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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20160418] 사회복지는 버러지같은 잉여인간들에게 베푸는 1%들의 시혜일까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7. 1. 1.
사회복지는 버러지같은 99%의 

잉여인간들에게 베푸는 1%들의 시혜일까


2016년 4월 18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도안동성당
2016년 상반기 정세미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와 특강)
제 69차 미사 김용태 마태오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신부강론



잉여인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잉여라는 말이 ‘쓰고 남은’ 것이란 뜻을 가진 것처럼 잉여인간이란 쓰고 남은 인간, 쓸모없는 인간을 뜻합니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인간역사는 0.1%의 창의적인 인간과 그를 알아보는 0.9%의 통찰력 있는 인간이 이끌어 왔으며, 나머지 99%는 잉여인간이라 말한다. 다수의 잉여인간은 소수가 땀 흘려 일구어 놓은 열매를 그저 떠먹기만 하는 수동적 인간인 것이다. 그들은 게으른 인간, 밥버러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사회복지라는 것도 이런 버러지들에게 베푸는 사회 1%들의 시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잉여인간과 잉여가 아닌 인간을 구분하는 것이 창의력과 통찰력일까요? 현실 안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1%의 엘리트와 99%의 잉여인간을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은 현실에서는 “돈”입니다. 실제로 2016년이면 세계 최상층 1%의 재산이 나머지 대다수 99%의 재산 총액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상위 1%가 차지하는 부의 비중이 2009년 44%에서 2014년 48%로 높아졌으며,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2016년에는 50%를 돌파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결국 잉여와 잉여가 아닌 이들의 차이점은 창의력과 통찰력이 아니라 돈인 것입니다.


이 시대는 아무리 창의적이고 통찰력이 아무리 좋아도, 성실하고 열정적이어도 흙수저는 그저 흙수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세상은 상위 1%가 만들어낸 불평등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상위 1%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철옹성 같은 체제와 구조 속에서 99%의 잉여들은 아무리 기를 써도 상위 1%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와 체제를 없애려는 노력보다는 그 구조에 철저히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희망 없는 삶의 굴레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십니다. 단 한명도 잉여가 되지 않는 삶을 제시하십니다. 당신에게 맡겨진 이를 단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떠나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통해 그 누구도 없어져도 상관없는 잉여인간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이 비젼 안에 드러나는 잉여 탈출의 방법은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을 만나 충만한 삶으로 변화된 사람들을 보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거나 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보잘 것 없는 지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이제 하나같이, 없어도 되는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귀한 인간으로 탈바꿈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가난하지만 충만함으로 가득 차있고, 여전히 비천하지만 존귀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대표적 잉여인간들인 세리와 창녀, 고아와 과부,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 나그네와 이방인 이들 모두 예수님을 만나면서 더 이상 잉여가 아닌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탈바꿈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예수님은 1%의 엘리트와 99%의 잉여인간을 나누는 불평등한 구조가 아닌 1%와 99%가 서로 만나서 하나가 되는 평등한 삶의 구조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높은 산과 언덕이 깍여서 골짜기를 매워 평지를 이루는 형제적 삶의 방식을 보여주십니다. 삶의 충만함은 더 많은 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빵을 나보다 더 가난한 이에게 내어주는 사랑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고, 인간 삶의 존엄은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비천한 이들을 섬기는 사랑에서 온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떳떳함은 다른 이들의 칭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1%를 위한 99%의 희생이 아니라 우리와 모두를 위한 공동선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님께는 애초에 잉여인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주인이며 모두가 존귀하고 모두가 충만하고 모두가 당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초대하시는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제러미 리프킨이 말한 1%의 창의적이고 통찰력 있는 엘리트들 속에는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둑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강바닥을 긁고 콘크리트를 붓고 멀쩡히 흐르는 강에 16개나 되는 보를 설치하는 이 도둑질은 인류역사 안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창의적입니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기에 멀쩡히 살릴 수 있는 304명의 생명을 일부러 구하지 않고 차가운 바다 속에 수장시켜버린 이 학살극은 단군 이래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악랄합니다.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애를 쓰는 도둑들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단 한 마리의 양도 잃지 않고 모두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찾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이 시대 잉여인간으로서 버려진 세월호의 희생자들과 이 시대의 수많은 희생자들은 우리의 사랑 안에서 고귀하고 존엄한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2016년 4월 18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도안동성당
2016년 상반기 정세미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와 특강)
제 69차 미사 김용태 마태오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신부님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