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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20150311] 김유정 신부의 사회교리의 신앙적 토대 (사회교리 2강)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5.

2015년 3월 11일 | 사회교리2강 | 사회교리의 신앙적 토대 | 대전가톨릭대학교 김유정 신부님

 

이것은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13 사회교리학교의 두번째 강의 내용이고, 유성구 하기동성당에서 매수 수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열리는  10주간 과정이다다음은 신부님 강의를 기록하고 정리한 것이기에실제 강의내용이나 맥락과는 차이가 있을  있다.



사회교리의 신앙적 토대

대전가톨릭대학교 김유정 신부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총무

 

예수님께서 우릴 아주 많이 형제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신 성경 구절이 많습니다. 어디 있을까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시는 구절이 있죠. (마태 12,48. 마르코 3,33)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코 3,35)


요한복음 20 17절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요한 20,17 중)


그리고 히브리서 2장 11절부터 12절을 보면요. 같이 읽어보실까요?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분명 여기서도 형제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런데 2 12 말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2장 17절 다시 같이 읽어보시죠.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히브리 2,17 ㄱ)

 

그리고 로마서 8장 29절.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들 말고도 굉장히 많습니다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까요? 아니면 없을까요? (...)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것과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차이가 없다. 그래서 우린 한 형제다. 

 

그런데 마태오복음 5장부터 7장까지를 산상설교, 진복팔단으로 시작하는 산상설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태 5,48끝)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참 어려운 말씀인데그런  앞에 붙어있는 말들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 숨어계신 너의 아버지. 그래서 숨어서, 골방에서 기도를 해라. 그러면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 6,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산상설교는 아무나 지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산상설교의 말씀은 아무나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딸이  사람만 지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아들로서 사신 체험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란 구절이 얼마나 나오는지 나중에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산상설교 한 가운데에, 마태오 복음 6장에 <주님의 기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 모든 말씀에 대한 집약입니다. 어떻게 시작합니까?

 

주님의 기도는 집약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우리'의 대표는 누구일까요? 우리의 대표자는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볼 때, 주례의 집전자는 신부이지만, 미사의 참된 집전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치는 제사에 우리가 참여하는 겁니다. 주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대표해 바치는 기도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시편 22편이 중요하다


아까 하브리서 2장 12절의 말씀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왜 이 말씀이 중요한가? 이것은 시편 2223절을 인용(똑같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22편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바치신 것입니다. 


(시편 22편 2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  


시편 22편이 이렇게 시작을 하는 데, 23절에서 저 말씀이 있거든요.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이 말씀을 바치시면서, 그리고 그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로 저 말씀을 꼽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바치진 말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돌아가시면서까지 전하려고 했던 말씀은 뭔가? 예수님께서 형제들에게 아버지 이름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엄청난 사실


사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고대 시대 당시에는 독재자들이나 통치자들, 그리고 황제들 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신의 아들하늘의 아들스스로를 그렇게 불렀습니다중국의 황제는 천자로마의 황제는 신의 아들이집트의 람세스는 태양의 아들. 이런 뜻이죠. 그래서 '내가 잘못 다스리더라도, 너희와 나는 격이 다르니까, 복종해야 한다.'  통치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너희는 나에게 복종해라'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인데,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 딸이다. 그러니까 다함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자!'


이것은 예수님의 엄청난 초대입니다. 그럴 자격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당신만 바치시고 부르실  있었던 칭호에 우리를 초대한 겁니다. 그래서 함께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교리적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인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초대 교회 시절의 엄격한 전례


그래서 예전에는 예비자 분들이 앞에 나오셔서 예비자 석에 따로 앉으셔서 미사를 봉헌하고는 했는데, 초대 교회 당시에는 말씀의 전례 끝나면 가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의 전례를 모실 수가 없었던 것이었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이제 세례 받기 직전 전단계까지 오면, 성찬례 전례에 참여하는 데, '주님의 기도' 전에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주님의 기도'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칭호인가? 그런데 우리는 립서비스, 입술봉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8절에 나옵니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마태 1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코 7,6)

 

이 구절을 보면, '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 이라고 해서, 이사야서 말씀 인용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우리는 미사를 드릴 때나 기도를 드릴 때 입술봉사를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줄줄줄...' ... 제가 부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사도들이 신경써서 만든 사도신경


본당 신부님이 주일미사 강론 끝나고  하시죠사도신경사도들이 신경써서 만들어서 사도신경이죠아니죠. 사도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우리의 믿음!. 어떻게 시작하나요? '천주 성부~' 그런데 신부님께서 그만 실수로, '전능하신 천주와~' 하셨는데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형제들께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 제 탓이요, 제 탓이요... " 절반 이상이, OOO 본당이었고, 주일미사에 800여명 하셨는데, 400명 이상이... 절반이 ... 그런 일이 있었고요. 어떤 본당에서는 주임신부님이 초등부 캠프 월화수, 중고등부 캠프 수목금 연달아서 캠프를 하시고 금요일에 오셨는데, 잠을 못 주무신 겁니다. 그래서 미몽사몽 중에 하시는 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강복하시고 ... 아멘,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러자 주송하시는 분이 "파견성가는 OOO번입니다." 그래서 파견까지 다 하셨던 거에요. 그런데 하시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거였어요. 왜 빨리 끝났지?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


어쩌면 우리가 입술봉사를 많이 하고 있는  아닌가? 정말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정말 아버지라고 믿는가성당에 오면 서로 뭐라고 부르죠? 형제님자매님, 왜 그렇게 불러요? 아버지가 같으니까. 아버지가 같으니까. 우리 신앙의 핵심은 그것입니다. 우린 하느님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그래서 형제이고 자매인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아버지는 신자가 아니셨습니다. 전 외 아들이었고여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대를 잇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셔서집도 나가라고 주먹으로 바닥을  치면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렇게 안돼!, 오늘부터 부자의 연을 끊는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얘기를 다 하시더라고요. ' 나가라. 그리고 앞으로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그래서 한동안 못 불렀습니다. 그래서 홍길동전도 생각나고한동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그리고 8 뒤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제가 신부될 때는 신자가 되셨어요. 제가 3년간 외국국 유학을 가기 전에 40 피정을 하면서, 과거의 제 아픈 것을 많이 돌이키면서 보니까, 제가 제 아픈 부분을 잘 다루어 왔다고 보았는데 그렇지 않은 걸 발견했습니다. 사실 피정이란 하느님 안에서 굉장히 기쁘고, 평화로운 시간이 있지만복음말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 가셔서 40일간 유혹을 받으셨다고 나옵니다. 


광야의 유혹


(마태 4,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마르코 1,12~13) 12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루카 4,1~2) 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루카복음에 보면,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 유혹을 받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순시기를 맞이해서 더 열심히 사려고 하면 할 수록 그걸 방해하는 유혹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사실 평상시와 같을지 몰라도 내가  민감하게 느끼는 겁니다. 고해성사 받고 나면 꼭 날 화가 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 시비를 걸고, 오늘부터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데, 왜 그러냐면, 내가 죄를  지으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죄의 길로 안 가려고 하는구나!'라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나 알아차린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고 그냥 휩쓸려 가면 유혹에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40 피정을 하면서 여러가지 유혹들을 만났는데, 가장  유혹은 제 사제성소에 대한 의심이었습니다. 제가 신부가 된 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이었나? 왜냐면 7년간 아버지가 예비자 교리를 받겠다고 결심할 때까지 그 삶을 돌아보면 너무 엄청났던 것입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시고, 그래서 아버지는 힘들어하셨고, 덩달아서 어머님도 힘들어하셨고, 저도 힘들고방학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많은 상처의 원인이 바로 그날, 신학교에 가겠다고  날, 부자간 주고받아서는 안되는 말을 너무 많이 주고 받았고, 저도 대들고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수많은 일들이, '하느님께서 부르셨다면 이렇게 힘들었을까?' 혹시 착각해서 신학교 가서 신부되고 사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유혹인 것은 사제가 된다는 것은 그것을 공적으로 서품식 때 확인을 받는 자리가 되는 것인데, 그게 성소인데, 막상 유혹에 들어서면 그것도 다 의심스러웠던 겁니다. 그래서 정말 하느님의 뜻이었을까정말 하느님께서 부르시고뜻이 맞다면 아들이라고 불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하느님도 아버지고 제가 실망시켜드리면, 하느님이 성에  차면 아버지라고 안하려고 아들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종일 기도를 해도 아무 느낌 없고, 두시간 기도하고, 성경 한 구절, 8시간 기도하고 성경 두 구절 읽었는데, 읽는 말씀마다  닿지 않았어요. 그래서 괜히 했구나. 제가 하느님을 시험하는 거죠. 그래서  포기하고그날 잠자기  두시간  기도하고성경말씀, 제가 고르는 게 아니고 주어지는 것인데   저에게 주어진 말씀이 거룩한 변모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를 데리고, 높은 곳에 오르셨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하늘에서 구름이 일더니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마태오 17:5 중,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래서 펑펑 울었습니다아들이라고 불러달라고만 했는데내가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물론 이 말씀은 하느님 아버님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지만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형제들에게 아버지를 전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루카복음 15장을 보면, 작은 이들이 잘못하고 돌아왔을 때, 뉘우치는  낱낱이 듣고 용서하는  아니라 작은 아들을 보고 바로 달려가시는 아버지먼저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 그게 바로 하느님 아버지라는 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우리 모두가 사랑받는 아들딸,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 딸, 불리움을 받았음을 에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어찌되었든 그 당시는 울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런 상황을 말씀드렸다가, 혼난 경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응답까지 의심하면 어떡하느냐고 수녀님께 혼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말씀을 가장 마음 깊숙한 곳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사랑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나?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안동할머니부터 여기까지가  세트입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제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걸 원하시는 구나 얘길 전하기를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마음에 드는 . 그리고  말씀을 달리 번역하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로 인해 기쁘다는 이 말씀인데, 우리가 믿지 못하기때문에, 나는 아직도 부족해, 사랑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잘못 생각한 거죠.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사랑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계시고, 나로 인해서, 내가  일로 기뻐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드실 때도 있지만, 여전히 나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여전히 하느님의 기쁨이 되는 그래서 나를 향해 달려 나오시는 그 아버지시라는  예수님께서 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꼭 전해드리는 게 저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으시기 바랍니다. 천천히 들이 마실 때, 코와 윗입술 사이가 시원해지고, 또 내쉴 때 따뜻해집니다. 이 시원함과 따뜻함을 느끼면서, 창세기에 보면, ...


창세기 2,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하느님의 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성령을 받아라.


요한 20,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미사 성찬기도 감사 기도 중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물고기가 물을   없는 이유는  속에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까닭은 하느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겨 살아가기 때문입니다하느님 어디 계시냐고 멀리서 찾을 , 내가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있다. 이보다 가까이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심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자 이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쉬면서,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아들 딸, 둘 중 하나를 하시고, 호흡의 리듬에 맞춰서 열 번 해보겠습니다. ... 느낌이 어떠십니까? 느낌 좋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이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라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다만 내가 하느님께 내 마음을 드리고 있다는 것과 말씀을 되풀이하면서, 내 마음을 말씀 안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옆 사람을 보라


이번에는 옆의 분을 한번 보시겠어요. 누구죠? 딸이고 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함부로 대하면 안됩니다. 함부로 대하면 이 분의 아버지가... 아버지가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지죠? 저 사람 아버지가 장관이야! 그렇죠? 저 사람 아버지가 하느님이야! 그러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겠죠? 내 남편이 아니고 하느님 아들이고, 내 자식이 아니고, 하느님의 자식이다. 내 부인이 아니고 하느님 딸이다. 이 말씀을 어느 본당에서 드렸더니, 어느 자매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내가 하느님의 딸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우리 신랑이 하느님 아들인 줄은 오늘 처음 알았어요!" 이러면 안되는 거에요. 내가 하느님의 아들 딸이고, 내가 함께 사는 사람도 그렇다는 것. 그런데 이것이 점점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내가 얼마나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가를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세상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가에 달려있다고 하셨어요. 이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진 분이 계십니다. 


이태석과 황일광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에서 이름모를 어린 아이들이 내 형제자매라고 생각하셨고, 순교자 분 중에 황일광 알렉시오라고 계십니다. 이번(2014.8.16, 광화문 시복미사)에 복자품을 받으신 분입니다. 이 분이 순교하시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다나는 하늘나라를 이미 살았고, 이제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옮아가고 있다. 나는 백정이라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는데천주교인들은 나를 형제라고 불러주었다."


이미 천국 살았다


'이미 천국을 살았다.' 이 말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실 때, 제2 바티칸 공의회가 있기도 전에 공의회의 말씀을 이미 하신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하셨죠. 이미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았다고 고백을 하시는데 이유는 형제자매였기 때문에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은 내가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형제 자매인 하느님 아들 딸들과 살아가는 구나모르는 사람도  형제구나그걸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겁니다


그걸 가장 넓으신 분은 프란치스코 성인이셨습니다. 태양과 바람을 형님이라고 얘기하고, 달과 별을 누님이라고 하고, 불을 형님이라고 하고 물은 누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 죽음을 보고, '나의 누이여 어서 오라.' 죽음까지도 나의 누이라고 불렀습니다.



형님인 태양의 찬가    

 류해욱신부님 옮김


지극히 높고 강하며 선하신 주님. 모든 찬미와 영광과 기림과 축복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오로지 당신,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만이 합당한 까닭이나이다. 그 누구도 당신의 지존한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당신이 지으신 모든 창조물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특별히 형님인 태양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태양을 낮이 되게 하시어 저희에게 빛을 주시었사오니 태양은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띠우나니 당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달과 별들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맑고 빛나고 사랑스럽게 하늘에 그들을 지으신 분은 당신이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바람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공기와 구름과 맑고 고요한 날씨와 온갖 기후를 통해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그들을 통해 당신은 손수 지으신 창조물들을 살피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물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물은 쓸모있고 겸손하며 맑고 소중하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불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불은 아름답고 장난스러우며 활달하고 강하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이며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찬미를 받으소서. 저희를 지켜주며 다스리는 대지는 온갖 과일이며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을 용서하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아픔과 고난을 참아 받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을 바라보며 고요히 참아내는 이들은 복되나이다. 그들은 월계관을 받을 것이옵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찬미를 받으소서


아무도 죽음을 피할 이 없나이다. 대죄를 짓고 죽음을 맞는 사람은 불행할진저!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 따르며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복되나이다.두번째 죽음이 그들을 해칠 수 없는 까닭이옵나이다. 저의 주님께 찬미와 축복과 감사를 드리오며 지극한 겸손으로 당신을 섬기나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 형님인 태양의 찬가’는 성 프란치스코가 지닌 있는 독특한 자연과의 일치로  주님을 찬미하고 있으며 성인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극명하게 보여주어 프란치스코 영성의 진수로 평가된다.



세월호 이야기는 이제 그만?


세월호 1주기가 다가옵니다어떤 분들은 그만하라고 얘기를 합니다. 보시는 언론에 따라서 달라지는 데요. 그런데  동생이 죽었으면그만  것인가방금 말씀처럼모르는 사람들도 형제 자매라고 하는데그런 비극이 이 세상에 굉장히 많은데 일일이 슬퍼할 것인가일일이 슬퍼하기 되더라고요. 일일이! 그런데 기뻐할 일도 많습니다. 내 형제 자매가 잘 되니까. 어찌 되었든, 내가 하느님을 내 아버지라고 깨닫는 그 만큼, 저 사람은 내 형제고 자매구나! 이것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도 너희의 형제다


사회교리는 그래서 신앙적 기초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저는 그걸 한마디로 우리가 형제 자매들에 대해서 말로 하는  아니라진짜로  형이고 동생으로 세상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입니다우리 가족이니까예수님이 꾸신 꿈이 그것이었습니다나도 너희의 형제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 뿐이시다. 너희가 다 형제다. 나하고 너희도 형제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교리서 2419항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지혜에 부합한, 정의와 평화가 요구하는 바를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419항 전문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 제2부 십계명. 제2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제7절 십계명, Ⅲ 교회의 사회교리 중 첫번째 항목)  2419 "그리스도교 계시는……사회생활의 법칙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160) 교회는 복음서에서 인간에 대한 진리의 완전한 계시를 받는다.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의 품위와 사람들을 일치시켜야 할 그 소명을 인간에게 증언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지혜에 부합한, 정의와 평화가 요구하는 바를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이어서 2422항에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빨간 굵은 글씨)


2422 교회의 사회 교리는 점차로 분명해지고 체계화되어 가고 있다. 이 가르침은, 역사가 흐르는 동안 발생한 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말씀 전체에 비추어서,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해석함으로써 교회가 점차적으로 표명하는 것이다.163) 이 사회 교리는 신자들의 행동에 반영될수록, 선의의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2423항  교회의 사회 교리는 성찰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판단의 기준들을 이끌어 내며, 행동의 지침들을 일러 준다.



평화가 거대한 환상이라면?



* 돔 헬더 카마라 (Hélder Câmara,1909.2.7-1999.8.27). 브라질의 가톨릭교회 대주교이자 해방신학자


브라질 유명한 주교님이 계십니다.  핼더 까마라 주교님이라고 하는데요. 그 분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없으면 평화는 언제나 거대한 환상일 것이다."

 

이번에 교황님께서도 비슷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는 정의,를 전제로 한다." 까마라 주교님 굉장히 유명한 말씀하셨는데요.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빨갱이(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



신약 안의 '연민'이란 단어


'연민'이란 단어가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 '스플랑크논'이라는 희랍어(=헬라어, 그리스어)인데,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 대해 갖고 계신 여러 마음  하나 입니다이걸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가장 비슷한 단어가 '연민'입니다. 영어로는 Compassion입니다. 같이 느낀다는 겁니다. 원래 '스프랑크논'이라는 단어는 구약시대는 감정이 내장기관에서 올라온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사람이 너무 불쌍해서 애간장이 내 창자에서부터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 그래서 연민보다  세고 적극적인 표현인데요. 루카 6,36을 보면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1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에게 임금님이 품었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죠.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오복음 18,23~35)


마태복음 18장 27절을 보면, 어떤 종이 1만 달란트를 빚졌는데, 다 갚겠다고 말하니까,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18,28절)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는데, 그 동료가 똑같이 했어요. 엎드려서 사정을 한 겁니다. 그런데 반응이 달랐어요. 왜냐하면 이 종은 연민이 없었고, 동료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감옥에 가두어버리니까, 나중에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는, (18,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하면서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5백만원과 30조원

 데나리온은 오백만원입니다. 오백만원 빚진 사람한테 그렇게 했는데, 내가 하느님, 임금으로 나오는 분에게 빚진 1만달란트는 삼십조원입니다. 하느님께서 불쌍한 마음으로 용서해주셨는데, 나는 그만한 마음이 드는가?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들었던 가엾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루카 10장 33절을 보면,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상관 없는 사람이죠. 사제도 그냥 지나치는데, 레위도 그렇게 하고,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가엾는 마음이 들어서,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닮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가질 때 하느님을 닮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닮는다고 했습니까? 내가  생겨져서운동 열심히 해서? 닮는 게 아니고, 하느님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닮는 것인데, 가장 닮는 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이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연민의 마음이고, 또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보고 들었던 아버지의 마음(루카 15,20)이 그런 것입니다. 

(루카 15,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교회가 먼저 정의로워져야 하는가

그래서 이 마음을, 다른 사람을 보고 아이쿠 딱하구나! 그런게 아니고 내 동생이 굶고 있구나, 아파하고 있구나! 이렇게 드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교회가 정의롭지 못하면서 무슨 정의로운 얘기를 하는가? 또 개인이 그렇게 하면, 당신은 뭐가 정의롭길래, 정의에 대해 얘기하나?라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회개의 방법 중의 하나가 정의의 실천과 타인의 권리를 확보해주는 것입니다. 같이 읽어보시죠. 

1435 일상생활에서 회개는 화해의 행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정의의 실천과 타인의 권리 옹호,28) 형제들에게 잘못을 고백함, 형제적인 충고, 생활에 대한 반성, 양심 성찰, 영적 지도, 고통을 받아들임, 정의를 위해 박해를 견딤 등으로 실현된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확실한 회개의 길이다.29) 제2편 4절 고해성사 Ⅴ. 그리스도인 생활의 다양한 참회형태

회개하는 삶의 다양한 형태


회개라고 하면  한가지만 생각해요그냥 십자가의  하는 그런데 우리 삶이 전반적으로 돌아서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으시고, 정의로운 하느님이시고,  구약에서 예언자를 통해 공정을 말씀하시니저런 것이 우리 회개의 실현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뭐냐면, 제가 영성신학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데, 이게 좀 어려운 과목입니다. 왜냐면 가르치는 사람이 잘 몰라요. 그런데 제가 대학원 1학년 영성신학 시간에 이걸 듣고 많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과의 섣부른 약속


제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쓰고 신학교를 갔잖아요. 그래서 저는 굉장히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루 종일 기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빨래할 때도 마음 속으로, 빨래를 갤 때도 기도하고, 저는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고해성사를 할 때, 죄를 고백한 것은 딱 두가지였습니다. 뭐냐면 하나는 담배를 끊겠다고 약속을 해 놓고, 담배를 못 끊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요. 왜 약속을 했을까? '하느님 저 담배를 끊으려고 합니다. 도와주십시요.' 그러면 되는데, 함부로 약속하는 게 문제에요. 제 영성지도 신부님께서는 '다음에 꼭 끊어보아요.' 이렇게 말씀을 하셨지만요. 


넌 지금 죄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두번째는 형제를 비판한 것입니다. 왜냐면 전 너무 열심히 사는 데, 저 친구는 별로 열심히 안 살아요. 집에서는 서포트를 많이 해주는데, 부럽기도 하고 판단을 많이 했습니다. "왜 저렇게 열심히 살지 않을까!" 그러다가 나중에 복음서를 보고 똑같은 사람이 있더라고요. 바로 '바리사이'. 저는 되게 열심히 살았는데, 그것도 너무 억울했습니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아니 그건 아니고, 열심히 살았는데, 그러면서 죄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전 세상에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저는 제 아버지가 "유정아,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 때문에 구원받는구나!" 이 얘기를 하실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빨리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 데살로니카 1서, 2서 보면 세상 멸망에 대해서 얘기가 나오죠. 그래서 전 그 날이 빨리 왔으면... 하면서 세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방학 때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가 본당에 가서 뭔가 일이 있고 난 뒤의 뒷풀이 하는 것들이 싫었고 그냥 기도만 하는 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믿고 살았는데, 그게 영성의 큰 두가지 흐름인데, 그 중 한가지만 영성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바로 종말적 영성이었던 겁니다. 


영성의 두가지 큰 흐름


그래서 종말적 영성이란, 이 세상을 죄와 고통의 장소로 보고, 인간 구원과 성화를 천상적이고 종말론적인 면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이고, 현세에서의 이탈자기 성화완덕을 강조하고, 주로 십자가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즉, 파스카 신비의 죽음이 참여하도록 권고하는 영성입니다.

 

그런데 다른 중요한 영성이 있습니다. 뭐냐면 육화적 영성(강생적 측면)이란 것입니다. 저는 세상을 굉장히 미워했는데, 원래는 교구 신부가 아니고 봉쇄수도원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것도 착각이었습니다. 봉쇄 수도원이 그런 삶이 아닌데요. 저는 부끄럽습니다만, 세상을 미워했어요. 그런데 요한 복음 3장 16절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뭔데 세상을 미워하나! 그것이 제 잘못이란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영성의 육화적 측면이란 뭐냐면 너무나 사랑하셔서 아드님을 보내주신 이 세상, 그렇다면 사랑한다면 얼마나 사랑하는 것인가? 정말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을 강조하게 되는데요.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육화를 강조한 것인데, 그리스도의 육화와 부활로 말미암아 성화된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따라서 현세적인 일들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현세의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것을 업신여기지 않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세상의 성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여기서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사실은 종말적 측면 이것만 영성이라고 생각해도 문제고이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육화만 생각하는 것도 문제는 문제인데, 올바른 영성은 결국 한 쪽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 황일광 알렉시오 복자의 말씀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았다. 나는 이제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옮아간다."


이 두가지가 다 하느님 나라고, 이 두 가지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필요한 겁니다. 사실 이것을 잘못 따라가는  우리고예수님께는 그런 분리가 없었어요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였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극히 종말적이고 지극히 육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혼동되지 않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 수난을 기념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성체를 모실 이유가 없습니다. 언제나 수난과 부활이 함께 있고그래서 종말적 영성과 육화적 영성은 삶에 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상대적으로 교회는  측면(종말)만을 강조한 것이 사실입니다. 근대 이후에 또 프랑스 대혁명 때, 민주주의적 측면에서는 매우 중요하지만, 당시 아주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살해되었습니다. 단지 성직자이고 수도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 종말론적 영성이 굉장히 발달했던 겁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살해를 당한 것이죠. 그런데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란 책이 있습니다. 조르쥬 베르나노스라는 신부님이 계신데, <어느 시골신부의 이야기>(1936)라는 책으로 유명하십니다. (국내는 1960년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제5권) 이 분이 1948년에 희곡작품으로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란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냥 가르멜 수녀원에서 그냥 순수하게 수도생활하던 분들이 그냥 혁명군에게 살해당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그래서 프랑스 교회는 종말적 영성이 혁명 이후 강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교회에서는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프랑스 교회는 알짜배기들만 모여있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분들이 선교사가 되어서 그런 영성으로 조선 땅에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에 가면 죽는 거 뻔히 알지만, 샤스땅 신부의 편지를 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겁니다.



지극히 사랑하올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께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올해에는 부모님의 소식을 듣게 되려나하고 기대해 보았으나, 아직 아무런 편지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빌 뿐입니다만, 제게는 작은 희생을 하나 더 주님께 바치는 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비할데 없이 좋은 곳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보다 앞서 가신 영광스러운 순교자들과 함께 영원한 휴식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부모님과 형제들이 너무 상심하지 않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그러니까 15년 전부터 우리의 사랑하는 조선은 어느 정도 평온을 누려왔습니다. 박해 때문에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 수 있었고, 선교사들을 모실 수 있게 되어 큰 기쁨이었으며, 주교님까지 입국하시게 되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도 잠시 뿐 백여명의 신자가 체포되고, 재산은 몰수당하고 육신은 매질로 만신창이 되었고, 혹형과 감언이설을 견디지 못한 신자들은 배교함으로 하느님과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단은 올해 들어 더욱 더 날뛰고 있는데, 지독한 박해때문에 나이,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2달 동안 25명이나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참수, 치명하셨고, 5명은 고문 도중에 혹은 그 후유증으로 죽었으며, 150명 이상의 신자들이 감옥에서 같은 운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배교한다는 그 말 한 마디만 한다면 그 혹독한 고통에서 또 죽어가는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지만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 모든 형벌을 기쁘게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양떼를 흩어버리거나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목자까지도 잡아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11일에는 주교님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이 나라에 와 있는 두 선교사들을 잡아들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갓 입교한 예비 신자들까지도 선교사들에게 기꺼이 은신처를 제공해 주어 우리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숨겨준 덕분에 넉 달 동안 숨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 주교님께서 현 상황에 미루어 보건대, 지금은 목자가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때라고 현명하게 판단하시어, 직접 자수하심으로써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당신처럼 하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박해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교님의 명령을 받들어 자수하라는 명령도 피신명령처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다만 이 모든 일을 통해 하느님의 좋은 뜻이 이루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곳 조선으로 올 때 하는님을 위해 언젠가는 고통을 받아야 할 것임을 각오하고 있었고, 저는 이제 곧 순교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사랑하는 조선땅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5명의 신자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고, 또 끔찍한 소식을 들으면서 겁에 질려 떨었던 게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용기의 은총을 주셨고, 심지어 10세에서 15세의 어린 신자들까지 혹독한 고문을 끝까지 견디며 보여준 덕분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내일 동료 신부와 주교님을을 압송해 간 장교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둘이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감옥으로 끌고 가겠지요. 그 곳에서 주교님과 순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랑하는 열심한 신자들을 다시 만나게 되면 큰 위로가 되겠습니다.


어쨌거나 저의 온 마음은 주님께로 향해 있는데, 만일 이 좋은 기회를 통해 지극히 사랑하는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다면, 부모님께서는 저의 이 큰 행복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주님께 크나큰 감사의 기도를 올려 주십시오. 제가 이 세상에서 부모님과 가족 모두를 사랑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순교의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는 은총을 허락하신다면 그 곳에서도 여러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지막이 될 이 편지를 통해 지극히 사랑하올 부모님, 형님과 동생,누이들, 친척과 친구 여러분에게 하직인사를 올립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제게는 금도, 돈도 없으니 유산으로 남길 것이라고는, 신자들이 마련해 준 옷 몇 벌이 전부인지라 뒤처리 하는 일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로 보면 가난하나, 십자가의 은총으로 보면 비옥한 이 조선땅으로 저를 불러주신 주님께 끝없는 감사를 올려 주세요. 이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더 길게 쓸 수가 없어요.


부모님, 형제 자매님, 자식으로서 사랑받았고 형제로 정을 나눌 수 있었음은 제게는 더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하기에 아들로서 부모님께, 한 가족 된 형제 자매들에게 사람으로 지닐 수 있는 가장 큰 사랑과 정성으로 인사드립니다. 


Jacques Chastan(정야고보)올림



저는 행복하니까 그렇게 아시고, 전 자수하러 갑니다. 제가 숨어있는 것도 주교님의 뜻이었고, 지금 저는 권고에 의해서 계속 숨어 있으면 너무 많은 교우들이 죽어가기에 지금 자수하러 갑니다. 당신의 아들이어서 자랑스럽다는 식으로 편지를 쓰셨어요. 그런 혹독한 상황에서 언제나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던 훌륭한 분들이 조선에 오셔서 피로 한국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순교자들의 삶이란?


한편으로 종말적인 면이 많이 강조되었고전세계적 흐름이었고. 우리도 그랬는데, 지금 우리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으니, 과연 오늘날 순교자들의 삶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내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우리가 바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영역이 조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루터의 5대 원칙


   

(1483.11.10~1546.2.18) 신성 로마 제국의 기독교 신학자는 원래 신부였다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 성자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 걸음으로써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가 내놓은 다섯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가톨릭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 것들입니다. 앞으로 이런 것들 따른다고 말했는데요. 

1) 오직 성경으로만

2) 오직 믿음으로만

3) 오직 은총으로만 


그 다음에 밑의 2가지는 유명하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가톨릭하고 똑같은 거니까요. 

4) 오직 그리스도만

5)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래서 위의 세가지(오직 성경, 믿음, 은총)만 가톨릭과 다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3) 오직 은총으로만'도 가톨릭과 같습니다우리가 하느님 자녀로 올바로 사는  은총이기 때문에. 그래서 

문제는  1)번과 2)번 두가지입니다. <오직 성경으로만>과 <오직 믿음으로만> 이것이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오직 성경으로만>에 비해서, 우리는 성경과 성전을 합쳐서 하느님 말씀으로 합니다. 

 

이 구절은 성경 어디에 있는가


스콧 한(Scott Hahn)

1957년에 태어나 10여년간 장로교회 목사요,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6년 부활절에 가톨릭으로 돌아온 스콧 한은 성서와 가톨릭 교회 신앙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국내외 에 발표하고 있다. 1979년 그로브 신학대학에서 신학,철학,경제학을 전공 했으며, 1982년 고든 콘웰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 석사학위를, 그리고 1995년 마르케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최우수로 수여 받았다. 현재는 1990년 이래 스투벤빌 프란치스코 대학교에서 신학과 성서학 교수생활을 하고 있으며, 2002년에는 성바오로 성서신학센터(Scotthahn.com) 를 설립,운영하고 있다. 같은 해 콜럼버스에 있는 요세피눔 교황청 신학대학 부교수로 초대되었고, 성서문학학회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 가담, 활약하면서 탁월한 교수법 과 연구실적으로 다양한 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영원토록 당신 사랑 노래하리다] [어린양의 만찬] [거룩하신 모후님,하례 하나이다]외 다수가 있다. 몇십 편에 달하는 논문과 글을 썼으며 오디오,비디오 테이프가 있다.


참고적으로 스콧 한 교수님이 쓰신, <당신 사랑 영원토록 노래하리라>란 책이 있습니다. 스코탄 신부님은 원래 개신교 목사였고 신학교수였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을 연구했습니다. 가톨릭을 연구한 이유는 그것이 이단이기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단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증명하려고 연구하다가 개종했습니다.  분이 부딪쳤던 구절이 저겁니다. <오직 성경으로만>  구절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모든 진리는 오직 성경 안에만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성경 안에 있습니까? 그런 구절이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구절을 풀어냈으니까 틀린 겁니다. 진리는 성경 안에만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성경 안에 없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믿을 구절이 아닌 것. 그래서 자기 교수와도 얘기하다가, 지금은 굉장히 유명한 가톨릭 평신도 선교사  책도 많이 내고교수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루터의 믿음


루터는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로마서의 말씀을 읽고 그랬는데사실 로마서 3,28절을 읽고,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아 그렇구나 실천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구나!'했는데, 사실 야고보서에 정 반대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고보서 2장 24장을 같이 읽어봅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루터가 저 구절을 어떻게 했을까요? 저것을 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같은 서간이다."라고 하면서 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경을 새로 하려고 했는데, 안되고, 나중에는 인정을 했어요. 그런데 루터는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은 겁니다. 로마서 3장 28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


율법이 아니라 믿음


그런데 행위와 상관없는 게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가 하시는 말씀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게 아니고요. 대칭을 잘못 이해한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말씀과 야고보서 말씀이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황님께서 <복음의 기쁨>에서 '사랑으로 실천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갈라디아서 말씀을 인용하신 겁니다.


갈라티아서 5,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1교시 끝. 


사회교리의 신앙적 토대 ②


알아듣는다는 것


어떤 할아버지가 신문을 보고 계시는 데, 노화의 단계가 5 미터에서도 못 들으면 심각하고, 3 미터에서도 못들으면 더 심각하고, 1 미터에서도 못들으면 그건 엄청 심각한 상태이다. 그래서 '내 할멈은 어떤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할멈 뭐 해?"라고 물었더니, 못 들으시더래요. 그래서 3 미터 뒤로 다가가서 "할멈 뭐 해?"라고 하는 데도 대답이 없으시더랍니다. 그래서 1 미터 뒤에 가서 "할멈, 뭐해?"라고 하는데도 아무 대답이 없으신 거예요. 그래서 뒤에서 꼭 끌어안으시면서, "할멈! 그동안 내가 고생만 시키고 너무 무심했구나. 할멈! 뭐~해?" 그러니까 할머니가 뭐라고 하셨을까요? "수제비 만든다고 세번을 얘기했어, 세 번을!" 


대화가 안 통한다고 생각할 때, '저 사람이 내 말을 못 알아 듣는다!'라는 생각이 들 때, 사실은 내가 못알아 듣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섭리에 대한 말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을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로 풀어볼 수 있죠. 창세기 37징부터 50징까지 나오는데, 야곱의 아들이 몇 있었죠? 열 두명 있었어요. 여기서 잠시 동영상 3분 30여초 짜리 하나 보고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스티브 커츠(Steve Cutts)라는 만화가의 <MAN>이란 작품입니다. 유튜브에서 <MAN>을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스티브 커츠 홈페이지. http://www.stevecutts.com/) 

사랑받아서 생긴 요셉의 비극

오늘날 우리가 복음적으로 신학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때 우리가 오늘날 편리하게 생각하는 '과학기술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영상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야곱의 아들은 열 두아들인데, 그 열 두아들 중 누굴 편해했나요? 요셉이죠. 거기서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형들의 곡식단 일어나서 요셉의 곡식단에게 절을 한 겁니다. 그 꿈을 누구한테 가서 얘기했나요? 형들한테 가서 한 겁니다.

"형들, 한번 들어보세요. 제가 이런 꿈을 꾸었지 뭐에요."

안 그대로 지금 형들이 심기가 불편한데, 굳이 그런 얘기를 형들한테 한 걸까요. 그들에게는 엄마가 네 명이었습니다. 야곱의 레아와 라헬이 있었고, 몸종들이 있어서 엄마가 넷이 있었고, 그래서 열 두 형제가 안그래도 사이가 안좋은데, 야곱이 그런 얘기를 하니까 형들이 죽여버리려고 했죠. 그런데 그 때 르우벤이 나서서 "우리가 아우의 피를 봐서 좋은 게 뭐냐!" 또 유다가 "죽이지는 말자!"리고 해서 구덩이에 넣어 가뒀다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넘겨서, 이집트까지 팔려갔죠.

이집트로 갔는데, 그곳에서 포티파르라는 파라오의 신하의 시종 곧 하인으로 살았는데, 거기서 포티파르의 아내가 유혹을 해요. "나와 함께 자요!" 그런데 요셉이 안 졸려가지고, 안 졸립다고 하니까, 오히려 포티파르의 아내는 요셉을 '성폭행 미수'로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갇힙니다. 전자팔찌도 찼겠죠. 그런데 거기서 꿈을 풀이해주거든요. 감옥에 갇혀있던 또 다른 시종들의 꿈을 풀이해주는데, 그 시종들 꿈이 정말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사형을 당하고, 한 명은 복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가 괴상한 두 가지 꿈을 꿉니다. 그래서 그 시종이 "아! 맞다." 3년 전에, 그러니까 3년 만에 생각난거에요.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고 3년 만에 생각이 납니다. 시종은 파라오에게 감옥에서 자신의 꿈 풀이를 해주었던 히브리 총각 요셉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파라오가 데려오라고 하죠. 

그런데 요셉은 말하기르 전 세계에 앞으로 가뭄이 들 것이니 식량을 비축해 놓아야 한다고 말하고, 그 꿈대로 식량을 비축해 놓았는데, 정말 기근이 들어서 오랫동안 지속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지역에도 먹을 것이 없어서, 야곱의 다른 아들들이 곡식을 꾸러 이집트까지 오는데, 요셉을 못 알아 본 것입니다. 파라오의 재상이 되어 있는 요셉을 못알아 보죠. 요셉은 알아보았는데 말이죠.

내가 요셉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굉장히 갈등에 시달리다가, 굉장히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그 요셉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요셉은 나중에 밝힙니다. 울면서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요셉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팔아넘겼다고 해서 형님 자신을 미워하지도, 형님 스스로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요!."

요셉이 깨달았던 것

이것은 엄청난 얘기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다신 그러지 마!'라고 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에게 화를 내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여기로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나를 파라오에게 보낸 것입니다.' 요셉이 그걸 깨닫고 형들을 용서합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섭리가 무엇인가? 형들에게 나쁜 마음을 줘서 요셉을 죽이려고 한 게 하느님의 섭리인가? 또는 포티파르의 아내에게 나쁜 마음을 주게 해서 요셉을 감옥에 가두려고 한 것이 하느님의 섭리인가? 우리가 보통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할 때, 나쁜 일도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는데,  사실 하느님은 죄나 악을 조장하지 않으신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할 것인가?

하느님의 섭리는 발견해야

인간이 저지른 악도 선으로, 그 악조차도 끊임없이 이용해서 선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요셉의 이야기에서는 르우벤이 '죽이지 말자! 피를 봐서 우리가 좋을 게 무어냐!", 유다도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37,21~22) 21 그러나 르우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내어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창세기 37,26) 그 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이처럼, 죽이지 말자는 르우벤과 유다를 통해서 생명의 하느님이니까 그렇게 섭리를 하신 것입니다. 요셉에게 지혜를 줘서 감옥에서 꿈풀이를 하게 하신 것이 그런 섭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쁜 일까지 다 알아서 하는 것은 아니란 겁니다. 

잘못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건 아닌가

예를 들어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도록 계획을 해 놓으시고, 몇 월 며칠에 빠지도록 한다는 사고방식, 그것을 하느님의 섭리로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큰 일 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제 식민지도, 남북 분단도 모든 게 하느님의 섭리라고 주장할 수 있게되는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게 아니고,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이고, 남북의 분단 상황 안에서도 끊임없이 통일운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나쁜 것을 하느님이 일부러 만들었다고 얘기를 하면 우리는 잘못된 신앙을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한 가족으로 모여서 평화롭게 살아가시길 원하시는 것이지,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잘못들. 앞서서 동영상에서 보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그 모든 일, 유전자 조작 같은 것을 섭리하셨는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서, 구약에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의인을 통해서 개입을 하셨고, 오늘날에는 공동체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개입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세상에 개입하시길 원하는 걸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회교리의 목표

예전에는 사회와 가정이 심각하게 복잡하지 않아서, 개개인을 통해서도 그런 개입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백성들에게 모세를 파견하여 데리고 나오신 것이라면, 오늘날 그런 모세의 역할을 어떤 추기경님이 하실 것인가? 그게 아니라 그게 이제 교회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 듣는 것이 사회교리의 목표가 됩니다.

<주님의 기도>의 공동체적 차원

아까 산상설교 말씀에서 주님의 기도를 말씀드렸는데, 이 주님의 기도를 개인적 차원에서 바칠 수 있지만, 공동체 차원에서도 주님의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는데, 이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데,  마태오 사가가 산성설교에서 요약을 했고, 주님의 기도는 산상설교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 교리서 2763항(제4편 제2부 주님의 기도 제1절. 1. 성경의 핵심)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여기서 '우리'는 아무도 제외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아무도 제외하지 않고, 우리의 기도는 '폭넓은 사랑'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리서 2792~2793항에 나오는 말입니다. 먼저 제2792항을 요약해서 보면, '주님의 기도 첫 머리에 나오는 "우리"와 마지막 네 가지 청원"의 저희는 아무도 제외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표현입니다.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2793항에서 보면, 우리의 기도에는 국경이 없고... 우리의 기도는 아직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폭넓은 사랑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피조물의 찬가
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성인이 계시지요. 그 프란치스코 성인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이 4대강과 강정의 파괴에 눈을 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사자방 비리에 대한 얘기가 세상에 나오고 있는데, 그런데 4대강 건설 시기에 김종수 주교님까지 해서 공주에서 모두 다 걸었습니다. 그런데 공사를 다 했고 지금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명을 더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 뉘우침이 매우 큽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한번 다 같이 읽어볼까요?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히 빛나소서."라고 가려서 말하지 않고, 그 이름이 모든 사람 안에서 빛나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교리서 2814항 중 일부) 

 다음에 아버지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이 구절은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에 투신하기 위해서 창조주께 받은 힘과 수단을 유용하게 활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알아서 오실 거니까 우린 아무 것도 안해도 된다는 게 아니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세상에 개입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신다는 것은 내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협력을 해야 합니다. 나와 우리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정치적으로는 하느님 나라는 제국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뿌리는 깊습니다. 바벨탑도 사실은 바빌론 제국을 비판하는 것이죠. 창세기가 씌어질 당시에. 우리는 일본 식민지배를 통해서 제국이란 다른 나라를 언어적으로 문화적 통일하면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 식민지배를 통해 관여하는 것으로 생각하죠.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문화적으로 신자유주의를 거슬러서, 광야에서 예수님이 빵의 유혹 권세의 유혹 그리고 자신의 뜻을 거슬르게 하는 시험의 유혹을 받으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복음 삼덕(청빈, 정결, 순명)으로 이겨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유혹들은 예수님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도자들의 복음 삼덕이고 우리가 초대받는 3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청빈하게 살게 하는 것일까요? 잠언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잠언 30,8)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알맞게만 청하고 있는데, 오늘날 세상은 그런 게 아니라, 점점 더 많이, 미국의 백만장자, 하워드 휴즈라는 백만장자에게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행복해지려면 얼마만큼 돈이 필요할까요?" 그러자 대답을 했어요. "A little bit more!" 조금 더 많이. 그 사람이 돈이 엄청나게 많은데, 행복해지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를 하느님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고, 이게 해악이라고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하고 계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것이 좋았다고 말씀하시면서, 복음으로 주님의 기도로 살아가도록 하느님께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비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더 많이, 더 좋은 것, 더 남과 다른 것을 조장합니다. 특히 광고에서, 요즘 너무 많은 대출광고들, 일주일에 20시간 평생 TV를 보면 13년간 TV를 보는 셈이랍니다. 그런데 27%가 광고라서 평생 3년간 광고를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생을 짧은 것인데, 평생 3년간 광고를 본다는 것이죠. 

광고를 통해서 계속해서 내가 갖고 있는게 얼마나 구제품인지, 그래서 계속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족, 내 외모에 대해서 불만족 성형광고, 내 몸매에 대해 불만족 다이어트 광고,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게 불만족하게 만들면서, 영원한 불만족의 굴레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서처럼, 이세상에 잘못된 것이 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바라보면 안되는 겁니다. 세상에서 오류가 추방되고, 진리가 넘치며, 악습이 퇴치되고, 덕이 다시 번성하며, 땅이 더 이상 하늘과 다르지 않게 되기를 바라시는(교리서 2825항 후반부) 것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의 뜻입니다. 

그러면 무력침공과 군사기지 건설이 아버지의 뜻인가요? 강정 마을의 행정대집행이 있었고, 2천 800일 넘게 주민들이 고생을 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거기서 보상금 더 얻으려고 그런다는 것?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지금 중국이 21세기에 미국의 경제력을 압도할 것이라고, 아니면 이미 넘어섰다고, 그런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일부 학자들은 그것을 중동 지역에서 중국으로 가는 파이프라인을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 화학무기를 찾겠다거나 빈 라덴을 찾겠다거나 하고 공격을 하고 민간인들도 많이 죽고는 했습니다만, 그런데 화학무기는 찾지 못했어요.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면서, 중국으로 가는 송유관을 미국이 관리를 하겠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육로로 그렇게 차단을 했으면 이제 바다에서도 견제할 곳이 필요한데, 우리나라에서 제주도를 쓰시라고 제주도 강정이 그런 의미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에 그랬습니다. 제주 강정기지는 북한을 막기 위해서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연평도나 서해 5도에 있어야지 왜 제주도 강정에 해군기지가 있어야 할까요? 그것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가정이 사실이라면, 앞으로는 중국과 미국의 사이가 안 좋아질 때, 중국이 어딘가를 공격한다면, 미군 기지를 공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절대 우리나라의 안전을 지켜주는 게 아니고,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화약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여기서 이 양식은 물질적이고 영적인 합당한 모든 재화를 얘기하는 데, 이와 관련해서 가톨릭교회 교리서 2830항과 2831항을 살펴보겠습니다. 교리서 2831항에서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 청원의 또 다른 깊은 의미를 일깨워준다.' 일용할 양식을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바로 '우리에게', 다시 말해서, 너희에게도 아니고 '오늘 저희에게' 그러니까 내 주위에 굶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2830  "저희의 양식."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께서 삶에 필요한 양식과, 물질적이고 영적인 '합당한' 모든 재화를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우리 아버지의 섭리에 협력하는 이 자녀다운 신뢰를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갖 불안과 걱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자녀답게 의탁하는 일이다.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를 찾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곁들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과연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자신이 하느님을 버리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2831  그러나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 청원의 또 다른 깊은 의미를 일깨워 준다. 세상에 굶주림의 비극이 있다는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인 처세에서나 인류 가족인 그들과의 연대에서나, 자기 형제들에 대한 실질적 책임을 다하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이 청원은 거지 라자로의 비유나 최후의 심판의 비유와 뗄 수 없다. 



강우일 주교와 함께 걷는 세상. 지은이 강우일, 바오로딸 출판. 2012.12.20 정가 6,000원


<강우일 주교와 함께 걷는 세상>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여러 기고문들을 모아서 내셨는데요. '구제역 사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성찰'이란 글이 있는데, 구제역 파동을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논한 강론이 있고요. 이 책을 한번 소개해드리고 싶고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세계 도처에서 굶주리는 아이가 5초에 한 명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9명 중 한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걸려있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세계식량계획(WFP)이 2014년 9월 16일 공개한 '2014 세계 식량 불안 상황(SOFI)' 보고서에 따르면 2012∼2014년 전 세계의 기아 인구가 8억530만명이라고 AFP 통신 등이 전했다.)

그런데 세계곡식 총 생산량의 47%가 가축 사료, 소, 돼지, 닭이 먹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진국 사람들이 먹어야 하기 때문에, 그걸 먹고 각종 성인병, 고지혈증 등에 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식습관을 바꾸려고 해도, 지금 시스템이 굉장히 어렵게 되어있는데, 어렸을 때보다 고기 너무 많이 먹습니다. 너무 너무 많이 먹습니다. 그리고 너무 너무 많이 팔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치킨산업 10년전 비해서 9배 성장했다고 합니다. 월드컵 지내면서 '치맥', 드라마에서 '치맥', 그렇게 닭도 많이 먹게 되었습니다. 

닭이 치킨이 안돼고 늙어 죽을 때까지 살면

닭의 수명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닭의 평균 수명에 대한 통계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여기 저기 좀 다릅니다. 그게 늙어서 죽을 때까지 닭은 놔두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닭의 수명이 20년이란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먹는 치킨은 얼마를 사는 것일까요? 45일을 삽니다. A4 크기 종이보다 더 작은 공간에서 태어나자 마자 45일만에, 그 시기가 제일 야들야들하다고 합니다. 그 때 잡는 겁니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둘 중에 하나가 됩니다. 거기에 후라이드가 될 것인지, 양념이 될 것인지, 그렇게 두가지 가능성만을 지닌채 한달 반 밖에 살지 못하고 우리가 먹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밖에 못 살아요? "너무 잔인하잖아요!"라고 할 수 있는데, 왜 그럴까요? 우리가 먹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먹고 다시 성인병에 걸리고, 그 사이에 가축 사료로 곡식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는 굶어죽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굶어죽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선진국의 식습관 책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곡식이 남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곡물협회에서 태평양에 버린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아프리카까지 운송하는 운송료, 그리고 곡물가격의 하락을 감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할 수 있는걸까요? 

함께 살자 농성촌

이게 2013년 9월 현재 전국 함께 살자 농성촌 현황입니다.(신부님은 농성촌이 표기된 한반도 지도 를 보여주었는데, 이를 시사IN의 기사로 대신함)



여기서 콜트.콜텍 2391일이 되었는데, 지금 거기서 한 500여일 정도를 더해야 합니다. 강정마을이 2300여일, 그 다음에 수많은 사람들, 이미 굴뚝 쌍용자동차 노동자 두분 한분 오늘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댓글들 보니까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쌍용차가 얼마나 좋은데면 저렇게 하냐"면서 마치 귀족노조라는 비아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쌍용차 사태 이후로 벌써 23명이나 돌아가셨습니다. 가족까지 포함해서요. 그 아픔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교황님께서는 일자리 없으면 인간 존엄성도 없어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의 우상"이란 말씀을 강조하셨는데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국가별 핵무기 보유현황을 말씀드리면, 이것도 몇년 지난 자료인데요. 러시아가 1만1천개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8,500개 가량입니다. 프랑스가 300개, 중국이 240개, 영국이 225개, 이스라엘 80개, 파키스탄 105개, 인디아 90개, 북한 10개. 무엇보다도 북한은 핵무기 개발해서는 안됩니다. 당연히 안되죠. 그런데 다른 나라는 해도 되나요? 과연 1만 1천개를 갖고 있는 나라나 8천5백개를 가진 나라는 그걸 쏘지 않을거니까 갖고 있어도 되는 걸까요? 

제가 탈핵 강의를 듣는데요. 강의하시는 분 말씀이, 이스라엘이 핵무기는 있는데, 핵 발전소, 곧 원자력 발전소가 없답니다. 그 분 말씀이 핵무기보다 원자력 발전소가 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약 북한과 전쟁이 났을 때 우리나라 23개 원자력 발전소 중 하나만 폭발해도 그것으로 끝이 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발전소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오늘이 후쿠시마 4주기 되는 날입니다. 여태까지 핵 사고가 4번이 있었습니다. 최근이 후쿠시마(2011), 체르노빌(1986), 미국의 스리마일섬(1979) 그리고 최초인 히로시마(1945)는 고의적 핵사고였어요. 이것이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후쿠시마의 그것이 태평양으로 퍼졌고, 몇년 지나면 전 세계의 바다가 오염될 것이라고 합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아까 '쌍용차' 말씀을 드렸는데, 폭력진압했고, 더 안타까운 건, 공장 안에 있는 노동자들한테, "너희도 안 잘리려면, 해고당하고 싶지 않으면, 저들을 내쫓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눈 빛만 봐도 알죠. 어제까지만 해도 한솥밥 먹던 동료들이었는데, 그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해서 그게 너무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살자를 포함헤서 스물 세분(23명)이 돌아가셨는데, 그 폭력진압이 경찰청 우수사례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악마를 내쫓고 질병을 고치셨는데, 신약성경 시대는 모든 병을 악마에게서 유래한다고 봤는데, 정말 그 때는 악마들이 병으로 활동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예전에 병에 걸리면 그 사람이 죄를 졌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어디 교통사고 난 분을 병문안 가가지고, "아니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교통사고를 당하고 다치신 겁니까?"라고 묻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아픈 건 이제 의술이 치료합니다. 그러니까 만일 악이 활동한다면, 병에서는 더 이상 횔동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병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죄인 취급을 당하고 공동체가 분열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공동체에 대한 효과적 분열은 병이 아닙니다. 신자유주의, 소비주의 개발논리, 생태 파괴 등입니다. 국가간 불평등, 언론장악, 전쟁협박, 언론문제도 굉장히 심각합니다. 진리를 보도해야 하는 것인데요. 세월호 사고가 난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석간 문화일보는 "대형 참사 날 뻔했다"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단원고 학생 338명 전원 구조", 언론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굉장히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심지어 MBC에서는 과연 보험금이 얼마나 될까? 휴대폰도 20만원 보상해준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순간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런 보도를 접하면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보험으로 검색해보면 수많은 기사들이 나왔습니다. 세월호에 대해서 이것이 국가인가? 등등 세월호를 안타까워하는 주간지들의 보도가 있었지만, 어떤 주간지는 생뚱맞게 "이래도 수학여행 가야하나?" 굉장히 독특한 시각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첫번째 하느님 말씀에서, 두번째는 교회 안에서 즉 성사와 전례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세번째 작은 이들을 위한 봉사에 참여함으로써, 이것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 안에서, 두번째 고해성사, 전례 등에서 세번째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마태오복음 25,35~36)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이 굶주리고, 예수님이 목마르고, 예수님이 헐벗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이 나다. 헐벗은 사람이 나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에서만 예수님을 찾는다고 하면 개신교이고, 성사와 전례에서만 찾으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이고, 사람들에서만 찾으면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도 있죠. 그런데 이 세가지를 늘 신앙 안에서 조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방한의 영성적 의미

마지막으로 교황님 방한의 영성적 의미 중 일부분만 짧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교황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이해할 때 첫번째로 교회가 '열린 마음을 가진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두번째로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 그리고 세번째는 '사회교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이 계속 하시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문을 열어놓아라. 이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성사의 문을 더 열어라. 그러니까 교회에 더 많은 이들이 들어와서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두번째는 정말로 성당 문을 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의 기쁨 46항) '출발하는 교회는 문을 활짝 열어놓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49항) "자기 안위에만 신경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렵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신학적 자기 도취

이걸 교황님이 말씀하신 게 아니고, 어떤 신학자가 말했다면 난리가 났을 지도 모를 말씀이십니다. 교황님 말씀이십니다.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교황님께서 (2013년 3월) 선출받기 전에 콘클라베가 추기경단 회의이죠. 그 때, 선출되기 전에, 추기경님들이 한 분씩 말씀을 하시는 데 교황님이 그 때 저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A4용지 절반 정도 내용으로요. 그러면서, "교회가 자신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며 '신학적 자기도취'(narcisismo teológico)에 빠져 있다." 나르시스가 자기 얼굴 보다가 빠져 죽죠. 교회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 안에서 자신에 의해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속적 교회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복음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도 2013년 3월 콘클라베에서 선출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자신 안에서, 자신에 의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세속적 교회 
(la Iglesia mundana que vive en sí, de sí, para sí)
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복음적인 교회
(la Iglesia evangelizadora que sale de sí)
가 되어야 한다”

안과 밖, 무엇이 더 복음적인가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할 수 있어요. 교회가 세상 일에 관여를 하면 안되고, 교회 문제에만 관여를 해야 복음적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반대로 말씀을 하셨죠.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세속적이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복음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기 교황은 교회가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을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차기 교황은, 교회가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추기경님들이 "그럼 당신이 하시라"고 한 겁니다. 그렇게 교황님이 선출이 되신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교황님 개인의 메시지가 아니고, 저런 말씀을 하신 추기경님을 다른 추기경님들이 교황으로 선출하도록 성령께서 이 시대에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뵙는다는 것은 조금 전에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찾는다는 것은 영성생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묵상하는 것과 교회의 거룩한 신비들에 적극 참여하는 것, 그리고 또한 '작은 이들'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현대의 사제양성 46항). 위에서 언급한 바 있죠. 

지킬 의무로서의 사회교리

사회교리는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에 속하는 만큼 이와 동등한 위엄과 권위를 지닌다. 이는 참된 교도권으로 신자들은 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80항) 그런데 우리는 사회교리가 부록처럼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지만, 이것은 교리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비자 교리서에 사회교리에 대해서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기로 교리교육위원회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 185항에서, 이 문서 <복음의 기쁨>은 우리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모든 사회 문제를 세부적으로 다룰 자리는 아닙니다.... 그러한 여러 주제에 관한 성찰에 알맞은 도구들은 '간추린 사회교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공부하고 활용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복음의 기쁨, 185항) 

여기서 교황님은 '강력히' 권고한다고 쓰셨습니다. '강력히'라는 단어는 이 때만 쓰셨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지난 8월 14일 한국 주교님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복음의 중심에 있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합니다... 교회의 풍부한 유산인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 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8.14.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 중 하신 말씀) 

그러니까 앞으로 교리교육과 강론 때 사회교리 공부를 시키라는 말씀이십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말씀하십니다. 2004년 출간된 <간추린 사회교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응우엔 반 투안 추기경 님. 베트남 추기경 님이신데, <지금 이 순간을 살며>,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라는 책으로 유명하신데, 공산 치하에서 13년간 감옥에 계시면서 혼자 미사드리고 하신 분인데, 이 분을 교황청 정의평화위원장으로 임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사회교리 집대성을 맡기셨고, 2002년 선종하시면서 후임 레나토 마르티노 추기경님이 완성을 한 것이 <간추린 사회교리> 책자입니다.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방한기간 중 많이 사용하신 단어들은 평화, 가난, 사회, 화해, 정의, 연대, 자유 등이란 단어를 많이 쓰셨는데, 특히 전임 교황님들에 비해서 '가난'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쓰셨다고 해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난한 이들, 취약계층,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방한 때, 공직자들이 만남에서나 주교들과의 만남 등에서 '가난한 이들의 절박한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것과 인간적이고 문화적으로 향상되도록 도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015.3.11(수) @ 대전교구 하기동성당

위 내용은 필자의 편의에 따른 기록이 반영되어, 실제 강의내용과는 차이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