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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노은동 사회교리학교 1강 인권(2023.4.14.)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4. 14.

김용태 마태오 신부의 '인권' 강의 

노은동 사회교리학교 1강. 4월 14일(금) 저녁 7시 40분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대전정평위)는  2023년 4월 14일(금) 오후 7시 40분 노은동 성당에서 제35기 사회교리학교를 시작했다. 총 10주간 진행되는 이번 사회교리학교의 첫 강의는 행사를 주관하는 대전정평위 위원장 김용태 신부(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가 맡았고, <인권>을 주제로 약 110분간 강의했다. 수강을 신청한 31명의 신자들은 2시간 남짓한 짧지 않은 시간에도 강사와 수강생들이 서로 호응하며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다음은 강의 전문이다.

 

노은동 사회교리학교 제1강 '인권'

4월 14일(금) 저녁 7시 40분~9시30분 , 김용태 마태오 신부

인권의 바탕은 존엄성

인권의 바탕은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이것이 사회교리의 중심 안에 있습니다. 사회 교리는 침해할 수 없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통찰로부터 비롯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 인권이 유린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뇌와 성찰 속에서 사회교리는 발전합니다. 복음의 길에서 벗어난 삶의 모습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성찰 속에서 하나의 중심. 즉 예수님께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 그 안에 인간의 존엄성이 살아있습니다. 이것이 사회교리의 근간입니다. 

 

하이퍼 리얼리즘을 통해서 바라본 인권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기본으로 그것에서 파생되는 인권을 말할 수 있습니다. 혹시 하이퍼 리얼리즘이란 말 들어보셨습니까? 극사실주의라고 합니다. 실제와 똑같은 그림이나 조각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사실인가, 그린 것인가?’ 구분이 안됩니다. 인간의 몸을 조각할 때 힘줄까지도 표현합니다. 그것은  ‘현실을 그 자체로 풍자하는 겁니다.’ 진짜로 똑같이 표현하지만 진짜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것에 꽂힙니다. 그리고 현실을 외면합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나요? 국민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나요? 무엇이 맞습니까? 그것이 거꾸로 된 시절이 많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국가는 목적이 아닙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가 있는 게 아니라 국민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그런 시절을 겪어왔습니다. 멸사봉공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의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그 대의는 권력자를 위한 것이죠. 사실상 국가는 수단입니다. 국민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도되어버립니다. 이 현실을 꼬집는 것이 바로 극사실주의입니다. 하이퍼 리얼리즘입니다. 

 

 

도구가 목적이 되는 게 우상화

예전에는 어디 밥 먹으러 가서 “여기 맛있다”라고 음식 사진을 찍어 올리는데, 요즘은 사진을 찍으러 갑니다. 그렇게 바뀐 것도 한가지 사례가 됩니다. 또 돈은 무엇입니까? 수단입니다. 요긴한 수단입니다. 그 돈은 우리 삶을 위해 쓰여지는 건데, 우리 인간이 돈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렇게 뒤바뀌고, 결국 물신주의, 돈이 하느님 자리로 올라갑니다. 뒤바뀐 모습들입니다.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우상화는 또 무엇일까요? 어떤 형상을 만들어놓고 절하는 것도 그렇지만, 도구가 목적이 되는 게 우상입니다. 목적이 도구로 전락하고 도구가 목적이 되는 주객전도의 현실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우상화된 현실이 많습니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수단이지만, 그 공부 때문에 아이들이 죽습니다. 부모님들이 이렇게 말하죠. “다 너 잘 살으라고 그러는 거야?” 그러면서 닦달합니다. 예전에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자기 연습장 하나 쭉 찢어서 유서를 쓰고 나서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져서 죽습니다. 전교 2등을 하던 학생이었는데, 부모는 “1등 좀 해봐라!”라고 닦달을 합니다. 아이는 전교 2등임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다가 전교 1등을 하고 나서 그날밤 죽습니다. 찢은 연습장에는 “엄마, 이제 됐어?”라는 식의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아마도 자식을 잘 살게 하려고, 닦달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주객전도된 모습이 우리 삶에 너무나 많습니다. 수단이 목적이 되는 모습들, 목적이 수단으로 전락한 모습들. 그래서 하이퍼 리얼리즘 작가들이 현실을 꼬집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 역시 이 시대에 그렇게 전락한 것이라고 본 겁니다. 노동자들을 생각해보면, 자본가의 수단으로 전락한 건 아닐까요? 

 

우리 삶의 중요한 목적들이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

우리 삶 안에서 중요한 목적들이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린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통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무엇이 부족했는가?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통찰이 새롭게 생겨납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모든 생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인간에 대해 이해하려고 해도 수많은 차별과 격차가 존재합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 안에 이미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닌 것들에 대한 수탈과 파괴가 있습니다. 환경, 기후, 생태 등 인간을 이해할 때 그 안에서 더 약한 것들에 대한 배제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인간을 이야기해도 시작부터 차별과 격차가 생겨난 겁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더 특별한 감수성으로 말씀하시고, 일찍이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말씀하셨던 이 세상의 저 바닥에 기는 미물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보다 못한 인간에게 함부로 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모든 피조물에 대한 감수성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인간은 왜 존엄한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는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첫 시작이 잘못되면 이후로 잘못 나아갑니다. 인간은 왜 존엄한가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최고로 훌륭한 존재이며, 모든 만물 안에 최고봉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이미 차별이 존재합니다. 이미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란 표현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원숭이보다 나아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내면적 존재이므로, 등등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훌륭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존엄하다. 이렇게 존엄성의 근거를 “너보다 낫다”에서 찾습니다. 즉 차별에서 찾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존엄성을 찾을 때, “저 사람은 마티즈를 타는 데, 나는 벤츠를 타.” “너는 임대 아파트? 나는 타워팰리스야?” 라는 식입니다. “넌 전 재산이 2천만원? 난 200억” 그렇게 2천만원 짜리 존재와 200억 짜리 존재로 차별합니다. 

 

격차와 차별에서 존엄성을 찾는다면 ... 
격차와 차별에서 존엄성을 찾는다면, 나보다 못한 존재, 덜 가지고 주머니에 통장 잔고에 얼마 없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존엄합니다. 그러나 그 존엄성은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 앞에서 철저히 무너집니다. 200억 짜리 존재는 2000억 짜리 존재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 뛰어난 나보다 더 많이 가진, 나보다 더 똑똑하고 위에 있는 사람 앞에서 내 존엄성은 철저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일 인간보다 뛰어난 외계인이 등장하다면 원숭이보다 뛰어난 인간은 외계인 앞에서 원숭이의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그런 비교와 차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70억 가까운 인구들 중에 존엄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갑질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향한 행위이죠. 나보다 힘센 사람에게 못하는 짓을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향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권력은 차별에서 나옵니다. 

 

차별이 곧 권력이다
우리가 똑같이 100억 씩 갖고 있다면 그 공동체 안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20만원씩 있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2천만원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권력이 생깁니다. 차별이 권력입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평등함을 원치 않습니다. 음식점에 갔을 때 식당 주인에게 특별한 대접을 받으면 좋아합니다. 화장품 가게에 갔더니 구석으로 불러서 뭔가 “딴 사람한테 주는 거 아니니까 절대 이야기하지 마세요.”라는 특별함을 좋아합니다. 그 마음은 바로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입니다. 특별한 대접을 좋아합니다. 차별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차별적 구조를 지지합니다. 지금은 을의 입장이지만, 언젠가는 갑의 입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존엄성을 찾습니다. 그런 중에 차별적인 세상의 구조는 바뀌지 않습니다.

 

존엄성은 복음에서 찾아야
격차와 차별, 비교. 바로 이런 것들에서 존엄성을 찾는다면, 그 존엄성은 어느 순간 산산히 부서집니다. 그렇다면 복음에서 찾는 존엄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닮았다는 그 사실에서 인간의 존엄함이 옵니다. 비교와 차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았다는 사실로부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존엄합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아무런 능력이 없고 가진 것이나 내세울 게 하나도 없더라도 그 자체로 존엄합니다. 이유는 바로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하느님을 닮았을까? 
그렇다면 과연 인간만이 하느님을 닮았을까요?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땅을 기어다니는 미물까지도 존엄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만드셨기에, 참된 존중은 땅바닥의 작은 미물까지도 존중하는 마음에서, 부자와 라자로에서 그 라자로까지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는 그런 인간까지도 섬기고 발을 씻어주고, 그런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나아갈 때, 인간의 존엄이 생깁니다. 하느님을 닮은 존재인 인간과 하느님을 닮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생각이 모든 것의 전제가 됩니다. 새로운 감수성으로 “모든 피조물은 다 존엄하다.”라고 말합니다. 

 

죄의 범위를 확장하면 ...
이제 죄의 범위도 확장합니다.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죄악을 넘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통찰력을 교황께서 우리에게 알려주듯이, 하느님을 닮은 모든 피조물을 함부로 훼손하고 해치는 것까지 죄악이라고 봅니다.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의 의미 : '연결성'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이유를 확실하게 정의하겠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다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닮았다’는 건 무엇일까요? 생김새를 말하나요? 그 표현에는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게 들어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이다.” 가지가 나무에 연결된 순간 거기서 열매가 맺습니다. 그런데 뚝 분질러지면 그건 말라비틀어진 가지일 뿐, 포도나무의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하느님 다움이 우리 삶 안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닮았다는 것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의 인격입니다. 인격이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은 항상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음으로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왕자와 거지’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왕자가 자기랑 얼굴이 똑같은 거지와 옷을 바꿔입습니다. 여기서 이 왕자의 존엄성은 왕과 얼굴이 닮았다는데서 오나요? 아니면 왕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서 오나요? 거지가 왕자의 옷을 입고 있고, 또 성격이나 언행 등이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그 거지를 진정한 왕자라고 볼 수 있을까요? 즉 인간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 관계성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성이 인간과 인간으로 연결되어 나아가는 것을 ‘사회성’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확장되어 나갑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다른 인간에게 확장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며 연결된 인간은 다른 인간으로 확장됩니다. 하느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어려운 교리를 이해시키려고 할까요? 단순하게 말하면 그건 관계입니다. 이 세상의 모습을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신 이 세상 안에서 서로 어우러지는 겁니다. 숲에는 똑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소나무 산이라도 똑같지 소나무들은 저마다 다릅니다. 똑같은 게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어우러져서 울창한 숲을 이룹니다. 수많은 관계들 안에서 내어주고 받아들입니다. 숲에서 학이 소나무 위에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해보죠. 바닥을 기어다니는 지렁이를 하찮게 볼까요? 고고하게 서있는 학은 학의 역할이 있고, 지렁이는 또 나름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들은 순환하며 삽니다. 그 모습이 성부, 성자, 성령인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연결되고, 인간이 인간과 연결되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존엄함이 살아있습니다.

 

죄는 관계성이 깨지는 것 ...
그렇다면 죄는 무엇입니까? 그 관계성이 깨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엄성도 깨집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진다면 존엄성이 훼손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연결이 깨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존엄성의 상실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들이 스스로 존엄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항상 관계를 이루는 존재인데, 그 관계가 단절된 것을 죄라고 합니다. 디아블로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디아블로’라는 말의 어원이죠. ‘악, 악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디아’라는 접두사가 붙으면 어떤 뜻이 있냐면, ‘단절’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원래 하나 있던 것을 갈라놓습니다. 횡경막이 그렇습니다. 디아스포라는 또 뭘까요? 유대인공동체가 전세계 뿔뿔이 흩어집니다. 원래 한 데 살다가 갈라졌습니다. 그러면 디아블로스는 뭘까요? 쉽게 말하면 갈라놓는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존엄성을 훼손시킵니다. 모든 죄의 부리, 디아블로스입니다. 악입니다. 죄는 악에서 옵니다. 


종교는 영어로 Religion이라고 합니다. 라틴어 Re-legere에서 온 겁니다. 여기서 '레(Re)'는 다시 묶는다는 겁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다시 묶어주는 겁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인간과 인간을 다시 묶어주는 겁니다. 그래서 상실된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는 겁니다. 더 재미있는 건, 이 디아라는 접두사의 정반대가 있습니다. 합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씸’입니다. sym입니다. 심포니 오케스트라라고 하죠. 그리소 심볼루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사’입니다. 칠성사를 가리키는 아주 오래전부터 쓰여오던 말입니다. 성사는 하느님과 인간, 악에 의해 갈라진, 악마로 인해 관계가 갈라지고 존엄성이 훼손되어버린 그 지점에서 다시 합쳐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인간과 인간을 다시 합쳐줍니다. 모든 성사의 원형은 죄악을 물리치고 죽음으로부터 승리를 이끌어내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사의 원형 ...
예수님은 모든 성사의 원형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표현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게 성사입니다. 심볼이며 상징입니다. 살과 피를 가진 분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인간을 다시 연결하고 인간과 인간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사의 원형, 그리고 교회는 기초성사입니다. 디아블로스로 인해 훼손된 우리를 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서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는 게 바로 성사입니다. 수도 없이 갈라지고 존엄성이 훼손된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은 성사적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뿌리내리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존엄성은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이고,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인간과 인간으로, 피조물까지로 뻗어나갑니다. 

 

 

죄악의 2가지 측면 : 개별성과 사회성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로 고백 기도를 시작하는 이유

죄는 2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은 하늘을 향한 것도 있지만, 형제를 향한 것도 있습니다. 즉 개별성과 사회성이 있습니다. 성찰 안에서 중요한 내용입니다. 죄는 인간으로서 하느님과의 단절이라는 개별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를 향한 죄는 사회성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맺는 관계는 하느님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연결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계명과 관계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죄도 그렇게 2가지 차원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이야기’를 원작으로 합니다. 그 영화와 소설은 비슷한데요. 소설은 좀 더 비극적입니다. 여성이 죽습니다. 전도연 씨가 주인공으로 나왔죠. 소설에서는 절망 끝에 죽습니다. 영화나 소설이나 아이가 살해당했는데, 알고보니 학원 원장이 범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주인공 엄마는 개신교회를 다니게 되고 그런 뒤로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주자는 생각으로 교도소에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면회에서 마주친 그 살인자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죄를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라는 겁니다. 그러자 아이를 잃은 엄마는 면회를 다녀온 뒤로 걷잡을 수 없는 절망과 상실로 앓아눕습니다. 그렇지는 죄악은 인간에게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그렇습니다. 그 사형수는 애를 죽였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용서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범죄자로 인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고통의 삶을 사는 이에 대한 죄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엄성은 형제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죄도 2가지 개념이며, 사랑도 2가지 개념입니다. 존엄성이란 하느님 앞에서의 존엄성 뿐만 아니라 형제들 사이에서도 존재합니다. 나는 내 형제의 존엄성을 세워줘야 하는 겁니다. 각자가 모두 각자 존엄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존엄하지만, 이것이 형제들 사이에서 섬김으로 존엄을 세워야 합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하느님 닮은 인간이란, 나와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하느님 닮은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저녁 8시 26분 휴식. 8시 43분 재개

 

 

죄악의 사회적 구조

 

죄란 무엇인가요?  죄의 개별성과 사회성.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나와 내 이웃. 이처럼 2가지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존엄성이란 하느님 앞에서 우린 모두 존엄하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서로를 존엄하게 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서로서로 섬기고 존엄하게 만들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죄란 무엇입니까? 한 개인이 짓는 죄도 있지만, 죄의 사회적 구조라는 것도 있습니다. 인간 사회는 수많은 체제와 제도와 법과 구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어떤 행위로 인한 죄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 구조를 죄의 형태로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재국가 안에서는 그런 죄악이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인권을 유린하는 게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악법들이 그런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도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들이 존재합니다. 예전에 독립군을 때려잡던 법와 친일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들입니다. 막걸리 보안법이라고 해서 막걸리 마시다가 말 한마디 잘못해서 잡혀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없애자고 하지만 아직 못 없앱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두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게 바로 죄악의 구조입니다. 개인이 저지르는 행실이 아니라 법과 제도가 복음적이지 않고 반인권적, 반인간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세우기 위해서, 인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그런 죄악의 구조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에는 너무나도 많은 죄악의 구조가 있습니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어도 구조를 바꾸지 못해서, 그 악의 세력들이 여전히 건재합니다. 지금의 검찰독재는 그런 경우입니다. 법위에 군림하면서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려 합니다. 그런 잘못된 구조를 개선하려고, 수사권 기소권을 분리시키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안에 인간의 존엄성이 바로 세워지고 인권이 존중되려면, 개개인의 인간존중, 개개인의 존엄성 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친일적폐 매국 세력이 이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이것을 다 뜯어고쳐야 합니다. 이것이 검찰개혁이며 언론개혁입니다. 


구조적 죄악의 3가지: 돈, 명예, 권력

죄의 구조를 이루는 3가지 범죄가 있습니다. 바로 돈, 명예, 권력입니다. 돈은 자본이고 명예는 언론이며 권력은 바로 검찰독재입니다. 이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의 가치는 돈입니다. 또 권력입니다. 한 푼이라도 더 많이 갖고 있는 게 권력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복음적이고 반인권적 구조가 생기면 인간은 도구가 됩니다.

 

'기레기'란 표현조차 과분한 한국 언론의 죄악

또 하나는 명예입니다. 겉으로 드러납니다. 이 시대의 외모지상주의입니다. 정보화시대에 겉으로 드러나는 게 중요하죠. 정보화 시대의 최고의 권력자는 언론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조성하고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나쁜 놈도 괜찮게 포장하여 만들고. 아주 괜찮은 사람을 파렴치하게 만듭니다. 언론이 기술을 부리면, 이 시대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파렴치한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 통장 털고, 카드 털고, 성모님 잡혀가고 그렇게 탈탈 털 겁니다. 이 시대 예수님은 언론에 의해 동네 양아치이며 파렴치한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도리가 없습니다. 부처님이든 공자님이든 예수님이든, 언론이 기술을 부리면 양아치가 되고, 구조화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레기’란 말은 너무 과분합니다. 글을 쓰면 남는데, 이런 글을 쓰고도 부끄럽지 않은지.

 

검찰 공화국

또 권력은 무엇입니까? 권력은 힘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세계화와 맞물려 있는데요. 무한경쟁 속에서 이기는 놈이 잘하는 건데요. 힘센 나라가 힘 없는 나라를 수탈합니다. 우리가 미국에 꼼짝 못하고 속국처럼 전락해 있습니다. 미국이 도청하더라도 아무 소리를 못하고 있습니다. 굴욕적입니다. 힘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힘센 놈이 다 갖습니다. 우리나라도 보면 힘센 놈들이 좌지우지합니다. 역사상 가장 힘센 세력으로 오늘날 검찰 권력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의 캐비넷 속에 국회의원, 재벌, 그리고 심지어 판사들의 비리까지도 있는 모양입니다. 

죄의 구조 속에서 인간의 구조는 추락합니다. 인권이 유린됩니다. 관계성은 훼손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단절됩니다. 각자도생의 삶을 삽니다. 누가 죽어나가든 말든, 나만 잘 살면 됩니다. 대한민국 안에 디아블로스는 뭡니까? 검찰, 언론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성사적 삶으로 관계를 연결하고 죄의 구조를 깨부셔야 합니다. 복음적 구조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복음적 구조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여 공동선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인간에 대해서 지금까지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기본 개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차별이 아닌 하느님을 닮았다는 그 관계성에서 존엄성이 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 즉 사회성으로 드러납니다. 

 

 

통합적 존재로서의 인간

 

두 번째로 그러면 그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에 대한 다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 인간은 통합적입니다. 통합적 존재로,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순전한 영혼과 순전한 육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통합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삶의 다양한 구성요소 안에서 오로지 순전하게 '정치적 인간'이 있거나 '경제적 인간' 등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통합적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 안에서 두루두루 존엄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만 존엄한데, 문화적으로 존엄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예술적으로 존엄한데 정치적으로 광대 천민일 수는 없습니다.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 통합되어 나를 설명하는 겁니다. 존엄성은 내 삶의 모든 것 안에 살아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는 통합적이어야 합니다.

 

존엄성은 내 삶 안의 모든 것 안에 살아있다

우리는 사람을 단편적으로 이해합니다. 그게 바로 외모평가입니다. 외모지상주의입니다. 외적으로만 존중받는 것은 통합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를 균형있게 바라봐야 하는데, 그리스 철학자 중에 육체를 하찮게 보는 경우가 있고, 영혼을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킨다는 식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동양에서 시작하여 서양, 즉 로마로 건너간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적 개념들이 들어오면서 몸뚱아리를 하찮게 생각하며 금욕주의적, 극단적으로 몸을 바라보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사고 방식 안에서 육체노동을 하찮게 바라보게 합니다. 정신 노동을 고귀하게 바라봅니다. 이것 역시 통합적이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예전과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여전히 겉으로 들어나는 모습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얼짱, 몸짱을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얼짱에서 말하는 ‘얼굴’의 ‘얼’은 무엇입니까? 사실 ‘얼’은 내면이고 영혼입니다. 내면이 겉에 드러나는 게 ‘얼굴’입니다. ‘굴’은 '통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멍한' 사람을 보면 '얼이 빠졌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얼굴의 모습이 다르게 보입니다. 결국 내면이 겉으로 드러나는 게 얼굴인데, ‘얼’이 내면이라면 ‘얼짱’은 사실상 내면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우리가 ‘얼짱’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낯짱’이라고 해야겠죠. '낯'이란 눈, 코, 입 따위가 있는 얼굴의 바닥을 말합니다.

 

'얼짱'과 '낯짱'을 구분하는 방법

혹시 얼짱과 낯짱을 구분하는 방법을 하세요. 어떤 분의 얼굴을 보면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어보세요. 그러다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얼짱’입니다. 얼짱 사진을 이용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콘을 이용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이나 성모님 사진을 보면서 기도하면 평화와 고요를 느낍니다. 예수님의 평화와 고요를 바라보며 평화로워지고 고요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얼짱이신 겁니다. 어쨌든 이 시대의 치우쳐져 있는 모습들이 아니라 균형있게 바라봐야겠습니다. 단편적인 판단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추레해보이는 외면 안에 하느님처럼 빛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내외면에 자리잡은 모습들을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월적 존재로서의 인간

 

리고 인간은 초월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 갇혀있지 않고, 항상 넓어집니다. 항상 확장됩니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나에게서 하느님에게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에서 비가시적 세계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철학을 할 수 있고 신학을 추구하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갈망합니다. 내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미성숙하다고 합니다. 아이가 처음 태어나면 나와 엄마에 대한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다나 ‘나’라는 개념이 생기지만, 거기서 멈추면 미성숙한 겁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초월적 존재이므로, ‘너’를 압니다. 나를 뚫고 나가서 너의 아픔을 이해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 얼마나 불편할까”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슬퍼합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자들의 모습

9년 전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던 중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애는 안 죽어서 다행이네”라고 할까요? 이렇게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죽음 앞에서 심지어 내 자식이 없어도 가슴이 아픕니다. 자식 잃은 부모들이 진상을 요구하는 그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먹습니다. 이들은 인간성을 상실한 자들입니다. 공감능력이 없고 자기 안에 갇혀있는 자들입니다. 내 안에 갇혀 있으면 다른 이들의 아픔이나 행복을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이의 마음 속에 하느님이 있다는 걸 볼 줄 아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을 보는 겁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깔을 통해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하늘의 달과 태양을 칭송하는 것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든 피조물의 찬가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유아기적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갇혀있지 않고 열려 있어야

인간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갇혀 있지 않고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겁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사랑이 넓어지고 깊어지지 않고 자기 안에 갇혀 있다면 엄청난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라는 걸 보면 김혜자와 원빈이 나옵니다. 김혜자는 홀어머니인데, 아들 하나 바라보며 삽니다. 그런데 살인사건에 연루된 아들의 누명을 벗기려고 발벗고 뛰죠. 그러다가 알고 보니 사실은 아들이 범인이었습니다. 아들은 피해자를 죽이려고 죽인 게 아니라 좀 모자라서 죽인 거였습니다. 결국 엄마는 유일한 살인의 목격자였던 고물상 하는 이를 죽입니다. 증거를 없앤 겁니다. 그리고 엉뚱한 남의 아들이 감옥에 들어갑니다. 자기 아들은 풀려나고. 그러면서 그걸 잊으려고 관광버스에서 춤을 추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사랑이 간장종지만할 때, 그것이 인생에서 어마어마한 폭력으로 자리합니다. 

 

자신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은 폭력의 모습이다

부녀자들을 납치해서 사창가에 팔아먹는 인신매매범에게 중학교 딸이 있습니다. 그런데 밤늦게 들어오자,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라면서 놀랍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하겠습니까? 어머어마한 부를 이룬 대기업의 회장은 아들에게 불법으로 자리를 승계하면서, 그 기업이 성장하는 데 역할을 한 직원의 산재처리는 외면합니다. 내 자식만 사랑하는 것,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폭력의 모습입니다. 사랑은 넓어지고 깊어져서, 남의 집 자식들도 담겨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의 초월성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다면 온전한 사랑이 아니고, 우리 안의 존엄성을 없애버리는, 훼손시키는 그런 폭력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고유한 존재로서의 인간

 

함부로 인간의 무게를 설정할 수 있을까

인간은 또한 세 번째로 고유한 존재입니다. 유일무이합니다. 전 우주 안에서 나랑 똑같은 인간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고유합니다. 어딘가에 소리 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 삶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똑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초라하게 어딘가 구석에서 말없이 죽어가더라도, 그들의 삶과 죽음을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어느 여인의 뱃속에서 자라나다 낙태된 아이들의 인생은 빛도 못보았다는 이유로, 이 세상에서 엄청나게 실적을 이룬 위대하다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무시해도 될까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 모든 게 똑같습니다. 누구나 유일무이한 고유한 존재이므로, 함부로 인간의 무게를 설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안에 우리가 섬기지 못할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속에 하느님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공권력이 필요한 이유 

 

강제성이 작동하는 근거

그리고 여기서 이러한 인간, 인간이 이러한 존재이므로 지금까지 이야기한 인간의 존엄성, 그러한 존중이 자리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각자 알아서 하면 될까요? 각자만 알아서 하면 잘 안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강제성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공권력입니다. 그게 정치공동체이며, 수많은 법과 제도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 올바로 자리잡도록 작동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자리한 공권력의 기능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위치에 있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습니다. “알아서 하십시오”하면 아무도 안 합니다. 인간은 초월적 존재이지만, 이기적인 면도 있어요. 우리는 모두가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안의 이기적인 면을 뚫고 초월적 존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그런 권한을 공권력으로 부여합니다. 그것은 또한 종교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회의 책무입니다. 공권력의 역할인 동시에 교회의 역할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 자유

 

통합적, 초월적, 고유한 존재로서 인간의 존엄성

마무리 단계입니다. 인간의 특성을 설명할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그 바탕, 인간에 대한 이해, 통합적 존재로서의 인간, 초월적이며 고유한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공권력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가장 큰 또 다른 특징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유입니다. 존엄성과 인권을 이야기할 때 빠져서 안되는 게 바로 자유입니다. 아무리 잘 대우해준다 한들, 동물을 동물원에 가둬놓으면 그게 동물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아닙니다. 동물이 초원에서 하늘에서 마음껏 그들의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초월성, 고유한 존재 등을 하지만, 실제 삶을 보면 자유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뭔가 구속된 노예의 삶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그동안의 모든 이야기들이 허물어져버립니다. 자유라는 토대 안에서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자유입니다. 모든 것은 자유의 토대 위에서 이뤄집니다. 새를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숲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새를 존중하는 행동은 큰 새장을 만들어서 모이를 주고, 새를 위한 복지시설을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새를 사랑한다면 잡아놓지 말고 자유롭게 풀어줘야 합니다. 인간의 권리를 이야기할 때도 자유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빼놓고 아무리 그럴사한 이야기를 한들,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난 너를 사랑해”라고 하면서 수험생을 압박한 부모님들은 자살한 자식에 대한 슬픔도 있었겠지만 화를 냈다는 말도 있더군요. 부모는 자식을 위해 그렇게 해줬다는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입시의 감옥에서 고통받는 아이의 생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숨을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
 

'다 너를 위한 거야, 조금만 참아?'

인간은 자유 안에서만 선을 지향할 수 있다. 기본적인 겁니다. 이것 빼고, 감옥에 가두고, ‘다 너를 위한 거야.’ ‘1년만 참고 열심히 공부해’라고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심지어 당신을 거부할 자유까지 주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시인 서정윤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새의 날개를 꺽을 수 없다"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혼배 미사 때 서류를 작성할 때 묻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자유'입니다. 온전히 자유롭게 이 혼인을 선택했는지를 묻습니다. 그게 아니면 아무리 사랑해도 사랑이 아닙니다. 자유는 모든 것의 바탕입니다.

 

모든 것의 바탕인 자유와 그 자유의 한계

그런데 자유를 이야기할 때 동전의 양면이 있습니다. 나의 자유가 너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자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한한 자유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관계성을 훼손하면 안됩니다. 옆 사람을 푹 찌르고, 또 옆 사람 물건을 훔치고, “내 자유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니 다른 사람의 자유도 중요합니다. 그 자유가 충돌할 때 필요한 게 공권력입니다. 그래서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와의 관계성 안에서 함께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 한계성이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라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맘껏 누리게 하면서도 ‘선악과’를 금지합니다. 어마어마한 선물과 동시에 그 한계를 부여했습니다. 그걸 넘었을 때 악이 됩니다. 태초의 디아블로스인 뱀이 나타나서 “한계를 넘어서라. 따먹어”라고 하죠. 

 

자유의 다른 한계인 '보호의 필요성'
자유에는 보호라는 한계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아파트 베란다에서 마음껏 뛰놀도록 놔두나요? 베란다는 떨어질 수 있으니 위험합니다. 그래서 위험하기 때문에 못 나가게 하고 문을 닫아걸어야 합니다. 그런 게 보호하는 겁니다. 자유를 주셨으면서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가 본능적으로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 안에 심어놓은 게 바로 양심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느님이 내려주신 신법과 자연을 이루는 자연법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심어주신 양심법을 통해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한계를 체험하는 겁니다. 

 

인간 존엄성은 보편적인 가치

 

존엄성은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존엄성과 인권을 이야기할 때, 어느 특정한 그룹이나 사람에게 해당되고 나머지가 해당되지 않는 것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존엄성이나 인권은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일입니다.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보편성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만의 존엄성이나 인권이란 말은 말이 아닙니다. 모두를 위한 인권, 모두를 위한 존엄성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할 때, 동등한 존엄성을 말합니다.

 

평등과 획일은 같은 게 아니다

그런데 동등하다고 해서, 평등이란 모두가 똑같다는 획일적 의미가 아닙니다. 동등한 존엄성이란 통장 잔고가 같고, 키도 같고 그런 게 아닙니다. 다양하지만 동등한 존엄성으로 어우러지는 겁니다. 각자 모두가 다르지만 함께 어울리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 있는 사람 덕분에 살고, 능력 있는 사람은 능력 없는 사람과 함께 삽니다. 비난하지 않습니다. 숲 속에는 온갖 다양한 것들이 있고, 값으로 매기면 천양지차이지만, 서로서로 메워주고 주고 또 받습니다. 평등이란 이런 것입니다. 인간의 평등이란 다 똑같은 게 아니라 다 다른 겁니다. 그러나 함께 모두 각자 존엄하며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복잡한 직소 퍼즐은 맞추듯 서로 어우러집니다. 틈 하나 없이 완벽한 퍼즐이 완성되려면 사소한 한 조각까지도 모두 소중합니다. 그렇게 그림 하나가 완성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이 만든 세상입니다. 그게 우리가 가진 평등의 개념입니다. 다르지만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한 조각이라도 없어지면 안 됩니다. 그 조각이 큰 것만이 아니라 작은 것까지 모두 채워져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 중 최고의 가치는 생명권

 

모든 권리를 아우르는 최고의 권리는 생명권입니다. 일단 사람 살리고 보는 겁니다. 네 편이냐 내 편이냐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일차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것이 바로 생명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낙태를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낙태를 주장하는 이들은 여성의 지위와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이 뱃속의 태아가 지닌 원초적 생명권 ‘살고 싶다’라는 말도 못하고 햇볕도 못보는 가장 작은 존재의 생명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게 교회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뱃속의 아이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낙태를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2023년 4월 14일(금) 밤 9시 38분 종료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학교 1강 '인권'

김용태 마태오 신부(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