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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윤종관 신부강론. 법률의 생명회복으로써 오늘날 우리나라의 혼란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7. 2. 12.

연중 제6주일 하부내포성지 윤종관 주임신부 강론
2017. 2. 12. 11:00   하부내포성지 서짓골 돈이관에서


법률을 죽이지 마라!

율법에 생명력을 넣어주시는 말씀!

 

우리는 연중 제4주일부터 마태오복음서 5장을 주일복음으로 이어 봉독합니다. 오늘 연중 제6주일과 더불어 다음주일인 연중 제7주일까지 마태오복음서의 5장을 이어서 봉독합니다. 마태오복음서 5-7장에 수록된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신 내용이라고 제가 연중 제4주일과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산상수훈’은 하늘나라의 ‘헌법’처럼 이해하자고 저는 강조했습니다. 그러한 헌법의 서두 즉 ‘전문’과 같은 내용이 마태 5, 3-10의 ‘진복팔단’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정강’이라 할 수 있는 ‘진복팔단’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마태오복음서 7장까지 이어서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산상수훈’은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걸어가야 할 삶의 길을 제시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한 ‘산상수훈’을 청취하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가장 먼저 따르는 사람들을 그분의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은 세상의 빛이며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우선 강조하신 말씀을 지난주일(연중 제5주일)에 들었습니다. 마태 5,13-16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연중 제6주일)은 마태 5,17-37의 말씀을 우리가 청취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청취하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삶의 기본적 태도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다소 길게 이어지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만, 그 내용을 제가 감히 평가하자면, ‘죽은 율법에 예수님께서 생명을 불어 넣으신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산위에서 선포하신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이라는 시각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하느님의 계약(십계)을 선포한 이후, 그것이 유다인들의 율법이 돼왔습니다. 그러나 율법준수에 있어서 형식에만 치중해온 것이 유다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약(율법)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어넣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율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 17-20)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더불어 이루시고자 하신 애초의 그 계약정신을 회복하여 완성하시려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 ‘하늘나라’를 새롭게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래서 율법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아주시는 ‘산상수훈’으로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그렇듯이 ‘죽은 율법에 예수님께서 생명을 불어 넣으신 말씀’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내면화를 이루어주십니다. 사람들 각자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하나하나가 마음속에서부터의 변화로써 그 율법이라는 것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예수님께서 강조하십니다.


그러한 ‘율법의 내면화’를 예수님께서 오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 각자에게 촉구하시고 계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 21-24)


이렇게 하늘나라의 삶을 향한 율법의 내면화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적시해주십니다. 살인은 물론이려니와 사람들 사이의 미움과 원망을 금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죄악의 뿌리를 제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음과 거짓 언행에 대해서도 그 근본부터 없애야 된다고 내면적 청산을 강조하십니다(마태 5, 25-32 참조). 이러한 ‘율법의 내면화’는 형식에 그치지 말고 더 우선적으로는 보이는 행위로 실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 37)


오늘의 이러한 예수님의 ‘율법 내면화’와 우리의 실천정신에 대해서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생명력 있는 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법률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현 시국에서 소위 법률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법률을 죽이고 있습니다. 법조인으로 권력에 빌붙어 살면서 노회한 정치로 나라를 더럽힌 사람들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김기춘’이라는 분입니다. 그분을 사람들이 ‘법꾸라지’라는 별명으로 부릅니다. 무지막지한 폭압으로 국민을 짓누르던 이른바 ‘유신헌법’이라는 것의 제정에 앞장서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수십 년 권력을 탐닉한 사람입니다. 


이른바 국가안보를 빙자하여 국민의 기본권마저 유린하여 권력에 충성해온 수십 년에 결국 이즈음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의 핵심범법자로 낙인찍힌 사람입니다. 법률전문가로서 과연 ‘법정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었던지 아니면 ‘법’을 죽여 온 범법자인 것입니다. ‘법’에서 양심을 제거하고, 그 시체 같은 법을 도구로 하여 사람을 죽여 온 그 사람입니다. 걸핏하면 ‘좌파 종북 빨갱이’이라면서 썩은 권력에 협조하지 않는 국민을 박해해왔습니다. 그러면서 거짓과 모르쇠로 법률조항에 걸리지만 않으면 온갖 국정농단도 서슴지 않은 ‘법꾸라지’가 천주교 신자로서 오늘의 복음말씀을 청취해야 하는 미사에 과연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형제를 ‘바보’ 또는 ‘멍청이’라 하면 법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넘겨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듣고 그 ‘법꾸라지’가 일말의 반성이라도 할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듯 법률을 죽이며 살아오기까지 그의 권력은 달콤한 것이었을까요? 그러나 법 이전에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는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법률조항에 걸려들지 않아서 자랑스러운 국민이기에 앞서 양심에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없어야 할 인간이어야 천주교 신자로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정강으로 선언하신 예수님의 오늘 복음은 한 마디로 “법률에 양심을 되찾아 넣어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여 ‘율법의 내면화’와 ‘법률 살리기’라 할 것입니다. 즉 법에 생명력을 부어넣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법률의 생명회복으로써 오늘날 우리나라의 혼란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졸렬한 수법으로 법망회피의 청와대와 권력기득권이 우리나라의 기본법인 ‘헌법’을 농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법이 살아있고 양심이 부끄럽지 않음으로써 이 나라의 우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떳떳한 국민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오늘의 복음말씀 청취자로서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법대로 살아왔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런 나 자신의 양심이 뭐라 대답하는지 들어봐야 합니다. “법에 걸려 처벌받을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는 대답이 들리는가? 그렇다면 법에 걸려들지만 않았을 뿐, 왜 법이 존재하는지, 그 법치의 바탕은 무엇인지 아느냐 하는 질문에도 대답을 할 수 있는가?


법률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최소한의 선(線)’을 그어놓은 것일 뿐 그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법률보다도 양심은 ‘최대한의 영역(領域)’을 통치한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에 이르면, 우리 모두는 두려워집니다. 양심 앞에 두려워집니다. 그러한 두려움이 없을 정도로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하고 예수님께서 오늘 하늘나라의 정강 설명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정강 앞에 ‘Yes’와 ‘No’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삶을 지향해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산상수훈’을 들으면서 예수님 가까이 다가가는 제자들이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의 복음을 들으면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출처: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