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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노은동 사회교리 5강 경제생활(2023.5.19.)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5. 20.

이진욱 미카엘 신부의 '경제생활' 강의 

노은동 사회교리학교 5강. 5월 19(금) 저녁 7시 40분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학교 다섯 번째 강의가 2023년 5월 19일(금) 저녁 7시 40분 성당 지하 다목적실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강의 제목은 <경제생활>이며,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며, 원신흥동성당 주임신부로 사목 중인 이진욱 미카엘 신부가 맡아서, 2시간 동안 진행했다. 주님의 기도를 함께 올리며 시작된 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5강 <경제생활>의 목차
들어가는 말
1.‘부자되세요’라는 구호가 미덕인 세상
2. 인간이 배제된 경제 활동
3. 눈치채지 못하게 스며들어있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
4. 신자유주의의 도전
5.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6. 사회, 경제적 문제가 동시에 도덕적 문제라면 교회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7. 관계성, 연대, 협력, 애덕
마치는 말

경제 이야기는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고 여러분이 훨씬 더 전문가이십니다. 저는 사목자로 살아오며 느끼고 배우고 공부하고, 또 제가 알고 있는 것, 경제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경제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자녀이자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편으로 제가 미흡할 수 있고, 또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교회적인 차원에서 말씀드리겠고요. 「간추린 사회교리」  문헌의 스키마,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들어가는 말 

 

「간추린 사회교리」 문헌은 1891년 교황 레오 13세께서 최초의 사회회칙이라고 일컫는 「새로운 사태」라는 문헌을 반포한 이래, 최근까지 역대 교황님들이 반포한 사회 교칙, 권고, 연설문 등등을 2차 바티칸 공의회 관점에서 총 정리해서 하나의 문헌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간추린 사회교리」는 서문과 3부로 구성되었는데, 서문에서는 이 문헌이 왜 집대성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1부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구세사에 비추어 회고하는 성경적 관점을 보입니다. 글면서 사회교리가 복음의 필수임을 강조합니다. 이에 따라  공동선, 재화의 보편적 목적,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보조성, 참여, 연대성 그리고 사랑 등 사회교리의 여러 원리들을 언급하면서, ‘사랑’의 개념이 성경 전체의 보편적 기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이것이 재인식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애덕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2부에서는 구체적으로 신자유주의 개념, 제가 반복해서 강의를 통해 말씀드릴 것인데,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시대의 징표란 단어로 강조하며 언급합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세계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계화’가 뭐 어때서?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따른 세계화의 문제를 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신앙인들이 어떻게 복음을 증언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의 기준을 제시하는 게 2부입니다. 이 문헌이 나온 배경이자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와 그에 따른 획일적이고 비인간적인 ‘세계화’라는 징표를 말하고자 합니다. 획일적이고 비인간적인 세계화라는 징표는 교회 시각에서 어떻게 비판적으로 다룰 것인가? 이것이 간추린 사회교리 2부에서 각 주제별로 배치했습니다. 이에 대한 신앙인의 응답, 여기서 경제 개념이 등장합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 개념입니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세계화가 낳은 문제들

신자유주의는 경제개념이자 이론처럼 보이는데, 그 출발이 그렇더라도 지금은 그 이상입니다. 지구 상의 인간 사회에서 다방면으로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 오묘하게, 기괴하게 또는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침투하여 영향을 끼치는 거대한 신경망이 되었습니다. 세계화가 나쁜 건 아닌게, 그걸 이루는 신경망이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보이지 않는 무언의 폭력을 저지릅니다. 인간의 다양한 가치를 담보하는 존엄성을 하나의 부속으로 바라봅니다. 세계화를 이루는 하나의 볼트, 하나의 너트. 이렇게 바라봅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문제는 우리 신앙인들 역시 이러한 흐름을 눈치채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거대한 흐름 속에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는 겁니다. 

 

신자유주의가 온 세상의 신경망으로 펼쳐져 있는 지금

이러한 세계질서와 흐름, 세계의 이념과 시대의 정신들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와 그에 따른 세계화는 단순히 경제원리 차원에서만 해석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철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대해 교회는 “하느님께 도전장을 내미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인 시대의 악”이라고 신자유주의를 표현합니다. 무서운 표현입니다. 도전장을 내밀지만 보이지는 않고, 그러면서 구조적인 악입니다. 구조적이기에 또 다른 악을 양산하는 근원적인 악입니다. 이에 따른 복음적 가르침을 위해 「간추린 사회교리」가 발행된 것이죠. 결국 우리는 우리가 아는 수준에서의 경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저는 철저하게 교회의 시각에서 경제적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어떤 신앙적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교회적 가르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도전장을 내밀면서도, 보이지 않는 구조적 악으로서의 신자유주의
「간추린 사회교리」 제2부 제7장 <경제생활>은 사회문헌들을 근거로 우리에게 다양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약 54개 항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항들마다 교회의 가르침이 녹아 있습니다. 오늘 경제생활이란 주제로, 현대의 경제생활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는 신자유주의와 그에 따른 세계화, 그 위험성과 그 자각에 대해, 그리고 이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나누겠습니다.

 

(유명한 남성연예인) OOO이 잘 생겼습니까? 제가 더 잘 생겼습니까?

오늘 강의를 들으시면서 항상 마음에 염두에 둬야 하는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유명하고 멋진 남성 연예인과 저를 비교하면서, “누가 더 잘 생겼을까요?”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나요? 아마도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라면, “내 아들이 그래도 더 잘 생겼지.”라고 할 겁니다. 즉 기준점이란 게 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기준점을 아는 겁니다. 세상의 기준은 가변적이지만, 교회의 기준은 불변합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치 기준의 최정점에 있습니다. 이 기준을 잣대로 경제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세상의 경제움직임과 우리의 경제활동을 바라보면 보이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원칙을 풀어서 사회에 적용하는 소원칙이 바로 교회의 사회교리입니다. 

 

사회교리의 대원칙을 풀어서 말한다면 ...
사회교리의 대원칙을 풀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회교리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등을 다른 말로 하면, 다섯 가지의 원칙으로 바꿔서 말할 수 있는데요.

 

첫번째, “모든 것에 있어서 가난한 이의 필요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두 번째, “사물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다.”

세 번째, “기술문명보다는 윤리의식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

네 번째, “이제 그런 기준들을 장착했다면, 단순히 할 수 있는 것을 물을 게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

다섯 번째, “소유가 아니라 사람됨을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 원칙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 등 모든 것을 판단하기 위한 신앙적 기준입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세계화, 획일화, 비인간화를 주도하며 하느님의 피조물, 특히 인간에게 폭력을 일삼으며 지금도 폭력을 자행하는 시대의 흐름들, 그걸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휩쓸려 가는 그 흐름을 비정상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1. ‘부자되세요’라는 구호가 미덕인 세상


‘부자되세요’라는 말 좋아하시죠? 네.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들어서 기분 나빠할 사람도 없을 거 같습니다. 이러한 인사가 미덕인 세상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빈민의 아버지라는 별칭이 있 아베 피에르 신부님(1912~2007)은 2007년 돌아가셨는데, 1912년에 유복한 집안의 자녀로 태어나셨지만, 성직자 길을 걸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사회부조리를 직접 목격했고, 전쟁 중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신합니다. 평생 빈민구호에 힘쓰시다가 2007년에 돌아가십니다. 피에르 신부님은 지금 프랑스에서는 살아있는 성자로 존경받는 분이신데, 신부님께서는 이러한 말을 남기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굳이 둘로 나눠야한다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눠진다.” 

 

사진설명. 프랑스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는 아베 피에르 신부님이고&nbsp; 2 위가 축구영웅 지네딘 지단이다 .

 

‘부자되세요’라는 말에 담기 의미 ...

한 때 ‘부자되세요’란 말이 유행했습니다. 마음의 부자가 아니라, ‘배부른 돼지’가 되라는 구호같다고 저는 표현합니다. 우리나라 땅에서는 서로 배부른 돼지가 되자고 권하는 세상입니다. 그걸 미덕처럼 생각하는 것은 통탄할 일입니다. 그게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도 아니고, 세계 다른 나라의 가치관도 아닙니다. 심지어 아파트 광고를 보면,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것도 있습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광고 ...

기억나세요? 이걸 들으면 어떤 마음이나 생각이 드시나요? 이 광고는 공중파를 통해서 나왔습니다. 우린 그런 세상에서 삽니다. ‘소유냐, 존재냐’라고 에리히 프롬이 말했습니다. 지금 세상은 소유가 존재를 규정합니다. 아무런 거부감이나 위화감 없이 이런 표현이 흔해진 세상에서, 인간의 존재를 아름답게 가꾸려고 하는 대신, 소유를 더 많이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이 곧 잘 사는 삶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존재와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오로지 소유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라지고 경제동물만 남습니다. 인간관계는 파괴됩니다. 이웃에 대한 상상력, 공감력이 없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상상력과 공감력”이 없어진 세상 ...

우리가 단칸방, 쪽방촌에서 한 가족이 열악하게 산다고 가정해보면요. 저녁에 끼니를 겨우 때우는데, TV에서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이건 끔찍한 표현입니다. 신앙인조차도 이런 표현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세상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듣고 흘려버립니다. 이런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일들이 벌어지지만, 그것이 순순히 받아들여지고 공공연하게 들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면 인간성은 이미 훼손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 1위
초등학생들이 장래 희망으로 뽑은 1위가 뭔지 아세요? 유튜버? 아닙니다. 연예인? 아닙니다.  ‘건물주’입니다. 초등학생 장래희망 1순위는 부자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의 1순위는  ‘CEO’입니다. 청소년들에게서 장래에 이웃사랑과 연대를 실천하면서 자아를 실현하겠다는 꿈과 열정을 가지려는 모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의 아이들을 어른들이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소유만 바라보며 경제동물만 키워내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해결할 것인가?
사람들은 묻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세계화의 환경에서 거대한 악이 끊임없이 양산되는 이러한 세상. “거대한 시대의 조류를 끊을 수 있는 기관이나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해서 많은 전문가들과 학자들은  “대학이고 종교”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거대한 악을 양산하는 이 흐름을 끊어낼 가장 가능성 있는 단체나 기관이 대학이거나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대학은 제 스스로 자정작용조차도 못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통한 희망은 사라져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어떨까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사랑보다는 개인차원의 구원만을 소명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개인차원의 구원은 ‘부자되세요’와 일면 일맥상통합니다. “우리 교회 오시고, 구원받으세요.”라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은 흡사 이단의 종교관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단들의 세계관을 보면, 이 교회에만 나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그것이 가정을 파괴하는 상황이든, 다른 이가 멸망한다거나, 아이들이 죽던지 살던지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그렇게 종교계에도 신자유주의가 깊숙하게 침투해 있습니다. 종교 역시 사회구성원이 경제동물로 축소되는 현재의 상황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런 흐름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개인차원의 구원만을 소명으로 여긴다면?
그럼 저는 누구입니까? 저는 가톨릭이란 종교의 지도자입니다. 그런 제엑 묻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 사실 그것은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나만 소유하면 그것도 확실하게 소유하면 된다는 식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으로 눈에 보이게 빠르게 구원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신앙인이 있다면, 그것은 경제동물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럼 하나 더 묻겠습니다.

 

묵주기도 5단과 100단 중에 누가 은총을 더 많이 받을까?
묵주기도 5단과 100단은 누가 더 은총을 더 많이 받을까요?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느님만이 판단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묵주기도 100단하는 것으로 은총을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우리가 경제신앙인이 되어버린 증거입니다. 신앙인들조차도 눈에 보이는 구원을 좇다보니, 구원을 양으로 환산하여 미사참여 횟수, 봉사활동 횟수 등의 기준으로 개별적인 신앙의 수준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결국 우리 종교 안에서 경제논리가 침투하여 우리를 변질시키고 있다는 걸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눈과 귀가 즐겁지 않으면 가르침을 저버려야 하나?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귀와 눈이 즐겁지 않으면 신부의 강론을 평가하면서, “강론 못해, 들을 게 없어”라고 판단합니다.  내 귀와 마음을 즐겁게, 평화롭게 만들어주지 않으면 사람도 교회도 신앙도, 그리고 결국은 주님의 가르침도 버리고 맙니다.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교구청에 투서를 넣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내 뜻에 맞지 않으면 이간질에 질투에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렇게 교회 공동체에는 누군가를 몰아내려는 모습들이 우리 안에 다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만연해 있는 경제적 논리이며, 우리가 물들어 있는지 조차 잊고 있는 사악한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내 이웃이나 소수자, 그리고 약자의 인권이나 설 자리는 당연히 없습니다. 사회정의에 대한 생각조차 없어져 버립니다. 만연한 위법과 불법적 행위와 부패한 행위가 미덕이 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부도덕한 기업의 성공이 신화로 포장됩니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한 것이기때문에, 대기업을 무조건 밀어줘야 해. 라는 모습으로 국가와  대기업을 경배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닌 경배 속에서 우리들은 사회적 불의함와 불평등, 그 구조적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구조적 모순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사회적 악에 물들어 있다면, 그런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과연 이룰 수 있을까요? 구조적 모순에 대해 무관심하면서도 나의 구원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하느님이 보시고 좋아하실까요? 그러면서도 우리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시킨 하느님이 당신 아들의 고귀한 죽음을 미사때마다 기억하며 외쳐댄다고 해서, 과연 우리를 믿으실까요? 이미 우리의 삶과 생각은 경제논리에 입각해 있으며, 그 경제논리는 이미 신자유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2. 인간이 배제된 경제활동


돈이 필요한 이유
현대 인간의 경제활동의 근간이 되며,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체계의 핵심인 돈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은 물질적 재화가 필요합니다. 이를 사용하고 처분하는 행위를 우리는 경제활동이라고 합니다. 이 활동은 생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품위를 유지하는 높은 문화생활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예술과 문화, 그리고 종교활동에서도 상당한 재화가 필요합니다. 생계를 넘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경제생활과 돈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를 물질주의적이라고 폄하하거나 천시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자기 발전을 위해 필요한 재화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제한할 수 없는 자유권입니다. 인간존엄과 인격에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일정한 재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동시에 일정기간 점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문제들

그런데 이 재화는 양이 충분하지 않고, 계속 소모되는 것이기에 지속적으로 재화의 조달에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러한 욕망은 동물처럼 배부르다고 안먹는 게 아닙니다. 제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무한한 행복에 대한 추구라는 본성이 있으므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며 무한대를 지향하므로 멈추지 않습니다. 재화는 한정되었지만 욕망은 무한한 것을 알기에  지금 재화를 아끼고 보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경제란 말에는 절제와 검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제활동은 근본적으로 재화를 아껴쓰는 것이며 그 수행에 있어서 안배되고 절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생활이 건강해지고 그 속에 사람이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 인간은 재화를 함부로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재화 그 자체보다 상위개념인 돈이란 어마어마한 개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것들
돈이 있으면 고기를 살 수 있고, 카드가 있으면 기름을 넣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카드가 있으면 든든한가요? 그건 카드 계좌의 통장 잔고에 좌우됩니다. 그 개념의 기준이 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돈이 상위개념입니다. 돈이 있으면 가스와 기름을 얻을 수 있고, 모든  자원과 재화를 소유할 수 있게 만든다는 이 잘못된 생활이 오늘날 우리의 경제활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 아래 있는 하위 개념들, 천연자원, 식량자원, 원자재들이 어떻게 생산되며 어떻게 고갈되며 비인간적으로 파괴하고 죽이며 만드는지, 다른 피조물과 인류, 그리고 지구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돈만 있으면, 다 소유할 수 있다고 보면서 인간조차 하위가치로 전락했습니다. 1980년대부터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도 생겨났지요. 

 

돈보다 하위개념으로 전락한 인간이란 존재
돈보다 인간이 하위개념으로 전락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사목헌장」은 인간이 경제활동의 건설자며 중심이며 목적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중심이고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 이익과 효율성 때문에 인간이 중심에서 제거되면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경제 사회 생활에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그 온전한 소명, 사회 전체의 선익은 존중되고 증진되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 사목헌장 63. >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40주년을 맞이하여 1931년 5월 반포한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사십주년」은  제43항에서, 경제보다 더 높은 가치의 서열에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도덕, 즉 거룩한 가치인 하느님이 위치함을 확인합니다. 경제활동의 목적은 한도끝도 없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자 조달이 아니라, 물질적 풍요와 많은 소유에 의한 행복추구가 아니라, 전인적, 특히 사회적 가치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신앙 안에서 말할 수 있는 경제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사람이 있고 더 중심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경제활동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논리를 추구하는 것이 경제활동입니다. 그것이 지극히 건강한 것이며, 영성적으로도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훌륭한 활동입니다.

 

「사십주년」,  제43

43.  ... 오늘날의 경제 체제는 주로 자본과 노동에 토대를 두고 있으므로, ... 올바른 이성과 그리스도교 사회 철학의 원리가 결국 이론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고 실천으로 옮겨 져야 한다. ... 자본가와 노동자의 상호 관계는 그리스도교 애덕의 보조를 받으면서 교환 정의(commutative justice)라고 불리는 엄격한 정의의 법칙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 자유 경쟁과 특히 경제적 독점은 일정하고 적절한 한계 내에 묶여 있어야 하며 국가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공권력의 효과적인 통제하에 놓여져야 한다. 국가의 공공 기관은 모든 인간 사회가 공동선의 요청, 즉 사회 정의(social justice)의 규범에 합치하도록 ... 

 

요한 23세의 회칙을 통해 바라보는 경제생활
돈보다 인간이 하
교황 요한 23세는 회칙 「어머니요 스승」(1961) 제175항에서, 정신척 가치를 등한시하는 물질주의를 경계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과학적 기술적 진보, 경제나 국민 생활의 번영이 이루어지는 것은 틀림없이 문명의 적극적 요소라고 하면서도, 그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해서도 안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절대적 가치에 비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방편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과학 기술의 발전과 경제나 국민 생활의 번영이 이루어지면 그곳의 인간 문명과 문화의 진보에 많은 공헌을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최고선이 아니라 오로지 최고선을 추구하는 적절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한다. 「어머니요 스승」(1961) 제175항


여기서 절대적 가치는 바로 하느님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경제개념을 가톨릭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삶 속에서 살아가는지 각자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2023년 5월 19일(금) 저녁 8시 29분 휴식, 8시 39분 재개

 

3. 눈치채지 못하게 스며들어있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나?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 6장 24절의 말씀을 통해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무엇을 선택할까요?  

 

신자유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경제적 신자유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야만적인 세계화가 가져오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불의의 차원에서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화로 인해 세계화된 경제는 극단적 이윤추구와 시장 경제를 통해 사회의 약자들이 더욱더 소외되게 만들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사회적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 점검하고 연대를 통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 극단적인 이윤추구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사상은 곳곳에 깊숙이 박혀 있고, 더러는 의식하면서도 타협하거나 용인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인 채로, 그런 경제적 삶을 충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음의 기준은?
도로에 람보르기니 차가 지나가면 “우와~~”라고 하겠죠. 우와 저 차 좋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좋음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비싼 거죠. 10평짜리 작은 연립과 80평 짜리 아파트를 비교하면 어느 집에 더 좋은가요? 비싼 거죠. 비싼 차를 보고 서슴없이 좋은 차라고 합니다. 자동차 값이 비싸다는 것은 좋음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죠. 좋은 차란 연료가 적게 들어도 훌륭한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으며, 생태 환경을 덜 오염시키면서 다양한 면에서 인간을 이롭게 만든다면 어떻습니까? 그게 진짜 좋은 차일 것 같습니다. 돈의 기준이 복음의 기준을 밀어내고 어느새 우리 안에 자리잡고 우리 감성과 사고를 지배합니다. 흔히 좋은 집안이라고 하면 돈이 많은 집안입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사고와 감성의 틀을 바꿔넣고, 선악의 기준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가치기준, 새로운 윤리모델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강한 경각심을 요한바오로 2세께서 표명하신 겁니다. 

 

우리를 세뇌시키는 대중매체와 광고
대중매체와 광고는 끊임없이 우리를 쇄놰시킵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동안,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한 광고와 뉴스들. 그들은 다분이 의도적으로 거짓뉴스나 자극적 제목으로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조회수가 많이 나오면 광고가 많이 들어오죠. 그러면 돈이 들어온다는 뜻이겠죠. 거짓뉴스를 돈 때문에 만들어내는 언론들이 있는데, 과연 그걸 비판적으로 바라볼 능력이 있을까요? 소수에 대한 폄하, 장애인에 대한 비하, 나와 뜻을 달리하는 이에 대한 멸시, 성장이란 허울 뿐인 파괴적인 건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사회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라고 쉽게 포기합니다.  "너는 그래야만 해"라고 끊임없이 포장되어 언론을 통해 세뇌를 시키고 있으니, 우리는 하는 수없이 쉽게  동조합니다. 비판의식은 사라지고 세뇌당합니다. 결국 사회의 약자들은 도태되지만, 이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나치의 독일이 유태인들을 멸종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시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TV의 경향과 성경의 영향, 누가 더 세나?
TV의 영향과 성경의 영향에서 무엇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까요? 이것만 봐도 답이 나옵니다. 하느님 복음의 힘은 광고와 뉴스의, 힘 앞에 무력합니다. 무엇에 더 노출되었는가에 따라 달라지기때문이죠. 그러면 우리 신앙은 회칠한 무덤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고를 순진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보여지는 것 그대로 언론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왜곡된 가치가 숨어있고 왜곡된 윤리, 왜곡된 종교관도 있습니다. 복음적 가치관을 외면하게 만드는 이 땅의 신앙인들이 돌아봐야 할 숙제, 과제입니다. 한편으로 신앙생활일 수도 있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는 그 생각을 넘어서, 내가 딛고 있는 내 삶의 자리에서 내 말과 행동을 신앙적 기준에 의해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어떤 논리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4. 신자유주의의 도전

 

1997년을 기억하시나요?
1997년을 기억하시나요? 경제위기로 적지 않은 사람이 삶의 위협을 받고 생명을 끊는 등, 여러 사회적 폐해와 부작용이 속출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교회는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다양한 복지 등의 활동으로 위기 극복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 역시 주춤거리다가 언제 그런 위기를 겪었느냐는식으로 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경제적 위기가 단순히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는 게 아님을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그 위기를 만들어낸 경제이념이나 체제는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오히려 강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체제 안에서 우리 삶이 자리하고 있죠. 사실 우리의 삶의 기본 틀은 이러한 체제에 의해 지배받고 짜여져 있습니다. 모든 것을 경제의 제로 환원할 수 없겠지만, 우리의 삶이 이러한 경제적 틀 위에 세워져 있고, 그 경제적 작용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의 하느님을 고백하면서 경제문제를 다시금 신앙의 기준에서 진지하게 바라보는 건 당연합니다. 즉 경제생활의 문제를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가 교회의 관점에서 관심을 갖고 지켲봐야 할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백주년」(1991)이 말하고자 하는 것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1년 반포 100주년을 통해서, 회칙 「백주년」을 반포하시면서,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새롭게 도전하는 ‘새로운 것들’을 둘러보며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인간 중심으로 해명하고 제삼천년기를 바라보도록 권고한하고 계십니다. 특히 이 권고를 통해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늘날 지배적인 신자유주의가 고유의 사고나 행위모델을 만들어내며 그리스도교의 윤리에 도전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즉 정신을 바짝차리고 현실적 도전에 대응하며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백주년」,  제100

61. ...  교회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계급 투쟁의 혼란한 시기에 경제적 착취와 전체주의적 체제의 폭정으로부터 인간을 옹호하기 위하여 개입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물질적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억압 없는 협조와 연대 관계의 정신에 기초하는 사회 질서를 주장하면서, 교회는 자신의 사회 메시지의 핵심에 인간의 존엄성을 둔다. 교회는 인간과 사회가 재산뿐 아니라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가치를 필요로 한다고 중단 없이 선언했다.  ... 교회의 호소가 항상 모든 이에 의해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라도, 그 실상을 아주 명확하고 솔직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느꼈고 또 느끼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도전은 신앙 실천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업이나 자본의 부도덕성이나 반사회성에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모르게 그런 경향에 일조하는 건 아닌지 반성할 필요도 있습니다.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우리는 늘 종교적 관점에서 성찰과 반성을 해야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여러분, 만일에 어떤 금융기관에서 이자 8%를 준다면 예금을 하시겠습니다.

(그러자 대체로 일치된 목소리로) “해야죠.” 

 

우리는 자연스럽게 높은 이자수익을 쫓아서 예금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불법 대부업체라면 어떨까요? 그런데 분명히 이자를 받을 확률이 있다면 과연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깡패를 동원해서 배불리는 업체라면 과연 여러분은 그곳에 투자할까요?  (그러자 대체로 일치된 목소리로) “아니요.” 사실 이를 알면서도 투자한다면 공범입니다. 그래서 알아야 합니다. 단편적으로 말씀드렸지만, 은행이나 투자사는 우리에게 높은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 이익 발생을 위해 기업에 투자를 하겠지요. 그런데 그들이 만일 자연을 파괴하고 노동을 착취하는 비인간적이고도 반환경적 활동을 서슴지 않는 기업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관계성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우리의 투자 활동은 부도덕한 기업의 위법/불법적 활동에 원인을 제공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단순히 어떤 한 사건을 보았을 때, 겉에 드러난 하나의 단체만 몰아부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적 차원이든 실천적 차원이든 경제문제에 대한 복음적 판단을 하기 위해 윌는 배우고 또 알아야 합니다. 자본이란 새로운 형태의 가짜 복음을 잘 식별해야 하고, 삶에서 자본주의의 논리를 종교 안에 갖고 들어와서 그 논리를 종교에서 구현시키려는 경제종교로 전락하는 그  위험에 우리가 노출되어 있습니다. 

 

 

5.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1997년을 기억하시나요?
제가 경제학자는 아니어서 전문적으로 모든 걸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현대 교회가표명하는 우려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자유주의란 말 그대로 새로운 자유주의를 말합니다. 그것은 구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새롭게 태동된 것이겠죠. 신자유주의 한마디로 모든 것을 시장경제에 맡기고 국가는 최소한으로 개입한다는 18세기 애덤스미스의 자유주의를 새롭게 부활시키자는 것입니다. 사실 평가하기 나름이지만, 애덤스미스의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입니다. 속되게 표현하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한 놈이 다 가지겠지 그러니 싸우게 냅둬.  괜히 국가가 개입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게 자유주의입니다. 결론은 중요한 건 발전이야 발전을 위해 싸우게 냅둬.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시장경제의 원리인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돈벌이에 대한 관심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충실했을 뿐, (그들의 돈벌이에 대한 관심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이것은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입니다. 시장경제의 발전에는 자비나 애덕, 그리고 상호간의 관계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욕구만 있습니다. 참으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과연 그들 경쟁의 룰을 누가 정할까요? 국가도 개입하지 않는다면, 결국 기준은 힘있는 자가 정합니다. 한번 싸워서 이긴 자는 그만큼 힘을 비축하니 이긴 놈이 계속 이깁니다. 그런데 지면 점점 도태되고 자멸합니다. 여기서 힘은 소유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이깁니다. 소유는 독점입니다. 과연 독점한 자가 그것을 배분할까요? 더 많이 가져가야 이기는 게임이니까, 절대로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누가 애덕을 베풀고 누가 자유롭게 자원을 배부할까요? 

 

자유주의가 부활하게 된 사연
그러면 이 자유주의의 부활을 이야기할까요? 1970년대 세계는 석유파동 등으로 경제의 큰 위기에 봉착합니다. 그러자 당시 세게는 위기에 직면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는 논의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해법으로 꺼내게 됩니다. 강대국인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를 재건하자는 고민과 논쟁의 결론이 바로 신자유주의였더너 것지요. 예전의 자유주의 체제를 부활시키자. 그래야 사람이 살 수 있다.”라는 식으로 논리를 펼칩니다. 사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경제적 위기의 극복을 논의하면서 신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하였고, 그들의 주장이 국가의 경제영역에서 주류가 되면서 훨씬 더 강력해진 시장경제논리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그 논리가 경제정책으로 입안되면서, 그것은 현실적으로 정형화되고 구체화됩니다. 그러던 중에 제3세계국가의 위기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적인 붕괴 등 사회적인 체제의 변화가 함께 몰아닥치면서 신자유주의는 전세계적으로 확산됩니다. 그것이 전세계 인류발전의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할 때, 우선적으로 경제문제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장경제에 대한 절대적 신뢰
신자유주의 경제이념의 핵심은 시장경제애 대한 절대적 신뢰에 있습니다. 경제적 영역에서 국가가 저지른 과오를 단죄하면서, 심판(국가의 개입)을 제거하자고 합니다. 심판을 빼버리려고 합니다. 경제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고 국영기업은 민영화하려고 하고, 노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차단합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무역장벽을 낮추고, 이런 식으로 국가는 시장과 경제를 외면하고 시장경제와 자유경쟁만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은 죽어도 돼.그게 바로 FTA, Free TradeAgreement. 즉, 자유무역협정입니다. FTA, 상호 수출입관세 등 무역장벽을 제거하자는 건데요. 이런 시장경제적 논리나 원칙을 경제 영역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인류발전의 이름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의료, 역사, 교육 등의 모든 곳에 침투해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대학끼리도 경쟁을 시킵니다. 경쟁과 도태를 중요시하는 학문적 문화는 교육 분위기에 영향을 끼치고 후세의 미래 세대들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신자유주의 신념 체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도태된 사람은 죽어도 마땅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신념 체계속에서 일어하는 현상들입니다. 시장경제는 체제의 이름으로 인간을 도구화하고 획일적 행동방식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최첨단의 휴대폰이나 컴퓨터 등에 익숙지 못한 나이많은 어르신들은 정보화 영역에서 소외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많은 분들이 따라가질 못합니다. 계속 발전하는 기술을 익히고 학습하는 자만이 발전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도태되고 떨어져나가더라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 성소수자도 마찬가지, 청소년, 어린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문화적 획일화 더 나아가 문화적 제국주의에 빠질 위험이 커지면서, 저마다 사회의 개별적이고도 특유하며 고유한 규범과 준거들은 위협을 받거나 파괴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백주년」(1991)에서 오늘날 문제가 되는 신자유주의에 따른  세계화의 시대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인간의 존엄성은 모든 것의 원천이므로, 교회는 자신의 사회적 메시지의 핵심을 인간의 존엄성을 둔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 경제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빈곤이 지속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세계로 향하도록 촉구합니다. ... 버림받은 이들, 노인들, 병자들, 소비주의에 희생된 이들의 계층의 여러 가지 형태의 가난이 있으니, ...  구체적으로 적합한 조치들이 제때에 취해지지 않으면, 큰 위기가 예상된다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인플루엔자(Influenza)와 어플루엔자(Affluenza)
인플루엔자란 단어 아시죠? 바이러스, 감영병으로 유행성 독감입니다. (매년 겨울철에 유행하여 고열과 함께 기침 등의 호흡기 증상을 일으키는 질환) 이런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게 전염되고 또 감염되며, 그 결과로 누군가의 생명을 죽이고 파괴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환경과학자 데이비드 왠 등이 공동집필한 책 「어플루엔자 Affluenza」가 있는데요. 여기서 어플루엔자”현대인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곳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유 중독과 소비 중독을 일컫는 말인데요. 소비와 소유를 통해 만족을 얻고자 하는 증상을 가리켜,  어플루엔자에 감염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플루엔자는 어플루언트와 인플루엔자의 합성어이고, 소비중독바이러스를 말합니다. 

어플라엔자. ... 고통스럽고 전염성이 있으며 사회에 전파되는 병으로,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비롯하는 과중한 업무, 빚, 근심, 낭비 증상을 수반함. 즉 어플루엔자는 삶에 대한 무력감, 과도한 스트레스, 이미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 쇼핑 중독, 만성 울혈 같은 다양한 병후가 사회 전체에 만연하게 되는 일종의 사회병리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모임에 나갔는데요. 한 친구는 구찌 가방을 들고 왔고, 다른 한 사람은 페리가모 가방을 들고 과시를 하고 있다면, 나는 다음 모임에 나갈 때 어떤 가방을 들고 나가야 하나요?  (그러자 많은 신자분들이 답하기를   ‘에코백’ ) 그럼 감사하죠.  소비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경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하고 이 생산을 위해 자원을 갈취하거나 파괴하고 또 나올 때까지 끝없이 쥐어짭니다. 문제는 이것이 생태와 자연월 가리지 않는데다가, 더 큰 문제는 사람 역시 그런 수단에 불과해진다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현상의 겉모습만 말고, 그뿌리를 봐야 합니다. 그 뿌리에 신자유주의가 있습니다.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교회의 비판적 가르침을 통해 이러한 상황에 접근해야 하겟습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2015)를 통해 살펴보는 사회적 가치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위 3년째인 지난 2015년 5월 24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셨는데요. 보통 우리가 이 회칙을 환경에 대한 회칙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것은 분명히 사회에 대한 회칙입니다.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언급하시면서, 환경에 대한 파괴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결국 (49항에서) “오늘날 우리는 참된 생태론적 접근은 언제나 사회적 접근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접근은 정의의 문제를 환경에 관한 논의에 결부시켜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모두에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합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미받으소서」는 가톨릭 신앙인들을악의 뿌리를 바라보자고 초대하는 정치회칙, 경제회칙, 문화회칙, 인문회칙입니다. 환경의 위기에 대한 대응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위기를 양산하는 신자유주의를 복음적으로 바라보고 성찰하자는 겁니다. 

 

6. 사회, 경제적 문제가 동시에 도덕적 문제라면 교회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비오 11세의 회칙 사십주년」
1931년 5월 반포한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사십주년」은  경제활동의 목적이 사회적 가치에 봉사하는 것라고 말하면서, 사회질서의 재건을 위해서는 그 중심에 사람이 있고 더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즉 경제활동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있음을 인식해야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이미 레오 13세가 1891년 회칙에서도 명확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레오 13세께서 사회 경제 문제에 관하여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교황의 권이리자 의무라고 밝힌 것을 비오 11세의 「사십주년」에서 재확인한 것입니다. “좌시해서는 안된다!”, “주시해야 한다.”  이렇게 교회가 경제활동의 기준에 대해 무시하거나 간과하면 안된다는 점을 재차 확인한 것이 바로 회칙 「사십주년」인겁니다.

 

하느님이 교회에 내린 임무

회칙「사십주년」은, 그것이 도덕적 문제라면, 그것이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한다면, 교회는 권위로 간섭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 교회에 내린 임무라고 밝힙니다. 사회교리 첫문헌 「노동헌장, 새로운 사태」(1891)를 통해 레오13세 교황이 당부하신 것은  1891년의 새로운 사태를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회칙은 현실세계에 대한 교회시각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문헌이었습니다. 즉 악(惡)의 현상 뿐만 아니라, 근본적 원인이 되는 구조적 악(惡)악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

 

몸에 종기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분, 몸에 종기가 났습니다. 그리고 빨갛게 부풀어올랐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종기를 쬐야겠죠. 그래도 안 나으면 어떻게 하나요? (어떤 신자분이 답변하시기를, '고약'이요.) 고약? 네. 아니면, 도려내야 하나요? 만일 그렇게 낫지 않는다면요? 그래서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보니 이런 진단을 내립니다. “이건 단순한 종기가 아닙니다. 내장에 이상이 있어서 그 이상이 계속 생기는 암세포같은 겁니다. 그래서 종기가 아니라 뱃속 내장을 치료해야 합니다.” 

 

의사의 말을 들어야 할까? 
의사 말을 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집에 가서 고약만 바르면 될까요? 「새로운 사태」(1891) 이전 교회가 취한 현실적 대처는 의사의 말을 듣는 식이 아니었습니다. 종기가 나면 종기를 쬐야 한다고 말하고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는 모습이 「새로운 사태」즉, 노동헌장 이전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사회교리문헌 「새로운 사태」(1891)이러한 구태의연한 교회시각을 바꿔놓았습니다. 이 문헌의 탁월한 공로는 현실적 고통에 대한 임시적 치료를 넘어서 왜 그런 문제가 발생했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졌고, 근본적 치료가 필요하다가 발언했다는 점입니다. 구조적인 악을 발견하고 복음화를 통해 근본적 치유를 하는 게 교회 사명임을 최초로 자각한 겁니다. 그래서 후대 사회교리의, 특징은 직접적인 언어로 말했습니다. 구조적 분석을 위해 사회학 같은 세상의 학문과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사회 회칙에 실질적 언어를 담아내면서, 후대의 사회교리 문헌들에서는 뜬구름잡는 식의 표현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찬미받으소서」 50항 

50. 가난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바꾸는 방법을 생각하기보다 출생률 감소만을 제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발 도상국들은 때때로 경제 지원을 특정한 ‘출산 보건’ 정책에 연계시키라는 국제적 압력을 받습니다. 그러나  ... 지나친 선택적 소비주의가 아니라 인구 증가를 비난하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려는 술책일 뿐입니다. ... 우리는 생산된 식량 전체의 거의 3분의 1이 버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버릴 때마다, 그 음식은 마치 가난한 이들의 식탁에서 훔쳐 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

 50항에 보이듯이, 개발도상국들은 때때로 경제지원을 출산보건정책에 연계시키라는 국제적 압력을 받습니다. 애 그만 낳으라고 말하고, 너희들 나라는 경제가 어려우니까, 피임약, 콘돔 잔뜩 지원해줄테니, 산아제한하라는 압격을 받습니다. 그런 게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니, 그 이유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직접 꼬집습니다. 이런 식의 압력은 애덕의 실천이 아니라, 도태된 나라를 더 도태시키려는 술책입니다. 지나친 선택적 소비주의를 비난해야지, 문제를 회피하면서 인구증가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고, 현재의 분배방식을 옳은 방법으로 바꾸라는 직접적 표현을 하십니다. 이렇게 가톨릭 교황들의 역대 회칙들은 「새로운 사태」(1891)「찬미받으소서」(2015)에서보이듯이, 다분히 도전적이면서도 감정적인 언어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다수의 주도적 이론에 숨어있는 허위와 신화를 가차없이 벗겨내자는 시도이며, 그 허위에 대한 불쾌감도 과감히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생태 환경문제는 결코 ‘환경’이란 주제로만 풀 수 없는 복잡한 원인들에 기인한다는 점을 「찬미받으소서」는 밝히고 있는데요. 특히 1장과 3장을 주의깊게 보면, 이 문제가 왜 생겼는지, 악의 뿌리이자 근원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찬미받으소서」 1항과 3항 

1.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아름다운 찬가에서 우리의 공동의 집이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 주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며 어머니인 대지로 찬미받으소서. 저희를 돌보며 지켜 주는 대지는 온갖 과일과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나이다."
3. 50여 년 전에 세계가 핵 위기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던 무렵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는 전쟁 반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평화를 제안하는 회칙을 반포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가톨릭 세계”뿐 아니라 “선의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발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계적인 환경 악화에 당면하였기에 저는 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이를 대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지속적인 선교 쇄신을 촉구하고자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썼습니다. 이제 저는 특별히 우리의 공동의 집에 관하여 모든 이와 대화를 나누고자 이 회칙을 씁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결국 그 구조의 정점과 기저에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한 권력, 특별히 자본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명시합니다. 예를 들어 54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찬미받으소서」 54항 

54. 국제 정치의 반응이 얼마나 미약한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환경에 관한 세계 정상 회담의 실패는 우리의 정치가 기술과 금융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김없이 보여 줍니다. 너무나 많은 특정 이익 단체들이 있고, 경제적 이익 단체들은 손쉽게 공동선을 장악하고 그들의 계획에 영향이 없도록 정보를 조작하기에 이릅니다. 「아파레시다 문헌」은 “생명의 원천을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경제 집단들의 이익이 천연자원을 다루는 일에서 우선시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경제와 기술의 동맹은 그 즉각적 이익과 무관한 모든 것을 결국 배제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기껏해야 피상적인 말, 어쩌다 하는 자선 행위, 마지못해 보이는 환경에 대한 관심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사회 안에 있는 단체들이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기울이는 참다운 노력은 낭만적인 환상에 근거한 골칫거리나 회피해야 할 걸림돌로 여겨집니다.

즉각적 이익을 위해 즉각적이지 않은 이익을 제거하고, 즉각적 이익을 산출해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상황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또한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앞에서 취약해진 자연과 환경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그 심각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찬미받으소서」 62항 

62. 선의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이 문헌에 신앙의 확신에 관한 장이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치와 철학 분야에서, 창조주의 개념을 단호히 부인하거나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어 종교가 통합 생태론과 온전한 인류 발전을 위하여 커다란 이바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종교를 그저 관용되어야 하는 하위 문화쯤으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과학과 종교는 각자의 고유한 현실 접근 방식으로, 서로에게 생산적인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새로운 구조가 되어버린 기술경제패러다임,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영향력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무위로 돌린다고 이 회칙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1891년 「새로운 사태」 이래로 교회는 산업화 이후의 사회적 문제를 구조적으로 분석하였고, 이러한 시각에서 생태환경문제를 다룹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것들이 각각의 개별사안이 아니라 세기적 문제이며 세계의 시스템적 문제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그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인류는 자멸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을 것 같아서 큰일났다가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질서가 무너지고, 그 사실을 바라보는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이 아파하신다면 우리는 그 마음을 잘 헤아리고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찬미받으소서」 101항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을 인식하지 않고서 그 증상들을 설명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인간의 삶과 활동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이 왜곡되어 현실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빗나가게 되었습니다이것에 대하여 차근차근 성찰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래서 저는 강력한 기술 지배 패러다임과 이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 행동이 차지하는 자리에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합니다.

 

 

7. 관계성, 연대, 협력, 애덕

 

프란치스코 교황의 2019년 3월  말씀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 협동조합 100주년 기념식 말씀을 통해 조합원들에게 연대의 중요성을 언급하셨습니다. 즉, 연대는 구조적 악에 대처하는 하나의 기준점이자 필터이며 동시에 각자의 삶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을 때 필요한 열쇠와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 세상은 분명 바꿀 수 있으며, 그 열쇠는 바로 관계성, 연대, 협력, 그리고 애덕이란 것을 말씀드리고자 이번 챕터의 제목도 그렇게 잡았습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시길,  “사회를 기만하고 점점 더 비인간적이며 불공평하게 만드는 우상인 ‘돈의 신이 지배하지 않는 사회에 살기 위한’ 대안을 찾으십시오.” 라고 하시면서, 돈을 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면 물질적 재산이 아니라 관계성, 연대, 협력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가 죽은 언어나 추상적 담론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삶으로 변화할 때 그것은 강력한 표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희망을 향한 생각이 실제가 이뤄질 수 있으려면, 연대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자본주의를 인정하면서도 인간를 경시하며,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비용의 절감을 위해서, 생산성과 이익의 추구를 위해서, 인간을 소모품처럼 버리는 문화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새로운 사태」(1891)를 발표하며 일찍이 이러한 사회악에 대해 경고하였죠. 서구 사회가 산업화된 사회로 넘어오면서, 노동자와 임금의 문제, 노동조합 보장의 문제 등에 대해 최초로 교회가 개입하고 교회 입장을 밝힌 「새로운 사태」 등을 시작으로 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본적 치유가 종교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근본적 치유책이 종교에서 나와야 한다고? 
한편으로 이게 “이게 무슨 치유책이야?”라고 하면서, 제가 드리는 말씀을 “피상적”일 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깊이 묵상을 해보면, 이것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치유책은 바로 애덕, 애덕의 실천, 즉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결정적 해결책으로 “애덕”을 꼽습니다. 그야말로 세속의 교만과 이기심을 해소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책이라고 첫 번재 문헌  「새로운 사태」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태」 41항 

(결정적 해결책:애덕) 41. ... 처음부터 줄곧 역설해 왔듯이 참되고 근본적인 치유책은 오로지 종교로부터 나올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그리스도교 생활을 다시금 영위해야 한다. 그 생활을 영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뛰어나고 효과적인 방안일지라도 소기의 목적을 결코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모든 덕의 근원이고 절정인 애덕의 열정을 불러일으켜 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 사랑은 ... 항상 자신을 희생시킬 만반의 태세를 갖춘 그리스도교 사랑, 곧 애덕이다. 애덕은 그야말로 세속의 교만과 이기심을 해소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약이다. 애덕의 신적 요소들에 대하여 성 바오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노동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소유를 위해 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그분을 뵐 수있는 관상의 기회이며 소통하는 신심의 기도인 겁니다. 경제와 인간 ... 그것의 최우선적 목적은 결국 애덕이다. 사랑이어야 합니다. 경제생활, 경제활동의 최종 목적은 사랑입니다. 누구에 대한 사랑일까요? 하느님에 대한 사랑, 하느님이 끔찍이 생각하시는 사람들, 피조물에 대한 사랑. 이것이 경제생활하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면 자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이 말하는 기업가의 소명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2013) 제203항에서 모든 경제 정책에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기업가들의 소명이 고결하다고 언급하시면서, 기업인들이 이윤을 창출하여 공동선을 발전시키고 궁극적으로 인류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기업인들은 인류를 좌지우지할 수 있기때문에, 기업인들이 보편적 인류애를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사회의 이념과 목적으로 보편적 인류애를 설정하고 인간중심의 애덕어린 경제생활 한다면 인류는 변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 신앙인들이 주시하고, 때론 잘못되었다고 외쳐야 하겠습니다. 지켜만 봐서는 안된다. 그래서 앞서 6번 제목을 “사회, 경제적 문제가 동시에 도덕적 문제라면 교회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라고 정했던 겁니다.

 

 

마치는 말

 

그동안 가톨릭 교회의 사회교리 회칙들은 신자유주의에 따른 획일적 세계화를 비판하고, 그로 인한 비인간화를 간파해서 볼 수 있도록 복음적 시각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그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회칙「찬미받으소서」에 등장하는 기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제시한 그 기준에 따라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판단한다면, 복음적 기준에 따른 답이 나옵니다.

 

세 가지 기둥

「찬미받으소서」(2015)의 세가지 기둥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와  경제를 복음적으로 보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모두 연결되어 있고, 모두 주어졌고, 모두 취약하다. 

 

하느님 아래 모든 피조물, 자연질서, 재화, 경제의 움직임, 정치의 움직임, 그 중심에 인간이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그 인간 속에 있는 하느님의 심성을 통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받아누리는 온갖 것들, 하늘과 태양과 자연, 그리고 재화와 돈도 마찬가지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어진 것만으로 우리를 완전하게 할 수 없다는 게 바로 세 번째 기준인 “취약하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머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모두 연결되어 있다’

첫 번재 기준은 「찬미받으소서」 회칙에서 계속 반복 나오는 표현 “모두 연결되어 있다”입니다.   지구와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는 모두 다이내믹하게 연결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습니다. 꼼꼼하고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에 속하므로 자연과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합니다.... 우리는 환경 위기와 사회 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당면한 것입니다. 그 해결책을 위한 전략에는 빈곤 퇴치와 소외된 이들의 존엄 회복과 동시에 자연 보호를 위한 통합적 접근이 요구됩니다. (139항)

 

자연은  ‘보호’가 아니라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가 환경이라고 말할 때, 이는 자연과 그 안에 존재하는 사회가 이루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우리 자신과 분리된 것이나 단순한 우리 삶의 틀로만 여기지 못하게 되지요.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에 속하므로 끊임없이 자연과 상호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연의 모든 범주는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 그 관계, 자연과 생물과 무생물과의 모든 관계를 다 포함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연을 보호하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존중’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먹여살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얻어먹기에 ‘보호’는 어색합니다. 그래서 생태와 사회문제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구조적 악이 전세계의 모든 사회, 정치, 문화, 경제 영역에 악영향을 끼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참된 생태적 접근은 언제가 사회적 접근이 된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접근은 정의의 문제를 환경의 문제로 결부시켜 가난한 이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두번째,  ‘모두 주어졌다’
두 번째 기둥이자 기준은 ‘모두 주어졌다’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열매, 비와 물, 지하수, 기름, 석유, 자원 등 다 포함됩니다. 지구가 맺는 모든 열매는 우리가 무상으로 받은 선물입니다. 선물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 선물은 교회 사상에서 ‘지상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암시합니다. 지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며, 모든 재화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주어진 것이므로, 소유하거나 독점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다 갖고 잇는 권리이며, 모두가 누려야 할 하느님의 선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게 안됩니다. 이 인식이 없습니다. 이 선물을 인정한다면 220항에서 말하는 감사함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으로 선물하셨기에 우리도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포기하고 누가 보거나 인정하지 않더라도 관대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어진 모든 것들은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세번째,  ‘모두 취약하다’
우리는 모두 취약합니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나도 약하고 너도 약합니다. 비록 주어졌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기에 돌아가기 전까지 모두 약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 취약하다는 것,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인정은 보호만을 촉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인간의 창의력을 촉구한다고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도 약하고 나도 약하니까, 우리는 함께 같이 있어야 해!”라는 생각의 시작.  “너도 춥고 나도 추우니, 우리는 함께 끌어안고 있어야 해!”라는 겁니다. 207항에서 교황님은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공동운명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의 추구를 요청합니다.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공동 운명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의 추구를 요청합니다. 우리 시대가 생명에 대한 새로운 경외를 일깨우고 지속 가능성을 이룩하려는 확고한 결심을 하며,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투쟁하고 삶의 흥겨운 축제를 위하여  노력한 때로 기억되도록 합시다.”라는 말씀입니다.

 

충만한 상태에는 창조가능성이 없다
취약함에 대한 인정없이 새로운 시작도 없습니다. 충만한 상태는 창조가능성이 없습니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새 생명도 없습니다. 인간의 수많은 울부짖음은 새로운 질서로 재창조하라는 하나의 거대한 초대입니다. 그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응해야만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아뇨. 가볍다입니다. 너무 가벼워서 티도 안납니다. 쉽게 간과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볍습니다. 그래서 굳이 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백지장도 미미하지만 같이 들면 가볍습니다. 귀찮거나 불편할 수 있으므로, 낫다는 오답이죠. 이 속담의 교훈은 작은 일에서 서로 도우면,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서로 돕고 협력하고 연대할 때, 각자에게 모두 이익이 된다는 이 진리. 너무 단순해서 우린 실천하지 않습니다. 여럿이 함께 같은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는 말 ...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러한 하느님의 초대, 그런 꿈을 꾸는 당사자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 꿈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하느님 안에서 하나되게 하고, 교회를 일치하게 만들것이며, 같은 꿈을 꾸면서 내 삶의 자리에서 비판적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을 실천한다면 그것들이 하느님 나라를 만들겠죠.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르쳐준 세가지 기준으로 복음적 시간을 가지면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재창조해나가는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기준을 외치면서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모두 주어졌고, 모두 취약하다. 

2023년 5월 19일(금) 밤 9시 46분 종료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학교 5강 '경제생활'
이진욱 미카엘 신부(대전교구 원신흥동성당 주임신부, 정의평화위원회 위원)