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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노은동 사회교리 4강 정치공동체(2023.5.12.)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5. 13.

김용태 마태오 신부의 '정치공동체' 강의 

노은동 사회교리학교 4강. 5월 12일(금) 저녁 7시 40분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학교 4번째 강의가 5월 12일(금) 저녁 7:40, 성당 지하 다목적실에서 개최되었다. 강의 제목은 <정치공동체>이며,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장인 김용태 신부(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가 맡았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사회교리 4강. 「정치공동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올릴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요.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그것은 공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상태’이며 ‘상황’입니다. 즉,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그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다.

 

일곱가지 청원이 담긴 주님의 기도

따라서 오늘 주님의 기도를 시작 기도로 바치면서 우리의 사명을 성찰하고 다짐했으면 좋겠는데요. 주님의 기도의 일곱가지 청원에는 우리의 다짐과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은 수퍼히어로처럼 나타나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우리가 이웃을 구원하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아야 할 대상인 동시에 구원하는 주체인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두 가지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 강의는 주님의 기도로 시작하겠습니다. 

 

2023년 5월 12일(금) 저녁 7시 45분 주기도문으로 강의를 시작함

주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정치공동체」에 대한 성경의 관점

 

「모든 형제들」을 통해서 본 정치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이야기는 ‘정치’입니다. 정치공동체, 다스림, 공권력에 대해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세 번째 회칙인 「모든 형제들」(인간의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다루는 사회 회칙으로, 2020.10.3.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전야에 반포) 176항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일부 정치인들의 실수, 부패, 무능 때문에 흔히 정치를 불쾌한 표현으로 여깁니다. …… 그러나 정치 없이 우리 세상이 돌아갈 수 있습니까? 올바른 정치 없이 보편적 형제애와 사회 평화를 향한 효과적인 발전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모든 형제들」, 176항).

덜 나쁜 놈을 뽑을 수밖에 없는 현실

정치는 중요한 것이죠. 올바른 정치 없이 보편적 형제애와 사회발전이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다고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전 세계적으로 조사를 하면 나오는 부동의 1위가 있습니다. 신뢰도 면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직업은? ’ 바로 정치인입니다. 그래서 선거 때에, 여러 후보 중에 ‘덜 나쁜 놈’을 뽑을 수밖에 없는데요. 아무리 다 나빠도 ‘덜 나쁜 놈’을 뽑아야 한다는 식으로, 정치인의 실수, 부패, 무능 등으로 정치혐오가 생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나쁜 놈이 세상을 더 망치지 않게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의 주체입니다. 따라서 잘 눈여겨봐야 하겠습니다.  

 

한자어로 살펴보는 '정치'

정치(政治)란 무엇인가요? 한자어로 풀어보면, 바를 ‘정(政)’은 바를 정(正)과 칠 복(攵)자가 결합한 모습입니다. 즉 ‘바르게 잡는다’는 뜻이죠. 옳지 못한 걸 바로 잡습니다. ‘치(治)’는 물수변(삼수변) 수(氵)에 태(台)자가 결합했습니다. 태(台)는 기르다, 양육하다는 뜻이 고, 상형문자로 숟가락을 입에 대는 모양입니다. 즉, 치(治)자는 물을 잘 다스려서 백성들 먹여살리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정치(政治)는 바로 잡는 것, 백성들을 먹여살리는 겁니다. 잘 먹이고 다 살린다는 것이지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잘 살 수 있도록 어우러져 살도록 다스리는 것,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잘난 사람 잘 난대로, 서로 함께 잘 수 있도록 하는 게 정치(政治)입니다. 

성경의 관점

그러면 성경의 관점에서 ‘정치’는 무엇입니까? 정치에 대해 가장 잘 설명된 게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의 다스림은 무엇인가요? 하느님의 다스림을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올바른 정치공동체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곧 '정치'

첫 번째 하느님의 다스림이 정치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린 게 이 세상입니다. 우리 세상은 당신이 창조하시고 “보시니 모든 것이 좋았다”라는 겁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피조물이 다 있죠. 산에 자라는 나무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그것들이 서로를 업신여기지 않고 어우러져 삽니다. 숲 속에는 발밑의 미물들, 지렁이들을 창공 위를 나는 새들이 무시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꼴대로 어우러져 삽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 어우러져 살도록 하느님이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루두루 어우러져 다 풍요롭게 잘 살아라”라는 다스림을 하느님이 인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창세기」의 내용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다스려라”라고 위임하였습니다. 

정치는 하느님의 다스림인데, 인간에게 위임한 거죠. 인간이 피조물을 다스리게 되는 이유이며, 이것이 정치의 원형입니다. 즉, 정치의 기원은 하느님이고, 인간에게 위임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모든 피조물, 즉 생태계를 보존하고 하느님이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느님이 사람에게 다스림을 위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
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이 세상을 풍요롭게 잘 살리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이런 정치를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여하지 말라면서 “하지말라”라는 식으로 말하는 건 ‘무식한 것’입니다. 무식하고 아무 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받드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래서 구약부터 오늘날까지 정치는 하느님이 위임하신 다스림에 성실히 복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신앙 안에서 왕의 지위

왕이 하는 일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대표로 위임받아서 펼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신앙 안에서 왕은 하느님 같은 왕이 아닙니다. 인간제도 안에서의 봉사자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위임받아서 다스리는 그런 신분이지요. 이것이 이스라엘 신앙 안에서 왕의 책무입니다. 그래서 ‘참된 왕’이란 하느님의 명령에 봉사하는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게 그들의 시선이었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도,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게 위임받아서 정치를 하는 것인데, 그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될 수 없으니, 소수를 뽑아서 맡깁니다. 그리고 그 원형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시편 72편에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 [솔로몬]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왕자에게 베푸소서. 2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 3 산들은 백성에게 평화를, 언덕들은 정의를 가져오게 하소서. 4 그가 백성 가운데 가련한 이들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폭행하는 자를 쳐부수게 하소서. 5 세세 대대로 해처럼 달처럼 살게 하소서.

여기서 보면, 하느님의 다스림을 왕과 왕자에게 내려주고, 당신의 백성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당신의 백성’이라고 하지, ‘나의 백성’이 아닙니다. 즉, 왕의 책무는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일에 봉사하는 은총을 청하는 것이지요. 

6 그가 풀밭 위의 비처럼, 땅을 적시는 소나기처럼 내려오게 하소서. 7 그의 시대에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8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중간 생략) 12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합니다. 13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 14 그가 억압과 폭행에서 그들의 목숨을 구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에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중간 생략) 19 그분의 영광스러우신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시리라. 그분의 영광은 온 누리에 가득하리라. 아멘, 아멘! 20 이사이의 아들 다윗의 기도는 여기에서 끝난다.

 

왕은 하느님의 대리인이며 봉사자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본인이 펼칠 수 있는데 필요한 은총을 기도로 청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은 하느님의 대리인으로 봉사직무임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왕은 하느님만이 왕이죠. 뼛속 깊이 새겨진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이집트 파라오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신 분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왕국을 만든 게 아니라, 평등공동체를 만듭니다. 200년 동안 지속하죠. 엄청난 시간입니다. 200년이면 조선시대 순조 임금(재위 1800~1834)때부터 현재까지의 긴 시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주변국은 절대 왕조였지만, 유독 이스라엘만 왕정이 아니라, 씨족공동체의 평등국가였어요. 그 까닭은 광야를 거치면서 엄청난 깨달음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위 광야에서 죽을 때마다 살려주십니다. 목마르면 마실 것을,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십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광야를 거치면서 그들이 깨달은 것은 야훼 하느님만이 유일한 신이란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하느님이 세상의 수많은 신들 중에서 조그만 부족의 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어요. 야훼 하느님은 힘없는 신, 파라오의 신보다 힘없는 신이라고 생각했다가, 이제 다른 신들은 먼지에 불과하다고 깨닫습니다. 그렇게 절대적, 유일한 신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점을 광야에서의 고생 끝에 깨달았던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 신앙은 광야에서 정리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원시적인 신앙이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시절에는 애매모호하던 것이 광야를 거치며 절대자이며 유일신인 야훼 하느님을 깨닫게 됩니다. 오로지 야훼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믿겠다고 계약을 맺는 것이 시나위 광야에서 이뤄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뿌리는 시나위 광야인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에게 “하느님을 유일한 신으로, 왕으로, 어버이로 모시겠습니다.”라고 약속합니다. “당신을 우리 주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당신의 백성이고 자녀이며 종입니다.”라고 계약합니다.

 

왕에게 부여된 3가지 직무

고대 근동지방에서 왕에게는 3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무는 백성들을 먹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땅을 줘야 하고, 세 번째는 보호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위 광야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하는 것은 하느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에게 먹을 것, 땅, 보호의 의무를 요구하는 겁니다. 그러면 영원히 우리의 왕, 어버이로 모시겠다는 겁니다. 이 계약이 굉장히 중요한 까닭은 수직적 계약이었지만, 수평적 계약들이 파생됩니다. 하느님만이 왕이므로, 우리는 왕이 될 수 없다는 평등 개념이 나옵니다. 똑같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네가 나에게 왕 노릇을 할 수 없는” 똑같은 인간이며 백성입니다. 돈 좀 있다고 왕 노릇을 할 수 없다는 평등개념이 발생합니다. 하느님만이 어버이이며, 우린 똑같은 형제이며 자매입니다. 우린 똑같은 종이기에 다른 이가 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위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 파라오를 만든 게 아니라 평등공동체를 만든 겁니다. 그들의 신앙 안에서의 이상(理想)은 하느님만이 왕이므로, 12부족 공동체를 200년 동안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왕정을 만들게 된 현실적 이유

그럼에도 왕정이 200년 후에 현실적 이유로 만들어집니다. 당시 주변에는 강력한 왕권국가들이 있었습니다. 왕국의 지휘체계가 일사불란한 반면, 이스라엘 12부족장은 회의를 거쳐서 결정을 내립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오는데, 회의하면서 시간을 지체합니다. 200년 동안 동네북처럼 살다가, 명령체계라도 만들자는 의견이 모아집니다. 앞서 200년의 기간을 판관기라고 부릅니다. 평등공동체의 시대였고, 12명의 족장이 있지만, 어떤 분쟁이 일어날 때, 그것을 중재할 수 있도록 12부족을 대표하는 큰 어르신이 바로 판관입니다. 그런데 전쟁상황이라면 판관은 전쟁 지휘자가 될 사람이 뽑혀야 합니다. 그래서 삼손이 판관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지혜보다는 힘센 사람이 필요하니, 삼손이 뽑혔고, 마지막 인물은 사무엘입니다. 200년 역사에서 마지막 판관 사무엘을 축출한 이가 다윗인데, 그는 왕이 되고 싶었고, 절대왕정을 만듭니다. 

 

판관 사무엘과 사울, 그리고 다윗의 등장

우리는 하느님만 왕이시라는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날 때, 누군가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해서 세운 이가 바로 ‘사울’입니다. 사울을 지칭할 때는 번역으로 왕이라고 하지만, 사실 사울은 전쟁을 위해 세워놓은 장군이고, ‘멜렉’도 왕이란 뜻인데, 사울에게는 ‘멜렉’이란 말을 잘 안 씁니다. 전쟁하기 위해 사울을 앞에 세워놓고, 실권은 사무엘이 갖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전쟁에서 이기면서, 마음 속에 “나도 왕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생기죠. 가는 곳마다 승리하며 인기가 오릅니다. 진짜 왕을 꿈꿉니다. 실권자 사무엘에 비해 아무 권한이 없자, ‘멜렉’이 되고 싶은 욕심을 내는데, 사무엘이 눈치챕니다. 

“어디 왕이 되려고 해? 어디 이놈이?”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사울을 축출하고 말 잘 듣는 꼭두각시를 뽑아야지 한 게 ‘다윗’이었습니다. 사실 호랑이 새끼를 뽑은 거죠. 사무엘은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려고 생각하면서, 사울을 축출하고, 다윗을 다시 세우게 되고, 다윗이 사울과 적대관계에 있게 되었고, 다윗이 처음에 말을 잘 듣는 척했지만, 사울보다 더한 욕망이 있었죠. 다윗은 왕이 되기 위해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계획이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 같은 ‘블레셋’족까지 개입시킵니다. 깡패같은 용병들로 자기민족들과 싸웁니다. 용비어천가처럼, 다윗은 성공한 쿠테타로 미화되어 있고, 물론 잘 다스린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항우처럼 사면초가에 빠진 사울은 자살하고, 다윗은 절대왕정을 하려는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왕이 된 다윗, 그러나 ...

다윗은 이교인들의 부인들과 정략결혼을 합니다. 야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세력을 얻으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통일왕국을 공고히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 자기 아들도 죽게 됩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통일왕국을 만들었는데, 늘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언제 쿠데타가 일어날지 모르죠.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은 하느님이고, 다윗은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이게 기본개념이니, 불안한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란 신도읍을 만듭니다. 신도시를 만들었는데,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백성의 시선은 계약의 궤에 쏠려있기때문입니다. 계약의 궤는 사실 이동식(포터블)입니다. 어깨에 메고 다녔는데, 그렇게 광야를 지난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디에 있든 하느님은 그곳에 계시는 것이니, 눈이 거기에 쏠린 겁니다. 거기가 진짜 궁궐인거죠. 

 

핵심은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 ...

그래서 다윗이 머리를 씁니다. 사실상 하느님만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으니, “내가 있는 곳이 곧 하느님이 있는 곳”이란 생각에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성막을 벽돌로 만들어 못 움직이게 합니다. 그 이전에 이동식이고 성막이었는데, 다윗 시대에 하느님을 붙박이 성전 안에 모신 겁니다. 그렇게 기원전 1000년경, 다윗왕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백성의 도읍으로 정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화려한 신전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눈치만 보던 다윗에 비해서, 경제적으로도 부강해진 아들 솔로몬은 눈치 볼 게 없었습니다. “야 성전 만들자” 그러고 벽돌로 만든 성전에 계약의 궤를 고정해놓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하면 거들떠 보지도 안했다가,  왕궁 옆에 성전을 지어놓으니, 그걸 보면서 궁전도 보이는 겁니다. 그걸 겹쳐서 보이게되면서, 성전이 있는 곳에 도성이 있는 겁니다. 그렇게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했던 겁니다.

 

남북 왕국으로 분열되는 이스라엘 왕조

왕조는 다윗의 손자대에 분열됩니다. 똑똑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달리 르호보암 왕은 바보였고 뭔가 부족하여 남과 북으로 분리됩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930∼913년)은 뒤를 이어 왕권을 물려받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통일 왕국의 체제가 무너져 버린 겁니다. 그렇게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분열되었는데, 북왕국에서는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고, 남왕국은 바빌론에 멸망할 때까지 지속됩니다. 이유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공식 지정한 그런 것처럼, 예루살렘은 하느님이 인정한 곳이어서 다윗의 후손이 계속 이어집니다. 반면 북쪽은 성전이 없으니 계속 분열이 일어납니다. 늘 불안합니다. “내가 왕이야”그러면 다른 쿠데타 등 뭔가 정치적 혼란과 불안으로 먼저 멸망합니다. 기원전 922년 경에 생겨서 기원전 722년에 먼저 멸망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250년이 지난 기원전 586년경, 바빌로니아에 의해 남왕국도 멸망합니다. 사실상 이스라엘 사람들의 뼛속 깊이 각인된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500년 가까이 왕정이 이어졌지만,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뼛속 깊이 하느님만이 왕이란 사실, 이것이 우리 신앙 안에 이어진 겁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왕들은 하느님 통치를 위임받았다는 게 신앙 안의 개념입니다

 

예언자의 역할과 메시아에 대한 희망

예언자들은, 왕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걸 생각하지 않고, 권력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착각하고 멋대로 통치할 때, “그게 아니다. 넌 하수인, 대리인, 하느님의 통치를 이루는 심부름꾼이야!” 이걸 깨우쳐주는 사람들입니다. 즉 “넌 왕 아냐”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하느님 통치를 이루는 게 정치야”라고 등장하는 게 예언자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역시 예언자 역할을 우리가 하는 겁니다. 정치를 못하면 예언자로서 우리가 등장하는 것은 구약 시대부터의 소명입니다. 정치를 못하는 것은 나쁜놈이거나 무식한 놈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성당 안에서도 “이런 얘기 하지 말라”라고 막 뭐라 하는 사람은 나쁜 놈 같지는 않고, 무식한 사람입니다. 정치는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정 안에서 역사가 이뤄지는 가운데, 제대로 된 왕이 몇이나 있었을까요? 요시아왕, 다윗왕, 솔로몬왕? 수많은 왕 중에 한두 명? 그리고 다 시원찮은 놈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짜 왕, 하느님 통치를 대리할 참된 왕이 올 것이라는 기대, 즉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생깁니다. 특히 메시아를 기대하는 것은 언제입니까? 나라가 힘들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시절에 간절해집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 중에 어떤 청년이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3년 만에 죽습니다. 물론 아는 사람은 압니다. 부활했다는 거.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이걸 믿지 않습니다.

 

 

공권력의 희생자,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왕이란 하느님 통치를 받드는 대리인이라는 점, 봉사직무인 것이 성경 안에 드러납니다. 특히 왕의 통치나 정치는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는 정치와 다스림, 그것은 어떤 형태인가요?  위정자들이 본받아야 하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오시자마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겁니다. 또한 그것은 당시 반역자로 고발된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공권력의 희생자입니다. 역사의 순교자들 역시 공권력의 희생자들입니다. 

마태오복음 16,21∼23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마르 8,31-33; 루카 9,22)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니, “맙소사 왜 죽어야 합니까? 좋은 얘기만 하고 그러면 되는 거죠.”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십니다. 우리 신자분들 중에서도 “아니 신부님이 왜 정치에 관여합니까?”라고 따지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제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구나!”라고 …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아니고, 알아들으시도록, 좋게 설명을 드리지요. 

 


마태오 복음 20잘 25절부터 28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모습은?

이게 바로 하느님이 다스리는 모습이며, 섬김입니다. 다른 민족의 통치자, 고관들의 세도를 부리는 모습 … 2023년 지금도 그렇습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정치공동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통치를 위임했으므로, 그 제도를 인정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을 받드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것은 하느님에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라는 말이 나오죠. 세상의 제도와 법, 체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느님 통치가 들어가 있습니다. ‘네 스스로에게서 나온 권력’이 아닙니다. 이 중요한 내용.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적인 것은 절대적 권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4장 1절부터 11절에는 광야에서의 유혹 3가지가 나오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마르 1,12-13; 루카 4,1-13)
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6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8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이 중에서 특히 세 번째 유혹, ‘다스림’에 대해 말씀드리면요. “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이란 말이 나옵니다. 복종시키고, 군림해야 거대한 조직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니, 그러니 힘을 줄테니, ‘나를 섬기라’라는 권력에의 유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참된 다스림은 힘이 아니라 섬김과 사랑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악마가 아닌 약자에게 절을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깁니다. 가난하고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도 존중받고 존엄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섬김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 모든 사람이 두루두루 잘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바다가 평평한 것은 그 바닥의 계곡 깊은 밑바닥부터 물을 채우기 때문인 것처럼, 가장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부터 먼저 챙김으로서, 별의별 사람들이 다 골고루 잘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통치하는 기본적 자세를 예수님이 알려줍니다. 

저녁 8시 31분 휴식, 8시 40분 재개

 

사회교리 4강. 두번째 시간. 「정치 권위」

 

권력과 권한의 차이점
권력과 권한은 다릅니다. 권력은 타인을 복종시킬 수 있는 힘입니다. 국어사전의 정의를 찾아보면, 권력이란,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이고, ‘특히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강제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모든 권력은 권한이어야 합니다. 권한은 그 권력의 범위와 한계를 말합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은 바다를 창조하시면서, 바다와 육지의 한계를 정합니다.(욥기 26,10, 38,10). 지구상에 바다가 많아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정합니다. 즉 권한, 모든 권력은 권한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범주와 한계를 뛰어넘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나쁜 정치는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이란 나쁜 정치입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받드는 권한이며, 이것이 건강한 겁니다. 시계를 보면, 초침, 분침, 시침이 있습니다. 시침이 한 바퀴, 분침은 더 빠르게 돌겠죠. 초침은 더 빠르죠. 그런데 초침이 시침에게, “넌 왜 그렇게 느려”라고 한다거나, 시침이 초침에게 “너 하찮은 새끼”라고 하지 않습니다. 각자 역할이 다릅니다.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는 게 바로 권한입니다. ‘권한’이란 차원에서 평등합니다. 조직도 안에 수직적 체계가 있지만, 권한 안에서 평등합니다.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서 평등합니다. 그리고 이때, 바른 정치와 아닌 것의 기준은 바로 공동선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다스림을 지향하는가 아닌가로 판단합니다. 

 

섬김과 공동선
예수님에게 드러나는 정치는 섬김의 형태입니다. 공동선은 세도와 군림이 아니라 모두 다 어우러지도록 섬깁니다. 단순하면서도 명확합니다. 세상 위정자들이 섬김의 자세를 보인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섬길 줄 아는 것,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정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섬김을 통해 이뤄지는 것은 공정, 정의, 평화입니다. 반면, 나쁜 정치, 군림과 세도 안에서는 차이를 지향합니다. 권력은 차별에서 옵니다. 내가 너보다 위에 있을 때 격차와 권력이 발생합니다. 너와 내가 똑같지 않았을 때, ‘내가 천만 원 정도 있어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10만 원밖에 없을 때’ 권력이 생깁니다. 그런 ‘격차’에서 권력이 나옵니다. 권력을 지향하는 이들은 한계를 초월하고 세도를 부리면서 계속 더 큰 격차를 만듭니다. 달라야 한다면서, “여기가 어디라고 올라와!”라고 합니다. 

 

나쁜 정치가 만들어낸 현상
그래서 나쁜 정치는 항상 격차와 차별을 만들고, 양극화는 심해집니다. 저 밑바닥 인생, 다른 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작년 비가 많이 왔을 때, 지하 방에 세 모녀가 죽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대통령은 우산 쓰고 구경하고 사진 찍고, “내가 집에 가는데 비가 많이 왔더라고.”라는 남 얘기하듯 말을 합니다. 나쁜 정치가 왔을 때 공통적 현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죽습니다. 세월호, 이태원 참사, 최근 건설노동자가 죽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대한민국 모습입니다. 나쁜 정치가 만들어낸 참상(慘狀)들입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다스림, 공정, 정의를 우리가 펼쳐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 통치를 펼쳐나가기 위해 예수님을 본받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하느님의 통치를 가장 잘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그 분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야말로 진정한 왕의 통치이므로, 그분의 통치가 이뤄지도록, 그것이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꿔나가도록 우리가 다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신부님, 정치 얘기는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 무식한 겁니다. 

 

김용태 신부는 2023-5-10(수) 오전 10시, <대전 시국공동선언 기자회견>에 참여하여공동선언 첫번째 발언자로 나섰으며, 이후 KBS 기자와의 인터뷰도 진행하였다. (아래 링크 참조)

https://www.djpeace.or.kr/1519

 

검찰독재 1년, 대전 시국공동선언 기자회견에 김용태 위원장 참여

검찰독재 1년, 못살겠다 갈아엎자! 대전 시국공동행동에 김용태 정평위원장 참여 5월 10일(수) 오전 10시, 대전시청 북문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2023년 5월 10일(수) 오전 10시, 대전시청

www.djpeace.or.kr

 

그리스도인의 사명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하느님 통치를 적극적으로 펴나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나쁜 정치를 몰아내고, 정치를 바로 세우는 것은 특정한 정치공동체 출현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 모든 이들의 각성과 참여로 이뤄집니다.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우리가 끌어내리고 우리가 세우는 겁니다. 좋은 사람이 나타내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겁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 통치를 이뤄나가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치는 열려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겁니다. 편의상 몇몇 정치인에게 맡겼지만, 못했다면 빨리 끌어내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하느님의 통치를 이 땅에 이뤄지도록 하는 것.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통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정치에의 참여를 강조하십니다. 교황이 되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 2013년 어느날 예수회 학교를 방문하셨을 때,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에 관한 질문을 받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입니다. […] 우리는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치란 공동선을 찾는 보다 특성화된 사랑의 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왜 정치가 타락하는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적 정신으로 그것이 타락하지 않도록 막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모든 것을 '그들 탓'으로 돌리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의무입니다.”

 

 

검찰독재 1년, 대전 시국공동선언 기자회견에 김용태 위원장 참여

검찰독재 1년, 못살겠다 갈아엎자! 대전 시국공동행동에 김용태 정평위원장 참여 5월 10일(수) 오전 10시, 대전시청 북문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2023년 5월 10일(수) 오전 10시, 대전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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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선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것은 가장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황님도 안타까워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남 탓’으로, ‘그들 탓’으로, ‘그놈들 때문’으로, 돌리면서 욕만 하지 말고 참여하라는 겁니다. 과연  나 자신은 뭘 하고 있습니까? 공동선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 하고,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예수님을 옹호하는 변호인이 한 명이라도 있었나요?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과 사형의 집행, 그 속에는 검사와 판사만 있고 변호사는 없었습니다. 그 2천 년 전 일이 지금도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2천 년 전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말합니다. 화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건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앙이 아닌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이때, 한 신자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저는 오늘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신부님들이 이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을까요?”

 

세상에 칼을 주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오 10,34)라고 하셨고,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라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주려’ 오셨고, ‘불을 지르려’ 오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의 칼 역시 예수님의 칼처럼 날카로워야 하는데, 사실 두부도 썰지 못할 정도로 칼은 무뎌졌습니다. 이런 예수님 말씀에 다 떠나가고 열 두제자만 남았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 말씀이 두렵습니다. “좋은 말만 하세요.” 신자들이 떠나갈까봐 좋은 말만 합니다. 사실 신자들도 ‘좋은 말만 하라고’요구합니다. 저는 좋은 말만 하는 게 아니니까 저에게 어떤 분들은 욕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말씀은 양날의칼과 같다고 했습니다. 칼은 날이 서 있는 것이고, 벼려있는 것으로, 이런 게 바로 복음말씀인데, 이 시대의 그것은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습니다. 요한묵시록 3장 16절에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라는 구절이 나오죠.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말만 하고 다닌다면 ... 

이것이 이 시대 복음의 말씀인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말만 해댑니다. 이건 나쁜 사람들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겁니다. 질문하신 것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린다면, 교회가 점점 더 칼을 주러 온, 불을 지르러 온 예수님의 복음 정신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멤버십처럼 운영되면서 진정한 제자는 없어지는 모습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4월 1일,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hristus Vivit)라는 권고를 통해, 정치덕 애덕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신앙 실천을 위한 “형제애의 길”을 제안하시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고, 사회적 정치적 애덕에 힘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란 말씀을 하셨어요. 다시 말해, 내가 가난한 옆 사람에게 만원짜리 한 장을 주는 것도 애덕이지만, 이 사람이 가난하게 된 이유에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가 부당하게 해고되었을 때, 그 잘못된 제도와 정책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영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행동, 그들을 압박하고 바른 정치를 펼치도록 하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한 일이 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2가지 방법, 사회복지와 사회정의

이런 맥락에서 사랑의 실천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사회복지가 있고, 사회정의가 그것입니다. 사회복지와 사회정의의 실천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사회복지는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죠. 그것은 좋은 겁니다. 그런데 사회정의는 “왜 빵이 없어요?”라고 묻는 겁니다. 빵을 뺏는 사람들, 부당한 자와 맞서 싸우는 겁니다. 가난한 이에게 빵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뺏어가고 폭행하는 이들에게 맞서는 것도 중요한 겁니다. 

“너 왜 맞았어?” “저 놈이 그냥 때려요?” 그럴 때 ‘저 놈’에게 가서 ‘왜 때리냐’라고 묻고 맞서야 합니다. 만일 그가 성당에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등의 이유로 아무 것도 묻지 않은채, 맞은 이에게 돌아가서 “교회에 약이 많아 발라줄게, 다음에 맞으면 또 와”라고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즉, 적극적 사랑인 정치적 애덕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정치공동체의 토대와 목적

인간이 정치적인 토대입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정치는 인간본성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정치의 목적 모두를 다 이롭게 하는 것, 즉, 공동선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 바로 그 모습 회복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입니다. 공동선을 달성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입니다. 인권, 인간존엄성을 실현하는 게 정치가 지향하는 것이며, 모두 이롭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공동체보다 항상 우선합니다. 인간은 심지어 국가보다 우선합니다. 정치공동체 역시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입니다. 인간이 중심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정신은 사랑입니다. 형제애이며 우애입니다. 사랑을 강조합니다. 정치에도 사랑이 자리합니다. 섬김도 사랑입니다.  독재국가에서는 섬김이나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독재정치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버리고 국가에 헌신하는 것이죠. 대의가 중요하고, 멸사봉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정치 권위
정치 안에서 권위는 무엇일까요? 권위는 하느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위임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것이죠. 하느님의 권위를 인간에게 주고, 그것을 대표자에게 줍니다. 정치공동체와 정치인들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정치 권위는 그 권위에 부여된 임무 때문에 필수적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이해와 갈등, 분쟁을 조절할 때 힘이 필요한데, 그게 권위입니다. 사회적 합의와 약속입니다. 권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에게 주셨으니, 권위의 주체는 국민입니다. 인간이 주체인데, 국민들은 선출된 대표들에게 위임하는 데 끝나지 않고 평가하거나 교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권리입니다. “다음 선거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물을 수 있겠죠. 그러다가 나라 거덜날 수 있다면 교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대리운전을 불러서 대전에서 천안까지 간다고 해보지요. 그런데 대리운전 기사가 음주운전자라면 천안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할까요? 기다리는 중에 사고가 나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서 갓길에 세우고, 다른 대리운전자를 불러야 합니다. 교체해야 합니다. 

정치 안에는 공동선을 위한 방향성은 중요합니다. 정치가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도덕적인지를 봐야합니다. 정치적 권위는 도덕률에서 비롯됩니다. 즉, 통치행위는 공동선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도덕이고 양심이며 윤리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에 맞아야 합니다. 그것이 양심이며, 자연법이고, 신법입니다. 이걸 도덕, 윤리라고 표현합니다. 정치는 그렇게 이뤄져야 공동선을 이루고, 하느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정치의 공동선, 도덕, 윤리, 양심, 자연법, 신법

정치를 이야기할 때, 도덕, 윤리, 양심, 자연법, 신법이 따라 나옵니다. 하느님의 뜻, 복음, 복음적 가치 등입니다. 이것은 법적인 토대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법으로 실현하고 법으로 보호받습니다. 그래서 정치는 법치국가의 토대를 갖습니다. 즉, 공정하고 제대로 된 법과 제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입법, 사법, 행정 안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권위는 인간의 존엄과 이성에 따라 이뤄집니다. 여기에 어긋나는 것은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겁니다. 그런 법은 부당합니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교회는 ‘악법도 법이다. 그러니 따르라’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악법은 법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의 오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소크레스는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라는 말을 남기고 독배를 마셨다고 합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1930년 「법철학」이란 책을 쓴 일본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尾高朝雄)가 실증주의법철학과 소크라테스를 연계하며 생긴 말이었습니다. 

 

악법은 지키는 게 아니라, 없애야 ...

아무튼 악법은 지키는 게 아니라 뜯어고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라틴어 격언에도 ‘두라 렉스, 세드 렉스(Dura lex, sed lex)’라는 말이 있어요. ‘엄격한 법, 그러나 법’이란 뜻인데, 고대 로마의 교훈으로, 법은 엄격해도 그래도 법이니까 힘들어도 지키자라는 말이지, 악법도 법이란 뜻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현재 악법이 존재합니다. 국가보안법, 빨리 없애거나 뜯어고쳐야 합니다. 악법도 법이니까 지켜야 하는게 아니라, 양심에 따라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권리입니다. 정치 권위를 아무리 인정한다해도, 그것을 위임한 것일 뿐이고, 악법이라면 저항하고 맞서야 하듯, 양심에 따라 윤리적 도덕적으로 공동선에 위배되는 정책이라면, 신법, 자연법, 하느님 뜻에 따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양심에 다라서 거부할 권리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 질서의 요구나 인간의 기본권 또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될 때, 국민들은 양심에 비추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422항)

우리 가톨릭의 교리는 양심에 따른 거부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빨갱이’라고 하면서 비난하는 것은 교회의 교리를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또 거부권 외에 저항권이란 것도 있습니다. 즉 정치적 권위가 자연법의 근본원리를 심각하게 또한 반복적으로 침해한다면, 그 권위에 대한 저항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자연법은 실정법의 토대이며, 모든 법의 상위개념입니다. 즉 양심에 새겨진 신법, 자연법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준 것이고, 궁극적인 겁니다. 즉, 아무리 세상의 법전에 명시되었더라도, 그것이 옳지 않다면 거부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가톨릭 교리는 저항권 행사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으로 다섯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권력의 억압에 대한 저항은 아래의 조건들이 다 함께 충족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무기 사용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1) 기본권이 확실하고 심각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침해를 받을 때, 2) 다른 수단을 모두 사용하고 난 후에, 3) 더 심한 무질서를 유발할 우려가 없을 때, 4)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일 때, 5)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더 나은 해결책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설 때. 「가톨릭교회 교리서」 2243항  

때로는 저항 안에서 무력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무력을 사용하는 저항권 행사라고 써놓으니, 전쟁을 정당화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위와 같은 조건이라면 무력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5.18 광주 시민군이 무기고를 탈취해서 저항한 것이 그런 거겠죠. 그런데 이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무리’라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는 가급적 ‘가능한 한 하지 말자’라고 말합니다. 무력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극단적 저항이기에 극도로 삼가면서 소극적 저항, 비폭력저항을 더 바람직하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현대 가톨릭 사회교리는 폭력을 정당화 악용하는 무리로 인해서, 비폭력저항을 요즘은 더 지향하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이걸 악용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무기력하게 죽는 모습에서 비롯하여 그냥 죽임을 당하는 비폭력저항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형벌의 부과에 대해서


공동선을 보호하려면, 합법적인 공권력이 범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을 부과할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여야 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266항)

교회는 공동선을 위해서 형벌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2가지로, 하나는 예방이고, 두 번째는 교정입니다. 범죄를 막고, 바로잡는 것, 즉 예방과 교정 차원에서 형벌이 작용하는 걸 교회는 인정합니다. 따라서 예방과 교정을 통해 수형자가 다시 정상적으로 사회에 복귀하도록 돕는 것이며, 제거하는 것은 아니기에, 교회는 사형제도를 반대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사형은 제거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형벌’이란 그야말로 온전한 회복을 지향하고, 구원을 지향하는 것이므로, 형벌에서 고통을 주는 행위 즉 ‘고문’을 절대적으로 반대합니다. 형벌은 사회를 구원하고, 죄지은 자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는 겁니다. 교회가 형벌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을 주려는 게 아닙니다. 

형사사법제도와 관련해서 그 활동에 대해 교회가 언급하는 것은 ‘진실규명’을 추구합니다. 억울한 사람 있으면 안 되고,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온전히 보장하면서, 범죄가 입증되기 전 형벌을 내리면 안된다는 것, 과정 안에서. 그래서 범죄가 입증되기 전에 이뤄지면 안되고, 진실이 규명된 후에 이뤄질 수 있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기레기들의 언론플레이와 무리한 검찰의 수사와 기소로 죄를 만드는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완강히 거부하며, 이것을 고발하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을 외칩니다. 온전한 정치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또한 재판은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습니다. 따라서 재판을 잘못했을 때 희생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이들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법으로  규정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교회는 공공선을 위해 주장과 가르침으로 디테일하게 개입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뤄지기 위해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은 민주주의라는 제도 안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 틀 안에서 정치, 통치행위가 이뤄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국가권력이나 정치공동체가 양심, 도덕, 윤리, 자연법, 신법, 복음적 가치로 공동선이 이뤄지도록 민주주의 안에도 작동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감시합니다. 이때 모든 것을 꿰뚫는 것은 공동선이며, 그게 지향하는 건 우리 모두의 구원입니다.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우애, 형제애입니다. 이러한 사랑이란 다시 말해 섬김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그런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이므로, 삼권분립이 견제와 균형 속에 잘 이뤄질 수 있도록 교회는 요구합니다. 

정보와 민주주의
정보는 민주적 참여를 위한 주요한 도구입니다. 정치 참여의 도구로 정당활동, 국민투표 등이 중요하지만, 정보도 매우 중요합니다. 정보는 중요한 민주적 참여를 위한 도구인데, 오늘날 우리나라 뉴스미디어 상황은 ‘언론 쓰레기’라고 할 만큼 심각합니다. 일부 언론이 금융이나 재벌, 검찰 독재 등과 유착하여 전체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론개혁이 중대하게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대중매체를 통한 정보전달은 공동선에 입각해야 한다.

시민사회에 봉사하는 정치공동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의 역할도 있지만 시민사회단체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개인적 활동뿐만 아니라 연대하는 시민사회단체를 통해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하기를, 정치공동체보다 시민사회단체가 더 상위에 있다고 봅니다. 인간이 국가보다 위에 있듯이, 시민사회가 국가보다 위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들의 어우러져 사는 시민사회 모습이 상위개념이죠. 국가는 개인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민사회를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다면 주객전도입니다. 개인과 시민사회, 이것이 정치공동체보다 상위개념이고, 정치공동체와 국가권력은 국민 한 사람뿐만 아니라 이들이 모인 시민사회단체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2023년 5월 12일(금) 밤 9시 35분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가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고 있는 것들을 설명드렸습니다. 교회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상 교회는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이제 저는 6월의 토크콘서트 때 뵙겠습니다. 그때 마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김유정 노은동성당) 주임신부님과 같이 앙상블 공연을 합니다. 서커스에 버금가는 토크콘서트에 많은 기대 부탁드리고,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침기도로 하여 마치겠습니다. 

 

2023년 5월 21일(금) 밤 9시 40분 종료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학교 4강 '정치공동체'

김용태 마태오 신부(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