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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안팎뉴스/정평위 뉴스

[제주 4.3 기행](2) 해방과 좌절 - 전쟁-해방-자치-미군정-3.1 발포사건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8. 11. 10.

[제주 4.3 기행](2) 제주의 해방과 좌절

대전정평위 제주 4.3 방문단(2018.11.10 토) 제주 평화공원 제2관 해방과 좌절

전쟁-해방-자치-미군정-3.1 발포사건


대전정평위 [제주 4.3 평화기행단]이 1박 2일의 일정을 시작하며 처음 방문한 곳은 제주평화공원이었다. 우리는 오전 11시경 공원의 전시관에 들어섰고, [제1관 프롤로그]로 통하는 길은 동굴로 된 입구였다. 


제주 4.3평화기념관 전시관 제2관으로 들어서고 있다. '흔들리는 섬'이라는 제목 아래로
해방과 자유를 뜻하는 영어(Liberation and Frustration)이라는 글자가 씌여있다.


그리고 [제1관]을 거쳐 [제2관 해방과 좌절]은 해방의 기쁨도 잠시, 1948년 4월 3일의 무장봉기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른바 전쟁-해방-자치-미군정-3.1 발포사건-탄압의 순서로 전개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들을 영상과 전시물로 보여주는 곳이다. 해방이 되고 제주도민은 자치를 시행해 나갔다. 그러나 1947년의 3.1절 기념대회에서 민간인 6명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제주도민과 미군정의 갈등과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제주다크투어의 강은주 공동대표가 제주 4.3평화기념관 전시관 제2관의 전시내용을 설명 중이다.


제주다크투어의 강은주 공동대표가 제주 4.3평화기념관 전시관 제2관의 전시내용을 설명 중이다.



사실상 제주 4.3은 7년 7개월이란 기간 안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이해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지만, 사실상 제주 4.3이 발생한 이유와 성격 그리고 원인 등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일제시대 제주도가 처한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앞선 우리나라의 역사를 아는 것도 필요하다. 제주 4.3이 단지 단 한번 벌어진 제주도의 비극이 아니라, 오랜 세월 비민주적인 상황 속에서 반복적으로 수탈을 겪으며 견뎌온 민중의 수난사란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즉 제주도가 얼마나 오랫동안 동등한 주체가 아니라 객체화되고 대상화된 채로 살아왔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 4.3 사건 보고서]에서 이야기하는 사건의 시점은 1947년 3월 1일로 잡고 있으며, 우리가 흔히 칭하는 '4.3'이란 날짜는 1948년 4월 3일에 벌어진 사건을 두고 말한다. 1948년 4월 3일로부터 1년 1개월 쯤 전인 1947년 3월 1일, 3-1절 만세기념대회가 제주 관덕정 거리에서 열렸다. 이때는 가장 많은 제주의 민중들이 모였던 때였다.  


 일본은 제주 섬 전체를 군사요새로 만들었고, 일본군을 무려 7만명을 배치했다. 


그런데 1947년보다 더 앞서서 일제강점기때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제주도 전체를 다 군사요새화시키려고 했었다. 일제는 당시 제주도 안에서 공항으로 사용하려고 길을 닦은 곳이 총 5군데였다. 그 중 '진드르'라는 곳은 평화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일대에 있다. 진드르는 닦기만 하고 실제 사용하지는 못했다. '드르' 혹은 '뜨르'는 넓은 들판을 이야기하는 제주말인데, 일제가 세운 공항으로 많이 사용했던 곳이 제주국제공항 지점인 정(井)뜨르, 서귀포 송악산 부근의 알뜨르 등이다.  알뜨르 비행장은 실제 난징대학살에 사용한 비행기들이 출격한 곳이었다. 일본 본토에서 출발해서 예전에는 기름이 오래 못가니까 알뜨르에서 한번 더 급유를 하고, 난징으로 가서 너무나 많은 수십만명의 사람들을 죽였던 그런 역사와 관련있는 곳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반도와의 항복조인식을 하고도 제주도를 따로 내려온다. 제주도에서 따로 항복조인식, 무기해제식을 할 정도로 해방이 되기 전까지  일본은 제주도 전역을 완전히 대규모의 군사요새로 만들었던 것이다. 일본은 망해가던 당시 '결'작전, 혹은 '옥쇄' 작전을 펼쳤다. 끝까지 본토를 사수하겠다는 작전이었다. 그래서 홋카이도를 결 1호로 시작하였고, 제주도는 결 7호에 해당되었다. 그래서 이곳들이 폭력을 당할 지언정, 본토는 끝까지 지키겠다는 작전을 펼친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빠르게 퍼진 건국운동


해방이 되면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자는 기치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이 결성되었다. 여운형 등이 주도한 건준은 치안유지와 건국활동에 매진했다. 8월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나 되는 건준 지부가 생겼고, 이 조직들은 곧 인민위원회로 개편됐다.  



특히 제주도의 인민위원회 결속력은 특히나 강력했다. 그러나 미군정 입장에서 자주독립국가의 자치를 주도하던 인민위원회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고, 미군정의 탄압으로 다른 지역의 인민위원회는 소멸하거나 이름을 바꾸고 있었다. 사실 승전국 미국에게 한반도는 패전국 일본의 영토 일부를 점령한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그런 미군정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건재했던 까닭은 그 주도 세력이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교육사업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야학과 학교설립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광복직후 제주 사회의 주도권은 한동안 인민위원회가 잡고 있었다. 미군정의 지배가 큰 틀 안에서 움직였지만, 일상의 활동과 주민 정서상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고, 미군정 당국에서도 협조를 구하는 공문을 관공서와 똑같이 보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미군정과 인민위원회는 대립이 커져갔고, 그러는 사이에 일제의 고문경찰이 해방이후의 경찰이 되고, 총독부 직원은 면직원이 되어 있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모든 면에서 제주도에서의 

유일한 당이었고 유일한 정부였다."


군정의 정보요원으로 일했던 E. 그랜트 미드란 사람이 한 말이다. 실제로 제주 인민위원회가 세운 건국 5칙은 오늘날 적용해도 손색이 없이 매우 민주사회적인 이상을 담고 있는 내용들이다.


건국 5

1. 기업가와 노동자가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2. 지주와 농민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3. 여자의 권리가 남자와 같이 되는 나라를 세우자.

4. 청년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를 세우자.

5. 학생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제주도의 국제평화적 연대 사상


일본은 망해가던 당시 '결'작전, 혹은 '옥쇄' 작전을 펼치면서 홋카이도를 '결 1호'로 시작하여, 제주도는 '결 7호'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곳들이 폭격을 당할 지언정, 본토는 끝까지 지키겠다는 작전이었다. 그래서 당시 오끼나와는 미군의 폭격으로 20만명이 죽었다. 다시 말해서 제주에서도 역시 미군의 폭격이나 원폭투하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이를 두고도 대살(對殺)이라는 슬프고도 잔인한 표현이 쓴다. 그것은 "대신 죽였다." 혹은 "대신 죽었다"는 건데 과연 누구를 죽였단 말인가? "오끼나와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일본인들은 한반도를 지배하던 잔인한 외세무리였지만, 제주의 선각자들은 그 너머의 평화적 연대를 보는 사람들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제주다크투어 공동대표 강은주의 말을 참고할 수 있다. 그는 제주 4.3을 공부하면서 2가지가 늘 궁금했다고 한다. "왜 항쟁이 제주에서 일어났을까?"와, "왜 제주는 다른 곳과 다르게 희생이 이렇게도 컸을까"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강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즉 제주도는 해양권 문화로 육지에 비해 교류가 훨씬 더 활발했다. 독자적으로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으며 제주의 있는 집안 자식들은 경성보다 일본으로 유학을 많이 갔다. 그곳에서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사회운동, 노동운동을 배워온 지식인들이 제주사회에 많이 분포되었던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육지 사람들보다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지식인 계층이 비율상 더 많았고, 이들을 기반으로 민주주의적 열망이 훨씬 높게 형성되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해방이 되면서 당시 일본에 있다가 독립되고 돌아온 사람들이 무려 6만명이었다. 당시 제주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게 힘들었다. 20만 남짓이던 제주도에 무려 6만의 인구가 갑자기 불어난 것은 사정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돈을 벌러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광복이 되자 고향으로 쏟아져 들어왔지만 그들은 빈털털이나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서 심각한 일자리부족과 사회불안이 뒤따랐던 것이다.  


그 배경에는 미군정의 통제정책이 존재한다. 일본에서 귀국하는 이들이 모아놓은 재산을 거의 가지고 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생활필수품도 일본에서 들여왔었는데, 그것마저도 막혀버렸다. 결국 제주 사람들의 경제적 형편이 더욱 악화된 것이다.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든 것은 1946년 여름의 콜레라 사태였다. 그 해 여름 매일 50명의 환자가 생겼고, 가뭄과 흉년으로 식량은 크게 부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의 부역자들이 여전히 관직에 앉아서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이에 도민들은 점점 더 화가 났고 청년들은 앞장서서 힘을 모으자고 움직이고 있었다. 


일부 세력이 숭배하는 맥아더에게 한국은 '점령지'였을 뿐이다. 맥아더가 발표한 포고문 1호는 "본관 휘하의 전승군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렴(occupy)함"이라는 것이었고, 이후 미군정은 만 3년간 통치했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비극은 친일 경찰과 관리를 재등용하면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적폐세력의 발원지가 그들인 셈이다.
제주의 비극 역시 그것이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계속)


천주교대전교구정의평화위원회는 교구설정 70주년을 기념하며, 올해 70년을 맞이한 제주 4.3을 추모하는 다크투어를 기획했다. 그리고 2018년 11월 10일(토)~11일(일)의 1박 2일의 일정으로 제주를 방문했다. 참여자는 정춘교 사무국장, 박갑주 대건안드레아, 이요한 등 평신도 위원들과 자발적 참여자인 노은동 성당의 멋있는 한 쌍의 부부 등 총 5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