다. 그래서 묵주기도 중 고통의 신비가 있어요. 무엇을 위한 신비입니까? 흙의 먼지로 내려가기 위해서도 고통이 필요하고, 그렇게 내려가야 함께 살 수 있고 원래 창조의 질서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겁니다.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모습이다.

협력이 구원의 역사

그래서 교회가 말하는 노동의 의미에는 육체건 정신이건, 힘든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는 창조를 완성하는데 협력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노동이 숭고한 일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협력이 그래서 구원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으로 넘어가기 전에 딱 두 명(아브라함과 성모님) 얘기할 께요.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라함은 75세 때, 정든 고향을 다 버리고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길을 떠나고 돌아보니, 땅은 주시는 거 같은 데 새끼는 안 주는 거 같아요. 그런데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천막 밖으로 불러내고, 하늘을 보라고 합니다. 별이 있습니다. 네 후손이 저렇게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라고 합니다. 


창세기 15장 5~6절

5 그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정의는 그대로 따르는 것

아브라함이 그러자 "언제요. 빨리 줘봐요!"라고 하지 않고, 그냥 "믿습니다!" 라고 말하고, 그러니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정의라고 합니다. 정의는 하느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따른다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의심하고 의로움이 깨졌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얻은 것은 25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입니다. 길고도 잔인한 세월이지만, 아브라함은 믿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성조가 됩니다. 

성모님의 경우

마리아 성모님은 어떱니까?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천사는 마리아 집으로 들어가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하자, 마리아는 '몹시' 놀랍니다. 천사가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고 얘기를 하죠. 그 때 마리아가 "뭔 헛소리요~?" 합니까? "뭣이여 시방,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데 무슨 애를 배는거야!" 그러나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믿음은 때로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말씀이 진실로 이뤄지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는 데까지 기다리는 걸 말합니다. 믿음은 때로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요구합니다. 우리를 계속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그런데 이 두 인물, 아브라함을 통해 구약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성모 마리아님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통로를 마련한 겁니다.

예수님과 광야, 그리고 이단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도 낫게 하고, 마귀도 쫓아냅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이겨내는 예수님을 보며, 예수님은 하느님이잖아요. 우리같은 사람은 "그렇게 못해욧!"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참 하느님인 동시에 참 인간입니다. 먹고 마실 때는 인간이고 동시에 온존히 하느님이십니다.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의 육체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인성과 신성이 하나인 분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받은 유혹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혹의 핵심은 너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 올라설 수 있다는 것. 그런데 그것을 말씀으로 이겨내십니다.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루카 4,16-30, 마태 13,54-58 ; 마르 6,1-6)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스크린에 보여지는 글, 루카 4,18-19 함께 낭독함)


이것은 희년 선포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취임 연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두루마리를 펼치고 말씀하시는 거죠. 이 일을 예수님은 시작하십니다. 이 말씀이 너희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얘기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와 있다라고 얘기하시죠.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분명히 와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린 그것을 갈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죽은 다음에 갈 곳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재미는 없지만, 마일리지를 쌓는 것처럼, 주일미사 10마일리지, 평일미사 20마일리지, 레지오 30마일리지, 그렇게 쌓는 게 그다지 재미는 없지만 천당에 가야 하니까 포인트 쌓아가듯 신앙생활을 한다는 겁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 13장(1절~13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3장은 '사랑'이란 소제목을 가진 사랑의 찬가인데요. 주욱 말하고 끝에서 뭐라고 하냐면, 1코린 13장 중에서,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지금은 뿌연하다, 어렴풋하다


그러니까 지금은 뿌연합니다. 그런데 내가 개인적 종말이 왔을 때, 맛들이고 갔을 때 그 뿌연함이 하느님 앞에 가면 선명하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어느 프랑스 신학자의 말인데요. '살아있을 때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죽어서 부활은 없다!'는 겁니다. 즉  너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와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맛들여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 비유가 있죠. 밀알의 비유, 내가 흙의 먼지로 밑에 내려갔더니 누군가가 살아나더라. 이게 하느님 나라인가? 이렇게 맛들이면서 순례의 여정을 나아가는 것이죠. 또 한가지 중요한 잣대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31~46절) 중 34~40까지 참고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유일한 기준


하느님 나라를 만나고 차지하는 데 이게 유일한 기준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길거리 찾아다니며 빵 주고, 교도소 찾아다니고 해야 하나? 물론 그래도 좋습니다. 그런데 왜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 나그네, 아픈 사람들, 왜 죄짓고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생길까? 이런 사람들이 안 생기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게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겁니다. 적선 베푸는 것처럼 그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일도 함께 하며 두가지를 함께 할 때 하느님 나라를 만나고 맛들여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작년이죠. 교황님 오셔서 8월 15일 미사 때, 비인간적인 경제모델을 거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에 오시기 전에 교황청의 당부는 교황님의 방한을 이벤트로 여기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황님의 강론 말씀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가난을 만들어내는 이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을 언급하신 겁니다. 


2014년 8월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강론에서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빕니다."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를 ‘1대 99 사회’로 몰아가는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에 대해 이전 교황들과 달리 매우 적극적인 비판을 제기해왔다. 



그리고 오신 날 저녁에 한국 주교님들과 만나서 이런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에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또한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다고) 나자렛 회당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마지막 날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 모두가 심판 받을 때 적용될 “규범”을 알려주십니다. 거기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한국 주교들과 만남. 2014.8.14(목) 서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강당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그래서 이제 사회교리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이것은 1962년부터 65년까지 4년간 열립니다. 이게 언제 열리냐면 그당시 어떤 일이 있었냐면, 요한 23세 교황님이 보편공의회를 열겠다고 했을 때, 이런 반응입니다. "뭐여. 뭔 일 있는겨?" 

그런데 공의회 설명하는 방법 중 이런 게 하나 있어요. 얼마 전 요한바오로 2세와 요한 23세 교황님이 성인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우린 요한 23세를 잘 모릅니다. 성인 품에 오를 때 우리가 아는 것인데, 심사과정에서 기적을 요구합니다. 하나의 기적을 요구합니다. 불치병이 낫다든지 여러가지 형태 기적이 있죠.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는 기적이 있었고 인정되었지만, 요한 23세는 기적없이 성인 품에 오릅니다. 그것은 제2차바티칸 공의회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모르면 우린 중세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편지를 보내죠. 전 세계 주교들에게. 이번 공의회의 논의 주제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현대 세계의 오류에 대한 단죄'라는 답변이 옵니다. 세상은 늘 문제투성이고 교회는 이를 혼내줘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을 향해서 "이건 악이야, 이것은 죄야!, 그리고 교회는 깨끗해." 그렇게 성과 속을 분리하려는 게 교회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걸 보고 다 치워버립니다. 그러면서 교황님은 앞으로 공의회는 사목 공의회가 될  것입니다. 현대 세계에 어떻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달할 것인지 고민하는 공의회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조르나멘토. 적용, 적응입니다. 무엇에 대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을 죄악시하는 게 아니고, 죄가 있는 세상이라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지 연결하자고 한 게 성과였고, 4년동안 열리면서 가톨릭 교회를 완전 뒤집어놓습니다. 

예전에는 미사중에 왜 묵주기도만 했나?

단순한 예가 십자가를 향해서 벾에 붙은 제대에서 신부가 십자가를 향해 바라보며 혼자 떠듭니다. 그것도 라틴어로 합니다. 그럼 신자는 뭐해요? '묵주기도 하는겨'. 그래서 예전 신앙생활 하시는 분 중에 그런 분이 계시죠. 그런 성과와 전반적 지향은 현대 세계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그 중에 그 결과물이 바로 문헌입니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 겁니다. 이것은 그냥 받아들여도 되는 안해도 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성전(聖傳)과 같습니다. 

성경과 성전(거룩한 전승)

개신교는 믿음의 원천을 성경 하나만 봅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성전, 즉 거룩한 전승도 인정합니다. 공의회 회칙도 성전에 포함되고, 우리 믿음의 근원입니다. 여기에 네 개의 헌장이 있습니다. 그 중 네번째가 바로 사목헌장입니다. 오늘날 세계 안에서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그 1장이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즉 세상이 기뻐하는 게 교회가 기뻐하고 세상이 슬퍼하는 일에 교회도 슬퍼하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뭘 할 때, 왜 정교분리 있는데, 왜 그러냐고 하지만, 정교분리는 결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서로 전혀 신경쓰지 말라고 분리시킨 게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는 그런 게 아닌데, 오도되고 이상하게 풀어낸 겁니다.  15분 쉬었다가 다시 하겠습니다.(8시 57분 휴식)

2교시 | 2015.3.4(수) 09:15~ pm


요한 23세 교황님은 안타깝게도 공의회를 마무리하지 못하셨습니다. 연로하신 상태에서 교황이 되셨고, 공의회 개막 다음해(1963년) 선종하십니다. 그것을 이어받은 분이 바오로 6세 교황님이시고, (1963.6.21~1978.8.6, 80세 선종), 그리고 공의회가 끝난 다음에 『간추린 사회교리』를 펴낸 것이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죠. 이것도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산물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교황청의 기구가 있어야 하겠구나,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퍼뜨리는 기구가 있어야 하겠구나 하는 건의가 받아들여지고 교황청 내에 추기경을 의장으로 하고, 대주교가 사무총장이 되는 기구가 설치된 것입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 자 교황청 정의 평화 평의회 | 출판사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출간일2005-10-31 | 판형/면수160*225 /양장/ 614면 | 가격 20,000원 

교황청 정의평화평위회가 2004년에「간추린 사회 교리」를 펴낸 이후 이 교리서는 곧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다.우리말 책은 2005년 출판되었다. 「간추린 사회 교리」는 천주교회가 지난 한 세기 이상 사회 문제에 대하여 신자들에게 체계적으로 제시해 온 가르침의 핵심 부분을 일목요연하게 엮어 놓은 것이다. 이 교리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따라야 할 성찰의 원리와 판단 기준과 행동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의 복음 선교(1968)

바티칸이 현재 구조조정 중이라고 하는데요. 그 안에서 정의평화 평의회가 성(정의평화평의성)으로 될 움직임이 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은 공의회를 마무리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하며 권고를 하나 냅니다. <현대의 복음선교>(1968)입니다. (바오로 6세는 '행동하는 교황'으로 불리웠고, 재임 15년동안 다른 종교와의 해묵은 갈등을 치유하는 데에도 앞장선 바 있다. 또한 많은 회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은 재작년(2013)에 발표한 것인데, 이것이 다뤘던 주제와 똑같은 주제로 발표되었던 회칙이 바로 <현대의 복음 선교>(1968)였습니다.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권고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이었고, 이미 그 이전에 복음화와 관련된 권고문을 주신 분이 바오로 6세이십니다. 

바오로 6세의<현대의 복음선교> 제 1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장은 책의 제 2부 첫 장입니다. 제2부 복음화란 무엇인가에서 첫 장인 17장은 소제목이 있는 데, <복음화 활동의 복잡성>이라고 되어 있고 본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 선교한다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그 사람이 성사를 받게 해주면 '복음화 끝, 선교 끝'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한 축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란 게 그 내용입니다. 복음 선교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파악하면 그르칠 위험이 있다. 다만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에게 세례를 받게 하는 것과 함께 바로 선교는 인류 발전, 인류 해방 이것과 연관이 있다. 세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① 인간적 측면이 있습니다. 복음화되어야 할 대상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구체적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24시간 동안 성당에서 기도하고 먹고 마시기만 하나요? 아니죠. 기도도 하지만, 미사를 보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죠. 그래서 사람이 복음화되어야 하는 것은 종교적, 정신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인간이 많은 일들을 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이고, 인간을 축소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다양한 인간들을 축소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화 활동의 복잡성>

17.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서 각별히 유의하여야 할 요소와 국면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떠한 것들은 매우 중요하여 단순히 그것들만 복음화 활동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성사와 다른 성사들을 베푸는 것을 복음화라고 규정하려 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화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역동적인 참모습을 부분적으로나 단편적으로 규정하려 하는 것은 복음화의 의미를 빈약하게 하고 나아가 왜곡할 위험이 있습니다. 복음화의 모든 본질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복음화의 개념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지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특히 강조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도 자주 연구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기쁘게도, 이러한 요소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 특히 '교회 헌장'과 '사목 헌장', 그리고 '선교 교령'의 방향과 일치합니다. (17장 끝)



2015년 3월 4일(수) 오후 9시 15분경 2교시가 막 시작된 하기동 성당 2층 성전 모습


사람이 복음화되어야 하는 것은 종교적, 정신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인간이 많은 일들을 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이고, 인간을 축소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② 신학적 측면입니다. 창조계획을 회복시킨다는 것은 부정과 싸우고 정의를 다시 세우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불의와 싸우고 정의를 만드는 것이 창조를 완성시킨다는 것, 그것이 신학적 측면입니다. 그리고 복음적 측면에서 사람들이 고생하고 고통받는 데, 그런 고통의 실제 현장에서, 혹은 전쟁터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복음적 측면은 '애덕'이고 사랑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힘들고 고통받는지, 현재 고통에 처한 어떤 인간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31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음화에서는 현대 세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의, 해방, 개발, 평화와 같은 여러 문제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있거나 무시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고통과 궁핍 가운데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제 31항은 제3부 복음화의 내용 중 하나로, 소제목은 <인간 발전과 필연적인 관계>)


<인간 발전과 필연적인 관계>

31. 복음화와 인간발전 - 개발과 해방 -, 이 둘은 실제로 밀접히 관련됩니다. 인간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문제에 종속된 존재이기 때문에 복음화와 인간발전은 인간적 질서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화와 인간 발전은 신학적 질서의 관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창조 계획과 구원 계획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 계획은 불의를 물리치고 정의를 회복하여야 할 매우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됩니다. 복음화와 인간 발전은 또한 사랑의 관계인 복음적 질서의 관계도 포함합니다. 정의와 평화 안에서 참되고 진정한 인간 발전을 증진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랑의 새 계명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복음화에서는 현대 세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의, 해방, 개발, 평화와 같은 여러 문제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있거나 무시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고통과 궁핍 가운데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행히도 지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는 열의와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이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나자렛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성취하신 대로, 또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해방의 중요성과 그 깊은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31장 끝)



이것이 몇 몇 교황님들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성전은 거룩한 전통, 주욱 흘러내려온 흐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난을 더욱 강조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전 교황님들은 그것을 안 했느냐하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 성직자들보다 평신도들에게 더 중요한 게 사회교리입니다. 어쩌면 평신도들이 세상의 창조를 회복시키는 구체적 현장에서 노동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정치가 썪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계속 혼탁해지기 때문입니다." 라고 얘기하시죠. 


사랑을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정치가 혼탁하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계속 혼탁하게 될 것입니다. (2013.6.7일 예수회 운영학교 학생들 만남에서도 언급) 그리스도인들도 너무나 쉽게 세속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십자가를 지고 겸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진정한 승진이며 이를 통해 예수를 닮게 됩니다.

행정 업무에 치중하거나 소수 사람만을 상대하는 교회는 결국 병에 걸릴 것입니다. 양떼를 찾아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고립을 자처하는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교회가 폐쇄적이면 부패하게 됩니다. 폐쇄적인 교회는 일년 동안 문을 닫아 놓은 방과 같습니다. 누군가 그 문을 열었을 때 악취가 풍길 것입니다. 수백 만명의 어린아이들이 매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데도 차를 마시며 고상하게 신학을 논하는 신자들이 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현재의 경제 위기는 경제문제가 아니라 사람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가치의 문제입니다.
프란치스코교황 2013년 5월18일 성령강림대축일 전야미사 강론 중 일부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정교분리의 원칙'에 대해서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어느누구도 더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 일에 대해서 영혼 구원에만 힘쓰는 것은 아니란 걸 확인해주신 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바라는 교회상은 이런 것입니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
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바라는 교회상, 복음의 기쁨 49항 중 일부)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처럼 되었다고 바오로 사도가 말합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죄많고 억눌린 사람들과 당신은 하나가 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늘 저 위에서 팔짱 끼고 위에서 자기 안위만 지키며 바라보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똑같이 이땅에 와서 살고 깨지고 상처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시죠.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자기 스승이고 모범이신 예수님이 했던 방식을 따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곳입니다. 그게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표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탈리아에서 일반 알현 때 하신 동영상을 하나 보여드립니다.
(영상시청.. 교황 알현 현장에서 한 교사가 사회정치 현안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는 의무

(동영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이 참여하는 걸 교황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의무라고 교황님은 말하십니다. 정치는 공동선, 네번째 사회교리 시간에 공동선에 대해 김용태 신부님이 말씀하실 것인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꿈과 이상을 완성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조건들, 그것을 이루어내는 사랑의 고결한 형태라고 얘기합니다. 정치가 제대로 되어야지 그 공동선을 잘 만들어내고, 바로 그것이 사랑의 고결한 형태이기에 정치는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는 의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번 교황님 오셨을 때도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2014-8-14)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교회의 풍요한 유산인 사회 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 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야 합니다."라고 주교님들에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사회교리의 간단한 역사를 말씀드릴텐데하기동 성당의 수료미사에서는 김종수 주교님이 강론을 하실 것인데요. 주교님이 꼭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첫번째 사회교리 회칙이 뭡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태> 이거 외우셔야 합니다. 이거 자주 물어보십니다. 

왜 새로운 사태인가?

1891년 교황 레오 13세는 <새로운 사태>라는 사회교리 회칙을 발표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과연 교회가 사회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가? 그것이 아닙니다. 산업혁명과 근 현대로 넘어오면서 세상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농업과 목축, 간단한 가내수공업을 통한 물물교환이나 거래 등의 수준이었죠.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라는 게 등장하고 시장이 형성되면서 이 사회가 그 전에는 <윤리신학>이란 분야에서 다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윤리신학이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이전 윤리신학에서 식별하던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러한 현상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교회의 가르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보면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이란 책을 1776년에 냅니다. 본래 명칭은 국가의 부 <국부의 기원과 성질에 대한 연구>가 원 제목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어떻게 하면 나라가 부유해 질 수 있는가? 입니다. 그전에는 금이나 은을 많이 가진 것이 나라의 부유함이었는데, 그걸 깹니다.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1790)

출생 1723년 06월 05일 스코틀랜드 커콜디

사망 1790년 07월 17일 (67세) 국적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애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아담스미스는 많은 시민이나 개인들이 자신의 재산이나 부를 넉넉히 갖고 있어야 하고, 그럴려면 시장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시장에서의 인간, 즉 시장형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빵을 만드는 경우를 보았을 때, 빵을 파는 사람은 그냥 좋아서 내놓는 게 아니고, 더 비싸게 받을고 할 것이고, 더 싸게 사려고 하면서 가격에 의해서 조정이 되면서, 합리적 가격으로 물건들을 사게 되면, 그러면 시민들 부유해지고, 국민들 부유해지고, 그러면 나라가 부유해진다는 게 간단히 <국부론>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수요와 공급이 만나서 정해지는 이 '가격'을 정하는 것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말합니다.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1818~1883)

(독일어: Karl Heinrich Marx, 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인란트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맑스, 막스, 칼 마르크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나,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표기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아담스 vs. 마르크스


그렇게 자본주의가 인류 역사 안에 경제시스템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1848년에 아담 스미스에 대적할만한 인물, 이른바 우리나라에서는 빨갱이에 해당하는 마르크스, 위대한 철학자이며 경제학자이기도 한 데요. 마르크스가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까 자본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과는 다르게 세상이 움직히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보이지 않는 손으로 형성된 가격에 사고 팔면 모든 이가 좋고 풍요로울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더라!' '독점과 과점의 형태가 보이더라!'하는 것이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10개의 공장이 신발을 만든다고 가정하면, 더 있는 놈(대형 신발공장)이 가격을 다운시켜서, 값싼 신발을 내놓고, 그 다음 주위 신발공장을 죽이고 망하게 하면서 과점을 하고 심지어 독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격을 올려서 폭리를 취하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아담 스미스가 얘기한 것처럼만 움직이지는 않았고, 그리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한 것 중에도 오늘날까지 유효한 것들이 바로 이 독점과 과점의 형태입니다. 우리나라 통신, 정유, 유통 등은 과점의 형태이고, 소비자들이 합리적 가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점의 형태에서 우린 울며 겨자먹기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합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경제공황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게 2008년의 경제위기나 계속해서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고 있는 겁니다. 


비참한 노동자

그러한 것들을 비판하며 보니까 마르크스는 노동수익 중에 남는 수익, 그것이 잉여가치이고, 그것이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많은 몫들이 있는데, 이것을 자본가들이 다 가져가더라. 그래서 1848년에 '노동자들이여 일어나라 단결하라.'라고 하면서 공산당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마르크스의 말이 먹혔던 것일까요? 우리가 현재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했다고 보는 나라는 영국과 미국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대에서도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었죠. 그런데 공급이 많아지니까 값어치가 떨어지고, (일하고 싶은 데) 일을 할 수가 없는 사람들도 많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태들이 아주 취약한 것입니다. 그냥 넓은 공간에 난로 하나 놓고 바닥에 남자와 여자가 뒤섞여서 누워있고, 주된 수입은 도둑질과 매춘이었다는 보고서들이 올라가는 겁니다. 그리고 약한 사람들, 남자들은 임금을 깍으면 저항을 하니까 누구를 선택하게 되죠? 바로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이나 아동에 대한 착취가 생기는 겁니다. 때로는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어떨때는 아침 9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24시간을 일했다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1700년대, 1800년대 산업화 과정의 영국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19세기 글래스고 지역에 대한 영국 정부의 보고서(강의스크린)에는 산업혁명을 통한 기계와 인간의 전도현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 글은 강의 당시 스크린에서 보여준 내용과 비슷한 것이고, 출처는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이다.

19세기 중엽의 영국은 전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도시에 살았다. 그런데 그 도시라는 것은 도무지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하늘은 시커먼 매연으로 뒤덮여 있었고, 뒷골목에는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넘쳐 흘렀다. 식수를 공급하거나 쓰레기를 수거하는 등의 공공서비스는 급속한 도시 인구의 팽창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물과 공기는 오염되어 콜레라와 장티푸스, 호흡기 질환이 주기적으로 밀어닥쳤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를 증진시켰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문명화된 야만의 상태'에 집어 던졌다. 글래스고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영국 정보의 한 보고서는 글래스고의 한 노동자 주거지역의 실상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1만 5천~3만 명이 사는 그 지역은 좁다란 길과 네모꼴의 구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구획 사이에 쓰레기 더미가 있었다. 이곳은 겉보기에도 무척 역겨웠지만, 그 내부의 불결함과 비참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밤에 합숙소를 찾아가니 마룻바닥에 사람들이 빽빽이 누워있었다. 보통 열다섯 내지 스무 명의 남녀가 옷을 입기도 하고 벗기도 한 채 뒤엉켜 누워 있었다. 가구라고는 전혀 없었고, 사람 사는 곳임을 알려주는 것은 벽난로의 불꽃 뿐이었다. 이런 사람들의 주된 수입원은 도둑질과 매춘이었다. 


새로운 기계의 발명은 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재앙이었다. 새로운 기계들은 노동자들을 단순한 부속물로 전락시켜 극히 간단하고 규격화된 작업만을 강요했다. 그리고 고용주들은 다루기 힘든 남자들 대신 여성과 어린이를 싼 값에 고용했다. 여성과 아이들은 최악의 근로조건에서 일하면서도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특히 어린이들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당시 영국 정부는 '빈민 구제법'에 의해 빈민 자녀를 수용하였는데, 자본가들은 이 어린이들을 "선도하고 열심히 일하는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정부로부터 넘겨받았다. 그러나 이 어린이들이 빈민구제라는 훌륭한 명분 아래 받은 '혜택'은 하루 14시간 이상의 긴 노동과 20분간의 짧은 식사 시간이었다. 기계장치에 휘말려 손발이 잘리고 관리자들에게 '심심풀이'로 린치를 당해 불구가 된 어린이들의 이야기는 당시로서는 그리 희귀한 것이 아니었다. 



여성과 아동 착취

또한 여성과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에 대해서는 <1833년 영국 의회에 제출된 아동 고용에 대한 보고서>에서 그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열한 살짜리 소년 토마스 클라크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졸 때는 그들이 가죽끈으로 때렸습니다... 나는 6시 조금 못되어서, 때로는 5시에 공장에 나가 밤 9시까지 계속 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룻밤을 꼬박 일했으며...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했습니다. 돈을 벌고 싶었으니까요. 그저께는 아침 6시부터 ... 다음날 밤 9시까지 계속해서 일했고... 나는 지금 밧줄공장에서 일합니다... 내 동생이 나를 돕고 있습니다. 그 애는 꼭 일곱 살입니다. 나는 그 애한테 아무것도 안 주는데... 만약 내 동생이 아니라면 일 주일에 1실링씩 줘야 합니다...나는 아침 6시에 그 애를 데려가서 밤 8시까지 데리고 있습니다.



왜 공산당에게 달려갔나?

그런데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하니 우리 편에서 이야기해주는가 공감하며 많은 노동자들이 그 쪽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시절에 사실상 많은 풍요가 있는데, 부익부와 빈익빈이 심화되면서, 그것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1700년대와 1800년대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하니까 이것은 사회주의 이론은 교회가 보기에 위험했던 것입니다. 유물사상으로 물질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것이니, 그것은 교회의 가르침과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제 여태까지 윤리신학이 해결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겠구나 해서 1891년 레오 13세가 첫번째 사회교리 회칙인 <새로운 사태>를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공산당은 교회 가르침과 다르다

그러면 교황님이 이걸 혼자 발표하고 끝낸 게 아닙니다. 그 이후로 교회는 전통으로 현대 세계에 대한 교회의 회칙을 반포하게 됩니다. 그래서 레오 13부터, 비오 11세,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2세 등 100년이 넘는 사회교리 문헌들이 정치, 경제, 노동자, 전쟁, 평화,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아래 대표적인 회칙에 나오는 내용들이 그런 것입니다.

1. 새로운 사태(교황 레오13세의 회칙, 1891)
2. 사십 주년(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1931)  
3. 어머니요 스승(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1961)
4. 지상의 평화(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1963)  
5. 사목헌장(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1965)  
6. 민족들의 발전(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1967) 
7. 노동하는 인간(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1981) 
8. 사회적 관심(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1987) 
9. 백 주년(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1991)  

간추린 사회교리가 나온 까닭

그래서 이것을 100년이 지난 다음에 여러분에게 나눠준 <간추린 사회교리>는 시대마다 중요한 것들을 맞같게 발표한 것인데, 100년이 지났으니, 100년(새로운 사태 백주년, 1991)을 정리한 게 교재로 제공한 <간추린 사회교리> 책입니다. 간추렸는데 400페이지입니다. 그만큼 방대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기때문입니다. 사회교리가 그렇다면 교황님들의 가르침들로만 이루어졌나? 그건 아닙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도 이 내용이 남겨져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크게 네편입니다. 이것은 교황청에서 발간한 것이고, 가톨릭 신자라면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들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구성

저는 신학교 때 나와서 낱권으로 가지고 있는 것인데요. 지금은 한 권으로 묶여져 나옵니다. 그 중에서 제 1편은 무엇입니까? 1편은 신앙고백입니다. 내용은 뭐냐면, 사도신경을  풀어놓은 것이고, 그것이 400페이지입니다. 우리가 뭘 믿고 있는가? 사도신경은 그냥 우리 신앙을 아주 엑기스로 비문처럼 짧게 묶어놓은 기도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 입니다. 

2편은 성사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오늘날 기념하는가? 즉 제2편의 제목은 <그리스도 신비의 기념>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곱가지 성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3편이 믿고 기념하는 데 어떻게 사는가?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제목이고, 4편이 믿고 사는데 힘떨어져!, 그래서 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죠? 기도해야죠.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기도>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3편은 2개 부분(제1부와 제2부)로 나눠져 있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제2부)입니다. 그리고 그 앞부분인 제1부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존엄성(제1장), 인류공동체(제2장), 하느님의 구원: 법과 은총(제3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겁니다. 거기에 (제2장에) 인간과 사회, 사회생활 참여, 사회 정의 등 사회 교리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서 안에 있는데 그동안 안 가르친 겁니다.

왜 사회교리주간을 만들었나

그런데 다행히 2011년부터 한국주교회의에서 사회교리를 이상하게 받아들이거나, 신자들이 모르고 있다고 여겨서 대림 2주일부터 2주간을 사회교리 주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가톨릭교회 교리서, 그리고 교황님의 여태까지 가르침 등이 사회교리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11년 12월 4일 인권주일을 맞이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이용훈 주교는 제30회 인권주일 담화문이며, <'사회교리 주간' 제정에 즈음하여>라는 부제와 <정의와 사랑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소명>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오늘날 교황님께서도 많이 얘기하시는 것으로, 우상은 무엇일까? '돈'이 나오죠. 돈이 맞습니다. 돈이 오늘날 굉장히 큰 우상이지만, 그 이전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제 주장인데요. 내가 만든 하느님을 믿는 겁니다. '하느님은 이래주셔야 해. 하느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고, 내가 듣기 좋은 말을 들어주셔야 해' 하면서 내가 하느님을 만들고, 내가 만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뭘로 발전하냐면, 교회는 내가 만든 교회를 다니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얘기를 교회는 해줘야 하고, 내 바램을 들어줘야 하고, 그래서 교회에서 다른 얘기를 하면, "왜 교회에서 그런 얘기, 불편한 얘기를 왜 하십니까?"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무서운 우상입니다. 


"내 이름은 야훼. 있는자 그대로이다."

신앙은 하느님 뜻에 의해 우리가 변화되는 것이지, 내 뜻과 내 바람대로 하느님이 움직여주시고 변화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더 무서운 우상입니다. 하느님을 내가 조종하고 하라는 대로 하느님이 움직여주시길 바라는 마음. 바로 이 때 의로움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말씀에 흔들리지 않고 믿으면서 따라가는 것, 그것이 기본입니다. 이것이 안되면 그 믿음의 자리에 다른 녀석이 들어와서 나를 흔들어댑니다. 그것이 우상이고, 먼저 그래서 내가 만든 하느님, 내가 원하는 듣고 싶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믿는가? 아니면 성경에 있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신, 즉 모세에게 하느님은 "내 이름은 야훼. 있는자 그대로이다."

난 누굴 믿고 있나

있는 자 그대로의 하느님을 진정 믿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부분만 해주는 하느님을 믿는지 늘 신앙생활하며 계속 물어봐야 합니다. 뭔가 하느님의 말씀이 내게 감동과 평화를 주기도 하지만, 때로 예수님은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미없는 분열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삶을 막아버리는 것들과 사람들을 정화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부분을 신앙생활 가운데 늘 곱씹어보시길 바랍니다. 과연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인가? 이것은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월 가를 점거하라(영어: Occupy Wall Street, OWS)

2011년 미국 뉴욕 주 뉴욕 월 가에서 진행되었던 시위이다. 2011년 9월 17일 미국 사회의 경제 불안과 부조리에 항의하는 "고학력 저임금 세대" 30여명이 월가에서 처음 시위를 벌였다. 구호는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이들은 미국을 경제위기에 빠뜨리고서도 수백만 달러의 퇴직금을 챙겨 떠나는 월가 최고경영자들에게 분노했던 것이다. 뉴욕은 세계 최대 강대국 미국의 경제수도이며, 월 스트리트는 그 뉴욕의 경제중심거리이다. 사실상 지구상의 경제수도의 핵심 경제중심가에서 발발한 시위이다. 미국의 가을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사람들은 아랍의 봄(2011년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촉발됨)과 5월에 시작된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과 비교하기도 한다. 당시 월가 시위를 모델로 다른 도시에서도 점령시위가 확산되었는데, 보스턴, 워싱턴,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등 다른 대도시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으며, 미국을 넘어 세계 각지로 확산되어 2011년 10월 15일 캐나다의 증권거래소 앞에서도 같은 시위가 열렸으며,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 여의도, 서울역 등지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출처. 위키피디아)

황금송아지와 월스트리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날 가장 큰 우상은 '돈'입니다. 세계금융무역의 중심지인 뉴욕의 월 스트리트의 금송아지 조각이 있죠. 그것은 성경에 나옵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온 신을 보여달라고 하니까, 아론이 금붙이 줘 봐! 아론의 표현대로라면 '불에다 쑤욱 넣었더니 쑤욱 나왔다'고 해요. 성경에서 송아지는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그것도 금송아지입니다. 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만들었을까? 이 사람들은 과거 이집트에서 파라오와 이집트 문명을 보았습니다. "와! 우리가 저런 나라를 꿈꿔야 겠다. 거기서 종살이를 했지만 저기가 센 거야. 저 황금덩어리!"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 가보면 어마어마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걸 본 거에요. 

그런데 모세에게 십계명을 준 하느님은 나는 너희를 종살이하던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이다. 그런데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이 되려고 하니, 다른 사람과 같이 살려고 하지 않고, 억누르려는 그 곳에서 신음하며 종살이를 했는데, 그걸 듣고 모세를 통해 끌어왔는데, 어떻게 너희들이 그걸 추구하려고 하냐? 그래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려다 말고 화를 내죠. '이 백성은 참으로 뻣뻣한 백성이다.' 그래서 모세가 내려외서 십계명을 깨고 다시 계약을 맺을 준비를 합니다.

어쩌면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알 신이라든지, 이방의 신들은 풍요를 낳게 하는 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유다가 왜 망했는가? 그 풍요로움을 주는 우상들을 섬기다가 망하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된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또 와서 보니까, 이번 주 복음입니다, 성전에서 그 짓거리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아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문제다

돈이란 오늘날의 우상만은 아닌 겁니다. 옛날에도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왜 가지려고 하는가? 남들 위에 올라서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돈이란 건 얼마전 교황님이 말씀하시길 "돈은, 사탄의, 악마의 부산물이다." 돈의 우상화를 경계하시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떨어트려 놓아야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계속 말씀하고 계시고,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비극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한국 현대사의 큰 아픔들

오늘날에도 이 돈으로 인해서 그리고 다른 권력 등을 통해 우상화를 하면서 빚어지는 아픔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대표적 일이고, 제주도 해군기지, 동북아 평화의 문제, 비정규직 노동문제, 환경 문제인 4대강이나 핵발전소, 이걸 막기 위한 언론과 방송, 여러가지 역사문제, 이런 것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아프게 갖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들을 이제는 여태까지 설명드린 것은 바로 이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기도만 열심히 하고 나만 착하게 살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떠올려 보면, 사제와 레위인은 부정 탈까봐 초주검이 되어있는 저 사람을 피해 갑니다. 그런데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마리아인은 끌어안고 치료해주고 여관에 데려가고 돈까지 주고 갑니다. 이 질문은 무엇을 뜻합니까?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가 계명에 대해서 잘 설명을 합니다. 한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게 율법과 계명의 정신이다 등등 설명하고 잘난척하다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자, 그러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면서, 끝부분에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고통받고 울부짖고 아픈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넘겨버리는 것은 굉장히 우리 신앙에 위험을 주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처음에 로마 밖으로 가서 하신 미사입니다. 람페두사란 곳이고, 이탈리아 최남단 섬인 람페두사에서 첫 바깥 미사를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난민으로 유럽대륙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배에 타고, 바다에 빠져죽고 도착해서는 수용소에 갇힙니다. 그런 아픔이 있는 곳이 람페두사 섬인데, 거기서 드린 미사입니다.

교황님의 호소를 우리가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는 능력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는 능력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기억하게 하고, 그 관심으로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보기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해준 것이 내게 해준 것이란 말씀을 삶의 중요한 가치임을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인간이 무엇인지 사회교리가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흙의 먼지이면서 동시에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첫 사회교리 책이 <새로운 사태>라는 것도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2015년 3월 4일(수) 밤 10시 06분 강의종료
위 강의노트는 필자의 기억과 기록에 따른 것이기에 다소 부정확할 수 있으며 
강의내용과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