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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노은동 사회교리 3강 ... 사랑의 계획과 교회의 사명(23.4.28.)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5. 9.

박상병 신부의 '하느님 사랑의 계획과 교회의 사명' 

노은동 사회교리학교 3강. 4월 28일(금) 저녁 7시 40분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학교 세번째 강의가 2023년 4월 28일(금) 저녁 7시 40분 성당 지하 다목적실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강의 제목은 <하느님 사랑의 계획과 교회의 사명>이며, 대전교구 시노드사목연구소 소장인 박상병 루도비코 신부가 맡아서 진행했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인간, 교회의 길

 

이 강의는 원래 사회교리학교의 첫 시간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인권>과 <사회교리의 원리>를 들으셨는데, 우리가 배우는 <사회교리>는 우리 신앙이 세상의 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러면 사회교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교회가 걸어가야 할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제 강의의 제목은 <인간, 교회의 길>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제264대 교황, 재위 1978~2005)께서 교황으로 선출된 후 첫 번째 발표한 회칙이 「인간의 구원자」입니다.  회칙 14조에서 『인간은 교회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이다』라고 선언합니다. 교회가 걸어가야 할 일차적이고 근본적 길은 사람이라는 선언. 즉 사람은 우리 교회가 걸어가야 할 아주 중요한 길이 된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인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요? 이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가지 창조 이야기

2가지의 창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 번째 인간의 정체성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창세기 1,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두 번째 정체성은 인간을 ‘흙의 먼지’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창세기 2,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하느님의 모상>과 <흙의 먼지>는 참으로 거리가 멉니다. 고귀한 하느님의 모상이면서, 저 밑바닥 흙의 먼지라는 다른 모습. 그리고 세 번재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면서, 무엇인가 만들고 ‘보시니 좋았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기 1,3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사랑은 타자가 필요해 ...

사람이 혼자 있는게 ‘보기 좋지 않으니’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는 것. 즉 함께 있는 것이 보기 좋은 겁니다. 하느님의 모상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면, 하느님의 모습을 닮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처럼 머리 하나 팔다리 두 개, 귀 두 개 입 하나 이런 모습일까요? 사실상 본질적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모습을 닮고 태어난게 인간인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누군가 타자를 필요로 합니다.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 공동체로 있어야 한다는 게 당연히 연결됩니다. 이렇게 3가지의 모습이 창조된 본연의 모습이며, 이렇게 살아갈 때 인간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원죄 이야기 ...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는데, 왜 이 세상에는 죄와 악이 이렇게 많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응답이 창세기 3장의 원죄 이야기입니다. 원죄는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은 것? 그것이 원죄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일까요? 원죄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3장에 뱀이 등장하기 이전, 하느님은 에덴동산에 사람을 갖다놓고, “이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에서 너는 열매를 따먹어도 된다. 대신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16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3장에 뱀이 등장하며, “하느님이 여기서 하나도 따먹지 말라며?”라고 이야기합니다. 뱀이 이야기한 게 하느님 말씀과 다릅니다. 즉 ‘유혹’입니다. 유혹이란 "선한 거, 정의로운 거, 사랑이란 거, 그런 거 할 필요 없어. 그건 힘들어." 라는 속삭임입니다. ‘하느님이 너희를 그렇게 사랑한다고? 아냐 군림하고 조종하는 분이야.’라는 접근입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유혹이고 때로는 내가 좀 건강하면 이런 유혹을 쉽게 밀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상황이 취약하고 꼬여 있을 때 우리는 그런 유혹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죄를 짓게 되는 경험을 한번 씩 했을 겁니다. 하와 역시 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슨 소리야, 이거 다 먹어도 된다고 그랬어,”라고 했으면 좋았을텐데, 하와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뱀의 유혹에 “모든”이란 단어를 뺐습니다. 하느님은 먹지만 말라고 했지, ‘만지지도 마’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하와 안에 이미 하느님이 사랑 안에 우리에게 무서운 분이시고 군림하시는 분이란 생각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래서 뱀은 ‘안 죽어~ 너도 똑같이 하느님이 돼’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와는 거부하지 않고 먹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뱀의 말이 맞았다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하느님이 되겠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알몸인 것이 부끄러워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립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 뒤로 어떻게 되었나요? 사람이 대답하기를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기 3,12)라고 합니다.  "당신이 하와를 안 만들어줬으면, 이런 죄를 안 짓죠."라면서 하느님께도 탓을 돌리는 겁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이 인간을 향해 네가 무언가 잘못했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하느님이 사람을 쫓아내지만, 그것만으로 ‘실패작이구나’라고 끝내버리는 건 아닙니다.

 

에덴동산을 떠내보내며 내려준 2가지 소명 ... 노동과 출산

하느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떠내보내면서도 2가지 소명을 줍니다. 남자에게 노동을, 여성에게 출산의 소명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노동과 출산은 창조의 의미입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듭니다. 출산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입니다. 이러한 소명은 ‘노동과 출산’을 통해, 내가 창조한 모습을 회복하라는 소명을 준 겁니다. 벌로 준 게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 고통이 들어옵니다. 여기서 고통은 ‘원죄의 벌일까?’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흙의 먼지로 내려가면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았을 때, 새벽 1시나 2시에 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엄마 아빠 중 누군가는 일어나야 합니다. 기쁘게 일어나는 사람은 별로 없을테지만, 아이의 울음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잠에서 깨어 일어납니다. 우리에게는 고통이 수반되는 삶을 원래부터 사는 것인데,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그 고통을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고통을 신비롭다고 합니다. 고통이 신비롭습니까? 사실 가급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가까이서만 봐도 고통은 어렵습니다. 인류 구원의 역사는 다른 게 아닙니다. 노동과 출산이라는 형태로, 하느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모습으로 회복하려는 역사적 구원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 ...

아브라함의 별칭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정든 고향을 떠날 때 나이가 75세였습니다.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게 해주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친척들의 무리를 떠난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감내하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부동산은 좀 보여주셨고, 재물도 늘어났지만, 시간이 지나도 영영 아이 소식이 없습니다. 사실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하소연을 하죠. “당신께서 자식을 준다고 했는데 안 주셔서, 제 여종의 자식이 재산을 상속받게 하게 되었다”라고 하자, 다시 나오라고 해서 하늘의 별을 보라고 하니, 아브라함은 “믿습니다.”라고 하였고, 성경은 “의롭게 하였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정의가 나옵니다. 의로움은 결국 믿음을 통해서 생기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2~3년 믿어서 생긴게 아닙니다. 그의 나이 103세에 이삭을 얻습니다. 25년의 시간을 기다린 겁니다.

 

[창세기 15장 5~6절] 5 그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성모님의 믿음도 마찬가지 ...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아이를 가질 거야”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 이야기를 <성경의 말씀>이기때문에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나에게 생길 일이라면 그걸 믿을 수 있을까요? 성모님에게도 그 사건은 가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저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라고 합니다.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하신 말씀이 저에게 이루어지십시오”라고 합니다. 이루어지십시오는 라틴어로 피앗(Fiat)이라고 합니다. 성경 1장에서 ‘빛이 생겨라. 뭐가 되어라’할 때와 같은 ‘피앗’이란 동사입니다. 성모님이 ‘당신 뜻대로 하세요’라고 한 게 아니라, 창조와 구원의 역사가 다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믿음은 때로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성모님이 앞으로 일어날 이 일을 과연 알고 있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네’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음이 있었던 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설령 감내할 일이 아니더라도, 하느님이 뜻하신 바이고, 그것을 구원과 선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란 믿음입니다. 어쩌면 성모님은 아이를 잉태했을 때부터, 또 낳았을 때, 8일째 봉헌했을 때 시메온이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영혼의 칼에 찔려 아플 거야’라는 말은 갓 태어난 아기에게 할 말은 아니죠. 그리고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에 찾아보니 ‘누가 내 형제고 내 어머니이냐’라고 합니다. 

 

성모님이 교회의 어머니인 이유 

성모님은 이런 상황이 무슨 일인지 곰곰이 새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어머니이신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이것이 내게 어떤 일이지?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끌어가시려는 건가? 이렇게 계속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겁니다. 그 대화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죄가 있어도 받아들이기 힘든 자식의 죽음인데, 죄없는 아이를 30년 전에 낳으라고 하신 겁니까? 성모님 역시 십자가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겁니다. 그럼에도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함께 부활을 만납니다. 그렇게 내가 응답한 것이 구원의 역사와 만나는 겁니다. 결국 구원으로 나아갈 때 필요한 것은 ‘믿는가’입니다.

 

구원으로 나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원죄에서도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것이 의로움으로, 곧 정의가 생깁니다. 그것은 흙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부활을 생애 속에서도 만납니다. 부활은 곧 평화가 됩니다. 단지 전쟁과 다툼이 없이 혼란없는 세상이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합니다. 내 안에서, 내가 이 땅에 내려온 것 자체가 흙의 먼지의 자리를 선택하신 겁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과 사셨고, 십자가에서 전부를 내어주시고 완전히 흙의 먼지 자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 뜻이 이루어졌으니 미사 때의 평화의 인사 “평화를 빕니다”는 당신 안에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뤄지기를 바랍니다라는 겁니다. 결국 하느님의 힘으로 성령과 함께 이뤄지길 바란다는 의미로 그 축복의 인사 이후에 성체를 모시게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가 잊고 있는 것, 잘못된 선택으로 단절된 내 상태를 다시 하느님께로 순환하는 연결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순례의 여정을 가는 것이죠. 

 

에덴 동산의 유혹 vs. 광야의 유혹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하나인 분

예수님은 첫 번째 공생활 중 유혹은 아담과 하와가 그 당시 선악과를 먹으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네가 더 위에 올라가고 권력을 가지라”라는 악마의 유혹입니다. 악마의 유혹을 예수님은 성령과 함께 말씀으로 이겨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은 예수님이 아니니까 못한다는 나약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떨 때는 (일방적으로) 하느님 모습, 어떨 때는 (일방적으로)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단일성이란 표현으로, 예수님 한 분안에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하나인 분을 우리가 믿는 겁니다. 그것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뤄졌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로 이뤄진 게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 역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입니다. 이러한 단일성이란, 교회는 영적인 것만, 영혼의 추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 신경써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스트레스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신체적으로 병이 생기는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 육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영과 육을 분리시키는 순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됩니다. 즉 영과 육을 온전히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책무이며, 그렇게 하느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즉 교회와 세상 역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만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에서 이기신 이후, 회당에 가서 이사야서를 읽습니다.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루카복음 4장)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 다음(루카 4,21)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하십니다.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가운데 와 있는 걸로 생각하지 않고, 나중에 알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갈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 티켓을 얻기 위해 마일리지를 쌓는 걸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주일미사 100마일지리, 평일미사 20마일리지 이렇게 차곡차곡 쌓은 뒤 티켓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체험하셨습니까

살아서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부활을 얻을 수 없다라는 프랑스 신학자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체험하셨습니까? 없지 않으실 겁니다. 살아 있으면서 부활을 체험한다고요? 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서 하느님 나라를 만나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만나면서 살 것인가? 이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이 많습니다. 무엇인가 작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거기에는 늘 당연히 흙의 먼지 자리를 선택하는 것, 즉 일정한 고통과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게 담겨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 13장(1절~13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3장은 '사랑'이란 소제목을 가진 사랑의 찬가인데요.  1코린 13장 중에서,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이러한 하느님 나라를 신앙 안에서 세상 속에서 만나는 겁니다.  또 결정적으로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31~46절)을 들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31~46절) 중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너희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해준 것 ...

“너희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이 하나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가난한 이에게 해주는 것, 그 가난한 사람들을 예수님과 동일시시켰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만나는가가 하느님 나라를 만나는 기준이 됩니다. 가난한 이들은 다양한 형태로 있습니다. 우선 집안에서의 가난한 이는 누구일까요? 더 약한 사람입니다. 물론 때로는 더 나이가 어려서 약할 수도 있지만, 나이가 들어도 힘빠지고 아프고, 또 영혼이 가난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 세상 안에서 일차적으로 경제적 가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종류의, 요즘은 더 부유하고 풍요로워진 세상 안에 영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들이 더 힘들어지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것들이 물질적 가난이건 내적, 영적 가난이건, 이것은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이 일어나는 일들이 덜 생기는 사회구조를 만든다면 그것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 해주는 겁니다. 기후위기를 예로 들겠습니다. ‘나 하나 쯤이야’라는 생각으로 쉽게 쓰고 버리는 데, 약 70억의 인구가 ‘나 하나쯤’이라고 했지만, 이것이 모아지면 엄청난 재앙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세상과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014년에 한국에 오셨을 때, 첫날 주교님들께 당부하셨습니다.  복음의 시작, 복음의 중심, 마지막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에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또한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다고) 나자렛 회당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마지막 날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 모두가 심판 받을 때 적용될 “규범”을 알려주십니다. 거기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한국 주교들과 만남. 2014.8.14(목) 서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강당>

 

최후의 심판 때 기준은 '가난한 이들 위한 우선적 선택' ...

사회교리의 원리 중에서 또 하나로 교회가 식별의 기준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 있습니다. 같은 사안이 있을 때,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 선택하게 됩니다. 물론 부유한 이들을 배제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을 빨갱이처럼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습니다. 노동은 교회의 시각에서 매우 신성합니다. 사회교리의 출발 역시 ‘노동에 대한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8시 28분 휴식, 8시 37분 재개

 

사회교리와 현대 교회의 출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해

현대 교회가 어떤 흐름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서 사회교리가 어떻게 출발되었는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해해야 합니다. 1962년부터 4년간 열린 보편 공의회인데요. 벌써 60년이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현재의 우리는 아직 이때 결정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16차 주교시노드가 열리고 있는데, 그 주제는 ‘시노달리타스’입니다. 이를 쉽게 말하면, ‘같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 백성이 누가 한 명이 끌고 가는 게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걸 그냥 좋다고 산책하는 게 아니라, 목적이 있습니다. 어디로 향하는 것인데요. 그 목적을 잃는다면, 함께 걸어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노달리타스를 얘기할 수 있게 다시금 교회가 잃었던 걸 회복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성 요한 23세(재위 1958.10.28.~1963.6.3.) 

(1881년생으로, 77세 교황선출, 81세 선종, 축일 10월 11일)

 

성 요한 23세 교황님은 제2차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하신 분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는 전례를 자연스럽게 우리 말로 하고 있죠. 유럽에 여행을 가면 제대가 다 벽에 붙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제가 혼자서 벽쪽을 보고 미사를 보았지요. 그래서 미사 때 묵주기도를 하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그건 신부님이 (벽쪽 제대를 향해서) 혼자서 미사를 보실 때, ‘우리가 뭐래도 해야지’라는 심정으로 연결되었던 풍경입니다. 

 

요한 23세 성인의 축일이 특별한 이유

요한 23세는 요한 바오로2세와 성인이 되셨는데, 통상적으로 성인의 축일은 성인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즉 하늘에서 다시 태어나신 날입니다. 그런데 6월 3일 돌아가셨는데, 축일은 10월 11일입니다. 뭐길래 축일이 되었을까요? 그건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막한 날이기에 그렇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방향성. 첫번째 교회 안으로(ad intra)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크게 2가지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 안으로(ad intra)입니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가 마치 피라미드 구조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교황님을 정점으로 교황-주교-성직자-평신도의 위계질서처럼 보입니다. 그걸 교회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연 이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고, 초대교회는 그렇게 살았는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2000년의 역사를 보면, 박해와 성장, 우여곡절과 실수 등을 반복하며, 어느 순간 루터가 떠나가면서, 교회와 분리되면서, 이것이 교회의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루터가 말한 것이 과연 맞아? 라고 하면서 열린 공의회가 트리엔트 공의회입니다. 거기서 가톨릭 신앙을 다시 정리합니다. 그리고 조금 엄격해지기 시작합니다. 함부로 교리를 잘못 해석했다가 이런 문제발생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서, 아무에게나 성경해석 권한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평신도는 배우는 위치가 되면서 위계구조로 300~400년을 삽니다. 그러다가 1,800년부터 신학자들이 연구에 연구를 하면서 이게 과연 하느님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인가? 그러면서 성경을 찾고, 초대교회와 교부시대를 연구하고, 이런 아픔과 상처를 통해, 놓쳤던 것을 회복시키는 기틀을 만들어내고 그 기틀이 정리된 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ad intra(교회 안으로)
원천으로
성경과 성전, 그리고 초대교회

 

평신도의 직무, 사제, 예언자, 왕직

평신도 역시 사제이며 예언자이며 왕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각자 맡은직무는 다르지만, 각자가 제 갈길에서 각자의 일을 하면서, 그것으로 함께 걸어간다는 겁니다. 몸에 비유를 든다면,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지체인 몸이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지체가 교회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는 게 중요하고요. 주교님이 심장이라고 한다면, 신부는 간일까요. 아무튼 평신도 누군가는 왼손가락, 엄지, 또는 아킬레스건, 이렇겠죠. 아킬레스 건을 느끼면서 하루를 살아가나요? 그걸 언제 알까요? 아플 때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아킬레스 건을 맡고 있는 평신도라고 할 때, 그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면서 작동을 잘하다가, 걷지 못할 때, 계속 누워 있을 때, 다리의 근육들이 빠집니다. 심장도 움직이지 않으면 약해질 겁니다. 어느 하나 지체가 다치고 상처받는다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모두가 제대로 못합니다. 심장이, 주교님이 더 아킬레스 건보다 더 소중하다고 볼까요? 아닙니다. 위계로써 뭐가 무엇보다 훌륭하고 뛰어난 게 아니라, 제 역할마다 모두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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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르나멘토(쇄신, 적응, 적용)
세상을 향해 나가는 교회

 

 

이탈리아 말, '아조르나'는 '업데이트'한다는 뜻

우리의 복음을 현대 세계에 어떻게 전할 것인지를 새롭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옛날의 방식, “사람이 왜 태어났느뇨?”라는 예전의 교리문답만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아조르나멘토의 동사는 아조르나레입니다. 쉽게 이해하려면 스마트폰의 어플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합니다. 이태리말에 아조르나 가 업데이트입니다. 복음이 변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방법이 계속 갱신되고 업데이트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세상과 담을 그만 쌓자라고 합니다. 그 이전에 폐쇄적이고 권위적으로 300년 정도 살았던 겁니다. 이때 생각한 것은 세상은 이성이 발달하고, 인문학, 과학, 계속 새로운 것, 인류가 잘못 생각했던 것들을 찾아냅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교회에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은 뭔가 더럽고 문제투성이이고 오류투성이이지만, 교회는 깨끗한 곳이란 인식이 퍼져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를 시작하면서 이런 얘기들을 물리칩니다.

 

현대 세계의 오류에 대한 단죄, 완전한 교회 등의 안건들을 물리고, 이 세상 안에서 이렇게 기아도 많고 가난과 굶주림이 많은 상태에서 교회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고, 교회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그렇게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세계에 어떻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달할 것인지 고민하는 공의회가 된 겁니다. 루터가 나간 뒤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교의를 다시 정리하고, 우리가 믿을 걸 다시 정리했습니다. 여태까지 그랬습니다. 그러나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공의회라고 할 정도로 세상에서 복음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잊고 살았던 걸 회복하자는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공의회 참석자들은 전 세계주교님들이 모두 참석합니다. 어떤 안건과 주제를 토론하고, 심각하게 이게 맞냐, 이게 틀리냐라는 논쟁도 하고, 그 토의 끝에 투표까지 합니다. 그리고 결정되면 우리 교회가 나아갈 권한이 있는 법적 성격이 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러 문서 중에서 4대 복음서처럼 가장 앞에는 4대 헌장이 있습니다. 그 중 네 번째가 「사목헌장」인데요.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인데요. 「사목헌장」을 [기쁨과 희망]이라고도 하는데, 1항이 이렇게 시작하기에 그렇습니다. 

 
[사목헌장] 1.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모인 그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야 할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는 인류와 인류 역사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

교회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어받는 곳

세상과 교회가 벽을 쌓았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과연 예수님이 그랬을까요?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팔짱끼고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흙의 먼지로, 육화되어, 공생활로 어떻게 사셨습니까? 율법학자와 바리사인들과 살았나요?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 이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다른 이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어받아야 하는데 왜 세상을 더럽다고 생각하는가? 그게 예수님이 살았던 방식일까?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먼지묻은 교회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건 교황님 말씀이기도 하겠으나,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고, 4년 동안 열렸던 것인데요.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당시에 혁명과도 같다라고 세상의 언론도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4년동안 토론하고, 바티칸 문헌은 간추린 사회교리보다 좀 더 두껍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고생들 했어~ 열심히들 살어~ 그러면 열심히 사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오늘날 걷기 위한 업데이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 참석한 주교님은 2,800~3,000명 정도 됩니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지금) 주교님의 숫자는 더 많아졌겠죠. 그러니 다 모여서 회의하는 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2천년 역사에서 21번째 공의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엄청난 회복, 걸어갈 길을 정했는데, 이걸 업데이트하기 위해서 다른 회의체가 필요하다고 보아서 열게 된 것이 세계 주교 시노드입니다. 그리고 역대 시노드(세계주교대의원회)는 16차까지 있습니다. 그 주제는 다양합니다. 복음화, 교리교육, 가정, 등이 있는데, 제목에 ‘현대 세계, 현대 사회’등이 앞에 붙습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업데이트할 것인가를 보는 겁니다. 주교회의를 하고 자문투표를 해서 통과되면 교황님께 전달되고, 사도적 권고라는 가르침을 쓰게 됩니다. 그런 것들 중에 「복음의 기쁨」(2013)이란 책도 이쓴 겁니다.   

열여섯 번의 시노드 중 3차와 13차가 ‘복음화’ 관련 시노드였습니다. 그리고 3차 시노드를 통해 나온 문헌인 「현대의 복음 선교」는 바오로 6세 교황께서 내신 권고입니다. (바오로 6세는 '행동하는 교황'으로 불리웠고, 재임 15년동안 다른 종교와의 해묵은 갈등을 치유하는 데에도 앞장선 바 있다. 또한 많은 회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바오로 6세의<현대의 복음선교> 제 1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 선교하는 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그 사람이 성사를 받게 해주면 '복음화 끝, 선교 끝'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란 게 내용입니다. 복음 선교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파악하면 그르칠 위험이 있다.

 

인간적 측면 ... 구체적 삶의 상황

다만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에게 세례를 받게 하는 것과 함께 바로 선교는 인류 발전, 인류 해방 이것과 연관이 있다. 세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① 인간적 측면. 복음화되어야 할 대상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구체적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24시간 동안 성당에서 기도하고 먹고 마시기만 하나요? 아니죠. 기도도 하지만, 미사를 보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죠. 그래서 사람이 복음화되어야 하는 것은 종교적, 정신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인간이 많은 일들을 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이고, 인간을 축소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다양한 인간들을 축소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화 활동의 복잡성>
17.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서 각별히 유의하여야 할 요소와 국면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떠한 것들은 매우 중요하여 단순히 그것들만 복음화 활동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성사와 다른 성사들을 베푸는 것을 복음화라고 규정하려 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화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역동적인 참모습을 부분적으로나 단편적으로 규정하려 하는 것은 복음화의 의미를 빈약하게 하고 나아가 왜곡할 위험이 있습니다. 복음화의 모든 본질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복음화의 개념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지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특히 강조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도 자주 연구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기쁘게도, 이러한 요소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 특히 '교회 헌장'과 '사목 헌장', 그리고 '선교 교령'의 방향과 일치합니다. (17장 끝)

 

사람이 복음화되어야 하는 것은 종교적, 정신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인간이 많은 일들을 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이고, 인간을 축소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측면 ... 불의와 싸워서 창조를 완성시킨다

두번째는 ② 신학적 측면입니다. 창조계획을 회복시킨다는 것은 부정과 싸우고 정의를 다시 세우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불의와 싸우고 정의를 만드는 것이 창조를 완성시킨다는 것, 그것이 신학적 측면입니다. 그리고 복음적 측면에서 사람들이 고생하고 고통받는 데, 그런 고통의 실제 현장에서, 혹은 전쟁터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복음적 측면은 '애덕'이고 사랑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힘들고 고통받는지, 현재 고통에 처한 어떤 인간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31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음화에서는 현대 세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의, 해방, 개발, 평화와 같은 여러 문제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있거나 무시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고통과 궁핍 가운데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복음적 측면 ... 애덕의 실천

인간학적 측면에서 인간은 추상적이지 않고, 매우 구체적인 존재입니다. 복음화되어야 할 인간이 영적인 생활만 하는 게 아니라 매우 구체적으로 경제활동도 하고 이 모든 요소가 복음화되어야 하고, 두 번째 신학적 측면으로 구원의 역사는 곧 창조질서를 회복하느 것이죠. 부정과 불의와 싸우고 정의를 수립하는 것이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신학적으로도 영적 구원사업과 세상의 일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음적 측면에서는 애덕입니다. 애덕은 사랑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뭘 해야 하나요. 무조건 전쟁을 빨리 막는게 사랑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 전쟁터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고셍서 “예수님 믿으면 하느님 나라 가요.” 이런 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현장에서는 우선 살리는 일, 그리고 고통을 주는 이들과 맞서 싸우는 게 애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선교와 복음화, 그리고 선교는 인류를 해방시키고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겁니다.

가톨릭적 '인간발전'에서 '발전'의 의미

사회교리에서 발전은 외적이고 경제적 발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교황청의 정의평화담당 부서는 인간발전성이었습니다. 이름이 어색해보이잖아요. ‘발전’을 경제적 발전만을 보이는 것 같아서요. 바오로 6세는 <민족들의 발전>에서 발전을 경제적인 면으로 축소하지 말고, 전인적 통합적인 것으로 아우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경제가 많은 걸 해결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특히 우리나라 독재시절에도 인권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발전’이란 말은 사회교리에서 사용할 때 양적 성장이 아니라 ‘온전한’, ‘전인적인’ 인간의 모든 요소의 발전과 성장을 말하고, 사회는 모든 부분과 분야들이 함께 골고루 발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구체적인 사회교리의 출발

레오 13세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구체적으로 사회교리의 역사를 말한다면 그것이 세상과 교회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걸어가는 역사를 말합니다. 특히 현대의 사회교리를 말할 때는 1891년에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레오 13세 교황님께서 첫 번째 사회교리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1891년 5월에 발표하셨습니다. 이 회칙은 오랫동안 <노동헌장>으로 불렸습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2부에 노동파트가 있는데, 노동, 자본, 노동자, 자본가, 노동조합, 임금 이러한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교회 책에 이런 게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왜 그런 걸 발표했을까요? 새로운 사태인 겁니다.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담 스미스의 말처럼 모두가 풍요로워졌나

인류는 오랫동안 단순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수공업 정도인데, 서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다른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공장과 자본주의가 생기면서, 아담 스미스는 1776년「국부론」을 이야기합니다.  국부의 기원과 성질에 관한 연구가 전체 이름인데요.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어떻게 하면 나라가 부유해 질 수 있는가? 입니다. 과거에는 나라가 부유하다면 왕이나 귀족의 부유함이겠지요. 아담 스미스는 그러나 이제 사람들이 부유해지는 것은 사람의 특징 중 ‘이기심을 가진 인간의 특징’으로 인간은 일정한 공간에서 거기 안에서 상거래를 하고 움직이게 하면,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여 가격이 형성되고 생필품을 사고 팔며 시민들이 혜택을 받고 국가는 부유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회는 성장하고 풍요로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과연 모두가 부유해졌나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산업혁명 - 인간과 기계의 전도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대에서도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었죠. 영국의 산업혁명 시대에도 (일하고 싶은 데) 일을 할 수가 없는 사람들도 많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태들이 아주 취약해집니다. 넓은 공간에 난로 하나 놓고 바닥에 남자와 여자가 뒤섞여서 누워있고, 주된 수입은 도둑질과 매춘이었다는 보고서들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약한 사람들, 남자들은 임금을 깍으면 저항을 하니까 누구를 선택하게 되죠? 바로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이나 아동에 대한 착취가 생기는 겁니다. 여성과 아동은 더 약자들이기에 가혹하게 다루어집니다. 때로는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어떨때는 아침 9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24시간을 일했다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1700년대, 1800년대 산업화 과정의 영국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즉  산업혁명을 통한 기계와 인간의 전도현상이 벌어진 겁니다. 

 

여성과 아동 착취
 여성과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에 대해서는 <1833년 영국 의회에 제출된 아동 고용에 대한 보고서>에서 그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열한 살짜리 소년 토마스 클라크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졸 때는 그들이 가죽끈으로 때렸습니다... 나는 6시 조금 못되어서, 때로는 5시에 공장에 나가 밤 9시까지 계속 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룻밤을 꼬박 일했으며...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했습니다. 돈을 벌고 싶었으니까요. 그저께는 아침 6시부터 ... 다음날 밤 9시까지 계속해서 일했고... 나는 지금 밧줄공장에서 일합니다... 내 동생이 나를 돕고 있습니다. 그 애는 꼭 일곱 살입니다. 나는 그 애한테 아무것도 안 주는데... 만약 내 동생이 아니라면 일 주일에 1실링씩 줘야 합니다...나는 아침 6시에 그 애를 데려가서 밤 8시까지 데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 속에서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1848)이 등장합니다. 마르크스가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까 자본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과는 다르게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보이지 않는 손으로 형성된 가격에 사고 팔면 모든 이가 좋고 풍요로울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고, 독점과 과점의 형태가 보였던 것입니다. 그는 철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이지 선동가는 아닙니다. 물론 그가 주장한 것으로 인해서 전세계는 좌우로 나누어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경제학자로서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의 지적 중에서 지금까지 유효한 것 중에는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을 것이다."라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과정과 독점의 형태를 띤다라는 역시 그렇습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노동자들이 가져가야 할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이 터무니없이 많이 가져간다고 보면서 1848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합니다. 

 

유심론이나 유물론이냐의 문제는 아니다
 이처럼 노동자와 자본가의 문제는 받아들일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철학자 마르크스의 유물론입니다. 유물론이란 육체를 중시, 물질을 중시합니다. 그 반대는 유심론이겠죠.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어느 하나가 아니라 영과 육의 통합을 말합니다. 

1891년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
윤리신학의 영역
산업혁명과 사회의 급속한 변화
풍요와 빈곤의 양립
아담 스미스 국부론 (1776)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1848)

결국 레오 13세 교황이 「새로운 사태」라는 회칙을 발표하며, 세상의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교회 입장을 발표합니다. 그렇게 사회교리는 시작합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경제문제에 대해서 사회교리를 통해 언급하였고, 평화와 노동 등 다양한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특히 2천년으로 넘어오면서 어떤 부분을 걱정하게 되냐면, 금융질서, 돈, 이것의 흐름에 대해 사회교리는 지적합니다. 이와 관련된 책 「간추린 사회교리」는 '새로운 사태'의 1891년에서부터 100년이 흐른 1991년에 이르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반포 백주년을 기념하며  「백주년을 반포하였고, 당시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를 통해 체계적인 정리했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나온 책입니다.  그렇게 간추린 400페이지 이상 분량은 100년의 역사를 모아서 그런 겁니다. 그리고 빠진 것들이 다음에 나온 것들이죠. 특별히  「찬미받으소서」(2015)는 생태 문제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구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전세계 공통 교리서입니다. 이 중에서 제1편은 신앙고백으로,  “저는 믿나이다.”입니다. 사도신경을 예로 들면 함축적인 믿음의 표현입니다. 제2편은 그리스도 신비의 기념 특히 7성사를 믿고 기념하는 것인데요. 우리가 그걸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제3편에 그리스도인의 삶  여기서 제1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에서 사는 삶> 바로 여기서의 내용이 바로 사회교리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안에 담긴 정치가 필요한 이유는 공동선의 창출을 위해 존재한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제4편이 그리스도인의 기도 즉 믿고 기념하며 사는데 힘이 빠지면 기도로 힘을 얻는 겁니다. 기도 편에서는 주님의 기도를 설명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합니다. 이렇게 사회교리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구조 속에서 이뤄집니다. 

 

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214791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판 16쇄)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판 16쇄)

ebook.cbck.or.kr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 주교단과의 만남(2014.8.14.)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교회의 풍요한 유산인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모든 측면에 반영되여야 합니다.”라고요. 

 

오늘날의 우상

2011년 미국 뉴욕 월 가의 시위 당시 이미지

내가 만든 하느님과 진정한 하느님의 차이
오늘날 가장 큰 우상은 돈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신앙인의 입장에서 하느님과 다른 우상으로 만들고 섬기는 것은 ‘내가 만든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모세가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있는 나다"라고 대답하셨지요. 나는 있는자 그대로이다. 야훼라고 했습니다. 있는자 그대로인 하느님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성경의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듭니다. 내가 기도하면 바라면 들어줘야 하는 “하느님은 이런 분이겠지”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내가 만든 우상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가 열심히 해서 하느님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는 대로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바뀌는 걸 말합니다. 하느님이 원하고 이끌어주시는 대로 우리가 바뀌는 게 우리 신앙의 길입니다. 삶 안에서 우리 구체적인 삶에서, 집과 성당, 사회 등의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내가 뭔가를 조종하고 싶어합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까지도 조종하고 싶어할 때 첫 번째 모습이 “내 말 들어”라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한번쯤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소유격을 붙일 수 있는 건 단 하나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 소유격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모으시고, 살게하시고 이끄시는 게 교회공동체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소유격은 그래서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자칫 내 것이라고 생각할 때 내가 신이 되려는 겁니다. 흙의 먼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것이라고 생각할 때 ‘내 말 들어’라는 말로 연결됩니다. 교황님의 것도, 주교님의 것, 주임신부님의 것, 사목회장님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내 역할로 함께 걸어가도록 초대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 생각해봐야 합니다. 내가 공동체에서 크고 작건 간에 내 몫을 성찰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겁니다. 그 표징으로 “내 말 들어”라는 말로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봉사하지 않고, 군림하는 금융질서
13차 주교회의(2012.10)는 복음화가 주제였습니다. 13차 주교시노드의 주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유산을 전할 때 새로운 복음화에 무엇이 필요한가?  후속문헌으로「복음의 기쁨」(2013)을 출간했는데, 그 2장에서 “오늘날 복음화를 가로막는 1차적으로 강력한 것은 돈이라고 하며, 이를 새로운 우상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봉사하지 않고 군림하는 금융질서, 교황님은 이를 새로운 독재라고 표현합니다. 너는 독재자야 라고 말합니다. 이게 중요한 것은 우리 신앙 안에서도 중요한 데, 황금송아지상. 세계금융 질서의 중심인 월스트리스의 문제점. ... 성경 안의 황금송아지, 탈출기(출애급기)에서 모세가 시나위 산에서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가서 40일이 되도 안 내려오니까 백성들이 형 아론에게 우리를 이끌고 갈 신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니 아론이 야 이집트에서 가져온 금을 가져와”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은 금을 불에 쑥 넣으니 황금송아지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걸 출애급에 나선 백성들이 어디에서 보았습니까? 노예살이 할 때, 이집트에서 본 겁니다.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죠. 금송아지니까 엄청난 풍료로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보았던 풍요로움. 하느님이 자신들을 그곳에서 꺼내셨지만, 그 이집트의 왕이 된 듯이 잔치를 벌입니다.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느님은 나는 너희를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준 이다.”라고 하십니다. 물리적으로도 노예에서, 그리고 영과 육을 아우르는 모든 죄의 형태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준 게 하느님의 일이고, 십계명은 종살이를 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걸어갈 길로 제시된 것입니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하기 전에 죄를 졌는가, 안졌는가를 확인하는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누군가를 종으로 만들지 않고 내가 누군가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한 것이 바로 십계명인 겁니다.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육. 간음하지 마라.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교회 공동체에 소유격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하느님이십니다. 한분이신 하느님만을 흠숭하라. 여러분인 제1계명 잘 지키고 있습니까? 1계명 식별 기준, 오늘 아침 오늘 운세를 봤습니까? 타로 받습니까? 그럼 1계명을 잘 지킨 것일까요? 분명히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흠숭하라고 다른 것을 섬기고 있다면 1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에 대해 예를 들면,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키나요? 공부 열심히 하라는 식으로 엄청난 사교육을 시킵니다. 목표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 좋은 직장에 가는 겁니다. 내 아이의 적성과 그런 것에 알맞게 일을 하며 행복하구나 보람도 느낀다는 게 아니라 안정적 수익을 얻는 것이 좋은 직장의 기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고3 성당들 나와야 안나와요? 고3이 성당을 나오면, 고3 부모님들이 보면 “저 애 왜 저런데? 대학 포기했어?”라는 관점이 있을겁니다. 우리는 과연 어렸을 때부터 약한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약자들에게 어떤 배려와 친절을 보여줘야 하는지 같이 살아가는 교육을 하고 있는가? 아니죠. 공부 잘하면 다 용서되는 그런 전반적 풍토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떨까요? 

 

 

돈을 숭배하는 배척의 경제 
우리는 사실 돈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복음의 기쁨」(2013)에서, 오늘날 돈의 우상화가 생기면서 사람마저도 쓰고 버리는 소모품처럼 여긴다고 하십니다. 오늘날은 어느 정도의 불평등이 아니라, 사회에서 필요가 없으면 밀어내어버리는 정도이니, 이른바 배척의 경제이죠. 이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오늘날 세상 안에서 바라볼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침묵하지 않는 것 즉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적 질병을 낳는 악행을 공모하는 자들과 공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게 침묵입니다. 내가 아니니까, 침묵하는 것. ...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은 인류에게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마르틴 뇌밀러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왜 우리가 이 인류 역사안에서 600만이라는 사람들을 홀로코스트, 즉 집단학살 했는지 과연 왜 그랬을까"를 반성하며 독일 국민들에게 촉구하는 글을 썼습니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 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를 위해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관심의 세계화 

 

이 사회의 어떤 일 하나가, 어느 지체 하나가, 하느님이 이 모든 걸 창조하셨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단 하나의 지체가 다치고 깨어졌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몇 년째 OECD 기준에서 자살율 1위입니다. 정상적 사회가 아니란 징조이죠. 그래도 우린 무덤덤합니다. 이 사회가 정상사회가 아니란 겁니다.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고, 그래서 움직이자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lZJv1soUKE 

 

우리를 통해서 우리를 도와달라 
다음은 교황님 동영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두 번째로 사목방문하신 곳은 이탈리아 남부 사르데니아라는 섬이었습니다. 청년 실업율이 높은 곳이고, 돈의 우상화과도 연결되는 데, 관련 내용이 복음의 기쁨 문헌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는데요. 교황님은 맨 끝에 기도하시는데, 주님 저희를 홀로 남겨두지 마십시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를 이러저러한 일로 이기심으로 무관심으로 사는데, 어떻게 도와달라고 하냐면, 우리를 통해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도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우리를 도와달라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신경 맨 앞의 속성이죠. 그런데 하느님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으실까요?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할 때 모든 걸 수퍼맨처럼 해결하는 하느님의 전능이 아니라, 사랑 앞에서의 전능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의 전능입니다. 사랑하기에 흙의 먼지로 내려가고 비워주면서 맨 마지막에 줄 수 있는걸 다 주다가 주다가 맨 끝에 주는 게 목숨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의미에서 전능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전능함을 잘 사는 사람,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죄인이고 병자고 깨어지고 부셔지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해 전부를 내어주셨습니다. 신이 피조물을 위해 생명까지 내어준 종교가 우리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뭔가요? 이것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어떤 분이신지,  ... 

우리는 사순절을 보냈습니다.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하면서, ... 그럴 때 내가 나의 자유를 하느님께 드리고, 그때 하느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돕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사회교리학교를 함께 하시면서 가족과 내가 친한 사람들과 이런 일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면, 남이 남이 아니라, ‘또 다른 나’이며 ‘또 다른 내 가족’으로 시선을 확장하는 게 신앙이 성숙되는 또 하나의 표징입니다. 사회교리는 그렇게 초대하고 불러일으키는 가르칩니다. 
우리는 홀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함께 구원되는 존재입니다. 


이 기도, 한 수녀님이 제게 편지에 주신 것인데 사회교리와 잘 맞아서 마지막 기도로 띄워놓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행동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말만 내세우는 사람은 그만큼 적어진다.
가능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람은 그만큼 적어진다.
군중 속으로 뛰어가서 거기서 무언하 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변두리에 앉아서 단지 남의 결점만 들추는 사람이 적어진다.
어떤 것이 옳은가를 지적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릇된 것을 고립하는 사람들은 적어진다.
촛불을 켜드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어두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2023년 4월 28일(금) 밤 9시40분 종료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학교 3강 '하느님 사랑의 계획과 교회의 사명'
박상병 루도비코 신부(대전교구 시노드사목연구소 소장)

 

https://www.djpeace.or.kr/1510

 

오늘부터 10주간 노은동 성당에서 사회교리학교 열어

대전 정평위, 3년 만에 10주간 사회교리학교 개최 오늘부터 매주 금요일, 노은동 성당(제35기)에서 시작 4/14(금) 대전 노은동 성당, 4/16(일) 천안월랑성당에서 각각 10주 과정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

www.djpeac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