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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20150325] 김용태 신부의 사회교리의 원리 (사회교리 4강)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5.

2015년 3월 25일 수요일 저녁 8시, 하기동성당에서 개최된 대전사회교리학교 13기의 제4주차 <사회교리의 원리>는 김용태 신부님은 '마음이 지쳐서'를 기타연주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마음이 지쳐서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사회교리의 원리 ①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사회교리 4주차]

사회교리는 복음적 가치를 비추는 것


(저녁 8시08분 강의시작) 반석동 성당 떠난지 5년째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사회교리의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사회교리?" 하면, 뭔가 특별한 사람들, 빨갱이스러운 사람들, 평소에 개량 한복 많이 입고다니는 사람들... 이런 부류들이 주로 하는 것. 혹은 반정부활동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닌가?


사회교리도 그냥 '교리'다


아닙니다. 사회교리는 복음적 가치를 세상 두루두루 비추는 것입니다. 사회교리는 이미 우리가 배우는 내용들을 다시 배우는 것입니다. 사회교리가 따로 있고 복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배웠던 것이죠. 신앙이 안방에서, 교회 울타리 안에서, 성당 안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고, 사회를 비추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리는 복음과 성서에서 끌어낸 원리와 이치인 것입니다. 사회교리는성서에서 이끌어낸 원리들을 말합니다. 따로 떨어져서 사회교리가 존재한다는 건 아니죠.


2015년 3월 25일(수) 오후 8:02분 하기동 성당 모습. 강연에 앞서 기타연주로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런데 왜 '사회교리'라고 말하나


우리가 예비자 교리를 배웁니다. 예비자 교리와 사회교리가 다릅니까? 그것도 안 다릅니다. 그런데 왜 특별해 보였나? 그만큼 복음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삶에 적용하지 않고, 세사을 다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해서 '사회교리'가 특별해보인 것일뿐입니다. 그래서 굳이 '사회 교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서 설명하는 것이지, 사회교리는 그저 교리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잘 사는 삶인가? 이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행복한 삶이 안방에서도 이루어지나요? 물론 안방에서도 이루어지겠죠. 때로는 은밀하게.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란 말을 쓰는 것도 좋은 게 아닙니다. 


모든 게 다 예수님 말씀이다


정의평화위원회, 정의구현사제단 이런 말 쓰지만, 모든 사제들은 정의를 구현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정의를 구현하는 사제입니까? 당연한 겁니다. 신부는 정의를 구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투신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정의평화, 정의구현을 말할 때 그걸 빨갱이스럽게 보이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하루에 밥 세 끼 먹었습니다.'가 이상한 말인가?


정의와 평화란 단어, 정의란 단어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이 세상에 정의가 희박하다는 증거이고, 그것이 교회 안에서도 특별히 보이는 것 교회 안에서조차도 제대로 서있지 못하다는 걸 반증하는 겁니다. 제가 오늘 밥 세끼 먹었어요?란게 특별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지만, 이 세상 안이 복음화되지 못하고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가 특별히 보일만큼 세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는 그냥 교리입니다. 따라서 예비자교리 때 마땅히 배웠어야 할 내용이 사회교리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과 우리 하느님이 같은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사회교리의 하느님과 교리의 하느님이 서로 다른 존재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되는 것이죠. 다 같은 것입니다. 늘상 신부님들이 강론 때 하는 말씀들과 복음이 다 같은 것입니다. 사회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고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이 세상에 정의평화 생명의 가치가 그만큼 망가져있다는 겁니다.


사회교리와 '잘 살아보세'


사회교리는 예수의 복음적 가치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적용하는 공식입니다. 하느님 말씀과 복음말씀을 가지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과 신앙의 대주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잘 살아보세'입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구호가 아니라, 성서의 대주제입니다. 두꺼운 성경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잘 살아보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잘 살 수 있습니까? 하느님 안에서만 잘 살 수 있고 하느님을 벗어나면 잘 살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신앙의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면 우린 잘 살 수 없다. 우린 죽는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냐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신다. 우리는 그래서 가장 멋있고 아름답고 의미있고, 보람되고 가치있게 사는 건 하느님 안에서, 그 분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서 걷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풍요롭고 충만하게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만들었던 그 좋은 모습으로 사는 것. 누구안에서? 바로 하느님 안에서. 바로 이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성서를 한마디로 줄이면 '삶'


성서를 한 마디로 줄이면 삶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분명하게 보여주셨어요. 그것이 성서 전반의 이야기이면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특별하고 명쾌하게 말씀과 온 삶으로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내용에서 모든 교리가 우러나옵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복잡다양한 세상에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세상에는 60억의 인구가 있습니다.  60억 인구의 삶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지고 삶을 조명해보고, 내 삶이 얽켜있을 때에, 복음을 가지고 삶을 비출 때 서로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가는가?라고 생각할 때 나오는 공통 원리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여러 문제가 있는데, '복음을 적용하면 되겠구나!'하는 것. 마치 수학공식같은 원리, 이게 사회교리 원리입니다. 사회교리에서 생소한 단어들 나오지만, 그것은 명칭을 갖다 붙인 것이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미 '서로 사랑하십시요!'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사랑의 계명'안에 다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그것을 공식화하면서 복잡한 삶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적용시켜 나갈 때 여러가지 상충되는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용하는 원리들에 대해서 특별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원래 다 아는 것들입니다.


원리를 알아야 잘 풀린다


세상에 돌아가서 뭔가 헷갈릴 때 원리를 알면 잘 풀수 있습니다. 원리를 모르고 답만 안다면, 세상이 충돌하는 것들에 대한 분석이 어렵습니다. 공식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본질을 안다는 것이죠.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수많은 조문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구구단을 외웠지만, 그 곱하기 원리는 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쉼'의 본질은 몰랐습니다. 본질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쉬는 날인데, '쉰다'는 것은 바보같은 율법한자들은 쉰다는 걸 곧 일 안하는 걸로 생각해서, 이 일도 안돼고, 저 일도 안 안돼고...  


숨과 쉼과 삶은 같은 말


쉰다는 것은 일을 안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숨 돌릴 틈도 없는 사람들 숨 돌리게 하는 것이 쉬는 것이고, 안 그러면 숨이 멎습니다. 숨이 멎는 다는 것은 곧 죽는 것입니다. 숨을 통해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숨과 쉼과 삶은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살리는 것. 안식일 쉬는 날이 일 안하는 날이 아니고 살리는 것이 본질이고, 그걸 아시는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 본질에 충실한 것인데 율법학자는 어겼다고 여기고 죽이려고 모의한 것입니다. 


하느님 법에 충실하다는 것


법치국가에는 두 부류의 인물이 존재합니다. 법을 지키는 사람과 법을 어기는 사람이죠. 그런데 제3의 인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법 없이 사는 사람이죠. 그것은 법 본질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같은 사람이죠. 그래서 예수님같은 분을 법 조문에 얽매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법을 어긴 사람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법 원리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법에 더 철저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일점 일획도 법을 어기려고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다. 난 법을 완성하러 왔다. 그러니까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은 법을 완성시키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법을 초월해서 원리를 아는 것, 인간이 인간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본질을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국가법에 의해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지만 마음 안에서는 하느님법(神法) 안에서는 떳떳한 사람들입니다. 국가법을 어기고 법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벌, 처형된 정치범입니다. 우리나라 순교자들도 다 정치범으로 순교하셨습니다. 법에 의해 처형당했지만 하느님 법에 충실한 모습. 우리들이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원리에 충실할 때, 이세상 법을 초월해서 법 없이 사는 사람. 즉, 하느님 법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회교리의 원리들


1. 공동선의 원리 ...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해 흘릴 피


생소해보인 단어라도, 이미 복음 안에 있는 말들을 도출하고, 이런 말을 붙인 겁니다. 공동선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이 공동선을 알기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와 모두를 위해서 흘릴 피다." 이게 공동선의 원리입니다. 너 한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한다는 것' 이것인데, '공동선'이라고 하니까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라는 거죠. '너희의 죄를 사해주려고 모두를 위해 흘릴 피' 특정 인물이나 단체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모두를 위해서. 우리가 잘 살게 되는 게 선이고, 공동을 붙여서, 어느 한사람이나 부류, 부분에 국한된 게 아니고 모두 다 살아야 한다는 것. 너만 잘살라는 게 아니다. 너만 배불러서는 안된다는 것. 사회적으로 이기심때문에 이해못할 수 있지만, 한 집안에서 엄마나 아빠가 아이들 생각하지 않고 혼자 먹으면서 행복해지나요?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달라진다


그런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세상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가족이란 테두리에서는 이해되는 것이 이 세상 일로 넓어지면 이해를 못할까요? 너는 죽든 말든, 바다에 빠져 죽던 말든, 이제는 다 잊어버려요. 1년이 지나도록 아무 것도 된 게 없는데, "이제 다 잊어먹고 새로 시작합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로 자식잃은 사람들을 또 한번 죽이고 또 죽이며 비수로 찌르고 죽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자기 가족 안에서 이해되는 일을 가족에서 벗어나 이 세상으로 넓히면 그런 일이 벌어지나요? 나만 살면 된다.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것... 그래서 공동선을 이야기하는 거죠.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을 확대시키는 겁니다. 나쁜 놈들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확대시켜야 합니다. 자식과 가족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을 확대시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루카 6,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다른 이의 아들도 내 자식처럼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이 공동선인 것이죠. 늘 복음에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단군왕검이 말한 홍익인간도 같은원리입니다. 


편차를 봐야 한다


그런데 공동선은 1인당 국민소득같은 얘기가 아닙니다. 단순한 합산이 아닙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불, 3만불이라는데, 전체 인구가 각자 그만큼 버는 게 아니라, 평균을 낸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이는 3천불도 못 받죠. 그런 편차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누릴 것 이상으로 누리고 있는데, 만일에 평균치를 내서 1인당 3만불이니까 행복지수가 높다고 말하는 것은 공동선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야 합니다. 한 쪽은 높이 쌓여있고, 한 쪽은 없는데, 공동선이 있지는 않습니다. 산과 언덕을 깎아서 골짜기를 메워야 공동선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 수치상 평균을 잡는 행복지수는 허구입니다. 그래서 공동선은 단순한 합산이 아니죠. 인간이란 존재자체가 인간은 그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것을 전제합니다. 인간의 참된 완성에 이르는 것은 스스로 혼자 완성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 이전에, 한자에서도 한자 획 두개로 사람(人)을 표현했습니다. 저 사람이 살아야 나도 산다. 우리가 추구하는 좋은 것들은 다 좋아야. 


국가와 정치단체의 역할


그런데 사람은 욕심과 이기심을 타고났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 때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중재하고 조절하고 조율해줄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국가공권력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계약을 맺고 만들어준 게 공권력이죠. 수많은 이해들의 충돌 속에서 국가가 중재를 해야한다는 것이고, 정치공동체의 과제는 수많은 이해관계를 조율해주는 역할입니다. 그래서 규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규제 완화,  규제 철폐'를 말하지만, 규제를 없애버리면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힘이 있는 사람이 다 가져갑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그것은 '무한경쟁시키자'. '경쟁해야 발전한다'. '인류발전, 국가발전은 경쟁을 통하는것'이란 생각. 능력있는 사람은 살아남고 게으르고 능력없고, 무능한 이는 도태되는 것. 인류 진화를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그럴듯한지만, 실체를 뜯어보면, 백이면 백 힘센 사람이 다 가져간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승자독식입니다. 


가족의 개념에서 생각해본다면, 가족 중 병들고 약한 아이가 있다면 아프든 말든 그 아이를 수용소로 보냅니가? 오히려 더 신경쓰고, 그 아이한테 집안의 삶의 방향을 맞춥니다. 이걸 조금만 확대하면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도 이런 태도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이해를 못합니다. 왜 우리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손해를 봐야합니까? 내가 왜 기다려야 합니까? 희생해야합니까?


희생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희생자가 생긴다


잘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걸어주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공동선입니다. 경쟁사회 안에서 과연 나는 온전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희생자가 왜 생기는가? 아이러니하게도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희생자가 생깁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 공동선의 가치를 널리 펴야 하고, 국가는 공동선의 원리에 입각해서 목발을 짚고 오는 사람들을 기다려서 같이 오도록 개입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국가의 규제는 100미터를 9초에 뛰는 이들, 부자, 재벌, 기업, 힘있는 사람을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 정치공동체는 힘없는 사람, 목발짚은 사람을 향해 규제를 외치고 있는 꼴입니다. 목발 짚고 걷는 이에게 목발을 버리고 따라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동선의 최고 가치


그렇다면 공동선의 최고가치는 무엇이죠? 그건 하느님입니다. 인간의 참된 삶은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지막 종착역은 과연 어디인가? 바로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인간을 하느님처럼 만드는 것, 그래서 우리 삶이 하느님 안에서 완전해지도록, 그것이 공동선의 궁극적 목적입니. "나는 길이요." 예수님이 제시해 주긴 그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생명에로 도달해 가는 것이 공동선의 궁극적 모습입니다. 



신화(神化)와 성화(聖化)


신화(神化)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dĕĭficátĭo(데이피카티오)라고 합니다. (영어로 Deification, 디이업휘이슌), 그리스 말로는 테오시스(Theosis)라고 하는데요. 옛날 옛날에는 이말(신화, 神化)란 말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신화(神化)된다고 하니까, "어떻게 인간이 신이 되냐?"고 오해를 많이 하면서, 이제는 '성화(聖化)'란 말을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라틴어로 sanctifícĭum(상티피치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는 신화(神化)가 궁극적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이 공동선의 원리의 최고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2.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


두번째 원리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무슨 원리라고 하니까 어려워보이는데, 이것은 사목헌장 69항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목헌장에서 말하는 원리


[사목헌장] 69.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8) 다양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민족들의 합법적인 제도에 적용된 소유권의 형태가 어떠하든, 언제나 재화의 이 보편적 목적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하 생략)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  모든 것들을 어느 특정한 사람 아니라 모든 사람들 다 사용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사람, 어느 단체에 속한 그들을 위해서만 사용되면 안되고, 모든 이가 두루두루 골고루 누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한쪽은 산과 언덕이 쌓여있다면 그것을 깍아서 골짜기를 메워줘야 한다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인 것이고, 이것은 공동선을 위해서 하느님이 주신 것을 골고루 쓰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것을 한 사람이 다 갖고 있고, 다른 쪽은 쫄쫄 굶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공동선 원리에 입각해서 창조된 모든 재화도 너희와 모두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즉 그러한 보편적 목적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 두번째 원리가 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바탕에는 이 세상 모든 것 주인은 너희가 아니라 하느님이란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입니다. 은총의 라틴어는 bĕnĕfícĭum(베네피치움)입니다. 이것은 원래 공짜로 거저 준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것이 재화의 보편적 목적 원리입니다. 네 소유라고 주장하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것이다. 너희 것이 아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창조할 때 아담과 이브는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발가벗고 있엇지.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다 누리고 있었습니다. 왜? 하느님 안에 머물고 있었기때문에. 


원죄의 의미는 무엇인가? 


전세 계약에서 못하는 것은 베란다 트고, 방 두개 트는 것은 원주인 허락없이 할 수 없고, 2년동안 주인처럼 살지만 못하는 게 있다면 주인이다 아니다? 에덴동산도 하느님 것이란 것. 못하는 게 있다는 것. 마음껏 누리지만 못하는 게 있다는 것은 소유주가 하느님. 그래서 원죄는 소유. 소유하지 않았을 때 모든 걸 가졌는데,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겁니다.


원죄를 진 이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은 옷을 입는 것이었어요. 지어입기 시작한 옷에는 주머니 달려 있습니다.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지 않는 소유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원죄이고, 이세상 모든 죄의 뿌리는 소유. 전쟁, 살인, 이런 모든 것들. 주진 않고 내 것으로 만들려는 것. 아담과 이브의 이 모습은 하느님 안에서 다 누리는데, 욕심 때문에 결국 한쪽 쌓이고 한쪽은 패이면서 아름다운 세상이 지옥처럼 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고, 원래없었던 죽음을 인간이 스스로 끌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내용 요약입니다.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가 벗어나려고 하는 것 


그런데 지혜서 내용을 보면, 하느님은 인간을 불사불멸의 존재로 만드시고, 인간을 정말 잘 살으라고 창조하셨지만, 그런데 죄가 우리에게 들어와 죽음이 들어왔다고 지혜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는 소유를 시작한 것입니다.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는 바로 이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거저주셨으니 우리도 거져 줄 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낙원상태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입니다. 이 상태로 되돌리려는 게 재화의 보편목적의 원리가 됩니다. 예수님이 가진 것을 다 나누어주어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받아먹어라. 그렇게 다 주십니다. 오천명의 기적을 행할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죠.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런데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저희 돈이 없어요.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모자르겠습니다."


풍요는 이미 가진 것을 나누는 것 


풍요는 이미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제자들은 더 많은 돈을 얘기합니다. 제자들이 말한 것처럼,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이 있어도 모자르겠다는 것은 지금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은 세가지 유혹 중에서 "돌을 빵으로 만들어 봐라."는 것이 제자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악마는 도망가죠. 예수님이 악마를 물리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풍요는 더 많은 빵에서 오는 게 아니라,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돈을 골짜기로 흘러내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풍요의 원리는 이미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을 유혹이란 걸 압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끌리고, 빨리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고 싶기도 하고요. 그러나 풍요는 더 많은 돈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에서온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성체 성사의 숨은 뜻


그래서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빵으로 만듭니다. 이게 바로 성체성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나를 기억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먹을 걸 더 달라고. 이백데나리온 어치도 모자르다는 제자들. 악마는 다시 제자들 입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눔의 신비로, 장정만 오천명인데, 기적이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뭡니까?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들은 하느님이 공짜로 준 것이란 뜻, 이걸 먼저 초대한 겁니다. 하느님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은 공짜로 거저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겠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모두가 동참하였고, 배불리 먹고 나서도 열두광주리가 남은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음식물 쓰레기 잔뜩 남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리는 가진 것을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받아먹어라 했지, 잡아먹어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주셨으니 너희들도 주라고 하신 겁니다. 부자되세요라고 은행에서 말 많이 하지만, 주지도 않으면서, 줘야 부자되는 거죠. 돈 가지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오히려 '부자되세요.'라고 합니다. 


(중간 휴식)


사회교리의 원리 ②



2015년 3월 25일 저녁. 9시 10분. 기타연주로 두 번째 시간을 시작했다.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리...사유재산과 충돌하나?


재화의 보편목적원리가 사유재산과 충돌하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재화의 보편목적에 충실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사유재산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당의 본당 차량은 쉽게 망가집니다. 왜 그럴까요? 주인이 정해진 게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다 타니까 관리가 잘 안됩니다. 내 차가 아닌 것들, 공동 자가 들어가면 쉽게 망가집니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보면, 관리가 잘 안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유재산이 필요한 것은 책임을 가지고 잘 다스리라고 하느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책임 소재를 분명히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능력에 따라서 서로 간에 격차가 쌓입니다. 어느 쪽은 쌓이고, 다른 쪽은 패이게 됩니다. 농사를 지어도 풍년과 흉년이 다르게 생깁니다. 그러면 꿔야 합니다. 그러다 또 흉년이 들어서 또 꿔가다가 나중에는 종살이를 하는 지경에 갈 수 있죠. 처음에는 똑같이 시작해도 한쪽은 쌓이고, 한쪽은 깍이고, 시간이 지나며 격차와 차별이 생기면, 예수님 말씀대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공동선을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 산과 언덕을 깍아줘야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작업을 해줘야 합니다. 사유재산제도는 있지만, 거저주신 것이니만큼 거기 입각해서 생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똑같이 공동 사용한다는 게 아니고, 주위 가난한 사람 있으면 사랑이란 가치 안에서 그리로 흘러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재화의 보편목적 원리는 누구를 향하는가? 시간이 지날 수록 산과 언덕은 높아지고, 골짜기 깊어지면, 골짜기에서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산과 언덕이 뭔가를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스스로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부자가 먹여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가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흘러가게 하는 게 재화보편목적의 원리가 됩니다. 돈 벌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부유해질 수 있습니다. 


부유함은 은총이다 


교부들은 부유함은 은총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느님이 책임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러한 소명은 부자들의 소명은 자신의 부유함을 가난한 이에게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의 부유함 자체 문제가 아니라, 흘러가지 않고, 고이고 쌓인채로 있는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항상 공동선과 재화보편 목적의 원리에서는 누가 우선적 고려대상인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라자로를 알지도 못하는 부자는 왜 지옥에 갔나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를 때 바닥부터 채웁니다. 바다가 평평한 것은 물이 맨 밑바닥부터 채우기때문입니다. 이 시대 우린 가장 가난한 이에 대해 관심갖고 있어야 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지옥에 갑니까? 지옥에 가는 부자는 라자로 것을 빼앗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부자가 지옥에 갔는가? 라자로가 부자 곁에 있었다는 이유입니다. 라자로를 몰랐습니다. 부자는 문간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겁니다. "전 몰랐는데요?, 잘못이에요?",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닌 거 아닙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무식함은 죄입니다."


나중에 라자로가 지옥에 갑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에게 간청합니다. 물을 찍어서 혀를 식히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그럽니까? 사이에 큰 구렁이 있다고 합니다. 건너가려고 해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이하 생략)


여기서 말하는 큰구렁이 뭡니까.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 세상 안에서 부자가 만든 넘지못한 구렁입니다. 이 세상 양극화. 빈부격차입니다. 그 큰 구렁이 결국 목도 축일 수 없는, 건너갈래야 갈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부자가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수 많은 구렁이 있습니다. 그럼 더 많은 것을 벌어들이는 게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은 나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두가지 방법


가난한 사람을 우선 선택해서 나눈다고 할 때는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불우이웃 돕기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웃을 불우하게 만들지 않는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까지는 잘 알죠. 이웃에게 빵을 나눠주는 것은 잘 합니다. 그런데 이웃을 불우하게 만드는 모든 잘못된 제도들을 없애는 것에는 신경도 안쓰고 관심도 없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가난한 이를위해 형제적 사랑으로 나누는 것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렇게 만드는 제도에는 소홀해 진다는것입니다. 이게 무엇이나면, 사회적 정치적 차원입니다. 사회구조, 정치구조, 이 안에서 더 가난하게 만들고, 더 부자로 만드는 구조를 없애는 것도 가난한 이를 위한 노력이 됩니다. 이 부분 열심 노력하는 이들을 좌파와 빨갱이로 종북으로 비난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빨갱이, 좌파, 종북이라면 예수님이야말로 대빵 좌파, 종북이 될 겁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브라질의 유명한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성인'이라고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  


왜 가난한가? 가난하게 만든느 것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합니다. 공동선을 위해,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를 위해 나눔을 실현하고, 이웃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이웃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없애는 게 중요합니다. 이웃이 울고 있을 때, 달래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웃을 때린 사람들이 더 때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래주는 게 전부인 줄 압니다. 그리고 때리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것이 훨씬 더 본질적인 것임에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 주는 게 전부인 줄 알지, 정당한 빵을 빼앗아가는 이들을 말리는 이들, 이런 일들을 하려고 하면, 신부와 성직자들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방송, 언론들이 있습니다.


거짓 평화


사람들은 잘 믿죠. 그러니까 나쁜 권력자일 수록 언론을 장악하려고 듭니다.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정책, 제도, 세력은 끝까지 저항해서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하지만, 너무 소홀히하고, 교회가 앞장서야 하는데, 우리가 순교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다 정치범으로 권력자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권력자에 대항한 것이죠. 구약 예언자, 예수님, 이땅 순교자들. 사학죄인, 사학괴수, 그 당시 왕권에 대항한 것으로 보았죠. 이 시대 우리가 당연히 그렇게 죽어야 하는데, 그 죽음을 거부한다면 거짓 예언자, 거짓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린다는 것은 거짓평화입니다. 이에 대해서 지혜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의 운명(지혜서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하 생략)



진짜 죽은 것은 마치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 같은 너희들이 죽은 것이고, 의인들은 평화를 누린다는 걸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완전히 끝장난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사는 것은 그 의인들이란 말씀입니다.  이걸 분명히 얘기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가다가 살아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진 것을 주어라


성 그레고리오 교황 사목규정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돌볼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뭘 주는 게 대단한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들 것을 주는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이 나를 통해서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요한 금구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 재물은 우리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난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난 라자로한테 해꼬지한 게 없는데? 난 그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별거 한 것도 없는데?"라고 항변하겠지만, "너가 가진 걸 줬어야지!" 바로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바티칸공의회 문헌 평신도교령 8항에 보면, 정의에 따라 이미 주었어야 할 것을 마치 사랑의 선물처럼 베풀어서는 안 된다. 이미 줬어야 하는데, 주면서 잘난 체 하는 게 아니란 거죠. 이게 바로 재화보편목적의 원리입니다. 



3. 보조성의 원리


재화의 보편목적의 원리도 이것을 위해서 국가권력이나 상위집단의 규제가 필요합니다. 공동선 차원에서 순전히 자발적인 것에만 맡기면 안됩니다. 산과 언덕을 깍아서 골짜기를 메꿔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이런 정치들이 필요합니다. 정당한 세금을 대기업에게 매겨야 하는 데, 부자감세를 하고 그 세금 모자른 것을 골짜기를 더 긁고 긁어서 긁다긁다 강바닥까지 다 긁어버리는 일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가진 상위권력집단은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이 원리에 입각해서 조절해나가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마음이 보조성의 원리이다


힘 센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이 도와주는 것, 힘 센 집단이 힘 없는 집단을 도와주는 게 바로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보조성의 원리는 말 그대로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공동선을 추구하고 재화보편목적원리 추구함에잇어 가난한 사람도 물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두가 함께 추구하는 것이니까요. 남녀노소할 것없이 모두가 함께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만, 과연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우선 먼저 능력을 발휘하도록 키워주는 게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먹을 것만 주면 아이가 제대로 크나? 낚시하는 법 가르쳐줘야지. 고기만 잡아주면 부모님 돌아가시면 어떻게 사나요? 아이가 할 것까지 다 부모가 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도록, 스스로 해나가도록 도와주는 것. 함께 추구해나갈 때,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같은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잘 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가르쳐주면서 공동선을 위해 뭔가 하도록 돕는 게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보조성의 원리란 말이 어려워 보여도,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하는 게 보조성의 원리입니다.그냥 놔두면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치유되어 멀쩡해 지도록 돕는 것. 이미 복음 안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보조성은 라틴어로 전방부대를 후방부대가 도와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대신 싸워주는 게 아니고 잘 개척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걸음마를 하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 마음처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잘 할 수 있도록. 꼭두각시처럼 만드는 건 보조성의 원리가 아닙니다.


보조성의 원리와 참여는 동전의 양면


처음에는 약하고 가난하고 그러다가 그 다음에 키워주면 잘 하게 되었을 때, 공동선과 재화보편적 원리에 한 몫 담당하게 큰다면, 이 단체나 사람은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조성의 원리와 참여는 동전의 양면이 됩니다. 보조성의 원리가 커가면서 하나하나 참여하게 됩니다. 애들은 어리니까 주제넘게 참여하는 데가 적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참여할 곳이 많아지고,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개진하게 됩니다. 


참여의 반대 ... 무관심과 배척


우리 세상 안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너네들이 뭘 안다고 그래!" "끼지마!" 배제시킵니다. 도와주고 키워서 주체로 모든 의사결정을 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곳에 참여하도록 키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여의 원리의 반대는 무관심과 배척입니다. 무관심은 자기 스스로 관심없어서 선거 때도 놀러가는 것.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죠. 내가 마땅히 참여해서 나를 피곤하게 하는 제도와 관행들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뭘가? 그것이 투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돈 없다고 배제시키는 것은 참여를 거부당하는 것. 무관심은 스스로 참여하지 않는 것이라면, 참여를 방해하는 우민화정책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농촌에 계신 할아버지 어르신 분들 중에서 FTA로 쌀 개방이 되어서 농촌에 입은 피해 등에 대해서는 잘 모르십니다. 그냥 올해 쌀 수매값은 얼마인가? 이런 것은 아는데, FTA 뭐니 하면서, 졸속협상 등으로 우리나라 농촌 다 망치는 그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좋다고 뽑아 줍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는 자신이 뽑아준 그 정치인들이 어떤 사람인 줄 모릅니다. 그들이 농촌을 망치고 있지만, 자신이 허리 꼬부라질정도로 일해도 피폐해진 이유가 자신이 뽑아준 그 사람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여를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참여를 못하게 국가기관은 모든 걸 총동원해서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 일 복잡하니까 넌 야구나 봐!", "TV나 봐!" TV를 켜면 막장드라마가 막 나오죠. 어느날 봤더니, 결혼하려고 하니까, "걔는 네 동생이야!" 이렇게 자극적이고 말초신경에 빠져서 세상 사람들 죽어나가는 것을 "왜 그런가?" 생각하게 안한다는 겁니다. 유병언이 하나 잡으면 모든 상황이 끝날 것처럼 몰아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사람 하나 족치면 세상이 끝나나? 그냥 아무 생각없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뛰는 처지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응당 참여하고 따져야 할 일들을 따지지 않습니다. 부패한 권력일 수록 참여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합니다. 참견하면 번거로워지니까, 재미있는 거 틀어주면서, "다 알아서 할테니까 너희는 걱정하지 마세요."라면서 우민화 정책을 펴는 것입니다.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말라? 웃기지마! 참여해야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을 복음화시켜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복음화를 안방에서만 하나요? 성당 울타리 안에서만 하는 것인가요? 우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하느님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분에서 복음화의 사명을 이룬다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정치는 최고로 복음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장 복음화되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복음화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가난한 사람 계속 가난해지지 않게 하려고 가장 먼저 복음화되어야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라


사제가 이런 얘기하면, "불편하게 그런 얘기 하지 마시요!"라고 합니다. 그냥 "하느님께 기도하세요!"라고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12월에 불우이웃 돕기 한번 하는 것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그러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불편한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잘못을 보면서, 십자가를 계속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편안한가요? 그 안에 하느님 사랑이 담겨있고 동시에 우리 죄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봐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 담긴 우리의 죄, 잘못, 무관심, 배척, 이런 죄들이 그 안에 들어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해주신 하느님을 상기하고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사 1시간 30분 보고 끝. 그래서 종교는 성당 안에 있어야 한다. 안방에 있어야 한다. 안방에 십자가가 있죠. 그런데 제일 좋은 자리에는 TV가 있어요. 그 다음 좋은 자리에 십자가가 있죠. 아무튼 자꾸 하느님을 가둬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제야말로 가장 정치에 민감해야 하고, 교회가 가장 정치에 민감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은 무식한 겁니다. 또 어떤 때는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민주주의는 참여입니다. 교회도 중요한 민주주의의 한 축입니다. 민주주의에서 더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명으로, 두루두루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여를 방해하는 이들, 가로막는 불의한 시도들이 있다면 없애려고 저항해야 합니다. 수많은 불의한 시도들, 심지어 부패한 권력이 있다면 끌어내려야 합니다. 이것이 참여의 복음입니다. 


4. 연대성의 원리


연대는 함께 협력하는 것입니다. 어우러짐이죠. 연대성의 원리를 쉽게 표현하면 어우러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유기체 교회론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코린토 1서 12장 12절부터 31절까지입니다. 


하나인 몸과 여러 지체(코린토 1서 12,12~31)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18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생략)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이하 생략)

 

홀로 존재하듯이 살아야 할까

이 말씀은 연대성의 원리에 바탕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다 이겁니다. 우리는 홀로 독립된 저 사람 삶과 무관한 존재가 아닙니다. 저 사람 죽어도 나만 살아도 되고, 저 사람이 불행해도 나만 행복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이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고, 저 사람이 불행하면 나도 불행해 질 것이란 말입니다. 우린 하나의 생명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곧 유기체입니다. 각자 고유한 존재하지만 완전 독립되어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두 거대한 생명으로 이루어져 유기체로 있다는 것입니다. 홀로 존재하듯이 살아서는 안된다는 게 연대성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 개개인들이 상호 협력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solidáris(솔리다리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인데, 굳게 결합한다는 것, 우린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이가?"란 말이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했지만, 종교적으로 볼 때, 우린 남이 아니고, 우린 한 몸입니다. 한 가족의 차원을 초원해서 한 몸. 그래서 연대성의 원리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생각하라. 결국 저 사람 고통이 무관해보이지? 아니다. 너가 행복해지려면 저 사람도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게 연대성 원리의 핵심입니다. 

천 조각의 불완전함


그래서 어우러짐이 중요합니다. 보신각 종을 비유로 들면, 머리부분을 탕 때리면 어느 부분이 울릴까요?  (묵묵) 다 울리지! 아랫부분 때리면? 다 울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고 유기체로 이뤄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어우러짐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천개의 불완전함... 직소 퍼즐을 예로 들면, <최후의 만찬>이라는 직소 퍼즐을 보면, 조각 하나하나 보면 천개의 불완전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우러지다보면 한 그림에 빈공간 없이 완전한 하나의 그림이 됩니다. 하느님이 인간세상을 그렇게 창조한 것입니다.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어우러짐으로써 완전해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 한조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우린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의 비유가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모두가 참여하는걸 강조합니다. 어우러짐. 거대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지 좋았다'고 하셨지만, 오늘날 사회는 수천조각이 불완전함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본래 만드신 세상은 어우러진 세상입니다. 다른 사람 불행에 귀막고 눈감고, 너가 배고프든 말든 상관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것입니다. 연대성의 원리 안에서 기꺼이 산과 언덕을 깍아서 메꿔주는 것입니다. 너를 채워주는 것은 곧 나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다 망합니다. 


액수가 아니라 격차


지금 핵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게 조금이라도 잘못 되면 우린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 덜 가지고, 조금 불편해도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 연대성의 원리입니다. 사람들은 연대성의 원리를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평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산과 언덕을 깍아서 골짜기를 메워주면 되는 데 그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이걸 싫어하고, 차별과 격차를 원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고 힘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00억이 있으면 부자인데, 이 세상 개념에서는 부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전세계 60억 인구가 100억씩 갖고 있다면 부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개념 안에서 부자의 개념은 내가 1억을 가지고 있어도 상대가 나보다 덜 갖고 있어야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액수가 아니라 격차가 중요한 것이죠. 내가 왕이면 남은 비천해지고 내 밑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왕인 것이죠. 


지옥을 누가 만들었나?


하느님 나라는 개념이 반대입니다. 모두가 부자고 모두가 왕이고, 모두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거부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고, 지옥으로 기어들어갑니다. 지옥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느님? 아니,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격차와 골, 너와 나 사이에 구렁이 만들어져 있어서 건너갈려고 해도 건너갈 수 없다.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격차를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산과 언덕을 깎아서 골짜기를 메꿔줄 생각을 안 합니다. 내가 부자가 되려면 저 사람은 없고, 나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차별과 격차를 좋아하죠. 


거지들끼리도 갑과 을이 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 마음에도 그것이 들어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부자들이나 대기업을 배불리우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찍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난한 이들 중에도 처지는 가난하지만 마음 속에는 똑같은 마음, 격차와 차별을 선택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하철 노숙자들 사이에도 갑과 을이 있어서, "거긴 내 자리야!, 저리가!"라고 툭 차기도 하고, 거지들 사이에서도 갑과 을, 감방 안에서도 갑과 을, 격차 안에서 차별 안에서 존재를 확인하려는 게 세상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골만 깊게 만들고 결국 다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연대가 될까


그래서 연대성의 원리는 우리는 하나다. 이 모든 것을 가족의 틀 안에서는 다 이해되는 데 그 울타리를 뜯어내면 이해하지 못하고, 남의 것 빼앗고 무관심하게 눈감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연대성의 궁극은 무엇입니까? 바로 어우러짐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연대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죄를 짓고 그럴 때 다 없애고 새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서 오신 것이 바로 최고의 연대성의 원리입니다.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저 높은 곳의 하느님. 인간과의 격차가 가장 큰 창조주께서 당신이 그 격차를 없애고 나와 똑같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연대입니다.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이 되신 것이 연대성의 극치입니다.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께서 이걸 당신이 없애시고 똑같이 되신 것. 차별과 격차를 없애시고. 그런 모습을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되시고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 바로 연대입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희생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냥 저절로 연대가 될까요? 앞서 말한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처럼 부자들이 더 힘을 써줘야 합니다. 부자들이 내려가 줘야합니다. 연대의 원리는 가난한 이들보고 "너희들이 올라와!" 한다고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부족한 것을 남은 사람들이 끼워줘야 채워지는 것입니다. 연대는 그렇게 밑으로 내려가는 사랑 안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모습. 공동선,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 참여, 연대성의 원리 등 이 모든 내용들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서로 사랑하십시요." 바로 이겁니다. "내가 사랑한 것처럼, 자기 이웃은 몸처럼 사랑하십시요. 가진 것을 줘라. 먹을 것을 줘라. 받아먹어라. 이 내용이 다 사회교리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범위를 확대시켜라. 그래서 가족들에게 하는 그것을 바로 이웃에게도 하라는 게 지금가지 내용의 요약입니다. 가족들에게 적용하고 실천하던 이 모든 원리들을 이웃에게도 적용하고, 울타리 넓혀라. 가족끼리 하고 있는 걸 이웃에게도 하라는 것이 오늘 강의의 요약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용 23장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其次는 致曲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아 爲能化니라


기가 막힌 얘기입니다. (다들 웃음) 몰라요. 이거? 이것은 영화 <역린>에 나오는 얘기이고, 그 주제입니다. 뜻은 이렇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라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하자는 것.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공동선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 그러니까 "그래 그거야!" 하면서 거창하게 '남북회담'이나 '6자회담'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모든 것은 바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위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밝히라는 게 아닙니다. 촛불 하나 켜면 내 앞과 뒤에 있는 사람들을 밝힐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할 때, 결국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왜 망했습니까?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란 나라를 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버티는 이유는 어딘가에 의인 열 명의 역할을 누군가가 있기때문입니다. 작은 촛불 켜고 있는 이들이 있기때문에 안 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4년 4월 30일 개봉. <역린> 누적관객수 3백85만명. 영화는 정조 즉위 1년, 왕의 암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엇갈린 운명과 역사 속에 감춰진 숨가쁜 24시간을 담고 있다. 100억원이 총 제작비가 투입되어 이에 따른 손익분기점은 보통 관객수 400만명 이상이어야 하지만, 흥행 선전을 위한 의도였는지 몰라도 320만이 돌파된 5월 13일경, 손익분기점 관객을 돌파했다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나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바뀌나?


빵 다섯개 물고기 두마리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이백데나리온 어치의 빵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옆 사람은 먹이라는 것이지, 오천명을 먹이라는 게 아니다. 나같은 사람 천명이면 오천명을 먹이는 것. 내가 열명을 먹일 수 있으면 오백명만 있으면 오천명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영화 <역린>의 말미에 보면, 정조대왕이 나쁜 놈 '광백'(조재현 분) 인간백정의 소굴을 찾아가서 아이들을 구출합니다. 그 때 광백이 뭐라고 하냐면, "아이쿠, 나 하나 죽일려고 왕까지 왔네? 나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바뀔 거 같아?"라고 말을 하자 마자 정조대왕은 그를 확 죽여버립니다. 이 마지막 장면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 하나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너부터 먼저 죽이자!"라고 한 겁니다. 


세상을 바꾼다고 거창한 것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내 앞의 작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가는 겁니다. 사랑이란 옆 사람에게 던지는 작은 미소, 옆에서 주눅든 사람의 등을 두드려지는 것. 하늘의 태양이 될 생각을 하지 말고 작은 촛불이 될 생각을 하기 바랍니다. (끝)


2015-3-25 수요일 저녁 10:09 종료



2015년 3월 25일(수) 하기동성당 밤 10시 09분. 대전교구 사회교리학교 제13기, 4주차 수업 [사회교리의 원리]의 강의가 끝났다. 이 강의는 필자의 기록을 토대로 재정리된 것으로 실제 강연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의신부님의 의도와 맥락에서 벗어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