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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오늘부터 10주간, 천안 월랑성당 사회교리학교 개최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4. 16.

대전 정평위, 천안 월랑성당에서 10주간 사회교리학교 개최  

오늘부터 매주 일요일, 교중 미사에 앞서 50분 특강 형식 

4/16(일)부터 6월 18일(일)까지 총 10주 과정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대전정평위, 위원장 김용태 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는  오늘부터 10주간 천안 월랑 성당에서 제36기 사회교리학교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월랑성당 사회교리학교는 기존의 사회교리학교의 방식을 탈피하여 교중미사가 열리기 전 전 신자를 대상으로 약 50분의 특강 형식으로 진행된다. 

 

 

2023년 4월 16일(일) 오전 10시부터 약 50분간 진행된 첫번째 시간은 김용태 마태오 신부(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평위원장)이 강의를 맡았고, 주제는 '인권'이다. 김용태 신부는 먼저 인권의 바탕은 <인간의 존엄성>이며, 이것이 사회교리의 중심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통찰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 그 안에 인간의 존엄성이 살아있으며, 그것이 사회교리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이하는 강의의 주요 내용이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인간이 모든 만물의 최고봉이기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았기때문이다. 즉, 존엄성의 근거를 격차와 차별에서 찾는다면, 나보다 못한 존재 앞에서 나는 존엄할 수 있지만, 나보다 더 많이 가진, 나보다 더 똑똑하고 위에 있는 사람 앞에서 내 존엄성은 철저하게 무너진다. 만일 인간보다 뛰어난 외계인이 있다면 원숭이보다 뛰어난 인간은 외계인 앞에서 원숭이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다는 사실로부터 존엄함을 찾는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존엄하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아무런 능력이 없고 가진 것이나 내세울 게 하나도 없더라도 그 자체로 존엄하다. 이유는 바로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만이 하느님을 닮았을까? 그렇지 않다.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만드셨다. 그래서 땅을 기어다니는 미물까지도 존엄하다. 그래서 하느님을 닮은 존재인 인간과 하느님을 닮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생각이 모든 것의 전제가 되므로, 이처럼 새로운 감수성으로 “모든 피조물은 다 존엄하다.”라고 말하는 생태감수성까지 확장할 수 있다. 이렇게 죄의 범위도 확장된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죄악을 넘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통찰력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우리에게 알려주듯이, 하느님을 닮은 모든 피조물을 함부로 훼손하고 해치는 것까지 죄악이 된다. 

이때 우리가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연결성'을 말한다. 하느님을 ‘닮았다’는 건 무엇일까요? 그것은 생김새가 아니라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게 들어있습.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이다.” 가지가 나무에 연결된 순간 거기서 열매가 맺습니다. 그런데 뚝 분질러지면 그건 말라비틀어진 가지일 뿐, 포도나무의 가지가 아니다. 하느님의 하느님 다움이 우리 삶 안에서 드러나는것이므로, “닮았다는 것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성이 인간과 인간으로 연결되어 나아가는 것을 ‘사회성’이라 한다.

 

숲에는 똑같은 게 하나도 없다.  산과 숲은 서로 다르지만 함께 어우러져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수많은 관계들 안에서 내어주고 받아들인다. 그들은 순환하며 산다. 그 모습이 성부, 성자, 성령인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다. 하느님과 인간이 연결되고, 인간이 인간과 연결되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존엄함이 살아있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일까? 그것은 관계성이 깨지는 걸 말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깨지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진다. 그것이 죄이다. 인간과 인간의 연결이 깨진 것도 마찬가지이다. 죄는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존엄성의 상실이다. 디아블로스라는 말이 있다. ‘악, 악마’라는 말이다. 여기서 접두사 ‘디아’는 ‘단절’이란 의미가 있다. 원래 하나 있던 것을 갈라놓는다. 그래서 디아블로스는 <갈라놓는자>이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존엄성을 훼손시킨다. 

 

종교는 영어로 Religion이다. 라틴어 Re-legere에서 왔는데, 여기서 '레(Re)'는 다시 묶는다는 말이다. 하느님과 인간을 다시 묶어주고, 상실된 존엄성을 회복시켜준다.  그래서 이 디아라는 접두사의 정반대는 합치는 것, 바로 ‘씸(Sym)’이다. 심포니 오케스트라, 심볼루스라는 말이 있다. 심볼루스는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이며, 바로 ‘성사’이다. 칠성사를 가리키는 아주 오래전부터 쓰여오던 말로 악마로 인해 관계가 갈라지고 존엄성이 훼손되어버린 그 지점에서 다시 합쳐주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과 인간을, 인간과 인간을 다시 합쳐준다.  모든 성사의 원형은 죄악을 물리치고 죽음으로부터 승리를 이끌어내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모든 성사의 원형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표현한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게 성사이다. 심볼이며 상징이다. 살과 피를 가진 분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렇게 하느님과 인간을 다시 연결하고 인간과 인간을 연결한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예수님은 모든 성사의 원형, 그리고 교회는 기초성사이다.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는 게 바로 성사이다. 수도 없이 갈라지고 존엄성이 훼손된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은 성사적 삶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은 하늘을 향한 것도 있지만, 형제를 향한 것도 있다. 즉 개별성과 사회성이다. 죄는 인간으로서 하느님과의 단절이라는 개별성이 있다. 그런데 형제를 향한 죄는 사회성이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맺는 관계는 하느님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도 2가지 개념이며, 사랑도 2가지 개념이다. 존엄성이란 하느님 앞에서의 존엄성 뿐만 아니라 형제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므로, 형제들 사이에서 섬김으로 존엄을 세워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야한다. 

개인이 짓는 죄도 있지만, 죄의 사회적 구조라는 것도 있다. 한 사람의 어떤 행위로 인한 죄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 구조를 죄의 형태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독재국가 안에서는 그런 죄악이 구조화되어 있다. 막걸리 보안법이라고 해서 막걸리 마시다가 말 한마디 잘못해서 잡혀가기도 한다. 개인이 저지르는 행실이 아니라 법과 제도가 복음적이지 않고 반인권적, 반인간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에는 너무나도 많은 죄악의 구조가 있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어도 구조를 바꾸지 못해서, 그 악의 세력들이 여전히 건하다.  이 세상 안에 인간의 존엄성이 바로 세워지고 인권이 존중되려면, 개개인의 인간존중, 개개인의 존엄성 만으로는 쉽지 않다. 친일적폐 매국 세력이 이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이것을 다 뜯어고쳐야 합니다. 이것이 검찰개혁이며 언론개혁이다.   

구조적 죄악의 3가지: 돈, 명예, 권력. ... 죄의 구조를 이루는 3가지 범죄가 있다. 바로 돈, 명예, 권력이다. 돈은 자본이고 명예는 언론이며 권력은 바로 검찰독재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의 가치는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복음적이고 반인권적 구조가 생기면 인간은 도구가 된다. 또 하나는 명예이다. 정보화 시대의 최고의 권력자는 언론이다. 언론은 아무리 나쁜 놈도 괜찮게 포장하여 만들고. 아주 괜찮은 사람을 파렴치하게 만든다. 언론이 기술을 부리면, 이 시대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파렴치한으로 만들 수 있다. 예수님 통장 털고, 카드 털고, 성모님 잡혀가고 그렇게 탈탈 털 거다. 이 시대 예수님은 언론에 의해 동네 양아치이며 파렴치한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기레기’란 말은 너무 과분하다. 

또 권력은 힘이다. 우리가 미국에 꼼짝 못하고 속국처럼 전락해 있다. 미국이 도청하더라도 아무 소리를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힘센 놈들이 좌지우지한다. 역사상 가장 힘센 세력으로 오늘날 검찰 권력이 등장했다. 그들의 캐비넷 속에 국회의원, 재벌, 그리고 심지어 판사들의 비리까지도 있는 모양이다.  죄의 구조 속에서 인간의 구조는 추락한다. 인권이 유린되고, 관계성은 훼손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단절되고, 각자도생의 삶을 산다. 누가 죽어나가든 말든, 나만 잘 살면 된다. 대한민국 안에 디아블로스는 누구일까? 바로 검찰이나 언론 등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성사적 삶으로 관계를 연결하고 죄의 구조를 깨부셔야 한다. 복음적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 이 세상을 복음적 구조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여 공동선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러면 존중이 자리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각자 알아서 하면 될까? 각자만 알아서 하면 잘 안된다. 강제성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공권력이다. 정치공동체이며, 수많은 법과 제도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 올바로 자리잡도록 작동해야 한다. 세상에 자리한 공권력의 기능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또한 종교의 역할이기도 하다. 공권력의 역할인 동시에 교회의 역할이다. 

인간의 특성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그 바탕, 인간에 대한 이해, 통합적 존재로서의 인간, 초월적이며 고유한 유일무이한 존재란 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공권력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러면 인간의 가장 큰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자유이다. 뭔가 구속된 노예의 삶이라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허물어진다. 자유라는 토대 안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를 이야기할 때 동전의 양면이 있다. 나의 자유가 너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한계가 있다. 무한한 자유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관계성을 훼손하면 안된다. 옆 사람을 푹 찌르고, 또 옆 사람 물건을 훔치고, “내 자유야”라고 할 수는 없다.  자유가 충돌할 때 필요한 게 공권력이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존엄성과 인권을 이야기할 때, 어느 특정한 그룹이나 사람에게 해당되고 나머지가 해당되지 않는 것은 온전하지 않다. 존엄성이나 인권은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동등한 존엄성이다. 그런데 동등하다고 해서, 평등이란 모두가 똑같다는 획일적 의미는 아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 있는 사람 덕분에 살고, 능력 있는 사람은 능력 없는 사람과 함께 산다. 서로 비난하지 않는다. 인간의 평등이란 다 똑같은 게 아니라 다 다른 거지만, 함께 모두 각자 존엄하며 어우러지는 것이다. 복잡한 직소 퍼즐은 맞추듯 서로 어우러진다. 틈 하나 없이 완벽한 퍼즐이 완성되려면 사소한 한 조각까지도 모두 소중하다. 모두 다르지만 어우러지는 것, 한 조각이라도 없어지면 안 되고, 조각이 큰 것만이 아니라 작은 것까지 모두 채워져야 한다.   

끝으로, 모든 권리를 아우르는 최고의 권리는 생명권이다. 일단 사람 살리고 보는거다. 네 편, 내 편을 구분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것이 바로 생명권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낙태를 반대하는 이유이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게 교회의 입장이다. 그래서 뱃속의 아이를 선택한 것이다. 


2023년 4월 16일(일) 오전 10시~10시50분

천안 월랑 성당 사회교리학교 1강 '인권'
김용태 마태오 신부(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