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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교회의 생일, 성령강림대축일의 핵심은 세상에 참된 지혜를 준다는 것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7. 6. 4.

[성령강림대축일]

성령강림의 핵심은 세상에 참된 지혜를 준다는 것


2017년 6월 4일(주일)



오늘은 교회의 생일이라는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영어로 Whit Sunday라고도 합니다. (Whit는 wit에서 파생된 단어) 다시 말해서 wit sunday 라는 겁니다. 위트있는 주일인 것입니다. 위트는 우리가 재치나 익살 등을 말하기도 하지만, 위트의 어원은 사실 지혜(wisdom)입니다. 즉 성령강림대축일은 지혜의 주일입니다. 따라서 성령강림의 핵심은 세상에 참된 지혜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강림이란 의미보다는 불의 혀처럼 나타난다는 이미지에 압도되거나 어떤 물건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제3의 소유할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야 하는 것이고, 그 그늘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성령이 너를 드리우고"라고 말하듯이 하느님의 신적 지혜 안에 들어가는 것을 '성령강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신적 지혜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인 올바른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곧 성사생활입니다. 성사의 뜻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의 보이는 표징을 말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성사란 무엇입니까?"


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의 보이는 표징


여러분, 하느님 은총이 보이십니까?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의 보이는 표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이란 성사생활인 거죠. 보이지 않는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영성체를 통해 느끼고, 세례성사를 통해 느끼고, 고백성사를 통해서 느낍니다.


또한 그 역으로 보이는 것 뒤에 감추어져있는 하느님 은총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린 여전히 눈에 보이는 걸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는 건 아닌지. 예수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대한 현실 앞에서, 그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을 때, 바로 그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제자들은 철옹성같은 밤을 부수고 세상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돈? 명예? 학벌? 시간? 기타 등등 눈에 보이는 수많은 것들 ...
우리는 사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만, 내가 봉사하고 그분 뜻대로 십자가를 지려고 하면 내 눈 앞의 것들이 날 가로막습니다. 그것이 두렵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적당히 타협합니다. 부딪쳐서 다칠까봐 물러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적당히 적당히'가 된다. 그러면 그 뒤의 생명의 샘, 오아시스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요르그 징크(Jörg Zink, 1922~2016)는 이런 우화를 남겼습니다.

"한 청년이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려고 계획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여러가지 장비를 준비하고 가장 중요한 물을 넉넉히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계획보다 여정이 길어지자 준비해간 물이 바닥나버린 겁니다. 그는 버티다가 쓰러져버리고 실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힘없이 눈을 떠보니까 저 앞에 샘이 어른 거리고 야자수가 보이는 겁니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흩날리는 것같기도 합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내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 환각을 보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다시 기절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정신이 돌아오면서 귓가에는 새소리에 물소리까지 작게 들립니다. 그러자 청년은 "아! 내가 정말 죽을 때가 다 되었구나."하고 이번에는 귀를 닫아버렸습니다. 그렇게 청년은 결국 죽어버렸어요. 다음날 아침이 되어 사막에 베두인 부자(父子)가 그 길을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오아시스 물가에서 입이 타들어가 죽은 청년을 본 것이죠.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이 사람은 왜 물가에서 이렇게 죽어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시죠. "여기 오아시스 앞에서 죽은 청년이 바로 현대인이란다."


마지막 한걸음 혹은 두 걸음을 걷는 데는 내 앞을 가로막는 엄청난 장벽이 존재합니다. 그 장벽 앞에서 우리는 희생과 용서가 필요합니다. 너무 철옹성같아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 하나면 부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성령께서는 바로 그것을 부수게 해주십니다. 제자들이 지녔던 두려움과 공포를 부수게 해주셨던 것처럼요. 성령강림대축일! 우리에게 선물이 되어 오신 성령으로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다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잘 살아보려고, 돈을 만들었는데, 지금 현대인들은 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돈 밑에 깔려서 허덕이는 현대인들, 몸을 보호하려고 옷을 입는데, 옷이 너무 좋아지니까 옷을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명품 핸드백과 짝퉁 핸드백은 비가 오면 구별할 수 있다고 하죠. 비가 올 때 짝퉁 핸드백은 비를 가리기 위해 머리 위로 올라가지만, 고가의 값비싼 명품 핸드백은 품 안으로 감싸기에 바쁩니다.

그렇다면 살기 위해 집을 마련하려던 오늘날의 사람이 사실은 집의 주인이 아니라 집을 지키는 개가 된 건 아닌가요?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사랑하기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하기 어려워하는 거 아닐까요? 머리 속으로 온갖 것을 따지고, 악착같이 계획만 세우느라 지금 순간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게 현대인이 아닐까요?


여러분!
참된 지혜란 무엇입니까? 성령님 안에서 큰 용기를 내어 한번 바꿔봅시다. 이제껏 나를 나답게 살지 못하게, 내 발목을 잡은 많은 것을 어떻게 이겨낼지 한번 봅시다. 기쁨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 때 주변 사람들은 나를 제대로 이해합니다. 사람들이 날 무엇으로 기억합니까?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계획을 가지고 두려움없이 살라고 오늘 성령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우십니까?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오늘 성령님을 보내셨는데, 그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좀 더 깊어졌으면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도전입니다. 하느님의 본래 그 모습대로 우리 신앙인들이 살고 계셔야 합니다. 밖에서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고, 얼마나 대단하든, 성당 안에서는 그 껍데기 다 버리고 하느님 앞에서 온전한 진정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 무거운 갑옷을 입고 성당에 오신다면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여기는 돈이 많건 적건, 지위가 높건 낮건, 나이가 많건 적건 다 똑같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도 그 똑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제자들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의탁하는 순간 그 두려움은 헛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은혜 안에서 철옹성 같아 보이던 장벽은 모두 무너져 내립니다. 왜?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 앞에서는 다 무너지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이 세상의 벽, 이 암울한 세상의 벽을 다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여러분 삶 안에서 하느님이 훨훨 살아남길 바라면서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2017-6-4(일) 성령강림대축일
관평동성당 교중미사 김홍식 임신부님 강론을 정리한 것이며, 편집자의 요약과 편집과정을 거쳤기에,

당일 신부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