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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20150318] 한정현 신부의 성서와 사회교리(사회교리3강)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5.

2015년 3월 18일 하기동성당

한정현 신부의 성서와 사회교리

한정현 스테파노 신부


우리는 성서를 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저는 3년째 (대전)교구에서 이뤄지는 사회교리의 한 파트를 맡아서 합니다. 그 주제는 [성서와 사회교리]입니다. 처음엔 부담이 많이 되었는데요. 비록 제가 (로마에서) 성서를 공부했고, 그 중 구약, 구약 중에도 성서가 쓰여진 언어 전공자라서, 구약성서의 언어와 쓰여진 언어의 주변언어, 문화들 이런 것들 전공한 사람이라서, 많은 성서를 공부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분들도 고백하시겠지만, 우리가 성서를 안다고 말할 자신있는 사람 많이 않으니 계속 공부해나가는 단계, 끝까지 계속 될 것인데, 덧붙인 말이 사회교리 아닙니까? 


'사회교리'란 오래전 부터 쓰여진 흔한 단어였다


안타깝게도 프란치스코 교황님 뿐만 아니라, 그 전 교황님들도 사회교리란 말을 많이 쓰셨는데, 저는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 전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이후로 서품을 받아서 사제로 살면서, 또 외국에 (유학) 가서 공부를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사회교리에 대해서 공부 자체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저희같은 세대가 신학 교육을 받을 때에는, 그래서 예비자 교리의 일부분인 줄 알았습니다. 어떤 파트 중의 한 파트로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조금 공부해보니, 어마무시하더군요, 이게 "와아!, 사실 성서를 다 이 안에 포함시킬 수도 있겠다!"고 여겨질 정도로 굉장히 중요했는데, 외부의 힘이던지, 내부의 힘이던지,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 


부족함은 교회가 채워준다


그래서 지금도, 제가 교구에 돌아와서 3년째 이 말씀을 드리면서도, 제가 뭘 가르쳐드릴 수 있다? 대단히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성서와 사회교리]를 어떤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한지 말씀드리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다만 부끄러우면서도 위안이기도 합니다. 모든 부족함은 교회가 다 채워준다는 말이 성사론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부족한 것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란 희망을 갖고 강의를 하겠습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부분에 대해 묵상하고 성찰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Catechesis와 Doctrine


개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요. 

Catechesis ... 카테케시스 , 교리란 말입니다. 교리를 받는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신앙공동체의 지식적 측면으로 알려질 만한 것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이론적 측면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Doctrine ... 이것은 뼈대가 정확히 있는 원칙을 세울 때 선언되는 것, 그것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도권의 가르침, 그래서 교의라고 씁니다. 단순히 이론 뿐만 아니라, '교리'의 이(理) 자는 지식적인 걸 안다는 것이고, '교의'의 '의(義)'자는 자연스럽게 뼈대 있는 걸 통해서 행동을 한다라는 실천이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는 social dictrine 라고 합니다. 사회교리라고 하지만, 교리라는 말 뜻에는 지식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뼈대가 우리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 그런데 교리와 교의에 대해 인터넷을 찾아보면 교리를 doctrine, 교의를 dogma로 구분하기도 한다.)


2015년 3월 18일(수) 저녁 8시05분 하기동 성당 2층 성전 모습. 대전교구 사회교리학교 제13기의 3주차 수업


성서와 사회교리


성서와 사회교리가 이 시간 제목입니다. 이것은 꾸준히 강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와 사회교리, 즉 ① 성서가 존재하면 사회교리와 비교를 해보라는 것인가? 아니면 ② 성서의 내용 중에 사회교리에 쓰일 수 있는 것만 추출해서 다뤄보라는 건가? 아니면 ③ 사회교리 중 이론적으로 정착된 것 중에 이론적 근거 만들기 위해 성서를 활용해보려는 것인가? 뉘앙스의 차이이기도 합니다만, 아마도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 성서와 사회교리라고 제목을 지은 것 같습니다. 양쪽 다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성서 내용 중 사회교리만 뽑는 것도 위험하니까요. 전체를 봐야합니다. 이론적 근거를 대는 것은 더더욱 위험합니다. 


나를 위로해주는 성서 한 구절이 갖는 의미


내가 신앙인으로 살며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하고, 위로받고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성서의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내 심리상태가 어떤 상태인데, 성서를 넘기다보니, 내 마음을 전하는 구절이 있다고 보면, 그 말씀을 나의 것 화(化)시키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서와 사회교리]란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이라도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한번이라도 읽으신 분은 성서는 그 자체로 사회교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성서 그 자체가 사회교리


저는 적어도 구약성서 안에서는 그렇게 느끼고요. 신약성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걸 다 드러내시는 삶을 몸으로 살아내신 것이니까요. 감히 말하건데, 이 두가지 말을 다 성서에 붙일 수 있다고 이 교리도, 이 교의도, 그러면서 성서 전체가 사회교리의 기본적인 흐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원래 사회교리학교에 가서는 정말 뛰어다니는 식으로 말씀드렸지만, 이전 사순은 왜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나? 오늘은 지난 2년간 강의록도 안 가져오고, 사순시기를 보내는 저를 지난 주 생각하면서, 성서 안에서 우리가 일관되게 우리 신앙과 사회교리 측면에서 함께 나눠볼 수 있는 주제가 혹시 있을까? 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성서는 강한 권력자의 언어였나


가만히 보면 성서가 강한 사람의 언어인가 아니면 약한 사람들의 도움이 되는 입장으로 말해지고 행동되었는가? 2분법이 아니라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가? 그 의미를 본다면 사회교리가 더 분명히 다가올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과거를 선물로 주십니다. 조금전 지금 제가 드린 말씀과 시간과 오늘의 일상은 과거라는 단어로 모두 포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때문에 힘을 얻는 사람, 힘을 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을 잃는 건 후회의 감정이 남습니다, 그 때 잘할 걸, 한마디라도 더 해줄 걸, 그런 후회죠. 잘했다면, 잘한 걸 뿌듯해하며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어찌되었든, 지나간 것, 흘러간 것은 다 흘러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바로 5분 뒤, 아니면 조금 더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그런데 어떤 힘을 주님께서 주셨냐면, 기다리고 희망하는 힘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는 이 육신은 지금 이 순간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는 데에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나의 결정인가?


오늘을 돌아보았을 때, 자랑하고 싶은 게 있으신 분?, 후회가 있으신 분?  그러면 지금 이후에 희망하는 게 있으신 분 있겠죠? 뭐가 그런 게 있나요? 그런데 나는 어디 있는가? 난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게 누구의 결정입니까? 전 저의 결정일까요? 성서는 나의 이야기인데, 나를 잠깐 빼놓으라고 우릴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내 말이라면, 내가 그 말을 선택하고 결정한 게 아니라,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잠깐 떼어놓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끌어주신 분이 주님이라고 성서는 계속 고백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지금의 개인의 역사는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렇게 되도록 만든 주님의 결정이고 선택이라는 것.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우리가 단순히 나의 것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의 힘이 나를 통해 살아지도록 그렇게 나를 그분의 도구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성서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내가 이걸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야훼 하느님께 조금씩 혼납니다. 그러나 그 혼나는 것도 매를 맞는 게 아니라, 그걸 깨우치도록 혼이 난다는 겁니다.


야훼 하느님께 혼이 나야 하는 이유


그래서 성서를 단 한마디로 말하면, 주님이 개인의 역사와 공동체의 역사를 통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역사하시고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이끌어가시는 데에 내가 내맡긴다고 고백하는가? 아니면 항거하고 반대하고 거부하는가?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 믿음이란 내가 선택해서 이 만큼 된 것이라고 고백하면 좋지만, 그렇게 대부분 신앙인들은 내가 나를 성장시킨다는 위험에 빠집니다.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 되었다고! 그런데 인간은 응답을 했을 뿐이지, 그걸 이끌어가는 분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 정말 많이 고백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때 그렇다고 생각하다가, 그건 돌아서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서를 볼 때는 그래서 내 힘을 빼고, 날 비워놓으라고. 그 수많은 역사와 스토리와 수많은 인물을 통해서, 나의 힘을 쥐어서 이어가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매순간순간 부르심에 지금 이 순간을 살면서, 주님의 개입하심과 역사하심을 매 순간 느끼는 존재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힘을 빼고, 날 비워라


지나간 과거는 역사로 남습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예상할 수 있든 없든 다가오지 않은 그 희망으로 그대로 남습니다. 이 두가지에 반대방향의 양화살표(과거⇔미래)를 과거와 미래로 이렇게 적은 이유는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이 서로 긴장된 관계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살아있음이란 바로 긴장입니다. 과거에는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방향을 알았고, 이후로는 또 나침반으로 방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나침반은 고장난 나침반입니다. 멈춰서있다면 제대로가 아니죠. 제대로 된 나침반이라면, 미세하게 계속 흔들려야 합니다. 정확히 딱 서있으면 고장난 것입니다. 우리 삶 속의 그런 긴장과 떨림, 때로는 하느님을 두려워한따고 표현하는 그런 두려움. 그런 게 없으면 편하게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 의외로 많습니다. 그 녀석만 없으면 살만하겠다. 이것만 해결하면 살만하겠다. 그 녀석을 보면 한 대 쥐어박아야 겠다. 그런 생각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래서 뭔가 딱 멈춰서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인간본성상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두렵고 떨림이 인간을 지탱해줍니다. 


인간을 지탱해주는 건 두려움과 떨림


그래서 사회교리란 '확답을 주는 것처럼 말하는 것의 취합'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금 내가 불안하고 떨리고 두려운 이것을 통해서 나침반이 살아있는 것처럼, 동방박사를 인도한 별이, 궁창에 어둠이 있어야 빛이 발하듯이, 개인의 역사, 공동체의 역사, 국가의 역사에도 모든 것이 완전 해결될 것 같은 확답을 통해 우리 인간사에 행복을 주는 게 아니라, 어둡고 떨림을 통해서 매순간 하느님은 개입하시고 이끌어가신다는 측면에서 성서는 계속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하는 인간] 회칙을 발표합니다. 이것은 레오 13세가 발표한 [새로운 사태](1891) 반포 90주년을 기념해서 내신 것입니다, 거기에 3항에 보면, 실상 사회교리 근원은 성서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특히 복음서와 사도들의 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기쁨과 희망]이라는 교회 헌장 23항 보면, 그리스도교계시는 창조주께서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새겨준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이 우리 사회생활의 법칙이고, 그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 사회교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이미 교도권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동과 인간] 노동 문제는 사회 문제의 관건

3. 사회의 객관적인 현실을 진단하든지 (중략) 인간의 노동에 관한 문제는 자연히 빈번하게 대두된다. 이 문제는 사회 생활에서도 교회의 가르침에서도 이제는 불변의 요소가 되었다. 더욱이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 속에 노동 문제가 언급된 것은 훨씬 오래된 일로 최근 90년 동안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실상 교회의 사회 교리는 그 근원을 성서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특히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간에 두고 있다. 처음부터 사회 문제는 교회의 가르침에 속해 있었다. 교회는 사회 속에서 인간과 생명을 인식했으며 특히 각기 그 시대의 필요에 따라 사회 윤리를 다루었다. (이하 생략)



창세기를 보라


특히 구약성서를 보면, 창세기를 통해서 그리스도 인간학의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성찰한 것입니다. 특히 앞부분을 보시면, 인간이 창조되고, 어떻게 자신의 나약함에 빠지고, 나약함에 빠지고 나서도, 자신 스스로의 양심에 거스르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타인도 나약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걸 죄라고 합니다. 죄는 나혼자 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공범이 있다


아담과 하와의 첫 얘기가 그렇습니다. 이 열매만 먹지 말라고 했는데, 나중에 아담아 너 어디있느냐 하니까, 히브리 원문을 보면 '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 대답은 '예, 여기있습니다,'인데, 하브리 원문은 '예'라는 말을 하다가 흐지부지하게 끝납니다. 뭔가를 잘못한 아이가 있을 때,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그 아이를 부릅니다. "누구야!"라고 불렀을 때, '예!"라는 대답이 조금 시원찮은 아이들처럼, 자신이 뭔가 잘못한지를 안 것처럼, 아담도 그런 태도였던 것입니다.


남 탓이요! 남 탓이요!


아담은 그걸 하와에게 돌립니다. 우리 말로, 저는 절대로 그럴 생각이, 하느님 말씀을 거스를 마음이 요만큼도 없었는데, 지어미가 그러니 따르는 게 도리일까 싶어서, 내 생각은 아니지만, 저사람 의견을 따라야 할 것 같아서? 그러자 순수하신 하느님은 다시 하와이게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그런 잘못을 하도록 전가받은 인간은 그 순간부터 죄가 나의 것만 되지 않고, 누군가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되도록 만들어진 겁니다. 그 얘기를 안 들었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구해주기는 커녕,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 지아비의 얘기를 다 들었을 하와는 그걸 말할 수 없는 존재에 전가시킵니다. 나는 당신이 아시는 것처럼 그런 일을 할만한 사람이 아닌데, 뱀의 간계에 넘어간거라니까요. 


정리정돈이 원래적 상태


뱀이 우리의 가장 사회적인 현상, 사회생활에서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중에, 꼭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것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겁니다. 죄는 원래 성서적 의미는 정리가 잘 되어있어야 하는데, 무언가 정돈되어 있는 상태를 흐트려트려 놓은 것, 무질서한 것으로 만든 겁니다. 원래 인간이 창조된 본성은 주님의 마음을 살도록, 주님의 마음으로 정돈되어 있도록 한 것을 스스로의 계획으로, 선택과 결정으로 어그러트린 것, 그것을 최초의 원죄에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거은 가정과 사회로 확대해서 묵상하면 엄청난 것들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현상을 한번 보십시요. 요즘은 하도 세월호 얘기를 많이 한다고 하면서걸 귀찮고 싫어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애들이 왜 거기 있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사회생활하다가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체험을 합니까? 내가 지금 여기 있어야 하는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물리적 위치일 뿐만 아니라, 내 내면에서 함께 흘러나가는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스려라'의 의미


내 마음은 어디있어야 하는가? 몸은? 그것은 내 모든 역사에서 하느님은 매순간 바로잡고 정돈사켜가시려고 개입하고 계시고, 인간은 흐트려 트려놓으려고 본성상 그러는 건 아닌가? 그래서 인간학의 첫번째 사고들이 나오는 창세기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 모든 것을 다스려라'라고 번역하는데, '다스린다'는 말을 요즘 이해하기 쉬운 말로 옮긴 것이, 원래는 '다스린다'는 말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쉬웠던 모얍니다. 그 히브리어 동사를 제대로 번역할 현대어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서가 그렇게 번역하는데, 쉽게 말씀드리면, '세상 모든 것의 가이드를 잘해라'하는 의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의 가이드를 잘해라


성지순례와 여행을 다닐 때에 내가 모르는 곳을 여행하면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가이드는 어떤 사람입니까? 설명을 잘해주는 사람? 좋은 가이드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해달라는대로 다 해주는 사람? 이 가이드가 지니는 의미, 성서적 의미는 그곳을 처음 가보는 사람을 위해서 그곳을 미리 가본 사람입니다. 그것이 원래 가이드에게 쓰는 말입니다. 내가 처음 가보는 곳을 미라 가본 사람,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세상을 다스려라고 했을 때, 세상에 대해서 가이드를 잘하라고 인간을 보내셨는데, 인간이 그 세상에 대해서, 내가 너희를 어느 곳이든 보내면, 그곳에 너희들이 알고 느끼고 깨달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마련된다는 걸 함축한 단어가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요즘같으면 차라리 다 이 세상도 잘 좀 다스려주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가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그런데 먼저 가본다는 것은 세상에서 우리를 다스린다는 사람도 그 부분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우리들 삶의 모습에서 오는 희로애락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가본다는 것은 그곳의 정보를 아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게 될 모든 감정들, 즉 희로애락을 거기에서 미리 체험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창조된 인간의 소명은 주님이 던져주신 곳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 주님의 뜻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것이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처음이고 사회교리의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시편 8장 6절과 7절을 묵상


하느님 안에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시편 8장에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8,6절 말씀입니다. 


6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7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시편 8장 7절에서 나오는 '다스림'도 그런 뜻입니다. 



성서와 사회교리 ②


스무 바늘을 꿰맨 까닭


저도 10년 넘게 외국갔다 와서 본당(버드내성당)에 발령 받아서 살고 있는데요. 성당에서 제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분은 안 계시고, 그래서 혼자 해먹고 삽니다. 그래서 잘 먹어서 찐 게 아니라 부은 겁니다. 지난 해 11월 1일, 11월은 위령성월의 달이기도 해서요. 저는 영혼들을 생각하며 오늘은 단식을 해야겠다. 토요일이었고, 일찍 자자. 그랬는데, 딱 누웠는데, 냉동칸에 보관된 추석때 갔다주신 빈대떡 두덩이이 생각이 난 겁니다. 그래서 생전 들지도 않았던 큰 칼을 들고 어떻게 하다가 쓰윽 미끄러져서 (손바닥에 스무바늘을 꿰매게 된 사고발생) 그래서 신자분들이 말씀하시길, "다음번에는 꼭 해동을 하고 하시라고" 걱정을 해주시기도 했습니다.


손을 베인 사고의 본질


저는 그 사건 후로 본가 어머니를 보러 가지 않습니다, 그 후로, 작년 11월부터 어머니 눈에 띄일까봐. 이 이야기의 본질은 칼에 손을 이십바늘 꿰맨 게 아니고, 그냥 잤으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내 배를 채우겠다는 마음이 그 순간 들었다는 거죠, 지향은 단식하겠다는 지향은 좋았는데, 그 때 함께 들었던 생각은 '그래 저녁은 잘 안 먹으면서 살은 좀 빼는 걸로!', 이 생각이 조금 더 커졌습니다. 원래는 세상을 떠난 영혼을 위한 단식이었는데, 다른 지향이 슬며시 들어온 겁니다. 


원래 지향이 사라지자 배고픔이 찾아왔다


원래 지향이 사라지자, 갑자기 배고픔이 찾아온 겁니다. 더 쉽게 유혹에 빠진 겁니다. 그리고 빠지고 나서는 그것(냉동된 빈대떡)을 자르기 직전에는 저를 한참 합리화를 합니다. 저 혼자 있으면서도, 오래 된거니까 빨리 먹어야지. 또 생각도 계속 바뀝니다. 유혹에 빠지면서도, 두 달 좀 더 지나면 버려야 되니까 빨리 먹어야지. 그러다가 이렇게 베고 나서 응급실에 가서 꿰멘 다음에 어떤 생각을 했냐면, 결국 어떤 일을 겪으면 지향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처음으로 시작되기 이전으로 날 되돌립니다. 한 가정이 함께 밥 먹자고 했는데, 그 때 따라갈 걸. 


핵심은 나약함


우리가 특별한 사건이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나약함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서가 대부분 약한 이들이 주인공이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성모찬가를 마니피캇이라고 합니다. 다 아시죠? 


Magnificat ( 참고. 위키피디아. 영문보기  한글보기

라틴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마뉴 + 파체레. Magium은 크다, facere는 뭘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뭘 크게 만든다는 것의 뜻입니다. 기가 막힌 건 이런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보잘 것 없음이 핵심


이 중에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보잘 것이 없습니다. 보잘 것 없다는 것에서 그러면 뭔가를 크게 만든다는 것. 그래서 그 그 뜻은 누군가를 큰 것으로 이해해주는 것, 만들어주는 것이 찬송의 의미가 됩니다. 대단히 신적 영역으로 보이지만,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구원계획의 신비. 다른 이를 높은 사람으로 들어올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만나는 사람을 들어올려주는 연습을 해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높은 사람으로 들어올려주는 것을 연습하고, 또 익숙한 것.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란 첫구절은 다른 사람 안에 보이는 하느님을 내가 보는 것에 익숙한 것. 왜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다음 초기 그리스도교는 모여모여 신앙생할을 이어나갔잖습니까? 우리나라 초기교회처럼 박해를 많이 받았죠?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박해에 앞장섰다고 사울이란 이름으로 그랬다고 스스로 고백했죠. 저 다마스커스, 이스라엘 약간 북쪽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집회활동을 신앙활동 계속한다는 얘기를 듣고 때려잡으러 가는 길에 예수님 만난거잖아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개고생


초기시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유다인들이 초기 신자들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나자렛은 도시 취급도 받지 못하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미 모든 기득권을 누리고 있고 정치사회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본인들의 방식으로만 살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데 어떤 주저함도 없던 유다인의 한 무리들, 그 무리들을 정말 보잘 것 없는 비천하기 짝이 없는, 알려지지도 않은 도시 출신에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을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게 어쩔 수 없이 듣긴 했지만, 이 유다인들 미음 속에는 그것이 언젠가는 복수해야 할 아주 폐부를 찌르는 부정적 체험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박해를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뭐? 그래서 하느님이라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며? 사람의 아들이라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매?


복음에도 예수님을 박해하던 병사들이 옷을 찢으면서, 야! 하느님 아들이라며? 네 목숨이나 구하라고! 그렇게 힘있고, 하느님 아들로서의 권능을 지녔으면 자기스스로도 구하고 세상도 구하고 모든 것이 정돈되고 바로잡혀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비웃고 박해하고 죽이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곳에 머물 수 없어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터키로 옮겨다니며 근근히 살았습니다. 신약성서가 희랍어로 씌여진 데에는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겁니다.


힘이 강한 예수님 vs. 나약한 예수님


예수님이 강하고 힘이 있었다면? 그러면 당신도 어려움을 체험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어려움없이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는 건 아니었을까? 만일 하느님 아들이 인간 모습을 취하셨으나, 모든 권능을 떨치셨다면, 모든 사람이 와하고 몰려갔다가, 몇 번 권능을 보고나서는 어떤 흠이나 부족함이나 나약함도 보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몇 번 예수님 설교 말씀 듣고 이적 행하시는 거 보고 집에 가서는 나는 왜 저 분을 바라보면 부끄럽기만 한가? 하면서 그 다음엔 예수님 따라다니는 걸 주저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그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신 것, 그래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느님 스스로가 이미 인간의 나약함을 취하기로 마음 먹은 건 아닌가? 하느님 원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마음은 인간의 나약함을 똑같이 살겠다는 당신의 본성에서 드러나는 건 아닌가? 그게 잘 드러나는 게 필리피서입니다. 그런데 그 준을 따르던 무리를 박해하던 사울은 그 이름을 버리고, 바오로라는 아름을 갖습니다.


사울에서 변신한 바오로의 탄원


고린토전서 다 읽어보신 분들은 바오로가 그 타락했던 고린토 공동체에게 읍소하고 부르짖는 말씀들 중에, 나 옛날에 정말 잘 나갔던 사람입니다. 나 율법 다 아는 사람이었고. 그 율법을 지켰는지 안지켰는디 해석해주는 사람이었고, 나 대법관이었던 사람입니다. 나힌테 율법 배운 사람만 해도, 다 그들이 여기서 날 스승으로 우러러보며 율법학자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내가 한없이 약한 존재라는 걸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랑을 하려거든, 하느님의 강함을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나의 약함을 자랑하려 합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약함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인간인 내가 내 약함을 깨닫고 인정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도 비슷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 사람을 들어높여주려고 하는 것, 저 사람이 높은 이라고 그렇게 내가 인정해주는. 것, 그게 나의 약함을 통해서 그 사람을 올려줌을 통해서 하느님께 찬미드리는 게 마니피캇의 의미입니다.


성서 전체에서 이론적으로 [그리스도교 인간학]이나, 윤리신학의 [대 사회윤리] 분야 등에서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만, 전체를 놓고 보면 결국 내가 나약함을 인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게 성서에서 사회교리에 접목시킨다면, 깨달을 수 있는 건 인간의 나약함을 통해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뤄가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약함을 묵상하고 살아가야


십자가를 바라보면, 강함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신 게 아니라, 권능과 영광을 통해서 인간에게 빛을 주시는 게 아니라, 어둠과 나약함, 보잘것 없고 비천함 이걸 너네도 그렇게 살라고 보여주신 게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하느님의 약함이 세상의 강함을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신 것이고,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하느님 말씀을 통해 따르고자 모인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 약함을 묵상하고 살아가겠다는 그런 다짐과 실천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닌가? 


성공과 파워를 말하는 교회들


성공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합니까? 그런데 진정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도 보잘 것 없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보잘 것 없지만, 그 사람들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역사를 내가 보여주는 것, 거게에서 오는 것이 진정한 하느님이 아닌가? 그래서 성서는 나 중심이 아니고, 나를 비켜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내 것이 조금 비워지고, 비워지면 뭔가 채워지지 않으면서 약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약함이 내 안에 지리잡아졌으면 좋겠다. 


구약성서 전체로 놓고 보면, 그리고 신약성서를 포함해서, 성서와 시회교리라고 하면, 약함의 역사 안에서, 약함의 조건 안에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끌어가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서구절을 몇 개 정리해보겠습니다. 먼저, 인간이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창세기 1,26-30장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2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시편 8,6-9까지 함께 읽었습니다.  


 시편 8장  5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6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7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8 저 모든 양 떼와 소 떼 들짐승들하며 9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입니다. (*참고. 8장 5절은 필자와 인연있는 한 신부님의 서품성구여서 기록에 남김)


죄는 정돈된 걸 흐트려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그 얘기부터 이어집니다. 원래 무질서한 것에 동참한 게 아니라, 원래 하느님것으로 정돈되어 있는 걸 인간이 흐트려놓는 것이 죄입니다. 여기에 누군가 억압하고 누군가 폭력을 행사하는 일들이 빚어집니다. 그래서 가정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데요. 창세기 3장 16절부터 19절까지에 들어있습니다.


 창세기 3장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위의 구절처럼) 창세기 3장 16절에서 19절을 보면, 여자야 이렇게 살아갈 거다. 남자인 너는 이렇게 살아갈거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가정 안에서 춛분히 묵상할 수 있는 주제들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 3절부터 16절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창세기 4,1~16)이 나옵니다. 4,3-16절은 억압과 폭력이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은 바벨탑 이야기를 묵상하게 합니다. 원래 하나의 말이 각자 흐트려지면서, 또 국가 안에서는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 보러가기)


아모스서는 8장 4절부터 7절을 통해서 속이고 착취하는 자들을 거슬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예언자 아모스가 말하고 있습니다.  


속이고 착취하는 자들을 거슬러(8,4~8)

 아모스서 8장   4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5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6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7 주님께서 야곱의 자만을 두고 맹세하셨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탈출기 1장에서 보면 이집트에 정착한 이스라엘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번성하고 강해졌습니다. 탈출기 1장 6장부터 10절까지 보면, 불어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이집트 새 임금의 두려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 새 임금은 요셉이 누군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1장  5 야곱의 몸에서 난 이들은 모두 일흔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요셉은 이미 이집트에 가 있었다. 6 그 뒤 요셉과 그의 형제들과 그 세대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식을 많이 낳고 늘어만 갔다. 그들은 번성하고 더욱더 강해졌다. 그리하여 그 땅이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찼다. 8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9 그가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10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이하 10절 내용 생략) 


더 빡센 일을 주자!


이집트에서 요셉을 잘 모르는 임금이 나올 때까지 어찌 어찌 시간이 흘러서 이스라엘 백성이 더 수가 많아진거죠. 그래서 우리나라 말 번역에는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더 많고 강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롭게'라는 표현은 곧 '죄를 짓게 만들자는 겁니다. 그래서 더 어떻게 하자고 나오냐면, 한 마디고 "더 빡센 일을 주자!"  그런 내용입니다. 국가간 관계에서도 너무나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대목들입니다. 또한 이러한 죄는 인간사회의 어울림을 깨트리는 일입니다. 


(지혜서 14장 22절부터 마지막 31절까지는 소제목이 '우상숭배의 결과) 지혜서 14장 22절부터 27절까지를 보면, 여러가지 악을 평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혜서 14장    22 하느님을 잘못 아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는지 그들은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격렬한 싸움 속에 살아가면서 그토록 커다란 여러 악을 평화라고 부른다. 23 아이들을 죽여 제사를 지내거나 비밀 의식을 거행하면서 또는 이상한 예식으로 광란의 향연을 벌이면서 24 자기들의 삶도 혼인도 더 이상 깨끗이 지키지 않고 음흉한 방식으로 서로 죽이고 간통을 하여 서로 괴롭힌다. 25 모든 것이 뒤엉켜 있다. 유혈과 살인, 도둑질과 사기, 부패, 불신, 폭동, 위증  26 가치의 혼란, 배은망덕, 영혼의 부패, 성도착, 혼인의 무질서, 간통과 방탕이 뒤엉켜 있다. 27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이 모든 악의 시작이고 원인이며 끝이다.


모든 걸 하나로 만들어놓고, 그런 엄청난 무지를 지금 이순간도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범하는 지를 모릅니다. 다니엘서 7장에 보면 네마리 짐승의 환시가 나오는데 정말 기가 막힙니다. 7장 8절을 보면 환시에 대한 마지막 구절 기가 막히죠. 


 다니엘서 7,8   내가 그 뿔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것들 사이에서 또 다른 자그마한 뿔이 올라왔다. 그리고 먼저 나온 뿔 가운데에서 세 개가 그것 앞에서 뽑혀 나갔다. 그 자그마한 뿔은 사람의 눈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입도 있어서 거만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해결할 힘으로 묘사되는데,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구약시대에는 억압에서 해방하신,분으로 묘사되는데, 신약에서는 하느님 자체가 약한 모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약함이 성서 전체에 질 묘사됩니다.  구약에서는 정의와 연대를 원하시는 분으로 많이 묘사가 됩니다. 그래서 탈출기 23,3절부터 9절까지는 정의의 실현에 대한 내용이고, 22,20-26까지는 약자보호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계명 자체가 율법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사회적 관심과 종교적 실천이 분리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공정과 정의가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서 5장 24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하느님께 우리가 드리는 기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삶을 봉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미사여구로 기도하는 데 익숙하지만, 나의 약함을 고백하는 게 첫번째여야 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흠숭하는 게 기도 첫번째 단계라고 배웠는데, 그것은 마니피캇의 의미처럼, 당신도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셨는데, 그 보잘 것 없는 모습을 통해서 날 이끌어가려고 하시는 당신의 강함이 있다고 그분을 인정하는  찬송입니다. 나에게 복을 두어서 찬송하고, 그만큼 기도해서 안들어주면 원망을 들어야 하는 게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은 이미 보잘 것 없음을 취하셨으니 당신의 선한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단식이란 무엇인가?   


이사야서의 58,6-7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걸 단식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내 혈육을 보면 피해 숨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들어높여줄 연습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성서 안에서, 예수님의 비유말씀을 새겨 들어야 할 것입니다. 루카복음 10장에 보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루카 10, 29-37) 그 전에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묻습니다. 바로 전 단락(루카 10,25-28 가장 큰 계명)입니다. 


 루카(10,25-28)   10,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참고. 민수기 6,4-6절 말씀과 레위기 19,8 말씀)


예수님은 루카 10,28절에서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다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죠. 루카 10,29-3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어떤 이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어떤 사제가 가다가 길 반대쪽으로 가버립니다. 회피하죠.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여행하던 인간취급 못받던 사마리아인이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여관으로 가서 돌봐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율법교사도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서와 사회교리의 핵심이 되는 말씀은 안 것을 느끼고 깨달았으면, 안다고 깨달았으면, 세번째는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서 그렇게 그 전에 율법교사가 말했던 것처럼 자비로움을 살도록 합시다.  


 루카 10,29-37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2015년 3월 18일(수) 하기동성당 저녁. 대전교구 사회교리학교 제13기 3주차 수업 [성서와 사회교리]의 강의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