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십자가, 우리의 어머니(Ⅰ)


함세웅 신부 (서울대교구 원로사제)


고통의 하느님, 해방의 하느님


「하느님의 백한 번째 이름」(성바오로 딸,2000)을 기초로 여성신학적 관점에서 신관을 새롭게 묵상했습니다. 저자 엘리사벳 존슨 수녀님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관은 알게 모르게 가부장적 남성 신관으로 가득차 있음을 역사적, 신학적, 성서적으로 지적하며 이에 잘못 형성된 신관을 근원적으로 바꿔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특히 엘리사벳 존슨 수녀님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도 사랑의 관계성 안에서 이해하고 고백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사람은 언어를 통해 순서를 따라 이야기하게 되어 있으니 우리가 아무리 삼위일체 하느님이 근원적으로 동등하다고 고백하더라도 성호경의 기도에서와 같이‘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부르니, 언제나 성부는 첫째 그리고 예수님은 둘째 그리고 성령은 셋째로 자리매김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그는 빙빙 도는 춤의 원리에 기초해 그야말로 평등한 관계를 설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삼위일체론을 펼치면서 성령론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론 그리고 창조주 하느님을 설명합니다. 매우 신선한 신론 전개였습니다.


특히 결론 부분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종합하면서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관계의 하느님, 살아계신 하느님, 그리고 끝으로 고통 받는 하느님, 연민의 하느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대표적 속성은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있는 그대로 껴안고 계시는 하느님이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가장 적합한 대답은 바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해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핵심인 탈출기의 하느님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 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탈출기,3,7-9)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체험한 하느님은 바로 인간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1940년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끌려가 군부대에서 매 맞고 성폭행 당한 우리의 소녀들, 인간의 생명과 같은 정조를 빼앗기고 여성성을 짓밟힌 이 소녀들 그리고 이제는 90세가 넘은 할머니가 된 이 분들의 쓰라린 과정, 그 과정 속에 바로 하느님이 함께 하셨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성령께서 모욕을 당하셨다는 이 신학적 인식과 신앙의 깨달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원과 현주소를 분명히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말씀을 되새깁니다.“너희는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고, 아프고 병들었을 때 그리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찾아와 위로해 주었으니 하느님의 나라, 구원의 나라로 들어오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이 아프고, 병들고, 굶주렸을 때 마땅히 찾아가서 위로를 해 드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점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역사와 현실 앞에서 겸허하게 하느님께 용서를 빕니다. 


제도의 폭력으로 훼손된 인간성 


저는 엘리사벳 수녀님의하느님의 백한 번째 이름을 다시 읽으면서 성서 전체를 새롭게 묵상했습니다. 


필리스 트리블은성서의 폭력 Texts of Terror」에서 위로하고 도와줄 이 하나없이 참혹한 비극으로 고통당하는 여성들에 관해 드러나지 않은 성서의 이야기들을 밝히고 있다. 곧 추방당한 노예 여인 하갈, 강간당한 공주 다말, 희생 제물로 바쳐진 입다의 어린 딸, 윤간과 살인을 당한 베들레헴 출신의 이름 없는 첩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여기 네 이야기 중 셋에 대해서는 가해자에 대한 성서적 비판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여성에게 가한 고통은 엄청난 것이다. 베들레헴 여인을 예로 든다면, 남편이 여행 중에 자신을 보호하려고 이 여인을 무뢰배들에게 넘겼던 것이다. 그 후 그들은“잔인하게도 그 여자를 밤새도록 욕보였다. 그러다가 동이 틀 때가 되어서야”(판관19,25), 그 여자는 집으로 보내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녀의 몸은 열두 조각이 난다. 트리블이 여성신학적으로 해석한 작품에서는 고문의 현장을 이렇게 묘사한다.


성서의 모든 인물들 가운데에서 그 여자가 제일 보잘것없다. 이야기의 처음과 끝은 바로 강간이다. 이 여자는 남성의 세계에 홀로 있다. 다른 인물들도 화자도 그녀의 인간성에 대해 알지 못한다. ⋯ 이름도 없고, 아무 말도 아무 힘도 없는, 살아 있을 때도 그를 도울 친구가 없었고, 죽었을 때도 애통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 여자는 그들 사이에서 이리저리로 넘겨졌고, 이스라엘 남성들은 그녀를 완전히 말살해 버렸다. 그 여자는 붙잡히고, 배신당하고, 강간당하고, 고문당하고, 살해되었고, 분해되었고, 흩어져 버렸다. 이 여인은 가장 큰 죄의 희생물이다. ⋯ 그녀의 몸은 찢겨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졌다. 이보다 더 무력한 여성은 없었으며, 그녀의 생명은 남성에 의해 내버려졌다.


이런 고통은 여성이 새 생명을 출산하거나, 정의를 위해 일어서거나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한 선택으로 생긴 고통이 아니다. 이 고통은 여성 스스로의 의지에 반하여 남성들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여성들에게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빼앗는다. 이 책이 그토록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오늘날에도 이런 고통들이 실제로 여성들에게 계속해서 가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여성들이 겪는 재난의 역사에서 매우 공공연하지만 아직도 발표되지 않은 영역은 종교재판에 의해 마녀로 고발당한 여성들의 재판과 처형이다. 가부장제의 영적 권위와 치유권의 독점을 상실한다는 염려 때문에 수만의, 아마도 백만 명이 넘는 여성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살되었다. 비통한 증언 전승으로 한 시인은 여성 학살을 기념하기 위한 호칭기도문을 만들었다.(하느님의 백한 번째 이름, 387-388쪽) 


여기서 더욱 놀라운 일은 지난날 우리 교회도 바로 이와 같은 범죄를 자행했던 주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죽인 이들도 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늘 이점을 되새기며 성찰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엄청난 모순이며 아이러니입니다. 오늘도 똑같이 이러한 엄청난 일과 모순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점을 깊이 뉘우칩니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매국노들


저는 특히 2015년 12월 28일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일본의 외무상이 합의한 내용을 보고 1905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었던 이완용 등 매국노들이 여전히 지금도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침략의 역사, 매국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종 등 조선과 대한제국 말기에 권력자들은 총 한방 쏘지 못한 채, 군대를 해산하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또한 박정희는 1965년에 한일협정을 통해 새로운 양상으로 일본에 종속되었습니다. 모두 망국적 행업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두 눈을 뜨고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공범자입니다. 


기계적 반일주의를 극복한 과정 


사실 우리는 모두 철저하게 반일 교육을 받은 세대입니다. 이에 저는 개인적으로 로마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일본 신학생들로부터 일본말만 들어도 뭐랄까 속에서 역겨움과 분노가 치밀어 오름을 느끼곤 했습니다. 일본 친구와 만날 때에도 부자연스러웠고 늘 껄끄러웠습니다. 그러던 중 반일감정을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와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독재 때였습니다. 지학순 주교님을 비롯한 목사님들과 청년 학생들이 옥고를 치루고 있을 때 일본의 정평위 관계자들과 YMCA, YWCA 등 개신교 신자들과 그 외 수많은 양심적 지성인들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해 애썼습니다. 이분들의 헌신적 도움을 체험하면서, 저는 기계적 반일주의를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는 침략세력과 양심세력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일본 침략의 동반자인 박정희를 비롯한 친일세력과 평화와 인권을 위한 양심인들이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안에도 침략주의와 군사주의 등 내부의 적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그 대표적 예는 1965년 한일협정의 주역인 박정희, 정일권, 김종필 등이며 이것은 2015년 겨울 바로 박근혜와 윤병세 등 현 권력자들, 새누리당 등 썩은 정치인들, 부패관료, 재벌, 뉴라이트, 조선 동아 수구언론 등 곧 새로운 유형의 친일파들을 통해 재현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매주 월요일 저녁에 광화문 광장에 모여 뜻있는 신자들과 시민, 수도자와 사제들이 모여 신종 유신 쿠데타 타파 미사를 봉헌하며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주장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는 반민족ㆍ친미주의를 극복해야


그런데 그 배후에는 언제나 미국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실 지난 1905년 7월 이른바 테프트-카츠라 밀약도 그것입니다. 그리고 2016년 2월에 폐쇄된 개성공단의 배후도 미국입니다. 이 점을 깊이 되새깁니다. 실제로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무장관 합의의 배경도 미국의 오바마였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역학관계를 직시하고 남북의 일치와 화해가 제 1차적 과업이며 6.15 공동선의 실천 곧 자주, 평화 통일이라는 가치를 새삼 확인합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핵심은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첫째는 분명한 역사의식, 민족의식, 자주의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일본의 침략 정책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친일청산, 친일파 척결의 책무입니다. 셋째는 그 연장선상에서 인간의 품위를 깨닫고 민주주의의 가치와 남북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민족적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결국 친일파와 유신 독재 잔재 청산이 선결 과제입니다.


요사이 고발된 어버이연합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친일파와 이승만의 우의 마의 동원 등과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절에 있었던 민의 조작, 중앙정보부, 안기부, 국가정보원이 청와대 권력기관의 앞잡이임이 이미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근본 이유가 바로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유신 잔재, 독재 잔재, 분단 세력을 척결하지 못한 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귀향'의 교훈, 기억과 치유


영화‘귀향’의 교훈을 함께 생각합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고백은 개인적으로“부끄럽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숱한 모욕과 상처와 아픔과 치욕스러움을 한마디로“부끄럽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사의 압축입니다.


이에 저는 십자가 예수님의 고통을 새로운 관점에서 묵상했습니다. 아니,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께서 매 맞고, 옷 벗겨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 사형 틀에 달리셨으니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하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여러 관점에서 묵상하고 생각하고 지내왔지만 김학순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그래!’ 예수님께서도 몹시“부끄러웠다”라고 말씀하셨으리라 생각하며 묵상했습니다.


‘귀향’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바치는 마음으로‘고난의 여성들’을 묵상하며 두 손을 모으고 민족사를 순례했습니다. 무속인을 통한 위령제 자리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재현하는 미사봉헌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위령제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의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했던 시절, 친구끼리 내기에서 친구의 귀중한 노리개를 취한 행위에서 그 때문에 무섭게 엄마로부터 매를 맞았던 일, 꾸짖음 당했던 내용, 일본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 당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와 폭행, 그리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죽어간 벗들을 떠올리며 살아 있는 자신의 죄스러움에 대한 고백, 그 가운데에서도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은 한 일본 군인의 자세, 그 자세는 바로 인류의 양심과 연민, 인간성 전체를 압축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의 신고를 접수하고 있는 젊은 공무원들의 시각,“그거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부끄러운 일을 신고할 수 있을까!”라는 말에 가슴에 칼이 찔리듯 큰 아픔을 체험한 김학순 할머니는 이렇게 절규합니다.“그래, 나 미쳤다! 미쳐서 이렇게 신고한다!”이렇게 절규하는 순교자들은 누구인가? 하느님을 위해 미친 사람들은 누구인가? 1866년 병인박해 150주년을 맞은 올해 순교자들은 또한 어떤 분들인가? 라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이에 저는 이 외침을 깊이 생각하며 새로운 관점에서 묵상합니다. 하느님께 미친 사람, 그래서 진실규명과 인간회복, 민족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 미친 사람, 자기 회복과 인간의 존엄 회복을 위해 미친 사람, 이들이 바로 순교자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두 이 분들을 경외해야 합니다.


귀향! 그렇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묵시록의 저자가 꿈꾸고 보여줬던 그 나라 곧 자기 회복, 하느님께 안기는 꿈을 간직합니다. 할머니가 된 그는 이제 소녀의 옛 고향집, 부모에게 안깁니다. 인간성을 되찾고 진실을 얘기하고 악과 불의를 고발하며 모두 제자리에 바르게 곧게 서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잔인한 일본인들에개 회개를 촉구하며 기도합니다. 


뉘우치는 독일, 범죄를 속이는 뻔뻔한 일본


나치 히틀러에 대해 독일인들은 뉘우쳤습니다. 속죄를 하고 보상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유대인들은 나치 히틀러와 독일을 고발하는 영화를 계속 새로 제작하여 발표합니다. 잊을 만하면 독일인들의 심장을 칼로 찌르듯 다시 후벼 파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저는 뉘우치는 독일인들을 존경합니다. 일본인들은 전혀 반대입니다. 전쟁범죄의 침략국 일본, 지금 아베를 비롯한 일본인들은 불의와 거짓, 악 자체이며 그야말로 왜소한 작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아름다워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속죄하지 않은 일본에 대해 늘 작고 추한 모습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이 순간만큼은 한 신앙인으로서 저는 그들이 진실로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하도록 하느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뉘우치는 마음, 인간성의 회복


1995년 1월 고베 지진이 나던 때에 저는 한 수녀원에서 피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고베 지진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있었지만 저는 크게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로 일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속마음으로는 일본 전체가 해일로 바다에 다 가라앉더라도 조금도 끄덕이 없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수녀님들은 아침기도와 신자들의 기도에서 고베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크게 뉘우쳤습니다. 제 안에 살인마와 같은 악이 내재되어 있구나 하고 반성하며 성당과 제단 앞에서 저의 비인간적 마음에 대해 크게 뉘우쳤습니다.


그해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5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동경 주교좌성당에서 정의평화위원회 주최로 기념행사와 강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고베지진에 대해 제가 지녔던 그 비 인간적인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저는 고베 지진 뿐 아니라 일본 전체가 바다에 빠져들어도 끄떡이 없었다는 제 속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신자들과 수녀님들은 무척 놀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 저의 비인간적인 마음을 고백하면서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다고 실토했습니다. 사랑하는 일본 교우들과 수도자 모든 분들께 이 자리에서 다시 고백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일제가 36년 동안 한국에서 자행한 침략의 범죄가 얼마나 크고 잔인했었는지 아십니까?”하며 크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과 만행, 어린소녀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끌고갔던 일, 우리의 곡식과 재산과 문화유산을 약탈해갔던 일, 이 모든 일들을 모두 낱낱이 나열했습니다. 그리고 호소했습니다.“여러분은 일본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여러분들의 선배들이 저지른 침략적 죄악에 대해, 비인간적 죄악에 대해, 특히 일본군 성노예로 끌고갔던 헤아릴 수 없는 천인공노할 잘못에 대해 여러분들은 깊이 뉘우치고 속죄해야 합니다.”라고 요구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많은 수녀님들이 제게 와서 울면서 속죄했습니다.“신부님, 죄송합니다. 정말 저희들은 일본의 침략 역사를 잘 몰랐었습니다. 더군다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의 사안을 잘 몰랐었습니다. 저희들이 인간의 이름으로 신앙인의 이름으로 용서를 빕니다.”저는 수녀님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인간성의 회복, 바로 그것이 구원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저는 저 자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해 아픈 과정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반성하고 그분들의 아픔을 늘 되새기고 있습니다. 


부활과 희망을 확인하며


그리고 영화‘귀향’의 마지막 대목에서 깊이 묵상했습니다.“일어나요, 이제 집에 가야지요!”목숨 잃고 누워있는 옛 동료들을 떠올리며 기도 바쳤던 생존자 할머니의 염원과 기도! 그것은 부활에 대한 희망, 미래에 대한 확신, 구원에 대한 신념이라고 재해석했습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의 피맺힌 아픈 삶은 바로 민족의 십자가입니다. 약소민족의 아픔입니다. 그 십자가는 지금도 불의한 정치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으며 남북 분단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할머니들은 민족의 아픔, 십자가를 껴안고 사셨습니다. 때문에 그분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어머니이십니다. 십자가 밑에서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파하셨던 성모 마리아, 바로 성모님의 그 고통을 껴안고 산 분들이 바로 우리 할머님들입니다. 이분들의 아픔이 치유되도록 기도하며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새 하늘 새 땅’을노래한 묵시록의 저자 요한의 희망을 확인합니다. 하느님! 기쁨과 평화, 아름다운 미래를 확인해 주소서. 아멘



책의 편집자 주 : 1992년 12월 27일(일) 오후 2시 서울 아현동 성당에서 함세웅 신부님과 안충석 신부님 집전으로 일본군‘위안부’할머니들을 위한 첫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피해자 할머니들을 모시고 봉헌된 미사의 주제는 ‘민족의 십자가, 우리의 어머니’였으며 그때를 상기하며 함세웅 신부님께 강론 글을 부탁드렸고 기꺼이 써주셨습니다. 


출처. 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천주교전국행동 발행(2016.12.2)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강론 및 교육 자료집 민족의 십자가, 우리의 어머니』10~16쪽



Posted by 대전정평위뉴스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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