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안팎뉴스/정평위 뉴스

[제주 4.3 기행](4) 비극의 도화선이 된 47년 3-1절 만세기념대회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8. 11. 11.

[제주 4.3 기행](4) 47년 3-1절 만세기념대회의 비극 

대전정평위 제주 4.3 방문단(2018.11.10 토) 제주 평화공원 제2관 해방과 좌절

해방되었지만 더 큰 참극에 휘말린 제주의 아픈 역사


1947년 3월 1일의 발포사건은 다음 해 4.3 새벽에 일어난 무장봉기와 이어진 대학살극의 신호탄이 되었다. 

사진은 제주다크투어 강은주 공동대표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이다. 


제주 섬의 지정학적 위치는 강대국인 미국이나 중국이나 결코 뺏길 수 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국제적 힘의 역학관계상 제주도가 반드시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제주 4.3의 비극은 이 섬이 다시는 강대국의 전초기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광복 이후 미군정이 되면서 제주도(島)는 전라도(道)에 속한 섬(島)에서 분리되어 제주도(道)로 승격 된다. 사실상 인구가 많아서 승격해주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야 더 많은 경찰과 군인을 주둔할 수 있기때문이었다. 또한 미군정은 미곡(쌀) 수집 정책에서도 혼선을 거듭하면서 민심과 멀어졌고, 쌀 농사가 거의 없는 제주에서 주로 하는 보리 농사의 흉년도 굉장히 심각해지면서 미군정과의 갈등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시 북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전국적인 행사 중 한가지였고, 진정한 자주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열망이 모인 자리였다. 해방이 되었지만 사회는 계속 살기 어려워지는 가운데, 항일 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자는 취지였던 것이다. 


해방이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었지만, 세상은 제대로 풀려나가지 않고 꼬여만 갔던 것이다. 그런 즈음에 당시 제주북초등학교(당시 제주북국민학교)애 무려 3만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3.1 정신으로 통일 독립 전취'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해방이 되어도 좋은 세상이 오지 못한 이유는 여전히 외세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다고 보았던 까닭이다. 


관덕정 뒤편에 자리한 북초등학교에서 오후 2시에 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곧바로 가두시위로 나섰다. 당시 제주의 다른 지역들에서는 행사가 끝나고 음악회(대정면)을 열거나 씨름대회(안덕면)를 열기도 했지만, 북초등학교의 행사에서는 참혹한 비극으로 치닫게 될 사건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래 내용은 관련 사실을 다룬 공식 애니메이션이다. 




그리고 다음 내용은 이와 관련된 최근 뉴스내용이다.



위의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가 제주 4.3을 이야기할 때의 기점은 1947년 3월 1일이다. 즉 1948년의 4월 3일의 시작점은 1947년의 3-1절 만세기념대회이다. 그리고 4.3을 이야기하며 '3만'이란 숫자를 말하는데, 당시 모인 숫자가 그만큼이었다. 당시 인구 규모로 보았을 때 매우 많은 인원이 참여한 행사였다. 특히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학교에서 사전집회하고 모였는데, 문제의 시작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 아이가 차이는 사건이었다. 그때 해당 경찰은 사과하거나 돌봐주려 하지 않았다. 그 자는 그냥 도망가기에 바빴고, 사람들은 화나 났고 항의하며 쫓아가며 돌을 던졌던 것이다. 


결국 경찰은 사람들을 향해서 발포를 한다. 공적인 장소에서 민간인을 향해 발포하는 것은 일제시대때도 없던 일이었다. 3만 여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무엇을 외쳤냐면, '친일파 청산해라.' '통일독립'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바라던 독립이되었는데, 우리가 바라던 모양의 나라가 아니니,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 그 당시의 구호였다. 


 제주다크투어 강은주 공동대표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이다. 


4.3의 도화선, 3.1절 발포사건


그러나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더 큰 국가폭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발포사건으로 인해 6명이 죽게 된다. 그 광장에서 6명은 보통 뒷쪽을 맞았다. 도망가는 사람들을 향해 발포를 한 것이라고 한다. 당일 오후 2시 45분경,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 총성이 울렸다. 시위대가 빠져나갈 즈음, 기마경찰이 급히 경찰서 쪽으로 달려간 다음에 터진 총소리. 관덕정 광장 앞에 있던 제주경찰서 망루에서 미군정 경찰이 구경꾼들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3.1 대회를 앞두고 미군정은 제주에 100명의 응원경찰을 내려보냈다. 이날 발포를 한 자도 육지에서 급파된 응원경찰이었다.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었다. 그것이 경찰의 과잉대응이었고 사람들은 전혀 무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사망자들 대부분은 등뒤로 총을 맞았다. 분명히 잘못된 발포였던 것이다. 경찰은 그것을 실수였으므로 사과를 하면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끝까지 정당방위라고 우겼다. 사망자 중 한명은 심지어 아기를 업은 여성이었고 나머지는 학생이나 구경꾼들이었다. 항의하는 군중이 아니라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3.1절 집회를 주도했던 사람들을 잡아가기 시작하면서 민심은 더욱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3만명의 희생자를 낸 4.3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전 도민이 참가한 항의 총파업

이 사건으로 인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고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민관합동 총파업이 벌어진다. 제주도민의 거센 항의가 시작된 것이다. 1947년 3월 10일에 시작하여 22일에는 제주도 전체의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공무원도 같이 총파업을 했다. 당시 제주 사람들은 민에 있던 관에 있던 일하던 사람의 95% 이상 노동자가 같이 파업을 했다.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했고, 제주도청 공무원들은 제주 행정을 멈춰버렸다. 시장도 장사도 작은 가게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먹고 살기 힘들었을테지만, 3.1절 발포에 대한 항의로 자발적으로 문을 닫았다. 



그렇다면 미군정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민심을 잘 파악하려는 노력을 보이는게 정상이었을 것이다. 미군정이 제주에 민주주의를 심으려고 했다면 잘 해결하려고 노력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오히려 반대로 나아갔다. 그들은 강경진압으로 치달았다. 아예 빨갱이의 섬 레드 아일랜드라며 강경진압을 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제주도민의 90%가 좌익색채를 띠고 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것은 흑색선전에 불과한 잘못된 주장임이 최근까지의 연구로 밝혀졌지만.



제주지사 박경훈의 항의성 사직서 제출

당시 제주도지사 박경훈은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항의성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는 [도민에게 고함]이란 글에서 "해방된 오늘 아직도 완전자주독립을 실현하지 못한" ... "금반 사건에 무참히 희생당한 인민에 대하여서는 30만 도민 전부가 한없이 동정과 조의를 표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오는 앞날 우리 통일민주독립을 위하여" 등으로 표현했다. 그럼에도 미군정 경찰은 일방적으로 억압하는 방식으로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제주도민들은 건국5칙에서도 보여지듯이 강한 민족의식과 근대의식, 그리고 자치정신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특히 총파업 참여에도 교사가 81명, 공무원 24명 등 교사와 공무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4월 3일에 이르기까지 1년간 무려 2,500명이 잡혀갔다. 제주 각 마을의 똑똑한 청년들이 거의 잡혀간 셈이었다. 



극우단체 서청의 등장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극우단체 서북청년단(서청)이 파견되면서부터이다. 미군정의 지시를 받아서 북쪽에 고향을 둔 '서북청년회'와 타 지역 사람들로 구성된 응원경찰대가 제주로 대거 내려온 것이다. 민심은 더욱 흉흉해져 갔다. 이 악명높은 단체 서청을 파견할 때 이승만 정권은 경찰의 직함은 주었지만 월급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생존을 하려면 알아서 그 지역에서 수탈해야 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북한의 토지개혁과 친일청산 등의 정치적 변화에 내몰려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큰 자들이었고, "제주는 빨갱이 섬"이라는 교육을 받았기에 제주도민을 죽이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슴지않고 살인, 방화, 강간 등을 자행했다. 다음은 당시 서북청년회 단장 문봉제의 증언이다.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달라고 하면 서북청년회를 파견했어요.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겠어요? 그 한 예가 제주도인데, 조병옥 박사가 경무부장으로 있으면서 4.3이 나자마자 저를 불러 제주도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경찰 전투대를 편성한다면 5백 명을 보내달라기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문봉제(당시 서북청년회 단장)


서청의 횡포와 만행은 4.3으로 이어지는 제주도민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저항정신에 따른 민란의 전통이 있었다. 이처럼 4.3은 어느날 갑자기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3.1 사건 이후로 형성된 제주 공동체의 반감이 정서적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억압이 쌓여가면서 비극적 사건으로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박경훈 제주도지사가 3.10 총파업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이후, 그 후임으로 유해진 지사가 부임했다. 그런데 그자는 서청 단원 7명을 데리고 왔다. 이후 4.3이 발발하기까지 제주도에 들어온 서청의 단원 수는 760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에게는 급료를 지급하지 않은 것은 제주도민을 약탈해서 먹고 살라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서청은 계속 파견되어 1,700명이 추가 투입되었고, 처음에는 경찰의 옷을 입고, 나중에는 경비대(군인)의 옷을 입고 들어왔다.



당시 17세였던 김민주의 증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학교 김용철 학생이 조천지서로 끌려가 고문치사를 당한 후, 서북청년회와 경찰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래서 '악질 경관 처단하자'라고 쓴 삐라를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막상 4월 3일에 무장봉기가 벌어져 소위 반동이라고 지목받은 사람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는 어린 마음에 '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튼 서청과 경찰로 인해 도무지 마을에서 살 수가 없어 48년 8월경 산에 올랐습니다. 조천중학원 2학년 때지요. 그땐 사태가 그렇게 오래갈 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여름옷 달랑 입고 올라겠습니까? 산에 올라 무장대 대장이 된 이덕구 선생님을 우연히 만나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 불렀더니 걱정스런 눈빛으로 '공부나 하지 왜 올라왔냐'고 하시더군요. 

김민주(당시 17세)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되었던 학생과 청년 등 3명이 고문치사로 잇따라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6일 조천지서에서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김용철이,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양은하가, 29일에는 서청에 의해 박행구가 희생되었다.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되었던 학생과 청년 등 3명이 고문치사로 잇따라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6일 조천지서에서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김용철이,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양은하가, 29일에는 서청에 의해 박행구가 희생되었다. 이에 억울하게 경찰고문으로 죽임을 당한 양은하의 어머니 고 윤희춘 여사는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 

.


(계속)


천주교대전교구정의평화위원회는 교구설정 70주년을 기념하며, 올해 70년을 맞이한 제주 4.3을 추모하는 다크투어를 기획했다. 그리고 2018년 11월 10일(토)~11일(일)의 1박 2일의 일정으로 제주를 방문했다. 참여자는 정춘교 사무국장, 박갑주 대건안드레아, 이요한 등 평신도 위원들과 자발적 참여자인 노은동 성당의 멋있는 한 쌍의 부부 등 총 5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